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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 일본·류큐·제주도 ㅣ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총서 27
오카야 고지 지음, 이예안.이윤주 옮김 / 제이앤씨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만큼, 민속학에도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외국 출신 신神을 추종하는, 그 중에서도 유독 개신교로 점철된 우리나라를 보고 있노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은 이토록이나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시골에 가면 당산나무가 있었고, 서낭당도 있었고, 가족과 마을을 지켜주던 가택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신앙에 살아숨셨던 신들은 잊은채 외국 신에 열광한다. 외국 출신 신을 받드는 종교도 종교거니와, 그리스/로마/북유럽 등의 외국신화에도 열광한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살았을, 우리를 지켜주었을, 우리만의 신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직 제주도에는 신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 신화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제주 여행을 다닐 때는 제주의 신화와 관련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본토에는 찾기 힘든 민속신앙을, 제주도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제주도만큼은 아직 신화의 나라이며, 그네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내가 본 제주도의 신들도, 이미 수 많은 신이 사라진 뒤였다.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않게 꼭꼭 숨어있는, 본토처럼 난개발에 사라지고 있는 제주도의 ‘당’을 보고나서야 알았다. 뭐, 이 책의 주제는 사라지는 전통신앙에 대한 것은 아니니,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제주도, 한반도 서남해안, 오키나와, 일본 본토의 신사를 답사하며 연구한 결과물이다. 제목은 「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한줄로 요약하자면 “일본 본토의 신사의 원형은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그럼 이 우타키는 어디서 온 것인고 하니, 제주도의 ‘당’”이다. 물론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기엔 그 내용이 꽤나 방대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한일고대사를 너무나 좋아할 뿐더러, 관련 역사책을 비롯하여 일본에 갔다 하면 도래인의 흔적을 찾으로 여기저기 다니던 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아니,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지? 산지는 꽤 되었는데. 육아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미루고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좀 길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일본의 신사의 원형을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보고 있는데, 이 우타키의 원형은 제주도의 당으로 추정된다. 우타키나 당은 성스러운 숲, 여성사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제주도의 당 문화는 바다건너 서, 남해안에도 퍼져있을 것으로 보이나, 제주도와는 달리 본토는 미신타파 등 토종신앙 박해등으로 당문화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3.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우타키 문화만 제주도의 당 문화가 비슷한 것인가? 아니다. 제주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오키나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규슈 해안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고대에는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를 주변으로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여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풍습 역시도 오키나와나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 마을과 비슷하다. 즉 제주도인과 오키나와인, 그외 큐슈 해안가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고대의 일본 신사는 오키나와 우타키처럼 신사 건물이 없었다. 즉 성스러운 ‘숲’이나 나무, 바위 등을 모셨다. 신사에 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은 한반도 도래인이, 자국의 신을 모시기 위해 세운 신사에서 시작된다.
5. 일본 내에 있는 신사에서 출토된 제일 오래된 물품은 야요이 토기인데,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 도래인의 선진문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그외 수많은 도래인이 세운 신사의 기록을 볼 때, 일본 내의 많은 신사의 성립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은 어떠한 경로로든 개입이 되어 있을 것이다.
6.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숲’, 즉 신수신앙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데, 신수신앙에 대한 시작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성스러운 숲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있다. 또한 당시 고대 일본의 권력은 신라계 도래인이 쥐고 있었다.
7. 제주도의 당(본토 성황당 등)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본토 신사)는 그 시작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본의 신사와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일본 관광책자에는 무조건 실려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제주도의 당이나 본토의 성황당등은 많은 수가 사라졌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며, 실제로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중요시하였고, 타종교를 들여왔어도 박해를 하지 않았으나, 한반도는 달랐다. 고려 불교 오백년, 조선 유교 오백년, 현대의 새마을운동등을 거쳐 한반도 토종 민속문화는 거의 절멸하였다.
