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쁜 보드리와 벚꽃구경을 하고 싶었던 대발이. 하지만 보드리 눈에는 왜인지 모르게 대발이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었나보다. 특히 발!!!!! 그래도 대발이는 보드리를 너무 죠아해.....흑흑 아, 우리 대발이.... 이렇게 짠한 캐릭터였니? 엄마는 슬프구나T_T.



뭐랄까, 성인인 엄마의 눈으로 본 이 그림책은 모든 친구들이 나를 좋아할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과 같이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지만 보드리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하는 그런 너낌적인 너낌의 그림책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조금은 잔혹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유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건 사실이니까T_T.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내가 나빠서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아버리니, 그전에 이렇게 그림책으로 미리 이런 상황을 대리경험하면서, 모든 친구들이 나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인 것 같다. 




아, 뎡말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조금 슬픈이야기네. 우리 뿡뿡이는 친구를 너무 좋아하지도, 너무 싫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딱 적당할 정도로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으면. 여튼 그래서 난 우리 뿡뿡이가 기관에 입소하거나, 단지 내 친구들이 생긴다면 친구에게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이유없이 나를 싫어하는 친구도 있을 수 있으니, 그 친구들에게 잘보이려 하지도 말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다. 흑흑.



아? 문득 내가 자주 뿡뿡이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네?



“뿡뿡아, 착한 호구처럼 살면안되고, ㅅ년으로 살아야 잘 살아!! 네 것은 네가 챙겨야해!! 엄마랑 아빠는 뿡뿡이꺼니까, 엄마아빠는 챙기는거 잊지 말고?!”



이제 뒤집을 준비하는 어리디 어린 뿡뿡이에게 엄마가 하는 말이 이런거라는게 넘나 슬픈것T_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전설일본


꽤 오래전에 짧은 서평으로 올렸던 『에도 일본』 후속편이다. 음 후속편이라고 하는게 맞나..? 저자인 모로 미야는 『에도 일본』, 『전설 일본』, 『헤이안 일본』, 『이야기 일본』 총 4권의 책을 출간했다. 다만 이 책들은 현재...당연히 절판이다. 하지만 내 책장에는 4권 모두 있다는 것! 이럴땐 묘하게 뿌듯뿌듯.



일본은 팔백만신의 나라답게, 그만큼 많은 전설을 가지있다(도시전설 제외!!). 예컨데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모모타로 이야기라던가, 카구야 공주 이야기도 일본의 오래된 전설 중 하나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전설들이 일본의 요괴문화의 시작이었으며, 현재 일본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쉽다. 우리나라로 치면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까지는 아니고, 쉽게쉽게 읽힌다고 해야할까? 거기다가 역사적 근거 또는 전설이 전승된 지역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 유적지도 알려준다. 친절하게 사진까지 포함해서! 책을 읽다보면 내가 가본 곳도 있고,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 그렇다. 특히 가본 곳은....당시 그 곳을 갔을 땐 이런 전설이 있는지 몰랐던지라, 왜 진작에 이 책을 읽지 않았나 후회했을 정도T_T. 모르고 가서 보는 거랑, 알고 가서 보는 거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2) 일본신화 코지키(고사기)


음.... 이 책은 오늘 서평하는 3권중 제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아마 1n년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 뭐 당시에는 책은 읽기만 할뿐, 서평따위는 쓸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흠흠.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고 오래된 역사서로 《고사기》, 《일본서기》 2개가 있다(뭐, 《신찬성씨록》도 있긴 한데, 음). 개인적으로는 이 책들을 다 읽고 싶었었다. 한일고대사나 도래인에 대한 내용을 알려면 《고사기》,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을 전부 읽어봐야하니 말이다. 다만 이 책을 살 당시에는 해당 책들의 완역본이 국내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때 내 눈에 띄었던게 이 책 『일본신화 코지키』다. 


