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사 - 선사시대부터 21세기까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후루타 모토오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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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타공인 역덕(이면서 잡덕ㅋ)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집 책장에는 역사책이 수두룩빽빽이다. 책장에 꽂혀있는 수 많은 역사책을 국적별로(?) 나눠보면, 그 비율은 한국사80%, 세계사20%정도이다. 즉 한국사가 압도적이란 이야기. 그나마 있는 20% 세계사 역사책도 더 세세하게 나누면 일본사60%, 그외 세계역사40%이다. 아무래도 역사를 바라보는 내 취향의 반영되다보니, 이런 쏠림현상(?)이 생겨난듯 하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외 세계역사 40%쪽에 각종 서양사(거시/미시사)와 중국사가 있다. 이쯤되면 그래도 왠만한 세계사책은 다 있겠거니 싶지만, 아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책은 우리집에 단 한 권도 없다.  하다못해 남아시아에 속하는 인도(인도네시아 아님ㅋ) 관련 책도 있는데, #동남아시아 관련 책은 진짜 1도 없다. 정말 소오름! 나름대로 역사편식을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편식중. 허허허.




동남아시아는 오늘날의 국가로 말하자면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동티모르·브루나이·필리핀 11개 나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 가운데 동티모르를 제외한 10개국은 아세안 가맹국으로, 아세안은 동남아시아로서의 결속을 국제 정치무대에서 과시하고 있다. (생략) 동남아시아는 자연 지리상으로는 대륙부(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와 도서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동티모르·브루나이·필리핀)로 나뉜다. p 011~012



나에게 동남아시아는 그저 여름휴가 여행지 정도다. 물론 내가 여름휴가로 동남아를 가본적이 있는건 아니지만, 남들이 동남아로 놀러다니는 걸 많이 봤으니까. 심지어 요즘 심심치않게 동남아로 여행가는 방송들도 나오기 시작했고! 아, 아는거 또 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 당연히 알게되는 베트남전쟁! 그리고 작년에 발생한 미얀마 군사 쿠테타? 진짜 딱 요정도다.



우리 뿡뿡이는 나처럼 시작부터 역사편식하지않고, 폭 넓은 역사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남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게 바로 8월 역사책 신간인 #동남아시아사. 책을 받고보니 생각보다 두꺼워서 아주 쪼오금 거부감이 들었는데, 책을 펼치고보니 안심했다. 두꺼운 만큼 글자크기가 좀 컸기에 ㅋㅋㅋ 괜히 긴장했네!



동남아시아사에는 문외한이다보니, 목차부터 아주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큰 목차로는 총 10개로 나뉘고, 각 목차별로 또 소목차가 나뉘어있었다. 약간 논문스타일? 결국 목차보고 다시 긴장해버렸다^_T. 나름 역사에 대해선 일반인보다는 해박한 쪽인데, 동남아시아사. 이야. 심지어 책이 너무나 논문스타일이다보니, 살짝 거부감도 들었지만...................그렇다고 평생 모를수없으니까! 이때아니면 언제 동남아시아사를 공부하겠나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진짜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보다는,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읽었다.



▶동남아시아란?


종교적으로도 다양해서 오늘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민 대다수가 신앙하는 종교를 살펴보면,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가 남방 상좌부 불교, 베트남이 대승불교, 싱가포르가 대승불교·도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가 이슬람교, 필리핀·동티모르의 경우는 가톨릭교가 우세한 형편이다. 동남아시아 주민 대다수는 인종적으로 남방계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사람들이지만, 언어적으로는 좀더 다양한 편으로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필리핀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베트남어·캄보디아어를 포함하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버마어 등의 중국-티베트어족·태국어등의 타이·까다이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분포하고 있다. p 013~014


동남아시아는 히말라야로 이어지는 산맥이 뻗어있는 대륙부에 큰 강이 흐르고, 풍부한 평야지대를 기반으로 크고작은 국가들이 생기긴 했으나, 통일국가로 이어가진 못했다.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도서부는 세계 여러나라와 교역을 하며 여러 국가가 번성했지만, 이쪽도 통일국가로 이어가지 못했다. 쉽게말하면, 한반도라는 하나의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여러 국가가 생기긴 했지만, 후에 통일신라나 고려 또는 조선같은 통일국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청동기 문화와 초기국가


