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OUT 일본근대백년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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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작년에 동 제목 시리즈로 유럽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책을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은 유럽을 떠나 일본에 주목했다. 그것도 일본 근대사에! 


한일관계사를 전공하기도 했고, 나름 관심도 많아서 관련 책도 많이 읽었던 나다. 그러다보니 일본근대사가 그 어떤 세계사보다,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고 있다. 또한 중요성과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일본근대사 책을 읽고 리뷰도 올리고 그랬다. 내 블로그를 오는 이들이라도 일본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책을 쓴 저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의 저자는 일본 근대사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왜? 일본근대사는 보는 사람 시각에 따라, 우리나라 근대사를 왜곡하는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이 왜곡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끔, 최대한 사실을 반영하여 ‘읽기 쉽게’ 서술하였다. 이 ‘읽기 쉽게’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일본 근대사는 대체로 내용이 무겁다. 그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하는 과정이라고 하기엔, 그 안에서 수시로 ‘정한론’이 나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본 근대화 영웅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당시 악랄한 가해자 일 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본능적으로 이 내용들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읽기 쉽게’가 중요하다. 내용은 무거울지언정, 책 속의 글은 역사책 형식이 아닌, 인문학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되어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 선진국을 견학하고 온 그들이 유신 상황에서 지금은 내치에 전념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편 것이 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정벌 불발로 실각 후 실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하에 1874년 대만을 정벌하고, 1875년 운요호로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한론의 서막을 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침략의 전초 단계이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것과 같은 전면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묵은 정한론이 12년 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아시아를 벗어나자는, 더 확대된 탈아론으로 진화되어 살아난 것입니다. p 027




일본 근대화의 분수령이었던 ‘메이지 유신’. 이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건 다름아닌 사무라이였다. 쉽게 말해서 문신이 아닌 무신들이 근대화 혁명을 추진했고, 심지어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계급에 따른 거주지 제한과 ‘독서’에 답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본인들이 지켜야할 주인(번주)가 있는 도시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는 전국시대와 달리 전쟁이 사라졌기에, 사실상 그들이 칼을 쓸 일은 없었다. 여가 시간이 많아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독서였다.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도시에 살수 밖에 없는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건 바로 도시로 몰려드는 각종 책이나 신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면 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주자학을 배우거나, 이미 그 수준이 꽤 높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그들은 격변하는 세계 정세를 몸소 느꼈다. 특히 수시로 해안가에 나타나는 서양 함선은 사무라이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자 공포였다. 서양 함선으로 인해 그들은 일본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서구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서양 함선의 출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하여 막부는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한 사절단을 조성하여, 서양으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생들은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불렸다. 후술하겠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간 핵심인물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호걸이자 대게 조슈번 출신이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일본 중앙 권력이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보내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했는지를. 동시대 조선은 이른바 세도정치 시대였다. 지배층인 왕실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지들끼리 권력 나눠먹고, 백성들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삼정의 문란’이 바로 이 때다. 양반들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갔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양반네들은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며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 민란이 많이 발생한 이유다.



일본이 근대화 혁명인 메이지 유신을 성공했을때 조선은 어땠을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비주류 지역인 시코쿠의 도사번 출신으로 그의 고향은 오늘날 고치현에 해당됩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에도 유학 중 앞바다에 떠있던 미국의 흑선 함대를 보게 됩니다. 그의 흑선 목격은 일본이 구미 선진국과 같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막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 사건으로 그때부터 그는 왕정복고를 위한 대정봉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p 046



메이지 유신 후 승자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삿초동맹의 멤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이 대거 출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최후의 승자가 가려집니다. 이제 그들은 대륙을 탐하고 눈을 돌려 바다로까지 뻗어나갑니다. p 054




조슈번은 현재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이 어디인가. 일본 중앙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혼슈 끝에 있는 지역이다. 거리로 치면 중앙 권력인 에도나, 과거 일본 정통 권력지였던 교토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다. 중앙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어떻게 혁명의 불씨가 타올랐을까? 그 이유는 기백년간 이어진 이 지역의 반골 기질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1614년에 발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데야스의 일전 오사카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알듯 승자는 도쿠가와 이데야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도요토미 지지 가문은 이 때 거의 죽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모리 가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의 영지와 녹봉을 거의 몰수하다시피 하고, 조슈번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조슈번은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채, 중앙권력에 이를 갈며 오랜 기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막부를 타도한 ‘대정봉환’,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다.


