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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
최경진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24년 6월
평점 :
이 역사책 『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는 오랜만에 필기하며 공부하는 자세로 읽은 역사책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하타 씨에 대한 내용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짜 근래에 읽었던 한일 고대사 역사책 중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은 책! 진짜 한일 고대사, 도래인 역사를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매우 추천하는 역사책이다.
본 책의 리뷰는 책 요약정리에 기반한 내용이므로 스크롤이 엄청 길 예정.
『신찬성씨록』, 『일본삼대실록』, 『일본서기』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秦 氏/진 씨)의 시작을 찾아보자.
1. 기원전 207년 진나라 멸망 후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
2. 기원후 195년(쥬아이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공만왕(진시황11대손)이 일본 규슈 시모노 세키에 상륙, 귀화 → 시모노세키 ‘이미노미야 신사 누에씨 도래 기념비’
3. 기원후 286년(오진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궁월군(진시황 12대손, 공만왕 子) 120현 백성들과 일본으로 이주. 최초 상륙지는 알려지지 않음.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에 정착
역사학자 이노우에 미츠로는 “진나라가 망한 때가 기원전 207년이고, 일본에 오기까지 약 700년 가까이 가야에 살았으므로, 하타씨가 진씨 왕조의 자손으로 중국인이라는 설은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하타 씨의 선조인 공만왕이 한반도로부터 규슈 부근인 시모노세키에 이주해 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p 047
9세기에 집필된 족보 『신찬성씨록』은 유명 가문들의 조상 유래가 적혀있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조상에 대한 근거자료를 해당 씨족이 스스로 제출해야 했기에, 자기 가문을 돋보이기 위하여 일부를 조작하거나 부풀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타씨가 말한 ‘선조는 진시황’이라는 주장은이 그 중 하나가 아닐런지.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진나라 유민들이니 진시황의 후손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로 건너온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때까지 약 700년 가량을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았기에, 그들 말처럼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타 씨 (秦 氏/진 씨)가계도 : 진시황 → 공만왕(AC 2) → 궁월군(AC 3) → 하타 사케키미(AC 5) → 하타 카와카츠(진하승 AC 5/교토 교류지 목상) →하타 와카 → 하타 하루카제
그렇다면 하타 씨가 일본으로 귀화하기 전 약 700년간 살았던 곳은 한반도 어느 지역인은 어딘지를 추정해보자.
1.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백제인이다.
2.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가야인이다.
3. 하타 씨는 신라에 흡수된 도시국가 파단국(현재 울진) 출신이다.
4. 하타 씨는 신라 노예 계층이 살던 부곡, 고지도(현재 부산 영도) 출신이다. (『하리마국풍토기』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의 출신지에 대해선 이렇게 총 네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도래인에 대해선 우리나라 역사서에선 내용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일본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하타 씨 촐신지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기사를 기본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궁월군에 대한 기사에 백제, 일본, 가야가 모두 나오다보니, 어느 한 곳이 강하게 치고나오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제일 크게 지지를 받는 설이 있으니 단연 ‘가야인’ 설이다. 아래에 후술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 ‘신라가 방해하여 가야에서 머물고 있다’는 기사와, 가야에서 규슈 지방으로 들어가는 바닷길인 현해탄을 수호하는 세 여신(아마테라스 딸), 현해탄 3신 중 한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 모시고 있는 점 등이 근거다.
반면에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던 파단국 및 고지도 출신에 대해선 꽤 오랫동안 무시받던 가설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위상이 바뀌었다. 특히 ‘하타 씨는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1988년 국내에서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 ‘파단국’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덕분에 하타 씨가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렸다. 뿐만아니라 결과적으로 파단국 역시 신라영토이기에, 신라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래들어 많은 힘을 받고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참고로 파단국의 ‘파단’은 일본어로 ‘하타’로 읽힌다.
고지도 출신이라는 가설은 일본의 『하리마국 풍토기』, 우리나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추측한 내용이다. 『하리마국 풍토기』에 의하면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학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부산 고지도를 발견했다.
