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파괴 - 군중에서 공중으로
윤동준 지음 / 파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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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잘 읽지 않는 분야가 정치, 사회학책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불편하니까. 매일 듣는 뉴스에서도 듣기만 해도 불편한 사건, 사고가 나오는데, 내가 읽는 책에서까지 그런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 불편하게 하는 사회 인문학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다. 왜?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알아야 하는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회문제에 있어서 최소한 방관자는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나보다 한참 어리다. 나나 신랑이 우스갯소리로 “2000년에도 사람이 태어났어?” 하던 새천년둥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지금 한창 놀아야할 20대 청춘이다. 그 청춘이 사회 인문학책을 썼다. 수박 겉핥기로 쓴 책이 아니라, 깊은 식견을 가지고 쓴 책이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그맘때 놀....지는 못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열씸히 일하느라 바빴기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1도 없었다.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남이 어떻게 살든 내 알바 아니었으니까. 굳이 사회문제나, 떠올리기만해도 불편함을 야기하는 적폐들은 신경쓰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조차 쓰지 않던 방관자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 살기도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고통들을 무시했다. 남이 배를 곯든 맗든, 나와 내 가족 끼니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굳이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누군가 나서서 해결하려 할테니, 나서지않고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렇게 터져나오는 사회문제들을 무시했다.



군중은 사회와 자신의 내면에서 절대시되는 낡은 가치들 곧 우상을 파괴함으로써 공중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정의한 우상은 영웅을 숭배하는, 고통을 방관하는, 승자독식주의를 추구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규칙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한 행동이 축적된 집단은 적자생존을 보장하는 교육, 보편적 윤리를 무시하는 부족주의적 공감, 책임을 방임하는 신념윤리, 교양을 파괴하는 전문가주의, 다원주의를 간과하는 상대주의, 허무감을 발생시키는 이기주의, 이성을 얕보는 직관이 뿌리를 두는 전근대적 사회를 조장합니다.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진보하며 과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이는 곧 하나의 전제는 미래의 새로운 전제의 토양에 불과할 뿐, 절대시 될 수 없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낡은 우상들은 새로운 토양을 가꾸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p 014



점점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고 나니 내가 좀 바뀌었나보다. 아이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신경쓰이고,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리기 시작했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사회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게는 바다 건너 아직도 깨끗한 물 한모금 마시기가 어려운 사람들. 의료, 교육, 문화생활은 커녕 등 기초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들. 더 슬픈 건, 이렇게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는 삶은 바다 건너에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기본적인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방관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전 세계적으로 문명, 과학이 발달하여 살기 편해졌다는 말을. 하지만 실상을 보면 아직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내가 사는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곳곳에 있다. 이말은 전 세계적으로 살기 편해졌다는 말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따르면(정확히는 저자가 읽었던 수많은 명사들의 책을 인용했지만) ‘세계 인구의 1퍼센트가 전 세계 재산 총액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자산 가치의 85%를 독점’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전 세계에서 10명 중 7명이 하루 10달러도 못 번다고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1970년대 이후 소득 분포 하위 50%의 노동자들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 임금은 같거나 하락했지만, 소득 분포 상위 1퍼센트의 실질 소득은 4배 이상 증가했고 상위 0.1퍼센트의 소득은 그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능력주의가 아닌 승자독식주의이며, 그 어떠한 이념으로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는 나름의 수고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도 극소수의 몇몇 인간만 그들보다 수억 배나 생산적으로 일하고 있었을까요? p 061



즉 세계 인구 하위 90%가 남은 자산 가치 15%를 나눠가지는데, 적어도 이 중 20%는 나처럼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되는, 하루 10달러(한화로 대략 1만 4천원) 이상은 벌 수 있는 서민들이다. 이 20%까지 제외하면, 결국 전 세계에서 70%의 인구에게 분배되는 자산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이 어려운 빈곤층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바로 우상을 숭배하는 군중들에 기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우상이란 1)영웅을 숭배하는, 2)고통을 방관하는, 3)승자독식주의를 추구하는, 4)자유를 보장하는 규칙을 무시하는 행동 등이다.



군중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다 잘 될 것이다’라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집니다. 공적 가치와 제3세계 구제와 공교육에 무관심하면서도 진보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은 언제나 실패하지 안고 발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군중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고 직장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 다른 일자리를 찾을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식의 부조리가 아직도 만연한 줄 알면서도 모든 개인이 똑같이 존엄하고 평등함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p 033



롤 모델의 부재가 빈곤층의 부족한 의지와 실행력의 일부 외부적 요인을 설명하지만, 근본적으로 빈곤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롤 모델을 가진 소수의 빈곤층이 자신 스스로 성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도전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의 원인으로 ‘자유의 부재’를 제시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국이 분쟁 중이거나 기후변화로 재앙이 불어 닥쳤거나 특정 배경의 인종을 차별하는 문화가 뿌리 깊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빈곤에 빠질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p 050



나 역시 지금 당장 내 삶에 위해가 가해지는건 없기에, 내 주변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눈을 감았다. 누군가 앞장서길 바라며, 정작 나는 편하게 인터넷 기사를 보며 좋아요, 또는 싫어요 누르는 행위로 나는 내 의견을 표시했다고 만족했다. 난 방관자였고, 누군가가 앞장서길 바랐던 수많은 군중 중 하나다.



철학자 오르테가는 학교가 대중들에게 오로지 현대적인 삶의 기술만을 가르쳤을 뿐 계몽시키지는 못했다고, 대중들에게 열심히 생존 수단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사명감을 심어주지는 못했다고, 그들에게 현대적인 도구의 힘과 긍지를 허겁지겁 전해주었지만, 그 정신을 심어주지는 못했다고 무참하게 비판했습니다. (…) 기술의 습득을 목표로 교육받은 현대의 군중은 같은 일만 반복하는 단순 무식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해 자신의 한계에 만족하는 폐쇄적인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p 093



저자는 이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관하는 군중으로 만든 우상 중에는 아이를 한 사람의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밑교육을 도맡아온 ‘학교’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의 학교교육 현실을 보자. 그저 전문교육을 가르치고, 좋은 대학을 보내고, 대기업 취업이 가능한 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어린 학생들에게 경쟁을 부추기며, 서로를 밟고 올라가게 한다. 학교는 어린 학생들에게 어른들이 말하는 이상향(우상)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 우상을 위해 어른들이 주는대로 따라가게 만들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부조리한 문제를 마주했을 때, 과연 대처가 가능할까? 비판적인 사고는 커녕 문제의식 조차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저 앞 사람 의견에 동조하는 삶을 살거나, 방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미래가 되면, 차라리 이정도면 그나마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왜? 이미 우리는 학교교육의 실패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청소년 범죄들을 비롯하여, 나이로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미성숙한 어른의 범죄가 매일 연이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지 않은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소양과 교양을 가르쳐야 한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삶의 나침반 찾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오로지 우상을 추구하는 교육에 매몰되어 버렸다.



인류를 야만에서 벗어나게 해준 ‘협력’은 서로에게 약간의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큰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p 108



그러한 ‘공통의 인식’은 미국의 도덕철학자 샘 해리스의 말대로 핵확산, 집단학살,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빈곤, 그리고 실패하는 학교 등의 근본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면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내세우며 독단의 함정에 빠지면 모든 것이 낭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문란한 성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오히려 동성애자를 비정상인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논쟁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도그마에 빠진 자의 시간 낭비입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말대로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p 111



우리가 직면한 대다수의 사회문제는 거대한 악, 즉 빌런에 의해 발생되는게 아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무관심, 방관 속에서 생겨난다. 내 자유가 중요하다면, 마찬가지로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데 앞장서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 거기서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그래서다. 20대가 쓴 이 사회 인문학책을, 저자와 동년배인 20대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기본적인 교양, 소양교육이 사라진 학교에서 교육받은 20대들에게 말이다. 이미 앞서 있은 어른들보다도, 훨씬 더 나은 어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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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범접할래야 범접하기 어려운 문화콘텐츠다. 한창 뮤덕시절에 오페라를 봐볼까? 싶던 시기도 있었지만 일단 티켓값이 뮤지컬보다 높았다. 거기다 대체로 외국어로 진행되는 특성으로 인해 도전할 의욕조차 팍(!) 꺾여버렸더랬다. 그렇다고 오페라를 아예 모르느냐? 한번도 본적이 없느냐? 라고 하면 대답은 NO다. 지자체에서 어린이 대상(ㅋㅋㅋ)으로 하는 오페라 <마술피리>나 <피가로의 결혼>을 본 적이 있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지만 간혹 TV에서 오페라를 중계해주는 것도 본적이 있다. 또 어떤 작품은 오페라를 본적은 없지만, 책으로 읽어서 그 내용을 아는 경우도 왕왕 있고. 그래도 오페라를 조금이나마 보긴 봤다고, 오늘 리뷰하는 에세이 「방구석 오페라」에 수록된 25편의 명작 중에서 일부 아는 작품들이라 꽤나 반가웠다.