아! 물론 지금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위 책들 완역본을 출간했다. 사야지사야지 하고 있는데, 서...섣불리 손이 안가는게 함정;; 



뭐 여튼, 이 책은 《고사기》 상,중,하편을 읽기 쉽게 엮은 책이라고 보면 된다. 상권의 이야기는 일본의 창세신화, 중권과 하권은 초대 천황을 시작으로 역대 천황들의 영토 정복과 이런 저런 이야기다. 온전히 《고사기》에 대한 내용이다. 근데 굳이 우리가 일본 신화를 읽을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나라 고대사를 추적하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는 고대사, 그러니까 당대에 쓴 역사서가 남아있는게 없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에는 당대의 역사서가 남아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고대사 추적을 위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를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역사서를 말이다. 유독 ‘일본’을 강조하는건, 《고사기》, 《일본서기》, 《신찬성씨록》에 고대 한반도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당대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우수했던 한반도의 청동기, 철기문화를 비롯하여 수 많은 서적을 전래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당대 천황가를 주름잡던 실세들은 한반도 출신 도래인들이 많았다.



특히 《고사기》 편찬자인 오오노 야스마로(기원 후 723년 사망)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들도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백제 멸망 당시 왕자 풍장을 호위단 중 한명이 오오노 야스마로의 조부였다. 야마토 정권 당시 대표적 실세였던 소가씨도 백제계 노래인이었고, 소가씨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모노노베씨도 도래인이었다. 당연스레 백제계 도래인 여성들이 천황 조모, 모친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고사기》에는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무리 당대의 역사서인 《고사기》라고 할지라도, 이 책은 천황가 주도로 편찬이 되었다는 점이다. 황실 주도라는 건, 황실을 띄우기 위해 편찬했다는 점을 뜻한다. 그래서 책 전반적으로 천황가의 정통성이라던가, 신의 자손이라는 점을 부각한다던가 뭐 이런 과장과 허구가 즐비하다. 그래서 보통, 아니 나같은 경우는 《고사기》를 비롯한 일본의 고서3종을 ‘5%의 진실과 95%의 과장’이 섞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속에서 5%의 진실을 찾아내는게 우리 고대사를 추적하는 길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렇다.



3) 정창원, 역사와 보물


일본 나라시에 위치한 도다이지(동대사). 도다이지는 아스카데라와 함께 나라시대를 대표한 사찰이다. 참고로 도다이지를 건립한 행기 스님은 백제 도래인이다(혹은 백제 도래인의 후손). 뭐, 이때는 이미 귀족, 기술자 각종 계층에 백제계 도래인들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도다이지 뿐만 아니라 아스카데라,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교토의 아사카데라 및 아사카신사, 교토의 후시미이나리신사 기타등등. 유명한 대부분의 사찰과 신사의 건립자는 대게 한반도 도래인 또는 도래인 후손이다. 뭐, TMI는 여기까지하고.



이 책은 도다이지의 쇼소인(정창원)에 대한 전문서적이다. 지금이야 도다이지의 쇼소인(정창원)이 워낙에 유명하여 고유명사처럼 되었지만, 실제로 ‘쇼소’, 즉 ‘정창’이라는 말은 중요한 물건이 보관된 창고를 의미한다. 고로 쇼소인은 도다이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찰에 쇼소인이 있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유물이 발굴된 대표적인 쇼소인으로는 규슈의 니시노 쇼쇼인, 규슈 우미노 쇼쇼인이 있다. 어라 생각해보니 이것도 TMI22.



흠흠.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2002년 당시 정창원 사무소장으로 재직하던 일본인이 쓴 저서다(지금도 재직중인지 모르므로). 이 저서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완역하여 출판한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한일관계사를 좋아하다보니, 동북아역사재단의 책도 꽤 읽어본 편이다. 해서 그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읽었다. 물론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한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난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나온 한반도계 유물들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정창원 자체에 대한 소개와 정창원의 역사 및 정창원 보물 분류 및 보관 등등 오롯이 ‘정창원’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내 기대와는 달랐지만, 이 책은 도다이지 쇼소인을 이해하는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숲에 있는 나무 한그루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은 그 나무를 포함한 숲 전체를 보여준 느낌이랄까?


