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판본비교
류성룡 지음, 신태영 외 옮김 / 논형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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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이, 지난 일을 반성하여 후환을 조심하기 위해서이다. “전란의 시초임진왜란의 일을 기록하여 후대에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재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징비록을 쓴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독자는 과연 무엇을 징비(懲毖)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저절로 따라온다.

 

전쟁을 막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우선 임진왜란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전쟁이 일어난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침략 의지가 만들어낸 전쟁이므로,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비난의 대상은 일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여야지, 이를 조선으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혹자는 일본 사절단을 갔다 온 김성일과 황윤길의 서로 다른 내용의 보고를 근거로, 동인과 서인이 당쟁에 빠져 전쟁 방비를 소홀히 한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징비록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도, 오늘날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이 아예 무방비 상태로 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기록을 추려보자.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의 침입을 근심하여 변방의 일에 능통한 재상을 뽑아서 삼남 지방을 순찰하고 방비토록 하였다. 김수를 경상 감사로, 이광을 전라 감사로, 그리고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서 병장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수축케 하였다. 특히 경상도에 성을 많이 쌓게 하였으니, 이를테면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의 좌우 병영을 새로 쌓거나 고쳐 쌓았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날로 급속하게 퍼지자, 임금님께서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재목을 각자 천거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사람들 중에 더러 고속 승진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해자와 성을 새로 쌓거나 병영을 개선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에 대비한 인재 선발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인용문에 주목해보자. 전쟁의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조정에서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류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은 고속 승진이 의심될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조선이 전쟁 준비를 소홀히 했다고는 보기 힘들겠다.

 

물론 나라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중앙과 지방이 모두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고, “군정의 근본인 장수를 뽑는 요령과 군사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백에 하나도 제대로 되지않았다는 류성룡의 비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조선이 침략에 대비한 어떤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덕이 지적하듯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 같은 해양 세력은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대규모 공격을 할 수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바다보다는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한 생존이었다.” (김시덕,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 했을 때 왜구, 혹은 명종 대 을묘왜변 수준의 침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조선군은 질이 매우 낮았던 반면에, 일본군은 100년간의 전국시대 동안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었다. 게다가 그 수도 2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전쟁 초반에 조선이 압도적으로 무너진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적의 수준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임진왜란을 통해서 무엇을 반성하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진단한 원인 분석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은 조선이 일본과 친교를 유지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일본의 정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그는 신숙주의 유언을 인용하면서원하옵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화평을 잃어서는 아니 되옵니다.”성종 대 이후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신숙주의 유언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반성한다. 성종은 신숙주의 말대로 사신을 보내 일본과 더 화목하게 지내려고했다. 그러나 대마도에 이르러 풍랑 때문에 사신들이 병이 생기자 원래 보낸 사신을 돌아오게 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매번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예를 갖추어 접대만 하였다.” 조선이 일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던 통로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이나 왜관뿐이었던 것이다.

 

잠시 한명기의 설명을 통해 당시 일본과 조선의 전사(前史)를 간략히 살펴보자.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책, 삼포 왜관 등 경제적 반대급부를 주는 회유책을 구사하였다. 그런데 삼포 지역(현재의 부산, 창원, 울산)에서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한 통제와 억제 정책을 강화했고, 결국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을 겪으며 쇼군과 오우치씨, 쇼니씨 이외에는 접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상업적 교류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는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전국시대 통일 이후 대마도를 주요 대상으로 무역 등을 통해 일본을 회유, 교린하려 했던 조선의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명기, 국제 관계와 전쟁, 조선시대사 1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참조)

 

대일관계가 악화되어 갔던 사이에 일본은 거의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일본을 통일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통일 직후부터 조선, 명을 경유하여 인도 정복을 구상하고 준비했던 듯한데, 문제는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도요토미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듯, “여러 섬의 왜인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왕래하면서도 그 엄한 영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일본이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도 조선은 가만히 있었고, 준비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난 채로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한 압도적 무력의 군사들이 들어오면서 초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대비 실패는 궁극적으로 외교적 실패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무심하였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결과로, 조선은 7년 동안 혹독한 전란에 시달렸다. 류성룡의 징비(懲毖),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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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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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쟁 속에서도 인간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한 스무 살 여성의 생생한 체험적 기록이자 삶에 대한 치열한 집념과 투지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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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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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대동법>(역사비평사)을 저술하였는데, 누군가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제목으로 그 책의 서평을 남겼다. 똑같은 제목을 사용한 이 책은, 그 서평의 질문에 대한 고민과 저자가 내린 결론이 담겨 있다. 책의 내용과 관련해 제목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왜 선한 정치를 펴도록 교육받은 지식인이 기축옥사 같은 “거대한 파국”을 맞이했는가, 일 것이다.

