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왕의 복음 -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
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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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는 이 책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복음'이라고 사용되어진 용어에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수정이라함은 확장이라는 의미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하지만 복음이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된다면 그것 역시 복음이 아니다!"(14) 스캇은 예수가 전하고 살아낸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르지 안하고 말한다. 바울의 복음은 구원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온 세계의 합법적이고 영예로운 주님이자 왕이며 구원자이신 예수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15)라고 말한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늘까지의 대부분의 복음전도가 누군가를 결단시키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가 아님을 의미한다. "결단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전도는 복음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반면,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는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이야기로서의 구원을 말한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통해 참되고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이스라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이야기로 결론을 맺는다. 사도적 복음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사도적 복음이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설명한다. "바울의 복음은 예수님의 승천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때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성취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83) 우리는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복음을 축소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복음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통전적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복음의 이야기를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 창조로부터 최종적 성취까지로 나아가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예수님 시대부터 종교개혁기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고린도전서 15장을 기초로 세워진 '복음의 문화'가 종교개혁기에 구원의 문화로 재편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상황(가톨릭 교회의 총체적 문제)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저자는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미국의 부흥 운동과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들간의 문화 전쟁을 통해 강력한 복음주의 문화가 만들러졌으며, 그 결과로 복음의 문화가 상실되었다고 한탄한다.(120)


그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며, 사복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기억하고 가르쳤던 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사도적 복음 전승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내용적인 측면에서 복음서는 고린도전서 15장이 확장되고 해설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복음을 선포하셨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라고 선포하셨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확신하셨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아주 명확하게 아우토바실레이아, 즉 "그 나라 자체"라고 표현했다(158-159).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복음서에서의 복음', '바울의 사도적 복음'을 거쳐, '베드로의 복음 설교'로 나아간다. 사도행전에서의 일곱 혹은 여덟 편의 복음 설교(2, 3, 4, 10, 11, 13, 14, 17장)를 통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앞에서 살펴보았던 복음의 상호연관성을 살핀다. 사도들의 복음 설교는 이스라엘 이야기가 전해졌으며,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가 복음으로 선포되었다. 또한 예수님에 관한 말로 복음을 요약했으며, 당시의 정황에 맞게 적용함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더불어 사람들에게 응답을 촉구했다. 결론적으로 사도적 복음 전승과 사복음서 안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 사도행전 안에 있는 복음전도 설교 이 네 증언은 복음이 동일한 것임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며 만유의 주님이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난 구원자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복음전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한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주 되심을 중심으로 하고, 사람들의 응답을 촉구하며, 구원하며 구속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오늘날의 복음전도가 되어야한다. 복음의 문화는 우리가 그 이야기의 사람들이 되어야함을 말하며, 우리는 더욱 예수님 이야기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는 현 시대 가운데 적절하게 반응하며, 예수의 복음을 말해야 한다. 이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상대주의 등에 맞서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이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서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이 일을 감당하며, 사랑과 긍휼과 섬김을 통해 복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책은 아주 명료하지만 풍성하게 복음을 새롭게 정의한다. 사실 재정의한다기보다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고, 회복시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오는 풍부한 복음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며, 살아내신 복음이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며, 성경 전체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 복음이다. 우리의 가치과 세계관으로 복음을 재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과 예수,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친 그 복음에 우리의 눈을 맞추고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후속적인 연구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함에 있다.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저자들과 책은 이미 국내에 소개되고 번역되어 있는 것이 많다. 따라서 이 책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소개되고 있는 혹은 추천하는 저자들의 저서를 계속적으로 탐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그러한 학문적 열의에 충분한 자극제가 된다. 필자도 이 책을 통해 톰 라이트, 제임스 던, 달라스 윌라드의 저서를 읽고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스캇 맥나이트의 다른 저서들도 다시 한번 정리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복음을 소개하는 이 책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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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해방된 교회
하워드 A. 스나이더 지음, 권영석 옮김 / IVP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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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이것이 표현되고 선포되고 증거될수 있게 하는 공동체(교회)에 대한 관심도 커져갔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하나님 나라'와 깊은 관련1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공부하면서 한번도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제목은 아쉬움이 있지만, 목차만 봐도 이 책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쓰여졌는지 알수 있다. 