8. 한국의 토종신앙과 일본의 신사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으며, 일본에는 명확하게 검증된 고대 도래인이 세운 신사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의 토종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타파한 유교문화이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신사가 일본 고유의 문화인 것마냥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 일본 신사의 시작은 한반도다.
정말 이 책을 읽은 나를 너무 칭찬한다. 특히 한일고대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만한 책이 또 어디있을까? 정말 이 책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이 흠잡을 데가 없다. 정말 역사책은 ‘ㅇㅇ총서’ 정도는 되야 흠잡을 데 없고, 번역에 대한 가독성도 높아서 읽기도 좋다.
나 역시도 일본의 신사의 시작은 고대 한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근거를 들자면, 일본에 갈 때마다 한반도 도래인이 세운 신사와 사찰, 도래인들이 꾸려나간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은것과, 한일고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보이는 고대 일본의 권력 중심세력이 한반도 도래인들이었다는 점이랄까?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저 나만의 ‘카더라’에 지나지 않기에, 그냥 입 밖으로는 내지않고 혼자만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이런 생각들이 그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니. 흑.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바로 일본에! 요즘의 일본은 자국에 있는 신사와 사찰에서 도래인의 흔적을 지우고, 도래인의 흔적이 남은 지명조차도 바꾸었기에, 일본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이런 연구를 한다면 극우파에 협박에 시달리지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뭐, 여기까지 각설하고!
한반도 도래인에 관해선 대충 규슈는 가야/신라, 관서는 백제/신라, 관동은 고구려 도래인 계열이 주를 이루었다고 알고는 있었다. 그 도래인들이 각 지방에 설립한 신사나 사찰에 대해서도 유래나 뭐 이런 건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대충 알고있던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부분이 꽤 많았다. 특히 이세신궁과 신라의 연관성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터라, 와. 생각해보면 신라나 이세신궁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다 알고 있던건데, 왜 난 이걸 연관짓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은 꾸준히 계속 배워야 하나보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총 10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주도 당과의 만남
-한국 다도해의 당
-제주도 당과 제
-오키나와의 우타키
-제주도와 류큐
-신사와 한반도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1 (조몬, 야요이와 신사)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2 (신사는 무덤인가)
-성스러운 숲의 계보
-신사, 우타키, 당
이 챕터중 일부를, 특히 내가 기억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부분을 아래에 발췌했다.
▶ 제주도 당과의 만남
당은 결코 제주도만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과거에는 신사나 우타키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어느 마을에나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유교를 국료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크게 변질되었고, 특히 최근에는 근대화(예를들어 새마을운동)나 기독교의 보급으로 한국 본토에서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p 012
내가 본 최초의 당은 잊을 수 없다. 그곳은 서귀포시 북쪽 교외 호근동이라는 마을의 당으로 감귤밭 속 작은 숲이었다. 『제주도 고대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려있는 사진과 똑같은, 아니 우타키의 숲 그대로였다. (…) 『니혼쇼키』와 『고지키』에 나오는 스이닌텐노의 명을 받아, 다지마모리가 바다 저편 이상향인 도코요노쿠니에 구하러 갔다는 도키지쿠노가쿠노미는 제주도의 감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다지마모리는 신라에서 건너간 아메노히보코의 후예로 알려진 인물이며, 게다가 감귤이 자라는 곳은 한반도 안에서 오직 제주도뿐이라고 하니 이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p 018
당은 신사나 우타키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청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청결하지 않다. 처음에는 신앙의 쇠퇴가 그 이유로 보였지만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 같다. 제를 지낼 때 이외에는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금기가 있고, 또한 사람들은 일단 신에게 바친 제물은 쉽게 가져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한 데에서 난잡함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021
