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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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거리를 한바탕 후에 옷깃을 여미게 !!!

 

학창 시절에 배웠던 국사는 그저 암기 과목일 뿐이었다. 역사적 사건을 총체적으로 있는 안목을 키우는 시간이라기보다는 그저 년도에 사건이 일어났는지, 기억해야 사람은 누구인지, 사람은 어떤 업적이 있는지, 그저 외울 것만 넘쳐흘렀다. 내가 배우는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그렇기에 율곡의 10 양병설을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초반부에서 저자는 율곡의 10 양병설의 진위를 따지며 후손에 의한 역사 왜곡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xx. 도대체 배웠던 거야? 라는 욕지거리라 불쑥 솟아올랐다. 그런데......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읽을수록 울화가 치미는데 도대체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아무리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독립된 주권 국가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었다.

 

이제부터 책을 읽고 한바탕 욕지거리를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선조와 조정의 중신이라는 인물들부터 살펴보자. 왜놈들이 쳐들어와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고 들어오자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와 조정의 중신이라는 인물들의 머릿속에는 명나라로 도망가 곳에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있었다. 나라의 왕이, 그것도 전쟁 중인 상태에서 국가도 백성도 필요 없고 오로지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다른 나라로 들어가 독립국의 지위를 버리겠다고 했으니 어찌 열불이 솟지 않을 있을까? 선조는 자신의 군사도 백성도 믿지 않았다. 오로지 명나라, 명나라 군사에게만 목을 매고 있었다. 조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과 관련해 명에 행한 변명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기대도 이들에게 남아있지 않는 모습, 아니 조선 백성의 모습을 수밖에 없었다.

 

가지 살펴보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지급할 없었단다. 뿐만이 아니다. 장수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못했단다. 아니, 먹을 것도 없고 싸울 무기도 없다면 도대체 전쟁은 어떻게 있단 말인가? 이처럼 어이없는 모습에 어찌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있을까?

 

이렇게 열불이 나는 상황 속에서도 옷깃을 여며야 했던 이유는 조선에 류성룡과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너무나 아는 인물이고 책에서 말하는 주인공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류성룡에 대해 내가 알았던 지식은 이순신을 발탁한 인물이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류성룡이 땅에 없었다면 과연 지금 나는 자주 독립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임진왜란에서 류성룡이 이룩한 업적은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조선을 배제한 이루어진 명과 왜의 강화 협상을 저지한 이도, 나라고 백성이고 모두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치려 선조를 막은 이도,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군량을 마련한 이도, 군제를 개편해 정병을 만들어 나라를 살리려고 했던 이도, 이순신을 발탁해 수군을 담당하게 이도 모두 류성룡이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명에 의존하지 않고 자강,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후손들의 자의식을 깨우고자 했던 <징비록> 집필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었다.

 

책은 자강을 외쳤던 류성룡의 질타를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 들려준다. 스스로 일어나라고, 그리하여 나라를 다시 강하게 일으켜 세우라고. 그것은 단순히 전투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세워야 것이 결코 물리적인 힘만은 아닐 것이니.

 

마지막으로 책을 여든의 노학자 송복 교수님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땅에 이렇게 멋지고 위대한 선조가 있었음을 깨우쳐준 노고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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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팡세 - 기독교를 위한 변증 Echo Book 3
블레즈 파스칼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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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이 유명한 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연약함을 갈대로 표현했다면 생각한다는 표현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한 파스칼. 그의 유작인 팡세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 쓴 924편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원작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924편의 글 중에서 기독교 변증에 초점을 맞춘 342(옮긴이는 364편이라고 썼으나 오타인 듯^^)12개의 주제로 분류한 작품이다.

 

사실 기독교 변증이라고 하면 상당히 어렵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증명해야 하다 보니 너무 광범위하기도 하고 용어 자체도 상당히 난해하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도 쉬운 책은 아니었다. 342편의 글 하나하나를 눈으로 읽고 그냥 이해하기에는 함축적 의미, 중의적 해석이 담긴 문장들이라 가볍게 읽고 책장을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각각의 주제마다 주제와 관련된 QT라는 글을 담아 일반 독자들이 파스칼의 생각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으며, 중간 중간 삽화로 글의 내용을 표현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무엇보다도 12개의 주제를 명쾌하게 설명한 짧은 문장들이 눈에 띈다.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이야기한다. 뒤집어보자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책을 읽다보니 과연 사람들이 철저하게 자신의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하고 반문하게 되었다. 파스칼이 비참함이라고 표현한 내용은 결국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의 자랑에 빠져 천성적으로 사악한 존재.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룰 수 없는 존재. 미래나 구원을 바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또한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가?

