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역사성 논쟁 -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네 가지 관점과 목회적 적용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3
데니스 O. 라무뤼 외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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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역사성 논쟁』은 네 명의 저자가 각자의 관점으로 아담의 역사성에 대해서 주장하는 책이다. 더불어 두 명의 목회자가 아담의 역사성이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논평도 추가되어 있다. 여섯명의 관점을 보면, 근래에 복음주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거의 모든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네 명의 저자는 엘버타 대학교 세인트조세프 칼리지의 과학 및 종교학 교수인 라무뤼(Denis O. Lamoureux), 휘튼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월튼(John H. Walton),  커브넌트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C. 존 콜린스(C. John Collins)와 배릭(William D. Barrick)이다. 


먼저 라무뤼는 역사적 아담이 없다고 말하며, 진화적 창조론에 근거해서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다. 특히 “맞추심”(accommodation)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인간의 수준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우주의 구조와 기원은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무오한 신앙의 메시지를 계시하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로서 동시대 사람들의 과학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월튼은 역사적 아담이 있다고 믿으며, 원형적 창조론의 관점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는 역사적 아담을 믿긴 하지만, 성서의 일차적인 관심은 인류의 원형적 대표자인 아담과 하와라고 말한다. 또한 신구약 성서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의 문헌들과 비교대조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성서가 아담에게 제시하는 신학 요점들은 역사적 아담의 유무와 상관없이 원형적 측면에서 고려한다. 이렇게 성서를 해석할 때, 다양한 과학적 주장과 성서의 메시지는 대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콜린스는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존재했으며, 성서의 스토리라인을 구성할 뿐 아니라,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될 필요가 있는 죄인이며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경험을 잘 이해할 수 해준다고 말한다. 그는 오래된 지구 창조론(OEC)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창세기 1-2장의 날들을 긴 시간의 간격이라는 견해를 배제하지 않으며,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간의 시초이긴 하지만 유일한 인간 부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간주한다.  


배릭은 성서의 기록에 따라 아담을 역사적 인물이자 인류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젊은 지구 창조론(YEC)을 근거로 자신의 관점을 펼치고 있다. 특히 그는 아담의 역사성은 성서의 메시지와 신앙에 있어 중차대한 문제이며,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 있어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릭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절대적으로 무오하며, 현대 과학의 주장과 성서의 내용이 상충할 경우 성서 편에 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네 명의 저자의 관점은, 논리적인 치밀함과 동시에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논리적 비약 또한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각자의 주장과 더불어서 그 주장에 대한 다른 저자의 논평이 있다. 더 큰 장점은 다른 저자의 논평에 대한 응답까지 수록하고 있다는 점인데, 지면의 한계가 아쉬울 뿐이다. 조금 더 서로의 의견에 대한 논평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각자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한계가 메꾸어질 수 있다면, 독자로서 더 큰 만족감이 있을 것 같다.

 

짧게 이 책 자체에 대해 평하자면, 무엇보다 쉽고 재밌다. 과학과 역사, 신학에 대해서 모르는 독자라도 쉽게 접근가능하며 이해 할 수 있다. 어려운 용어나 개념보다는 평이한 문체로 독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내용은 상당히 알차다. 학문적 깊이가 엿보인다. 오랜 시간 자신이 씨름하고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무엇보다 균형잡혀 있다. 어떤 관점에 대해 은근히 지지하거나 배제하는 법이 없다. 분량이나 다루는 방식 등이 모든 저자들을 배려하고 있다. 다소 아쉬운 점은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충분하게 소개받는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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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 기독교란 무엇인가, 전면 개정판
박철수 지음 / 대장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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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개신교는 안팎에 걸쳐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러 부정적인 요소들이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며 개신교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들, 교단과 신학교의 다툼과 분열들, 교회 권력과 명예를 둘러싼 싸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오르내린다. 지금 한국 교회의 위기는 개신교 전래 이래 가장 큰 위기라고 여겨진다. 더 큰 문제는 교회을 향한 비판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하여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의심과 공격을 거쳐 종국적으로는 기독교의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부정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적인 이유와 외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신학과 성서해석이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과 인간과 세계의 상황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늘 파악해야하는 관계라면, 내적인 복음의 확실성과 더불어서 전세계적인 상황과 한국의 상황에 대한 탁월한 안목도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에, 복음에 대한 확신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의 적용도 전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한 개인의 구원에 머무는 복음이다. 그것을 조금 더 풀어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값을 치를 능력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도록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는 모든 사람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수 있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복음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의 핵심은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다.