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네, 다섯 명의 할머니들에게 물으니 이 마을의 당은 해안가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파괴되었다고 했다. 새마을이란 새로운 마을을 의미하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농어촌 구습을 타파하고 시대에 걸맞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당 신앙 등은 미신으로 규정하여 배제 대상이 되었다. p 026
▶ 한국 다도해의 당
한산도에 가는 페리안에서 일본어를 잘하는 제승당 이사장과 함께 있었기에 당의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없어요” 라고 단번에 부정을 하는 바람에 나는 섬을 돌 의욕을 잃어 제승당만 보고 다음 페리를 타게 되었다. 연화도에서도, 욕지도에서도 내 입에서 나오는 당이나 신당이라는 말에 주민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단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작은 마을에 개신교, 천주교를 포함해 네 개나 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보급은 우리 일본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예를 들어 상점 하나 없는 작은 섬에도 지붕에 십자가가 반짝이는 교회만은 있다고 할 정도이다. p 039
나는 소매물도에서 처음으로 당, 정확히 말하면 당의 흔적을 보았다. (…) 그러자 주인은 나를 가게 밖으로 데려가더니 왼쪽 작은 산 정상 가까이의 산등성이에 우거져 있는 벌목된 것 같은 작은 숲을 가리키며 “옛날에 저곳에 당이 있어 제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까지 올라가 보았따.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그 앞에는 희미하지만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라진 당이었다. p 040
한려수도의 섬에서는 제주도와 비교해서 당 신앙의 자취가 매우 옅고, 당의 형태도, 그 제祭도, 제주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p 044
(신안 지도) 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아직 초목의 마른 빛깔이 남아있는 밭 속에 있었는데 주위의 평범한 풍경 속에 있어 유달이 눈에 띄는 숲이었다. (…) 신목이라고 생각되는 숲 중심에 솟아있는 커다란 팽나무 밑가지에 금줄이 쳐져있을 뿐이었다. 당은 보편적으로 마을의 뒷산과 가까운 산, 작은 산이나 조금 높은 곳에 입지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당인 제주도 호근동의 당과 이곳처럼 밭 가운데 있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이런 당을 들당이라고 한다. 당이 상당과 하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 신사의 야마미야와 사토미야과 같이 상당은 산이다 다른 높은 곳에 있고 하당은 마을이나 그 주변에 있는데, 대천리에서는 이 들당이 상당이고 마을안에 하당이 있다. p 048
비금도에서는 섬 남서부에 있는 내촌리의 당을 보러갔다. 마을 뒷산 중턱에 제를 지낼 때 제물 등을 준비하는 낡은 오두막이 있고, 그곳에서 40~50m 정도 더 올라간 곳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 구역이 있었다. 그 안에 높이 1m정도의 돌로 만들어진 신기한 신상이 평평한 자연석 위에 모셔지고 있었다. 이목구비와 가슴 앞에 모은 두 손만을 매우 단순한 저부조로 새긴 반신상으로 어딘가 오리엔트나 이집트의 신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도해의 당제』에 의하면 먼 옜날 한 학자가 딸인 소녀를 데리고 이 마을에 유배되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서 익사하고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산 정상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는 사이 죽게 된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딸의 영혼을 모시라고 고했기에 모시게 된 것이 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소녀상인 것이다. p 051
내가 이 섬을 방문하고자 한 이유는 외나로도의 신금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 숲이 있어, 그 속에 마신馬神을 모시는 당이 있다는 것을 『남해안』이라는 한반도 남해안 가이드북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최덕원씨의 「나로도의 당제」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최씨에 의하면 1986년 조사 시점에서 나로도 30개 마을 중 16개 마을에서 당제를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작년 내가 돌아본 몇 개의 당 중에 2곳은 폐당 혹은 제를 지내지 않아 현재 당으로써 남아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다. p 055
남해와 서해 섬들의 당을 돌아보고 깊이 느낀 점은 제주도 당의 분포가 높다는 점, 대부분이 당사를 두지 않는 작은 숲으로 되어 있다는 점,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점으로 다른 섬들의 당과 비교해서 상당히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질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의 당과 남해, 서해 섬들의 당, 특히 신안지역 섬들의 당 사이에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높은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 말한다면, 옛날에는 다른 섬들 즉 어느 섬의 어느 마을에서도 한 곳 이상의 당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왜 섬에서 당이 이정도로 소멸되었고, 제주도에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게다가 그 신앙이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 p 059
