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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3
이중환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7월
평점 :
읽은 지 거의 한달만에 리뷰를 쓰게된 우리 고전문학 《택리지》. 모름지기 내가 책 리뷰를 쓰는 이유는 책을 다시 한번 읽는다는 개념으로, 머리속에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꺼내놓기 위함이다. 그런데.........가끔 이런식으로 책을 읽고나서 리뷰를 미루다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럼 책을 읽었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왠지 책 내용이 기억이 안나고 막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이렇게 더 미루다간 머리 속에 남는게 없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기억나는 내용만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가중 한명이다. 세력도 좋았고 나름대로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던 이중환이지만, 그가 살던 시기는 당쟁이 극렬했던, 숙종이 재위했던 때였다. 이중환의 당색은 남인.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여러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남인의 손을 잡았을 땐 서인을 축출하고, 서인의 손을 잡았을 땐 남인을 축출했다. 숙종이 환국을 단행하는 카드로 사용했던 사람이 남인쪽 장희빈과 서인쪽 인현왕후(+숙빈 최씨)였다. 즉, 최종적으로 장희빈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복귀하면서 남인은 완벽하게 축출,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조선이 망할때까지 쭉!
남인이었던 이중환은 이 모든 당파싸움 한 가운데서 모든 것을 겪었다. 권력 가까이에 있었으나, 권력 밖으로 밀려난 이중환. 그는 그렇게 방랑자의 삶을 택했다. 그의 명분은 조선팔도에서 사대부가 살만한 땅이 어딘지를 찾아다니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본인이 살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이중환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땅에 얽힌 역사, 지리적 이점, 사회 문화상 등을 본인의 저서인 #택리지 에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중환이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 우리나라 인문, 지리를 설명했지만, 진정한 본문은 〈복거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팔도총론〉이 “사대부는 어떤 곳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모아 정리한 자료라면, 〈복거총론〉은 바로 그 대답이다.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네 항목은 그때까지 다른 지리서에서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지세가 좋고, 생업이 넉넉하며, 인심이 후하고, 경치도 빼어난 곳. 이런 곳은 그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총론〉에서 다시 이 네가지를 묶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요약, 설명이 아니다. 그는 〈복거총론〉 ‘인심’ 부분에서 조선 후기에 사대부들이 겪은 당쟁을 설명하며, 당쟁이 없는 곳이 바로 사대부가 살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총론〉을 보면 그가 당쟁을 사대부만 겪은 피해라고 여기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쟁이 3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사대부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치우친 논의를 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염원한 땅이 어떠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치우친 논의를 하지 않고 사는 곳이다. 그는 사대부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차라리 농, 공, 상으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했다. p 006(옮긴이의 머릿말 中)
그는 어떤 곳을 좋아했는가? 〈팔도총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판단한 곳은 공주 갑천 일대다. 그가 공주의 금강 언저리를 설명하면서 ‘사송정은 울지 집’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결국 자기 고향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편하게 살지 못하고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 했으며, 그 뒤에는 별다른 벼슬도 못하고 온 나라 안을 30여 년 동안이나 떠돌아다녔다. (……) 그가 지리서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당쟁에 대해서 장황하게 기록한 이유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당쟁의 폐해를 심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그의 처가는 경종 때 신임사화를 계기로 당시의 왕세제였던 영조를 모함하면서 정권을 잡았지만, 뒷날 영조가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처가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 문과에 급제해 병조의 정5품 벼슬인 정랑까지 올랐던 그가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그가 인심이 좋은 마을에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대부들의 당쟁 탓에 온 나라 인심이 나빠졌다고 개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 007(옮긴이의 머릿말 中)