BC2000년기에는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 풍 응우엔 문화로 불리는 신석기 문화가, BC1500년 무렵에는 금속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BC5세기 무렵에 (중국)운남 지역에서 동고(청동 북)을 받아들여,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청동기 문화인 ‘동 선’문화가 성립되었다. p 017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메콩강 하류 유역에 1세기경 성립했고, 7세기 무렵까지 해양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번영했던 푸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중국의 사서에 수록된 푸난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푸난 사람들은 본래 나체로 살았고, 유엽이라는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생략) 현재의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있는 ‘옥 에오’는 푸난의 외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마 금화·힌두교 신상·한경·일출 및 트라이던트 은화 등의 출토품은 바다의 실크로드를 활용한 동서 교역과 동남아시아 역내 교역으로 푸난이 번영을 누렸던 정황을 말해준다. p 024~026



2세기 말에는 일남군으로 한나라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던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에서, 중국 자료에서 ‘임읍’으로 불렸던 국가가 자립하게 된다. 임읍은 영내의 산지에서 침향으로 대표되는 향료가 산출되었고, 남중국해와 타이만을 연결하는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 p 027


내가 세계사를 보는 관점은, 해당 년도에 따라 우리 역사에선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를 비교하며 보는 것이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지 않으면, 당최 머릿속에 남지를 않다보니. 세계사를 보면서 머릿속에 남기기위해 내가 고심한 방법이다.



동남아시아에 청동기문화가 들어왔을 시기는, 대충 우리 역사에선 고조선이 있었을 시기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BC 4세기로 추정되지만, 멸망시기는 비교적 확실하다. 한나라(전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다고 중국 사서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한나라가 당시 베트남 중부 지역에 있던 임읍(일남군)을 지배했던 것이다.



푸난이라는 국가는 중국식 발음이며, 크메르어로 프놈이라고도 불린다. 캄보디아 메콩강 하류 지역에 있었고, 임읍과 더불어 중국의 사서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던 국가다. 1세기에 건국되어 6세기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한반도에선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다. 고구려랑 백제가 7세기에 멸망했으니, 푸난도 꽤나 오래지속된 국가인듯 싶다. 다만, 학자들에 의하면 푸난의 경우 일종의 도시국가들의 연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푸난은 연맹국가치고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셈이다. 놀라울따름. 참고로 푸난과 건국시기가 비슷한 백제나 신라는 연맹국가인 마한과 진한에서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의 시작


7세기는 동남아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통일을 달성하고, 뒤 이은 당나라의 발전에 힘입어 거대한 중국시장이 출현하게 되었고, 동서교역이 활성화 되었다. 이것은 멀라까 해협의 이용을 촉진시켰고, 이 해협을 지남으로써 점으로 이어지던 항시국가가 아니라 해상교역로의 광대한 영역에 패권을 확립했던 스리비자야가 출현했다. 또한 이 시기에 인도에서 새로운 농법이 도입되어서, 캄보디아 평원·동북 태국·짜오프라야강 중유역·버마 평원에서의 국가형성이 진전을 보게 되었다. p 029




7세기에 기존의 육로교역에서 해로교역으로 루트가 바뀌면서 푸난이 쇠퇴하고, ‘스리비자야’가 번성했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리비자야’는 (인도네시아)자바섬에 기원을 둔 ‘사이렌드라’에 편입된다. ‘사이렌드라’ 는 지금도 유명한 (대승불교)보로부드르 사원을 건립한 왕국이다. 9세기 중반이 되면 ‘사이렌드라’도 ‘산쟈야’에 흡수된다.