확실한건 울진 파단국, 부산 고지도 모두 지배계층에게 억압받던 계층들이 살던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파단국은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사라졌고, 고지도는 노예계층이 사는 부곡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억악받던 계층은 살던 곳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가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궁월군 기사에 보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이 나온다. 궁월군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 왕실은 궁월군 귀화를 돕기 위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을 파견한다. 명에 따라 한반도로 넘어온 ‘가츠라기 소츠히코’는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 일부를 데리고 일본으로 넘어온다. 이후 가츠라기는 다시 한번 한반도로 넘어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 왕실에서 보낸(?) 여성과 가정을 꾸리며 한반도에 정착하고 만다(『백제기』 원전은 소실됨).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가 데려왔던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이 정착한 곳이 위에서도 언급했던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이다. 그들은 제철기술을 보유한 대장장이, 즉 제철 기술자이기도 했다. 경남 양산 백성들은 가모 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고사기』에 따르면 가모 씨는 오사카 스에무라 출신인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스에무라는 스에키, 즉 가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가야토기를 만들던 마을이었다. 즉 가모 씨는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던 가야 출신이었다.
나라현 고세에는 가모 씨가 세운 세 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다 다카카모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는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의 총 본산이기도 하다(교토 시모가모, 카미가모 역시 도래인 가모 씨 계열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일본에선 스사노오와 함께 최고위 신 중 하나이자 태양의 아들신이다(스사노오 역시 한반도 출신). 그런 신 이름에 들어간 한자중 ‘스키(또는 사히)’를 뜻하는 한자는 우리말로 호미 또는 작은 농기구를 뜻하는데, 보통 한반도와 연관된 명칭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다.
『고사기』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가모 씨와 함께, 미와 씨도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 전한다.
(광개토대왕비 및)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400년에 백제, 금관가야, 일본이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종발성이 무너졌고, 많은 가야인들이 규슈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 이주민들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미와산으로 옮겨와 미와 씨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와 씨의 선조는 5세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6세기경에는 오사카의 스에무라에 정착했으며, 이후 미와산으로 옮겨 미와 신사의 제사를 지냈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오타타네코가 가야인들의 도자기 마을인 스에무라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 미와 씨와 가모 씨의 선조라는 『고사기』의 기록을 합치면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p 117
다시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도움으로 나라현 고세 지역에 터를 잡았던 가모 씨, 하타 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456년 8월에 가모 씨와 하타 씨가 나라현 고세 지역을 떠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얀코 천황 때 발생한 ‘마요와 왕의 변란’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손자가 사건에 연루되며, 가츠라기 가문이 망한다. 가츠라기 가문에 후원을 받던 가모 씨와 하타 씨는 나라현을 떠나, 교토에 터를 잡았다. 가모 씨는 가모강 근처에, 하타 씨는 가츠라강 왼편에.
가모강에 자리잡은 가모 씨는 두 개의 신사를 창건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다. 가츠라강 왼편에 자리를 잡은 하타씨는 그 일대를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시켰다. 지금의 교토 서쪽 아라시야마, 우즈마사 일대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가모씨는 크게 야마시로 가모씨와 야마토 가모씨로 나뉜다. 야마토 가모씨는 위에서 언급한 가츠라기 고세에서 터를 잡은 씨족이다. 야마시로 가모씨는 지금의 와카야마현에서 시작된 씨족이라 한다. 크게 보면 고세나 와카야마현 모두 관서지방으로, 두 가모씨의 뿌리가 같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신찬성씨록 야마시로국 신별』
(진무 천황이) 야마토로 향할 떄, 산중이 험준하여 산야를 해매다 길을 잃었다. 이때 간무스비노 미코토의 손자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가 큰 새로 변하여 날아올라 길을 안내, 드디어 야마토에 도착했다. 천황은 그 공로를 어여삐 여겨 특별히 포상하여 아메노 야타가라스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그 이름의 시작이다. p 123
『야마시로국 풍토기』 가모 신사
히무카 소의 산정에 강림하신 신,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는 진무천황의 동정에 앞장서고, 야마토의 가츠라기산의 꼭대기에 머무셨다. 여기서 야마시로국의 오카다의 가모(지금의 교토후 기즈가와시 가모쵸키타)에 이르렀다. 야마시로강(지금의 기즈강)을 따라 내려가 가츠라강과 가모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강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좁지만 맑고 깨끗한 이시가와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시가와의 세미노 오가와라고 이름지었다. 여기에서 거슬러 올라가 구가노쿠니의 북쪽의 산록에 진좌하셨다. 이후 이름하여 가모라 불렀다. p 124
교토로 옮겨간 가모씨와 하타씨는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타씨와 가모씨 가문이 같은 전승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방증이다.