이러한 복음이해는 우리를 자기 안에 갇히게 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상황 가운데 더 큰 그림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정황과 구조적인 결함은 우리의 시각을 점점 더 협소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이유를 망각하게 된다. 존 하워드 요더는 “사람들은 특히 인생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인식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공포와 내세에 대한 말씀을 듣기 원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설교와 시가 죽음을 다루었고, 당연히 인간이 필요로 했던 좋은 소식은 영원한 생명이란 말로 설명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필요나 시대적 정황, 종교적 전통으로부터 시작한 복음 이해는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목적과 그분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은 적어도 성경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절대 가볍지 않았다. 복음은 깨어지고 뒤틀려진 세계를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도래시키는 메시아이며 왕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관한 혁명적이고 도전적인 메시지이며, 하나님나라 운동으로의 초청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최대 주제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의 최대 주제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는 전복적이고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힘의 논리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인들을 축출하고 모든 일을 바로잡아 줄 메시아를 소망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때, 유대 공동체 안에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기대와는 달리 연약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중심부가 아닌, 갈릴리에서 조용히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폭력과 힘, 강압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낮은자의 모습으로 고난당하셨다. 그는 무력 대신 고난을, 폭력 대신 사랑을 내세웠다. 예수님은 기성 체제를 위협했다. 그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로마인, 저항 세력들이 타고 있던 안락한 배들을 똑같이 흔들어 댔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거꾸로 된 것이었다. 단검이 아니라 긍휼의 행위가 혁명을 이끌었다. 사랑은 새로운 율법이었으며, 그의 뒤집힌 나라를 알리는 깃발이었다. 


이렇듯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변혁적이며, 혁명적이다. 이러한 논조로 박철수 목사는 그의 책 『하나님나라: 기독교란 무엇인가』에서 먼저 한국교회를 예리하게 진단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교회의 여러가지 어려움이 하나님나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포하지 못했기에 파생된 문제로 파악한다. 먼저는 하나님나라와 유토피아의 개념적 정의와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분석한다. 유토피아 또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겠지만,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는 유토피아와는 다르게 초월적인 계시에 바탕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는 결정적으로 다름을 말하고 있다.