▶ 제주도 당과 제
일본에서는 ‘민간신앙과 그들의 국가 종교가 대부분 직결’되어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민간신앙이라고 하면 바로 반사적으로 미신과 타파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며 장주근씨는 약간 노기 서린 어투로 말한다(『한국의 향토신앙』). 실제로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사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우타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쓰마번의 류큐정벌 이후, 번의 직할령이 된 아마미의 섬에서 우타키와 같은 신산과 그 신앙이 탄압을 받아 관리의 손에 의해 산신의 나무가 베어지는 일도 있었고, 메이지정부가 한때 우타키를 신사화 하려고 도모한 적도 있었으나 모두 극히 일시적이고 한정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불가하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도의 당 입지가 이러한 박해의 역사과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신사나 우타키와 같이 마을 안쪽 눈에 띄는 장소에 입지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부분은 외딴 곳에 숨어 있듯이 존재한다. p 066
제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 우타키는 비슷하지만, 우타키의 경우 사제자인 노로, 쓰카사도 여성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반해 제주도 당제의 사제자는 남녀 누구나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오히려 박수 중심이었는지 17세기 초반에 병자호란 때 제주도에 오게 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이라는 저서에는 ‘이 지방 풍속에는 예로부터 여자 무당이 없고 귀신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은 다 남자 무당이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p 072
▶ 오키나와의 우타키
여성 사제자는 오키나와, 아마미 외에 일본 곳곳 변두리에 아직 그 존재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카라열도의 네시, 쓰시마의 묘부, 이즈칠도의 하치조섬과 아오가섬의 미코, 무녀들이다. 모두 낙도 이야기이며 본토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사 제사에 여성의 영향이 커진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세신궁의 제사에 미혼의 여성 황족을 사제로 봉사시키는 사이구제도, 가모신사의 같은 제도 사이인은 그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가지 제도는 당시 다른 신사에서도 제사가 여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p 103
이러한 우타키를 대표하는 게 세이화우타키이다. 이곳은 류큐왕조의 최고 신녀, 왕비, 왕의 자매, 왕녀 등이 임명된 기코에오키기의 즉위식과 오아라우리를 행했던 곳으로 이세신궁과 견줄만한 성지이다. 지금은 가이드북에도 실려있고 주차장도 있어 관광 명소의 하나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통제가 심했다. 특히 남자 엄금으로 남자가 어쩔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여장해서 들어갔을 정도의 장소이다. p 109
오키나와에서 현재까지 제사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류큐왕조가 있던 시기에 기코에오키미를 정점으로 하는 확고한 신녀 조직을 구축한 점이 그 커다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영적 우위를 인정하고 자매를 형제의 수호신으로 하는, 이른바 오나리신 신앙이 아마미, 오키나와 지방에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야나기나 구니오가 「누이의 힘」에서 다룬 이후 잘 알려지게 되었다. ‘오나리’란 형제가 자매 즉 여자형제를 이르는 말로 자매가 남자형제를 이를 때는 ‘에케리’라고 한다. p 111
(…) 세 명의 신녀가 있어 류큐왕조의 판도를 세 개로 나누고 각각 구역을 관리, 통괄했다. 그들 하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마을 혹은 몇 개의 마을마다 한 명씩 둔 ‘누루’(노로라고도 함)이다. 누루는 임명제이긴 했으나 왕부에서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고 지역 구가 여성이 선택되었다. 부계를 따르는 세습으로 백모, 숙모에서 조카딸에게 이어지는 계승이 전형적이다. 현재도 누루, 쓰카사 제도는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소멸 직전에 놓여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제사 수는 많아 여러가지 제약을 받는 누루, 쓰카사를 자진해서 떠맡으려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p 112
▶ 제주도와 류큐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는 고대부터 서로 이주와 혼혈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거리적으로 가까운 고토열도, 쓰시마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상적이었다고 여겨지며, 한반도 남해와 서해의 섬들과 현해탄의 섬들은 한 때는 동일 문화권에 속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도와 쓰시마에 대해 살펴보면 제주도에서 자리돔, 갈치 등 연안어업과 해조류 채취에 지금도 사용되는 떼배는 쓰시마에 현존하는 떼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말은 일본에는 쓰시마, 도카라 열도, 요나구니 섬에 있는데 한국에는 제주도에만 있고, 쓰시마의 말은 제주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129
