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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평점 :
우리들 몸이 더러워진 것은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에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전쟁을 원한 적도 없고 전쟁에 미친 군인들을 위무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건 미친 바람이 지나간 자리일 뿐이에요. 바람은 곧 잠들 거에요. (p.243)
마음이 너무 아픈 건 이들이 말했던 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는 듯한 현실 때문이다. 그녀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미친 바람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채 끝없는 아픔으로 남겨져있다. 어쩌면 이생에서는 바람이 잠드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바람을 일으킨 미친 이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희망을 바라보았다. 열다섯, 열여섯 소녀들이 꿈꾸던 세상은 결코 악몽과 같은 세계가 아니었다. 비록 각자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은 희망을 키워나갔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절망이나 노여움으로 자신의 미래를 일찍 포기할 일은 아니다. (p.51)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꿈을 짓밟는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미친 바람 때문에 말이다. 기녀가 되기 싫었던 은화는 자신의 희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기를 바랐던 영실도 지척에 있는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남들의 눈에 편안한 삶을 영위할 것처럼 보였던 정인도 끝없는 우울증으로 평범한 인생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바라던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이들, 그렇게 자신의 희망과는 다른 삶을 산 그들은 결국 그 꿈을 잃어버렸을까?
길을 모르면서도 가야 한다. 그것이 선문처럼 머리에 남았다.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허덕거리며 가야 하는지. (p.304)
탈출에 성공한 칠복이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처럼 희망이 짓밟힌 이들에게도 나아가야 할 삶이 있었다. 여전히 길을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꿈을 버리지 않는 몽화이니까 말이다.
세 사람이 겪었던 역사의 풍랑은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 그 시대를 함께 겪었던 이들의 아픔이었고, 그 시대를 모르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잊지 못할 삶이다. 결코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던, 아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보듬어야 하는 그런 상처, 역사였다.
점순이 앞에서, 나는 아니라고, 나는 위안부가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겪은 아픔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p.177)
세 명의 친구들이 겪은 역사의 한 단면이 잔잔하게 그려지면서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삶도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들이 얼마나 아픈 나날을 보냈는지, 얼마나 고통 속에서 힘들어 했는지, 얼마나 이 땅의 해방을 기다렸는지를.
그래서 더욱 아프다. 지금의 현실이 너무 아프다. 여전히 불고 있는 미친 바람이 모든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지나쳐가지 않는 그 바람이.
암흑 같은 세월이,
힘들고,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p.380)
그 세월, 그 바람이 언제나 멈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