「하타 씨 본계장」은 하타 씨의 큰집인 고래무네 키미가타가 만든 『본조월령』이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게 90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당시 연중행사의 유래와 내용, 진행 방법 등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하타 씨는 883년 고래무네라는 성씨를 천황으로부터 내려 받아, 하타 씨의 큰집이 되었다.
하타 씨 딸이 가도노강(지금의 가츠라강)에서 흘러온 화살을 주워 침실에 꽂아 두었는데,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이상하게 여겨 아기의 아버지를 찾아보니 그 아버지가 바로 하타 씨가 창건한 마츠오 대사의 신인 마츠오 대명신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모 씨가 하타 씨의 사위가 되고, 하타 씨는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의 제사를 가모 씨에게 맡기게 된다. 한편 가모 씨 가문에서도 하타 씨 가문과 비슷한 내용의 전승을 가지고 있다. p 128
『연기식』 규정은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축제(가모축제/아오이축제)에 관한 것으로 각 신사에서는 제사관인 네기와 신사 관리인인 하후리르 한 명씩 참가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모 씨 행사에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도 같은 수의 인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규칙이 옛날부터 문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원래 이 가모 축제가 두 가문의 공동 축제임을 나타낸다. p 132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는 ‘양자 입양설’이 있다. 대대로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제사를 담당하는 ‘오니시 가문’의 계보에 따르면, 교토의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의 ‘하타 토리’와 전국 3만 개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인 후시미 이나리 대사를 지은 ‘하타 이로구’는 본래 가모 씨 태생이었으나 이후 하타 씨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나리 대사의 홈페이지에 있는 「오니시 가계도」를 보면 “하타 이로구는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의 24세손인 가모 아가타누시노 쿠지라의 막내아들로~” 하므로, 원래는 하타 이로구가 가모 가문의 자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p 133
읽던 중 놀라운 TMI 하나. 도쿠가와 가문과 가모 가문 문장이 비슷한데, 이 이유가 도쿠가와 본래 성씨인 ‘마츠다이라 씨’에 있었다. 미가와국 가모군 마츠다이라 마을(현재 아이치현)에 있는 가모 신사에 종사했단 가문이 바로 마츠다이라 가문이었다.
이번엔 하타씨 이야기로 넘어와서, 하타씨는 규슈 지역에 터를 잡은 부젠 하타씨와 간사이 지역(오사카, 나라, 교토 등)에 터를 잡은 기나이 하타씨로 구분된다.
▶ 부젠 하타 씨
713년에 겐메이 천황은 각 지역의 지형, 지명의 유래, 특산물 등을 기록한 풍토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중 『부젠국 풍토기』에는 “부젠국 다가와군 가와라산에 신라의 신이 스스로 건너와 살았으며, 철과 석탄이 풍부했다”라는 내용이 남겨있다. 부젠국은 지금의 북규슈 지역에 위치했으며, 다가와군 가와라산은 지금의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가와라 마을에 있는 산으로, 광산 지역으로 유명하다. 8세기 이전부터 철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지금도 시멘트 생산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가와라 마을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마을 이름인 ‘가와라’는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8세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철과 석탄을 캐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053
‘신라의 신’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은 사실상 ‘가야의 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당 책이 만들어진 713년 이미 가야가 멸망하고, 그 땅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신라의 신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도래인이 이동했을 바닷길을 따지자면, 신라인가 아닌 가야에서 출발했을 확율이 높다.