그렇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수많은 유신 호걸을 배출한 조슈번(야마구치현).  그리고 여전히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일본 총리다.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는 21%로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 조슈번 유신 호걸부터, 현재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들의 공통점은 비단 지역구 뿐만이 아니다. 일본을 벗어나 다른 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 그 야욕마저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이어졌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은 조슈번에 있는 ‘쇼카손주쿠’라는 아주 조그만 사숙에서 공부를 했다. 그들을 가르친 사람은 요시다 쇼인. ‘정한론’을 처음 알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콕집어 이야기한게 아니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위해선 조선이 그 시작점이었을 뿐, 조선을 넘어 만주, 훗카이도, 캄차카 반도, 대만,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 한마디로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한 사람이다. 하지만 당대 일본 권력자들은 요시다 쇼인의 이런 주장을 허무맹랑하다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쇼인은 권력에 가깝지 았았을 뿐더러, 이른나이에 요절했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스승의 구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서구 문물을 배우고, 대정봉환에 이어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고, 내각을 점령했다. 내치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그들은 스승의 해외팽창 구상을 하나씩 착수해나갔다. 조선침략, 만주사변은 폐기되었던 요시다 쇼인의 ‘대동아 공영권’ 부활의 서막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은 ‘대동아 공영권’이 완벽했다는, 그들의 축포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들의 축포는 결과적으로 원자폭탄으로 되돌아왔지만. 



TMI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메이지 유신의 아이러니 하나.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이난 전쟁 같은 사유로 대게 서로 맞서며 20세기 전에 요절했다. 반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일왕에게 권력을 넘긴 뒤 무려 공작 작위를 받고(!) 천수를 누리며 76세에 죽었다.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이들과는 달리, 구시대를 대표하는 마지막 쇼군은 매우 안온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TMI 둘. 일본 근대화 개혁의 선봉장은 단연 사카모토 료마다. 비록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가 대정봉환에 앞장서고, 일본의 근대화 불씨를 점화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근대화는 조금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사카모토 료마는 동료들과 ‘해원대’를 설립해 운영했다. ‘해원대’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오늘날 일본 해군의 기원이며, 일종의 군산복합체 성격을 띈 단체였다. 료마가 자객에게 죽음을 맞이한 뒤, 해원대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의 동료 이와사키 야타로가 해산된 해원대를 합쳐, 다시 기업을 세웠다. 그 기업이 바로 미쓰비시 그룹이다. 메이저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던 미쓰비시(우리에겐 강제동원 가해자이자 전범기업이다). 미쓰비시 창업은 사카모토 료마가 남긴 유산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딱 두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민간인만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사실 원폭으로 많은 사상자가 집중되어 피해가 커 보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체 피해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공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본토 상륙 공격을 당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패배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침략한 국가들은 그들이 영토의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만신창이를 만들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으니까요. p 095


도쿄 전범재판은 저지른 범죄와 흉포함에 비해 턱없이 약한 처벌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재판에 조선이든 대한제국이든 코리아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학국의 눈엔 우리가 전쟁 훨씬 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화가 완료된 일본과 한 덩어리인 국가로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피해자로 분류하면 연합국 중 그때까지도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영국 같은 나라들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 모른척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p 11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 회의에서 독도는 조약의 5차 수정 문서까지는 우리나라 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떤 작자가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 고문을 맡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6차 수정 문서엔 독도가 일본 땅으로 기록되었는데 영국과 뉴질랜드가 이견을 제시하자 그 다음 차 수정 문서엔 아예 독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최종 조약 문서에도 독도는 빠졌습니다. p 123



겉으로 보면 원자폭탄 엔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일본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실질적으로 일본 본토를 향한 집중공격은 없었고, 오히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리나라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동남아시아 여러나라가 그랬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원자폭탄’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인들이 피해자라는 대대적인 쇼를 하고 있다. 매년 8월 15일만 되면 온갖 방송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쇼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연코 미국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미국에 의해 망했는데, 미국 덕분에 쇼를 한다니. 



일제 패망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와 통치를 하고, 일본에도 들어가 통치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일본을 ‘아시아 민주주의 선봉장’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 재건을 이끌었다. 반면에 일제로 인해 유린된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했던 그대로 통치했다. 쌀 공출이 그러했고, 친일파를 재등용이 그러했다. 살기 어려운 국민들이 뭐라 할라고 치면 ‘빨갱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 4.3이다. 그러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며 벌어진 동족간의 전쟁이었지만, 실상은 소련 공산주의를 등에 업은 북한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연합군 뒤에 숨은 남한의 전쟁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알듯 휴전이다. 



전쟁 당사자들에게만 중요할 거라 생각한 6.25전쟁,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본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왜? 미국은 전쟁물자를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가져왔다. 우리에겐 아픔을 준 6.25전쟁이, 일본에서는 경제 부흥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 외교에 있어서 대일외교는 언제나 중요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향해 야욕을 드러냈고, 그 야욕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는 두 번이나 뼈아픈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야욕의 성격은 변했어도, 그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일본이 왜 그렇게 야욕을 드러내는지, 우리나라는 먼 과거, 가까운 과거에 참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본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녹록치 않다. 일본? 미국? 외치는 커녕 내치도 안되고 있다. 정말 놀랍게도 유사 민주주의의 대명사인 일본보다 못한,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어버렸다. 헌법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 뭐 진짜 뭐라고 해야할지.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을 읽을 때만해도, 우리나라, 일본과 미국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야. 뭐라 할말이 없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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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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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출판계, 아니 우리나라를 들썩이는 뉴스 속보가 떴다. 국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이야기. 그 작가는 불과 몇 년전에 부커상을 타며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한강.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증언 문학 『소년이 온다』를 집필했던 작가였다. 



