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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일본근대백년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ㅣ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평점 :
저자는 작년에 동 제목 시리즈로 유럽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책을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은 유럽을 떠나 일본에 주목했다. 그것도 일본 근대사에!
한일관계사를 전공하기도 했고, 나름 관심도 많아서 관련 책도 많이 읽었던 나다. 그러다보니 일본근대사가 그 어떤 세계사보다,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고 있다. 또한 중요성과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일본근대사 책을 읽고 리뷰도 올리고 그랬다. 내 블로그를 오는 이들이라도 일본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책을 쓴 저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의 저자는 일본 근대사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왜? 일본근대사는 보는 사람 시각에 따라, 우리나라 근대사를 왜곡하는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이 왜곡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끔, 최대한 사실을 반영하여 ‘읽기 쉽게’ 서술하였다. 이 ‘읽기 쉽게’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 일본 근대사는 대체로 내용이 무겁다. 그저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하는 과정이라고 하기엔, 그 안에서 수시로 ‘정한론’이 나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본 근대화 영웅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은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 당시 악랄한 가해자 일 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본능적으로 이 내용들을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읽기 쉽게’가 중요하다. 내용은 무거울지언정, 책 속의 글은 역사책 형식이 아닌, 인문학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되어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 선진국을 견학하고 온 그들이 유신 상황에서 지금은 내치에 전념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편 것이 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정벌 불발로 실각 후 실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하에 1874년 대만을 정벌하고, 1875년 운요호로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한론의 서막을 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침략의 전초 단계이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것과 같은 전면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묵은 정한론이 12년 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아시아를 벗어나자는, 더 확대된 탈아론으로 진화되어 살아난 것입니다. p 027
일본 근대화의 분수령이었던 ‘메이지 유신’. 이 근대화 혁명을 주도한 건 다름아닌 사무라이였다. 쉽게 말해서 문신이 아닌 무신들이 근대화 혁명을 추진했고, 심지어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계급에 따른 거주지 제한과 ‘독서’에 답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본인들이 지켜야할 주인(번주)가 있는 도시에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는 전국시대와 달리 전쟁이 사라졌기에, 사실상 그들이 칼을 쓸 일은 없었다. 여가 시간이 많아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독서였다.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도시에 살수 밖에 없는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건 바로 도시로 몰려드는 각종 책이나 신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면 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주자학을 배우거나, 이미 그 수준이 꽤 높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그들은 격변하는 세계 정세를 몸소 느꼈다. 특히 수시로 해안가에 나타나는 서양 함선은 사무라이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자 공포였다. 서양 함선으로 인해 그들은 일본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서구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서양 함선의 출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하여 막부는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한 사절단을 조성하여, 서양으로 유학을 보냈다. 유학생들은 당연히 위에서 언급한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었다. 그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불렸다. 후술하겠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간 핵심인물들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호걸이자 대게 조슈번 출신이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일본 중앙 권력이 서양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보내는 동안 조선은 무엇을 했는지를. 동시대 조선은 이른바 세도정치 시대였다. 지배층인 왕실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지들끼리 권력 나눠먹고, 백성들 수탈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삼정의 문란’이 바로 이 때다. 양반들은 온갖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갔다. 가렴주구,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양반네들은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며 백성들을 옥죄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 민란이 많이 발생한 이유다.
일본이 근대화 혁명인 메이지 유신을 성공했을때 조선은 어땠을까.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비주류 지역인 시코쿠의 도사번 출신으로 그의 고향은 오늘날 고치현에 해당됩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에도 유학 중 앞바다에 떠있던 미국의 흑선 함대를 보게 됩니다. 그의 흑선 목격은 일본이 구미 선진국과 같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막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 사건으로 그때부터 그는 왕정복고를 위한 대정봉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p 046
메이지 유신 후 승자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삿초동맹의 멤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이 대거 출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최후의 승자가 가려집니다. 이제 그들은 대륙을 탐하고 눈을 돌려 바다로까지 뻗어나갑니다. p 054
조슈번은 현재 야마구치현이다. 야마구치현이 어디인가. 일본 중앙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혼슈 끝에 있는 지역이다. 거리로 치면 중앙 권력인 에도나, 과거 일본 정통 권력지였던 교토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다. 중앙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어떻게 혁명의 불씨가 타올랐을까? 그 이유는 기백년간 이어진 이 지역의 반골 기질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1614년에 발발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데야스의 일전 오사카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가 알듯 승자는 도쿠가와 이데야스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도요토미 지지 가문은 이 때 거의 죽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모리 가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 가문의 영지와 녹봉을 거의 몰수하다시피 하고, 조슈번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조슈번은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채, 중앙권력에 이를 갈며 오랜 기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막부를 타도한 ‘대정봉환’,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다.
