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
최경진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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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책 『가야의 하타 씨와 일본의 겐지 무사』는 오랜만에 필기하며 공부하는 자세로 읽은 역사책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하타 씨에 대한 내용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짜 근래에 읽었던 한일 고대사 역사책 중 정말 많은 도움을 받은 책! 진짜 한일 고대사, 도래인 역사를 조금 더 깊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매우 추천하는 역사책이다.

본 책의 리뷰는 책 요약정리에 기반한 내용이므로 스크롤이 엄청 길 예정. 




『신찬성씨록』, 『일본삼대실록』, 『일본서기』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秦 氏/진 씨)의 시작을 찾아보자.


1. 기원전 207년 진나라 멸망 후 유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

2. 기원후 195년(쥬아이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공만왕(진시황11대손)이 일본 규슈 시모노 세키에 상륙, 귀화 → 시모노세키 ‘이미노미야 신사 누에씨 도래 기념비’

3. 기원후 286년(오진덴노), 한반도에서 살던 궁월군(진시황 12대손, 공만왕 子) 120현 백성들과 일본으로 이주. 최초 상륙지는 알려지지 않음.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에 정착


역사학자 이노우에 미츠로는 “진나라가 망한 때가 기원전 207년이고, 일본에 오기까지 약 700년 가까이 가야에 살았으므로, 하타씨가 진씨 왕조의 자손으로 중국인이라는 설은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하타 씨의 선조인 공만왕이 한반도로부터 규슈 부근인 시모노세키에 이주해 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p 047



9세기에 집필된 족보 『신찬성씨록』은 유명 가문들의 조상 유래가 적혀있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조상에 대한 근거자료를 해당 씨족이 스스로 제출해야 했기에, 자기 가문을 돋보이기 위하여 일부를 조작하거나 부풀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타씨가 말한 ‘선조는 진시황’이라는 주장은이 그 중 하나가 아닐런지.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진나라 유민들이니 진시황의 후손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로 건너온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때까지 약 700년 가량을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았기에, 그들 말처럼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타 씨 (秦 氏/진 씨)가계도 : 진시황 → 공만왕(AC 2) → 궁월군(AC 3) → 하타 사케키미(AC 5) → 하타 카와카츠(진하승 AC 5/교토 교류지 목상) →하타 와카 → 하타 하루카제



그렇다면 하타 씨가 일본으로 귀화하기 전 약 700년간 살았던 곳은 한반도 어느 지역인은 어딘지를 추정해보자. 


1.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백제인이다.

2. 하타 씨는 『일본서기』 기록에 따라 가야인이다.

3. 하타 씨는 신라에 흡수된 도시국가 파단국(현재 울진) 출신이다.

4. 하타 씨는 신라 노예 계층이 살던 부곡, 고지도(현재 부산 영도) 출신이다. (『하리마국풍토기』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




한반도 도래인 하타 씨의 출신지에 대해선 이렇게 총 네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도래인에 대해선 우리나라 역사서에선 내용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일본 역사서에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하타 씨 촐신지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기사를 기본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궁월군에 대한 기사에 백제, 일본, 가야가 모두 나오다보니, 어느 한 곳이 강하게 치고나오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제일 크게 지지를 받는 설이 있으니 단연 ‘가야인’ 설이다. 아래에 후술하겠지만, 『일본서기』에서 ‘신라가 방해하여 가야에서 머물고 있다’는 기사와, 가야에서 규슈 지방으로 들어가는 바닷길인 현해탄을 수호하는 세 여신(아마테라스 딸), 현해탄 3신 중 한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 모시고 있는 점 등이 근거다.



반면에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던 파단국 및 고지도 출신에 대해선 꽤 오랫동안 무시받던 가설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위상이 바뀌었다. 특히 ‘하타 씨는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1988년 국내에서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 ‘파단국’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덕분에 하타 씨가 파단국 출신이라는 가설에 많은 힘이 실렸다. 뿐만아니라 결과적으로 파단국 역시 신라영토이기에, 신라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래들어 많은 힘을 받고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참고로 파단국의 ‘파단’은 일본어로 ‘하타’로 읽힌다. 



고지도 출신이라는 가설은 일본의 『하리마국 풍토기』, 우리나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추측한 내용이다. 『하리마국 풍토기』에 의하면 하타씨 일족인 고치 씨 출신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이를 토대로 일본이 학자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부산 고지도를 발견했다. 



확실한건 울진 파단국, 부산 고지도 모두 지배계층에게 억압받던 계층들이 살던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파단국은 신라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사라졌고, 고지도는 노예계층이 사는 부곡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억악받던 계층은 살던 곳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가는 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궁월군 기사에 보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이 나온다. 궁월군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 왕실은 궁월군 귀화를 돕기 위해 ‘가츠라기 소츠히코’라는 인물을 파견한다. 명에 따라 한반도로 넘어온 ‘가츠라기 소츠히코’는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 일부를 데리고 일본으로 넘어온다. 이후 가츠라기는 다시 한번 한반도로 넘어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신라 왕실에서 보낸(?) 여성과 가정을 꾸리며 한반도에 정착하고 만다(『백제기』 원전은 소실됨).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가 데려왔던 낙동강 유역에 살던 하타 씨와 경남 양산 백성들이 정착한 곳이 위에서도 언급했던 ‘나라현 가츠라기 고세’ 지역이다. 그들은 제철기술을 보유한 대장장이, 즉 제철 기술자이기도 했다. 경남 양산 백성들은 가모 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고사기』에 따르면 가모 씨는 오사카 스에무라 출신인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스에무라는 스에키, 즉 가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가야토기를 만들던 마을이었다. 즉 가모 씨는 제철 기술을 가지고 있던 가야 출신이었다.



나라현 고세에는 가모 씨가 세운 세 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다 다카카모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는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의 총 본산이기도 하다(교토 시모가모, 카미가모 역시 도래인 가모 씨 계열 신사다). 다카카모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일본에선 스사노오와 함께 최고위 신 중 하나이자 태양의 아들신이다(스사노오 역시 한반도 출신). 그런 신 이름에 들어간 한자중 ‘스키(또는 사히)’를 뜻하는 한자는 우리말로 호미 또는 작은 농기구를 뜻하는데, 보통 한반도와 연관된 명칭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다.


『고사기』에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가모 씨와 함께, 미와 씨도 ‘오타타네코’의 후손이라 전한다.



(광개토대왕비 및)한국과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400년에 백제, 금관가야, 일본이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돕기 위해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종발성이 무너졌고, 많은 가야인들이 규슈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 이주민들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미와산으로 옮겨와 미와 씨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와 씨의 선조는 5세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6세기경에는 오사카의 스에무라에 정착했으며, 이후 미와산으로 옮겨 미와 신사의 제사를 지냈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오타타네코가 가야인들의 도자기 마을인 스에무라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 미와 씨와 가모 씨의 선조라는 『고사기』의 기록을 합치면 오타타네코가 가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p 117



다시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도움으로 나라현 고세 지역에 터를 잡았던 가모 씨, 하타 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456년 8월에 가모 씨와 하타 씨가 나라현 고세 지역을 떠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얀코 천황 때 발생한 ‘마요와 왕의 변란’이라는 사건 때문이다. 이때 가츠라기 소츠히코의 손자가 사건에 연루되며, 가츠라기 가문이 망한다. 가츠라기 가문에 후원을 받던 가모 씨와 하타 씨는 나라현을 떠나, 교토에 터를 잡았다. 가모 씨는 가모강 근처에, 하타 씨는 가츠라강 왼편에.