 

신앙은 개인적이라 다른 이들의 믿음이 어떤가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 신앙은 또한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달은 후부터 다른 이들의 믿음과 생각을 들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수백 년 전 천재라고 불릴만한 팡세의 신앙적 고백과 변증은 계속해서 곱씹어 보아야 할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내게 신앙과 관련해 또 다른 사고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고마운 책이었다.

 

파스칼의 팡세는 기독교인에게만 유용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분명 인간의 본성에 대한 파스칼의 깨달음을 담은 책이기에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본성에 대해, 우리의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물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을 통해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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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 묶여 있는 삶, 예수로만 풀린다
페리 노블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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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찬양 중에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곡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떠올랐던 곡이다.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정죄함 없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이 찬양을 부르면서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고통의 사슬에서 풀려난 기쁨이 넘치는가? 아니면 여전히 고통과 죄책감 속에 묶여있는가?

 

모태 신앙인 내게 신앙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성령 충만함을 느끼며 모든 일에 열심을 내었고, 10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내게 어느 순간부터 기쁨이 없지? 뭐가 잘못된 걸까?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때에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말 갑작스레 눈물이 솟았다.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이 책을 보니 기쁨이 없는 내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내 자신의 노력과 성과에 의지하고 있었다.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오로지 의무감에 빠져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해놓고 그 목록에 따라 생활하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두려움과 죄책감에 모든 것이 흔들렸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던가? 하나님은 내가 이룬 종교적 성과에 관심이 없으셨다. 그저 자녀이기에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나는 이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내가 예수님의 자녀라는 그 중요한 사실을 말이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로만 외치고 있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더 크게 받아들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나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위해 다윗처럼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건 내가 다윗만큼 위대해서일까? 아니 다윗은 위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탁월한 전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 싸워 이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역시 다윗과 같아야 되지 않을까? 내가 잘나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하며 주춤거려야 하나?

 

이 책은 나에게 기쁨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온전히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였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는 그 날까지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전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슴 벅찬 설렘이 넘치게 하였다. 이 책을 읽고 당신도 또한 그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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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김혜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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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진 작가의 <중앙역> 어둡다. 캐리어 하나를 들고 역사에 나타난 라는 인물의 등장부터 소설은 왠지 모르게 어두운 회색빛이 짙게 깔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전반에 펼쳐져 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가 계속 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앙역에는 오로지 현재만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아마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으리라. 도대체 라는 친구의 과거가 어땠다는 거야?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젊은 나이에 아니라고 하면서도 결국은 노숙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야?하지만 작가는 결코 라는 인물의 과거를 드러내지 않는다. 노숙자라는 삶이 과거와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세상이라는 걸까? 아니면 노숙자라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결코 과거처럼 없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여자의 말처럼 지금 현재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사실 작가의 의도를 아직까지 제대로 이해할 없기에 그의 과거가 더욱 궁금하다.

 

중앙역에는 사랑이 있다.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런데 도대체가 이해할 없는 사랑이다. 배에 복수가 차서 고통스러워하며 항상 술에 절어있는 나이든 여자와 새로운 길을 있는 기회와 젊음이 있는 와의 사랑이 어찌 이루어질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 몸도 아프고 나이도 많은(목발 여자와 비교해 봤을 40 후반 정도인 ) 여자와 건강한 20 초중반의 남자(낙태 수술에 동행한 여자와 비교했을 ) 어떻게 어울릴 있을까? 이건 정말 불가해한 일이다. 결말은 뻔할 뻔자다. 분명 헤어질 거야. 그러면 그게 말이 되는 얘기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쳐다보니 어찌 답답하지 않을 있을까? 오로지 술에 취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여자에게서 벗어난 하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오고 여자가 요양원으로 떠나면서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순간 여자가 다시 역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관계를 보며 중앙역이란 사랑이 있기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장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글쓴이) 너무나 지극히 세상적인 잣대(나이, 육체적 상태) 이들을 봤구나. 모든 것을 잃은 듯이 보이는 이들에게도 사랑이 있고 사랑 앞에 그들은 서로가 그렇게 다르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며 나의 편협한 판단에 미안함을 감출 없었다.