정창원 보물은 다양한 원류를 가진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필자는 이 정창원 보물들의 핵심이며 구심력이 되는 것으로 ‘정창원이라는 장소’를 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창원이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졌떤 행위 그 자체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보물 보전’의 내용이며 ‘정창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동대사 정창원은 역사상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오고간 장소다. 후지와라 미치나가, 고시라카와 법황, 다이라노 키요모리,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마사, 오다 노부나가, 메이지 천황 등 역사상 많은 중요한 인물들이, 고요황후가 쇼무 천황의 행복을 빌기 위해 대불에 바친 쇼무천황의 애장품을 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보고의 수리를 명하였고, 보물 보존을 위한 용기를 기증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식산흥업을 위해 보고에 보관된 직물을 배포하여 활용할 것을 제언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는 보물의 공개와 보존을 양립하기 위해 보고 안에 유리 진열장을 설치하였다. p 021(저자)



우리에게 정창원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신라촌락문서를 비롯하여 신라, 백제 등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문물들이다. 일본학계에서 신라촌락문서가 소개되자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후 수많은 연구 성과가 쏟아졌다. 1차 자료가 흔치 않은 한국 고대 사료의 세계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창원에는 희귀한 고대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보통 고대 자료들은 필사된 후대의 사본들이거나 지하에서 출토된 매장유물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정창원 문물들은 한 건물 안에서 온존하게 보존되어 전해졌다는 점에서 다른 고대 문물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p 022(역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10-07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신화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축하드려요 *^^*

이하라 2022-10-07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2022년을 살고 있는 나지만, 난 꽤나 우리 민속&전통문화를 중시한다. 예로부터 전해내려온 금기담도 어느정도는 지키려고 하는 편이다. 다 이유가 있으니 생긴 전통문화, 금기담이 아니겠는가? 이 책도 그 연장선이다. 




본디 우리나라에 있던 세시풍속은 농업의 주기에 맞춰 생겨났다. 한마디로 세시풍속은 곡식의 씨를 뿌리는 시기, 잘 자라는 시기, 수확하는 시기, 농사를 쉬는 시기에 맞춰 생겨난 것이다. 해서 매 계절, 절기마다 그에 따른 세시풍속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절도 세시풍속중 하나인 것이다. 벗뜨, 시간이 흘러흘러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는 산업국가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세시풍속도 잊혀져갔다. 대표적으로 일년 중 제일 큰 명절인 4대명절 설날, 추석, 단오, 한식 중에서 설날과 추석정도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단오는 여러 지자체에서 자체행사를 하기도 하지만, 한식은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옛날엔 4대명절 중 한식을 제일로 쳤는데, 2022년인 지금 한식은 아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신 외국에서 들어온 기념일을 챙기기 시작했고,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기념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화하니 어쩔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난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세시풍속이 하나둘 사라져가는게 슬펐다. 그래서 ‘나라도 알고 있어야지, 나라도 지켜야지’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뭐 역사를 좋아하는지라 더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여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예로부터 전해져내려온 세시풍속을 월별로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1페이지당 세시풍속 1개씩이고, 그나마 페이지의 반 이상이 일러스트다. 글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읽기 어렵지도 않다. 거기다 책도 손바닥만해서 보기도 편하다. 집에 아이들이 있다면, ‘이 달의 세시풍속은 뭐가있나?’ 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겸사겸사 하나둘 정도는 직접 챙겨보면 더 좋고.