『제주도 무속연구』의 저자 현용준씨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제를 지낼 때 심방이 ‘대로 만든 채롱 위에 북을 세로로 세워 올려 고정시키고, 북채를 양 손에 들어 오른쪽 고면 만을 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현씨가 쓰시마섬, 이키섬 조사 때 신사의 제의에어 신관이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북을 치는 것을 몇 군데 견학한 일이 있다고 한다. p 129
부언하자면 다니가와씨가 이 책에서 한반도에서는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하는데 제주도만은 구마모토, 가고시마에서 남도에 걸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력 팔월 보름날 밤에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이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로시오 문화권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역사학자 김태능씨는 제주 여성아 한반도 본토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까운 습속으로 ‘바느질 방법, 아이를 업는 방법, 물건을 등에 지고 머리 위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예로부터 떠돌아다니는 성향이 강해 타지에 진출하는 규슈 시마바라반도와 아마쿠사섬의 여성들이 제주도에 건너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p 131
김철준 교수는 ‘제주의 삼성설화는 이 지석묘 영조자들의 설화였다고 생각된다’고 까지 말한다. 삼인의 일본 여성이 안에서 나타났던 나무상자의 표착지는 제주도 동남쪽 온평리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규슈 서부지역에 가장 가까운 장소로 한때는 열운리라고 불렸다. ‘열운리의 여는 일본의 별칭인 이에 혹은 요와 비슷한 음이며, 이에인 즉 일본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이주해 온 장소라고 생각된다’고 김태능씨는 말한다. p 133
이러한 습속 외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독립국이었는데 결국 본토에 귀속되어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점, 최근에는 본토 사람들에 의해 제주도는 43사건,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라는 비극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매우 닮아있다. p 140
▶ 신사와 한반도
제주도의 풍습도 포함해 당이 우타키와 관계가 있다면 우타키는 신사의 ‘원시형식’이기 때문에 당은 신사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야요이 시대부터 고대까지 한반도 남부와 일본 본토, 특히 기타 큐슈와는 동일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과 신사의 관계는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 우타키의 경우보다 훨씬 밀접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든다. p 153
신사의 역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신사의 신역에서 야요이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서 야요이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한 문화이기에 그늘이 신사의 성립에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벼와 철이라는 이른바 선진문명의 전수자이기도 했고, 신을 모시는 방법만 토착민들(조몬인)에게 배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p 154
『하리마국풍토기』 이보군이세노조에 ‘기누누히노이테, 아야히토노도라라의 조상’이라는 백제에서의 도래인이 ‘여기에 살려고 신사를 산기슭에 세워 신을 받들어 모셨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또한 『고고슈이』에도 오진텐노 부분에 ‘진, 한, 백제에 종속하는 백성이 각각 많다. 감탄할 만 하다. 모두 그들의 신사가 있지만 아직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어, 도래인이 신사를 세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p 155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는 「신명장」에서 도래계라고 추정되는 신사를 표로 정리해 싣고 있고, 그 수는 14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등 이미 도래계로 확실히 알려진 신사는 제외한 것이니 실제수는 「신명장」 2,861사의 10퍼센트 가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사 명과 제신, 기록, 항간에 전하는 유래를 통해 사실로 판명된 것들이다. 하지만 중고시대 이후 신사 측에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꺼리는 경향이 강해져 이들 중에도 신사 명의 표기나 발음을 바꾸고, 제신도 원래 제신을 폐하고 『니혼쇼기』와 『고지키』의 신으로 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따라서 이들 이외에도 도래계였던 사실을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고 할 수 있다. p 155
신사에 대해 말하자면, ‘교토에서 가장 도래된 절인데, 전부라고 하면 과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반도 도래인의 신앙이 밀착되어 있다’라고 어느 좌담회에서 우에다 마사아키씨는 말했다. 실제로 가모신사,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야사카신사 등 교토의 유명한 신사의 대부분의 창사에 도래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p 161