저자는 전작 에세이 「방구석 뮤지컬」처럼, 각 챕터마다 작품의 줄거리 및 가사를 수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QR코드를 삽입하여 대표곡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얼마나 친절한지! 특히 오페라 작품의 줄거리와 가사, 작품 해석은 진짜 친절에 친절에 친절에 친절을 곱한 친절곱빼기다. 왜? 솔직히 오페라는 외국어(ㅠㅠ)로 진행되다보니 배경지식없이 보고 있으면, 당최 이게 무슨 내용인지. 걍 외국어로 된 성악(또는 가곡) 듣는 기분이다. 하지만 줄거리와 가사를 알고 있고, 심지어 해당 장면에 대한 해석까지 알고 있다면? 어떤 장면을 보든 문제없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진짜 이렇게 오페라를 해설해주는 에세이 라니! 정말 추천 오백개!

그도 그런것이...어린이 대상 오페라나 한국말(ㅋㅋㅋ)로 진행하지, 일반 성인들이 돈 내고 관극하는 오페라는 후후후. 듣는 내 꼬부랑글씨들이 내 귀로 미친듯이 침투하지 않을까? 물론 성인 상대 오페라를 직접 본적은 없으니, 확실하지는 않다. 하하하

이 에세이 서두에는 오페라 전문용어 사전이 실려있다. 오페라 초심자들에겐 정말 중요한 것! 오페라에 입문할 생각이라면, 이 용어들을 익혀놔야 좋지 않을까 싶다.


#방구석오페라 전문용어 사전

  1. 서곡(Overture): 극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곡으로,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에 연주

  2. 전주곡(Prelude): 서곡보다 작은 규모로, 음악 전에 나오는 자유로운 형식의 음악

  3. 합창(chous): 그룹으로 구성된 가수들이 부르는 곡. 대규모 무대에서 배경 음악이나 대사를 강화하는 데 사용

  4. 레치타티보(Recitative): 대사를 가끼운 멜로디에 맞춰 말하거나 노래하는 스타일. 주로 대화를 전달하고 흐름을 유지하는 데 사용

  5. 아리아(Aria): 주인공 또는 주요 등장인물이 자주 부르는 솔로곡. 주로 주제나 감정을 강조하고, 가수의 기량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

  6. 군무(Group dance): 오페라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무용 시퀀스를 가리키는 용어로 여러 명의 무용수가 함께 춤을 추는 부분을 의미

  7. 음악(Orchestra): 오케스트라로 연주 된 음악

  8. 간주곡(ntermezzo): 두 개의 악장 사이에 삽입되는 짧은 악곡. 관객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함

  9. 무대미술(Siage ar): 무대 디자인과 조형의 총체적인 개념으로 공연의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요소들을 포함

  10. 리브레토(bretto): 극적인 음악작품에 쓰이는 텍스트로, 오페라의 대본

  11. 듀엣(Duet): 두 명의 가수가 함께 부르는 곡. 주인공들이 서로 대화하거나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용

  12. 앙상블(Ensemble): 두 명 이상의 가수가 함께 부르는 곡. 대규모 장면에서 캐릭터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대화하는 경우에 사용

  13. 클라이막스(cfrax): 작품의 긴장과 감정의 정점을 나타내는 부분. 작품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나타나 전환점을 표현

  14. 결말(Fnale): 주로 작품의 이야기와 갈등이 해소되고, 등장인물의 최종 운명이 결정되는 부분

  15. 레치타티보 세코(Peciftative secco): 피아노나 기타와 같은 간단한 반주와 함께 말하는 스타일의 레치타티보

  16. 아페투오소(Affetuoso): 악보에서 감정을 지니고 연주하라는 말로,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표현을 위해 주로 사용

  17. 오프스테이지 트럼펫(offstage trumpet): 오페라에서 특정한 효과를 위해 트럼펫 연주자가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지 않고, 무대 뒤에서 따로 연주하는 것

  18.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18세기 나폴리파 오페라에서 성립된 것으로, 그리스 신화나 고대의 영웅담을 제재로 한 엄숙하고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19. 오페라 부파(Opera buffa): 18세기 발생한 희극적 오페라로, 가벼운 내용의 대중적인 오페라

  20. 리얼리즘(Reallom): 리얼리즘 오페라는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사건을 통해 인간의 추악함과 잔학성. 연약함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식

  21. 프리마 돈나(Pima donna): 이탈리아어로 오페라의 주역 여가수

  22. 프리모 우오모(Primo uomo): 이탈리아어로 오페라의 주역 남가수

  23. 베이스(Bass): 가장 낮은 음역대를 맡는 남성

  24. 테너(Tenor):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음악에서 최고 음역대의 남성

  25. 바리톤(Barttone): 테너와 베이스의 중간 목소리로 베이스 음색의 깊이와 테너에서의 화려함을 함께 지님

  26. 알토(Ao): 악기의 4도를 전후하여 소프라노 악기보다 낮거나 테너 악기보다는 높은 음을 의미

  27. 콜로라투라 소프라노(Coloratura soprano): 화려한 음악을 노래하는 것을 의미. 구슬을 굴리는 듯 화려한 소리로 노래 하는 선율

  28. 메조소프라노(Mez20 Soprano): 여성의 가장 높은 음역인 소프라노와 가장 낮은 음역인 콘트랄토 사이의 음역

  29. 아리아 디 소르베토(Aria di sorbetto): 중요하지 않은 아리아라는 의미로 셔벗이나 젤라토를 먹으며 관람할 수 있는 아리아

  30. 유도동기(Leitmotiv): 무대극 관련한 용어로, 인물과 상황 등 반복되는 짧은 주제나 동기를 묘사할 때 공통으로 사용되는 주제 선율

  31. 라르고(Largo): 음악에서의 빠르기를 지시하는 말로, 아주 느린 속도

  32. 지오코소(GIO00so): 악보 내에서 익살스럽고 활발한 연주


▶ 요정의 여왕

<요정의 여왕>은 당시의 다른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오페라와 발레의 합작품입니다. 이를 ‘세미오페라’라고 부릅니다. 반면, 음악적 요소는 초자연적 등장인물들에 맞추어 표현하였습니다. 작곡가는 영국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퍼넬로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습니다. p 084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과 달리 줄거리는 벤자민 브리튼의 《한여름 밤의 꿈》을 원작으로 합니다. 그리고 오페라 <요정의 여왕>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 그리스 신화를 가미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결합으로 극 중에는 수많은 신과 정령이 등장하며, 그들을 부각하기 위한 화려한 무대장치가 다수 사용됩니다. 그래서인이 이 오페라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p 85

오페라 <요정의 여왕>. 분명 본적이 없는데, 나 내용을 알고있네? 혹시나해서 큐알코드 찍고 영상(2시간짜리 두둥!!! 개이득ㅋㅋ)봤는데, 흐. 그저 내용만 알고 있을 뿐 오페라는 초면ㅋㅋㅋㅋ. 육아로 인해 영상을 풀로 보지는 못했지만, 육퇴하고 다시 제대로 달려야지! 무려 2시간 짜리 오페라 영상, 이런건 그냥 놓치면 안되지. 엣헴. 거기다 판타지 배경 오페라는 참을 수 없으니까!

