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중적 혁명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사명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이것은 출애굽의 메시지이며, 폭군과 압제자들이 마땅히 두려워할 메시지다. … 이 혁명은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 이 혁명은 세상이 치유되도록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그 아픔을 짊어지는 메시아를 통해, 그 메시아의 백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행위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것은 모험이며 도전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이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서명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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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실제로 예수님이 누구였고 누구인지 이해하는 출발점에 있는 문제로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의 소명, 특히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해방의 희망을 붙잡는다는 뜻이었다. 이제 노예들은 아들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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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같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도, 남과 다르게 자기를 구별하고 싶은 이중적 욕망 속에서 삶은 숨 가쁘다. 연령에 따라 욕망의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무늬만 다를 뿐, 사회 거의 모든 계층 속에 내면화된 욕망의 얼개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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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옆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르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이 기도는 공동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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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에서 ‘하늘’은 주님께서 계실 뿐만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가 있다. 온갖 신령한 복이 하늘에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올라가셨으며, 지금 하늘에 계신다. 즉, 하늘은 영적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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