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를 진단하다 아로파 총서 2
홍성태 지음 / 아로파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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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안전 사회인가? 이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로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제대로 된 날갯짓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세월호 사건이나 경주 마우나오션 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건을 떠올리면 아마 그렇지 못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길을 걷다 갑작스레 땅이 무너져 내리는 싱크홀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사회라면 그 어디에서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안전 사회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대한민국은 위험 사회를 넘어서 불신, 불안, 불행이 넘치는 3불 사회인 사고 사회라고 말하면서, 한국과 같은 사회는 고위험 과학 기술과 저급한 사회 체계가 결합되어 있는 가장 위협적인 위험 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사고 사회인 대한민국의 문제는 독재와 비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 사회의 위험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시절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에 이르는 토건 국가의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저자는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국토를 파괴하고, 수많은 비리가 횡행하는 개발 사업이 대한민국을 점차 비리가 판치는 사고 사회로 몰아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질적 병폐에 물든 한국 사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위험을 올바로 인식하고 관리하는 안전 사회이다. 저자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사회를 생태 복지 국가라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생태 복지 국가는 단순한 복지국가를 넘어서 생태계와 조화를 이룬 복지국가이다. 저자는 토건 국가의 개혁을 통해 생태 복지 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생태 복지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에서의 개혁이 필요하고 정치 개혁의 형태로 생태 정치를 제안한다.

 

저자가 뜻하는 바가 과연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위기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독재와 토건 국가 건설로 인한 비리 등이라고 말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친일 세력 때문은 아닐까 싶다. 정계, 학계, 기업 등 이 땅 곳곳에 깊게 뿌리 내린 친일파를 확실하게 척결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그 실수가 결국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사고 국가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소통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 이 사회가 그래도 안전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치인들이 과거의 잘못된 오류와 비리를 확실하게 끊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저자의 말처럼 대중들이 정치의 진정한 주역이 되는 사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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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1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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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치자면 망나니에 해당하는 사형집행인은 그 말 자체로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우리나라 망나니처럼 사형수의 목을 베는 일을 하기에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사형을 집행하는 이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지만 중세 유럽의 사형집행인에게는 사형 집행 외에도 여러 임무가 주어진다. 때로는 죄수들을 고문하는 일도 감당해야 하고, 때로는 오늘날의 의사처럼 환자나 산모 등을 돌보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생명을 살리는 일, 또한 생명을 죽이는 일 모두를 감당하는 이가 사형집행인이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실제로 사형집행인의 후손인 올리버 푀치의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중세 독일의 한 마을. 그 마을에서 어느 날 어린 소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아이의 어깨뼈 아래에 새겨진 기호를 본 사람들은 마녀의 소행이라며 산파 마르타 슈테흘린을 마녀로 몰아간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과 의사의 아들인 지몬 프론비저는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보기 시작하는데..

 

소설에 담긴 이야기는 마을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그저 편의주의에 빠진 지도층의 모습, 중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빠져 정확한 사실 규명 없이 아무 관계도 없는 누군가를 마녀로 몰아가는 과정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탐욕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 죄 없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인간의 끝없는 어리석음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도 보여준다.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에 더해 중세 시대의 시대상이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아이들을 죽인 범인과 그 뒤에 있는 물주의 뒤를 추적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나간다. 또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퀴슬과 의사의 아들 지몬 프론비저의 신분과 상황을 넘어선 사랑 이야기도 소설에 애틋함을 더해준다. 다만 마르타 슈테흘린이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할 긴박한 상황에 비해 소설의 진행이 조금은 더디게 진행되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렇게 크게 긴장감이 들지는 않았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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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의 살인 - 제22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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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 특히 어린 학생이나 소년이 탐정으로 나오는 소설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그저 소년 탐정 김전일(물론 만화책이지만) 정도 읽어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분위기가 낯설어 페이지를 넘기기가 조금은 힘들었다(학생들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서 그런지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가 오히려 더 어색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들어서면서는 나름 본격 미스터리물의 분위기가 풍겨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몰입할 수 있었다.

 

<체육관의 살인>은 말 그대로 체육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다. 그런데 이 살인사건이 밀실사건으로 형사들이 나서지만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우라조메 덴마. 그는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은둔형 외톨이에 만화라면 물불 안 가리는(이 점에서는 나랑 비슷하다) 구제불능 인간이지만 시험에서 전 과목 만점인 900점을 받기도 하는, 또한 논리적으로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천재이기도 하다.