더불어 저자는 창세기 1-4장을 면밀하게 해석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 즉 죄된 상태에 대하여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2장의 서두는 죄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하나님나라가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돌이킴, 즉 회개가 전제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나라의 개념적 정의를 뛰어넘어, 하나님나라와 회개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를 3장과 4장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회개는 믿음을 동반한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차이는 신념과 행동, 소속의 변화를 거쳤는가의 여부이다. 그런 점에서 4장 마지막 부분의 거짓 믿음(콘스탄틴 황제의 예)과 대조적으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5장에 밝히고 있다. 저자는 창세기 12~22장과 로마서 4장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나라의 입장권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를 말함에 있어 핵심적 주제인 하나님나라의 긴장은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저자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6, 7장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이전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오게 될 주제들은 소수의 학자들만 다루고 있거나, 다루더라도 몇 가지의 주제만 있을 뿐 모든 주제를 통전적으로 다루지는 못하는 듯하다. 저자는 기존의 하나님나라 관련서적과는 다르게 사탄의 활동, 하나님나라와 권세, 하나님나라와 가난한 자, 정치, 생태계, 안식일, 교회, 새 하늘과 새 땅을 8~16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하나님나라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나라의 관계적이고 통전적이며 급진적인 성격을 알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 사회, 환경 등의 주제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대부분의 주제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책은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더 깊이 주제에 파고들어 문제를 진단하고, 성경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양한 서적과 연구들을 총망라해서 잘 소화하고 흡수 한 뒤 새로운 언어와 통찰로 다양하고 폭넓은 영역의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부분에서 장점이 많다.  먼저 성경적이다. 이 책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의 순차적 전개를 존중하는 성서신학적인 책이다. 다양한 신학자와 그들의 저서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성경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접근 이전에 성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주제에 있어서도 성경의 구절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하여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역사적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2천년 교회사를 통해 검증된 정통신학자들의 신학적 통찰을 적확하게 인용하거나 인증하고 있다. 바울, 칼빈, 아브라함 카이퍼, 디트리히 본회퍼,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프란시스 쉐퍼, 오스칼 쿨만, 존 스토트, 위르겐 몰트만, 하워드 요더, 리처드 마우, 톰 라이트, 김균진, 김세윤, 김회권 등 많은 신학자와 저술가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성경적이며 역사적일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실제적이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칫 추상적이거나 명제적으로 주제를 다룰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문제나 내면의 문제를 뛰어넘기 때문에 정작 한 개인이 하나님나라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쉽게 안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저자는 구체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 환경 등의 영역은 우리와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며,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실제적인 이유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며, 우리 사회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성격은 본래 변혁적이고 전복적이며 급진적이다. 부드러우면서 때로는 강하게,  거칠지만 섬세하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의 전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가 참된 복음에 반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초대에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 땅에 소외된 연약한 이웃들이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참된 샬롬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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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문자
성 어거스틴 지음, 공성철 옮김 / 한들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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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마니교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신론을 확립하고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수립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는 죄론과 은총론을 확립하였다. 도나투스주의는 북아프리카에 국한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국지적인 것이었지만,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체 그리스도교계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보편적인 위협이었다. 펠라기우스는 그의 경건과 엄격한 삶으로 유명해진 영국(Britain) 출신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죄를 극복하는 성화의 삶을 구원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으셨고 악의 근원이 의지에 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인 스스로가 죄를 극복할 수 있고 성화에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죄나 구원이 모두 인간의 책임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했다.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If I ought, I can.)이라는 말은 그의 입장을 잘 표현한다. 그의 태도는 대중적인 스토아 윤리의 자세, 그것이었다. 그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었다는 어떠한 원죄도 부정하였으며, 모든 인간이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고자 의지하였고, 동시에 의지하지 않았던 때의 경험을 기억하였다. 이는 인간의 의지란 펠라기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의지란 항상 자신의 주인은 아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의 권세가 인간의 의지를 점령하고 있는바, 인간이 이 권세하에 있는 동안 인간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의지하는 것과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 사이의 투쟁인바, 이는 인간의 의지의 연약성을 폭로할 뿐이다. 죄인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으나, 은총을 세례와 전반적인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한 죄의 속량으로 생각하였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은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랑의 주입으로서, 이로 인해 인격이 점차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를 돕는다고 믿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너무도 깊이 죄에 빠져서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마저도 없어지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구원할 만한 아무런 힘이 없다고 확신하였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리석음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바울의 질문에 대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답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과분한 선물이며 우리는 그 선물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여 남긴 책으로는 『죄의 벌과 용서 및 유아세례에 관하여』, 『영과 문자』,『인간의 본성과 은혜에 관하여』등이 있다.


특별히 『영과 문자』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총과 원죄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과정에서 율법과 성령의 역할과 도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거스틴은 “성령과 문자”라고 했으나, 실제적으로 ‘율법과 새언약’, 혹은 ‘율법과 성령’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문학적으로 이 글은 신학논문에 가깝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펠라기우스의 의견에 반박하기 위해 적혀적기에 그의 논리는 날카롭고 풍부하다. 어거스틴이 이전의 다양한 문학과 역사적 정황, 철학 등을 많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글에서는 특별히 성경말씀을 계속적으로 근거로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피력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사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부으신바 되었던 것입니다(Ⅲ.5).” 어거스틴은 율법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율법의 한계와 성령의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한다. “율법은 선하고도 찬양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악한 욕망 대신에 선한 요망을 불어넣으면서 돕지 않으면 안됩니다(Ⅳ.6).”


우리는 하나님께 벌받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의를 행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하고 깨끗한 의를 원하신다. 결국 이 의는 성령이 도우시고 치료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의를 행하는 것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으로 선을 행하시며, 선을 행한 자들이 칭찬을 받게되는 원인이 되시는 분입니다(Ⅷ.13).”