가모강에 자리잡은 가모 씨는 두 개의 신사를 창건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시모가모 신사, 가미가모 신사다. 가츠라강 왼편에 자리를 잡은 하타씨는 그 일대를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번성시켰다. 지금의 교토 서쪽 아라시야마, 우즈마사 일대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가모씨는 크게 야마시로 가모씨와 야마토 가모씨로 나뉜다. 야마토 가모씨는 위에서 언급한 가츠라기 고세에서 터를 잡은 씨족이다. 야마시로 가모씨는 지금의 와카야마현에서 시작된 씨족이라 한다. 크게 보면 고세나 와카야마현 모두 관서지방으로, 두 가모씨의 뿌리가 같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신찬성씨록 야마시로국 신별』

(진무 천황이) 야마토로 향할 떄, 산중이 험준하여 산야를 해매다 길을 잃었다. 이때 간무스비노 미코토의 손자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가 큰 새로 변하여 날아올라 길을 안내, 드디어 야마토에 도착했다. 천황은 그 공로를 어여삐 여겨 특별히 포상하여 아메노 야타가라스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것이 그 이름의 시작이다. p 123



『야마시로국 풍토기』 가모 신사

히무카 소의 산정에 강림하신 신,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는 진무천황의 동정에 앞장서고, 야마토의 가츠라기산의 꼭대기에 머무셨다. 여기서 야마시로국의 오카다의 가모(지금의 교토후 기즈가와시 가모쵸키타)에 이르렀다. 야마시로강(지금의 기즈강)을 따라 내려가 가츠라강과 가모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러 강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좁지만 맑고 깨끗한 이시가와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시가와의 세미노 오가와라고 이름지었다. 여기에서 거슬러 올라가 구가노쿠니의 북쪽의 산록에 진좌하셨다. 이후 이름하여 가모라 불렀다. p 124



교토로 옮겨간 가모씨와 하타씨는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타씨와 가모씨 가문이 같은 전승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방증이다. 


「하타 씨 본계장」은 하타 씨의 큰집인 고래무네 키미가타가 만든 『본조월령』이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게 90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당시 연중행사의 유래와 내용, 진행 방법 등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하타 씨는 883년 고래무네​라는 성씨를 천황으로부터 내려 받아, 하타 씨의 큰집이 되었다.

하타 씨 딸이 가도노강(지금의 가츠라강)에서 흘러온 화살을 주워 침실에 꽂아 두었는데,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외할아버지는 이상하게 여겨 아기의 아버지를 찾아보니 그 아버지가 바로 하타 씨가 창건한 마츠오 대사의 신인 마츠오 대명신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모 씨가 하타 씨의 사위가 되고, 하타 씨는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의 제사를 가모 씨에게 맡기게 된다. 한편 가모 씨 가문에서도 하타 씨 가문과 비슷한 내용의 전승을 가지고 있다. p 128



『연기식』 규정은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 마츠오 대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축제(가모축제/아오이축제)에 관한 것으로 각 신사에서는 제사관인 네기와 신사 관리인인 하후리르 한 명씩 참가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모 씨 행사에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도 같은 수의 인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규칙이 옛날부터 문서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원래 이 가모 축제가 두 가문의 공동 축제임을 나타낸다. p 132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는 ‘양자 입양설’이 있다. 대대로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제사를 담당하는 ‘오니시 가문’의 계보에 따르면, 교토의 마츠오 대사를 창건한 하타 씨 가문의 ‘하타 토리’와 전국 3만 개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인 후시미 이나리 대사를 지은 ‘하타 이로구’는 본래 가모 씨 태생이었으나 이후 하타 씨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나리 대사의 홈페이지에 있는 「오니시 가계도」를 보면 “하타 이로구는 가모타케츠누미노 미코토의 24세손인 가모 아가타누시노 쿠지라의 막내아들로~” 하므로, 원래는 하타 이로구가 가모 가문의 자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p 133



읽던 중 놀라운 TMI 하나. 도쿠가와 가문과 가모 가문 문장이 비슷한데, 이 이유가 도쿠가와 본래 성씨인 ‘마츠다이라 씨’에 있었다. 미가와국 가모군 마츠다이라 마을(현재 아이치현)에 있는 가모 신사에 종사했단 가문이 바로 마츠다이라 가문이었다.



이번엔 하타씨 이야기로 넘어와서, 하타씨는 규슈 지역에 터를 잡은 부젠 하타씨와 간사이 지역(오사카, 나라, 교토 등)에 터를 잡은 기나이 하타씨로 구분된다.



▶ 부젠 하타 씨

713년에 겐메이 천황은 각 지역의 지형, 지명의 유래, 특산물 등을 기록한 풍토기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중 『부젠국 풍토기』에는 “부젠국 다가와군 가와라산에 신라의 신이 스스로 건너와 살았으며, 철과 석탄이 풍부했다”라는 내용이 남겨있다. 부젠국은 지금의 북규슈 지역에 위치했으며, 다가와군 가와라산은 지금의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가와라 마을에 있는 산으로, 광산 지역으로 유명하다. 8세기 이전부터 철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지금도 시멘트 생산이 계속되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가와라 마을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마을 이름인 ‘가와라’는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8세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철과 석탄을 캐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p 053




‘신라의 신’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은 사실상 ‘가야의 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해당 책이 만들어진 713년 이미 가야가 멸망하고, 그 땅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신라의 신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도래인이 이동했을 바닷길을 따지자면, 신라인가 아닌 가야에서 출발했을 확율이 높다. 



신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대체로 동해 남부해안이나 동해안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이 바닷길을 이용할 경우 도착지점은 이즈모나 츠루가 지역이다. 반대로 가야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바닷길은 남해 바닷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보통 현해탄을 가로질러 규슈 지역에 도착한다. 