 

주변의 평을 보니 이 책은 엘러리 퀸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한다. 추리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 엘러리 퀸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범인이 될 수 없는 인물을 역으로 소거해 가는 수사기법을 도입한 작가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엘러리 퀸처럼 이 작품에서도 우라조메 덴마는 결코 범인이 될 수 없는 자들을 추려나가면서 진범을 잡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우산이라는 하나의 증거물로 범인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장르의 작가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진 않지만 중반을 지나며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장르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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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밥 - 제133회 나오키상 수상작
슈카와 미나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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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보았던 외화(오늘날의 미드) 중에서 기억에 남는 시리즈 중의 하나가 바로 환상특급이다. 무섭기도 했지만 너무나 궁금해서 한 번이라도 보지 않으면 보고 싶어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보았던 외화였다. 제목처럼 환상적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그랬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의 즐거움이 남아있는 듯하다.

 

슈카와 미나토의 <꽃밥>은 외화 환상특급을 떠올리게 한다. 책에 실린 단편 6편이 모두 기묘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환생 이야기도, 죽어서 도깨비가 된 아이의 이야기도, 해파리처럼 생긴 미지의 생물 이야기도, 사람을 편안한 죽음으로 이끄는 말에 관한 이야기도, 화장터에서 움직이지 않는 영혼 이야기도, 동생의 혼령 이야기도, 모두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6편의 이야기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전래동화나 옛날이야기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6편 각각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람들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시대를 초월한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자 차별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중략] 나오유키의 눈치를 살피고, 그 자리의 분위기에 휩쓸려 정호를 지켜 주지 못했다(도까비의 밤, p.83)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명 옳지 않은 상황임에도 분위기에 억눌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부끄러웠던. 이런 모습은 <얼음 나비>의 마시히로가 겪는 일이기도 하다. 마사히로는 다른 이들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처럼 지내던 미치오와의 관계를 멀리하지만 가슴 한견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생활한다. 마지막에 용기를 내어 미치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사히로, 우리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워야하지 않을까?

 

6편의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그들처럼 그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뛰어놀던 그 때 그 시절,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 전 이야기지만 한편으론 내 마음 속에 항상 살아 숨 쉬는 너무나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다. 잠시나마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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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목민심서 - 상
황인경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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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과연 몇 페이지나 나올까? 당연히 다산 정약용과 나를 비교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3권을 합쳐 15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든 내 삶을 돌아보며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10페이지도 안 나올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나도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정약용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나는 정약용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를 위한 삶만을 살다보니 그저 내 얘기만 있을 뿐 남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도 아니니 신화 같은 이야기 거리도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제 내 이야기가 아닌 1500페이지에 달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시작부터 정약용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천만호를 위해 솜 트는 기계를 만들어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약용은 책상에 앉아 말로만, 손짓으로만, 머리로만 백성을 돕고자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자신의 품을 팔아 고민하고 연구하여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정약용은 이런 실학사상을 후에 제자들에게 놋쇠를 예로 들면서 같은 재료로 서양에서는 자명종을 만들고 우리나라에서는 놋그릇 밖에 만들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실학을 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설파한다.

 

이는 바로 실학을 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백성을 위하는 학문, 실생활에 필요한 학문을 하지 않는 까닭이니라.”(하권 p.299)

 

실학이 제대로 싹트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진정으로 고민하고 온 힘을 다해야 할 일, 즉 백성을 위하는 일보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는 정약용을 시기, 질투하여 어떻게든지 정약용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일에 몰두하던 이들에게 백성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까? 어디 이뿐이랴? 이전에 당했던 일에 대한 원한을 갚고 후환을 없애고자 권력을 잡았을 때 반대당을 완전히 쓰러뜨리고자 누명을 뒤집어 씌어서라도 눈앞의 적을 갈기갈기 찢고자 하는 복수 심리는 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사라지게 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는지. 이들에게는 백성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안위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를 보며 문득 고 노무현 대통령이 떠올랐다. 뭐라고 꼭 집어서 설명하긴 힘들지만 정조 또한 정약용과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백성을 사랑하고, 이 나라를 새롭게 바꾸고자 했던 그 마음과 애씀이 너무나 비슷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다산의 이야기는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그의 이야기는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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