〈팔도총론〉
이중환은 팔도총론편에서 각 지역을 언급하며, 그 지역의 환경과 역사적인 유래, 현재상황등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사대부가 살기 좋은지 아닌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함경도
옛날에는 숙신에 속했다가, 한나라 때는 현도에 속했다. 그 뒤 주몽이 차지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여진이 차지했다. 고려때는 함흥 남쪽 정평부를 (북쪽) 경계로 했다가,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여진을 쫓아 버리게 하고, 두만강 북쪽으로 700리를 지나 선춘령을 경계로 했다. 그 뒤 금나라에게 땅을 다시 돌려주고, 함흥을 경계로 삼았다. 우리나라 장헌대왕(세종) 때 김종서에게 북쪽으로 1000여 리 땅을 개척하고, 두만강 가에 6진과 병영을 설치하게 했다. (이때부터) 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여진이 근거지가 모두 우리 판도에 들어왔다. p 040
또 나라 습속이 문법을 중히 여겨서 서울 사대부는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서북 사람도 감히 스스로 사대부와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서북 양도에는 드디어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사대부들도 그곳에 가서 살지 않았따. 오직 함종 어씨와 청해 이씨, 본관이 풍양인 안변 조씨만이 조선 초기에 높은 벼슬을 했으며, 서울로 옮겨 와 살면서 대대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 밖에는 (이름난) 사람이 없다. 따라서 서북의 함경도, 평안도는 (사대부가) 살 만한곳이 못된다. p 048
-황해도
대체로 이 도는 국도 서북꽂에 위치해 평안도, 함경도와 이웃했으므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는데, 문학하는 선비는 적다.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납, 철, 면화, 벼, 기장, 생선, 소금 등이 많이 나 부유한 자는 많지만, 사대부 집안은 적다. 그러나 평야 지대에 있는 여덟 고을은 땅이 기름지고 바닷가 열 고을은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역시 (사대부가) 살 지 못할 곳은 아니다. p 056
-강원도
(강릉부)이 지방 사람들은 노는 것을 좋아해서, 노인들이 기생, 악공과 함께 술과 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으로 가 질탕하게 놀기를 즐기며, 이것을 큰일로 여긴다. 그들의 자제들도 이에 물들어 문학에 힘쓰는 자가 적다. 또한 지역이 두 서울에서 멀어, 예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 오직 강릉에서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제법 나왔다. (……) 대체로 이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닷가에 있으므로, 주민들은 고기 잡고 미역 따며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 한때 노닐기에는 좋지만 오래 머물러 살 곳은 아니다. p 059
결론적으로 한반도 북부쪽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게 이중환의 총평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함경도나 평안도는 여진과 경계에 있고, 농사지을 땅이 별로 없다. 심지어 함경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황해도나 강원도는 문학보단 무예 또는 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한다.
-경상도
신라는 영남의 여러 나라를 다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쇠망하기를 엿보다가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말엽에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명령이 시행되지않고, 불도를 지나치게 받들어 산골짜기마다 절이 두루 섰으며, 많은 백성들이 중이 되었다. 그러자 궁예가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견훤도 백제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가 나서서 고구려 땅과 백제 땅을 통일하자, 신라도 땅을 바치고 (고려에) 붙어버렸다. p 069
우리 왕조에 와서도 선조 이전에는 국정을 맡은 자들이 모두 이 도 사람이었고, 문묘에 모신 사현도 이 도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조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백사 이항목의 문생 자제들과 어지러운 정국을 진정시킨 뒤부터는 서울에 대대로 사는 집안의 사람들만 치우치게 등용했다. (……) 그러나 옛날 선배들이 남긴 풍습과 혜택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아,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며, 지금도 과거에 많이 합격하기로는 여러 지방 가운데 으뜸이다. p 070
