부자 오빠 부자 동생
로버트 기요사키 외 지음, 이주혜 옮김 / 명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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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을 찾아 노력을 기울인 오빠와 동생의 체험적인 자기계발 도서이다.

우리 모두 성공을 꿈꾸며 산다. 돈, 건강, 결혼, 진학 등 성공의 목표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계발 도서에 심취하며 나름 열심히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자기계발을 하는 목표는 "나답게 사는 길" 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이를 "자신의 소명"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성공" 과 "부자" 를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 토크 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 등은 각각 자기 분야에서 "성공" 을 거두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자" 이다. 그래서, 우리는 둘의 개념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성공을 자기답게 사는 것, 즉 자신의 소명을 찾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자오빠와 부자동생은 자신들의 인생에 각각 많은 시련을 만나고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소명을 찾았다. 이들이 소명을 찾을 수 있게된 것은 "영적 가족" 을 만났기 때문이다. 오빠는  R. 벅민스터 풀러 박사를 만나서 자신의 삶에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했다. 동생은 달라이 라마가 그녀의 "영적 가족" 이다. 출생으로 형성되는 생물학적 가족과 달리, "영적 가족" 은 삶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이며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대전환을 가져다주는 조력자이다.

 

"우리는 모두 약점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기계발을 통해 극복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자기계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약점 안에 갇혀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어저면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것과 싸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은 우리에게 그런 약점의 발견이 특수한 문제가 아니고 보편적인 문제라는 깨우침을 준다."

 

자기계발 원리 1 - "모든 개체는 복수다"

 

남성은 여성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아래로 내려가 보지 않고서는 위를 알 수가 없고 바깥이 없으면 안을 알수 없고 흰 색이 없으면 흑색을 알지 못하고 느리지 않으면 빠름을 알수 없고 부정이 없으면 긍정을, 그름이 없으면 올바름을, 지옥이 없으면 천국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계발 원리 2 - "선행"

 

돌이 떨어진 자리에소 고리모양이나 파도모양의 잔물결이 일어나는데 이게 바로 선행 효과이다. 선행이란 앞서 일어난 운동이 전해주는 반응, 메아리, 격려 들을 말한다. 선행은 갈망과 실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느린 사람들에게 과체중이 찾아오기 쉽고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도 많아 직업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뒤쳐지기 일쑤이다.

 

자기계발 원리 3 - "단명화"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해내는 것으로 지렛대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명화란 막대한 부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원리이다. 사업으로 성공하려면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삶 속에 단명화를 도입한 사람은 갈수록 부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갈수록 빈곤해지고 있다.

 

자기계발 원리 4 - "지체"

 

지체는 시간 속의 차이를 뜻한다. 산업별로 각기 다른 지체시간이 있고,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 각기 다른 지체시간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생각을 채택하는 데 유독 느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산업에 있어서 지체시간이 가장 짧은 산업은 기술산업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시리즈의 궁극적인 메세지는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의 주인이 되자" 는 것이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사람들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돈 번 사람은 늘었지만 진정한 부자의 숫자는 증가하지 않았다. 즉, 소명이 결여된 성공은 진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빠와 동생 두 남매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만난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상적인 모델로 꿈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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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밖으로 뛰어야 산다 - KOTRA 조환익 사장이 젊은이와 비즈니스맨에게 보내는 성공 메시지
조환익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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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5일,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미국의 4위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신고를 하면서 세계 금융계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전 세계 금융시장은 요동을 치고 AIG 등 거대 보험사와 시티은행 등 대형 상업은행들이 미국 정부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대마불사" 신화가 무너져 내렸다.

 

통상산업부를 거쳐 산업자원부 차관,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수출및 통상분야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낸 베테랑 경제 전문가 조환익, 그가 KOTRA 사장에 취임한 지 불과 두 달도 안된 시점에 터져나온 대형 악재였다. 지난 "IMF 악령" 이 되살아 난 듯한 분위기에서 외국 언론들까지 한국 경제의 수출 창구에 적색 신호가 켜지면서 아이슬란드, 헝가리의 뒤를 이을 희생양으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러나, 한국의 수충은 다시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삼성, LG 등의 대기업 브랜드 파워와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의 신기슬 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해외 시장에서 선전을 했다. 꾸준히 수출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국 경제는 내성이 있다는 조심스런 평가와 함께 위기설을 확산시켰던 외신들이 이젠 "경제 위기에서 가장 빨리 회복할 나라" 로 한국을 지목하기 시작했다.

 

"한국 경제의 회복세가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한국이 아이슬란드 꼴 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한국에 경의를 표한다" 는 말로 2009년 4월 25일자 "뉴욕타임스" 가 제일 먼저 포문을 열었다. 2009년 1분기 미약하나마 플러스 성장을 하자 찬사와 함께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마이너스 성장을 멈추었다고 논평했다.