아래는 9월에 해당하는 세시풍속 중 일부다. 아! 여기서 주의해야하는 건, 세시풍속은 ‘음력’ 날짜 기준이라는 것.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로 양기가 가득한 날이다. 이날에는 연고가 없이 객사한 이들, 자식이 없어 제사를 못 지내는 이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를 망제라고 한다. 망제는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못한 소회된 혼령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다. p 276



양기가 가득한 중양절엔 귀신을 쫒는 풍속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수유열매를 머리에 꽂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수유 열매를 꽂고 돌아다니면 잡귀를 물리친다는 속설이 있다. 수유 열매의 붉은색이 벽사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 279



봄에는 진달래 화전을 먹듯 가을이 오면 국화를 따 국화전을 요리한다. 요리하는 방법은 진달래 화전과 동일하다. 찹쌀가루 반죽을 얇게 펴고 그 위에 국화를 올린 뒤 부치는 것. 국화는 잡귀를 물리치는 힘을 가진 식물이기도 하다. p 280



음력 9월이 되면 가정에선 마당에 엄나무를 심거나 베어서 문에 매달아둔다. 엄나무의 날카로운 가시에 귀신의 도포가 걸려 못 들어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p 285



경상남도 함양에서는 중양절이 되면 시냇가에 모여 앉아 손을 씻는다. 손을 씻는 풍습은 액을 떨쳐내는 것과 연관이 있는데 단옷날 창포물로 머리감기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중양절 냇물은 양기가 가득해 음기가 있는 귀신을 씻어낼 수 있다. p 2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왕실의 자녀교육법 - 혜경궁 홍씨, 인수대비, 사주당 이씨에게서 조선시대의 총명하고 어진 자녀 교육법을 배운다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집에 있던 책이다. 내가 학찰시절 산건지, 아니면 누가 준건지 당최 언제부터 우리집에 있었는지 알수 없는 책이랄까. 그토록 오래 있었는데, 읽어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뿡뿡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 책에 눈길이 간게 아닐까 싶기도?




우리는 임신을 하면 그렇게나 ‘태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산모만 편하면 될것인데, 뱃속 아가를 위해서 고놈의 태교태교태교. 물론 나는 태교다운 태교는 하지 않았다. 산모인 내가 편하면 뱃속 아가도 편할텐데, 굳이 찾아나서서 태교를 할 필요가. 그저 내 취미생활인 독서를 계속했고, 틈틈히 블로그도 하고, 포켓몬고도 하고. 진짜 나 편한일만 했다............는 내 TMI. 우리나라에서 고놈의 태교를 입에 달고 있는건, 이 태교가 옛날부터 중요하게 여겨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임신태교 교육서까지 나왔다. 바로 사주당 이씨가 저술한 『태교신기』. 난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태교신기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냥 드립인줄 알았는데, 와- 진짜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었다는게 너무 소오름이었다. 더 놀라운건 현대의 태교보다, 조선의 태교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기를 갖는 과정조차도 엄격하게 따졌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있는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조차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사극에서 종종나오는 ‘합방일’이라는 것도 왕과 왕비사이에 아기를 갖을 최적의 날짜를 계산해서 합방을 하게 하는거니 말이다. 그래봤자 애바애라고, 성군될 놈은 성군되고 암군될 놈은 암군될 터인데. 허허허 ㅋㅋㅋ


아버지가 아이를 갖게하는 것과 어머니가 아이를 뱃속에서 기르는 것과 스승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훌륭한 의사는 병들기 전에 치료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가르친다. 그러므로 스승이 10년동안 가르치는 것보다 어머니가 뱃속에서 10개월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10개월간 뱃속에서 기르는 것보다 아버지가 하룻밤에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 036 『태교신기』 中



자녀를 갖고자 한다면 부인은 반드시 월경이 순조로워야 하고, 남자는 반드시 정액이 충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욕정을 줄이고 마음을 깨끗히 하는 것이 상책이다. 욕정을 줄이면 함부로 교합하지 않아야 기운과 정액이 쌓인다. 그러다가 때에 맞게 교합을 하면 능히 자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욕정을 줄이면 정액이 충분해 자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녀를 낳을 수 있고, 오래 살 수도 있다. p 066 『동의보감』 中