​​

▶ 마술피리

이 작품의 구조는 현대의 영화나 TV 드라마와 비슷합니다. 아름답고 품위 있고 진지한 주인공 커플의 러브스토리 곁에서 우스꽝스러운 조연 커플이 개그를 펼치는 것이 기본 형식입니다. 거기에 여자 주인공의 괴팍하고 강력한 어머니가 등장해 남자 주인공 타미노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자라스트로와 대결을 벌이고,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도와줍니다. p 160

작곡가인 모차르트에게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모차르트의 예약 연주회가 사라지면서 수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수익을 내기 위해 여러 일을 하던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와 다른 두 작품의 곡을 함께 썼는데, 이 때 건강을 크게 해치면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환상과 비참한 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곡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탄생합니다. 해당 아리아의 유명세로, <마술피리>는 오페라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작품으로 자주 선정됩니다. p 161

흐흐흐. 내가 봤던 오페라다! 물론 어린이 대상으로 한 미니한 오페라였지만. 근데 뭔가 이상하다? 내 기억속의 <마술피리> 명곡(ㅋㅋㅋ)은 ‘밤의여왕 아리아’ 보다는 ‘파파파파파파게노♬’ 인데?!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인 ‘밤의 여왕 아리아’ 보다는, 언제 들어도 신명나는 파파파파게노가 더 즐겁고 좋은듯!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 ㅋㅋㅋㅋ

하지만 이 책 큐알코드로 볼 수 있는 영상은 <마술피리> 대표곡 ‘밤의 여왕 아리아’라는 것! 즐거움이 필요할 땐, 파파파파게노 음악을 꼭 들어보길!

▶ 투란도트

<투란도트>는 중국의 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3막 구성의 오페라입니다. 푸치니는 이 작품에서 중국 멜로디를 일곱 번 사용했고, 중국제 오르골로 들었던 ‘황제찬가’의 멜로디를 작품 속에 유용하게 녹여냈습니다. 5음계와 함께 종, 실로폰 등의 악기를 사용해 중국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점은 작품의 높은 인기에 한 몫 했습니다. p 276

푸치니는 <투란도트>의 결말을 짓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의 내 오페라들은 모두 버려도 좋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했던 작품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을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제자 알파노는 스승을 위해 <투란도트>를 완성하여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참신한 화음, 관악기와 타악기의 효과적인 활용 등으로 독특한 색체를 가진 오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p 277

아주 완벽하게 책으로 먼저 접했던 <투란도트>다. 난 이게 오페라가 있는지도 몰랐네? 아니, 오페라가 먼저였다는 사실에 놀랐네? 심지어 현재 오페라 공연중이고, 티켓값이 의외로 현실적이라 더 놀랐네????????? 육아만 아니면 한번 훅! 하고 보러 가고 싶은 정도인데T_T.

하지만ㅋㅋㅋㅋ 나에겐 큐알코드가 있다! 투란도트편 큐알코드를 찍어보니, 이번에도 2시간짜리 영상! 진짜 개이득. 이것도 육퇴하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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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24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투란도트>는 애초에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고찌)가 쓴 작품으로 이를 프리드리히 실러가 리메이크한 것을 다시 푸치니가 자신의 리브레토 팀을 동원해 고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페루치오 부조니도 오페라 <투란도트>를 작곡했는데, 부조니의 것이 원작과 더욱 가깝다고 합니다. 두 오페라 간에 특히 투란도트가 칼라프에게 낸 수수께끼에 큰 차이가 있더라고요. 부조니의 수수께끼가 훨씬 고급스럽기도 합니다. 제 취향으로 관현악을 포함해서 부조니를 좀 더 좋아하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호시우행 2023-10-25 0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독하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한식 인문학 - 음식 다양성의 한식, 과학으로 노래하다
권대영 지음 / 헬스레터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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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심지어 우리 신랑도 이 사실을 정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이야? 아닌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는 여러 모순이 보인다. 


예컨데 우리나라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들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고추를 메인으로 한 음식이 없다. 무엇보다 고추가 임진왜란 당시 전래되었다는 것 치고는, 한반도에서 대중화된 시기가 너무 빠르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발효식품인 고추장이 되고, 갈아서 사용하는 고추가루가 되고, 고추가루를 이용해 만든 발효식품 김치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외국에서 들어온 식자재가 그 나라의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토착화되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로 인한 음식이 만들어지는데는 지난한 시간이 걸리니까. 그걸 백년도 안되서 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점을 기준으로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고추를 이용하여 만든 수많은 한식들 역사까지 축소시켰다. 고추를 즐겨먹는 한국인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한식을 깎아내리려는 중국과 일본에선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한식 역사 왜곡에 참전한다. 중국은 파오차이, 일본은 기무치 같은 배추 짱아찌들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김치 원조라고 나서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고추가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설에는 의문점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없는데 임진왜란 때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에 갖고 들어왔을까? 유럽에서 중남미 고추인 아히가 들어왔다면, 그 당시 함께 들어왔다는 토마토, 타바코처럼 적어도 ‘아히’ 아니면 ‘피망’같은 유럽식 이름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순 우리말 ‘고추’만 남아있고 심지어 ‘당초’, ‘번초’, ‘만초’ 등 순전히 중국식 이름이 붙어졌을까? 고추는 일본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도 없고, 따로 용도가 없을 때인데도 어떻게 전국으로 퍼졌을까? 어떻게 고추가 들어오자마자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식품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가설, 즉 있을 수 없는 주장이다. 인문학자라도 조금만 더 세심하게 바라보면 합리적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다. p 051


소위 지식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에서 발견된 모순을 검증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에 받는 것에 기뻐했다. 대중매체도 여기에 합류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식품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이 역사책의 저자다.


본투비 순수 자연과학자이자 식품과학자인 저자는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검증해서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박살내는데 앞장섰다. 한국학 박사 출신인 배우자 도움을 받아 오롯이 1차 원문(고문서 등)을 기준으로 연구했고, 본인 전공인 자연과학을 십분 활용했다. 무엇보다 저자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 출신이다. 태조 이성계도 그 맛에 반해 진상하라고 했다는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그 순창이다. 태조 이성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 조선을 건국했던 사람이다.


결정적으로 1990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 일본 《식품원료학》이라는 책에서 ‘고추는 조선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가지고 들어왔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 고추의 일본 전래설에 문제가 있다는 과학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고추의 전래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p 052


결정적으로 저자가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파헤치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고추가 전래된 시점을 확인하고 나서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래된 역사를 파헤치는 건 이 책의 백미다. 덧붙여 고추로 이용한 한식의 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한자 사대주의자들로 인해 왜곡되어버린 한식의 역사도 알려준다. 순 우리말인 닭도리탕이 일본어 잔재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우며, ‘닭볶음탕’이라고 창씨개명한건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이름을 지을 때 음식의 주재료, 요리방법, 종류를 의미하는 말을 붙여서 이름을 지었다. 닭을 고아서 만든 탕은 ‘닭곰탕’, 김치를 넣어서 끓인 찌개는 ‘김치찌개’, 닭을 기름에 볶으면 ‘닭볶음’, 닭을 찌면 ‘닭찜’,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은 ‘닭도리탕’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놈의 한자 사대주의자들이 우리말 ‘도리치다’는 생각치 않고, 고스톱의 ‘고도리’만 생각하며 ‘닭도리탕’을 일본어 잔재라고 몰아세웠다. 그런 한자 사대주의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도리치다’라는 말은 칼 등으로 돌려가며 거칠게 쳐내는 요리 방법이란 걸.


요즘은 한자 사대주의를 넘어 영어 사대주의가 기승이다. 해외에서 소개하는 한식 이름을 보면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냥 한식 명 그대로 영어로 쓰면 될껄, 굳이굳이 한식을 영어로 번역하는 정성을 들이니 외국인들이 ‘피쉬케이크’라는 단어를 보고 기겁을 하지. 심지어는 외국 요리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김치를 소개할 때 중국 배추요리인 파오차이를 사용하기도, 일본 배추 요리인 기무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청국장은? 코리아 낫토라고 소개한다. 두부는? 일본 발음인 토후로 소개한다. 그저 웃을뿐!