크메르인에 세웠다는 첸라(진랍)는 6세기에 현재의 라오스 참빠삭 지방에서 시작했다. (생략) 681년부터 약 2세기 동안에 걸쳐서 해안부·메콩·델타를 중심으로 한 수첸라, 캄보디아 서북부·동북 태국을 중심으로 한 육첸라로 대립·분열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p 035



에야워디강 유역에는 1세기 부렵부터 10세기에 걸쳐서 쀼라고 불리던 집단의 세력이 번영했다. 쀼는 각 지역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성곽 도시 유적을 남겼고, 밭농사와 소규모 관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형성하고, 인도에서 불교와 힌두교를 수용했다. p  036



쨔오프라야강 유역과 오늘날의 동북 태국에는 6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엽에 걸쳐서 몬족이 ‘타와라와디’라는 국가를 형성했다. 타와라와디도 쀼와 마찬가지로 타원형의 성곽 도시 유적을 남기고 있고, 은화가 출토됨으로써 교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p 037



▶중세국가로 넘어가다


1000년 이상이나 중국의 지배가 이어졌던 것이므로 독립 당시 베트남에 있어 중국의 영향은 여전히 강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아서 10세기 베트남은 중국적인 중앙집권 국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생략) 그러한 베트남에게 중국적 국가 체제 도입의 길을 택하게끔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다. (생략) 그래서 1009년에 성립한 리 왕조는 큰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규정을 세움으로써 1225년까지 존속하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최초의 장기 왕조가 될 수 있었다. p 047


베트남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건 ‘베트남 전쟁’밖에 없지만, 그 와중에도 아주 살짝이나마 베트남, 그러니까 당시 안남국의 리 왕조에 대해선 알고있다. 왜냐? 베트남 리 왕조가 몰락할 때, 이용상 왕자가 탈출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고려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있던, 왕건이 세운 그 고려말이다. 리 왕조의 이용상 왕자는 고려에 귀의해서, ‘화산군’에 봉해졌고 그렇게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대 화산 이씨 종친들이 베트남에가면 왕족대우(?)를 받는다는 사실!



뭐 여튼, 리 왕조는 불교국가였지만, 토착신앙도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도 숭배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다이비엣(대월)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당나라에서 안남국왕에 책봉되어, 중국/한반도/일본과의 외교에선 안남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국호가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 뿐만 아니라 농업을 진흥하고 해양교역도 번성하여 국가로써의 국제적인 지위도 높았다.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쟈바에서는 사이렌드라가 중국 시장이 폐쇄됨으로 인해서 쇠퇴해버리자, 중부 쟈바의 분지국가인 고 마따람 왕국이 산쟈아 왕가의 통치하에서 다시 부활했다. 10세기 전반의 신독왕은 왕도를 브란따스강 유역의 동부 쟈바로 천도했다. 이 신독 왕으로부터 13세기 끄르따자야왕까지의 시대가 ‘끄다리왕조’라고 불리고 있다. (생략) 11세기에는 중국·유럽에서 말루꾸군도의 특산물인 정향 등 향신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했던 시대였다. 특히 남송이 성립했던 12세기 이후로는 중국인 상인들이 동서 교역에 참여하는 수가 늘어나서, 끄다리와의 직접적인 조공 무역, 민간 교역도 크게 발전했다. p 059~061



멀라까 해협 주변에서는 10세기 이후 중국 쪽 자료에서 언급하는 ‘삼불제’가 빈번히 중국에 조공하고 있었다. (생략) 삼불제의 지리적 범위는 말레이반도 중부 이남, 수마뜨라섬의 북단으로부터 멀라까 해협의 연해지역, 서부쟈바, 그리고 서보르네오 지역 등으로 서아시아·남아시아 및 쟈바와 중국 사이의 교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송대 중국에서는 동남아시아산의 침향과 서아시아산의 유향 등의 향료가 주요 수입품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삼불제를 경유해서 중국에 수입되었다. p 069


동남아시아의 고대국가가 중세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요인들은 아래와 같다.


1) (서양) 인도양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


2) (동양) 당나라 쇠퇴 후 송나라의 중국 통일, 중국의 도자기 무역 번성


→동남아시아는 무슬림 상인과 중국상인의 해상교역의 교차로가 되며 점차 발전하게 된다.