문학과는 거리감을 느끼는 나지만, 간혹 읽어볼 때가 있다. 예컨데 『소년이 온다』 같은 증언문학을. 그렇다. 나는 국내외 역사적인 사건을 말하는 증언 문학은 가리지 않고 읽는 편이다. 특히 우리 현대사 비극을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이라면 더더욱. 물론 역사적인 비극에 대한 회고록을 읽으며, 사건에 진실을 알아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회고록보다 ‘소설’ 형식을 빌렸을 때, 그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도 그렇다. 특히 이번 노벨문학상으로 인해 그 파급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고, 한동안 더 커질 것이다. 여기서 내가 바라는 건, 『소년이 온다』가 증언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국가가 자행한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그 날들을 왜곡하는 이들이 이제는 멈추고, 진실과 마주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바람이다.



개인적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심이 많기에 사적지 답사도 다니고, 회고록도 많이 읽었다. 덕분에 5.18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 다만 워낙에 비극적인 사건이다보니, 분노하며 슬퍼하는 감정이 너무 격하게 올라와서 이를 자제하고자 많이 노력했다. 분노하고 슬퍼하다보면, 감정 자체에 빠져들어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지고 말테니까. 그래서 감정을 배제하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문제가 생겼다. 5.18 진실을 마주하며 누가, 어떻게, 왜 민주화를 열망하던 국민들을 학살했는지를 따져나가다보니, 정말 슬퍼해야하는 부분 마저도 슬퍼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 아까운 목숨들이 국가가 자행한 학살에 덧없이 죽어나갔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그들의 죽음으로 쌓아올린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가 꼭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잠시나마 망각했다.



그래서 다시 한강 작가가 쓴 이 소설책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들이 흘린 피에 같이 아파하고, 우리 대신 죽은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 015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자,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p 032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p 117



다섯명의 어린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앉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김진수의 등을 밝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 놓은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러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 133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p 206



사실 고민했습니다. 나는 할 말도 없는데 만나면 뭐하나. 그러다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니까. 그럼요, 어머니가 계셨다면 망설이지 않고 만났을 겁니다. 놔주지도 않고 끝없이 동호 이야기를 했겠죠. 삼십년 동안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p 211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p 213




혹시나 아직까지도 5.18을 모르거나, 잘못된 내용을 알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몇 자 적어본다.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박정희는 죽고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그렇게 최고 권력이 무너지자, 이 때를 기회로 삼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이다.


10.26 사태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한다. 전두환은 권력욕을 들어내며 하극상을 일으켰다. 1979년 12월 12일, 일명 ‘생일집 잔치’. 전두환은 하나회 출신 장교들(신군부)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고, 권력을 장악했으니 12.12사태의 시작이다.​


1980년 5월부터는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거세졌다.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등 전국에서 대학교 총 학생회가 연합했다. 그러자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부대를 전국 대학가에 투입한다. 결국 대학생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며, 시위를 중단한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주어, 민주화가 역행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신군부 세력은 수십명의 학생대표와 수백명의 민주인사들을 강제연행했다.


하지만 전남대 학생들은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남대 학생들 역시 민주화가 역행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들까지 호응하며 시위에 합세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광주에 7공수여단 33대대와 55대대를 투입한다. 이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 후방지역에 깊숙히 침투하여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로, 육군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부대다. 전두환은 이런 특수부대를 국민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시킨다.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남대 교문앞을 막으며,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렸으니 귀가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끊임없이 모였다. 300명 정도로 불어나자 학생들은 자연스레 노래와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다. 바로 그 때, 공수부대가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무기하나 없이 노래와 구호를 외치던 학생들을 상대로 진압봉을 가차없이 휘두르며 머리를 갈겼다. 그렇게 1980년 5월, 약 10일간 광주는 핏빛으로 물들었다. 




광주에서 자행된, 신군부 산하 공수부대 학살극은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모두가 침묵을 종용당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었는지는, 위 『소년이 온다』에서 일부 발췌한 위 내용으로 대체한다. 




문득 내가 아직은 사회초년생이었을 시절, 외가친지들을 만나고자 광주에 내려갔던 그 날이 떠올랐다. 당시 엄마와 함께 외삼촌을 따라 금남로, 충장로 일대를 구경했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좋아했던 나였다. 금남로, 충장로 일대가 1980년 5월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경하는 내내 엄마와 외삼촌은 1980년 5월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외가식구들은 영광, 광주 등지에 살고 있었기에, 분명 몸소 겪였을 사건일텐데도 말이다.