존 요더(John Howard Yoder)의 제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고민 가운데서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 1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간단하게 요약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로 해방되기를 바라는 그는,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 가운데서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Ⅱ. 본론

제1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형'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준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교회를 해방시키고자하는 저자의 간절한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제1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타의 책과 비교해보아도 깊이나 풍부함이 뒤지지 않는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회의 중심적인 초점은 바로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교회의 중심적인 초점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친히 말씀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나라요 … 그 나라의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다.…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다.”2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을 화목케하고 샬롬가운데 거하게 할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위해 교회는 자유로워져야한다. 그것이 바로 해방된 교회이다. 또한 교회는 예배와 공동체, 복음 증거 사이에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리듬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영적이고 생태학적인 균형을 유지한다. 저자는 교회가 예배와 공동체, 복음증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위해 교회가 해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충만한 예배와 열정적인 복음증거는 교회의 필수적 요소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주장할 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을 강조 할 수 있다. 만물의 회복이나 생태계의 보존 등에 관심을 둘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더욱 중차대한 부분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교회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책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풍성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그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론서에서 다소 아쉬웠던 부분인 예배의 중요성과 전도의 균형감에 대한 강조는 아주 반가운 부분이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 참여에 더 기울어져있다는 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회 가운데서도 이러한 균형은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예배와 전도의 균형은 건강하고 하나님 나라 지향적인 교회를 만들 수가 있다. 단순한 균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충만한 예배와 끊임없는 전도가 교회에 필수적 요소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제2부 '교회 해방의 모형'에서 저자는 성례로서의 교회, 공동체로서의 교회, 종으로서의 교회, 증인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성례(비밀과 모형)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통해서 임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부르심, 즉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있으라는 부르심을 들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참된 제자됨(그리스도의 충만)을 통해 이 세상에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 교회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그리스도의 충만’이 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드러나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꿈꾸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목회에 적용해야 할 중요한 원리는 성도 개개인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단순히 한 개인을 천국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통해,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제3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방되어야할 교회의 모습 중 핵심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종이요 제사장이다. 그렇기에 모든 신자는 사역으로 부름받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사역자로 구비되어야한다. 모든 신자는 사역에 필요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성령의 은사가 발굴되고 활용되어야한다. 또한 공동체적으로 신학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며 건강하게 발전시켜 나가야한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세상과 스스로에게 새롭게 신실한 말씀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역동적인 신학공동체가 될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방된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할뿐만 아니라, 그러한 증거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간다. “성경의 일차적인 기능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 언약에 대한 신실성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행동하는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다. 성경의 목적은 신실한 백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한다.”4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정작 이 말씀을 진지하고 역동적으로 살피지는 않는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기보다 자신에게 말씀을 맞춘다. 말씀을 통해 변화되려 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씀을 해석하려고 한다. 교회는 말씀 앞에 자신을 순복함으로 자연스럽게 복음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표현할 수 있다. 또한 말씀 앞에 반응하고 순종할 때,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은사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제4부 '성령의 자유 안에 거하는 교회'에서 성령의 자유 안에 있는 참된 교회가 어떻게 모두를 해방시킬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신도들은 사역자로 해방된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지도자로 해방된다. 그리고 압제받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로 해방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교회는 모든 주권자들의 주가 되시는 한 주님을 섬긴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은 제자훈련가로 해방된다. 목회 리더십의 최우선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제자로 훈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강한 리더십으로 키워서 함께 동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로 나아가야한다.5 