▶13~14세기 전환기를 거쳐, 15~17세기 교역의 시대로


동남아시아의 가장 유력한 수출품으로 떠올랐던 것이 후추였다. 후추의 원산지는 남인도였지만, 1405년 무렵에 북 수마뜨라에 묘목을 들여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이후 본래 동남아시아 원산이었던 정향·육두구에 더하여 이 지역은 후추에서도 중요한 원산지가 되었던 것이다. (생략) 이러한 ‘교역 시대’ 동서 무역은 바닷길이 주류였으며, 그것이 동남아시아에 있어 교역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몽골제국이 14세기 무렵에 이르러 몇 개의 나라로 쪼개지고, 그 여파로 아시아·유럽 사이의 육로를 통한 교통이 곤란해졌던 상황에 더해, 13~14세기에 나침판의 보급이 확대되고 장거리 항해의 확실성이 증가했던 사정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활성화된 교역 활동은 당시 신대륙·일본 양대 산지에서 공급되는 대량의 은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더욱더 촉진되었다. p 086~087


11세기~13세기, 유럽에서는 이 긴 기간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십자군전쟁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동방에 크나큰 관심을 갖게 된다. 13세기에는 칭기즈칸의 몽고(후에 원나라)가 대 제국을 이루면서 유럽땅까지 차지했다. 이로인해 본격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13~14세기 동남아시아 및 세계상황※


 1) 몽골제국의 침략과 이로 인한 태국계 여러 종족의 남하(기존 대승불교, 힌두교 문화에서 남방 상좌봐 불교 및 이슬람 문화로 변모)


 2) 유라시아 대륙에 대제국이 출현함으로써 동서 교역 및 해양 교역이 활성화됨


 3) 14세기 페스트 대유행 및 지구 한랭화(기근이 빈발)



15세기가 되면 일명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유럽 각국에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을 찾아다니는등 동-서양의 해양루트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서양에서는 없어서 못사는 조미료(후추 등)이 동남아에서 나왔기에, 동남아시아와 서양의 해양교류가 본격화된다. 




▶근세국가로 넘어가다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의 동남아시아사는 ‘교역 시대’의 번영이 종언을 고한 뒤로, 식민지 지배하에 놓이기까지의 틈새 시기로 종래에는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이 시대를, 근현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여러 요소가 형성되었던 시대, 즉 ‘근세’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정착하는 추세라 하겠다. 이러한 재평가의 계기가 되었던 사태의 변화는 20세기 말 이후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경제발전이었다. p 133



꼰바웅 치세에는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랑군이 버마 목재 수출과 인도 면직물 수입등으로 번영했고, 육로를 통한 대중국  무역 루트도 활황을 이루어, 버마 면화 수출과 중국 비단 수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국내 경제 활동의 ‘화폐화’가 진척되었고, 은과 합금이 상거래, 납세 등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꼰바웅 왕조 치세에는 중앙 정권에 의한 지방 통치의 실효화도 진행되어, ‘묘’라는 지방 행정단위가 새로 설치되었고, ‘드지’라는 해당 지역의 지배자가 다시 그 수장에 임명되어, 징세, 징병을 담당토록 했다. p 150



응우옌 왕조는 그때까지의 왕조들과는 국토의 크기가 전혀 다른 위대한 국가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804년에 청나라로부터 ‘월남’(베트남)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았지만, 한편으로는 1838년부터는 종래의 ‘다이비엣’을 대신하여 ‘다이남’이라는 국호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응우옌 왕조는 출발부터 다원성을 지녔던 국토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더 자국이 (인도차이나반도의) ‘중화’라는 점을 강하게 자기주장했던 것이다. p 155


근세국가로 명명되는 이 시기는 일종의 ‘낀 시기’여서 크나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요즘들어 재평가되는 시기라고 한다.



※18~19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세계상황※


1) 청나라의 번영과 그에 따른 아시아 내 교류의 발전(중국은 쌀, 설탕 등 식료품 및 은, 주석등의 광물자원, 면화등의 원료를 동남아시아에서 수입)


2) 대규모의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며, 자리를 잡음(차이나타운 형성)


3)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영국, 인도, 중국의 삼각무역 활성화 (면직물:영국→인도, 아편:인도→중국, 차:중국→영국)




▶ 19세기 식민지배와 2차대전,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독립


이 시기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나보니,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해서 따로 내용을 발췌하거나 요약 정리할 필요도 없는걸로!


