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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패소를 해도 패소를 해도 또다시 패소를 거듭해도, 나의 입각점은 한없이 강하다. 나는 나의 이 비할 데 없이 강한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당신들에게 <필부의 뜻>이야 말로 빼앗기가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끝없이 강한 이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확신한다. 패소해도 패소해도 또 패소해도, 역사는 결코 서준식에게 패배를 선고하지 않을 것임을!
1989년. 그 해에 나는 한 사람의 책으로 인하여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알게 되었다. 서준식.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숙연함을 느낀다. 그의 삶은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민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인간의 내심을 법적 규제의 대상'으로 삼은 한 줌도 안 되는 사법부 혹은 정부의 시녀들에 의해 청춘의 16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이 시대 '찬란한 부조리'의 희생자이다.
인간의 내심은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여기에 개진하려 하는 나의 내심을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근거로 삼아 나의 신체를 구금해 놓을 판정을 내릴 권한은 당신들에게는 없다. 나의 내심을 심판할 권한이 없는 당신들에게 내가 나의 내심을 고백해야 함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감히 이런 모순된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내가 한낱 '처분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냉전상황과 분단상황에서 빚어진 좌익사상에 대한 히스테릭한 적개심과 증오밖에 모르고 성장한 당신들과 나는, 이렇듯 상이한 성장경험을 당신들이 옳게 실감 못할진대 당신들에게는 나의 사상을 옳게 이해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당신들은 나의 내심을 심판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그는 1948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일본 경도(京都)시 화원 양북동에서 시작된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곤 그의 가족 밖에 없는 동네에서 독학으로 피나는 수련을 쌓아 한국말을 익힌 맏형 서선웅 씨와 작은 형 서승 씨에게 진지하고도 강인한 민족의식을 배웠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일본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내가 자신을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조선놈>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무렵부터 모친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참으로 시사한 <반(半)쪽발이>가 되었을 것이다. 모친의 가르침대로 어린 나는 그 누가 물어도 서슴없이 조선사람임을 밝힐 수가 있었다. 나는 때로 일본 아이들과 주먹으로 싸우곤 했는데 그 싸움은 따지고 보면 거의 모두가 직접·간접적으로 민족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놀이터 한 귀퉁이에서 서너 명의 일본 아이들로부터 몰매 맞은 일이며, 줄넘기 놀이하는 계집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어 갔더니 그 아이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고' 코를 쥐는 시늉을 하면서 달아나 버린 일이며, 학력 테스트의 국어(일본어)에 98점을 받아 1등을 했을 때 담임 여선생이 그 답안지를 재검사하고 사소한 트집을 잡아 94점으로 감점, 3등으로 밀려난 일……. 이런 사건들이 어린 나의 가슴에 깊은 슬픔이 되어 맺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막연하게나마 알지 못하는 나의 조국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물론 이러한 서러움만으로 일관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나에게 일본인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일의 괴로움을 뼛속 깊이 가르쳐준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내가 당하는 슬픔과 서러움 속에서 나는 어린 마음에도 동네 환경이나 가정 환경이 좋지 못하여 불행한 아이들, 더러운 아이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동정할 수 있었고 이 무렵부터 나는 모친에게 늘 <인정이 많은 아이>라는 평을 들으며 자랐다(모친은 나의 작은 형 서승을 늘 <활달한 아이>, <소탈한 아이>라고 평하셨다). 조국을 동경하던 <인정 많은 아이>가 후일 조국에 와서 동포들의 몸서리쳐지게 비참한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아, 인간해방과 민족해방을 소망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마르크스 사상에 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유년시절, 어린 마음에도 멀리 있는 조국을 그 얼마나 동경했던가! 애써<조선놈>임을 숨기려고 하던 학우들을 보면서 , 더러운 빈민가에서 제멋대로 성장하여 불량소년화 되어 가던 동포 학우들을 보면서 나는 그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그리고 까닭 없는 불공정한 처사나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는 모든 못난 아이들을 나는 그 얼마나 깊이 동정하고 불쌍해했던가!
그리하여 그는 1967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조국에서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19세부터 20세까지의 시간을 조국의 가난하고 불쌍하며 비참한 사람들(창녀, 거지, 식모, 지게꾼, '공돌이', '공순이')의 모습에 충격과 분노와 슬픔에 휩싸인 채 보낸다.
차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70년(서울법대 3년 재학 중) 여름방학 때, 작은 형 서승의 권유로 8일간 북한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대략 하루 당 2년씩을 고스란히 쇠창살 속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7년형을 받았으나 형기를 채우고도 9년 동안 보안감호소 1.7평 감방에 갇히게 된다. 이른바 <보안처분>이었다. 단지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처분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다.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사랑도 미움도 욕심도 호기심도 있는 연약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 죠르쥬 루오의 그림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사랑하고 J. S. 바하나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싶어, 이 삭막한 감방살이를 증오하고 서러워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목청껏 한국 가곡을 불러제끼고 싶고 판소리·창극을 간절하게 감상해 보고 싶은, 이문구씨의 소설에 울고 웃는 인간이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날 때면 가슴을 죄어오는 상념에 때로 잠 못 이루는 인간이다. 16년 동안 이 쇠창살 속에서 옛친구들과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고, 때로 어둡고 뜨거운 짐승적인 욕망에 몸을 지지며 번뇌하면서 그래도 한 여인을 소년과도 같은 두근거림으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타고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늘 국민학교 교원을 부러워하며 살아왔고 또 죽을 때까지도 부러워하면서 살아갈 한 사람의 인간이다.