조선시대의 임신한 여성에게는 수많은 금기사항들이 있었다. 임신 금기는 조선 왕실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왕비의 안전을 위해 또 몸과 마음이 건강한 후손을 위해 임신 금기는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임신 금기는 『동의보감』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에는 임신 금기가 음식 금기와 약물 금기로 나뉘어 있다. 그만큼 임신 중 음식과 약물이 태아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p 105



태교에 대한 조선 왕실의 목표와 신뢰는 『내훈』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은 인수대비 한씨가 왕실 여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궁중 여성 교과서였다. p 109



조선시대 왕실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여성들이 자녀 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문왕은 동양사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인물이었다. 유학을 대표하던 공자가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이 문왕이었다. 문왕은 중국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되는 주나라를 세운 창업자이며 완벽하게 인격을 연마한 성인이었다. (생략)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명실상부한 제왕을 길러내기 위해 태교를 행하였다. 나라와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왕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고, 그런 지도자는 태교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왕실 태교의 목표이자 신념이었다. p 112



조선왕실의 자녀교육은 태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출산 후 교육도 포함이다. 왜냐? 왕이 되어야 하니까!


옛날 사람들은 나라의 세자를 교육하는데 더욱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세자가 위로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자는 지위와 권세가 한없이 높아 방종하기 쉬우니

미리미리 바르게 교육하는 방법을 더욱 시급하게 서둘러야 합니다.

-중종실록 권 27, 12년 1월 을미조



어쩌면.. 현대의 유별난 조기교육은, 조선왕실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따라가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실에서는 아이가 두세살이 되면(특히 원자라면 더더욱), 그때부터 기본교육에 들어가니 말이다. 심지어 원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 실제로 조선시대 원자의 스승은 삼정승이나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또는 명망 높은 유학자 중에서 뽑았다고 하니, SKY 과외선생을 고르는 요즘 부모 유별나다할게 못된다.



근데 여기서 함정. 조선 왕실에서 정식으로 원자교육-제왕교육 루트를 밟고 왕이 된 사람은 몇명 없다는 것ㅋㅋㅋㅋㅋㅋ



고로 저렇게 유별나게 원자/제왕교육한다고 해도 쓸모가 ..........음, 쓸모가 있을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쓸모가 없지 않을까. 그나마도 조선왕실에서 저렇게 정식 루트 밟고 왕이된 사람들 보면 아주 소수만 성군이 될뿐 대체로 단명하거나, 암군되던데? 결국 애바애아닌가. 뎡말 예나 지금이나 애바애는 명언중의 명언인듯! 이래저래 작금의 유별난 태교열풍이나, 조기교육, 사교육 열풍은.......예로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었나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집 책장에는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책이 꽤나 많다. 그중 6할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4할은 일제잔재, 친일파, 일제강점 당대이야기 등). 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많이 읽었고, 심지어 여행다닐때도 독립운동 또는 독립운동가에 관련된 사적지도 자주 찾아다니고 그랬다. 유독 다른 시대의 역사보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기 위해서. 



그어떤 역사든 왜곡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 근대사, 특히나 독립운동 관련해서는 왜곡과 침묵이 너무나 많다. 제일 큰 이유는 해방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부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 이유는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사상이라는 무거운 문제로 대립하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두가지 이유는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해방후 친일매국노들은 사상을 방패삼아, 반공을 외치며 우파 독립운동가 뒤에 숨어들어갔고, 사회주의사상 또는 중도 독립운동가들을 척살해나간다. 그들은 그렇게 부와 권력을 유지했고, 그 친일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산다).