 

문제를 야기한 사이버 애널리스트의 위기설에도 불구하고 닥터 둠 마크 피버도 "한국에 투자하라" 고 독려하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도 "한국이 가장 빨리 회복하는 나라가 될 것" 이라고 평가를 하면서, 국내에 떠돌던 2008년 11월 위기설을 비롯 2009년 3월 위기설, 7월 위기설 등을 잇달아 잠재울 정도로 국내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 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폭풍 전야를 방불케 햇던 2008년, 그 누구도 낙관적인 기대를 꺼내지 못할 때, KOTRA 사장 조익환은 빼놓지 않고 강조한 말이 희망이었다. "우리는 분명 사는 줄에 서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맙시다!" 그가 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초가집도 그의 손을 거치면 기와집이 된다" 는 평가에 걸맞게 이미 KOTRA는 활기 넘치는 젊은 조직으로 탈바꿈되어 다시 한번 그의 능력에 놀랄 뿐이다.

 

금번 위기는 세계 경제의 지형과 권력을 재편할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 위기이후 진정한 강자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는 한국이야말로 이번 기회에 전 세계에 더오르는 강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한국인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쉬움도 토로한다. 한국 경제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우리 스스로 저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의를 일으킨 사이버 애널리스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유쾌하지 않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서 펼치는 감동적인 비즈니스 사례들도 전해주고 있다. 백 여 개의 기업들의 사례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듯 현장감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갑자기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하고 안주할 입장이 아니다. 이건희 회장의 샌드위치론만이 아니라, 중국이 고가의 하이테크 제품을 만들어 내고 일본이 중저가의 보급형 제품을 만들어 낸다면 우리 경제는 "역역샌드위치" 에 놓여질 신세가 된다는 의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향수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기업이란 사실을 숨기고 오히려 브랜드로 승부하여 크게 성공한 태평양의 아모레 사례처럼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미래 전략의 수립은 매우 중요한 것같다.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한국 경제가 중요한 변곡점에 위치한 지금, 젊은이들이 우리 경제의 미래를 준비해 주기를 당부하고 "글로벌 플레이어" 가 될 것을 주문하면서 책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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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죽어라 - 얼마를 벌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라
마크 레빈 외 지음, 노혜숙 옮김 / 해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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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고용 구조의 불안정성, 구조조정, 심해진 빈부 격차, 노후에 대한 불안 등 이젠 확실한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살아 가는 방식에 있어서 과거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 나질 못하고 있다.

IMF 경제 위기를 벗어나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2000년에 독특한 제목의 재테크 관련 도서가 출간되었다. 바로 이책이다. 9년 전의 도서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내용이나 용어 등은 수정하여 출간된 개정판이다.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의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돈" 과 "직장" 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다. 평생 직장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기에 재무 설계의 필요성도 대두되던 시기였다. 돈이란 많이 벌어야 하다는 전통적인 인식의 틀에 고착된 우리들에게 당시 출간된 "다 쓰고 죽어라" 는 다소 도발적이며 충격적으로 다가와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보였다.

 

이 책의 공저자 폴란과 레빈은 재무설계사이자 컨설턴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는 네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지금 당장 사표를 써라.

둘째, 현금으로 지불하라.

셋째, 은퇴하지 말라.

넷째, 다 쓰고 죽어라.

 

공부 잘 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한우물 파기" 는 하나의 교조였다. 그러나, 급변환 시대 상황이 직업관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자기 실현 욕구라는 것이 안정된 직장의 기반 위에 세워진다면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리가 불안한데 자기 실현을 계속 추구한다면 엄청난 좌절을 겪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부터 회사를 떠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린 근검 절약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금은 신용카드 제도의 확산으로 분수를 넘는 소비 생활에 매우 익숙해 있다. 신용카드로 가전 제품, 가구, 자동차, 옷 등을 마구 구매한다. 이미 사들인 물건의 대금 지불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신용카드로 또 구매한다. 수입을 초과하는 과다한 차입은 파산을 부른다. 그러나, 신용카드는 마치 현금처럼 사용하므로 착시현상에 빠지게 만든다. 따라서, 분수껏 살려면 가능한 한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과거 정년이 65세이던 시절에 인간의 평균 수명은 63세 였다. 그러나, 요즈음의 평균 수명은 80- 90 세이다. 이제 65세에 은퇴한다면 약 20년을 무료하게 소일하거나 전원 손질이나 하면서 지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노년에도 얼마든지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은퇴한다는 생각은 잊어버리자.