이 마을에 정착한 하타 씨의 친척인 가라시마 씨는 가야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약칸강의 오른쪽에는 우사 지방의 터줏대감인 우사 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모토산 꼭대기에 있는 세 개의 큰 바위를 지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가라시마 마을의 하타씨는 자신들의 신인 ‘가라쿠니 여신’과 우사 씨의 세 바위 신을 합쳐서 ‘야와타 신’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신이나 문화가 합쳐지는 ‘습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습합을 통해 하타씨와 우사 씨는 서로 협력하며 두 씨족의 안정을 택했다. p 063



야와타신으로 합쳐진 하타씨의 가야 여신과 우사씨의 지모 3신. 여기서 주목할 점이 우사씨의 지모 3신이다. 이들은 야마테라스의 세 딸로, 현해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현해탄은 가야인이 일본으로 향하는 바닷길이다. 거기다 세 딸 중 하나인 이치키시마노히메는 현재 오키섬에서 모시고 있으며, 오키섬은 ‘신이 머무는 섬’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또한 이 여신을 교토 마츠오 타이샤에서도 모시고 있는데, 마츠오 타이샤는 하타씨가 설립한 신사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는 ‘신라’에서 넘어온 신이며, 스사노오와 관련된 수 많은 이야기들은 전부 신라와 관련되어있다. 특히 스사노오가 지니며, 오로치를 헤치웠던 칼은 ‘카라쿠니마루’라 하며 현재 일본의 삼종신기 중 하나다. 따라서 스사노오의 누나인 아마테라스 역시 한반도와 연관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하타씨의 신과 우사 씨의 신이 습합하여 탄생한 ‘야와타 신’은 6~7세기가 되어 또 한번 그 모습이 바뀐다. 진구 덴노, 오진 덴노(진구子)가 야와타 신에 추가되어, ‘야와타 3신’이 된 것이다. 여기서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진구 덴노’ 부분이다. 한국사에서는 보통 신공 왕후로 부르며, ‘임나일본부설’의 근원으로 부정적인 인물로 보는 편이다(물론 왜곡한 당사자들은 현대 일본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사기』에 진구 덴노가 신라 왕족인 ‘천일창(아메노히보코)’의 후손으로 적혀있다. 이 인물은 신라 출신 대표격 도래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연오랑으로 추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야와타 3신’은 기존 하타씨가 모시던 가야 여신과 신라계 도래인 후손인 진구, 진구의 아들 즉 한반도 출신 신이라 할 수 있다.




▶ 기나이 하타 씨

궁월군과 함께 일본으로 귀화한 가야인들 나라현에 정착하여, 오사카, 교토 등 일대로 퍼져나갔다. 특히 교토는 하타 씨와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타 씨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 마츠오 타이샤, 코노시마 신사, 고류지 등 교토에서 유명한 신사와 절 대부분은 하타 씨가 창건하였다. 심지어 신사마다 성격이 다른데, 그만큼 하타 씨가 많은 산업에 종사하며 부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농업, 코노시마 신사/ 양잠, 마츠오 타이샤/양조 등)



하타 씨가 보유한 주 기술이 토목기술(제방공사)이었다. 일본은 대부분 도시에 큰 강줄기가 있었기에, 도시개발을 위해서는 제방공사가 필수였다. 그러다보니 도시마다 제방공사를 위해 강 주변에 대규모로 거주하며, 제방을 쌓았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있는 큰 강줄기 주변에는 하타씨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있다. 교토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맞은 편에 있는 대언천 제방도 하타 씨 작품이다(연장선상에서 아라시야마 일대를 개발한 것 역시 하타 씨다). 결론적으로 고대 일본 도시 건설에는 하타 씨가 중심에 있었고, 그로 인해 하타 씨는 부와 명성을 동시에 쌓았다.



이렇게 토목기술로 쌓은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하타 씨는 농업, 양잠, 양조 등 여러 생산 산업 기술을 확장하며, 부와 명성을 쌓았다. 고대 일본의 생산업은 하타 씨가 없으면 멈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와 명성을 쌓은 하타 씨 중 일부는 고위직에 종사하고, 천황에게 성씨도 하사받는 등 전방위적으로 위세를 펼쳐나간다.



나라현 시키군에 다와라모토쵸가 있는데, 이 지역은 고대부터 한반도 이주민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이다. 이 마을 부근에 가라히토노이케가 있는데, 『일본서기』 276년 9월 오진 천황 때에 고려인, 백제인, 가야인, 신라인을 동원하여 이 저수지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456년 8월에 ‘마요와 왕의 변란’이 일어나 하타 씨와 가모 씨는 가츠라기 고세를 떠났다. 교토로 향하던 하타씨 일부는 이곳에 정착하여 하타 마을을 세웠다. p 077



471년 유라쿠 천황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하타 씨를 하타노 사케기미에게 관리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들을 잘 관리하여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쳐 우즈모리마사라는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우즈모리마사’는 이후 우즈마사로 바뀌어 지금까지 교토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산더미 같은 비단을 조정에 바쳤다는 이 이야기는 하타 씨가 매우 부유한 집단이었음을 알려준다. p 084



스이코 천황 시대인 603년 11월, 하타 카와카츠는 신라 불상을 쇼토쿠 태자로부터 물려받아 교토의 고류지를 창건했다. 쇼토쿠 태자는 고모 스이코 천황으로부터 황태자로 지명받았으나 사망하여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권력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바로 하타 카와카츠였다. p 085



『속일본기』 746년 3월에 하타노이미키 아사토모라는 사람이 가즈에노 츠카사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즈에노 츠카사는 세금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로, 이 자리는 지금도 이어져 일본의 국가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재무성 주계국이 되었다. p 085



한반도에서 건너온 하타 씨는 어느 한 가족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같은 한반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여, 거대한 공동체를 조직하여 ‘하타 씨’라는 성씨로 묶인 거대한 집단이다. 이들이 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기술은 도시 건설에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토목(제방공사), 광산, 농업, 염전, 양잠, 양조 등 사람의 의식주에 중요한, 그 어떤 기술보다도 절대적 우위를 지닌 기술들이었다. 그렇기에 하타씨는 이 기술들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쌓았고, 권력의 최측근까지 올라간 것이다. 540년에 이미 거대 집단이 하타 씨는 700년 경에는 전국 어디에나 살었다.





하타 씨만 이야기했지만, 이 책 제목은 ‘하타 씨’와 ‘겐지’가 같이 들어가있다. 겐지 씨는 신적강하된 황자가 받은 성씨 중 하나이자, ‘미나모토 씨’라 부르는 유력한 무사가문 중 하나다. 천황가 핏줄을 잇는, 권세 막강한 미나모토 씨. 



미나모토씨 자제들은 성인식을 도래인 신사에서 지냈다. 가마쿠라 막부를 제창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도 그러했다. 과거에 ‘미나모토 요리토모’에 대한 역사책을 읽었었는데, 해당 책에서 미나모토 씨 후손들은 대대로 도래인 신사에서 성인식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성인식을 치룬 신사는 야와타신, 가모명신,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사였다. 심지어 그들은 ‘신라겐지’ 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물론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때 대체 미나모토 씨가 신라 도래인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데 있었고, 생각보다 싱거웠다. 겐지 가문(정확히는 가와치 겐지 가문) 후손이 도래인 신사에서 진행한 성인식은, 그저 ‘보은’으로 인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뭐 책을 보시라. 이하 생략!