오늘 읽은 이 책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내가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몰라서 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 실려있는 독립운동가들 대다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이 집필된 이유다. 바로 우리 동네에 세워진,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동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동상은 단박에 안다. 동상의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말이다. 반면에 독립운동가 동상은 ‘아, 동상인가보다’ 하고 외면한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의 동상 정도는 되야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다. 물론..... 나도 그런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아무리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알고, 독립운동사를 알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얼굴은 생소하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 그들을 기리고 동상까지 세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동상’들 위치를 보면,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지역이 꽤나 많이 있었다. 분명 당시에도 나는 역사덕후였고, 꽤 많은 독립운동 책을 읽었는데도 말이다.



아직은 응애밖에 못하는, 사랑스런 내 딸이 생긴 지금. 내 딸과 손잡고 여행을 다니다가 독립운동가 동상과 마주한다면, 그 때는 과거처럼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보면서 동상으로 세워진 이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렇게 동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1천대 1로 싸운 조선의 총잡이, #김상옥

독립운동가 김상옥, 지금보다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몸 담았던 독립운동단체가 #의열단 이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 역시도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조금 달라졌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가들 이름이 하나둘 대중매체(특히 영화)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나, 이 챕터의 주인공인 김상옥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나 총잡이 김상옥은 SBS 프로그램인 꼬꼬무에서도 한번 다뤘기에, 꼬꼬무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친숙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의 거리다. 온갖 공연으로 볼거리가 가득한 이 곳 한 모퉁이에 동상이 하나 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모델로 삼았던 김상옥이 동상의 주인공이다. 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상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한편으론 일본 경찰 1천여 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면서 수십여 명을 사살한 게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그러나 두말할 것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p 056



김상옥의 동지인 전우진을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한 끝에 김상옥이 이혜수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은, 1월 22일 새벽 다섯 시 중무장한 헌병대 1천여 명을 대동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깊은 숨을 내뱉은 김상옥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양손에 총 두 자루를 강하게 움켜쥔 채 일본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지붕에 올라가 김상옥의 동태를 살피던 일본 경찰이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총을 발사하니 긴장된 정적이 깨졌다. p 062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일본 경찰은 김상옥이 죽었으리라 짐작했지만, 두려움에 누구도 섣불리 걸음을 옮겨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그의 어머니를 총알받이로 내세워 조심히 변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순국한 김상옥이 있었다. 세 시간이 넘는 교전 끝에 열여섯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한 김상옥의 마지막은 장렬했다.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일본경찰들은 김상옥 곁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김상옥의 죽음이 확실해졌다고 생각하곤 김상옥의 시신을 옮겼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상옥의 몸에는 무려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던 것이다. p 063



나에게도 김상옥은 익숙한 인물이다. 각종 다큐, 책으로도 꽤 자주 접했던 인물이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챕터를 읽으면서 당황했던 사실은... 그의 동상이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대학로에 있었단 사실이다. 난 역사덕후이기도 하지만, 연뮤덕후이기도 하다. 연뮤덕의 특징 중 하나가 회전문인데(^^..) 그 덕분에 대학로를 아주 제집 드나들듯 다녔는데, 그 앞에 있던 동상이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동상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애초에 누구의 동상인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고 말이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나중에 대학로를 가게된다면, 김상옥 열사를 다시금 떠올려야지.