앞으로 목회를 해 나갈 사람으로서 두렵기도하지만 매우 위로되고 도전되는 내용이다. 이미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부분은 더욱 깊이 있게 마음을 담고,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설득하고 내려놓아 함께 만들어감이 필요하다. 해방의 관점에서 교회 공동체를 설명함에 있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추상적으로 논의되어야하는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고 누려야하는 영역임을 뜻한다. 사역을 함에 있어 구체적인 영역에서 해방을 이야기하고, 먼저 섬기고 낮아지며, 동역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것에 실패한다면, 이는 결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순종과 부족한 믿음 때문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회는 혁명을 일으킬 자원과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그에 신실하게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다.”6 우리는 부족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구현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Ⅲ. 결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이다.7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 구현되고 선포된다.8 “교회는 참 이스라엘, 곧 고난의 종 이스라엘의 운명을 취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하는 백성이 된다.”9 하나님께서는 직접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새로운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나라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는 지속적으로 확장된다. 이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 위해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 해방된 교회는 그것 자체가 곧 복음이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많은 영역들이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해방을 맛 본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교회에게 주어진 본래의 목적대로 살아내어 기쁨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 John Howard Yoder, Original Revolution : Essays on Christian Pacifism, 김기현・전남식 공역, 『근원적 혁명 :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에세이』, (대전: 대장간, 2011), 37-39; 김회권, “모세와 예언자들의 하나님 나라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 :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다스림』,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2. Howard Snyder, Liberating the Church, 권영석 역, 『참으로 해방된 교회』,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5), 32.
  3. 위의 책, 227-28.
  4. 위의 책, 291-92.
  5. 위의 책, 351-52.
  6. 위의 책, 373.
  7. Craig G. Bartholomew・Michael W. Goheen, Drama of Scripture : Finding Our Place in the Biblical Story, 김명희 역, 『성경은 드라마다: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생동하는 성경 이야기』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9)
  8. Scot McKnight, Kingdom Conspiracy: Returning to the Radical Mission of the Local Church, 김광남 역, 『하나님 나라의 비밀: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 회복하기』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9. John Bright, Kingdom of God, 김인환 역, 『하나님의 나라』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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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와 불링거 기독교고전총서 19
두란노아카데미 편집부 지음, 김유준.서원모 옮김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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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개혁자들의 대표인 츠빙글리는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관리의 아들이라는 좋은 환경 가운데 148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베센(Wesen)의 지구장(dean)인 숙부의 후원으로 그는 교육의 여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바젤에서 인문주의자인 베텐바하(Thomas Wyttenmach : 1472-1526)의 가르침을 즐겨 받았는데, 츠빙글리는 이 교수에게서 성경의 유일한 권위, 오직 속죄의 대가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 면죄부의 무가치성 등에 대해서 배웠다. 이 같은 교육의 영향으로 츠빙글리는 자기 자신이 기독교신앙의 최초와 초기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인문주의자가 되었고, 인문주의자들과 더불어 당시 가톨릭교회의 미신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루터처럼 죄에 대한 고민, 복음을 통한 은혜와 신앙에 의한 사죄를 깊이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태도는 작센의 개혁자인 루터보다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좀 더 과격하였다.


취리히에서 메그레는 츠빙글리에게 프랑스아가 신학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츠빙글리에게 어떤 의구심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스 궁정에 그의 신앙에 대한 분명한 진술서를 제출하라고 조언했다. 츠빙글리는 메그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531년 초여름 「신앙의 주해」를 작성하여 대성당 학교의 그리스어 교수이며 츠빙글리와 절친한 친구인 루돌프 콜린 편으로 프랑스 궁정에 보냈다. 


「신앙의 주해」는 사도신경 위에 세워졌는데,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도신경을 자신의 본질적인 정통 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기초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주제는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도신경의 모든 항목을 다루지는 않았고 그의 목적과 적합한 항목만 특별히 다루었다. 따라서 그는 성령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성찬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지면을 할애했다.


흥미로운 특징은 명백한 인문주의적인 색채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론에 대한 처음 단락에서 곧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자료만큼 고대 철학에서 많은 것을 끌어낸다. 츠빙글리가 고전 철학에서 발견한 개념과 논증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고전철학을 적용하는 그 하나님은 성경의 살아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그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계시와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모든 신앙을 끌어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로 구분하여 이와 같은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는 신론의 관점에서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라는 내용으로 적용된다.