(동래부와 대마도) 해마다 대마도 사람이 도주의 문서를 받아 왜인 수백명을 이끌고 와서 왜관에 머문다. 우리 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바치는 조세 가운데 일부를 떼어, 왜관에 머무는 왜인에게 주었다. 그러면 그들이 절반을 도주에게 바치고, 나머지 절반을 경비로 썼다. (……) 이 섬은 원래 왜국에 딸린 것이 아닌데,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왜국을 빙자해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나라를 빙자해 왜국에게 중하게 보였으니, 박쥐 노릇을 하며 이로움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토벌해 우리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지 않으면 도주를 해마다 한 번씩 우리 조정에 조회하게 해 신하로 복종케 하고, 상을 주는 예로써 전에 주던 액수와 같이 후하게 줄수는 있다. 그러나 관을 지어 머물게 하며 조세를 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조공하는 것 같아 명분이 바르지 않으니, 빨리 폐지하는 것이 옳다. p 075~076
-전라도
노래와 여색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는 습속이 있어 경박하고 간사한 사람이 많으며,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그러므로 과거에 급제해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하니, 문학에 힘써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걸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타고나는 것이므로, (전라도의 인걸) 또한 적지 않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 사람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사람이며, 하서 김인후는 장성사람인데, (모두)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모두 광주 사람이며 절의로 이름이 높았다. p 083
(남원부) 구례의 서쪽에 있는 봉동은 샘과 바위가 기이하다. 동쪽에는 화엄사와 연곡사 같은 명승지가 있고, 남쪽에는 구만촌이 있다. 임실에서 구례까지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름난 곳과 훌륭한 경치가 많고 큰 마을도 많은데, 구만촌은 시냇가에 자리해 강산과 토지의 이로움과 거룻배 및 생선, 소금의 이로움도 있으니, (이 가운데) 가장 살 만한 곳이다. p 091
옛날에 속수공이 ‘민지방 사람들은 교활하고 음흉하다’고 했지만, 주자 때 이르러 어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어진 사람이 살면서 부유한 생업을 바탕으로 예의, 사양, 문장, 행실을 가르치게 되면,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게다가 (전라도는) 산천에 기이하고 훌륭한 곳이 많은데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크게 드러난 사람이 없었으니, 모였던 정기가 한 번쯤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이 먼 데다 풍속이 더러우니, 살 만한 곳이 못된다. p 096
한반도 북부와 다르게 경상도에 대한 이중환의 평은 꽤나 좋다. 무엇보다 지리가 아주 좋다고 극찬한다. 뿐만 아니라 옛 신라가 있던 곳이며, 경상도는 문학을 숭상하고 문장과 덕행, 절개를 지키는 등 인재들이 많이 나온 곳이라고 한다. 물론 경상 좌도쪽은 땅이 메말라 백성이 가난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나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고 호평한다. 그 와중에도 동래부와 대마도를 콕 집어서, 조선조정에 비판할 건 비판한다. 조선 백성들도 힘든데, 왜 우리 세금으로 왜놈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냐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왜놈들때문에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다 겪고, 나라가 피폐해졌음에도 말이다.
경상도에 대한 극찬과 극명하게 대비되는게 전라도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전라도에도 인재가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놈과 맞서싸운 의병들에 대한 극찬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라도는 간사한 사람이 많고, 문학을 숭상하지 않으며, 음흉하여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못박는다. 앞서 한반도 북부에 대한 비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 오백스푼 들어간 평이다. 이쯤되면 전라도 사람에게 대놓고 데인적이..................아! 그러고보니 선조 때 동인을 대학살시킨 서인, 송강 정철이 전라도에서 은거하던 사림들에게 수학했는데, 설마 그때문인가?(동인이 후에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짐)
-충청도
물산이 많기로는 영남이나 호남에 미치지 못하지만, 산천이 평온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이어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서울에 대대로 사는 집 가운에 이 도에 논밭과 집을 마련해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게다가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골라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다. p 097
-경기도
(수원부) 여기서 서쪽으로 30리쯤 물길을 가면 연흥도가 있다. 고려 말엽에 종실 익령군 왕기는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성명을 바꾼 뒤 가족을 모두 데리고 바다를 건너 이 섬으로 도망 와 숨었다. 그래서 고려가 망한 뒤에도 (다른 왕족들처럼) 물에 빠져 죽는 환난을 면했고, 자손들이 그대로 (이 섬에) 살게 되었다. 지금은 (그들의 신분이) 낮아져 목장의 목자가 되었다. p 133
(개성부) 가장 통탄할 점은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고려 말엽에 재상 반열에 있었으면서도 왕검과 저연이 하던 짓을 본받아 나라를 팔아서 이익을 챙기고 스승을 해치며 벗을 죽인 것이다. 게다가 고려가 망하자 또 왕씨 종실들을 없애는 계책까지 냈다. 자연도에 귀양 보낸다고 핑계를 대고서 큰 배 한 척에 왕씨들을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남몰래 보자기에게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으라고 해서 가라앉힌 것이다. p 143