신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대체로 동해 남부해안이나 동해안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이 바닷길을 이용할 경우 도착지점은 이즈모나 츠루가 지역이다. 반대로 가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남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보통 현해탄을 가로질러 규슈 지역에 도착한다.
이 마을에 정착한 하타 씨의 친척인 가라시마 씨는 가야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약칸강의 오른쪽에는 우사 지방의 터줏대감인 우사 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모토산 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큰 바위를 지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가라시마 마을의 하타씨는 자신들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과 우사 씨의 세 바위 신을 합쳐서 ‘야와타 신’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신이나 문화가 합쳐지는 ‘습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습합을 통해 하타씨와 우사 씨는 서로 협력하며 두 씨족의 안정을 택했다. p 063
야와타신으로 합쳐진 하타씨의 가야 여신과 우사씨의 지모 3신. 여기서 주목할 점이 우사씨의 지모 3신이다. 이들은 야마테라스의 세 딸로, 현해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현해탄은 가야인이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이다. 거기다 세 딸 중 하나인 이치키시마노히메는 현재 오키섬에서 모시고 있으며, 오키섬은 ‘신이 머무는 섬’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또한 이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도 모시고 있는데, 마츠오 타이샤는 하타씨가 설립한 신사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넘어온 신이며, 스사노오와 관련된 수 많은 이야기들은 전부 신라와 관련되어있다. 특히 스사노오가 지니며, 오로치를 헤치웠던 칼은 ‘카라쿠니마루’라 하며 현재 일본의 삼종신기 중 하나다. 따라서 스사노오의 누나인 아마테라스 역시 한반도와 연관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하타씨의 신과 우사 씨의 신이 습합하여 탄생한 ‘야와타 신’은 6~7세기가 되어 또 한번 그 모습이 바뀐다. 진구 덴노, 오진 덴노(진구子)가 야와타 신에 추가되어, ‘야와타 3신’이 된 것이다. 여기서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진구 덴노’ 부분이다. 한국사에서는 보통 신공 왕후로 부르며,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보는 편이다(물론 왜곡한 당사자들은 현대 일본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사기』에 진구 덴노가 신라 왕족인 ‘천일창(아메노히보코)’의 후손으로 적혀있다. 이 인물은 신라 출신 대표격 도래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연오랑으로 추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야와타 3신’은 기존 하타씨가 모시던 가야 여신과 신라계 도래인 후손인 진구, 진구의 아들 즉 한반도 출신 신이라 할 수 있다.
▶ 기나이 하타 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귀화한 가야인들 나라현에 정착하여, 오사카, 교토 등 일대로 퍼져나갔다. 특히 교토는 하타 씨와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타 씨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마츠오 타이샤, 코노시마 신사, 고류지 등 교토에서 유명한 신사와 절 대부분은 하타 씨가 창건하였다. 심지어 신사마다 성격이 다른데, 그만큼 하타 씨가 많은 산업에 종사하며 부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농업, 코노시마 신사/ 양잠, 마츠오 타이샤/양조 등)
하타 씨가 보유한 주 기술이 토목기술(제방공사)이었다. 일본은 대부분 도시에 큰 강줄기가 있었기에, 도시개발을 위해서는 제방공사가 필수였다. 그러다보니 도시마다 제방공사를 위해 강 주변에 대규모로 거주하며, 제방을 쌓았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있는 큰 강줄기 주변에는 하타씨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있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 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도 하타 씨 작품이다(연장선상에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한 것 역시 하타 씨다). 결론적으로 고대 일본 도시 건설에는 하타 씨가 중심에 있었고, 그로 인해 하타 씨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쌓았다.
이렇게 토목기술로 쌓은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하타 씨는 농업, 양잠, 양조 등 여러 생산 산업 기술을 확장하며, 부와 명성을 쌓았다. 고대 일본의 생산업은 하타 씨가 없으면 멈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 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고, 천황에게 성씨도 하사받는 등 전방위적으로 위세를 펼쳐나간다.
