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시의 음악욕
운노 주자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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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SF물이라고 하면 어느 먼 미래의 이야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SFscience fiction의 약자로 공상과학소설을 모두 일컫는 말인데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책에 실린 단편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이게 SF 소설이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었다.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을 다 읽어갈 쯤에야 SF가 공상과학소설이라는 것을 떠오르면서 나의 무지함과 편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단편집이기에 어떤 이야기들은 너무 짧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 만한 작품들이었다. 게다가 SF소설에 미스터리 요소들을 접목하여 읽는 재미를 더욱 높여주었다.

 

과학적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소설 속 이야기들이 결코 저자의 머릿속에서만 살아있는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마 나만의 느낌은 아닐 듯하다. 특히 1000년 후에 다시 깨어난 과학자의 이야기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 속 모든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현실처럼 느껴졌다. 과학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현실로 만드는 것이 결국은 과학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면서 말이다.

 

미래의 인류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는 모르겠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인류에게 희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학이 우리에게 상상 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열쇠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상상의 현실화를 이루는 과학이 그리 멀리 있은 곳에 있음을 보여준 소설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생각하기 싫을 만큼 괴기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도 담겨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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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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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목사님은 예전에 로마서 강해를 읽으면서 처음 만났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 중 하나는 목사님의 강해가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정말 이해하기 쉬웠다는 것이다. 성경 강해라고 하면 상당히 난해한 용어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일반 성도가 읽기에 어렵다는 생각이 완전히 깨진 계기가 바로 팀 켈러 목사님의 저서들이었다. 목사님의 저서들을 읽으면서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과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이 책을 접했는데 이전과 달리 책 제목이 너무 도전적이라서 당혹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탕부 하나님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탕자라는 말에서 느끼듯이 탕부라는 말에서도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쾌락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무슨 말씀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서 바로 책을 펼쳐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탕자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었다.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자주 들었던 내용이기에 목사님의 설명이 이러저러할 것이란 예측을 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설명을 들으면서 탕자의 비유가 가진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은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일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은 분명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꼭 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탕자의 이야기는 결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 비유는 잃어버린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가슴 깊이 다가온 내용은 충성을 빌미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 내세우는 잘못된 순종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순종.

 

이 책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닫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은혜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 다시 한 번 그 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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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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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테 링크의 전작 <죄의 메아리>를 읽고 그녀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긴박감 넘치는 구성과 탁월한 심리묘사를 읽으며 여타의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까맣게 칠해 다른 아이들과 뚜렷하게 대비시킨 표지 이미지에서 이 소설이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유추해 보았다. 옆의 두 아이와 이 아이는 무엇이 달랐던 걸까? 부모가 원하지 않았던 아이?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 표지 이미지만으로는 도저히 무슨 내용이 펼쳐질지 알 수 없었기에 바로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두 건의 살인사건과 베켓농장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60년간의 이야기를 축으로 그려진다.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탁월한 플롯 구성과 심리묘사, 거기에 깊이 묻어둔 상처가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묘사들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작품이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어서였을까? 그 마음이 어떠한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받은 상처는 어떻게 다잡아야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을 뚫어버린다. 그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물론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지금도 그 아픔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전쟁이 주는 아픔이다. 전쟁을 겪지 못한 나로서는 그 깊은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가끔씩 듣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왔다.

 

노바디로 불리던 아이, 그 아이를 다른 아이로 내몰았던 시대적 상황과 인간적 배신, 그로 인한 모두의 불행. 어쩌면 지금 누군가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몸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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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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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은규 작가의 작품들은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소설에서 다루는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남달라서였을까, 무거운 느낌 속에서도 웃으면서 우리의 짐을 덜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번 작품도 그런 그의 성향이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는데 전작들과는 무언가 다르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이야기들은 전작들과는 달리 삶의 무거움이 그래도 전해지면서 침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일곱 편의 작품들 중에서도 <차고 어두운 상자>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작품이다. 납치되어 차고 어두운 상자의 갇힌 주인공은 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그녀를 찾아온 것 그녀를 어두움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기는 일 뿐이다.

 

이 소설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던 이유는 나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었던 그 어둡고 어두웠던 이라는 구렁텅이. 결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다.

 

문제는 그런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더욱 많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가난의 대물림, 빚의 대물림.

 

이런 어두운 세상에는 빛이란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환상 속의 산물인 것일까?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빛을 비출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어두운 곳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는 힘겨워 무너져 내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는 우리를 이끌어줄 희망의 빛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럴 거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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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바이러스
티보어 로데 지음, 박여명 옮김 / 북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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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말 그대로 광풍이었다. 소설이 가진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소설 <다빈치 코드>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영화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뿐 아니라 한 동안 다빈치 코드를 분석한 전문 서적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정도로 대단한 열풍이었다. 그런 광풍을 일으킨 댄 브라운의 뒤를 이은 작가라면 당연히 기대감이 높을 수박에 없다.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소재로 한다. 그것도 모나리자와 함께 한 이야기. 인류사에서 천재라고 손꼽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천재라고 손꼽히는 레오나르도의 이야기이니 이 소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는 예측은 예측이라고 하기에도 뭐하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단순히 재미로만 읽기에는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 강렬하다. 저자는 아름다움이라는 누구나 선으로만 보아온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선으로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선이 아닌 악으로 바라본다고 하면서.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사실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얼굴을 가진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오늘날에 나타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물어본다면 모두가 이를 악이라고 말할 것이다. 신체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렇지만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위한 성형은 결코 악이 아니다. 당연한 본능이니까.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옳고 그름, 혹은 선과 악으로 딱 잘라 구분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의 생각과 비슷한 부분은 라마니 박사가 매들린을 보고 느낀 그 감정이다.

 

소녀의 눈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자존심이었다. 그랬다. 소녀는 이 모든 수치에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p.288)

 

자존심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은 자존감에서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표현되는 상태, 그 상태가 진정한 아름다움의 열매가 맺히는 순간이 아닐까?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이야기 속에 담긴 화두에 깊이 고민한 시간이었다. 아직 그 정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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