 

중앙역에는 분수가 있다. 신역사를 지으며 점차 광장은 변해간다. 분수가 생기고, 나무를 심고, 돌멩이와 자갈과 통나무가 박힌 길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노숙자들은 점차 곳을 잃어간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차 변해가는 중앙역 광장의 모습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에서 외형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고층 빌딩이나 아파트들이 수없이 세워지지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이 조금씩 삶의 중앙에서 밀려나 결국은 곳을 잃어버리게 되는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앙역> 무거운 주제 가운데 삶을, 우리의 삶을, 사회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책이다. 또한 우리가 버리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떠한지 여러 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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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쟁 생중계 -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 전쟁 생중계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 / 북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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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재미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적극 추천한다.

 

책에 대한 평가를 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에 내가 읽어 중에서 아마 최고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좋아하는 장르 중의 하나가 전쟁에 관한 내용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특히 같은 경우는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같은 전략 게임, 삼국지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와 같은 전쟁 게임 등을 좋아해서 프로 게이머들의 게임을 중계해주는 방송을 자주 보는 편이라 더욱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전작 조선전쟁 생중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아무런 선입견도 없었고, 그렇기에 내게는 새로운 책의 세계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담 형태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책은 제목의 생중계라는 표현 때문이었을까? 정말 TV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전쟁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전체가 생중계 형태를 취한 것은 아니다. 책은 고려사에서 중요한 10개의 전쟁을 추려 먼저 전쟁의 개략적인 도입부를 보여준 전쟁이 일어나게 시대적 상황, 지휘관이나 병력 상황, 전쟁 당사자들의 전략 등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독자가 어느 정도 관련 내용을 파악한 상태가 되었을 때쯤 본격적인 전쟁 장면이 생방송으로 중계된다. 작가들이 중계하는 장면이 실제 중계방송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마치 전쟁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묘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면마다 고증을 거쳐 그려낸 삽화와 이동 경로 등이 어우러지면서 사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중계가 끝나면 전쟁이 가져온 결과와 전쟁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어떠한가? 작가의 말처럼 전쟁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책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밀려오는 적군 앞에서 두려움에 무조건 항복하는 지휘관들이 있었던 반면에 지휘관과 이름 모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어떻게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냈는지를 보여준다. 책에 나온 사례를 보자. 도순검사 탁사정의 경우는 자신이 야습을 제안했으면서도 몰래 도주하는 바람에 요나라와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반면 충주산성의 방호별감 김윤후를 보자. 그가 관노들의 호적 장부를 찢어 불태워버리면서 반드시 공적에 맞게 상을 내리겠다고 외치자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척준경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낱 무뢰배의 삶을 수도 있었던 척준경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며 윤관을 구하기도 한다. 김윤후나 척준경처럼 이름을 남긴 사람이든 혹은 이름 없이 전사한 수많은 땅의 백성이든 나라를 위한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가 이어졌음은 결코 부인할 없는 진실이다.

 

몽골의 일본 원정이나 홍건적 침입 때에 드러난 (충렬왕, 공민왕)이나 지도층의 모습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일본 원정을 위해 백성의 고혈을 빨아 원정 물자, 선박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로지 자신의 이익이나 권력 강화만을 추구하면서 동지도 거리낌 없이 베어버리는 그들의 모습이 결국 고려 백성들의 민심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백성의 마음이 돌아선 고려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백성이 떠나는 순간 모든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전쟁이든 나라의 부국강병이든 결국은 사람(국민)이다. 백성이 함께 했던 전쟁에서는 승리를,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백성이 떠난 나라는 망하였다. 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아니 땅의 모든 위정자들에게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반드시 돌아보라고 외치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라고, 그것이 과거의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삼가 대한민국의 모든 위정자들이 책을 읽고 다시 백성의 마음을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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