처음 그의 책을 펼칠 때는 그가 그 긴 세월 그깟 '전향서'를 안 쓰고 버틴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의 실리를 취하는 '지혜'에 대하여 많이 배웠던 나는, 그의 책을 다 읽고서야 비로소 인간이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경지를 깨달았다. (그의 책은 '나의 주장' 말고도 옥중서간집 세 권이 있다. 1권: 모래바람 맞은 영혼, 2권: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않고, 3권: 고뇌 속에 떠오르는 희망. - 2002년 현재 서준식의 옥중서간집은 출판사 야간비행에서 재출간되었다. 편집자)
그리고 많은 밤을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이 이데올로기에 침몰하여 저주받은 사회, 마비된 사람들의 분단비극에 대한 감각, 정의를 외면하는 소시민의 소심함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나 또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 비극이다. 그리고 비극에 대해 심한 부끄러움을 느낄 따름이다.
기결수가 된 후 만기 시까지의 나의 감옥 생활은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압력, 폭력, 고문에 대해 나의 양심,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그 내용으로 한다. 필사적으로 폭력에 항거하는 인간에게는 자신의 사상을 차분히 재검토해 볼 정신적 여유가 없는 법이다. 1973년에 좌익수 전향전담 <교화사> 대폭 증원과 더불어 전국 교도소에서 비전향 좌익 사상범들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국가정책>(당시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의 말)으로서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압력, 폭력, 고문이었다. 말단정보기관원이 하루아침에 <교화사>로 버젓이 둔갑하고, 정보기관에서 배우고 익혔던 온갖 못된 솜씨를 유감 없이 발휘하면서 좌익사상범 <정리>사업에 빛나는 업적을 쌓는 한편, 대낮부터 술로 발그레해진 얼굴로 잡범들에게 대량의 담배를 갖다 주고 대신 그 잡범들로부터 용돈을 뜯어 썼다.
그리고 그는 그 길고도 터무니없는 감옥생활을 마치고 1988년 5월 세상에 나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서 그는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로 활동했다. 그와 함께 구속되었다가 19년형을 살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의 작은형 서승은 원자탄이 훑고 지나간 대지 같은 얼굴로(그는 취조실에서 살인적인 고문에 못 이겨 시뻘건 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기도했다. 편집자)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또 그들의 막내동생 서경식은 지금 한국성공회대에 교환교수로 왔다 .디아스포라 기행,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그 서경식!
진정 사람의 마음을 쇠사슬로 묶을 수는 없으련만 국가보안법, 사상전향제도, 준법 서약제도는 인간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한 줌의 '자유'는 어떻게 얻은 것인가? 생각해보면 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보기도 쉽지 않았고, 또 보려는 의지도 박약했다)의 피와 눈물로 그나마 얻을 수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데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현존하며 북한을 주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 통일을 당위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인권을 함부로 무시하며 전권을 휘두르고 있다. 분단 조국의 자식으로 태어나 비극을 겪은 서준식의 삶은 이제 무엇으론가 보상받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꽃다운 청춘에 감옥에 들어가 중년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면, 그 조국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단지 반 쪽 짜리 조국을 8일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당신이 헤어진 형제의 집에 8일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17년의 그 비인간적인 세월을 살았다면, 그것을 결정한 인간들을(그들도 인간이다)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서준식은 1983년 '진술서', 1983년 '상고이유보충서', 1985년 '상고이유서'를 써가며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을 하였다. 그리하여 '재판'도 아닌 '보호감호처분'으로 9년을 더 '처분'당하며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당신들에게 아무런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환상을 품지 말 것을 1차, 2차 소송을 통하여 나에게 똑똑히 가르쳐준 것은 바로 당신들이었다. 법이란 궁극에 있어서 <폭력> 에 지나지 않음을, 기본적 인권 조항이란 결국은 정치 권력에 의하여 제멋대로 해석되고 농락 당하는 <갈보>임을 나에게 똑똑히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당신들이었다. 이제 만 9년의 보안구금을 당하고 있는 나는 이번 3번째 소송에 대하여 그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패소를 해도 패소를 해도 또다시 패소를 거듭해도, 나의 입각점은 한없이 강하다. 나는 나의 이 비할 데 없이 강한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당신들에게 <필부의 뜻>이야 말로 빼앗기가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끝없이 강한 이 입각점에 굳건히 서서 확신한다. 패소해도 패소해도 또 패소해도, 역사는 결코 서준식에게 패배를 선고하지 않을 것임을!
21세기를 살아가는 당신은 어쩌면 자본과 섹스, 외국어 그리고 인터넷에만 관심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누리는 그 모든 아름답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혜택 뒤엔 이 사람(그리고 이 사람들)의 빼앗긴 세월이 있다.
그래서 나는 권한다. 서준식의 '나의 주장' 전문을 읽어보라고.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온 저 처참한 세월의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진실을 알아야만 다시는 그런 미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설혹 그런 불순한 시도를 하는 자들이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인권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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