 

재산을 모으고 유지히는 것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람에겐 오히려 해만 될 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돈을 쓰지 못하고 자녀들을 위해 아껴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산의 상속 문제가 가족 관계에 커다란 멍을 남기는 것을 우린 많이 보고 있다. 따라서, 다 쓰고 죽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인생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투자수익률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라고 한다. 아무리 묻지마 투자가 극성을 부린다해도 돈, 인생, 그리고 일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자. 나의 인생의 마지막 날에 지난 생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까지 보낸 시간에 감사하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이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IMF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로 우린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양극화의 골이 깊어짐은 물론 이젠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무모한 투자보다는 갖고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스스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야하는 세상에서 꿈을 잃지 않고 신중하게 미래를 설계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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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트 석세스 - 성공적인 삶을 원한다면 내 안에 잠든 에너지를 깨워라!
에머슨 브랜틀리, 에프런 테일러 지음, 황소영 옮김 / 오늘의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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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성공은 자신의 재능과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유일성과 같은 내면의 섬광을 발견했을 때 시작된다"

 

우리 모두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다. 이 재능을 어떻게 사용할 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 그런데, 우리 모두 성공을 바라지만 정작 자신의 재능을 펼칠 필요한 노력이나 시도를 하기 보다는 돈이 없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다거나 등의 온갖 변명들을 늘어 놓으면서 자신의 당위성을 포장하는 데에 급급한다.

 

10대에 사업을 시작해서 20대에 성공하여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현재 25살의 에프런 테일러인데, 설교자이자 사업가이며 공기업의 CEO 등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크게 성공을 거두기까지 자신이 몸소 체득한 성공 법칙을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 테일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산을 물려받지도 않았다. 성공한 사업가의 가정에서 삶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유명한 목회자 로버트 슐러의 "당신이 심겨진 그곳에서 꽃 피워라!" 란 말처럼 자신이 심겨진 곳에서 성장했을 뿐이다. 그는 확고한 가치와 원리, 그리고 목표를 향한 열망으로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 진정한 성공을 쟁취한 것이다.

 

성공하는 것이 쉽다면 누구나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00명의 사업가 중 오직 한 두 명만 성공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따라서, 타인을 위해 고되게 일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장을 지켜보며 지혜롭게 일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생 목표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 앞엔 수많은 난관이 있기 마련이다. 이로인해 그 목표를 아예 포기하거나 중도에 그만 두어야 할 변명거리가 생긴다. 그러나, 병명은 실패의 두려움만 키울 뿐 정말 변명처럼 실패할 것이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모험을 즐기듯 온갖 시련을 극복해나간다. 마침내, 딘 위터의 인턴을 거쳐 정식 직원이 되어 크게 성공을 한다. 만약에, 가드너가 돈이 없어, 또는 시간이 없어 등의 변명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돈이 없어

나는 시간이 없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

충분한 정보와 지식이 없어

경험이 없어

자동차가 없어

아직 준비가 안됐어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지 않아서, 외모가 출중하지 않아서,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서 꿈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말 "너는 할 수 없어" 은 절대로 받아 들이지 말자. 그리고, 시도한 뒤 발생한 실패에 대하여 변명도 하지 말자. 오히려, "할 수 있다" 는 열정을 갖고서 설정한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자. 발명왕 에디슨도 만 번의 실패 긑에 세계 최초로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이처럼, 우리 모두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다.

 

변명하지 말라.

두려움을 버려라.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라.

결정하는 능력을 키워라.

일반적인 지혜를 무조건 추종하지 말라.

젊어서 개인 사업을 시작하라.

돈만 쫓지 말라. 돈이 아닌 다른 목표를 설정하라.

 

"꿈은 마술을 통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땀이 필요하고, 결연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어라. 어쩌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엔 멘토가 필요하다. 만약 멘토가 없다면 패배자의 경험엔 귀를 닫고, 성공한 경영진 또는 사업가를 찾아라.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전문 직업 협회, 라이온스 클럽, 상공회의소 등을 통해 훌륭한 멘토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내면에서 위대한 것을 찾기로 마음먹어라. 무슨 일이 생기든 성공할 때까지 난관을 당당히 헤쳐 나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을 이용하라. 큰 꿈을 꾸어라. 모든 성공은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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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들려주는 애국 - 불꽃처럼 살다 간 영웅
배정진 지음 / 세상모든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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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인 올해, 그의 영웅적인 삶을 기리는 기념 행사가 속속 열린다. 이 책도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도서이다. 또한, 내년 2010년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100 주년이 된다. 이 책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화자인 안중근이 자신의 삶을 직접 우리에게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879년(고종 16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 위치한 안씨 집안에서 한 사내 아기가 태어났다. 신기하게도 아기의 몸에는 가슴에서 배까지 일곱 개의 점이 나 있었다. 나의 부모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품었다며 아기의 이름을 응(가슴) 칠(일곱)이라 불렀다. 안씨 집안은 고려 시대 성리학자인 안향의 후손으로 해주 일대에서 제법 이름 난 가문이었다.