그렇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수많은 유신 호걸을 배출한 조슈번(야마구치현). 그리고 여전히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일본 총리다.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는 21%로 타 지역에 비해 매우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 조슈번 유신 호걸부터, 현재 야마구치현 출신 일본 총리들의 공통점은 비단 지역구 뿐만이 아니다. 일본을 벗어나 다른 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 그 야욕마저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이어졌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은 조슈번에 있는 ‘쇼카손주쿠’라는 아주 조그만 사숙에서 공부를 했다. 그들을 가르친 사람은 요시다 쇼인. ‘정한론’을 처음 알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콕집어 이야기한게 아니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일본의 해외팽창을 위해선 조선이 그 시작점이었을 뿐, 조선을 넘어 만주, 훗카이도, 캄차카 반도, 대만,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 한마디로 ‘대동아 공영권’을 주창한 사람이다. 하지만 당대 일본 권력자들은 요시다 쇼인의 이런 주장을 허무맹랑하다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쇼인은 권력에 가깝지 았았을 뿐더러, 이른나이에 요절했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스승의 구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서구 문물을 배우고, 대정봉환에 이어 메이지 유신을 성공하고, 내각을 점령했다. 내치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그들은 스승의 해외팽창 구상을 하나씩 착수해나갔다. 조선침략, 만주사변은 폐기되었던 요시다 쇼인의 ‘대동아 공영권’ 부활의 서막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습은 ‘대동아 공영권’이 완벽했다는, 그들의 축포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들의 축포는 결과적으로 원자폭탄으로 되돌아왔지만.
TMI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메이지 유신의 아이러니 하나.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이난 전쟁 같은 사유로 대게 서로 맞서며 20세기 전에 요절했다. 반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일왕에게 권력을 넘긴 뒤 무려 공작 작위를 받고(!) 천수를 누리며 76세에 죽었다. 일본을 근대화로 이끌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이들과는 달리, 구시대를 대표하는 마지막 쇼군은 매우 안온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TMI 둘. 일본 근대화 개혁의 선봉장은 단연 사카모토 료마다. 비록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가 대정봉환에 앞장서고, 일본의 근대화 불씨를 점화하지 않았더라면 일본 근대화는 조금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사카모토 료마는 동료들과 ‘해원대’를 설립해 운영했다. ‘해원대’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오늘날 일본 해군의 기원이며, 일종의 군산복합체 성격을 띈 단체였다. 료마가 자객에게 죽음을 맞이한 뒤, 해원대는 해산되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의 동료 이와사키 야타로가 해산된 해원대를 합쳐, 다시 기업을 세웠다. 그 기업이 바로 미쓰비시 그룹이다. 메이저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던 미쓰비시(우리에겐 강제동원 가해자이자 전범기업이다). 미쓰비시 창업은 사카모토 료마가 남긴 유산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딱 두 도시와 그곳에 거주하는 민간인만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사실 원폭으로 많은 사상자가 집중되어 피해가 커 보이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전체 피해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공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본토 상륙 공격을 당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패배라는 것입니다. 일본이 침략한 국가들은 그들이 영토의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만신창이를 만들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으니까요. p 095
도쿄 전범재판은 저지른 범죄와 흉포함에 비해 턱없이 약한 처벌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재판에 조선이든 대한제국이든 코리아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학국의 눈엔 우리가 전쟁 훨씬 전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식민지화가 완료된 일본과 한 덩어리인 국가로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피해자로 분류하면 연합국 중 그때까지도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영국 같은 나라들이 난처해질 수도 있어 모른척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p 11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 회의에서 독도는 조약의 5차 수정 문서까지는 우리나라 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떤 작자가 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독도를 일본 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 고문을 맡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6차 수정 문서엔 독도가 일본 땅으로 기록되었는데 영국과 뉴질랜드가 이견을 제시하자 그 다음 차 수정 문서엔 아예 독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최종 조약 문서에도 독도는 빠졌습니다. p 123
겉으로 보면 원자폭탄 엔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일본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저자가 말했듯, 실질적으로 일본 본토를 향한 집중공격은 없었고, 오히려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우리나라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동남아시아 여러나라가 그랬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원자폭탄’에만 초점을 맞춰서, 본인들이 피해자라는 대대적인 쇼를 하고 있다. 매년 8월 15일만 되면 온갖 방송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쇼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연코 미국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미국에 의해 망했는데, 미국 덕분에 쇼를 한다니.
일제 패망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와 통치를 하고, 일본에도 들어가 통치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일본을 ‘아시아 민주주의 선봉장’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 재건을 이끌었다. 반면에 일제로 인해 유린된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했던 그대로 통치했다. 쌀 공출이 그러했고, 친일파를 재등용이 그러했다. 살기 어려운 국민들이 뭐라 할라고 치면 ‘빨갱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 4.3이다. 그러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며 벌어진 동족간의 전쟁이었지만, 실상은 소련 공산주의를 등에 업은 북한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연합군 뒤에 숨은 남한의 전쟁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알듯 휴전이다.
전쟁 당사자들에게만 중요할 거라 생각한 6.25전쟁,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본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왜? 미국은 전쟁물자를 전쟁물자를 일본에서 가져왔다. 우리에겐 아픔을 준 6.25전쟁이, 일본에서는 경제 부흥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우리나라 외교에 있어서 대일외교는 언제나 중요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향해 야욕을 드러냈고, 그 야욕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는 두 번이나 뼈아픈 경험을 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그렇다. 야욕의 성격은 변했어도, 그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일본이 왜 그렇게 야욕을 드러내는지, 우리나라는 먼 과거, 가까운 과거에 참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본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이 녹록치 않다. 일본? 미국? 외치는 커녕 내치도 안되고 있다. 정말 놀랍게도 유사 민주주의의 대명사인 일본보다 못한,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어버렸다. 헌법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 뭐 진짜 뭐라고 해야할지. 이 책 『『TAKE OUT 일본근대혁명』을 읽을 때만해도, 우리나라, 일본과 미국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야. 뭐라 할말이 없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