어거스틴은 계속적으로 성경본문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리를 확장해나간다. 주로 로마서의 말씀이며, 1장 16-17절, 2장 9-10절, 14-15절, 3장 23-24절, 11장 6절 등 다양하다. 그 외에도 창세기와 시편, 디모데전서 등 로마서 외의 성경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성경해석과 비교해서 당시의 성경해석은 다소 연역적임을 볼 수 있다. 한 주제나 교리에 대해서 다양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반박하는 형태인데, 성경해석의 근거가 다양하지 않아 자칫 자신의 논리에 성경본문을 끼워맞추는 형국으로 보일 수도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정황에서 어거스틴의 글은 반성경적인 사조에 대항하며, 건전하고 새로운 기독교 사상을 확립하는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성령과 문자』에서 어거스틴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 너무 부패하여 모든 면에서 죄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그의 노력이나 의지로 치유할 수 없으며,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할 뿐 죄를 치유할 수 있는 궁극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유일한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자라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성령론은 성경적이지 않은 다양한 견해들로 오염되고 있다. 경험은 이론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일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하며, 성경을 통해 해석가능해야한다. 특별히 은사주의는 성령의 역사와 도우심을 왜곡하고 있다. 치유와 축귀도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성경에서 보여지는 성령의 도우심은 균형과 조화, 끊임없는 성숙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점에서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바가 크다.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과 온전함을 향해 매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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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 - 하나님의 선교 관점으로 성경 내러티브를 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정옥배.한화룡 옮김 / IVP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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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 관점으로 성경내러티브를 새롭게 열어주는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협소한 우리의 신앙관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성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더불어 현실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적용이 균형잡혀 있다.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2010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케이프타운 서약을 작성한 장본인이기도하다. ('하나님의 선교'는 케이프타운 선언문의 핵심 주제인 통합과 화해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훨씬 더 풍부한 해석과 예리한 통찰이 돋보인다.)

저자는 선교의 주체와 선교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명확하게 정리되어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선교의 목적 또한 열방가운데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선교의 주체와 목적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핵심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진보진영과 복음주의권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었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통합시키며, 진보진영과 복음주의권의 가교역할을 감당한다.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것은 성경전체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거나 통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러한 선교학적 성경해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본문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틀인지에 대해서 1부 전체를 할애하고 있다. 

1부. "성경과 선교"에서는 기독교 선교가 성경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학 저서의 대부분이 신약의 본문에서 선교의 정당성을 찾지만, 저자는 선교의 구약적 뿌리에 의도적으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확고한 신학이 성경 전체를 읽는 효과적인 해석학적 틀을 제공함을 보여주고 있다. 


2부. "선교의 하나님"에서는 한분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살펴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 전체에 걸쳐, 자신의 참 모습대로, 곧 여호와 하나님, 야웨,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는 분으로 알려지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3부. "선교의 백성"에서는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한 백성을 창조해 내심으로 모든 열방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하나님의 구속(선택)과 하나님의 선교의 중간지점에서 중대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특징짓는 중요한 기준인 윤리에 대한 강조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단히 공개적인 무대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나 역사에서 비밀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좋건 나쁘건(성경 이야기들과 선지자들이 보여 주겠지만), 이스라엘은 열방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런 위치에서 그들의 하나님 야웨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고, 망신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열방 한 가운데서 그러한 역사적 여행을 시작 할 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제사장다운 거룩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귀중한 소유라는 지위에 걸맞게 사는 것이다.(P.467)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주로 할 일은 그들이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은 선교를 선언하며, 이스라엘의 선교는 윤리를 요구한다(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P.471-472)

4부. "선교의 무대"에서는 하나님이 전체 창조 세계에, 땅 자체에,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들에게, 모든 문화와 나라들에 관여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 이책은 모든 족속, 백성, 나라, 방언의 사람들이 새 창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종말론적 목표에 대한 환상으로 마무리한다. 
 
 기독교적인 환경 활동은 사실상 전도 면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되도록 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성경 진리들을 선교적으로 구현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시켰기 때문이다.(P.527)
 
왜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복음과 선교가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총체적이기 때문이며, 회복되어야 할 영역이 총체적이기에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복음과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창조 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선교 현장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부름받은 선교에는 불가피하게 생태학적 차원이 포함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는 인간적 속성에서 많은 선교적 함축들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또한 철저히 그리고 포괄적으로 죄와 악에 오염되고 영향을 받았다. 우리의 선교적 반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루는 문제들만큼, 철저하고 포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P.567)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처해 있지 않다면,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긍휼과 죄사함을 베푸신다는 사실이 없다면, 선포할 복음이 없을 것이다.(P.579)

하나님의 선교는 땅의 모든 족속들을 복주시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편적 목표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대단히 특정한 수단을 선택하셨다. 그들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는 나머지 열방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독특한 구속 이야기는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루실(그리스도를 통해) 것에 대한 모범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독특한 청지기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로부터 열방들에게 그리고 땅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윤리의 독특한 구조는 구속받은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P.579)