나라현 시키군에 다와라모토쵸가 있는데, 이 지역은 고대부터 한반도 이주민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이다. 이 마을 부근에 가라히토노이케가 있는데, 『일본서기』 276년 9월 오진 천황 때에 고려인, 백제인, 가야인, 신라인을 동원하여 이 저수지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456년 8월에 ‘마요와 왕의 변란’이 일어나 하타 씨와 가모 씨는 가츠라기 고세를 떠났다. 교토로 향하던 하타씨 일부는 이곳에 정착하여 하타 마을을 세웠다. p 077
471년 유라쿠 천황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하타 씨를 하타노 사케기미에게 관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들을 잘 관리하여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쳐 우즈모리마사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우즈모리마사’는 이후 우즈마사로 바뀌어 지금까지 교토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쳤다는 이 이야기는 하타 씨가 매우 부유한 집단이었음을 알려준다. p 084
스이코 천황 시대인 603년 11월, 하타 카와카츠는 신라 불상을 쇼토쿠 태자로부터 물려받아 교토의 고류지를 창건했다. 쇼토쿠 태자는 고모 스이코 천황으로부터 황태자로 지명받았으나 사망하여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바로 하타 카와카츠였다. p 085
『속일본기』 746년 3월에 하타노이미키 아사토모라는 사람이 가즈에노 츠카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즈에노 츠카사는 세금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로, 이 자리는 지금도 이어져 일본의 국가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재무성 주계국이 되었다. p 085
한반도에서 건너온 하타 씨는 어느 한 가족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같은 한반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여, 거대한 공동체를 조직하여 ‘하타 씨’라는 성씨로 묶인 거대한 집단이다. 이들이 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기술은 도시 건설에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사람의 의식주에 중요한, 그 어떤 기술보다도 절대적 우위를 지닌 기술들이었다. 그렇기에 하타씨는 이 기술들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쌓았고, 권력의 최측근까지 올라간 것이다. 540년에 이미 거대 집단이 하타 씨는 700년 경에는 전국 어디에나 살었다.
하타 씨만 이야기했지만, 이 책 제목은 ‘하타 씨’와 ‘겐지’가 같이 들어가있다. 겐지 씨는 신적강하된 황자가 받은 성씨 중 하나이자, ‘미나모토 씨’라 부르는 유력한 무사가문 중 하나다. 천황가 핏줄을 잇는, 권세 막강한 미나모토 씨.
미나모토씨 자제들은 성인식을 도래인 신사에서 지냈다. 가마쿠라 막부를 제창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도 그러했다. 과거에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대한 역사책을 읽었었는데, 해당 책에서 미나모토 씨 후손들은 대대로 도래인 신사에서 성인식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성인식을 치룬 신사는 야와타신, 가모명신,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사였다. 심지어 그들은 ‘신라겐지’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물론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때 대체 미나모토 씨가 신라 도래인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데 있었고, 생각보다 싱거웠다. 겐지 가문(정확히는 가와치 겐지 가문) 후손이 도래인 신사에서 진행한 성인식은, 그저 ‘보은’으로 인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뭐 책을 보시라. 이하 생략!
대신 겐지가문이 섬겼던, ‘신라명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야와타 신과 가모명신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니). 신라명신은 도래인 역사에서 왕왕 나오기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신이다. 특히 교토 엔랴쿠지에 가봤던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신이기도 하다(아래 5번 관련). 신라명신에 대해선 보통 아래 가설들이 유명하다.
고대 시가현에 살았던 신라인이 모시던 신: 시가현은 고대부터 동해안 출신의 도래인들이 집단 거주한 지역이다. 특히 정창원 문서, 동대사 문서, 속일본기, 신찬성씨록 등에 따르면 고대 시가현 한반도 출신 343명 중 60%가 하타 씨 라고 한다. 시가현은 하타 씨의 왕국이었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망명한 백제 유민들도 시가현에 자리를 잡았다.
1. 이 지역(시가현) 세력가 오토모 스구리 집안이 모시던 신: 오토모 스구리 집안 역시 한반도에서 넘어온 집단이다.
2. 당나라 유학파 스님 엔친이 귀국할 때 배 위에 나타났던 신: 일본에 널리 알려진 학설이다.