불행중 다행인지 내가 알고 있는 한, 외가 식구 중 당시 정권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이유는,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피해를 받았거나, 혹은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날의 일을 묻지 않았고, 지금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5.18 민주화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광주에 갈 때마다 5.18 사적지 답사를 했다는 사실을 외가 식구들에게 넌지시 알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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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보니 책육아에 진심이다. 정말 수시로 그림책을 읽어준다. 다행히 아이가 그림책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하루에도 대여섯권 이상은 읽는 편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아이에게 어떤 그림책을 읽어주느냐! 이다. 엄마들이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아이가 자라는데 있어서, 삶의 첫 지침이 되는게 바로 그림책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하면, 그냥 아무 그림책이나 사서 읽어주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난 그림책을 사는데 있어서 많은 고민을 한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막연하게 정말 그림만 그려진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전래동화 부터 시작해서 인성교육, 생태/자연/환경, 공공예절, 미술 등 장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삶의 첫 지침서가 되는 책육아의 기본 중 기본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 장르만 치중하지 말고, 골고루 읽어주는 것이 제일 좋다. 전래동화 한 권, 공공예절 한 권, 생태환경 한 권 이런식으로 말이다. 


이제 본격 『초등공부가 쉬워지는 그림책 수업』 리뷰 시작!!!


이 책은 부모가 책육아에 있어서, 자녀에게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줘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예컨데, 라떼시절을 같이 살았던 사람이라면 기억날 것이다. 학교 교과서 공부에 도움을 주던 ‘전과’라는 책을! 그렇다. 이 책 『초등공부가 쉬워지는 그림책 수업』 은 그림책 전과다. ‘그림책사랑교사모임’ 들이 엄선한 그림책들을 소개하고, 해당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주면 되는지 알려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그림책 읽기 방법은 총 3단계다. 


첫번째, ‘함께 생각해요’ 제목과 표지를 보고 기본적인 내용을 짐작하며 본문을 읽어본다.


두번째, ‘내용을 확인해요’ 어휘력 심화과정이다. 새로운 어휘를 확인하고, 이 어휘가 어떠한 상황에서 쓰이는지를 생각해본다.


세번째, ‘사고력을 높여요’ 사고력 심화과정이다. 그림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가 기본이다. 아이의 이해력을 바탕으로, 엄마는 사고력이 높일만한 질문을 하거나, 아이와 토론도 하고, 아이가 책을 읽고 난 뒤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예컨데 책속에서 생각하기, 나와 내 주변으로 생각넓히기, 생각 나누기 등이 있다.



▶ 함께 생각해요!

우리는 부모님, 친구들과 스마트폰을 통해 연락하고 다양한 앱을 활용해 공부와 게임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생활을 스마트폰에 의존하면 어떻게 될까요? 식당에 가면 여러 가족이 대화하는 댓니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만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것을 건강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스마트폰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p 014


아파트와 연립 주택 등 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공동 주택에서는 위, 아래층, 옆집으로 소음이 잘 전달되기 때문에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은이와 은우가 용기 내 사과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타낸 것처럼, 이웃 간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표현하고 나눌 수록 커집니다. 공동 주택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p 038


독도는 어떤 곳일까요? 우리는 왜 독도와 독도의 바다,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보호해야 할까요?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우리의 땅입니다.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자연환경이 뛰어나 함께 노력해 보존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독도와 독도 바닷속 생물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p 116



내 아이가 아직 어린이집을 갓 벗어난 유아라면 ‘함께 생각해요’ 정도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만약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입학 구간에 있는 아이들이라면, ‘함께 생각해요’ 에 더해서 ‘내용을 확인해요’ 까지 진행하자. 위에서도 말했듯 ‘내용을 확인해요’는 어휘력 심화과정이다. 어휘력은 문해력과 직결되기에 아주 중요하다. 새로 나온 단어들을 확인해보고, 그 단어들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를 이야기해보며 아이들의 어휘력을 높여준다. 


‘사고력을 높여요’ 부분은 말그대로 사고력 심화과정이다. 이 구간은 일단 그림책에 대한 ‘이해력’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아이가 그림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림책에 대한 감상과, 그림책 속 인물들이 전혀 다른 행동을 취했다면 어땠을지, 만약 내가 그림책 속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 지 등 더 폭넓은 생각을 요구한다.


우리 뿡뿡이는 아직까지는 ‘함께 생각해요’ 정도에서 머무를 시기다. 하지만 앞으로 뿡뿡이의 어휘력과 사고력 향상을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할 시기가 올테니, 나부터 이 책을 읽으며 ‘그림책 육아’를 체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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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왕조실록 살림지식총서 511
이희진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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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있어서 유사역사학자가 제일 많이 분포되어 있는 구간은 단언컨데 고조선 ~ 삼한시대가 아닐까 싶다. 제일 큰 이유는 관련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는 데 있다. 그나마 있는 기록이라고는 중국 역사서에 실려있는 몇 줄이 고작이다. 다만 중국 역사서에 실린 내용은 자국(중국) 우위 관점에서 쓰여져 있으며, 같은 단락에서도 앞뒤가 다른 모순적인 내용들도 왕왕 나온다. 여기서 문제는 이를 교차검증할 또 다른 역사서가 없다는 점이다. 국내 역사서에도 고조선 ~ 삼한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최소 1천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보니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단, ‘단군신화’ 같은 신화의 관점으로 쓰여진 기록이 고작이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 역사책 『고조선왕조실록』은 앞서 말한 수많은 문제점을 인지한다. 그래서 고조선 시대구분과 자손들 등 현재 여러 학설이 제기된 주장을 소개하고, 왜 이런 이런 시비들이 생겨났는지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준다. 또한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가 확인된 부여, 동예, 옥저 등 고대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