서양열강이 동남아시아 뿐만아니라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배 한 것이나, 일제의 침략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과 민주화. 이는 한국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가 읽어도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거기다 극공감에 빡이 치는 상황(?)까지 온다고나할까. 고로 여기서부터는 공부하는 마음보다는, 가볍게 읽었다.



이래저래 동남아시아는 고대국가, 중세국가를 지나는 동안 강력한 통일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했고, 결국 전근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서구열강에 의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서구열강이 지나간 후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이어졌다.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역시나 조금 어려웠다. 특히나 동남아시아 곳곳에 있었던 각종 왕가, 종교 기타등등에 대한 부분들 말이다. 일단 왕가의 명칭이 익숙하지 않았고, 자주 나온 종교인 불교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불교가 아니었다. 하하하하. 더군다나 동남아시아에대한 지도가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서 그런가, 어느 강부터 어느 산까지 A국가, 그 옆에는 또 B국가 이런게 확 와 닿지않았다(한중일은 눈만감아도 지도가 그려지는데^_T;;). 또 우리나라와는 달리 국가 이름은 그대로 가되, 왕조만 바뀌는 행태라던가(우리로 말하면 왕조의 성씨가 바뀌는?)도 조금 어색했다. 그만큼 내가 동남아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이야기인듯하다. 하하하. 그래도... 나름대로 전반적인 세계사 흐름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T_T. 동남아는 예외였던걸로. 흑..



읽으면서 느낀사실은, 이 책은 만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서 형식의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전공자들의 초기 입문서or개론서 또는 동남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역사책 같았다. 거기다 저자가 일본인이다보니, 19세기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자국과 빗대어(또는 비교하여) 서술하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자국가 빗대어 서술하는 부분에선, 일본인 특유의 정신승리(?) 부분이 있기도 하는데 뭐, 그런건 귀엽게 넘어갈만하다.



확실한건 동남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도움이 될 책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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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 - 한 권으로 읽은 신라왕릉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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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블로그 이웃이신 김희태님의 신간이 나왔다. 책 주제는 무려 ‘신라왕릉’. 희태님 블로그에서 신라왕릉에 대한 답사 이야기를 봐왔고, 작년 이맘때 경주 신라왕릉 답사 당시 희태님의 신라왕릉 답사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고로 이 책의 완성도는 어마무시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심지어 신라왕릉 답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배웠던 당대의 역사와 학교에서는 잘 가르치지 않는 역사, 신라왕릉과 관련한 또 다른 역사 유적지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주제는 어디까지나 #신라왕릉 이지만, 책 자체로 보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명실상부한 신라 역사책이다. 우리 뿡뿡이가 책을 읽을 나이가 되면, 신라역사에 대한 첫번째 역사책은 이 책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으로 결정했다고나 할까?





학교 수학여행 이런 것을 제외하고, 내 스스로 경주 여행을 간 것은 두 번(2015년, 2021년)이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경주여행에서 나는 꽤 많은 신라왕릉 및 고분을 보고왔다. 워낙 역사를 좋아하고, 어디를 가든 역사유적지를 위주로 찾아다니는 나였기에(특히 무덤투어를 사랑함), 신라왕릉 및 고분군을 찾아다닌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2015년 당시에 보았던 신라왕릉과 2021년에 보았던 신라왕릉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확히는 신라왕릉을 바라보던 내 시선의 차이였다. 2015년에는 ‘아, 여기가 ○○왕릉이구나’ 였다면, 2021년에는 ‘여긴 전칭왕릉이군, 저긴 확실한 왕릉이군’ 이라는 점일까?



앞선 두 번의 신라왕릉 답사에서 내 시선의 차이가 달라진 이유는 아무래도 박종인 기자님 영향이 컸다. 박종인 기자님 덕분에 조선 후기 양반들의 무분별한 족보찾기 열풍으로 정확한 근거 없이 신라왕릉이 비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이 책의 저자이신 희태님의 신라왕릉 답사기를 보면서, 피장자가 확실한 신라왕릉 여부와 그 이유, 피장자가 불확실한 이유등에 대해 알게되었다. 



