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윤후명 소설전집 1
윤후명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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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장소가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일 수도 있고, 가장 힘들었을 때 지내던 곳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며 행복을 느끼던 곳일 수도 있다. 윤후명 작가에게 강릉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장소이다.

 

윤후명 작가의 책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라서 작가의 삶이나 사상에 대해 아는 바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하얀집단 한 편만을 읽었을 뿐이다). 작가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것도 몰랐고, 작가가 소설가로 활동하기 전에 이미 시인으로 등단했던 사실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 생각의 흐름 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윤후명 작가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강릉은 작가의 존재와 철학을 가리키는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윤후명 전집의 첫 권으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렵다. 이 책의 내용은 작가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 그가 소설가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살아온 삶의 여정과 철학이 담겨 있기에 한 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10편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한 편으로 일관된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처음에 읽을 때 호랑이나 처녀 머리 등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적지 않았다. 도대체 작가가 이런 표현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지? 역시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특히 작가를 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곳곳에서 작가의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소설과 시를 넘나들며 독자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간다. 아마 이 작품이 아니었으면 윤후명 작가의 시를 따로 읽을 기회가 없었을지 모르기에 소설 속에서 만난 그의 시가 더욱 반갑고, 더욱 가슴 깊이 다가왔다.

 

책을 읽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를 떠올려본다. 이제는 개발이 되어 옛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그 곳. 그렇지만 여전히 내 머리와 가슴에서 살아 숨 쉬며 나를 키우고 나를 만들어준 그곳의 추억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절, 그 곳, 그 사람들.

 

내게 다시 그 옛날의 추억을 돌려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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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
최항기 지음 / 세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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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줄의 짧은 노랫가락에 무슨 큰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 작가는 다르다.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헤쳐 나간다. 노래로 이어진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 운명의 얽힘 등 온갖 인생의 모습들을 담아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처용가는 학교 다닐 때 배운 이후로 다시 들쳐볼 일도 찾아볼 일도 없었던 내용이다. 간단한 노랫가락인 처용이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궁금해졌다. 과연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할까? 처용이 외계인이라는 조금은 황당무계한 설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 놓을까?

 

버려진 아이로 지상사에서 자란 처용의 인생은 시작부터 쉽지 않지만 그에게는 노래가 있기에 이를 견뎌낼 수 있다. 효병 스님에게서 노래를 배운 처용은 그를 따라 나섰다 인신매매단에 의해 노예로 팔리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를 구한 이는 권력다툼에 신물을 느낀 신라 귀족 위홍이다. 처용과 위홍은 노래라는 매개체를 통해 신분을 뛰어넘는 친구가 되고, 당나라 왕족인 이원과 당나라로 유학 온 최치원도 이들과 합류해 우정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소설 전반에 걸쳐 말하듯이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 노래와 관련된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위로받는 이들을 수없이 보았다. 신라로 돌아온 처용, 김위홍, 최치원 등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경연대회에서 처용이 부른 처용가는 모두의 아픔과 슬픔을 담을 만큼 크고도 큰 그릇이었다.

 

노래는 그렇다.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아픈 이의 마음을 보듬어 다시 삶을 이어나가게도 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도 용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노래의 힘이다.

 

역사적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뒤섞여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 <처용>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비롭고 은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들려주는 노래의 힘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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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지옥 여행기 단테의 여행기
단테 알리기에리 원작, 구스타브 도레 그림, 최승 엮음 / 정민미디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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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그의 이야기는 신비하면서도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가 가볍지 않다. 물론 개신교 신앙에서는 연옥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옥과 천국은 분명히 기독교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펴낸이는 단테의 신곡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소설로 각색하여 우리의 영혼을 이끌어 가는데 그 첫 번째 여정이 바로 지옥이다.

 

지옥이라고 하면 먼저 끝없이 타오르는 화염불, 마귀의 학대를 받으며 온 몸을 혹사당하거나 오물에 머리까지 푹 담고 있는 영혼들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을 묘사하는 첫 장면은 그런 이미지들과는 다르다.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으로 단테가 지옥의 문에 다다랐을 때 지옥문에서 읽은 글귀는 이렇다.