대신 겐지가문이 섬겼던, ‘신라명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야와타 신과 가모명신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니). 신라명신은 도래인 역사에서 왕왕 나오기에, 익숙하다면 익숙한 신이다. 특히 교토 엔랴쿠지에 가봤던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신이기도 하다(아래 5번 관련). 신라명신에 대해선 보통 아래 가설들이 유명하다.




고대 시가현에 살았던 신라인이 모시던 신: 시가현은 고대부터 동해안 출신의 도래인들이 집단 거주한 지역이다. 특히 정창원 문서, 동대사 문서, 속일본기, 신찬성씨록 등에 따르면 고대 시가현 한반도 출신 343명 중 60%가 하타 씨 라고 한다. 시가현은 하타 씨의 왕국이었다.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망명한 백제 유민들도 시가현에 자리를 잡았다.


1. 이 지역(시가현) 세력가 오토모 스구리 집안이 모시던 신: 오토모 스구리 집안 역시 한반도에서 넘어온 집단이다.

2. 당나라 유학파 스님 엔친이 귀국할 때 배 위에 나타났던 신: 일본에 널리 알려진 학설이다.

3. 천태총 사문파와 산문파가 서로 싸울 때, 산문파가 모시는 적산명신에 맞서기 위해 사문파가 만든 신: 위 엔친 스님과, 아래 엔진 스님 파벌싸움에서 나온 학설이다.

4. 장보고의 화신: 당나라 유학중이던 엔닌 스님이 장보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교토 엔랴쿠지에 신라명신을 모셨다.

5. 그 외 기타: 각 지역 도래인들이 고향에서 모셔온 신




일본에서는 1번과 3번이 가장 대중적인 반면에 우리나라에선 5번이 가장 대중적인 학설이다. 우리나라에서 5번이 가장 대중적인 이유는 관련 드라마로도 방영된 소설 『해신』과 《역사스페셜》이 견인차 역할을 했다. 나 역시 ‘신라명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꽤 오래전 보았던 《역사스페셜》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뿐이다. 고대 일본에서 믿던 ‘신라명신’은 위의 가설 속 성격과 조금 다르다.



(후쿠이현 이마죠) 이마죠 마을의 신라명신사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1615~1624년 사이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에 신라명신이 모셔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지금도 후쿠이 광산, 난죠 광산, 이마죠 광산이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모노시, 가네가스 등의 쇠와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남아있다. 이는 이 지역에 광부나 주물공,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p 151



(시마네현 이즈모) 스사노오 미코토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신으로, 일본 최고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이다. 이 신이 일본에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히이강 상류에 있는 나카유노무라 마을의 도리가미센츠산이다. (생략) 신화시대의 스사노오의 전승이 남아있는 마을인 나카유노무라에 신라명신이 있었던 사실은 이 마을이 옛날부터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신라명신이 모셔진 곳은 오래전부터 철광산 지역이었다. p 153



(효고현 히메지) 아케다 신라명신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신라명신을 모시고 있는 시라쿠니 신사와 히로미네 신사가 있다. 전국의 우두 천황을 모시는 신사의 총본산인 히로미네 신사는 옛날에는 이 신을 신라명신이라 부르고 모셨다고 한다. 우두 천황은 신라에서 돌아온 스사노오를 가리킨다. 히메지시는 지금도 열쇠를 뜻하는 가기마치, 대장장이 마을인 가지마치, 칼을 만드는 카타나데 마치 등 철과 관련 있는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p 154



(시가현 오츠)교토 야마시나부터 신라명신이 있는 나가라산 원성사까지 양질의 화강암 지대인 오사카 제철 유적이 있으며, 다카시마군에는 약 30여 개의 고대 제철 유적이 흩어져 있다. 또한 아사이군과 츠루가에 걸쳐서 10여 개의 유적이 남아있다. 고대 제철 유적이 많은 시가현에서는 광부들이 신라명신을 철강신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크다. p 157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과 남아있는 신라명신 신사들은 전부 고대 일본 제철 유적과 맞닿아 있었다. 거기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야와타 신’과 ‘가모 명신’도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 하타 씨와 가모 씨가 모시는 신이었다. 



즉 겐지가문, 미나모토 가문 성인식을 주관한 신사의 신들(신라명신, 야와타신, 가모명신)은 제철기술을 지닌 도래인들이 모시던 일종의 대장장이신이었으며, 단지 신을 모시는 집단과 지역이 달라짐에 따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성격은 같았다. 



석기 생활만 하던 고대 일본에 신도시 건설을 할 수 있도록 우수한 제철기술과 토목 기술을 가져온 도래인들. 그들은 그로 인해 일본 권력 가까이에 있었고, 스스로 권력가가 되기도 했다. 도래인 성씨에서 파생된 무수히 많은 성씨들 중 일부는 전국시대에 내노라했던 유력한 무사가문이 되기도 했다(‘시미즈’ 가문이 하타 씨에서 파생된 가문이다).




고대 일본을 건설하고, 일본 권력과 가까이 있었던 그들(천황가가 도래인 후손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도래인의 족적을 우리나라에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관련된 모든 흔적이 일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혹시나 도래인에 대해 알게되어도, 잠깐 뿐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본에선 도래인의 흔적을 축소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도래계 신사가 이름이 바뀐게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일본의 역사왜곡 범주에, 도래인의 역사도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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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
김유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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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에세이는 무려 MZ세대 ‘이장’ 이야기다. 요즘 MZ세대는 회사원 보다는 평생가는 기술직, 전문직을 선호한다던데! 이 에세이 주인공은 영화 《파묘》처럼 묘지 이장사를 하려는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표지를 보니, 그 이장이 아니다. 놀랍게도 시골마을 ‘이장’ 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골 마을의 대표! 그 이장이었다. 심지어 그냥 시골도 아니고, 쩌어기 남쪽마을. 남쪽마을에서도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바다 건너에 있는 완도군이다. 지금이야 완도대교가 있어서 자동차를 타고 오갈 수 있다지만, 60년대 초반 까지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섬이다. 그런 섬 마을 이장이 나보다도 어린, 20대라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20대가 이장을 할 수 있지? 아니 그전에 완도에 살고 있다고? 내륙에 있는 시골에도 청년 보기가 어려운데, 땅끝마을보다 더 멀리 있는 완도에 살고있다고? 온갖 호기심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이 호기심은 에세이를 빠르게 읽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데 이런 호기심이 나만 있는 건 아니었나 싶은게, 이 에세이 저자이자 현재 ‘이장’인 김유솔은 TV 에도 얼굴을 여러번 비췄던 것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보는 아침방송과, MZ세대가 주로 보는 물어보살 같은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따라서 예쁜 바다에 놀러가도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풍경에 큰 감흥을 못느껴 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평생 이 바다가 예쁜 줄도 모르고 살아서 다른 바다도 그렇게 예쁜 줄 몰랐던 것이었다고. 막연히 완도에 내려와 사는 상상을 해봤다. p 061


나의 가장 큰 재능은 바로 오지랖이다. 처음부터 내 재능을 알고 있던 건 아니고, 사진관 일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부터도 그랬지만 증명사진이라고 하면 본인 기준 예쁜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멋있게 하고, 화장도 하고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가? p 081



어려서부터 완도에서 나고 자란 김유솔. 한창 학교 다닐 땐 또래 애들이 다 그렇듯, 집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던 그녀였다. 거기에 실천력까지 남다른 그녀는 고3이 되자마자, 완도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꿈인 ‘디자이너’를 위해서! 부모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가니 조심해야돼~’ 라고 많은 걱정을 했지만, 웬걸? 서울 사람들은 코 베기는 커녕,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항상 바쁜 사람들 투성이었다. 완도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서울 사람들. 완도 소녀 유솔은 그렇게 서울살이에 적응해갔다. 