츠빙글리의 하나님 관념은 절대자 관념과 연결된다. 그가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논증은 성경에 의존해 있다기보다는, 하나 이상의 절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불가능이라고 보는 데 더 의존해 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지만, 이들은 피조물이나 다른 신이 아니라 셋이 모두 하나요, 한 본질이요, 한 우시아, 즉 실존이며, 한 힘과 권능, 한 지식과 섭리, 한 선과 호의이며, 세 이름과 인격이지만 모두 그리고 각자는 같은 한 하나님이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증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강조하는 키릴로스파의 관점보다는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오스파의 관점보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신성에서 어떤 것도 빠지지 않아 그분은 참으로, 고유하게, 본성적으로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분의 인성은 신성으로 들어가지 않아, 그분은 죄를 지으려는 성향만 빼고는 참으로, 고유하게, 또한 본성적으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이신 면에서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적인 연약함의 요구 때문에 신성의 속성 중 어느 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람이신 면에서 그분은 모든 면에서 사람이시므로, 인간의 참되고 고유한 본성에 속하는 모든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죄를 지으려는 성질만 제외하고는 신성과의 결합 때문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츠빙글리는 주의 만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너그럽게 주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리키며,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시고 돌보고 복되게 하신 구속하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즐거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기독교 교리들의 대부분에 있어서 서로 용납했지만 성만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어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초래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문자적 진리였다. 루터는 성만찬에서 전(全)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죄의 약속을 경험적으로 보증받는다. 네덜란드의 법률가인 호엔(Cornelius Hoen)은 일찍이 1521년에 “This is my body.”가 아니라 “This signifies(가리킨다 혹은 의미한다) my body.”라 하였다. 이 주장이 1523년에 츠빙글리에게 영향을 주어 제정의 말씀에 대한 그의 상징적 경향의 이해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 이후 츠빙글리는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이런 의미에서 실재적 임재-를 거부하였고, 그것의 기념적 성격과 믿는 자들의 회중을 한데 묶어 주님께 대한 충성을 약속하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츠빙글리는 행위의 근원은 믿음이 되어야 하며,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이 된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배역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모독이 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부터만 온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일의 표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본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무관해서 행해지는 일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 없이 행해지는 일, 즉 말씀과 하나님의 뜻 없이 행해지는 모든 일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죄다. 죄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의 뜻 없이 행해진 행위는 믿음 없이 행해지는 것이요, 믿음 없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바울의 판단에 따르면 되이며, 그것이 죄가 되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루터가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허용하려고 한 데 반해, 츠빙글리는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은 모두 금하려 했다. 이것은 로마주의의 모든 잔재를 훨씬 더 철저히 벗겨내는 것을 뜻했다. 루터는 바울의 복음과 직접 간접으로 상충되는 것만 배척하려고 한 반면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보다 한술 더 떠서 초대 교회의 형태와 구조까지도 회복시키고 싶어했다.

 


츠빙글리의 신학과 개혁은 현재의 개신교회와 상당히 흡사한듯하다. 그의 신학은 매우 성경적이면서도 당대의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의 정황에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교리들을 설명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듯 보인다. 우리의 신학과 목회도 결국 지금의 정황(context)에서 어떻게 진리(text)를 선포하는가하는 고민이다. 츠빙글리의 삶과 사역, 신학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사고하고 학문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교리와 신학을 정리하고 설명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 또한 더욱 치열하게 학문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을 알아감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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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9
마르틴 루터 지음, 황정욱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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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루터의 95개 논제가 세상에 공표된 후 그와 로마교황청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메워지질 않았다. 1518년 10월 아우그스부르그(Augsburg)에서 열린 추기경 카예탄(Jakob Cajetan de Vio)의 심문은 루터를 회유 내지는 굴복시키는데 실패했다. 1519년 잉골스타트의 요한 엑크(Johannes Eck)와 라이프찌히(Leipzig)논란을 벌이면서 루터는 교활한 엑크의 잔꾀에 말려들어서 성경의 권위는 교황이나 회의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황과 회의믜 미움을 사게 되었다.


루터는 이제 실로 싸움터에 깊숙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의 사상도 급속도로 명료하게 되어 갔다. 울리히(Ulrich von Hutten) 같은 인문주의 지지자들도 루터가 교황청과의 국가적인 분규를 영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그를 지원하고 있었다. 루터는 자기의 사명을 적그리스도로 간주되는 교황 한 개인보다는 오히려 교황청으로부터 조국 독일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진전되어가고 있을 때 작센주의 젊은 귀족인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로마 교황청과 루터진영 사이의 중재를 자청하고 나섰다. 로마 교황청과의 전적 단절을 원치 않았던 루터는 밀티츠의 요구대로 자시의 종교개혁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밝히는 신앙에 관한 소책자 한권을 저술한 후 이를 유화적인 편지형식으로 된 헌사와 함께 교황에게 보낼 것을 약속했다.


루터는 1520년에 3개의 중요한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Address to the German Nobility),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이다. 이 중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1520년 11월 20일경에 밀티츠와의 약속에 의해 출판된 책이다. 당시 독일 안에 교황의 교서가 한참 공포되고 있는 동안, 이를 구상하여 내놓을 수 있었음은 참으로 그의 험난한 생애 중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루터는 두 가지 핵심적인 명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상호모순되는 자유와 예속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이고 육적인 두 본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영혼에 따르면 그는 영적이고 새롭고 내적인 인간이라 불리우며 혈과 육에 따르면 그는 육적이고, 낡고, 외적인 인간이라 불리운다.(2,4단락)


