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똥찬 로큰롤 세대
로디 도일 지음, 정회성 옮김 / 나무옆의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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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눈길을 끈 이유는 제목에 있다. <기똥찬 로큰롤 세대>. ‘기똥찬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로큰롤 세대라는 단어도 그렇고 딱 우리 세대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요즘 세대도 기똥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은 정말 내가 어렸을 때 쓰던 단어였다. 또한 로큰롤이라는 말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세대를 아울렀던 문화 코드였다. 한 번쯤 밴드를 꿈꾸지 않았던 친구가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 시대의 즐거운 이야기를 생각했는데 이게 뭐지. 처음부터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대장암에 걸린 주인공. ,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던 거야? 물론 죽음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이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나이인데. , 이건 아니지 않나?

 

죽음만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린 젊은 세대다(물론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젊음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매순간 무엇을 바라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갑자기 내 모습을 돌아본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은 누구를 위한 걸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가장 귀중한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죽음을 생각하기 전까지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았던 지미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삶을 이어나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열정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진 그런 모습.

 

이제는 꿈을 꿀 수 없는 나이가 된 걸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죽음처럼 강력한 계기가 없다면 대부분의 중년들은 그저 그렇게 모든 것을 잊은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눈을 돌리자. 자기 자신에게로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꿈을 다시 그리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가족, 친구들을 더욱 진실하게 대할 수 있는 시간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음악과 엮으면서 무겁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소설이다. 중년에 이른, 혹은 꿈을 잃어버린, 혹은 무의미한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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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도덕주의자 - 우리는 왜 도덕적으로 살기를 강요받는가
기타노 다케시 지음, 오경순 옮김 / MBC C&I(MBC프로덕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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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영화감독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전방위 문화예술가. 그가 도덕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밝혔다. 평상시에도 신랄한 독설로 유명한 그이기에 도덕에 관한 그의 생각도 일반인들의 생각과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저자는 시작하는 글에서부터 과감하게 나아간다. 남의 말이나 글 혹은 남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도발하면서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기에 처음부터 이렇게 강하게 나가는 걸까?

 

책을 읽다보니 다양한 도덕적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에 일견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노력이나 성실함만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크게 공감했다. 노력이나 성실함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것만으로 세상의 여파를 넘기에는 때로는 부족함을 절절히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하지만 모든 이들은 노력하면 된다고, 조금만 더 노력해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런 도덕적 조언은 결코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허울 좋은 말일뿐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도덕을 만들어 지킨다는 그의 생각은 그럴듯하게 느껴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시대에 상관없이 고인 물처럼 썩어가는 도덕이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또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관을 세워야한다는 말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엉뚱한 해석도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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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의 음악욕
운노 주자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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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SF물이라고 하면 어느 먼 미래의 이야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SFscience fiction의 약자로 공상과학소설을 모두 일컫는 말인데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책에 실린 단편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이게 SF 소설이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었다.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을 다 읽어갈 쯤에야 SF가 공상과학소설이라는 것을 떠오르면서 나의 무지함과 편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단편집이기에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짧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 만한 작품들이었다. 게다가 SF소설에 미스터리 요소들을 접목하여 읽는 재미를 더욱 높여주었다.

 

과학적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소설 속 이야기들이 결코 저자의 머릿속에서만 살아있는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특히 1000년 후에 다시 깨어난 과학자의 이야기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 속 모든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현실처럼 느껴졌다. 과학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 결국은 과학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면서 말이다.

 

미래의 인류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는 모르겠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인류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이 우리에게 상상 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열쇠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상상의 현실화를 이루는 과학이 그리 멀리 있은 곳에 있음을 보여준 소설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생각하기 싫을 만큼 괴기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도 담겨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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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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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목사님은 예전에 로마서 강해를 읽으면서 처음 만났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 중 하나는 목사님의 강해가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정말 이해하기 쉬웠다는 것이다. 성경 강해라고 하면 상당히 난해한 용어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일반 성도가 읽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완전히 깨진 계기가 바로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들이었다. 목사님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과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접했는데 이전과 달리 책 제목이 너무 도전적이라서 당혹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탕부 하나님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탕자라는 말에서 느끼듯이 탕부라는 말에서도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쾌락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무슨 말씀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서 바로 책을 펼쳐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탕자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었다.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자주 들었던 내용이기에 목사님의 설명이 이러저러할 것이란 예측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설명을 들으면서 탕자의 비유가 가진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은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은 분명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꼭 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탕자의 이야기는 결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 비유는 잃어버린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가슴 깊이 다가온 내용은 충성을 빌미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 내세우는 잘못된 순종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순종.

 

이 책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닫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은혜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 다시 한 번 그 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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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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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테 링크의 전작 <죄의 메아리>를 읽고 그녀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긴박감 넘치는 구성과 탁월한 심리묘사를 읽으며 여타의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까맣게 칠해 다른 아이들과 뚜렷하게 대비시킨 표지 이미지에서 이 소설이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유추해 보았다. 옆의 두 아이와 이 아이는 무엇이 달랐던 걸까? 부모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 표지 이미지만으로는 도저히 무슨 내용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기에 바로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두 건의 살인사건과 베켓농장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60년간의 이야기를 축으로 그려진다.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탁월한 플롯 구성과 심리묘사, 거기에 깊이 묻어둔 상처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묘사들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작품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어서였을까? 그 마음이 어떠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받은 상처는 어떻게 다잡아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린다. 그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물론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지금도 그 아픔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전쟁이 주는 아픔이다. 전쟁을 겪지 못한 나로서는 그 깊은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가끔씩 듣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노바디로 불리던 아이, 그 아이를 다른 아이로 내몰았던 시대적 상황과 인간적 배신, 그로 인한 모두의 불행. 어쩌면 지금 누군가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몸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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