"끝맺는 말"에서 저자는 책의 방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대하게 될때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는가? 그것은 자신의 작은 세계가 제공하는 안락한 자아도취에 빠져들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큰 그림에 눈을 뜨라고 끊임없이 강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나의 인생 이야기 어느 부분에 들어맞는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나의 작은 삶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 큰 이야기 어디에 들어맞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삶에 꼭 맞게 재단된 목적에 이끌려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포함해서 모든 삶의 목적이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 안에 감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P.672)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전히 중요하고, 핵심적이며, 중심적임을 강조하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모든 역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그렇게 하기에 합당하고 권위가 있는 것은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 그 십자가는 구속적이고, 보편적이이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역사의 열쇠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이다.(P.674)

우리가 성경 전체의 웅대한 이야기의 초점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찾게된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전체 선교의 초점을 찾게 된다면, 우리의 반응은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이 우리 자신의 상황과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에 개인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무슨 의미인지 밝혀 내는 필수적 과업에 착수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도마처럼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P.674)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과 관심,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였다. 거룩한 백성(공동체)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 앞에 우리는 순종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의 이 세 가지 특징, 곧 하나님, 이야기, 백성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 특징들은 모두 사실상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특징들이 지닌 권위와 선교의 적절성이 유지될 뿐 아니라, 더 향상되고 변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된 성경적(즉, 신구약을 가로지르는) 신학이 지닌 선교학적 의의를 나타낸다. - P68

선교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의 모든 선교보다 앞서며, 우리의 선교의 기원이다. 또는 누군가 멋지게 표현했듯이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선교를 두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두셨다. 선교가 교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만들어졌다. - P74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성, 선교, 성취의 성경적 뿌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유일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적 유일신론은 대단히 선교적이다. 야웨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하나님이시며 다른 분은 없다고, 그리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어떤 이름도 주어진 적이 없다고 똑같이 힘있게 말하는 한(두 진술 다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주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P164

하나님의 선교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를 원래 의도된 대로, 곧 구속받은 인류의 지배를 받으며, 창조주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선교는 그러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여, 그것의 최종적 완성을 예상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우상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계속 일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그 우상들이 조장하는 파괴적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 P206

우상숭배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 따라서 성경적인 선교의 과업은 사람들이 다시 이러한 모든 영역에서 유일하고 참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위에서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만 경외하고 경배하며 떨어야한다. 주권적 창조주시며 은혜로운 구속주이신 여호와와 언약을 맺고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면, 물질적인 것이건 영적인 것이건 창조 세계 내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하나님은 반석처럼, 삶과 죽음의 모든 상황 속에서, 현재나 미래나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완전히 안전한 장소다. 그리고 이따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의 공급자시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간청하거나 회유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기 때문이다. - P21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억압에서 구속하시면서 행하시는 것은 그분의 개인적, 신적 이름인 야웨를 계시하는 것과 영원히 연결될 것이며, 그 이름이 지닌 특색을 영원히 규정지을 것이다. 야웨는 출애굽의 하나님이다. 야웨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이다. 야웨는 그가 보는 것을 미워하시고, 억압자를 무너뜨리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단호히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따끔한 심판을 받는 것에서든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예배하는 것에서든 둘 다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야웨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 그분이 선언하신 복적, 그분이 헌신하신 선교를 기억하신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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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위하여 몰트만 선집 7
위르겐 몰트만 지음, 김균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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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삼위일체론은 신학과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오히려 ‘삼위일체는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다.’라는 식으로만 회피한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삼위일체론은 시종일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저자는 그 동안의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며, 사회적이며 관계적인 삼위일체론을 주창한다. 그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표현되어지며, 역사 가운데 드러난 삼위일체론에 집중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 구조가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아닌 성서적 내러티브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새로운 신학 시리즈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친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과 새로운 ‘삼위일체론적 사고’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친교 속에서, 변화 속에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상의 분리와 격리가 없이는 활동할 수 없는 실체와 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낡은 사고를 해체하고 싶었다.” 


Ⅱ. 본론

먼저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논의함에 있어 근대의 삼위일체론적 사고를 말하고 있다. 이는 경험으로 접근할 것인가,실천으로서 접근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 한계를 지닌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성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개방된 삼위일체의 사귐의 관계의 역사에 대한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와 역사 가운데서 삼위 일체 하나님을 인식하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몰트만은 그 동안의 철학적 사고에 의한 무감정의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 반대 급부로 다른 피조물과 같이 결핍 때문에 고난 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고난받으신다. 이는 열정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제한하시고 자신을 낮추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고 박해받는 백성 가운데 함께 하시며, 스스로 고난받으신다. 그 동안의 이 고난의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 다양한 의견차가 존재했다. 특히 교부들은 랍비와 바울의 이론을 따랐다. 고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고난과 죄가 인과론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난에 대한 경험은 죄에 대한 경험과 은혜에 대한 경험을 뛰어넘는다. 고난의 경험의 뿌리는 창조된 세계 자체의 제반 한계에 있다. 고난의 경험은 사실에 있어서 죄와 무죄에 대한 질문을 훨씬 넘어서며 이 문제를 중정적인 문제로서 내버려둔다. 고난의 경험은 사랑의 경험만큼 넓다. 사랑에 있어서는 오직 “죄 없는” 고난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고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고난은 사랑만큼 넓으며, 사랑은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성장한다.


