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름이 없는 자
르네 망조르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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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갖 좋은 것, 특히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일까? 둘 다 틀리지는 않지만 둘 사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소설 <이제는 이름 없는 자>에서는 잘못된 사랑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 지를 그리고 있다. 그것도 자신과 상대방뿐 아니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도 커다란 여파를 미치는 그런 참혹한 결과 말이다.

 

천인공노할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상대방의 생각과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였다면 말이다. 리퍼를 통한 살인사건은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한 범인의 마음이라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안타깝기도 하다. 분명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결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행동이기에 말이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상대방의 생각이 너무나 고귀한 자기희생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결정하기도, 쉽게 실천하기에도 힘든 일인데 그런 고귀한 희생이 처참한 범죄의 계기가 되어버린 상황이라니.

 

소설의 소재 자체는 그렇게 새롭지는 않다. 최면술로 다른 사람을 조정하는 범죄자에 관한 이야기는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 등의 소설에서 이미 접했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재미는 소재에 덧붙인 또 다른 이야기들이다. 특히 죽음을 둘러싼 생각들은 앞으로 내게 다가올 죽음을 생각해보게 하였다. 과연 어떤 죽음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이 소설에서는 사랑의 역설적인 모습도 보았지만 사랑의 힘도 보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감정을 다시 일으켜 세운 그런 사랑.

 

소설적 재미도 상당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예상치 못했던 반전도 기대 이상이었고, 마지막 페이지는 가히 충격(?)이라고 말할만하기도 하다. 읽는 내내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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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메아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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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를 때 꺼리는 소재 중 하나는 아동성범죄에 관한 내용이다. 어린 딸아이가 있다 보니 책을 읽다 흥분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책을 읽은 후의 여파도 만만치 않아서이다. 그렇지 않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런 범죄를 어떻게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아동범죄를 다루고 있다. 물론 아동범죄가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눈은 오로지 이 범죄를 저지른 자가 누군지를 찾아 급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밝혀지는 범인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죄를 짓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에 안타깝기도 했지만 자신의 병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치료하지 않은 그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자신의 병을, 그것도 남들이 들으면 혐오할만한 병을 선뜻 드러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병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죄를 짓기 전에 치료법을 찾아나서야 했다.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치료해야 했다.

 

이런 모습은 버지니아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난 행복한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내면을 흐르는 죄의식이 결국은 그녀 자신을 망쳤다. 자신의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울림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는 버지니아의 문제만은 아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할 수 있다. 죄를 짓고 그 결과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누가 선뜻 그 죄를 고백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저지른 죄는 끝없는 메아리가 되어 평생을 울려퍼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가지. 버지니아와 나탄의 모습에 너무 흥분하지 마시길.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가 수없이 많이 있으니까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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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 - 위대한 군주와 잔혹한 아버지 사이, 탕평의 역설을 말한다
김수지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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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개그콘서트의 간판 코너였던 <아빠와 아들>에서는 뚱뚱한 아빠와 뚱뚱한 아들이 음식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뚱뚱한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뚱뚱한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먹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니까.

 

그런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 아버지도 있다. 스스로 아들을 죽음의 길로 나아가게 한 아버지. 뒤주에 가둔 채 아들이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아버지. 결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아버지. 그렇다. 그는 바로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이다.

 

요즘 극장가를 뒤흔들고 있는 영화 사도를 본 관객들은 과연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도가 정신질환을 앓았기에 영조는 어쩔 수 없이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던 것인지, 아니면 권력의 구렁텅이에 빠진 영조가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인지. 이 책의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사료를 제시하며 영조와 사도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구설수에 휘말린 영조는 평생을 왕위에 오른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그런 노력의 일환이 바로 탕평책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해 자신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인 세자의 교육을 소론에게 맡기기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력한 힘을 갖춘 왕권을 아들에게 넘기고자 하는 보편적인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히 배어나는 조치였다.

 

하지만 권력에 심취한 영조가 자신만이 진정한 권력자라고 생각하며 세자를 결국 하나의 총알받이로 사용하고, 세자의 기반이 되는 소론을 완전히 배제하는 행동을 하면서부터 세자를 향한 영조의 마음이 서서히 변해간다. 또한 권력을 향한 영조의 마음을 꿰뚫은 신하들이 둘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더욱 멀어지기만 한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사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했던 영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들보다도 더 중요했을까? 권력을 쥐고 흔드는 맛에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든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였든, 영조가 정신병자였든 둘 중의 하나는 분명히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갑자기 영화 <사도>가 보고 싶어졌다. 이준익 감독은 어떤 시각에서 이 사건을 들여다보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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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의 기술 -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베른트 브루너 지음, 유영미 옮김 / 현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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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은 적은 참 오랜만이다. 물론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내가 누워서 뒹굴 거리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일반적으로 누워있다는 것은 휴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게으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누워있으면 못마땅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뭐 어떠냐고 외친다. 누워있는 수평적 삶은 게으름의 상징이 아니라고, 눕기는 생각을 가다듬고 숙고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물론 내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내 삶의 다른 시간들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때로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육체적인 피곤함이 사라지면서 모든 일에 의욕이 넘쳐나기도 한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야외에서 누워있을 때는 또 다른 감흥에 빠지기도 한다. 하늘이 높다는, 햇살이 비치는 구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때로는 흐릿해진 날씨조차 내 삶을 감싸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에 빠져든다. 이런 감성적인 순간이 삶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면 그저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을까?

 

또한 눕기는 저자의 말처럼 창조력과 주의 집중을 고양시키는 최상의 전제이다. 아니 창조력은 조금 과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워 있을 때 빠져드는 몽상의 세계는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누워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 중에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고 좋았을까? 이것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누워계시던 그 아랫목에 등을 데고 누웠을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그 순간.

 

이 책에서도 동양적 뿌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지만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를 소개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눕기가 주는 따뜻함과 행복함을 알려주는 최상의 사례가 바로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이니까.

 

아쉽지만 이 글은 앉아서 쓴다. 하지만 바로 가서 누우련다. 내가 쓴 글이 <눕기의 기술>이라는 저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했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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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처럼 생각하라 - 과학적 사고와 수학적 상상력의 비밀
오가와 히토시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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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의 영재 발굴단을 보면 정말 천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이 아이들의 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이 아이들에게서는 평범함을 뛰어넘는 비범한 능력 뿐 아니라 이 아이들을 빛나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열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열정,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열정, 집이든 학교든 가리지 않는 열정.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도 부러웠지만 더욱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런 열정이었다.

 

이 책에서 전하는 피카소의 모습을 한 마디로 줄이면 바로 열정이 아닐까 싶다. 90세 넘는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피카소, 일반인의 상식을 깬 새로운 회화 방식을 연 피카소. 그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열정이 넘치는 피카소이기에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수없이 많은 미완(?)의 작품을 그릴 수 있었고, 남들이 걷지 않는 길에 과감하게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으며, 자신의 개척했던 길을 버리고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고, 분노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이런 삶을 살았기에 피카소의 인생은 늘 창조적이고, 새로웠다. 피카소는 바로 저자가 말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상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열정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 피카소처럼. 분명히 그럴 수 있다. 피카소의 작품, 삶의 방식이나 행동 등에서 저자가 찾아낸 52가지의 방식이 우리를 그런 크리에이티브한 일상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열정이 넘치는 삶. 늘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그럼 삶을 말이다.

 

이제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피카소처럼 생각하자. 창조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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