고추 역사왜곡! 고추는 임진왜란 전래설

‘고추 일본 유래설’이 시작된 시기는 1980년대 들어서다. 한양대 이성우 교수가 1984년 《고추의 역사와 품질평가에 관한 연구》에서 ‘1492년 콜롬버스에 의해 고추가 서인도 제도에서 포르투갈로 들어갔다가 100년 동안 인도 등을 거쳐 일본을 통하여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위 ‘고추의 일본 도입설’을 주장하면서다. (…) 이러한 주장이 기존 관념을 깨는 현대의 학문으로 인식되어 국민적 반향을 일으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가장 의아스러운 점은 음식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 전문가들이 이런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자들도 이러한 주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방치한 셈이다. ‘고추 일본 도입설’은 여러 가지 반증의 문헌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어떤 결정적인 근거도 확보되지 못한 채 철통같은 방어 논리로 이후 다른 문헌과 책을 통해, 반복 또는 확대 재생산 되었고 어느새 정설로 굳어져 버렸다. p 085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은 명문대 식품사학과 교수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교수 역시 나름대로 검증과 연구를 했겠지만, 그 검증이 과학적인 검증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게 아닐까. 더 아쉬운건 이 논문을 다시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가공 재생산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인해 한식의 역사가 대폭 축소 및 왜곡되었으니까.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인 근거로 드는 것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남만초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이라 그 이름을 왜개자라고 한다.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시다 죽는 자가 다수 있었다.’


이 고서에 등장하는 남만초에 대한 설명이 바로 고추가 일본을 통해 건너 온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봉유설에 적힌 남만초는 말 그대로 남만초다. 품종학적으로 지금의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당시 중국에서 보면 남쪽 지방 오랑캐들이 먹었던 고추로, 우리 고추와는 종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남만초가 언급된 글의 맥락을 살펴보자. 남만초를 술에 타 먹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평소 술에 고추를 타 먹는 문화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대로 해석하면 남만초가 얼마나 매운지, 독성이나 효능에 대해 잘 모르고 평소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듯이 했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다. p 080


옛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초기에 김종서가 북벌 당시 고뿔이 나거나 맹추위를 견뎌야 할 때면 우리 고추를 술에 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으로 보면 우리 고추와 다른 남만초를 우리 고추처럼 술에 타 먹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p 122



고추 임진왜란 전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내세운 조선시대 저서 《지봉유설》, 《오주연문장전산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근거는 파괴되었다. 앞뒤 맥락없이 근거라고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게된거다. 심지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 결과 우리나라에도 이미 고추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전혀 없다. 이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들어 일본 전래설을 뒷받침하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그 문헌에 우리 고추가 있었다는 문구가 발견되어 역풍을 맞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고추의 종류인 번초 또는 남만초가 들어왔으며, 담배, 토마토도 임진왜란 전후에 들어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 눈 여겨 볼 것은 이 책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매운 번초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바로 뒤에 ‘아초’라고 하여 우리나라 고추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명한 고추장이라고 한다. 순창군 천안군에 나오는데, 한 나라에 이름이 났다. - 중략 - 요사이 ‘우리 고추’는 품질이 좋아 왜관에 팔면 심히 이익이 난다.’ p 082


고추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시기 많은 문헌에 이미 고추장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식료찬요(1460년)》, 《향약집성방(1433년)》, 《의방유취(1477년)》 등에서 다양하게 발견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비위나 위가 약해 몸이 허해질 때, 닭이나 꿩을 도리쳐서 고추장을 넣고 끓여 먹거나 찍어 먹으면 밥맛이나 얼굴색이 좋아진다’고 하여 주로 식치의 개념으로 많이 쓰인 음식으로 소개되었다. p 091


고추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록은 꽤 많이 발견된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건 절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재배해왔던 우리의 두가지 전통 고추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이미 47만 년 전에 분화된 두 품종으로 밝혀졌다. 하나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데 쓰이는 우리 고추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매운 고추로 국과 탕에 맛을 내는 고추, 그러니까 청양고추의 원조로 보면 된다. 지금도 일부 지방에는 좀 매운 고추를 ‘땡초’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양고추가 최근에 남만초인 태국 고추와 우리 고추의 교잡종이라고 생각하는데, 식물유전학자로 세계적인 전문가인 최도일 교수는 청양고추의 뿌리는 우리나라 약간 매운 고추를 근간으로 종자 개령한 것이라고 한다. p 103



심지어 고추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니, 이 땅에 이미 우리나라 고추가 자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콜롬버스가 들여온 고추와 우리 고추는 품종이 다르다. 완전 다르다. 동남아 고추랑 우리나라 고추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있다면 그사람 시각과 미각, 후각에 문제가 있는 듯.


아주 박박 우겨서 콜롬버스가 가지고 온 고추가 포르투갈을 지나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치자. 당시 콜롬버스 고추가 우리가 먹는 고추로, 진화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 100~200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본디 생물이란 n만년, n천년이라는 오랜 기간, 아주 천천히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진화한다. 본투비 문과인 나도 이건 아는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은 왜 안해봤나몰라.


또 다른 한식 역사 왜곡: 김치, 고추장, 비빔밥, 떡볶이

고추의 역사를 왜곡했으니, 그에 따른 부차적인 한식 역사 왜곡도 당연이 줄을 이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이 김치를 자기네거라고 우기지!


이 잘못된 설을 무리하게 합리화하고 꿰맞추려 하다 보니 임진왜란 이전 옛 문헌에 나오는 모든 한차 초(椒)를 일률적으로 후추, 산초 등으로 번역하고, 임진왜란 전의 문헌에 나오는 김치는 모두 백김치라 주장하고, ‘순창 고추장’도 흑색의 후추고추장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p 085

김치를 장아찌와 짠지의 후손으로 폄하나는 이들도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학자는 김치는 원래 배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였다는 잘못된 논리에 빠져, 근거 없이 김치의 원조가 일본의 츠케모노,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한다 보니, 김치의 원조가 장아찌와 짠지라는 말을 무리하게 끌어들인 것에 불과하다. p 160


김치와 고추장은 엄연한 과학이다. 발효과학이라고 들어는 봤나? 그것도 아주 고급 발효과학이다. 


인류는 발효기술을 터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음식을 오래 보관하면 기본적으로 음식은 부패한다. 부패한 음식을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거나, 심하면 사망한다. 그렇게 몇 천년 간 인류는 부패한 음식을 먹고 아프거나 죽었다. 하지만 어떤 부패한 음식은 오히려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깨달음으로 먹어도 되는 부패한 음식을 가려낼 수 있게되었고, 심지어 손수 부패한 음식을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게 ‘발효’라는 과학적인 기술이란건 나중에야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게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나 고추장, 된장, 삭힌 홍어 등이다.


고급 발효과학이 들어간 김치는 일본 장아찌나 중국 파오차이와는 그 결이 다르다. 아주 다르다. 걔들은 발효식품이 아니라, 절임식품이다. 장아찌와 짠지 같은 절임식품은 미생물의 성장과 부패를 막기 위해 수분활성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쓰거나, 식초를 사용한다. 즉 부패를 막아야 먹을 수 있고, 부패하면 못 먹는다. 미생물의 성장을 도와 발효시키는 발효식품과는 그 원리가 다르다. 태생부터 완전 다르다.