…이나리라고 칭하게 된 유래는 하타노나카쓰헤노이미지키 등이 먼 조상의 하타씨족 이로구는 벼농사로 유명했다. 그런데 떡을 갖고 과녁으로 하여 활을 쏘았는데 떡이 백조로 변하여 날아가 이 산에 내려와 벼가 되었으므로 이를 신사 명으로 했다. 『야마시로국 풍토기』 中 인용
후시미이나리가 있는 주변은 하타우지 세력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신사가 진좌한 이나리산과 그 주변에는 몇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의 일부는 하타우지의 고분이고, 이나리 신사는 그 고분에 묻힌 하타우지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서 후에 농업신이 되어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하타우지의 창사에 관련이 있는 교토의 신사로는 이외에도 마쓰오타이샤와 하타노사케키미를 모시는 우즈마사의 시키나이샤 오사케신사가 있다. p 162
야사카 신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하나 소개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신사에서 나오는 『야사카신사 유서 약기』의 한 구절만을 인용하기로 한다.
…야사카 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사이메텐도 2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온 부사인 이리시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스사노오미코토를 야사카 지방에 모셔, 야사카즈쿠리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은 니혼쇼키에 스사노오미코토가 아들 이소타케루노카미와 함께 신라에 내려가 소시모리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신찬성씨록에 야사카즈쿠리는 고구려인 시루쓰마노오리사의 자손이라는 기록과 추정을 합하면 거의 이치에 맞는 창립이라고 볼 수 있다. p 164
이세신궁도 한반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실은 사라지거나 감춰져 이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향후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것이다. 김달수 씨의 『일본 속의 조선문화』 4에는 신궁 근처 이세시 구스베의 가라카미산을 찾으러 가는 도중 신궁사청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 지방사 연구에 볼두하고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니 그 사람이 “조사를 하면 할 수록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대로였어요”라고 했다. “모조리 조선 분위기가 풍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신궁사청이 곤란해진다는 거죠”라고 대답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덧붙여 이스즈강을 따라가는 가라카미산은 신궁의 네기(신관)의 묘지였던 곳으로 커다란 고분이 있었지만, 다이쇼 초기 이스즈강 개수 공사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는 가라신사의 작은 사당이, 그리고 가까운 숲에는 구니쓰미오야신사, 오쓰치미오야신사라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신궁 네기의 무덤이 있던 산이 왜 가라카미산으로 불리는지, 왜 근처에 선조를 의미하는 미오야라는 이름이 붙은 신사가 있는것인지 의문만 깊어간다. p 167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에서 먼저 쓰였다는 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나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 봄 2월조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신궁의 첫 기록이라 한다. 그 전까지 역대 왕은 제 2대 남해왕 때 창건한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 시조묘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왕이 제를 지내는 것은 신궁이 됨에 따라 시조묘를 신궁으로 개명했거나 개편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잡기 제1, 제사조에 남해왕이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기록한 후에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다’라고 하니, 이세의 제궁제를 떠올리게 하여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p 167
마에카와 아키히사씨는 「이세신궁과 신라의 제사제」라는 논문에서 ‘이세신궁이 신사에서 신궁의 칭호가 붙게 된 전화의 계기는… 신라의 제사성의 영향에 의한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하며, 이세신궁은 제사제도까지도 신라에서 배웠다고 한다. (…) 덴무도 이후 거의 정기적으로 복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덴무텐노시기로 보인다. 덴무텐도는 그 출신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로 신라에 가까운 텐노였다. 진신의 난이 덴지텐노의 친동생과 제1황자의 황위계승을 둘러싼 난이라는 종래의 설을 부정하고, 신라의 세력을 배후에 둔 오아마황자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은 오토모황자의 싸움이라는 오와 이와오씨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진신의 난 이후 덴무조에서 신라의 문물이 많은 분야로 들어왔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이세신궁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이세, 시마 지방에는 그 이전부터 많은 신라계 도래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p 168