 

고종 21년,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나의 아버지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에 의해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이들 개혁파는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따라서, 유학생 선발이 집안의 화근이 된 셈이었다. 나의 집안은 깊은 산 속에 숨어 사는 편이 나을 듯해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산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1885년, 청계동엔 화전민 두세 가구만 살고 있었는데 칠팔십 명의 대가족이 이사오면서 조용하던 마을이 활기 넘치기 시작했다.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 세력과 힘을 합쳐 고부 관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에선 이용태를 고부에 파견하여 수습하려 했지만, 이용태도 조병갑 못지 않게 뇌물을 밝히자 녹두 장군 전병준이 봉기하여 관군들과 맞서며 승승장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조정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청나라군이 우리 땅에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양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선 군대를 파병했다. 결국 주도권을 놓고 싸움을 펼쳐 일본이 승리했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한편, 황해도 감영에서 즉시 병사를 모아 사이비 동학군을 진압하라는 전갈을 우리 집안에 보내 왔다. 의병을 모은다는 소식이 돌자 동학군들은 우리 집을 선제 공격하려고 청계동 인근 박석골까지 쳐들어 왔다. 우리측은 훈련된 군사가 칠십여 명인 반면 동학군은 무려 이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호사다마" 란 말처럼, 동학군에게서 빼앗은 양곡을 이미 농민들에게 다 풀어 주었더니 당시 세도가인 어윤중과 민영준은 자기들 소유라며 이를 돌려달라고 했다. 이에 응하지 않자 안태훈 집안은 많은 양곡으로 군대를 양성한다고 임금에게 모함까지 했다.

 

1895년,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쳐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감행했다. 어윤중이 죽고 잠잠하던 아버지의 역모 건이 민영준에 의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할수없이 여러 달 동안 천주교 교당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가족 모두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 나의 세례명은 "토마스" 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도마 안중근으로 부른 것은 바로 세례명 때문이다.

 

1904년 2월 한반도 주도권 쟁탈전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나는 후일을 도모키 위해 청나라에 피신해 있다가 어느 신부의 충고에 따라 다시 귀국을 결심하고 진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병세가 악화되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이 사실을 나에게 숨기라던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나는 조국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안창호 선생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강산 개조론" 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다. 1907년 2월 대구에서는 천주교 지도자인 서상돈의 주도로 "국채 보상 운동" 을 펼치기도 했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과 이별하고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나의 독립 전쟁 근거지를 정했다.

 

1908년 4월, 의병군을 이끌고 함경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진지를 점령하는 등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체포된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나의 부대 위치가 알려져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많은 동료들이 무참히 살육되고 부대는 완전히 해산되고 마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1909년, 새로운 진로의 모색을 위해 "단지 동맹" 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다. "우리 열두 명은 태극기 앞에 맹세하노니,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속죄하겠습니다" 란 맹세와 함께 왼손 약지 한 마디를 댕강 잘라 냈다.

 

"이토 히로부미, 만주에 온다"

단지회 결성 이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면서 암살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두 살 위의 충북 제천 사람 우덕순, 러시아어를 통역할 18살의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 조선인 회장인 김성백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이발관에 들러 거사를 앞둔 성스러운 의식처럼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짤랐다. 또한, 사진관에 들러 세 사람은 기념사진도 찍었다.

 

우동지는 하얼빈에서 만난 조도선 동지와 함께 채가구 역에서 거사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는 하얼빈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하얼빈 총영사가 러시아 군경에게 일본인 환영객은 검색하지 말라고 특별 요청을 하는 바람에 무사히 권총을 휴대하고 개찰구로 입장했다.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총을 꺼내 늙은이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세 발을 쏘았다. "탕, 탕, 탕" 첫 발은 곧장 폐에 박히고, 두 번째는 가슴을 관통하고, 세 번째는 배에 박혔다. 나머지 네 발도 곁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순식간에 쏘았다. "이토가 쓰러졌다! 이토가 쓰러졌다!" 환영 인파가 가득하던 하얼빈 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러시아 말로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다.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 러시아 경찰서장과 의장대 두 명에게 포박되어 러시아군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쇠사슬에 묶여 모진 고문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전세계로부터 주목받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려 햇다. 하지만 러시아인 2명, 영국인 2명, 스페인 사람 1명, 한국인 2명, 그리고 일본인 1명의 국제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결국 국제 변호사 선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단순 살인 사건이나 파렴치범으로 결론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나는 조선 의병대 참모 중장으로서 적의 수괴를 처단한 것임을 천명하면서 국제법에 따라 재판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햇다.

1910년 2월 14일 재판장 마나베는 서둘러 판결했다.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1910년 3월 26일 온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어머니가 보내준 명주 수의를 입고 교수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하느님! 일본이 어리석음에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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