▶ 고조선

고조선을 세운 시조가 단군이라는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이른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까지 많은 기록이 확인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신화’로 기술되었으므로, 여기서 역사적 사실을 유출하는 건 후대 사람들의 몫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신화로써 등장한다.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이 없으며, 환웅 세력이 내려왔다는 점을 미루어볼때 고조선을 세운 집단은 외지에서 이동해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웅녀와 호랑이 이야기로 미루어볼때, 이 땅의 원래 주인은 ‘곰 토템’을 믿는 집단과 ‘호랑이 토템’을 믿는 집단이 공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은 외지에서 온 ‘하늘’을 믿는 환웅 집단과 ‘곰 토템’ 집단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라 할 수 있다. ‘호랑이 토템’ 집단은 단군신화에 근거하여, 권력에서 배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과 곰을 믿는 두 집단이 융합하여 세운 고조선. 고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 우리는 국사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단군’은 신을 모시는 사람, ‘왕검’은 통치자, 고로 고조선은 제정일치 된 나라.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단군 왕검’은 건국 시조의 이름이 아닌, 지배자를 뜻하는 명칭이다. 예컨대 1대 단군, 2대 단군 … 이런 식이다. 


주변 세력과 엮여 국가의 위상을 갖추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첫 기록은 『전국책』에 나온다. 기원전 4세기 중반무렵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나라와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는 틈을 타 “고조선도 이웃 나라 연과 비슷한 시기에 왕을 칭했다”는 것이다. 또 얼마 후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중국 쪽 기록에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당시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였음을 암시한다. p 035


기원전 222년 진이 연을 멸망시켰을 때, 고조선의 부왕은 진에 복속할 것을 청했다. 부왕의 뒤를 이어 준왕이 즉위할 즈음, 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피신해왔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통일한 전한은 연과 진이 사용했던 장성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과 요새를 수리하여 고조선과 경계를 패수로 재조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p 036






▶ 기자조선

기자조선은 고조선을 세운 단군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상나라)에서 건너온 유민이(기자 세력) 고조선을 찬탈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현재 우리 학계에선 입증할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기 때문에, 존재자체를 부정한다(연장선상에서 ‘기자동래설’도 부정). 무엇보다 진나라 이전 사료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지배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다 한나라 이후 갑자기 기자가 조선으로 갔고, 조선사람들을 교화시켰다는 내용들이 살을 더해가며 구전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여러 나라가 들어섰지만, 기자조선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주자학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조선 건국 후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신봉함에 따라 기자조선에 대한 비중이 급격하게 커졌다. 조선 양반들은 고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며, 기자조선에 정통성을 실어주었다. 



▶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은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 관직을 받았는다. 1년 뒤 위만은 준왕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하지만 위만이 정말 연나라 출신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만이 망명할 당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만은 연나라가 아닌, 조선출신이라는 학설도 제시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은 남쪽의 진국(辰)으로 피신해서 한왕(韓)이라 칭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준왕 및 그 후손들이 끊어진 뒤에도 한왕(韓)에게 제사를 지내고, 한(韓)을 이어가고자 했다.


위만은 전한 혜제가 즉위했을 무렵 정치적 타협을 이루었다. 외신이 되어 변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아주는 동시에 오랑캐 수장들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위만 정권의 실제 행보는 달랐다. 한과 타협을 통해 키운 힘을 바탕으로 주변 세력을 흡수해나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번, 임둔, 옥저, 동예 같은 곳이 위만 정권에 복속되었다. p 040



이후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128년 예맥이 우거왕을 배신하고 요동군에 투항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고조선이 전한에 침공에 맞서다가, 결국엔 위만조선 멸망까지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기원전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왕검성을 함락시킨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때 설치된 이른바 한사군은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 고대국가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했다. p 050


고조선 사회상은 전해지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에는 ‘8조법금’이 있었다고 한다. 『한서』에 8조 중 3조 내용이 전해진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의 신체를 상한자는 곡물로 보상하고, 도둑질 한 자는 그 집의 노예살이를 하거나, 50만전을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화폐’와 ‘노비’가 있음으로 모아, 고조선은 사유재산 및 최소 귀족과 노예 계급이 있는 사회였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와 전쟁 시 한나라가 고전했던 것으로 보다 고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알 수 있다. 