아, 이 책에 따르면 또 다른 소위 지식인들이 주장하길 우리나라엔 결구배추가 없어서, 최초 김치는 무김치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결구배추는 호배추(중국배추)라고 해서, 결구배추는 중국에서 들어온지 1백여년 밖에 안되었다는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최초 한반도에는 결구배추가 없었고, 기록에 나오는 모든 김치는 무김치라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자는 또 한번 강력한 역공을 펼쳤다. 《고려사절요》, 《삼국사기》에 이미 찢어먹는 통배추 김치 비유 기록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배추와 배추김치를 나타내는 표현은 우리의 오래된 고문헌에 승(㮱), 추승, 승저, 승제, 침승제 등으로 다양하게 나온다.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 남아있는 기록물만해도 서거정의 《사가집(1488년)》, 김창업 《연행일기(1712년)》 등에 배추김치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온다. 그런데도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다고? 고추가 없는 배추김치는 있을 수 없으니,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로 만든 김치만 먹었다고? 아유, ㅈ랄도 이정도면 정성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배추 말고도, 이미 옛날부터 우리나라 전통배추가 있었다. 조금은 작지만, 알찬 조선배추가.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빔밥이란 기록이 1890년경 쓰인 《시의전서》에 처음 등장한다며, 그 이전 비빔밥의 기록이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를 축소한다. 고추장의 역사를 짧게 할 수 밖에 없으니 고추장을 이용한 비빔밥의 역사도 짧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p 113


일반적으로 음식이 옛 문헌에 기록으로 등장한다면, 그로부터 수 백 년전, 수천 년 전에 이미 백성들이 먹고 있던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 《시의전서》에 ‘비빔밥’이 처음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를 100년으로 확언할 수는 없다. 당연히 비빔밥은 이미 16세기 말엽 박동량의 《기재잡기》에 ‘혼돈반’으로, 1724년 권상일이 쓴 《청대일기》에 ‘골동반’으로 한자로 쓴 명칭이 수록되어 있다. 《명물기략》에서는 소리를 빌려와 ‘부비반’으로 표기하였다. 이는 《시의전서》보다 300여 년 앞선 문헌 기록이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도 1819년 《몽유편》에 ‘브뷔음’으로 한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의전서》보다 100여 년 전에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p 114



고추 전래시기를 축소하니 각종 한식의 역사가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비빔밥 역사까지 왜곡되었을 줄 누가 알았나. 뜬금없이 왠 비빔밥이냐고 할 수 있다. 비빔밥을 잘 생각해보자. 비빔밥의 백미는 고추장이다!


간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궁중떡볶이고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는 일반 떡볶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고추로 만든 음식은 서민음식이고, 고추장을 넣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고추나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궁중 음식’이 아니라 ‘제사 음식’이었다. (…) 일반사람이나 군왕이 평소에 먹는 떡볶이는 오늘날의 떡볶이와 같이 고추장 등으로 양념한 떡볶이였다. 《승정원일기》 등에 떡볶이가 나오는 걸로 보아 떡복이가 왕이 좋아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대부가의 남인 이익의 문집 《성호집》에도 떡볶이 기록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도 떡볶이는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의식감》이나 《규곤요람》 등을 보면 서민들은 고추장을 중심으로 양념을 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궁중이나 사대부가들은 전복, 해삼, 쇠고기, 돼지고기 등 서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귀한 식재료를 사용한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 p 118


이제는 떡볶이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고추장 떡볶이도 옛날부터 즐겨 먹었다는거. 이 내용이 생소한 당신, 당신도 한식 역사 왜곡에 세뇌된 사람이다. 이 책을 읽기전 까지는 나역시 그랬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중에 파는 떡볶이가 대중화 된건 1960년대 이후다. 밀가루 수입과 기계를 이용한 밀떡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다.



고추 일본 전래설, 부침개와 주파수의 상관관계 외에도 일본 말이라고는 고스톱 판의 ‘고도리’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닭도리탕이 일본 말이다’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여기에 몇몇 언어학자까지 가세해 어느순간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뒤바끼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의 그릇된 연구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는 잘못된 식품 정보에 의해 우리 음식 역사가 왜곡되고 때로는 누군가 선의의 피해를 겪기도 한다. p 061



한식은 자랑스런 우리 음식이다. 빛내지는 못할망정, 제발 까내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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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다. 정확히는 로마시대 시인 오비디우스가 지은 『변신 이야기』 속 한 챕터의 주인공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의 그 피그말리온이 맞다. 고전 속 피그말리온의 일화에서 파생된거니까. 고전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키프로스에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살았다. 그는 몸을 파는 여성들을 혐오했다. 여성혐오가 심했던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자기 이상에 딱 들어맞는 여인상을 조각했다. 그 여인상은 새하얀 상아로 조각했다. 피그말리온은 언제나 이 여인상과 함께했다. 여인상을 ‘연인’으로 대했다. 피그말리온은 연인에게 옷도 갈아입히고 입맞춤도 했다. 하지만 이 연인은 어디까지나 조각상, 상호작용은 단연 없었다. 결국 피그말리온은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여인상을,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에 감동하여 소원을 들어주었다. 여인상이 생명을 얻어 진짜 여인이 되었고, 그 여인은 피그말리온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이름은 ‘파포스’다.


이 이야기는 ‘진실한’ 사랑 이야기 대표주자가 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심지어 여인에게 이름도 생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은 후대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 원전에는 여인의 이름이 없었다. 



고대에는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각광받았다. 아니 고대를 지나서 중세. 중세를 지나서 근세까지도 쭈욱. 이런 피그말리온 이야기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반대로 이야기해보자. 피그말리온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각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부계사회(남성중심사회)다. 피그말리온이 쓰였던 로마시대는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던 시대였다. 부계사회가 시작되기 이전, 그러니까 철기 문명이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전 세계적으로 모계사회였다는 역사적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확실한 건 그런 사회적 환경에 힘입어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아주 오랜기간 사랑을 받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은 21세기다. 2천년이 흐른만큼 사회상도 바뀌었고, 가치관도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피그말리온이 진정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피그말리온을 해석해보면 이렇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여성혐오가 지나쳐 집안에만 틀어박혀 살던 피그말리온. 심각한 여성혐오자였지만 사실상 집안에서 그가 만들었던 건 하얀 살결을 표현하기 위해 대리석으로 조각한, 아름다운 여인상이었다. 심지어 그 여인상을 실제 여인이라 생각하며, 자기 연인이라 생각했다. 옷갈아입히고, 포옹하고, 입맞추고, 같이 자고.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피그말리온의 여성혐오는 ‘선택적’ 여성혐오라는 사실이다. 즉 피그말리온이 혐오하는 여성은 ‘자기 주장이 있는 여성,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여성’인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그저 자신이 만든 여인상처럼 자기에게 순종하는 여인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피그말리온은 자기에게 순종하면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했다.


아름다우면서 자신에게는 순종적인 여자를 원했던 피그말리온. 주변에 그런 여자가 없어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찌질이. 피그말리온은 그저 찌질한 남자였다. 


피그말리온은 여신 아프로디테 은혜로 여인상이 정말 여인이 되었을 때도, 그녀에게 이름하나 주지 않았다. 아니, 이름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원전 속에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2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주 유명하고 진실한 사랑이야기 중 대표작이 되었다. 심지어 후대 사람이 이 여인상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갈라테이아.

과연 이 이야기는 모두가 인정한 진실한 사랑이야기가 맞을까? 

누군가에게만 듣기 좋은 사랑이야기는 아닐까? 



매들린 밀러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매들린 밀러, 그녀는 고대 고전 연구를 전공자였다. 그녀는 익히 알려진 고전 『갈라테이아』를 다시 썼다. 시점을 바꿔써. 원작이 누군가에게만 좋았던(예컨데 ‘피그말리온’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 시점이었다면, 저자가 쓴 『갈라테이아』는 이름도 없었던 여인 시점이다.


원작에는 없었지만, 분명히 있었을 상황.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는 주제를 위해 생략된 현실적인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살아났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생략되었던, 하지만 누구나 추측가능한 피그말리온의 찌질함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내가 탄생된 이후에 남편은 기를 쓰고 나를 안에 가두어두려고 했지만 하인들 보는 눈도 있었고, 게다가 사람들이 조각가의 아내를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특이한지 모른다는 둥, 그런 미모는 신이나 빚어낼 수 있다는 둥. 그걸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자기 너도나도 남편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남편은 돌을 깎고 또 깎아 처녀를 만들었고, 어느 날 나는 물었다. 그 중에서 살아 움직일 작품이 하나라도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p 15


돌이었지만 사람이 된 여인. 그녀는 항상 침대 위에 누워서, 남자가 고용한 사람들의 감시를 받는다. 남자가 방에 들어왔을 땐 항상 남자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해야한다.