이 책은 선조 8년~23년까지의 15년 동안에 벌어진 동서분당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더욱 조명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대단히 ‘조선다운’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조선 시대에서 가장 “정치에서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였음에도 사림의 정치적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저자는 이 시기를 “권력현상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치적 행위자들의 정확한 정치적 입장과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파헤친다. 저자의 이러한 방법론은 비단 조선시대 당쟁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림은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까지 약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번의 사화를 받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견디어 왔다. 특히 기묘사화(1519)에서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1567) 약 50년이라는 탄압의 시간과 기억은 선조 대 당쟁의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였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명종 대 정치는 외척과 훈구 세력이 기승을 부렸던 파행적 정치를 보여주었기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떠오른 정치적 과제도 자연스레 “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신진사림에게 구체제 청산이란, 훈척 세력과 외척 세력의 청산을 의미하였다.

교과서에서는 동서분당에 대해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과 김효원을 필두로 하는 동인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어 발생한 것으로 배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지 않은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다. 심의겸은 선조 초기 수렴청정을 하였던 인순왕후의 남동생, 다시 말해 외척 세력이었다. 따라서 동인에게는 심의겸과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서인 그룹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사실 선배사류였던 서인은 “사화를 미연에 막고 신진사류의 대표적 인물들을 보호한 공이” 있는 심의겸과의 관계를 쉽사리 끊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후배사류는 이를 이해할만한 여유나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갈등은 동서분열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림분열의 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갈등이 개인적 수준을 넘어 사림 간 집단주의적 갈등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기저에는 역사적 경험에서 누적된 구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그에 대비되는 자신들에 대한 도덕적 확신이 존재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언관직을 차지하면서 오랫동안 부패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을 해왔던 신진사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주도권을 확신하였다. 언관은 오늘날로 따지면, 비판적 민간 언론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그 본질적 기능은 “비관료적 기능으로 관료조직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국정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아니라 비관료성과 부패 방지였다. 국정 현안 해결은 대신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이 목격해왔던 대신은 부패만 일삼는 훈척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신의 권한과 역할을 부정하고 공론을 자신들만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이는 선도 대 대신의 권위와 권한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동서분당을 이해할 때 핵심적 사안은 사림을 제어할만한 합리적이고 권위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였다. 이 시기는 언관의 권한이 강한 대신 대신들의 권한은 매우 취약하였던 시기였다. 선조 대 사림들은 부도덕한 이전 시대 조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존경을 받는 대신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대신을 배제하고 정치적 주도권과 공론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치적 욕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된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 행위였다.

이이가 주장한 개혁의 핵심도 동서 사림을 통합하는 한편 약해진 대신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나, 대신권의 강화는, 공론을 유일하게 주도할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진심으로 믿었던 삼사에게는 이전 시대로의 회귀와 이이 당파의 조정 진출을 의미했기에 이이는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동인은 서인과의 갈등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았고, 이는 곧 이들이 한 세력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그들의 프레임이었고, 그들이 인식한 조정의 현실이었다. 대표적인 동인이었던 김우옹은 “당시 조정의 정치세력을 선과 악의 구도로 구획했다.” 다른 동인들도 “당시를 심의겸이 주도하는 외척의 전횡이 계속된 시기로 보았다.” 류성룡마저도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서인이라고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선조 8년부터 이어진 사림 세력의 분열 양상이 더 극단적으로 반복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 심문 과정에서 서인 정철은 동인에게 노골적인 적의감을 드러냈고, 피해자였던 동인 측도 정철을 포함하여 이미 한참 전에 사망한 이이에 대해서도 대단한 적대감을 보였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기축옥사를 통제할 수 있던 인물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선조뿐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림의 갈등은 역사적 요인과 당시 정치 구조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정치 현상이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에 갇히어 분열했고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자신의 정치를 하려던 선조는 이들의 분열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이용하였고, 그로써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사림 그 누구도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시기 정치 행위자들에게 공통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 즉 정치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었다. 그나마 이이를 제외한 모든 사림은 개인적 혹은 당파적 신념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을 뿐, 실제 사회적 결과에 책임을 지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선조는 정치적 책임을 지는 대신 그것을 사림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집중하였다. 명종 대에서 선조 대로의 이동은 사림의 역할 변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도덕적 비판자가 아니라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를 알았던 인물은 이이밖에 없었다. 정치가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정치세력 간의 시비”로 격화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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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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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면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아킬레우스는 철없는 소시민에서 성숙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전우 파트로클로스와의 우정, 공동체에의 헌신,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 즉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2.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직접적인 주제임을 드러낸다. 아가멤논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취한 크뤼세이스 대신 아킬레우스가 얻은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감으로써 그의 분노가 촉발되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첫째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가멤논이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강대진, <일리아스, 영웅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자신의 “명예의 선물”을 가져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차적으로 명예의 문제가 개입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트로이아군 헥토르에 의해 자신과 가장 친밀한 우정을 나눴던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헥토르에게 복수해야 하며, 침해된 그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헥토르를 죽이는 것은 22권에 가서 이루어지고, 명예의 회복은 24권에서 이루어진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본래 전장에서 많은 적을 쓰러뜨려서 획득한 것이었다. 명예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받는 전리품이라면, 브리세이스를 돌려받고 거기에 추가로 더 좋은 것을 받아야지 아킬레우스는 명예롭게 될 수 있다. 특히나, 전황을 한번에 뒤집고 헥토르를 쓰러뜨렸던 아킬레우스가 아닌가! 그는 더 좋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줌으로써 새롭게 명예를 부여받는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뺏어서 훼손된 명예가, 헥토르의 시신을 되돌려주면서 회복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온유함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3.