그 동안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능력이 많으신데 왜 이 땅에는 여전히 불의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가?’하는 질문이었다.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몰트만의 주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앞으로의 목회에 있어서도 고난은 계속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을 질문이었고, 던지지 말아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성경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이 문제를 적절하게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몰트만은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자유는 어떠한 자유인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서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는 그가 인간에게 제시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가 인간들을 자기 친구로 만드는 우정에 있다. 그의 자유는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사랑, 그의 개발성, 그의 응답에 있으며,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인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들을 중재하며, 이리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열어준다. 하나님은 그의 고난과 그의 희생과 그의 헌신과 그의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원한 자유를 증명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가슴벅찼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받기를 자처하신다. 


다음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역사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특히 십자가의 고난과 아들의 버림은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버림 받은 자들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아들을 버린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내어 준 자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아들을 내어 준다. … 그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의 적극적 수난, 의식적으로 시작한 고난의 길, 자신이 긍정한 죽음이었다.” 아들의 희생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형태는 어떠한가?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절대적 죽음에 내어 준다.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준다. 아버지와 아들 공동의 희생제물은 버림 받은 상태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와 결합시켜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인식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이러한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몰트만은 예수의 인간 되심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극적인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린 아들 안에서 ‘신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만난다. 하나님의 권능과 관련하여 그것은 하나의 제한을 의미한다. 그의 능력은 연약함 가운데에서 힘이 있다. … 안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밖을 향한 해제라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의 비하 가운데에서 가장 크시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무력하심 가운데에서 가장 영광스럽다. 그는 자기의 성육신 가운데에서 ‘가장 신적이다.’” 그 동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비해서 성육신과 그의 삶은 많이 간과되었다. 이전에 빌립보서 2장이 설교본문 순서가 되었을 때가 있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신학교에 와서야 성육신에 대해서 어느정도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성육신의 의미에 대해 풍성한 이해가 부족했다. 하지만 몰트만의 설명은 아주 통괘하고, 풍부하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만든다. 


몰트만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정리한다. 그 동안 둘을 구분하고 차이를 설명한 것에 비해서, 그는 이 둘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상호보완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통해 찬미를 올려드릴 수 밖에 없음을 말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케리그마 신학과 실천신학의 대상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찬미학적 신학의 내용이다. … 내재적 삼위일체가 찬양의 대상이라면,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경험의 총괄 개념을 뜻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인식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한다. 인식의 순서에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하며, 존재의 순서에 있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선행한다. … 기독교적 삼위일체론의 기본명제는 다음과 같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과 모순될 수 없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찬미의 진술들과 상응할 수 밖에 없다.”

 


Ⅲ. 결론

김균진은 그의 책에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요약한다. “1980년에 출판된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그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조직적으로 확립한다. 하나님은 철저히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유일신론, 다신론, 범신론에서 기독교를 구별하는 기독교 고유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명상하며 홀로 계신 일자(一者)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상호 구별과 교통 속에 있는 사귐의 존재다. 세 신적 위격들은 각자의 고유성과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한 몸(일체)을 이룬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책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깊은 사귐 가운데 한 몸을 이룬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는 인간의 삶 가운데로 확장된다. 우리는 공동체적 교제 가운데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해, 해방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섬기며 낮아지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결코 추상적인 사변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구체적인 실제의 삶 가운데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다시금 그 사람을 전해주기 위해 우리를 내어주게 된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의 여러 문제들 앞에서도 하나됨과 화목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들이 끊이지 않는다. 권력과 명예를 둘러싼 싸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 오르내린다. 우리는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 주제를 붙들고 논의하며 가르쳐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이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할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이해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우리의 교제는 사람의 사귐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신적 교제 가운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 가운데 교회가 동참한다면, 교회는 선교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성도간의 교제만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 연약한 자, 해방이 필요한 곳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달려가게 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문제와 만물의 회복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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