여유 조차 없던 서울 살이 중 모처럼 만의 휴가를 고향인 완도에서 보내고자 내려왔다. 그렇게나 떠나고 싶은 완도였는데, 막상 다시 찾아오니 그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완도를 떠났을 때처럼, 다시 서울을 떠나 완도로 돌아왔다. 완도를 떠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완도에서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바로 전공을 살린 사진관이다. 그녀는 완도에 남아있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그들의 언니와 누나가 되어주기로 결정했다. 10대때 그토록 원했지만, 완도에는 없었던 그들을 공감해주던 언니와 누나가 되기로.



 


"용암리 이장 해 보지 않겠어요?"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당시 내 나이는 24살. 내가 아는 ‘이장’이라는 말에 다른 뜻이 더 있나? p 089



사진관을 하며, 그녀의 재능인 오지랖을 펼치기 시작한 유솔. 그녀의 오지랖은 어린 학생들을 시작하여 동네 어르신들에게까지 뻗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 본 한 사람! 당시 용암리 이장님이셨다. 자네, 이장 한 번 해보지 않을텐가? 




영문 모르고 힘을 실어 준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나중에 이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할아버지 이름을 팔아 이장이 되었다며 몹시 자랑스러워하셨다(?). 이제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나는 진짜 이장이 되었다. 엄마 나 이장 됐어! p 099


사실은 이럤다. 그간 매일 가겠다고 약속을 잡는 건 왠지 어색하니까, 약속하지 않은 날에는 괜히 용건이 있는 것처럼 경로당에 들러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그게 어르신들에게는 용건이 없으면 경로당을 찾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어르신들은 계속 서운해하고 있었다. 한층 밝아진 어르신들은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서 함께 점심을 먹자며 이번 점심도 약속 없으면 먹고 가라고 했다. p 115




본투비 완도 태생인 김유솔. 그녀는 그렇게 용암리 이장이 되었다. 그것도 최연소 이장! 나이드신 분도 이장을 처음 맡으면 힘들진데, 마을 주민들이 전부 어르신인 상황에서 20대가 여성이 이장이 되었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각양각색이었다. 당사자도 그랬다. 이장은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해야 마을 대표를 할 수 있는가! 


이장을 맡으며 어려운일도 분명 있었다. 20대 이장과 마을주민이 대부분 어르신인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벽은 서로를 잘 몰랐기에 생겨난 생각의 차이였다. 어르신도 20대 이장이 처음이고, 20대 이장도 어르신들과 부대끼는게 처음일테니까. 그 벽을 허무는 순간 20대 이장과 동네 어르신은 서로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무리 우리끼리라도 이장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이장이 나이는 어려도 우리 마을을 대표하는 큰 어른이나 다름 없어.

우리가 높이 세워 줘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우리 이장 무시 못 해.

다들 밖에서 이장 함부로 부르지 말어!

든든한 마을 어르신들을 등에 업고, 오늘도 나는 어깨를 활짝 펴고 이장 일을 시작한다. p 142



별 것 아닌 나의 모습도 대단하다고 장하다며 추켜세우 주는 마을 분위기 덕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없으면 안 되는 기특한 이장이 되어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완도에 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나를 완도에 정착하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사람들’인 것 같다. p 143


소문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많은 어르신들이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김치는 아직 있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정을 서울에서는 잊고 살았는데 용암리에서, 우리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큰 행복인 것 같다. 아, 이 마을,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어머니들이 담그신 파김치를 먹기 위해 짜장라면에 물을 올리러 간다. p 149


기성세대라고 해서 어르신들이 이런 (코 피어싱을 한)내 모습을 절대 이해 못 하실거라는 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은 젊은 사람을 그들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해 못 하실거라고 생각하는 우리 세대의 고정 관념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p 164


이장 일을 하다 보면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게 어르신들과 지내다 보면 불편하지 않냐, 힘들지 않냐고 많이들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디서 비싼 돈 주고 맛없는 밥 사먹을 까봐, 돈 많이 써서 저축도 못하고 시집 못 갈까 봐, 야위어서 몸 아플까 봐 걱정하면서 맛있는 게 생기면 잊지 않고 불러준다. 그렇게 어르신 들의 보살핌과 사랑으로 기름지게 살이 오르고 있는 나는, 바로 밥 잘먹는 기특한 용암리 이장이다. p 170




나는 불과 최근까지 ‘시골텃세는 도시민도 못이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전에 읽은 안동 폐교살이 에세이를 읽으며 깨달았다. 시골에 대한 내 생각은, 정말 편협하고 오만하기 그지 없는 도시민의 불손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지 얼마 안된 오늘 『제가 이 마을 이장인디요』를 읽게 된 것이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더 확실해졌다. 시골 텃세는 도시민들이 만들어낸, 불손한 환상이었다. 오히려 시골 어르신들은 도시민보다 더 깨여있는 진정한 어른이었다. 단지 도시민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장가를 와야 해. 이장을 델고 가블믄 안 되고 장가를 와야 돼, 알겠지?

어르신들은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바쁘면 가 봐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p 178




더 많은 사람이 ‘완며들게(완도에 스며들게)’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잘한다 잘한다, 칭찬을 들으며 일했더니 2023년에는 ‘전남형 청년 마을 만들기’ 사업도 진행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청년 마을을 구성하고 외부에서 청년들을 모집해 한달 살기를 제공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전시와 플리 마켓 행사를 열었다. p 207


완도로 내려오면서 일이 없어지고 내 꿈이 작아질까 봐 걱정을 해 왔지만,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완도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종종 일에 깔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또 놀기도 많이 놀고 있다. 서울에서 했던 ‘잘 먹고 잘 살기’의 균형에 대한 고민을 완도에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가끔 밤을 새며 일할 때, 터무니없지만 ‘완도에서도 밤샐 일이 있네’ 하면서 기쁘기도 하다.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니까. p 218



현직 완도 용암리 이장 청년 김유솔은 앞으로도 계속 용암리에 남을 생각이다. 중년이 될 김유솔도 계속해서 용암리에 있을 것이며, 노년의 김유솔 역시 용암리에 있을거라 한다. 