반면에 9권에서의 아킬레우스는 이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9권에서 아킬레우스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킬레우스의 선택’이다. 아킬레우스는, 전장에 나와 다시 싸우라고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 사절단을 이렇게 거부한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다시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공동체를 구하고 전공을 세워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을 택하면, 그는 불멸의 명성을 얻지만 필시 죽는다. 다른 하나는 명예를 버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얇고 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아킬레우스는 사절단의 권유를 뿌리치고 후자를 택한 것이다. 강유원에 따르면, 이때의 명예란 “위험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이다. 아직 아가멤논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은, 속된 말로 아가멤논 때문에 삐진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왜냐하면 “싸워봤자 고맙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 뻔하고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심경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파트로클로스의 전사다. 주요 장수들이 계속해서 부상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파트로클로스는 전투에 나선다. 하지만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전사하고, 그 소식을 듣게 된 아킬레우스는, 죽을 줄 알면서도, 드디어 전투에 임하기로 작정했다. 전우의 죽음을 통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룩할 것이다. 아가멤논과 화해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하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필요에 따라 가슴속 마음을 억제하도록 합시다!

이제 나는 분노를 거둘 것이오. 화해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화를 낸다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오.” (19.65~68)

“가장 영광스런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여!

선물들은 마음이 내키시면 적당히 주시든지 아니면 간직하시든지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오. 지금은 서둘러

전의를 가다듬읍시다.” (19.146~149)

절정은 앞에서도 언급한 프리아모스와의 대화 장면이다. 프리아모스가 홀로 자신을 찾아오자, 그의 용기를 칭찬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프리아모스의 처지에 공감해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그의 장례식을 완수할 때까지 전투를 그치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특히, 24권 518~551행까지 이어지는 행복, 길흉화복, 죽음를 얘기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에서는 9권에서 사절단을 거절했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이전에는 싸움만 잘하는 육체적 영웅에 불과했던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의 갈등-파트로클로스의 죽음-헥토르와의 전투를 거치면서 영웅에 걸맞은 인격까지 얻게 된 것이다.

4.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리아스>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죽는다. 원래 아킬레우스가 살고자 했던 삶은 명예를 포기하는 대신 죽음의 운명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전장에 돌아왔다는 것은 죽을 운명을 각오했음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아킬레우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수용한 결과, 그는 시인의 노래를 통해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고, 제우스가 새로운 명예를 수여하였다. 그것은 강대진이 말했듯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적에게 관용한 데서 생겨난 새로운 명예이다.”

누가 영웅으로 불리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영웅적 가치란 무엇인지. <일리아스>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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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순전한 기독교>(문고본, pp. 168~ 182) 중 발췌


1) 결혼의 영속성에 대해

기독교의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 – 이것은 한몸에 해당하는 현대어입니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로 믿습니다. 인간이라는 기계를 만든 제작자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반뽁은 단지 성적인 차원에서만 짝으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결합되도록 만들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혼외정사가 그토록 흉해 보이는 것은 원래 함께 어울려 모든 차원에서 연합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것에서 딱 하나(성적인 연합)만을 떼어낸 탓입니다.

