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김정호
우일문 지음 / 인문서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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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하면 누구나 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문제는 대동여지도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명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인물인데 어찌 그리 그에 대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작가의 말을 보면 실제로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작가는 1934년에 발행한 <조선어독본> 5권에 실린 김정호의 옥사 내용을 보면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김정호는 대동여지도가 적국에 누설될 것을 두려워한 대원군에 의해 옥사를 당한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궁금했다. 정말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옥사를 당했는지. 또한 궁금했다.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소설은 어린 시절의 김정호, 그의 평생의 지기인 최한기, 아련한 사랑의 아픔을 남긴 이화, 그의 스승인 월천, 월천의 소개로 알게 된 정약용,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그에게 고산자라는 호를 넘겨 준 삿갓 노인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삶을 조명한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김정호에 대한 역사적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소설에서 맺은 인연들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한 김정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작성했는지 기존의 지도를 검토하여 편집한 것인지 알 수도 없다고 한다.

 

소설에서 본 김정호는 그렇게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었다(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가정을 돌보지 않은 채 전국을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자신을 기다리는 이화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린 점이나 상대방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이 그랬다.

 

그렇지만 지도를 향한 그의 집념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또한 정하상을 믿는 마음은 또 다른 모습의 김정호이기도 했고.

 

소설이기에, 그것도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그려진 이야기이기에 진짜 김정호와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통해 김정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이 땅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준 김정호라는 인물이 어떤 이였는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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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아마레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6
문형렬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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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로맨스 시리즈 [Roman Collection]의 여섯 번째 작품 <굿바이 아마레>. 앞서 나온 작품들 중 <미인도> 등 네 편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책도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어쩌면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이유는 사랑한다라는 의미의 아마레비통하다, 쓰디쓰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어떤 사랑이든지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가 가슴 깊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이 책에 다가갔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무언가 내 생각과는 달랐다.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상당히 퇴폐적인 장면 묘사에 굉장히 당황했다.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암스테르담 지사장인 강선배와 함께 아마레라는 카페에 간 허인수. 그가 경험하는 카페의 풍경은 상당히 외설적이다. 반면 강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카페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그 속에 존재의 의미에 대한 심오한 생각이 담겨있다. 상반되는 듯한 말과 풍경이지만 묘하게도 이 둘이 결코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레에서의 풍경에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허인수의 기억을 다시 따라갔다. 아마레. 그는 카페 아마레에 가기 전에 이미 이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낸다. 바로 그의 친구였던 한수명 유스토가 아마레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놀라운 것은 아마레의 의미를 알려준 한수명의 사랑이 바로 아마레에 담긴 뜻처럼 비통하고 쓰디쓴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악성골수종양을 앓는 연인 서인애 플로라를 끝없이 사랑했던, 또한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싶어 했던 한수명. 그 둘은 서로의 깊은 사랑만큼 커다란 아픔을 겪는다.

 

이 둘의 사랑이 안타까웠던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바란 기적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들이 바란 기적이 과연 진정한 기적인 걸까? 왜 나는 그들이 서로 사랑한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는 것일까? 나라면 결코 그들처럼 사랑할 수 없이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바라는 기적은 그들의 마지막처럼 결코 그들의 사랑에 별반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인가?

 

모르겠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기에 말이다.

 

아마레, 그리고 굿바이 아마레.

 

머릿속을 뒤흔드는 이 말을 당분간 계속해서 곱씹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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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안의 여자
윤정옥 지음 / 문이당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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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임종 시에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살았던 걸 가장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은 영혼의 본질이 아닌가. 명세진은 그것을 반대로 육신이 자신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바람같이 사라지는 짧은 인생이 아닌가.(p.267)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육체적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할까(내 기억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정신적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할까(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은근히 많다)? 둘 다 중요하다고 말할까(아마 대부분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작가는 애정결핍증을 갖고 있는 여강과 육체적 장애를 앓고 있는 세진, 여강의 남편 민규를 통해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책에서 육체적인 사랑보다 정신적 사랑이 상위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생각에 100%로 공감하지 않는다. 육체적 사랑만을 추구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사랑만을 추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까? 글쎄다. 작가는 영혼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적 사랑을 더 중요시하지만 육체적 사랑이나 정신적 사랑이나 둘 다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순위를 매길 수 없을 듯 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생각은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관계보다는 남자와 여자는 참 다르다는 것,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사람들은 각자가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사랑의 문제도 있지만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문제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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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해부학 - 누구도 말하지 못한 자살 유혹의 역사
포브스 윈슬로 지음, 유지훈 옮김 / 유아이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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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관심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아니, 죽음에 관한 관심이라기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이유는 아마 종교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현세보다는 다가올 다음의 삶이 더욱 크고 귀중했기에.

 

그런 내게 죽음은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모두가 겪어야 하는, 그러면서 나와 같은 신앙인들은 기쁨으로 기대하고 기다리는 과정.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의 형태에 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죽음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형태지만 수많이 이들이 자살을 선택한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죽음이라는,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길로 몰아간 것일까?

 

포브스 윈슬로의 <자살의 해부학>19세기에 출판된 책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자살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저자는 자살의 해부학이라는 제목처럼 자살에 관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자살의 탄생, 자살의 징후, 자살의 본색이라는 세 파트로 나누어 자살의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한다. 그 옛날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심신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철학자들 중에는 자살을 미화하면서 이를 부추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자살의 다양한 이유를 설명한 후 자살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저자는 자살을 질병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자살의 징후를 잘 살피면 이를 예방할 수도 있고 치료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평생 행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은 아니다. 나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삶을 살았다. 때로는 절망감에 빠져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처음에 설명했듯이 내게는 지금 현재의 삶보다 더 크고 중요한 죽음 이후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종교적인 부분은 아니더라도 건강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정신교육,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바로 그 주장 말이다.

 

자살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자살을 예방하자는 저자의 주장만큼은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주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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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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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에 실패하고 친구라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무엇을 할 힘도 없었다. 아니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런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기력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처럼 사업에 실패하거나, 친구에게서 배신을 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서일까?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내 목을 계속해서 조이기 때문일까?

 

<소유냐 존재냐>를 쓴 에리히 프롬의 글을 모아 엮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이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200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만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내용이다.

 

이 책은 첫 페이지의 차례만 읽어도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내 생각을 완전히 뒤흔든 문구를 ‘7장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에서 만났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그래, 어쩌면 이런 용기가 없기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우리는 무기력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홀로 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타인처럼 살아가야만 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야 한다면 아무리 지금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에 다시 실망하며 또 다시 무기력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내 자신의 자아를 강하게 키우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모든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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