▶을사늑약에 개탄하며 죽음으로 사죄하다, #민영환

구한말, 우국충절의 대명사인 민영환. 그는 민씨 척족임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가 아닌,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 자결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절개는 백성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였고, 우국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분명 다른 민씨와는 달리,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음은 높이살만하지만,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생각한 끝이 자결이라는게 좀 안타깝다. 후술하겠지만, 민영환처럼 태어나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던, 지체높은 양반가 석주 이상룡 집안이나, 민영환처럼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이회영 집안은 ‘살아서’ #항일무장투쟁 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선조들의 역사만봐도 민영환의 선택이 얼마나 씁쓸한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전, 일본을 찾아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황윤길은 (일본과)전쟁이 일어날거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7년간의 길고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쟁은 없을거라던 김성일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김성일이 민영환 같은 관료였다면, 자결하여 순국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일의 선택은 달랐다. 김성일은 앞장서서 왜놈들과 싸웠다. 약 이백여년 뒤 이상룡이 그러했고, 이회영 6형제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민영환의 순국은 그저 죽음으로 도망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씁쓸하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당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척족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민씨 척족 중 상당수가 부당하게 얻은 권력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달리 민영환은 쓰러져가는 나라의 국운을 걱정하며 자결했다. p 129



민영환은 여러 나라를 거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마주했지만,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의 풍습과 사고방식에 젖은 모습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생략) 민영환은 2년 동안 제국과 식민지로 전락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조선의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았다. 그런 시점에서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설립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부르짖었다. 서재필의 뜻에 동감한 민영환은 군부대신 겸 내부대신으로서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을 지지했다. p 132~133



민영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크게 변화되지 못했다. 대내적으로는 고정의 무능력과 친일파 득세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했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p 135



민영환은 일본 헌병이 조병세를 체포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본인이 소두가 되어 상소문을 재차 올렸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이번에는 민영환을 평리원에 구속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소문의 참뜻이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민영환은 목숨으로 뜻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일이 되던 날인 1905년 11월 3일 민영환은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순국했다. 민영환의 나이 45세였다. p 135



공개된 그의 유언서가 많은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라를 운영한 관료로서 국운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막아내지 못한 자신의 죄를 성토하면서, 이 나라를 포기하지 말고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당부에 많은 이가 눈물을 흘렸다. 조병세, 송병선, 홍만식 등 전,현직 관료들이 민영환을 뒤따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했다. p 136



관료로써 민영환이 참가한 독립협회. 여기에 대해서도 난 할말이 많다. 분명 독립협회 초반에는 고종의 지지가 있었고, 그렇기에 관료였던 민영환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을 이야기하자, 고종은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서 강제해산시켰다. 고종이 직접 말이다. 입헌군제자라함은, 전제왕권이 아닌 체제이기에, 왕권강화를 원했던 고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로 고종이 원한 자주독립은 전제왕권을 기반으로한 자주독립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대한제국 헌법에도 명확히 명시되어있기도 하고.


거기다 독립협회 2대 회장은 친일매국노이자,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이완용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상의 업적, #이시영

부와 권력을 쥔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시영, 그에게는 형제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이회영 6형제라 부른다. 대부분은 넷째였던 우당 이회영을 기억하지, 이시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한민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시영은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기에, 이름이나마 알고 있을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시영이라는 이름자체를 모르는게 부지기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할 때 보통 김구만 떠올린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6형제와 함께 오늘날로 환산해 600억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아부은 이회영은 기억하지만, 동생 이시영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잘 알지만, 부통령 이시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이시영은 드러나지 않는 2인자였지만 평생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로 나라를 위해 살았다. p 231



이시영은 간도로 떠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설 이 시간으로부터는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맹세했다. 굳은 결심으로 (간도)삼원보에 도착한 이시영은 교육과 상공업을 발전시켜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경학사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강습소를 세우는데 매진했다. 필요한 경비의 대부분을 제공했음에도 이시영은 직책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에게 직책을 양보했다.p 234

>경학사 초대사장 이상룡, 신흥강습소 초대교장 이동녕



(3.1운동 이후, 임정 수립)초대 법무총장으로 참여한 그는 곧 재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았다. 그리고 독립하는 날까지 임시정부와 함께했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독립운동 방향을 두고 분열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시영은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켰다. 국민의 염원과 희망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를 버린다는 건 이시영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 235



나라를 되찾고자 인생을 바친 이시영은 1945년 77세 때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따. 그러나 이시영은 굴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임시정부 시절 사용하던 예전 직함을 그대로 사용했다. p 237