노령화로 인해 20년후면 시골 마을들이 사라질거란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유솔은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모아 20년 뒤에도 완도 용암리 마을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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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늘
고광률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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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하기에 앞서 주의해야할 부분이 있다. 난 한국전쟁으로 순국한 영령들을 폄훼하는게 절대 아님을 밝힌다. 단지 순국한 영령들을 볼모삼아, 자신들의 죄악을 숨기기 급급한 한국과 미국의 못난 위정자들을 비판하고자 함이다.


불과 십년 전만해도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국군과 미군이었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쳐들어온 전쟁. 이 빨갱이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 국군과, 그런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파견된 미군들. 이들이 전쟁에서 빨갱이가 아닌 민간인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한국전쟁’이 가진 정체성은 흔들린다. 그 뿐인가? ‘한국전쟁’ 하나로 수많은 이득을 보았던 그들의 권력도 흔들린다. 그렇기에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 그와함께 임진왜란 후 조선이 명나라에 그랬던 것 처럼, 대한민국은 미국을 재조지은의 나라로 섬겼다. 정확히는 대한민국 정부와 지지하는 세력들이.



한국전쟁 이후 미군은 ‘한국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주한미군이다. 대한민국 정권은 이들을 환영했다. 재조지은의 나라가 아닌가! 국민들과 군인들이 죽던말던 한강다리 폭파하고 그렇게 꽁무니를 내뺐던, 싸울생각은 고사하고 전시작전권은 미군에게 바로 내주었던 그들은 그렇게 주한미군을 환영했다. 주한미군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범죄도 눈감아주었다. 주한미군판 위안부 기지촌을 운영했다. 주한미군이 일으킨 각종 범죄는 쉬쉬하며 눈감아주었다. 훗날 이로인해 일어날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발굴 유해 봉안식 장면이 전파와 지면을 통해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방송 기자는 이번 봉안식은 전반기이고, 후반기에 더욱 크고 성대한 봉안식이 또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는, 창군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국군의 날 행사는 온 국민의 자유 수호 의지와 염원을 담아 더욱 거국적으로 성대히 치뤄질 예정이라고 거듭해서 덧붙였다. 레거시 언론사가 정권에 들러붙은 국정홍보처를 자처하는 것 같았다. p 028


그렇게 쉬쉬하며 침묵하는 동안 대한민국에는 많은 독버섯이 자랐다. 한국전쟁 당시 멍청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의 합작품이던 민간인 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참전미군의 문화재약탈 및 민간인 강간, 국군에 의한 민간인 강간도 당연히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독버섯은 계속 자랐다. 주한미군 위안부인 기지촌 운영으로 생겨난, 부모 없는 혼혈아들과 주한미군에 의한 성범죄 및 살인사건.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대한민국은 쉬쉬했다.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7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미군범죄는 쉬쉬한다. 미군이 버리고 간 기지촌 여성들, 혼혈아들은 대체로 가난을 되물림했다. 혹여나 누군가가 미군을 처벌하자고 말하는 순간 “니가 감히? 빨갱이야?!” 라는 삿대질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이 소설책 저자가 펜을 들었다. 한국전쟁과 멍청한 대한민국 정부, 주한미군이 심어둔 독버섯을 지금이라도 뽑기위하여. 칼보다 붓이 강하기에, 저자는 소설을 썼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주도하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인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을 큰 틀로 하여, 그 속에서 참전미군의 각종 범죄와 기지촌(양공주), 혼혈아 등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생된 각종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픽션이 아니다.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29일 미군이 충북 영동 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영동읍 주곡리, 임계리 주민 500여 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모아놓고 무스탕 전투기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1999년 9월 AP통신 보도로 실체가 드러났으며, 이후 한미 양국 합동조사가 이뤄지고 2011년에는 사건 현장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기도 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中




이 소설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 눈여겨 볼 주요 인물은 넷이다. 


하지스: 한국전쟁에 파견된 미군이다. 그가 마주한 한국전쟁은 중공군을 무찌르는게 아니었다. 빨갱이가 민간인으로 위장할 수 있으니,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그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료가 서슴치않게 민간인 강간하는 것까지 보며 경악하며 회의감을 느낀다. 이에 반발하여 여자 하나만은 살리고자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미군 범죄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에서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있다.


하봉자: 부자집 여종이다. 종년 팔짜 그러하듯, 봉자 팔짜도 그러했다. 부자집 둘째자식 도완구에게 팔려와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에 도완구는 봉자를 겁탈하려했는데, 미군과 맞딱드린다. 하지만, 팔짜 더러운 년은 어쩔 수 없다던가. 봉자를 겁탈하려는 대상이 도완구에서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 뿐인가? 봉자의 가족들은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봉자의 삶은 고단했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녀를 미군들은 ‘맘’이라 불렀다. 그녀는 미군들에게 음식을 팔고 있다.


도완구: 부자집 둘째아들이다. 친일매국노였다. 독립운동을 한 형제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모처럼 내려온 본가에서 봉자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봉자를 내달라고 행패를 부린다. 그렇게 봉자를 얻어와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미군과 마주하여 죽을 위험에 처할뻔 했지만, 도완구는 어떻게든 미군에게 살아남는다. 미군은 그를 피난민을 모아둔 노근리 쌍굴다리에 던졌다. 오랜시간이 흘렀다. 친일매국노 출신인 그는 여전히 돈이 많다. 하지만 쓰레기에게 쓰레기 난다고 했던가.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다. 아들이 회사를 차지한 뒤로는, 뒷방 늙은이 신세다.


남득: 어려서 기지촌에 살았다. 엄마는 양공주였다. 남득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튀기’라 놀림받고 늘 소외된 삶이었다. 그래도 기지촌에 있으면서 미8군 음악, 당대 핫했던 대중음악을 듣고 자라며 독보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재능마저 도둑맞으며 그는 체념했다. 현재는 기술을 배워 하루벌고 하루먹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운명을 되물림이라도 하듯 남득의 아들 영수도 척박한 삶을 산다.




잊은 사람, 끝나서 정리된 연으로 알았는데,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전쟁이, 아니 학살이 앗아간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그 학살이 남겨준 상처이자 유산인 남동생과 아들……. 58년동안 서리서리 쌓이고 곪아 터져서 짓무르고 굳어져 옹이가 된 기억들이 칼이 되고, 창이 되고, 바늘이 되고, 망치가 되어 그녀의 몸과 마음을 베고, 자르고, 찌르고, 쑤시고, 두들겨댔다. p 037


단군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켜주지 못해 탄생한 자신들의 자식들을 책임지지 않고 유기했다. 자신들의 무능으로 오랑캐와 왜놈들에게 잡혀가 능욕을 치르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환향녀를 화냥년으로 만들어 스스로 책임을 회피코자 했던 치졸하고 비겁한 역사를 기꺼이 받아들여 재탕했다. 혼혈이 순혈들에게 빌붙어 먹겠다거나 해코지하는 것도 아닌데,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멸시하고 천대하고 구박했다. p 156