(개성부) 성에서 동남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덕적산이 있는데, 이 산위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 침실을 만들고 민간의 처녀를 두어 사당을 모시게했다. 지금까지 300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다. 그 시녀가 말하길 ‘밤이되면 신령이 내려서 교접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최영은 무모하고 용맹만 있는 사내여서, 자기 딸을 왕우의 비로 삼았고, 나랏일을 잘못해 마침내 사직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했다. (죽은 뒤에도 혼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에도 들어가지 못해, 국사도 교사도 받지 못하는 귀신이 되었다. 그런데도 남녀의 즐거움을 잊지 못했으니,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심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리석고도 음탕하다고 말할 만 하다. p 146
이중환이 말하는 사대부가 살기 좋은 땅이 충청도편에서 나온다. 충청도 중에서도 어딘고 하니, 바로 공주다. 아주 여러 이유를 들어 충청도가 살기 좋다고 극찬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사심이 오백스푼 들어가있는 듯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충청도 공주는 이중환의 고향이기도 하다. 뭐, 근데 이중환의 고향인 것을 떠나서, 현재 기준으로 충청도는 수도권은 아니지만, 수도권에 인접하고, 수도권보다는 집값이 저렴하니 지금도 살기 좋은 땅은 맞는 것 같다.
경기도 편에는 이래저리 그 땅에 얽힌 고려말 조선초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확히는 조선조정에 의해 학살된 고려사람들 이야기를. 그 와중에도 최영장군을 깎아내리는 듯한 민간전승도 이야기한다. 뭐 이렇든 저렇든, 결론적으로 경기도는 당쟁에 편승한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기에, 경기도도 전체적으로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게 이중환의 평이다.
이중환이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으로 꼽는 땅은 기름진 곳이고, 그 다음은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간의 생산 활동, 창조적인 생명력이 있는 땅을 중시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데, 생산활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이 상선의 운용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해 모든 물자를 말로만 운송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런 문제는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으며, 물자의 운반 수단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박지원, 박제가 등이 배, 수레의 제조 및 활용을 주장한 것과 연관이 있다. p 151(《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실학사상)
이러한 《택리지》에도 한계점이 없는게 아니다. 풍수사상,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환경결정론적 시각, 선호하는 지방이나 지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리적 패러다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점 등이다. 물론 《택리지》가 풍수지리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중환 자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18세기 사회 전반에 팽배한 길흉화복에 대한 음택풍수의 사유를 수용하고 나타낸 것 뿐이다. p 153(《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실학사상)
팔도총론편을 읽으면 이중환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꼽는 곳의 주된 공통점이 있다. 농사짓기 좋은 기름진 땅이 있는 곳이거나, 배가 드나드는 강/바다 등 수로가 있는 곳, 수레가 다니는 넓은 도로가 있는 곳이다. 조선에서는 직업의 우선순위를 ‘사/농/공/상’으로 나뉘어, 제일 귀한건 공부하는 선비, 그 다음이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공업이나 상업같은 생산활동은 주자성리학자 입장에서는 멸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고로 배, 수레 운반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 즉 주자성리학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중환 같은 사람들은 사문난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중환은 개의치 않았다. 공부, 농사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당연히 가세가 기우니 공부를 할 수 없고, 운반을 할 수 없으면 농사를 지어도 잉여농산물을 팔 수가 없다. 어찌 운반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중환은 조선후기 실학자의 계보를 잇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복거총론〉
팔도총론에서 각 지역별 장,단점을 이야기하며 시동을 걸었다면, 복거총론은 팔도총론에 대한 해설과 함께 정말 살기좋은 땅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의견을 서술한 택리지의 실질적 본편이다.