교회들은 적어도 이혼이 일종의 외과 수술처럼 살아있는 몸을 잘라내는 일과 같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합니다.......이혼을 단순히 ‘짝 재정리하기’ 정도로 여겨서, 배우자에게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 반대합니다.

성적 충동이 다른 충동들과 똑같은 것이라면, 성적 충동 역시 다른 충동들과 똑같이 취급해야 합니다. 즉, 다른 충동들이 약속의 제재를 받듯이 성적 충동 역시 결혼 서약의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껴야만’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결혼을 계약이나 약속으로 볼 여지는 아주 사라져 버립니다...그런데...서로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에게는 약속으로 자신들을 묶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기독교의 법은 사랑의 열정이 갖는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정 자체가 촉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사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꼭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의미의 사랑은 사랑(사랑의 느낌과 구별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 두 사람이 하나님께 구해서 받는 은혜로써 강화되는 깊은 연합입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심지어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 사랑을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처음의 흥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정적이지 않은 재미에 마음을 붙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흥분을 발견하게 되기 쉽습니다...저는 이것이야말로 “어떤 것이 먼저 죽지 않는 한 참으로 살아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담긴 뜻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두 가지 종류, 즉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부과하는 법으로 통제되는 결혼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엄밀하게 구별해야 어떤 부부가 기독교적 의미에서 결혼했으며,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은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내의 순종에 관하여: 에베소서 5장 22~24절에 대한 답변

(왜 머리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에서 가정에 머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결혼이 영속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언제나 일치한다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실제로 의견이 갈렸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결혼이 영속적인 것이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둘 중에 한 사람은 결정권을 가져야 합니다. 헌법 없이는 어떤 연합체도 지속시킬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왜 꼭 남자가 머리가 되어야 합니까?...주위 사람들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자기는 가정의 머리가 되고 싶어 허는 여성도 옆집 여성이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은 보통 좋게 보지 않습니다...아내 자신들이 남편 위에 군림하는 일을 어느 정도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휘둘리는 남편을 경멸하는 것을 보면, 아내가 남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은 무언가 부자연스런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가정과 바깥 세상의 관계는 최후의 수단으로 결국은 남성이 책임져야 하는데, 남성은 가정 밖의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더 공정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또 대개는 더 공정하기 때문입니다...남편은 아내의 강력한 가족 사랑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후 결정권을 갖습니다.

사랑(PP. 205~211)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을 북돋워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인위적으로 애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질적으로 냉정합니다...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먼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그가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자아이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바라듯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잘해 준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식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아니면 적어도 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적인 사랑은 머릿속이 감상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는 아주 냉정해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애정과 아주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애정을 낳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려고 애쓰며,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처음에는 자기가 좋아하게 되리라 상상조차 못 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좋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치고 행동하십시오...“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떠오르는 일을 가서 하십시오.

감정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38)”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여성관과 결혼관 (헨리 채드윅, <교부 아우구스티누스>,pp150~151 발췌)


(고린도 전서 11:7에 대한)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은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으로 구별될 뿐, 영혼이나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당시 생물학적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담에게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함께할 짝으로서 조력자가 필요했다면, 하느님은 분명히 또 다른 남자를 주셨을 것이다. 하느님이 이브를 주셨을 때 의도하신 것은, 종의 유지를 보장하시려는 것이었다”(de genesis ad litteram ix9)

또한 그는 부부가 서로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결혼론 I.1)고 말했다. 남편은 앞에 걸어가고 부인은 아이들과 짐을 챙겨서 뒤에 따라가는,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이 관습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안타깝게 여겼던 것 같다. 공공 영역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평등하지 않지만 혼인의 권리에서는 절대적으로 동등하다고 그는 말했다(마니교의 파우스투스에 반대하여22.31; 구약 7경서에 대한 물음들iv59)

어떤 설교에서 그는 자연, 음악, 꽃과 그 향기, 좋은 음식, 그리고 ‘부부 간의 포옹’에서 느끼는 기쁨이 정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설교 159.2). <신국론>(xxii.17)에서는 다가올 세상에서 부활한 남자와 여자 모두 남자의 육체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런 생각은 마치 여성성을 창조주의 불미스러운 오류로 생겨난 것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결혼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중 5월15일 레나테와 베트게의 결혼식을 위해 쓴 설교문 발췌. 대한기독교서회, pp. 103~111)


본문: 에베소서 1:12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서약한 “예”라는 대답과 더불어 그들은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삶의 전환을 맞이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삶은 지속적인 결합에 직면해 주어졌던 온갖 물음과 염려들에 기쁨에 가득 찬 확신을 갖고 도전하고, 자신의 행동과 책임 가운데서 그들의 삶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자유와 힘이 주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환희가 모든 결혼식에서 울려퍼져야 합니다.