이런 신라의 신의 숲은 당의 숲으로, 그리고 진수의 숲, 그러고 나서 우타키의 숲으로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신사와 한반도의 관계를 구체적인 사례에 입각해 추적해왔지만 끝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해 두겠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교토의 신사가 특히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에서 조선과 관련 있는 시키나이샤가 가장 많은 곳은 이즈모로 11곳, 다음은 오미 10곳, 야마토와 이세, 에치젠은 8곳으로 3위, 야마시로와 가와치, 무사시가 6곳으로 4위였다. 이주모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까워 신라와의 관계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p 169
약간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도래인의 흔적과 그들과 연관 있는 신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사의 성립을 고찰할 때 한반도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p 171
신라의 신수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좀 더 보충해보자.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숲 속 우물 옆에 놓인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고, 제13대 미추왕이 속한 김씨의 시조 알지는 계림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 속에서 나왔으며, 또한 수도 경주는 원래 계림이라고 불렸으니 이 나라는 수림樹林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 시대에 경주 부근 낭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왕은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 낭산을 성지로 하여 나무를 베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p 180
당과 신사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둘이 거쳐 온 역사이다. 신사 신앙도 우타키 신앙도 모두 시종일관 국가의 신앙으로 국가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며 박해를 받은 사례는 없었다. 그에 반에 당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음사로 배제되고,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당의 박해 사례는 제1장에서 언급했지만, 그것은 제주도만의 일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일이었다. p 181
일본에서 나오는 한국 가이드북에서 당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반해, 일본의 이세신궁이나 이즈모타이샤, 이쓰쿠시마신사 등에 대한 기술이 없는 한국 가이드북은 적다. 당의 자취는 희미하고, 그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아보인다. 그렇기에 신사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인 스스로 손수 다룬 당과 당제에 대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침내 본격화되고 있고,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당과 신사가 숨겨진 형제 혹은 자매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p 183
그리고.....책 내용과는 조금, 아니 매우 관계없는 TMI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는 김달수 씨의 저서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 김달수 씨의 저서가 우리집에도 있다. 그 책들은 여차저차해서 겨우 구하긴 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던 터라, 이 정도의 책을 쓴 저자가 인용할 정도면 그 내용도 정말 깊이가 있겠구나 싶다. 늦장 그만부리고 김달수 씨 책도 얼른 읽어봐야지(김달수 씨는 한일고대사에서 ‘도래인’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재일동포).
그러고보니22
이 책의 출판사가 제이앤씨다. 문득 내 책장에 일본사, 한일고대사에 관한 역사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봤는데 놀랍게도 제이앤씨에서 출판된 책들이 여러권 있었다. 뭐지 이 출판사..? 눈여겨 봐야겠어!
그러고보니333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번역이 꽤나 잘 되어 있다. TMI이긴 한데, 내가 읽어본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 중 반 이상은 정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물론 나 역시도 제약논문 번역을 하면서,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몸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뭐랄까.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돈받고 하는 일일텐데, 그정도로밖에 못하나? 싶은 마음이 아주 수백번 드는건 어쩔 수 없달까. 헌데 이 책은 그저 그런 교양서도 아니고 학술총서인데, 이 정도의 매끄러운 번역이라니! 이런 번역본들만 있었으면, 내가 굳이 원서를 읽을 일들이 없었을 건데^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