▶ 삼한

고대 국가인 마한, 진한, 변한으로 알려진 ‘삼한(三韓)’, 하지만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여 삼국통일을 ‘삼한일통’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한(韓)’은 고려와 조선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며, 훗날 대한제국, 대한민국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의 한도 이 ‘한(韓)’이다. 이토록 중요한 한(韓). 그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1. 한(韓)씨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에서 시작되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후 남쪽으로 가 ‘한왕’을 자칭했다는 위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2. ‘크다, 높다’라는 뜻을 가진 알타이어 ‘한(khan, han)’: 신라의 ‘거서간’과 비슷한 맥락이다

3. 간(馯)이라는 종족 이름

4. 그 외 


저자는 1번, 고조선 준왕에게서 ‘한(韓)’의 기원을 찾았다. 준왕이 남쪽 진국으로 향한 뒤 한왕을 자칭한 점, 준왕의 자손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한(韓) 지역’ 사람들이 준왕에게 계속 제사를 지낸 점, 고조선 멸망 후 삼한이 그 유산을 잇고자 한 점 등이 그 근거다. 그런데 한(韓)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기원은 조금 다르다. 진한(辰韓)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중국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에서 망명온 유민들의 후손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한을 辰韓이 아닌, 秦漢으로 쓰기도 했다. 


약간 삼천포긴 한데, 일본 역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207년에 진나라(秦) 유민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진나라(秦) 유민들 후손이 기원후 3세기 즈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도래인 ‘하타 씨’로 살아간다.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도래인 ‘하타 씨’ 기록을 이 책에서 보게 될 줄이야!



백제가 여러 나라 중 하나라는 구절 또한 마찬가지다. 『후한서』와 『삼국지』가 묘사한 3세기 중반까지도 백제가 주변 세력을 통합한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또 이러한 문제는 고조선과 삼한의 연결 문제와 관련된다. 뿐만 아니라 삼한의 발전 단계에 대한 시비로도 이어진다. 준왕의 설화에 사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인정하면 ‘삼한’ 내지 ‘진국’의 시작을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진국’이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수준의 체제를 갖추었느냐는 문제까지 걸린다. p 067


이 시비는 단순히 삼한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백제, 신라 같은 고대국가의 시작과 발전 단계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일부의 주장대로 『후한서』와 『삼국지』의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나 신라라는 고대국가가 들어설 틈이 없다. 즉 백제와 신라의 초기 역사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삼국사기』 내용을 믿는다면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의 역사는 대부분 기원전의 상황이고, 예수가 탄생했을 즈음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나라들이 세워졌다고 봐야 한다. 즉 중국 정사를 믿느냐 『삼국사기』를 믿느냐에 따라 삼한과 그 뒤를 이은 한국계 고대국가의 발전 단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p 069


일반적으로 삼한이 기원전 2세기 정도에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그보다 훨씬 늦추어 보는 학설도 있다. 이렇게 학설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하나다. 삼한 역사 기록 역시 많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도 대부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존하며 발생한 현상이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도 존재하나, 이 세 역사서는 전부 자국우월주의(중국)에서 편찬된 사서이기에, 한반도에 있는 나라들은 대체로 발전하지 못한, 미개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삼한에서는 매년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10월 추수를 끝내고 나서도 같은 행사를 치렀다. 그래서 한(韓) 사람들의 풍속이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뜯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변한, 진한에 비파와 비슷한 현악기가 있었고, 이것이 훗날 가야금으로 발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 국읍마다 하늘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을 ‘천군’이라고 불렀따. 천군이 지배하는 곳으로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기는” ‘소도’가 있었다.p 072



중국 역사서에서 삼한의 정치 발전 상황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던 것 처럼 묘사되지만, 농사와 양잠, 길쌈 등의 산업은 일찍부터 발달했다고 나온다.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자랐다고 한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 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수리 시설인 저수지도 많이 만들어진 듯하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이 이때의 저수지이다. 목축은 물론이고, 해안 지대에서는 어업이 성행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났고 널리 쓰였다. 그래서 철이 돈처럼 사용되었으며 예, 마한, 낙랑, 왜 등에서 사갔다고 한다. p 076



 이 외에 ‘부여, 옥저, 동예, 읍루, 두막루’에 대한 내용은, 이 역사책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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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조실록 살림지식총서 520
구난희 지음 / 살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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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퇴 후 잠들기 전 짧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으며 책장을 둘러보다 눈에 띈 책, 『발해왕조실록』. 살림출판에서 출간된 지식총서 중 한 권이다. 살림지식총서는 권당 200페이지 내외로, 짧은 시간 후루룩 읽을 수 있다. 우리집에 있는 지식총서는 내 편협한(?) 관심사로 인해 역사 관련 총서만 모아뒀는데, 그게 딱 눈에 띄었다. 살림지식총서는 모으긴 많이 모았는데, 실제로 읽은 책은 10권 미만이라는게 함정이랄까. 당분간 이른 육퇴가 가능하면 한 권 씩 읽을 예정!