“자고 있나?”

그가 물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야. 이 여자는 대리석에 불과한데.”

그는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들었다.

“오,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는 이런 베필을 찾을 수 었는 것일까요? 이토록 완벽한 여인이 어찌하여 인간이 아니라 대리석이라야 합니까? 만약 그녀가-” p 17


“하지만 분명해, 따뜻하다고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오 여신이시여, 이것이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하여주소서.”

그는 잠시 후에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대고 눌렀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내 생명, 내 사랑이여. 살아나라.”

나는 바로 이 순간, 이슬을 머금은 새끼 사슴처럼 눈을 떠 마치 태양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고 경외와 감사가 담긴 탄성을 조그많게 터트려야 한다. 그러면 그가 나를 따먹는다. p 19


그가 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뭐지?”

나는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은색 실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우리 아이가 남긴 흔적이잖아요. 살이 튼 자국이요.”

그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언제 생긴 거야?”

“아이가 태어났을때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었다.

“보기 싫구먼. 당신이 돌이라면 깎아서 없애버릴텐데.” p 25



생략되었던 고전 속 피그말리온의 찌질함. 그가 정말 이랬을지는 모른다. 그저 가정일뿐. 하지만 적어도 고전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가 절대적으로 여인상에게 친절했던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추측되는 찌질함의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뭐. 진실한 사랑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보기엔 좀 문제가 있어보인다는 것.


물론 이것도 요즘 시대 가치관에 빗대어 하는 말일 뿐, 기백년 흐르면 피그말리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평가가 달라진다 한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까 싶은?


역시 고전소설은 비틀어 읽어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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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섬 제주 유산 - 아는 만큼 보이는 제주의 역사·문화·자연 이야기
고진숙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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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제주 역사·문화에 꽤 관심이 많은 편이다. 왜? 제주도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섬 하나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굵직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반도 본토 역사를 축소하면 제주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수많은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유독 제주를 아꼈다. 여행지로써 제주를 아낀만큼, 제주여행을 할때마다 ‘답사’를 기반으로 제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제주 고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때로는 근·현대사와 관련된 지역을 찾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고대사부터 중세를 지나 근·현대를 거쳐, 모든 시간대에서 일어났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있기도 했다.

이런 내 여행 기질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답사 개념의 제주여행이다보니 어디를 가든 배경지식이 꼭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중에 출간된 제주여행 관련 여행책, 여행에세이, 답사기행문, 제주신화 등을 자주 읽었다. 각각의 책들은 모두 영양가가 높았지만, 그만큼 아쉬운점이 있었다. 이런 책들은 기본적으로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등을 한데 엮어놓은 책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여행’을 중점으로 쓴 여행책인반면, 어떤 책은 제주의 ‘신화’를 담은 역사서, 또 어떤 책은 제주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 등등. 오롯이 하나의 카테고리 기준으로 쓰여진 책들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제주 여행지, 역사 유적지, 제주 문화나 풍속 등을 전부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책들을 전부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었기도 했고. 앞으로도 더 읽을 예정이기도 했고.

그런데, 존버는 승리한다고 했던가! 이번에 제주 여행과 제주 역사, 제주 문화, 제주 풍속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주 여행책이 나왔다. 음 여행책이라고 하기엔 교양서 개념이 더 강하니, 제주 여행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감히 말하건데 이 책은 명실공히 제주 백과사전이다.

극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 책의 이름은 『신비 섬 제주 유산』이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두께가 솔찬히 있었으니까. 두께만 보면 약간 벽돌책 느낌이랄까? 시중에 출간된 일반 제주여행책이나 여행에세이, 제주 신화 역사책 등이랑 비교해봐도 이 책만큼 두께가 두꺼운 책은 흔치 않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범접하기 어려운 책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글 자체가 읽기 쉽게 쓰여져있으니까.

아! 갑자기 떠올랐는데, 이 책의 저자 ‘고진숙’님은 초면이 아니다. 저자의 저서 중 하나인 『제주 4.3을 묻는 십대에게(서해문집)』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다면 어려운 현대사, 그것도 현재 진행형인 제주4.3사건을 청소년에게 알려주는 책을 썼다는 건, 저자가 쓰는 글은 읽기 쉬운 글이자, 이해하기 쉬운 글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신비 섬 제주 유산』으로 돌아와서. 저자의 전작들은 대체로 제주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찾자면 저자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저자. 제주 고씨. 제주 역사속에 오랜 기간 있었던 탐라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삼을나를 떠올리면 쉽다. 삼을나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사람을 말하며, 탐라국을 건국한 시조로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의 시조들. 저자는 이런 역사를 지닌 제주 고씨다.

이쯤에서 제주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래와 같다. 짧게 요약한다고 요약했지만, 그럼에도 길다면 길다.

제주 역사 타임라인

주호국

3세기 무렵 쓰여진 진수의 『삼국지』에는 제주를 ‘주호’라 불렀다. 탐라국이 1세기 무렵 세워졌으니, ‘주호’는 탐라 초기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탐라국(~통일신라)

‘탐라’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서 등장한 건 5세기 무렵 쓰여진 『삼국사기』다. 백제 제후국으로 등장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조공국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만해도 ‘탐라’는 신라를 괴롭히는 9대 오랑캐 중 하나였다(황룡사 9층 목탑). 탐라가 신라 조공국이 된 후, 신라는 정식으로 ‘탐라’라는 국호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탐라를 지배하는 직위인 ‘성주’와 ‘왕자’도 신라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성주 및 왕자 가문은 제주 고씨가 세습하고 있었다.


고려(~무신정권)

신라 멸망 후 고려가 건국되었다. 탐라는 이 때도 고려에 조공하며 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는 고려에 강제 합병되며 ‘탐라군’이 되어버렸다. 고려 행정구역이 되면서, 중앙정부 지방관도 파견되었다. 단, 고려 중앙정부도 탐라의 ‘성주’와 ‘왕자’ 직위를 인정한다. 탐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성주와 왕자에 이어 지방관(고려정부)도 포함되었다. 무신정권 시기 제주 고씨가 세습하던 ‘왕자’ 직위가 제주 양씨에게 넘어간다. 1223년 고려는 ‘탐라’를 ‘제주’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후기(~원 간섭기)

1270년 대몽항쟁이 시작되었다. 여몽연합군에 밀린 삼별초군은 밀리고 밀려서 제주에 도착했다. 친원파였던 제주 양씨가 삼별초에 의해 몰락했다. 본토에서 온 문벌귀족 문씨 가문이 제주 고씨 가문과 결혼동맹을 맺고, ‘왕자’직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원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나라 직할시로 만든 뒤 말 목장 등을 직접 관리한다. 1295년 원은 제주를 간접지배방식으로 바꾼다. 제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어느새 고려정부, 성주 및 왕자 가문에 원나라까지 포함되었다. 원나라가 망한 뒤, 고려 말에 일어난 ‘목호의 난’은 원의 철수를 반대한, 친원 목장주들이 일으킨 난이다. 최영장군이 진압했다.


조선(~중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했다. 조선은 제주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이라는 3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했다. 제주 성주 및 왕자 가문도 폐지했다. 1445년 제주에는 중앙정부를 제외한 기득권층이 사라졌다. 기득권층이 사라졌다고 해서 제주민 삶이 나아지진 않았다. 중앙정부는 제주에 토지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과도한 진상을 요구했다. 중앙정부가 요구한 대표적인 진상품으로는 말, 귤, 전복등이 있었다. 과도한 진상으로 인해 제주 남자들이 제주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주에 여성 노동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제주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반토막나자, 인조 때 이르러 제주에 ‘출륙 금지’ 시행령이 반포되었다. 이는 약 200년간 지속된다.