>>내가 보고 온 신라왕릉: 오릉(1대 혁거세-알영부인, 2대 남해, 3대 유리, 5대 파사), 탈해왕릉(4대), 지마왕릉(6대), 미추왕릉(13대), 선덕여왕릉(27대, 확실), 무열왕릉(29대, 확실), 문무대왕릉(30대, 확실), 신문왕릉(31대), 원성왕릉(38대, 확실), 정강왕릉(50대), 경순왕릉(56대, 확실/연천 소재)



>>내가 보고 온 신라고분/묘: 대릉원(천마총, 황남대총), 서악동고분군, 인왕동고분군, 김유신묘, 김인문묘, 김양묘, 노동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봉황대, 서봉총, 금관총)



와, 이렇게보니 나도 경주에서 꽤 많은 무덤투어를 했나보다(연천에 있는 경순왕릉 제외ㅋ). 피장자가 확실하거나 불확실한 것을 떠나서, 신라왕 56명의 왕릉중 14기를 보고 왔으니 오우!.....였는데 이제보니 25%밖에 못봤다(고분제외). 하하하하. 그래도 앞으로 경주를 세네번만 더 가면 신라왕릉 답사 올클 가능할 듯 하다



#신라왕계보

(박)혁거세거서간 → (박)남해차차웅 → (박)유리이사금 - (석)탈해이사금 - (박)파사이사금 - (박)지마이사금 - (박)일성이사금 - (박)아달라이사금 - (석)벌휴이사금 - (석)내해이사금 - (석)조분이사금 - (석)첨해이사금 - (김)미추이사금 - (석)유례이사금 - (석)기림이사금 - (석)흘해이사금 → (김)내물마립간 - 실성마립간 - 눌지마립간 - 자비마립간 - 소지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인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박)신덕왕 - (박)경명왕 - (박)경애왕 - (김)경순왕



#신라왕 호칭변화

※거서간: 진한 말로 임금 또는 존귀한 사람을 칭함. ‘간’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유목민족의 ‘칸’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음

※차차웅: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차웅은 무당을 부르는 신라의 방언이며,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함. 신라가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을 보여줌

※이사금: 이가 많이 난 사람 혹은 연장자

※마립간: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립은 ‘말뚝’ 즉 궐로서 함조를 뜻하며, 함조는 자리를 정한다는 뜻. 즉 왕궐의 주인인 왕을 말함.

※왕: 중국식 왕 호칭


신라왕은 조선이나, 고려 등의 한반도에 있던 다른 국가와는 좀 다른 면이 있다. 대표적인게 바로 성씨. 무려 세개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뭐, 세개의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을 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물왕때부터 경주 김씨가 신라왕위를 세습했다(초대왕은 박씨인데?!). 뿐만 아니라 신라는 왕을 지칭하는 호칭도 조금 달랐다. 지증왕이 중국식 왕호인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뭐, 거서간이나 마립간은 초원의 유목민족의 리더를 ‘칸’이라고 부르니 이해가 가는데(신라 출토유물은 유목민족 유물과 궤를 같이함), 차차웅과 이사금은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니 ‘아 그렇구나!’하는 것 뿐.



여튼 이렇게 신라왕에 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알고, 책을 읽어보자!



▶신라왕릉 이야기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왕릉은 총 37기로, 연천에 위치한 경순왕릉을 제외하면 36기가 경주에 있다. 이 가운데 비석의 이수와 비편 등의 금석문을 통해 무열왕릉, 흥덕왕릉은 무덤주인이 명확한 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문헌에 기록된 장지 기록과 신라왕릉의 발전과정등의 교차분석을 통해 확인된 선덕여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밖에 다른 왕릉들은 근거가 명확하지 않거나 전칭왕릉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유는 신라가 망한 뒤 관리의 부재 속에 사실상 방치되다가, 자연스럽게 실전되는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p 048



조선 후기에 접어들수록 신라왕릉의 비정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이근직은 ‘족보 문화의 성행과 종중으로 대표되는 동족집단의 등장이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능묘에 대한 무리한 비정으로 나타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당시에도 왕릉 비정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화계 유의건은 「나릉진안설」을 통해 ‘왕릉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문자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무지한 촌노인의 말에 의존했다’며 비판했다. 경주를 찾았던 김정희 역시 「신라진흥왕릉고」를 통해 ‘진흥왕릉은 선도산 고분군이 아닌 서악동 고분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p 049



