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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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제부터인가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즐겨 읽곤 한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용한 부분은 각 책에 대한 해제 부분이 아닌가 싶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역시 현대지성에서 나온 책으로 읽었다. 이 책에는 앞서 말한 해제 부분뿐 아니라 막스 베버를 비판한 카를 피셔에게 보내는 베버의 1-2차 반박 내용도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

 

막스 베버야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저자이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인물로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이다. 경제, 역사, 정치, 법제도, 종교, 철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베버는 이런 지식을 토대로 사회학적 분석에 필요한 이론과 개념을 구축하였고, 이 책도 그런 베버의 지성이 이루어낸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어쩌면 상반된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두 개념을 막스 베버는 어떻게 연결시킨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저자는 자본주의 정신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조금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청교도 윤리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돈을 가장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욕망을 지양하려는 청교도. 이 둘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막스는 자본주의의 근간이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청교도들의 근면성실함에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막스 베버의 주장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돈에 대한 탐욕이 결코 아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고 말하면서 돈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온 세상이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넘실대는 오늘날의 시대에 막스 베버가 주장한 자유주의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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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Zero - 나의 모든 것이 감시 당하고 있다
마크 엘스베르크 지음, 백종유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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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웃으며 읽기 시작한 소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차 무겁게 다가온다. 이런 상황이 진짜 현실인 걸까? 누군가가 나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나의 삶, 나의 생각마저 지배하려든다는 그런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갔다.

 

드론으로 대통령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 습격을 자행한 집단이 제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다. 이들은 감시사회라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각 개인의 정보를 수집해서 이용하는 권력 집단에 거세게 대항한다. 제로 추적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데일리의 기자 신시아는 편집장에게 받은 스마트안경을 딸 비올라에게 무심코 넘겨주는데, 이 스마트안경을 쓴 비올라의 친구 애덤을 죽음으로 이끌고 마는데..

 

아마 신시아의 입장과 내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을 듯 싶다. 스마트 기기에 완전히 문외한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모든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기에 스마트 유저라고 하기도 뭐하다. 그런 입장에서 국가가 혹은 기업이 개인의 정보를 활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물론 페이스북 사태 등으로 정보 유출에 대한 경각심은 있지만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인지. 물론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을 그대로 옮겼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이야기가 마냥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님은 여러 정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감시사회. 생각만으로 끔찍하다.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런데 그런 정도를 넘어 누군가가 알게 모르게 내 생각을 조정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유용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런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족쇄를 채우는 과정이라면? 모두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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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反기업 인문학 - 인문학은 어떻게 자본의 포로가 되었는가?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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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도, 출판업계에서도 인문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할 분야가 바로 인문학이라는 주장은 하도 많이 들어서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진정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아니, 인문학이 분명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인문학이 나름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 인문학이 아니다. 기업이 혹은 정부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기업인문학만이 우리 사회에서 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

 

기업인문학이라니? 낯선 용어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기업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기업인문학이 탄생한 배경, 기업인문학의 경제, 정치, 과학에 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익히 알고 있었던 인문학 강사들의 실태는 차치하더라도 평생교육에 담긴 의미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기업이나 정부가 자기 이익을 위해 내세운 허울일 뿐이라는 것도, 클레멘트 인문학이 주었던 참신함과 따뜻함도 결국은 우리의 눈을 속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사실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기업인문학이 대중의 의식 조작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직원들을 대상으로도 기업 인문학은 의식 조작에 사용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얼마 전에 읽은 <제로>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개인의 정보를 이용해 개인의 의식을 조작하는 기업. 이런 이야기가 결국 소설 속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부의 불평등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반성, 회의, 비판이 핵심을 이루는 정통 인문학이다.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화두를 던지는 그런 인문학 말이다. 기업인문학으로 무뎌진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철저히 깨뜨려줄 그런 인문학, 이제는 그런 인문학의 열풍이 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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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정원의 로봇
데보라 인스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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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탱, 너는 쓸모가 있어. 넌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어. 나한테도, 다른 누구한테도. 너는 네 존재 자체로 훌륭해. [하략]”(p.384)

 

이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들어있지 않나 싶다.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와 그런 누군가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런 삶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을까? 그 누군가가 사람이든 혹은 요즘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반려 동물이든 혹은 또 다른 존재이든.

 

수의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백수로 빈둥거리며 지내는 벤과 변호사로 잘 나가는 에이미. 둘 사이에 놓인 긴장감은 달리 표현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루하루를 삐걱거리며 지내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난 로봇 탱. 하지만 탱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이다.

 

왠지 모르게 탱에게 마음이 쓰이는 벤과 그런 벤을 한심하게 여기면 얼른 탱을 치워버리길 바라는 에이미.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탱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에이미는 결국 벤에게 헤어지자고 하고. 벤은 금이 간 탱의 실린더를 고치기 위해 탱을 만든 사람을 찾아 나선다.

 

탱을 만든 이를 찾아 나선 벤의 여행은 너무 무모해보이기도 한다. 그를 찾을 만한 단서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찾아 나선 벤은 왠지 모르게 희망에 차 있다. 그런 희망에 더해 벤과 탱은 점점 더 서로를 위로하고 아껴주는 관계로 나아간다.

 

로봇과 인간의 감정 교류라는 어쩌면 누군가는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겨버릴 이야기지만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따뜻함에는 단순히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존재하는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정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사람은 결국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랑으로 살아가니까.

 

탱은 그런 존재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알게 해주는 그런 존재. 벤도 역시 그런 존재이다. 부족한 무언가를 늘 채워주는 그런 존재.

 

아픔이 많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희망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벤과 탱처럼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이들이 있다면 더욱 아름답고 따뜻한 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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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
후카마치 아키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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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소설을 쓴 작가 후카마치 아키오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제목을 지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목마름에 어쩔 줄 몰라 했던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그렇다.

 

목마름의 이유, 제목처럼 끝없는 갈증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사라진 딸을 찾아 나선 후지시마 아키히로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설을 읽으면서 드러나는 그의 비현실적인 모습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후지시마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끝없는 갈증에 사로잡힌 이유는. 어쩌면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직접 드러나지 않은 가나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리디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 그 아픔에 더해진 오가타라는 친구에게 벌어진 또 다른 사건. 그녀가 끝없는 고통과 분노에 빠져든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에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수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도를 넘어선 그녀의 복수에 안타까움이 넘쳐흘러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만도 아닌 듯하다. 가나코의 복수에 제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 중에서도 소설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세오카에 대한 연민이 너무 커서 점점 더 큰 목마름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닐까? 세오카는 그저 가나코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가 마주한 현실은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었으니까.

 

어쩜 이렇게 이 소설에는 독자의 마음에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들만 있는 걸까?

 

누군가의 잘못이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면서 점점 더 큰 아픔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할 말을 잊게 된다. 그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가슴 한 쪽에 원죄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 말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끝없이 탓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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