3. 천태총 사문파와 산문파가 서로 싸울 때, 산문파가 모시는 적산명신에 맞서기 위해 사문파가 만든 신: 위 엔친 스님과, 아래 엔진 스님 파벌싸움에서 나온 학설이다.
4. 장보고의 화신: 당나라 유학중이던 엔닌 스님이 장보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교토 엔랴쿠지에 신라명신을 모셨다.
5. 그 외 기타: 각 지역 도래인들이 고향에서 모셔온 신
일본에서는 1번과 3번이 가장 대중적인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5번이 가장 대중적인 학설이다. 우리나라에서 5번이 가장 대중적인 이유는 관련 드라마로도 방영된 소설 『해신』과 《역사스페셜》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 역시 ‘신라명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꽤 오래전 보았던 《역사스페셜》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뿐이다. 고대 일본에서 믿던 ‘신라명신’은 위의 가설 속 성격과 조금 다르다.
(후쿠이현 이마죠) 이마죠 마을의 신라명신사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1615~1624년 사이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에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지금도 후쿠이 광산, 난죠 광산, 이마죠 광산이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모노시, 가네가스 등의 쇠와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남아있다. 이는 이 지역에 광부나 주물공,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p 151
(시마네현 이즈모) 스사노오 미코토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신으로, 일본 최고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이다. 이 신이 일본에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히이강 상류에 있는 나카유노무라 마을의 도리가미센츠산이다. (생략) 신화시대의 스사노오의 전승이 남아있는 마을인 나카유노무라에 신라명신이 있었던 사실은 이 마을이 옛날부터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신라명신이 모셔진 곳은 오래전부터 철광산 지역이었다. p 153
(효고현 히메지) 아케다 신라명신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는 시라쿠니 신사와 히로미네 신사가 있다. 전국의 우두 천황을 모시는 신사의 총본산인 히로미네 신사는 옛날에는 이 신을 신라명신이라 부르고 모셨다고 한다. 우두 천황은 신라에서 돌아온 스사노오를 가리킨다. 히메지시는 지금도 열쇠를 뜻하는 가기마치, 대장장이 마을인 가지마치, 칼을 만드는 카타나데 마치 등 철과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p 154
(시가현 오츠)교토 야마시나부터 신라명신이 있는 나가라산 원성사까지 양질의 화강암 지대인 오사카 제철 유적이 있으며, 다카시마군에는 약 30여 개의 고대 제철 유적이 흩어져 있다. 또한 아사이군과 츠루가에 걸쳐서 10여 개의 유적이 남아있다. 고대 제철 유적이 많은 시가현에서는 광부들이 신라명신을 철강신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크다. p 157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과 남아있는 신라명신 신사들은 전부 고대 일본 제철 유적과 맞닿아 있었다. 거기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야와타 신’과 ‘가모 명신’도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 하타 씨와 가모 씨가 모시는 신이었다.
즉 겐지가문, 미나모토 가문 성인식을 주관한 신사의 신들(신라명신, 야와타신, 가모명신)은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들이 모시던 일종의 대장장이신이었으며, 단지 신을 모시는 집단과 지역이 달라짐에 따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성격은 같았다.
석기 생활만 하던 고대 일본에 신도시 건설을 할 수 있도록 우수한 제철기술과 토목 기술을 가져온 도래인들. 그들은 그로 인해 일본 권력 가까이에 있었고, 스스로 권력가가 되기도 했다. 도래인 성씨에서 파생된 무수히 많은 성씨들 중 일부는 전국시대에 내노라했던 유력한 무사가문이 되기도 했다(‘시미즈’ 가문이 하타 씨에서 파생된 가문이다).
고대 일본을 건설하고, 일본 권력과 가까이 있었던 그들(천황가가 도래인 후손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도래인의 족적을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관련된 모든 흔적이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혹시나 도래인에 대해 알게되어도, 잠깐 뿐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에선 도래인의 흔적을 축소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도래계 신사가 이름이 바뀐게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일본의 역사왜곡 범주에, 도래인의 역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