오릉은 조선 초기만 해도 혁거세의 능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4명의 왕과 1명의 왕비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시기마다 오릉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공통된 장지 사릉원을 혁거세의 장지 사릉과 같은 장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과는 별개로 오릉이 누구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근직은 오릉을 적석목곽분으로 추정했다. 적석목곽분이 맞을 경우, 해당 시기의 무덤 양식인 목관묘와는 차이가 있기에 진위와 관련한 논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은 오릉의 무덤양식과 출토 유물 분석을 통해 보다 명확한 진위여부가 밝혀질 것으로 판단된다. p 074



탈해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17번지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지 기록에는 성의 북쪽 양정 언덕이라고 적혀있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의 꿈에 탈해이사금이 나타나 자신의 왕릉을 파내, 뼈로 소상을 만들 것을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소상을 토함산에 두라는 말에, 문무왕이 소천구에 있던 탈해왕릉을 파내어 뼈를 모아 만든 소상을 토함산 사당에 모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토함산에서 탈해의 사당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기에, 탈해왕릉은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고 보는것이 옳다. p 078



현재 전 황복사지 동편에 있는 폐고분지는 임시로 정비되어 있는데, 출토된 갑석과 지대석, 탱석과 면석, 미완성 석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폐고분지를 효성왕의 가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 비교를 통해 현 경덕왕릉보다 앞선 시기의 왕릉으로 보고 있고, 미완성 석재를 통해 최초 왕릉을 조성하던 중 어떠한 이유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효성왕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효성왕은 742년 5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시신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한 뒤 동해바다에 산골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p 176


역대 신라왕은 56명인데, 알려진 신라왕릉이 37기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으로 양반네들이 무분별하게 ○○왕릉이라고 지정했으니, 당연히 모든 왕릉을 다 지정했을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신기하군. 그나저나 조금 놀랐던 사실은, 몇몇 신라왕들은 죽은 뒤에 화장을 한 것이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화장을 한 왕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것이다. 거기다 왕릉을 조성하다가 중간에 중단된 폐고분지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경주여행을 하기 전, 나름대로 사전조사를 하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초면인 문화재가 이렇게 많으니 원. 이렇게도 경주에는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유적/사적지가 많다. 경주를 얼마나 많이가야, 대충이라도 다 보고 왔다고 할 수 있을까^_T.



다시금 이야기하는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 이는 후대에, 그러니까 바로 지금! 신라왕릉에 대한 인식에 대해 생각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경주 김씨, 석씨, 박씨 종친들이 땅을 겟챠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신라왕릉을 비정한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데 현재 탈해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의 묘제는 신라 후기 묘제인 석실분이다. 하지만 탈해왕이 재위하던 초기 신라의 묘제는 목관다. 묘제부터 이미 탈해왕릉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선인들이 탈해왕릉이라고 했으니, 지금까지 그게 쭉 이어져와서 지금까지도 그곳은 탈해왕릉이다. 거기다 탈해는 경주 석씨의 시조인지라, 시조를 중요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는 석씨 시조 탈해를 기리는 사당 숭신전까지 건립했다.



분명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의 묘제가, 현재 명명된 ○○왕이 살던 시기의 묘제와는 확연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문헌에 기록된 기록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선후기 족보찾기 열풍의 영향은 아주 무서울따름이다. 역시 뿌리를 중요시하는 (어긋나버린)유교국가 답달까.