-지리
무릇 살 터를 잡는 데는 지리가 으뜸이고, 다음으로 생리가 좋아야 하며, 인심이 좋아야 하고,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없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 없고, 생리는 좋아도 지리가 나쁘면 역시 오래 살 수 없다. 지리와 생리가 아울러 좋아도 인심이 나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 또한 가까운 곳에 노닐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을 도야할 수가 없다. p 156
-생리
공자의 가르침에도, 넉넉해진 뒤에 가르친다고 했다. 제 몸도 가리지 못하고 빌어먹게 되어, 조상의 제사도 받들지 못하고 부모를 봉양하지도 못하며 처자의 윤리도 모르는 자에게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덕과 인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p 161
물자를 옮겨서 교역하는 방법은 신농 성인이 만들었다. 이러한 법이 없으면 재물이 생길 수 없다. 그런데 (물자를 옮기는 방법으로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가 배보다 못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그래서 온 나라의 장사꾼들이 모두 말에다 짐을 싣는다. 그러나 (갈) 길이 멀면 옮기는 비용은 많이 들면서도 소득은 적다. 그러므로 (말로 짐을 옮기는 것이) 배에 짐을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는 못하다. p 164
-인심
서울은 사색당파가 모여 살아 풍속이 뒤섞여 고르지 않다. 지방은 서북 삼도를 빼고는, 사색당파가 동남 오도에 나뉘어 살고 있다. 경상도만은 모두 예안 이황의 학문을 숭상하는데, 유성룡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남인이라는 이름이 유성룡 때문에 생겼으므로, 온 도의 사대부들이 남인이 되어 의논이 통일되었다. 그러나 나른 도에는 사색당파가 고을마다 섞여 살고 있다. p 187
개벽 이래 천지간 여러 나라에서 인심이 일그러지고 무너져 본성을 잃었지만, 지금처럼 붕당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다. 이를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면 장차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 귀퉁이의 탄환만 한 나라가 비록 작다고는 하지만 산 백성이 100만이나 되니, 장차 그 심성을 다 잃어버려 구제할 수 없게 된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다. p 191
그러나 (같은 색목끼리 모여 사는 즐거움도)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으며,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렇게만 되면 비록 농사꾼이 되거나 장인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어도 (참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그 고장의) 인심이 좋은지 나쁜지도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p 190
-산수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사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을 촌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 가운데는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사람은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만)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산수만 보고 삶을 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산수만 보고 사는 것보다는)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10리 밖이나 반나절 거리 안에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사 두었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때때로 오가며 시름을 풀고 머물러 자다가 돌아온다면, 이야말로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p 251
특히 이중환은 ‘인심’편에서 맹모삼천지교를 이야기하며 지방의 풍속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동서 당쟁의 시초를 시작으로 붕당정치의 폐해, 인조반정, 서인들의 집권 및 분열 등을 길게 이야기 한다. 이중환 본인이 사대부이면서 당쟁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당쟁의 피해가 사대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쟁의 피해가 백성에게까지 피해를 미친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팔도총론에서 이야기했던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발발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은 각각 서인과 동인이었다. 그들은 동/서인의 격렬한 당쟁속에서 선조에게 상반된 의견을 보고했다. 물론 그 보고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해야하는건 조선의 왕 선조였고, 선조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못한것도 문제지만, 서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상반된 보고를 한 두 사람도 문제였다. 결국 일본이 조선으로 처들어왔고 조선 땅에서 7년동안 전쟁이 벌어졌다. 또 다른 사례로는 병자호란도 있다. 병자호란 역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눠서, 서로 명분싸움만 하는 바람에 조선의 백성들이 또한번 피해를 입고야 말았다.
당쟁의 폐해는 비단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된 현재를 보면, 각 정당들이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외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오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이렇게 ‘반복’되는 좋지못한 행동을 개선하기 위함인데, 이 나라에선 언제끔 그게 가능해질런지,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한건지 당최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