조선(~후기)

출륙금지령이 지속된 상황에서 엄청난 기후변화로 인해 제주사람들이 굶어죽시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사태의 시급성을 인정하고, 제주에서 상업을 허용했다. 이때 나타난 이가 거상 김만덕이다. 뿐만 아니다. 제주는 고려말 부터 유배지 핫플레이스(!)였다. 특히 조선 중기이후부터는 격화된 당쟁으로 수많은 유학자 및 왕족들이 제주로 유배를 왔다. 당시 제주는 여성 노동이 중심인 사회였고, 따라서 제사권과 재산권도 여성이 중심이었다. 본토와는 매우 이질적인 다른 문화를 지닌 섬이였다. 하지만 유배온 유학자들로 인해 유교가 전파되었고, 이는 제주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특히 남아선호사상 등 여성차별을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현대

일제강점기는 제주를 수탈하는 지배계층이 일제로 바뀌었을 뿐, 제주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진건 없었다. 탐라, 조선, 고려 모든 시기가 제주민들에겐 수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제주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항일운동 및 노동운동을 진행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렇게 한반도가 해방되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하지만 제주는 그때도 제대로된 독립을 맞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린건 대다수의 제주인이 학살된, 제주4.3 사건이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월별로 추천하는 제주 여행지와 관련된 역사 및 문화 등을 소개한다. 제주 역사·문화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였것만, 그럼에도 초면인 내용들이 나와서 포스팅에 옮겨본다.



2월: 신들의 교대 기간, ‘신구간’에 이사하는 이유

제주에는 1만 8천 신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그 흔적이 바로 ‘신구간’이다. 일정 기간 동안 신이 이 땅에 없으니, 어떤 일을 해도 동티날일이 없다. 그러니 이사를 간다면 이때 가라. 뭐 이런 느낌이다. 이 내용은 분명 초면인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일본사에도 관심이 많은 터라, 일본 역사 문화에도 조금 많이 알고 있는 편인데, 일본에서도 제주 신구간과 비슷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절기상 대한 후 5일째부터 입춘 3일 전까지 7~8일 동안 이어지는 구간이다. 대략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가 신구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신들의 교대 기간이라서 세상에 신들이 없다고 한다. 신구간이란 ‘신의 교대 구간’이라는 말의 줄임말 쯤된다. p 071

자연재해가 많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인간들은 모든 재앙과 생로병사를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결코 관대하지 않다. 신들의 땅인 제주에선 더욱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두려워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온갖 신들의 영역이었다. 만일 잘못해서 인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노하게 되면 동티가 난다. 이 두려운 통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제주 사람들을 구원한 시나리오가 ‘신구간’이다. p 072

옆 나라 일본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본 팔백만 신들은 음력 10월에 ‘이즈모 타이샤’에 모여서 이른바 회합을 한다. 해서 이즈모 지역을 제외한 일본 전역은 음력 10월을 ‘신없는 달(칸나즈키)’라고 부르는 반면, 팔백만 신이 모이는 이즈모에선 ‘신있는 달(카미아리즈키)’ 라고 부른다.

 

과학적으로 신구간은 증명 가능한 신의 부재기간, 엄밀하게 말하면 동티를 피할 수 있는 시기이다. 제주학 연구자인 제주대학교 윤용택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일 평균 기온이 5~20℃ 이상이면 여름, 5℃ 미만이면 겨울이라는 계절분류를 가지고 1971년부터 (…). 분석결과 제주에는 일평균 기온 5℃ 이하인 날이 한 해 8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부르는 신구간과 거의 일치하는 8일이었다. 기온이 5℃ 밑으로 내려가면 세균들이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데 5℃ 이상이면 세균이 활개를 펴 사람들을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하고 (…).” - 제주도 ‘신구간’ 풍속에 대한 기후 환경의 이해, 탐라문화 29호

p 073

촘촘하고 단단하고 납작한 초가지붕인 데다 온도와 습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기 때문에 제주의 가옥은 온갖 세균과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집집마다 통시라고 하는 돼지우리 겸 화장실을 두고 살았다. 통시에서 나오는 거름을 쌓아 두었다가 늦가을에 보리 파종을 할 때 썼다. 이렇게 쌓은 낟가리를 ‘눌’이라고 하는데, 제주 사람에겐 이것 또한 두려운 존재라 제주에는 눌굽지신이 살고 있다. 이런 가옥 구조 때문에 제주에선 신구간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거이다. 제주 사람들이 ‘신들의 교대 시간’을 알아낸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p 076

어떤 신화든 그냥 신화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 신화속에는 과거의 현재가 들어있다. 예컨데 건국신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건국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다. 제주의 신구간도 그렇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 속에서 별 탈 없이(이른바 동티나지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보다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은 신화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4월: 삼별초여,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부제: 탐라 왕자?!)

난 개인적으로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고려 중앙정부가 원과 강화교섭한 이후의 삼별초 행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정권의 잔재라고 본다. 이런 삼별초를 드높게 평가했던게, 과거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 출신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뭐. 무엇보다 제주도로 간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점만 봐도 삼별초는 민초들의 대몽항쟁이 아닌, 권력을 놓지 못한 무신들의 발악이라 볼 수 있다.

김통정 신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애기 업개 이야기는 왜 삼별초가 제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망했는지 보여준다. 신화에 의하면 고려 정부군 김방경 부대가 항파두리성에 들이닥치자 성문을 닫았는데 그만 애기업개를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난 애기업개는 김방경 부대에게 성문을 열 방법을 알려 주고 김통정의 탈출 통로와 그를 생포할 방법도 알려 준다. 결국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겐 이런 말이 있다.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 p 139


김통정 신화에 나오는 “애기업개 말도 들어라”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애기업개’는 아기를 업은 사람, 아기를 돌보는 사람, 나이도 어리고 어리숙한 사람 등을 지칭한다. 즉 일반 민초다. 당시 제주에 진을 쳤던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제주에 남아있는 항파두리성 같은 삼별초 진지를 건설할 때 제주 민초들을 이용했으면서, 정작 삼별초는 제주 민초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원나라는 자신과 강화를 맺은 나라는 대우를 해주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나라는 잔혹하게 짓밟는다는 것을. 고려조정은 원나라와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명 〈세조구제(불개토풍)〉이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원나라 황실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는 달랐다. 원나라 입장에서 제주도민은 삼별초를 도운 반역세력이다. 그렇게 여몽연합군(고려조정+원나라) 토벌대상에는 삼별초를 비롯해 제주도민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제주도민을 이용만하고 보호하지 않았으니, 과연 삼별초를 대몽항쟁의 상징이라고 부르는게 맞을까?

탐라 왕자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탐라국 왕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아는 왕자란 그렇다. 그러나 탐라국에서 왕자는 왕의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2인자란 뜻이자 공동 지배자란 뜻이기도 하다. 제주는 보통 고, 양, 부 세개의 성씨가 탐라국을 만들어 다스려 왔다고 했으니 이들이 성주, 왕자 자리를 나눠 가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보다 복작하다. 확실한 것은 마지막 왕자 가문은 문씨 가문이란 것이다. 그 후손들은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383번지에 탐라 왕자 기념탑을 만들고 제주 입도조인 문착을 비롯해어 탐라국 왕자들을 봉안하였다. p 127

제주에서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고, 양, 부 즉 탐라 건국 씨족을 제외하곤 없었다. 문씨 가문이 제주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성주 가문이 중앙 정부에 줄을 대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아 찾아낸 문벌귀족이었다. 제주에 들어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입도조라고 하는데, 탐라국 지배 가문 외에 성씨를 가진 첫 번째 입도조가 바로 이들이다. p 139

성주 가문과 왕자 가문은 고려, 원, 삼별초가 제주를 무대로 벌인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아슬아슬 줄타기에 성공했다. 원, 고려, 탐라국 성주, 왕자까지 가세한 층층시하 핍박으로 탐라국 사람들은 다시 고통속에 빠졌다. p 140

삼별초와는 별건으로 ‘탐라왕자’ 이야기는 오우, 놀라운 내용이다. 제주에 탐라왕자 묘소가 있다는 건 알았으나, 진짜 탐라국 왕자(대충 고려 병합 전) 묘소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탐라왕자의 ‘왕자’는 일반적인 개념의 왕자가 아니었다. 무려 지배계급 직위였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 인정되었던....! 이야 이거 참. 우와. 심지어 세습된 직위였다는 거에 놀랐고, 세습한 성씨가 삼을나를 시조로 둔 고씨, 양씨에 이어 바다 건너 들어온 문벌귀족인 문씨까지 이어질 줄이야. 진짜 제주 역사는 새롭고 짜릿해★