어머니는 이장에게 다시 물었다. 좌익 빨갱이 짓을 한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죽였다고 하던데, 보도연맹과 아무 상관이 없는 봉수 아버지는 대체 왜 잡아가 죽인 것이냐고. 이장이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p 176


부모 품을 벗어나 멋모르고 하천 변 자갈밭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다가 미군의 총격에 즉사한 어린아이의 시신이 피 웅덩이 속에 그대로 너부러져 있었다. 미군은 무리를 벗어나려던 -이탈이나 도주 목적이 아니라, 용변을 보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청장년만 죽인 것이 아니라, 멋모르고 움직이는 어린아이까지 죽였다. 움직이는 대상은 애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p 278


이웃마을로 마실이라도 온 친지인 양 쌍굴다리로 어기적대며 다가와 기웃거리는 미군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통역이 없으니 대화를 하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점사격을 하고 표적지를 확인하러 오는 사격수 같은 태도였다. 미군은 피난민 몇몇이 토막 영어로 울부짖는 애원을 개 짖는 소리인 양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는 돌아가서 다시 사격을 가하는 짓을 일과처럼 반복했다. p 286


얼마나 지났을까. 폭격과 총격이 잦아든 뒤 미군이 산속으로 달아난 피난민들을 향해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에게 붙잡힌 피난민이 미군의 명령을 받아 방송헀다. 이 말을 듣고 산을 내려간 피난민들은 사살됐다. 미군들이 쌍굴다리 앞뒤를 포위하고는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p 310


그날 엄마와 두 동생을 잃었는데, 엄마와 봉순이는 아직껏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죽었을 터인데, 시신조차 찾이 못했다. 시신을 찾지도, 그날 그때 그곳에서 엄마와 봉순이를 봤다는 증언을 해줄 목격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철둑 위와 쌍굴다리에서 학살된 대다수가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이었으나, 타지인인 엄마와 두 동생은 아는 사람이 없어 증언할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는데, 경우가 비슷한 다른 희생자들도 마찬가지였다-에 봉자는 58년이 지났어도 엄마와 동생들을 그 자리에서 잃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길이 없었다. p 311



이 소설이 엔딩으로 치닫는 과정은 씁쓸하다. 이 과정이야말로, 이 내용이 소설이면서 사실에 입각하여 쓰여진 글이라는 방증일테지만.




미군이 주도한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시 일어난 다른 민간인 학살사건에 비하면, 그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무수한 어려움이 있었다. 국군이 주도한 학살사건이 아닌, 재조지은의 나라에서 온 미군이 주도한 학살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유감표명’으로, 겨우 기정사실화 되었을 뿐이다. 이 전까지만해도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언급을 한 사람은 ‘빨갱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2004년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피해자 유족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은 대게 노근리에 연고가 있는 주민들이었다. 소설 속 봉자와 같은 케이스는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비단 노근리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제주 4.3사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등 정부 주도하에 진행된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다. 목격자가 없다는 이유로, 연고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희생자들은 피해자가 아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책을 쓴 저자가 존경스럽다. 보통 역사소설이라고 치면, 우리에게 먼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사소설 「붉은 그늘」 처럼 가까운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면 달라진다. 권력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비난(더 나아가면 협박까지)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저자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권력을 지닌 소수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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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 - 여성, 나 자신을 찾아서
김경희 지음 / 공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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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신화를 역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된 이야기가 신화이며, 이 신화가 구전되어 후손에 닿는다. 후손은 신화 속에 얼켜있는 이야기를 씨줄날줄 분리하여 다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낸다. 그렇기에 신화는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신화를 읽는게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신화는 꽤 인기있는 장르다. 하지만 대체로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가 인기 정점에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아이들이 즐겨보는 신화 만화책도 그리스 로마신화다. 이 얼마나 아쉬운 이야기인가. 우리나라 신화가 아닌 타국 신화를 즐기고, 타국 신들을 익숙해하는 상황이라니. 근데 뭐 그럴만도 하다.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 5백년도 버텼던 우리 신들이었것만, 결국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우리나라 신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책 저자처럼 외면받고 있는 우리나라 여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헌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저자는 우리나라 신이 아닌, ‘여신’이라고 지칭하며 우리나라 ‘여신’을 찾아다닌다. 나 역시 우리나라 신화 하면 ‘여신’을 먼저 떠올린다. 왜? 왜 여신이 먼저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는 여성숭배가 당연시 되는 모계사회였다. 농경, 수렵, 채집을 하던 시기였던 고대는 노동력이 중요했다. 노동력 생산은 출산이 가능한 여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여성의 권위가 높았다.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나체 여인상이 그 증거다. 따라서 고대부터 숭상되는 신은 여신이었다.



하지만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며 사회가 변했다. 잉여산물이 생겨났고, 노동력 수요가 급감했다. 잉여산물을 노획하기 위한 영토싸움이 시작된다. 따라서 금속기를 휘두를 수 있는 남성의 지위가 높아졌다. 그렇게 부계사회가 시작되었고, 여신들은 지위를 잃었다. 모든 권능과 지위는 남신이 가져간다. 예컨데 어머니 신이었던 헤라가 훗날 제우스의 배우자이자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하고, ‘샛별’을 의미하던 여신 루시퍼가 타락한 악마가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가 들어오기전에는 부족별 토템신앙(곰, 호랑이) 라던가 마고할미(창조여신류)를 숭배했다. 하지만 철기를 지닌 고조선이 들어오며 토템신앙은 건국신화 속 하위신으로 흡수되고, 창조여신들은 산신이나 마을신으로 밀려났다.



이제 우리 나라 여신을 찾아볼까? 우리나라 여신들은 크게 건국신화, 산신, 마고신, 불교신, 자연신, 마을신, 무속신으로 나뉜다. 조금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불교신이면서 무속신에 들어가있는 여신도 있고, 자연신이면서 무속신에 들어가있는 여신도 있고 뭐 그렇지만 거기까지난 각설하고!



건국신화 대표여신으로는 위에서 말한 웅녀를 포함하여 하백의 딸 유화(주몽 모), 박혁거세 부인 알영이 있다. 산신/자연신은 정견모주(가야산신), 용녀(왕건 조모) 등이 있다. 마고신으로는 노고할미, 설문대할망 등이 있고, 마을신으로는 삼신할매, 조왕할미, 측신 등이 있다.




 


이 책 『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 는 저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할미신을 찾는 여행에세이 혹은 답사책이라 할 수 있다.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 신화 초심자에게 더할나위 없이 친절한 책이다. 다만 한국 신화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꽤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나만해도 책 속 내용이 대체로 다 아는 부분이다보니 썩 흥미롭지는 않았다. 초심자라면 더 궁금할 내용이 있을법한 부분도 스무스하게 지나간다. 