그대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작용하고 있고, 승리하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 의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이 가는 길은 당신들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따라서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만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이것은 우리의 의지요, 우리의 사랑이며, 우리의 길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강철은 사라져 가지만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들에게 승리, 환희, 자부심을 허락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대들을 당신의 의지와 계획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동시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는 그대들의 사랑을 성스러운 결혼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결혼생활을 제정했습니다. 결혼은 그대들 사이의 사랑 이상의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좀 더 높은 존엄성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인간을 마지막 날까지 보존하시기를 원합니다. 사랑 속에서 그대들은 오직 자신들만으로 바라보지만, 결혼을 통해서는 인류의 한 지체가 됩니다. 결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오고가게 하시며,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결혼은 인격을 초월하는 것이며, 신분이고 직무입니다...하나님과 인간들 앞에서 부부되게 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라 결혼입니다...그대들의 사랑이 결혼을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결혼이 그대들의 사랑을 지탱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의 결혼을 파기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19:6)” 하나님은 그대를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강조는 내가)......그대들은 사랑 안에 항상 내재하는 불안에서 벗어나 확신과 신뢰를 갖고 우리는 결코 서로 헤어지지 않고 뜻에 따라 죽을 때까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이 결혼을 통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시오.(골3:18)”..그대들은 그대들의 가정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단지 하나에서,, 즉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서만 그대들은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에게 그들이 가져야 할 영예를 허락했습니다. 창조이야기에 나와 있는 대로 남편에게 봉사하고 그를 돕는 것이 아내의 영예이며, 아내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이 남편의 영예입니다. 남편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고”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창 2:24, 마 19:5, 엡 5:29. DBW3(창조와 타락),88-95)” 남편을 지배하려는 아내는 자신과 남편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 또한 자신과 아내에게 불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아내가 남편과 같이 되려는 데서 명예욕을 찾고, 남편이 아내를 단지 자신의 지배와 방종의 장난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은 불건전한 시간과 관계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세계 한가운데 존재하는 나라 그 자체요, 시대의 폭풍 속에 있는 성채요, 피난처며, 성소입니다. 가정은 외적이고 공적인 삶 속에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사건들의 흔들리는 터전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처를 갖습니다. 즉 가정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의미와 가치, 본질과 권리, 그리고 규정과 존엄성을 획득합니다. 가정은 세계 안에 하나님의 터전...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이 거쳐해야 하는 장소입니다...이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대한 운명이며 과제하는 것을 아는 아내는 복됩니다.

“남편이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면 가난을 모르고 산다. 그의 아내는 살아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 양털과 삼을 구해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식구들에게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여종들에게는 일을 정해 맡긴다...한 손은 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다른 손은 펴서 궁핍한 사람을 돕는다...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자식들은 모두 일어나 어머니의 업적을 찬양하고, 남편도 아내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덕을 끼치는 여자들은 많이 있으나, 당신이 모든 여자들 가운데 으뜸이오’라고 말한다(잠31:11-13,15,20)” “어진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입니다(잠12:4)”

남편이 아내의 머리로 지칭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같이(엡5:23)”라는 내용이 첨가된다는 것은 우리의 지상적인 관계에 신적인 광채가 비쳐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남편의 존엄성은 인격적 능력이나 성품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혼인과 더불어 받은 직무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존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존엄성은 동시에 남편 자신에게는 최고의 책임입니다. 머리로서의 남편은 아내, 결혼, 가정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남편은 자기 식구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합니다...(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에 복과 함께 짐을 지워 주십니다. 복은 후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계속되는 창조사업에 동참하게 합니다...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들을 얻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아내와 남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짐이 지워져 있습니다. 아내는 고통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해야 하고, 남편은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가시밭에서 곡식을 거두어야 하며 얼굴에 땀흘려 노동을 해야 합니다....이 짐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본질이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지상의 가정은 하늘 집의 모상입니다. 지상의 가족은 모든 인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반영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에게 결혼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 15:7)”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대들의 죄를 서로 용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의 공동체도, 결혼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서로 대립해 죄를 상대방에게 떠넘기지 말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를 매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그대들의 가정으로부터 나오는 광채와 능력이 다른 사람들의 가정에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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