그리하여 오늘 리뷰는 지식총서 중 한 권인  『발해왕조실록』이다. 발해 관련 역사책을 읽은 적이라고는 정조 연간 집필된 유득공의 『발해고』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뭐 딱히 발해를 주제로한 역사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또 『발해고』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딱히 기억도 안나고 그래서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발해’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국사책에 실린 내용들만 알고 있는, 정말 백지장 같은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여기서 TMI 하나. 라떼 시절 보았던 드라마 《대조영》를 기억하는 사람은, 책을 읽으며 잠깐이지만 머리속에서 최수종 아저씨를 만날지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부흥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왕족 및 유민들을 당으로 끌고 갔다. 왕족은 대게 수도 장안에, 나머지 유민들은 고구려 영토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분산배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당나라는 이를 무마시키고자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책봉하고, 고구려 유민 재이주 정책을 취하는 등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도 연합하여 부흥운동을 시도했다. 심지어 당나라 곳곳에서 여러 이민족들의 반당운동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영주지역에서 봉기한 이진충의 난 역시 대표적인 반당운동 중 하나다. 



당나라에 반당운동이 거세지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다(대중상/걸사비우or 대걸중상/걸사비우). 걸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부친이며, 걸걸사비우는 이들의 측근이었다. 



초반 승세에 기세가 오른 당군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도망하는 대조영 집단을 추격하여 천문령에 이르렀고 당군은 매복해 있던 대조영 군사들에 의해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당군은 수천 명에 달했고 이해고는 달아나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천문령 전토의 승리는 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의 의작 이룬 승리였고, 그것을 이끈 결정적 원동력은 대조영의 탁월한 정세 판단과 추진력이었다. p 015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고구려 옛 영토인 동모산에 터를 잡고, 698년 나라를 건국했다. 동모산은 고구려 고씨들의 부족인 계루부의 영토였기에, 이는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건국 당시 나라 이름은 ‘진국’이었으나, 어느 시점에서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뀐다. 『신당서』에 언급된 “고왕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조영 재위 후반부에는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발해’라는 국명이 발해 스스로 바꾼 것인지, 당이 내린 이름인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대조영 사후 아들 대무예가 왕이 되었으니, 2대 무왕이다. ‘무(武)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무예는 당과 전쟁을 치르며 발해가 군사적으로도 ‘강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며 위상을 높혔다. 특히 일본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명시하여,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며, 그 영토를 회복했다고 천명했다. 『신당서』 무왕의 평가는 이렇다. “넓은 땅을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



무왕 사후 그의 아들 대흠무가 왕이 되었은, 3대 문왕이다. ‘문(文)왕’이라는 호칭에서 보이듯, 대흠무는 대내정책을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발해의 독자적인 3성 6부제가 이때 정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제도인 10위 제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5경 제도 등 문왕은 넓은 영토를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한 내치에 많은 힘을 다했다. 내치에만 치중하면 대외관계에서 어려울 수 있는데, 문왕은 외치에도 탁월했다. 부친때와는 달리 당과 우호관계를 조성하였다. 특히 이 때 당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를 포함하여 주변국이 위태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문왕은 이를 기회삼아 천도를 단행하여 나라의 안위를 지켰다. 당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수시로 왕래하며 외교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때 당은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한다. 발해는 명실상부 황제국이 되었다. 



문왕 사후 왕권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문왕의 장자는 재위 당시에 사망하고, 어린 손자 대화여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장자에 한해서만 이렇고, 문왕의 차남이하도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왕위는 적장자(손자) 대화여가 아닌, 문왕의 친척동생인 대원의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국인’에게 살해당했다. 



4대왕 대원의왕(시호 없음) 사후 왕위는 문왕의 손자였던 대화여에게 돌아갔다. 5대왕 성왕이다. 추정이지만 대원의왕을 죽인 세력은 문왕 지지층, 정확히는 대조영에서 이어지는 적장자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왕 역시 1년도 못되어 사망한다. 사유는 알려진바 없다. 



성왕 이후 왕위는 문왕의 막내아들인 대승린에게 돌아갔다. 6대왕 강왕이다. 강왕은 15년 정도 재위하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주변국 기록을 당, 일본과 교류에서 탁월한 외교술을 보였다. 내치 기록은 없으나 15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강왕은 앞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웠고, 내치에도 탁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왕 사후 그의 아들 대원유가 왕위에 오르니, 7대왕 정왕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 사신파견 정도이며, 재위 4년만에 사망한다. 정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언의가 왕위에 오르니, 8대왕 희왕이다. 희왕 역시 주변국에 남아있는 기록, 즉 대외적인 기록들만 확인된다. 재위 6년만에 사망한다. 희왕 사망 후 그의 동생인 대명충이 왕이되니, 9대왕 간왕이다. 하지만 재위한지 1년이 못되어 사망한다.



6대왕 강왕 이후 9대까지 적자계승이 아닌, 형제계승이 지속되었으며 이 역시도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을 보아, 강왕 이전에 있었던 왕위 계승 다툼이, 강왕 사후에 다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9대 간왕이 죽으며 대조영 직계 왕위 계승은 끊겼다. 이후 왕권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에게로 넘어간다. 대야발의 4대손인 대인수, 그가 발해 10대왕 선왕이다. 선왕의 등극은 ‘해동성국 발해’의 시작이었다.