“기독교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자유한 만물의 주이며,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는 만물의 가장 책임있는 종이다.”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유하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그의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만인제사장론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자권 및 그것의 영예와 품위를 소유하고 계셨던 것처럼 그분은 (이제) 그것을 당신의 모든 신도들에게 분여해 주시는고로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수 밖에 없다(20).”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이 육적으로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영적으로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에게 얻어주셨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왕권을 통해서 만물을 지배하며 그의 제사장직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영향력을 행사한다.(2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터는 카톨릭 교회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성직자여도 수도사여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덕이 없는 것이라고 본다. 믿음이 없으면 외적인 일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세속적인 일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성직자들보다 낫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 루터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결국 복음이란 한 편으로는 인간이 전혀 의가 없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율법의 말씀)과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음을 알게 하는 말씀(복음의 말씀)이다(11,12).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 카톨릭은 외적인 경건과 덕을 강조하고, 직무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 루터는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치않다라고 이야기한다(5,6).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믿음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롭다. “너의 멸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네 앞에 제시하시고 그분의 살아있는 위로의 말씀을 통해 너에게 말씀하게 하신다. 너는 굳은 믿음으로 그를 따르며 용기있게 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그 신앙 때문에 너의 모든 죄악들은 사함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너의 파멸은 극복되어질 것이며 너는 의롭고 참되며 평화롭고 경건하게 되고 모든 계명들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8)


오늘날에도 믿음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루터의 신학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있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염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여러 방편들이 그리스도인의 올무가 되어 의무처럼 느끼거나 율법이 될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복음 앞에 서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충만은 우리를 능히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를 의롭고 참되며 평화롭고 경건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며 선을 행할 것이다. 우리의 외적 모습은 내적 자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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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곱 DNA - 축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이중적 욕망
김기현 지음 / 죠이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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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 가운데는 기쁨과 확신, 기대와 설렘도 있지만 고통과 아픔, 좌절도 존재한다. 또한 삶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나의 욕구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한다. 나는 과연 신실하게 이 여정을 살아내고 있는가하는 의문이 우리에게 늘 따라다닌다. 


이럴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와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갔던 인물들을 대하게된다. 믿음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삶 곳곳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며, 위로와 도전이 되기도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받고 싶은 성경인물을 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를 택할까? 아마 야곱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닮은 성경인물을 택하라고 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야곱을 택할것이다. 

야곱은 인간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서있다. 그는 거룩하지만 세속적이며, 영적이지만 육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 이중성에 대해서 인식해야하며, 특별히 자신이 철저한 죄인이며, 연약한 존재임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아야한다. 

다윗도, 예수님도 심한 고통 속에서 구더기만도 못하다고 탄식했다. 자신이 그러했기에 우리 예수님은 버러지와 구더기 같은 사람들을 귀히 여기신다. 어부, 세리, 여인, 죄인…. 하나같이 좀 있다 하는 사람들 눈에는 지렁이 같을 게다. 그건 단지 사람들 눈에 비친 모습일 뿐 진실이 아니다.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어보신 그분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내면에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몸소 버러지가 되어보신 분, 그래서 버러지 같은 야곱을, 버러지보다 못한 나를 그분이 사랑하신다. 이것이 은혜다. 아, 하나님의 은혜! (P.33)
 
김기현 목사님의 '내 안의 야곱DNA'는 야곱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이중적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축복과 성공을 갈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표현한다. 한 인물에 대한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우리 또한 그러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겸손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야곱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기에 야곱의 마지막이 더 기대되고, 그의 결말이 더 궁금해졌다. 또한 그 여정의 끊임없는치열한 싸움,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는 과정이 너무 궁금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된다. 
 
나그네 여정은 한걸음에 다다를 수 없다. 즉,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이 한방에 끝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얍복강 나루터의 하룻밤 씨름이 야곱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긴 시간동안 반복적으로 야곱의 인격을 조련하고 담금질하신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그는 참 속물적 인간이면서도 거룩한 인간이다. 질길 정도로 잘 변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했다. 그가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위로를, 그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서 소망을 얻는다. 야곱같은 우리, 야곱보다 못한 우리, 야곱보다 더한 우리에게도 위로와 소망이 있다. (P.232) 

야곱은 결국 축복받는자에서 축복하는자가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그 사명을 이루게 된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 우리의 사명 또한 그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축복받고, 우리 공동체를 통해 많은 사람이 유익을 누리게 되는것. 땅에 떨어지고 더럽혀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 감사와 찬양으로 그분께 무릎꿇게 되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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