확실한 건 이 책은 한국 신화에 대한 교양서적이 아니라, 저자가 여신 설화가 구전되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행에세이 또는 답사기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여신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원한다면, 차라리 한국 신화 교양서를 찾아 읽는게 낫다. 반면에 신화가 얽힌 장소를 여행 또는 답사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이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근데 여기서 이제 또 함정이 있는게, 뭐랄까 이 책은 ‘여신’에 중점을 맞췄다기 보다는 ‘여성’에 중점을 맞춘 느낌이랄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내가 TMI를 빙자하여 서론이랍시고 구구절절히 쓴 저런 이야기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신화에 있어서 기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궁 이야기를 해볼까? 나는 솔직히 내 자궁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4세부터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난 생리통과 여러 몹쓸 증후군을 안겨준 것이 나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요즘 나는 자궁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이 든다. p 048



자궁을 가진 여성들은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어느 시기가 되면 할머니가 된다. 그러니 여성이 없었더라면, 혹은 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여성의 현신인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녀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나아가 남성들이 그 일에 당연히 동참하는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혐오를 깨고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 아닐까. p 049



그러니 가믄장아기가 될 수 없는 ‘당당하지도 혹은 솔직하지도 못한’ 여성들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현실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 인형과 같은 삶을 사는 것, 잘난 체 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려 든다면 이러한 업의 대가로 가믄장아기 이야기 속의 우매한 여성들처럼 청지네와 말똥버섯의 몸으로 환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p 094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할매신’ 이 아닌 ‘여성’ 이었다. 보통 책 제목을 보면 어떤식으로 내용이 흘러가는지 예상이 되곤 한다. 이 책 제목은 ‘한국의 할매신을 만나다’이고, 부제가 ‘여성, 나 자신을 찾아서’다. 역시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는데, 이건 뭐. 주객전도였다. 제목이 부제로 가고, 부제가 제목으로 가야 이 책과 맞지 않을까 싶은?



저자는 순수하게 ‘할매신’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여성혐오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집필한게 느껴졌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실제로 여신들의 권위가 떨어지고, 하위신으로 밀려나게 된 건 남성중심사회가 되면서였으니까. 따라서 여신을 이야기할 때 이런 내용은 필수불가결이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간 듯 보인다.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한 승부수였을지도. 하지만 순수하게 한국 신화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썩 좋지 않았다. 내 지적 탐구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기도 했고.


 



마고는 어떤 의미일까? 마고할미 신화는 한국 민간에서 구비전승되어온 거인 여신의 창세신화다. 마고할미는 마고의 한자표기가 대륙 신화에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반고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한자가 다르듯 그 의미도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마고는 단순히 ‘노파’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제주에서 ‘묻혀 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할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즉 우리나라 토착신앙인 셈이다. p 057



마고할미 설화가 궁금하다면 한반도 여러 곳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하여 ‘마고산성’이라 부르는 성만해도 전국에 수없이 많다. 경기도 양주 노고산성(마고성), 충주의 마고산성, 거제의 마고산성, 양산의 마고산성 등이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전해지는 마고할미 이갸기들은 수없이 많다. 마고할미가 만들었다거나 그녀의 집으로 불리는 고인돌만 해도 그렇다. 강화도뿐 아니라 전남 화순의 고인돌 유적에서도 마고할미 전설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대대로 ‘핑매바위’로 불려온 바위다. 핑매바위에 전해지는 전설 역시 마고할미가 주인공이다. p 064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한국 신화 초심자가 읽기에 이 책은 썩 나쁜 선택은 아니다. 쉽고 간결하니까. 뿐만아니라 여신 설화 전승지 답사 안내서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신화 교양서가 아닌, 에세이다. 에세이. 전문적인 내용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추천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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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 상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가 있다. 일명 ‘공능제’. 얼핏보면 무슨 제도인가? 싶은 이 단어는 ‘공감 능력 제로’라는 말의 줄임말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요즘 뉴스에서 접하는 사건사고와 그런 사건사고를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공감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유독 사회적 약자나, 나와 성향(또는 취향)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모름지기 공감능력이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배워나가는 중요한 역량 중 하나다. 이런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건, 과거와 달리 요즘 가정과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간과한채, 오로지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에만 매몰되어있는 것과 결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인성교육을 중요시 하는 부모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 부모들을 위해 어린이도서 『제로학교』를 소개하고 싶다.



1. 메이트 러너

2. 몽당연필

3. 고치고치

4. 뻐꾸기게임



『제로학교』는 위 4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능력이 제로인 학생들이, 실은 공감능력이 제로가 아니라는 것. 우리 어린이들이 제로에서 한발짝 나아갈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첫번째 에피소드 『메이트 러너』 中

“다들 기주 팬클럽이야? 와, 진짜 너무한다!”

지금까지 교실에서 그 누구도 나에게 어디서 전학 왔냐, 뭐를 좋아하느냐 묻는 애가 없었다. 그런데 기주는 예외인 것 같았다. 눈이 나쁜데도 달리기를 하는 기주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가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하는 대단한 친구가 기주였다. p 027


믿을 수 없었다. 나처럼 달리기에 진심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었다. 뒤에서 기주의 눈길이 느껴졌다. p 031


달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나와 같은 기주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달리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제야 가슴 속의 돌멩이가 사라진 것 같았다. p 037



분명 어딜가든 조건은 나보다 좋지 않은데, 이상하게 성적이(또는 성과가) 나보다 좋은 친구들이 있다. 나보다 잘하기에 당연히 시기, 질투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기, 질투가 부정적인 감정으로 진화하게끔 두는 것은 절대 금지! 이는 본인에게도 엄청난 독이 된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도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정하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공감이 되었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되는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성적이 좋아지는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선물과도 같은 것!



▶두번째 에피소드 『몽당연필』 中

아리처럼 적극적인 아이는 처음 봤다.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오래가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를 닮았다. 아리는 먼저와서 말을 걸어 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리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조용했던 학교 생활이 시끌벅적해졌다. p 051


늦지 말라던 아리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놀이공원 시계탑의 시침은 열한 시를 가리켰다. 아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다던 애들도 연락이 안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SNS 게시물 업로드를 알리는 알림이 떴다. 아리의 계정이었다. p 061


남자아이의 가방에 매달린 몽당연필이 그날 떨어진 몽당연필이라고 해도 더 이상 내가 주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서 아리에게로 갔고 아리는 처음부터 찾을 생각이 없었다. 몽당연필의 새로운 주인은 적어도 아리와는 달라 보였다. 나랑 같은 연필 덕후가 같은 학교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쫙 펴지고 웃음이 실실 나왔다. 아침밥을 먹지 않았는데도 괜히 든든했다. p 071



‘아싸’ 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아웃사이더. 교실에서 자의 또는 타의로 혼자있는 친구들이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 역시 아싸였다. 자의보단 타의에 속하는 아싸. 그러던 어느 날 보기만해도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가 다가오면서, 자신의 학교 생활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모두 그 친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게 고도의 괴롭힘이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게되면 보통은 위축될지도 모른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도 위축되었다. 아니 위축될뻔했지만, 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교묘하게 괴롭히던 그 아이가 불러도 움츠러들지않고, 당당하게 교실 문을 열 수 있게되었다. 곁에 있지 않아도, 나를 공감해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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