선왕 대인수는 13년간 통치하면서 발해를 크게 발전시켰다. 연호는 ‘건흥’이다. 연호로 보아 앞 시대의 혼란을 일소하고 새로운 중흥을 시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왕 때 발해는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어며, 이러한 발해를 두고 당은 ‘해동성국’이라 표현했다. p 064


선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넘어서 헤이룽강까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압록강 박작성 일대,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따. 당시 영토는 고구려 최대 영토의 1.5~2배에 달했다고 한다. 동시대를 함께한 신라 영역의 4배 이상이었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선왕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제도를 완비했다. p 065


선왕은 대외 정책도 활발했다. 내적으로는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방어에도 만전을 기했고, 외적으로는 당, 일본, 신라에 사신을 수시로 보내며 외교에 힘썼다. 특히 외교에 있어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주변국인 당과 일본, 신라을 넘어서, 바닷길을 이용해 서역과도 교류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둔황문서에 ‘고려(당시 발해를 뜻함)’가 등장하고, 연해주 발해 유적지에서는 이슬람 아비스 왕조의 은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선왕 사후 손자인 대이진왕이 11대 왕으로 즉위했다. 현재까지 전해진 시호는 없다. 그는 조부인 선왕처럼 발해의 발전과 융성을 이어나갔고, 주변국과 교류도 활발했다. 눈여겨 볼만한 건 당대 이야기가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 『발해국기』를 편찬했다. 현재는 소실된 사서지만, 『발해국기』는 『구당서』, 『신당서』, 『송사』 등 중국 당대 사서 집필 시 기본자료로 활용되었다. 



대이진왕 사후 동생인 대건황왕이 12대 왕으로 즉위했다. 역시 주변국 기록으로 확인된 대외교류 일부분만 전해지고 있다. 대외교류 기록과 14년간 재위한 것으로 보아, 조부 선왕과 형인 대이진왕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대건황왕 사후 아들로 추정되는 대현석왕이 13대 왕에 즉위했다. 대현석왕 역시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대현석왕 재위기간은 24년으로 역시 선왕들의 뒤를 이어 안정적으로 발해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된다.



14대 대위해왕은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선대왕까지 부자계승 및 형제계승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아, 대건황왕의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이 즈음에 당에 파견간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아랫자리를 받고, 당 빈공과에 발해 유학생이 신라 유학생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것으로 보아, 발해의 영향력이 위치가 이전에 비해 다소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15대 대인선왕은 발해 마지막왕으로 대위해왕처럼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앞선 사례들을 미루어보아, 부자상속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인선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가 906년으로, 당시 주변 정세는 매우 혼란했다. 발해 남쪽에 있던 통일신라는, 다시 삼국으로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싸우고 있었다. 발해 북서쪽으로는 거란족이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당과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을 상대하기 위해 신라와 잡고자 하였다(비밀결원). 또한 고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에 발해는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항복 이후에도 발해인은 자국의 멸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거란은 17일에 조칙을 내려 발해인들을 회유했고 19일에는 강말단 등을 파견하여 병기를 수색했는데 발해인들은 그를 살해했다. 20일에는 대인선왕이 거란에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었고 야율아보기는 다시 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대인선왕은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하는데 이후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7월에 왕후와 함께 거란군에 의해 거란 본토로 끌려가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으며, 자신은 오로고, 왕후는 아리지라는 거란식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p 103



거란에 의해 발해는 망했지만, 발해인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발해유민이 고려로 귀화했다. 그 중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 고려 왕족에 추가하고, 백주 땅을 주어 발해 왕가를 잇게 했다. 그렇게 고려로 귀화한 발해 유민은 3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자, 자신들과 뿌리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 유민들의 고려 귀화 외에도, 발해 부흥운동은 약 200년 간 지속되었다. 『요사』, 『송사』에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나라 모두 발해 유민들이 발해 부흥운동 과정에서 세운 나라다.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발해인은 멸망 후에도 자신들의 고유 습속과 생활 방식을 잃지 않았고 스스로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1009년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송나라 왕증이 남긴 여행기는 이와 관련된 여러 사실을 전하고 있다. 발해가 망한 지 8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을 거란인이 아닌 발해인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각별하다. p 117



발해는 가깝게는 주변국, 멀게는 서역까지 활발하게 교류했던 외교 천재의 나라였다. 특히 정확한 정세 판단으로 국운이 흔들릴만한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해인의 유연한 외교술과 대처능력은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이민족과 이문화에 개방적이었고, 이를 적절하게 받아들여 ‘발해’의 정체성에 맞게 융합하였다. 발해의 이런 모습은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찾아볼 수 없는, 꼭 필요한 모습이다.



잊혀진 제국 ‘발해’, 광활한 북방 영토를 다스렸던 해동성국 ‘발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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