이시영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든 일이 1946년에 발생했다. 여운형이 피습당하는 사건을 두고 좌익단체 민주주의민족전(민전)이 이시영이 위원장으로 있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부위원장 신익희가 이시영의 동의없이 민전을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검찰에 고발하자, 이시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과거의 동지들이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정치이념을 가졌음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었다. p 238



이 챕터의 주인공은 분명 이시영이지만, 난 이시영을 포함한 그의 형제들을 모두 이야기 하고 싶다. 이씨집안의 6형제는 모두 본인과 가족들, 재산 모두를 바쳐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니까.


→ 첫 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았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 둘 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 셋 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 넷 째 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이후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밝히지 못했다.


→ 다섯 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께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한강교를 폭파하고, 심지어 양민까지 학살한하고, 거기다 국민방위군 사건까지 겹치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그는 그 길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 여섯 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재작년 (1945) 해방이 되었다고 할 때

38년 전 여러 형제와 오십여 식구를 데리고 국경을 벗어져 나갈 때와

충칭에서 만리장공의 몸이 되었을 적에

많은 동지의 가족을 이토에 묻고 오는 마음은 처량하더라..

-민중일보에 실린 이시영의 소회




▶조상의 위패를 뒤로하고 총을 든 성리학자, #이상룡

경북 안동, 유서갚은 유림 가문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 그는 나라가 위태롭자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를 태우고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유학자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는 건, 자신은 유학자이기 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에 위태로운 나의 나라를 찾고자 함이다. 뼛속깊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문서를 태웠다는 것도, 조선을 망국으로 가게 한 구체제가 내 나라를 찾는데 하등 도움될 게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 나라를 찾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석주 이상룡


역사를 통해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나라는 결국 무너진다는 걸 잘 아는 이상룡은 다른 학문을 경시하고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유생들과는 달랐다. 무(武)를 천대한 유림과 달리 이상룡은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연노를 개량해 훗날을 대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p 285



일본에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처절히 느낀 이상룡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활용의 차이였다. 일본이 서구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여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았던 것에 비해 조선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과 관습만 고수하며 변화를 거부했기에 뒤쳐졌다고 분석했다. 지금껏 서구 문물에 반감을 가졌던 이상룡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십살 나이에 사고의 틀을 바꾼다는게 매우 힘든 일임에도 이상룡은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고 칸트, 홉스, 루소 등 서구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서구 문물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 응용할 부분을 찾았다. p 286



독립군 기지 건설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토지 및 가옥 등 부동산을 정리한 뒤, 노비문서를 불태워 가노들이 모두 자유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인근 유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는 1911년 1월 일가를 데리고 (간도)삼원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회영 일가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독립기지를 건설하는 데 애쓰고 있었지만, 참여할 독립운동가와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북쪽의 매서운 찬 바람을 뚫고 도착한 이상룡 일가 150명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상룡과 함께 삼원보로 망명한 김대락은 신흥강습소를 세우다가 1924년 순국했고, 김동삼은 청산리대첩의 주축이었던 서로군정서를 운영하다가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p 287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 확대, 개편했다. 신흥학교도 무관학교로 개편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는데, 1920년 8월에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p 289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고책임자인 국무령으로 취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일을 계기로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원할 새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선출된 상황이었다. 박은식은 문제가 많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체제를 바꾼 뒤,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추천했다. 유연한 사고로 모두를 포용해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이상룡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 291



역시나 TMI일지 모르지만, 석주 이상룡을 필두로 그의 부인 김우락,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며느리 허은 까지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의 집안은 모두가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면, 석주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꽤 많아졌으나,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상룡의 가족들 이름은 사람들에겐 생소하다면 생소하다는 것. 이회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이름이 덜 알려진 것 상황과 매우 비슷하달까.



그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도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9-08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이하라 2022-09-08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