4월: 백비는 일어날 수 있을까_제주4.3

제주의 4월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믿기지 않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4월에는 동백꽃이 진다. 그 모습이 마치 그날 하염없이 쓰러져 간 제주 사람을 닮았다 해서 제주 4.3의 상징 꽃이다. 당시 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로는 절벽, 폭포, 계곡, 바닷가나 움푹한 웅덩이가 많다. 시체가 쌓여도 치우지 않고 대량 학살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이 바다에 버려졌다. 그 시기 제주 사람들은 갈치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p 162

제주 4.3의 시작은 미군정 시대였지만 정작 대학살의 시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였으니 놀랍게도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한 권리’가 어떤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성문화한 것이다. 오로지 법류에 의해서만 이 권리를 제한할 수 있으며, 개인은 재팬받을 권리와 변호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은 제주 사람을 재판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학살에 살아남아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에 대한 절차 역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어떻게 군인이 국민을 향해 ‘초토화 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단지 무장대와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피난처를 구해 주지도 않고 삶의 터전을 불태워 없애고, 젊은 사람이란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어떻게 국가가 어린아이와 노인, 임산부 등 노약자와 비무장 민간인을 단지 무서워서 숨었단 이유로 처형한단 말인가. 헌법을 위반한 것은 국가였다. p 169

평화공원에 있는 ‘비설’이라는 모녀상은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두 살배기 딸을 안고 눈 덮인 거친오름 쪽으로 피신 도중 희생당해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된 엄마와 아이를 기리고자 설치된 조형물이다. 차디란 겨울, 더 이상 오를 데도 없이 산으로 올라야 하는 절박함,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아이를 안은 엄마의 절망이 오롯이 느껴진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준단 말인가. 그저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게 고작이었으리라. p 172

 

제주 4.3 사건 관련해서 많은 포스팅을 해왔으니, 여기서는 가타부타 하지 않기로.




몽골이 남긴 제주 유산

원 간섭기 당시 고려와 원은 서로의 풍습이나 문화 등 여러방면으로 교류를 했다. 그 흔적이 알게모르게 우리 일상에 많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제주는 더했다. 원 간섭기 당시 제주는 본토와는 달리 원나라 직할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제주는 본토보다 원나라의 영향력이 더 강했고, 강했던 만큼 원나라의 풍습이 제주어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제주에 남아있는 몽고의 흔적은 대부분 초면이라, 여기도 정말 놀랍고 새롭고 짜릿하고★

메밀의 원산지는 타타르족의 주 무대였던 동아시아 북부 바이칼호, 만주, 아무르 강변 일대에 걸친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그래서 메밀은 타타르 메밀이라 불리기도 하고 씨앗의 형태가 삼각형이라 삼각형쌀이라 불리기도 한다. 메밀 원산지에서 아주 먼 제주로 메밀 씨앗을 들고 온 이들은 몽골인들이다. 물론 메밀만이 아니라 한국에 가장 많은 외래 식물이 들어온 때가 원 간섭기였다. 전해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몽골인들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이후 탐라 사람들의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메밀농사를 장려헀다고 한다. p 199

비록 몽골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메밀을 전했든 간에 제주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고마운 음식이다. 쌀농사가 불가능한 제주에서는 보리농사가 흉년이면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런 제주 사람들을 구한 것이 메밀이다. 메밀은 아무렇게나 둬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충해에도 강하고 생육기간도 석 달이면 충분하다.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p 200

메밀음식 말고도 제주 음식 문화에서 몽골의 유산은 꽤 많다. 제사 음식중에 상애떡이란 것이 있는데,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찐 빵이다. 상애떡은 쌍화점이란 고려가요에서 나오는 상화라는 중국식 만두가 제주에서 변형되어 만들어진 떡이다. (…) 제주의 음료 중에 쉰다리라는 것이 있다. 먹다 남은 밥을 발효시켜 먹는 음료로 몽골의 타라크에서 나왔다. 수애(순대)는 몽골 군인들의 야전식량인 게데스에서 나온 것이다. 몸국과 같은 탕도 슐랭이라고 하는 몽골 음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p 202

특히 제주 조랑말 역사는 정말 와우. 결과적으로 제주 토종말은 원간섭기 이후로 사라졌고, 현재 남아있는 제주말은 제주 토종마+원나라 말이 교잡종이라는게 참. 이런 제주 조랑말이 조선시대에는 주요 진상품이라, 제주민들 수탈하는 또 하나의 족쇄였다는 사실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확실한 역사 기록으로는 1073년과 1258년 탐라에서 고려 정부에 제주마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나라가 말 목장을 제주에 만들면서 몽골의 말이 들어왔지만 그 말은 엄격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제주 말과 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호의 난으로 제주의 말 목장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50년도 못되어서 말을 관리하는 기관인 병조에서 “제주 목장의 말이 날로 키가 짧고 작아진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 목호들이 전부 사라진 후 말들은 방치되었고, 제주 전통 말과 섞이면서 유전적으로도 다른 말이 나타났다. 이 말이 조랑말이다. p 329

조랑말은 ‘조르모르’라고 하는 몽골말에서 나온 것인데, 조르모르는 기동력을 얻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말의 다리를 묶어서 훈련시키는 기법이다. 제주 조랑말은 이런 흔적을 갖고 있지만 훨씬 왜소하다. 제주 전통 말은 과하마 또는 토마라고 하였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고구려에서 유민이 들어오면서 같이 온 것을 보인다. 이 말이 제주에서 몽골 말과 교잡이 이뤄지면서 조선 초 조랑말로 새롭게 등장한 듯하다. p 329

말은 제일 먼저 제주에서 선정된 진상품이었다. 매해 200필은 기본으로 바쳐야 했고 임금이 탈 말도 20필 씩 매해 바쳐야 했다. 무슨 제사는 그리 많은지 그때에 맞춰 바쳐야 했고, 혹시 날이 날지 모르니 여분의 말도 있어야 했다. (…) 제주 말 목장의 총 책임자는 목사와 그 아래 층층시하 관리들이었지만 실제 말을 기르는 사람은 목자였다. 이 목자를 제주에선 테우리라고 한다. 테우리는 목자란 뜻의 몽골어이다. 테우리는 나라에서 정한 책임을 벗을 수가 없다. 벗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역할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워낙 일이 고되어서 제주에서도 가장 천한 일로 여겨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p 332

 

고렴(조문), 고적(부조떡), 구덕(바구니), 복닥(껍질, 모자), 허벅(동이), 호랑(처마), 술(줄), 살래(찬장), 눌(낟가리), 촐래(반찬) 같은 제주어는 몽골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를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쓰이는 ‘거리’도 몽골 전통 천막인 ‘게르’에서 빌려 온 말이다. ‘웡이자랑’도 몽골의 자장가였다고 한다. 몽골어 ‘모르’는 제주어 ‘ ’로 정착된다. ‘혼저’도 ‘빨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했고, 아기, 마누라 등도 몽골어라고 한다. p 374

정말 제주민들은 섬 내 지배계급에 치이고, 본토 사람들에 치이고, 외세에 치이고. 다시금 느끼지만 제주민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탈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모진 수탈과 핍박을 견뎌가며, 제주 역사·문화를 지켜온 제주도민들이다. 물론 출륙금지령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로 인해 제주를 나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이유로든, 자의든 타의든 본토와는 다른 제주 역사·문화를 만들어온 것은 제주도민들이며다. 본토와는 다른 문화로 제주는 본토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받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 외지인이 많이 유입되면서, 제주의 역사·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자체에서도 꽤 오랜기간 경제를 부흥시키고자 외지인 유입에 혈안을 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요즘 제주 곳곳에서 그들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불씨가 보인다는 점이랄까? 부디 제주가 제주답게 있을 수 있기를.

올 겨울에는...뿡뿡이와 동백꽃보러 제주여행에 도전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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