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윤주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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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례식에 갈 일이 많습니다. 개인적 친분으로 갈 때도 있지만, 교회에 장례 예식을 부탁하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장례 예식을 부탁하시면, 고인과 유족,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고인의 삶에서 따라야 할 본을 새겨보고, 유족들의 슬픔에 함께 동참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죽음 자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명 없음이 죽음의 전부인가 하고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죽음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세상에서 말하는 죽음과 기독교의 죽음에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의 말처럼 죽음은 신비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여러 지점이 교차하는 역설입니다. 끝이자 시작이요, 단절이자 이어짐입니다. 신학적 미학으로 유명한 발타사르는 이러한 죽음의 신비로움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저자는 죽음 이전에 우리의 현 존재가 모순임을 밝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만날 때의 신비는 '나와 너'의 만남, 존재와 존재의 만남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으로 품어주는 너라는 존재를 통해, 아이는 중립적인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나로서 의미 있는 상대에게 나를 개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할수록 인생의 유한함과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술가들의 여러 작품은 인간의 그러한 갈망을 잘 보여줍니다.



철저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을 그대로 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온전하게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사명에는 회복과 생명, 치유가 있지만, 죽음까지도 포함됩니다.



주님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역은 죽음이라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사명을 통해 완전하게 완성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음의 짐을 감당했습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포함하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사랑의 걸작을 이루십니다. 더불어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자신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해석에 맡깁니다. 저자는 이를 '궁극적인 포기'라 명명합니다. 죽음에 대한 해석은 성령님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죽음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포용하고 그 죽음을 충만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함 안에서 펼쳐지는 사랑을 실현하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사랑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성찬을 통해 누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영원한 희망, 충만한 평안을 맛봅니다. 교회와 우리의 사명은 어둡고 희망 없는 이 땅에 따뜻함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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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미소와 사랑으로 인해 깨어난 어린아이는 이를 바탕으로 비로소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어린아이의 상대방인 ‘너‘로서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사랑으로 품어 안는 가운데, 그 어린아이는 비로소 ‘나‘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제 어린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실재가 더 이상 중립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어린아이에게 의미로 다가와 그와 긴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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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개 파랑새 그림책 17
나자 글 그림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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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나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과의 교제는 새로운 힘을 더하여줍니다. 이름 없는 사람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었지만, 특별한 계기는 '나와 너'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줍니다.



짧은 인사지만 마음을 다하면 그것이 우리만은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작은 배려의 몸짓과 한 마디가 한 사람을 살리는 크나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외적인 조건보다도 중심과 존재를 보고자 하는 마음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어느새 힘겹고 각박한 세상에서 휩쓸리다 보면, 우리 또한 거칠어지기 일쑤입니다. 내면보다는 외형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재단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으로 대하기보다 여러 명 중에 하나 정도로 가벼이 여길 때가 있습니다.



『푸른 개』의 저자인 나자(Nadja)는 짧은 동화를 통해 묵직한 울림과 통찰을 던져줍니다.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마음속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장 귀하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상대방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바람인데 말입니다.



주인공인 샤를로뜨는 커다란 개가 자기에게 왔을 때 작은 환대를 베풀어줍니다. 진심 어린 눈빛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개를 쓰다듬고 초코빵을 나누어 먹습니다. 샤를로뜨는 푸른 개에게 아무것도 기대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만남이 주는 유익을 생각합니다.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 우리에게 유의미한지를 묻습니다. 이 책에서 엄마가 그러합니다. 푸른 개는 더럽고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가 진정 원했던 것은 편안하고 즐거운 관계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부정한다면 진정한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책임지는 자세라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안위를 위한 말이나 행동이라고 가정한다면 이후에 그에 합당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샤를로뜨에게 있어 엄마는 함께 있어 주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산딸기를 따기 위해 숲속에 혼자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아이의 슬픔 때문에 교외에 나왔는데, 정작 아이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중성입니다. 말이나 생각은 때로 참으로 교묘하고 허무합니다.



샤를로뜨를 어둠과 악,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상은 부모가 아닌 그 개였습니다. 푸른 개는 따뜻하게 불을 피워줍니다. 함께 있어 줍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악과 대항합니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을 때, 푸른 개는 밤을 새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아이를 지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아빠는 단 한마디만 합니다. "(개의) 이름을 뭐라고 할까?" 엄마가 아이를 다그칠 때도, 아이의 슬픔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주려 할 때도 아빠는 이 책에서 부재한 것처럼 그려집니다. 눈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림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단 한순간 아빠는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야 아빠의 눈빛은 따뜻하게 개를 향합니다. 나와 네가 관계를 맺는 순간입니다. 아이에게만 의미 있던 푸른 개는 이제 이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진정한 관계의 시작은 너의 이름을 물어보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가족의 일원이 된 푸른 개는 머리맡에서 샤를로뜨에게 말합니다. "맘 푹 놓고 자.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마음을 푹 놓고 잔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늘 스트레스나 분노, 의심과 염려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너 옆에 있어줄게." 어려움과 고난의 순간,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하는 듯합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때 단지 옆에 있어 주는 존재는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돌이켜보면 그가 힘들 때 마음 모아 그 옆에 있어주기만 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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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다시 묻다 - 원점에서 생각과 믿음을 정리하는 한알의 밀알 44
도이 겐지 지음, 가미야마 미나코.홍이표 옮김 / 신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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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가까이에서 체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 정신대로 살아가기보다 기독교의 탈만 쓴 채 우리의 욕구를 쫓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독교의 참 정신이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추상적이고 명제적인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고 대면할 수 있는 기독교의 정신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구체화된 언어가 없을 때 우리를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신학자인 '도이 겐지'는 근원으로 돌아가 기독교를 성찰합니다. 그리하여 이 책 『기독교를 다시 묻다』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질문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근원과 핵심에 다가가고자 노력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학생들에게 직접 들으면서 이 책을 구상합니다. 그러한 소통의 과정 속에서 네 가지의 주제로 기독교를 설명합니다. 이는 '전쟁', '사랑', '신', '신앙'입니다. 이와 같은 주제는 기독교의 교리에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밀접합니다.



도이 겐지는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의 어두운 면을 새롭게 조명함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파악합니다. 스리슬쩍 교리로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질문과 의문에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의문은 '왜 기독교는 전쟁을 일으키는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오해와 실제적 사실이 교차하여 생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제국주의의 선교는 기독교를 등에 없고 폭력을 자행한 행위였음이 분명합니다.



저자는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자체와 전쟁을 일으킨 주체를 분리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한 시대의 한 사회와 결합하여 그 사회를 결집하는 원리로서의 기독교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그 시대의 농축된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폭력이나 전쟁이 기독교의 정신일까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를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화목과 평화를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삶조차 철저히 비폭력적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규정이나 지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만남 가운데 '당신'이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고 만나고 감동하며 경계선을 뛰어넘는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강조점이 다른 주제에 스며듭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 실제적이며 구체화된 노력이 모든 관계로 확장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다른 신과의 절대적 차별성은 인격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지만,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계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가 모든 담을 헐고 화평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다른 편을 나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불어의 삶을 위해 변화됩니다.



결국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이 이 만남과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편협함을 극복합니다. 지위, 입장, 민족 등의 경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리하여 너를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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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나 지위 따위의 ‘누군가‘라는 속박을 넘어서서, 오직 한 명의 사람으로 눈 앞에 있는 타자와 만나는 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 관계입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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