 

비통의 도성 지옥으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거라

[중략]

한 번 지옥에 들어온 너희들의 영혼은 영원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으니 모든 희망을 버려라(p.31)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희망을 품을 수만 있다면 인간은 모든 힘듦과 고통을 견뎌낼 것이다. 하지만 지옥은 그런 희망을 처음부터 꺾어버린다. 결코 지옥의 고통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그러니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얼마나 무서운가? 지옥이라는 곳이. 끝없는 영겁의 시간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지내야 한다니.

 

뒤이어 단테가 둘러본 지옥의 모습보다 지옥문 입구에서 본 이 한 마디가 너무나 무섭다. 문득 단테의 신곡을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중학교 때쯤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문장을 읽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나는 정말로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라도 지옥에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마 단테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반드시 기억하라는 의미로 이 책을 집필했을지도 모른다. 지옥은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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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여신 2016-05-08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옥과 천국은 오직 여기있지요
죽어서 갈수 없는 그곳
 
단테의 연옥 여행기 단테의 여행기
단테 알리기에리 원작, 구스타브 도레 그림, 최승 엮음 / 정민미디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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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바로 연옥이다. 연옥이라는 개념은 개신교 신앙에는 없다. 그렇기에 처음 읽을 때부터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읽은 부분이 연옥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신앙적으로 이런 곳이 없다는 믿음은 확고하지만 단테가 연옥을 묘사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척 궁금했다.

 

연옥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곳이다. 연옥은 연옥 입구, 연옥, 지상 낙원으로 이루어진다. 연옥문 앞에서 천사가 일곱 개의 P자를 이마에 새기면 연옥에 들어가 이들 일곱 개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이마에 새겨진 P를 씻어낸 후 지상 낙원으로 들어간다.

 

일곱 개의 죄는 이렇다. 오만의 죄, 질투의 죄, 분노의 죄, 태만의 죄, 탐욕과 낭비, 인색함의 죄, 음란의 죄. 이들 죄는 예전에 본 영화를 떠오르게 했다. <세븐>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책을 보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이 영화가 바로 단테의 신곡을 토대로 한 영화였다.

 

연옥과 일곱 개의 죄를 회개하고 씻어내는 그 과정을 보니 사실 연옥은 사후의 세계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이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에서 죄를 깨달은 후 회개하며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곳은 다름 아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매 순간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여전히 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연옥에서 이마에 새겨진 일곱 가지 죄의 표식을 레테강에서 하나씩 지워가듯이 우리도 죄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있는 이곳에서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의 순간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천국으로 가는 분명한 여정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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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천국 여행기 단테의 여행기
단테 알리기에리 원작, 구스타브 도레 그림, 최승 엮음 / 정민미디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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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천국에 이르렀다. 단테는 자신을 지옥과 연옥으로 인도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진 후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의 곳곳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단테가 도착한 천국은 모두 10천으로 이루어져있다. 단테가 그린 10천은 중세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서원기도를 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한 이들이 하나님의 용서로 오게 된 제1천 월광천에서부터 아홉 군데 천계가 통일된 곳으로 축복받은 자들의 진정한 보금자리인 제10천 지고천에 이르기까지 천국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단테는 각각의 천국에서 그가 가진 의문점들을 해결하기도 하고,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가 궁금해할만한 부분들을 하나씩 들려준다. 다만 개신교의 교리와는 다른 부분들도 꽤 있었고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부분을 그려낸 곳도 있어서 성경적이면서도 또한 성경적이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공존하기도 한다.

 

천국은 우리 기독교인의 소망이다. 천국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당연히 한 가지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다른 여타의 방법을 나는 배우지 않았다. 단테가 그린 천국이든 혹은 다른 모습의 천국이든 상관없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곳, 바로 그곳이 우리 모두의 천국이니까.

 

단테의 신곡을 소설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에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한 단테의 신곡,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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