 



▶신라왕릉에서 만나는 신라사

실크로드를 따라 여러 이국적인 유물이 신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황금보검 이외에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이 주목된다. 재미있는 것은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지역에서 출토된 유리잔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리잔이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리잔이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원성왕릉의 호인상처럼 서역인을 닮은 토용과 터번을 쓴 형태의 토우가 발견되는 등, 이국적인 유물을 통해 실크로드로 세계와 교류했던 신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p 188~189



839년, 왕위에 오른 그 해에 신무왕은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삼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그 뜻을 접어야 했다. 이후 신라 조정과 장보고 간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으로 보이는데, 846년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그 증거이다. (중략) 청해진이 있었던 장도에는 토성의 흔적과 건물지, 당시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책의 흔적이 잘 남아있다. p 200



『삼국유사』에는 더 상세한 기록이 확인되는데, 헌강왕이 순행했던 장소가 개운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으로 놀러 왔던 헌강왕이 갑작스럽게 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한다. 이 현상이 동해용의 조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헌강왕은 용을 위해 절을 지을 것을 명했는데, 이 절이 바로 망해사다. 그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고 하여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이 때 사찰을 지어준 헌강왕을 위해 동해의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는데, 그 아들 중 하나가 바로 처용이다. p 312


이 책을 읽기 전, 제목만 봤을 때는, 신라 역사도 있겠지만 말그대로 신라왕릉 답사기가 주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왠걸? 책을 읽고보니 이 책은 신라왕릉으로 신라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었다. 내물왕릉 편에는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와 박제상과 관련된 사적지가, 법흥왕릉편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이차돈 무덤 추정지와 사당터 등이, 진흥왕릉편에는 백제와의 전투 및 가야정복, 가야금으로 유명한 우륵의 귀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성왕릉의 호인상에 주목하며, 경주 도로공사 중 발견된 황금보검과 함께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바다건너 국가와도 교역을 했던 글로벌 국가였다던지, 신무왕과 문성왕 때 해상왕 장보고가 어떻게 신라 조정에 들어가게 되고, 어떻게 죽었는지라던가 말이다. 



진심 이 책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라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하지만 역덕들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았거나, 혹은 다큐로 보았던 신라의 숨겨진 이야기도 다룬다.




 



▶신라의 숨겨진 이야기

신라는 진한에서 시작되었다. 한원에 인용된 『괄지지』에 따르면 신라는 금성(서라벌)을 도읍으로 하는데, 본래 삼한의 옛 땅이라고 했다. 당시 경주에는 사로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의 유민들이 육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중략) 『삼국유사』에는 신모가 혁거세의 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김부식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우신관에 있던 신모의 상을 봤다고 한다. 당시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신모는 중국 황제의 딸로 진한으로 건너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해동의 시조는 혁거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p 053~054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성모사가 서악의 선도산에 있다고 했다. 성모는 혁거세의 어머니로 사소 혹은 신모등으로 불렸다. 현 선도산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옆에 자리한 성모사는 사소의 사당으로, 뒤쪽 바위에는 성모구기 각자가 새겨져있다. 이 밖에 성모사에서 350m 떨어진 봉우리에 성모유허지가 있는데, 관련 장소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p 063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웅진방령 예식의 배반과 함께 붙잡혀 항복했고, 8월 2일에는 나당군사동맹의 승전 주연에서 술을 따르는 모욕을 감내해야했다.(중략) 한편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무열왕은 661년 6월에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태자인 법민이 왕위에 오르게된다. 이가 바로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무열왕에게 태종의 묘호를 올렸다. p 142



문무왕릉비는 신라 김씨의 기원을 투후에서 찾고 있어 주목된다. 투후를 언급한 금석문은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에서도 확인되는데, 비문에서 언급된 투후는 흉노족 출신의 김일제를 뜻한다. 또한 비문에는 태조 성한왕이 등장하는데, 투후와 성한왕 사이에는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이 새겨져 있다. 유득공은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을 세차를 서술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 경우 투후로부터 7대를 전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에 비문의 문맥을 고려하면 신라 김씨의 기원은 투후가 기준점이 된다. 그랬기에 앞선 김정희의 『해동비고』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에서 신라 김씨가 김일제에서 시작한 것인지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중략) 금석문의 기록처럼 신라 김씨가 실제 흉노족의 후예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도 가능하다. 예컨데 강인욱은 ‘신라 김씨가 흉노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언급한 것은 지배 구조의 확립에 따른 관점에서 시조를 윤색한 측면’이라고 강조한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출자한 지배 구조가 있는 반면, 신라 김씨의 경우 지배 구조가 확립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의미의 선민의식을 확립하기 위한것으로 보고 있다. p 157~158



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 육촌장 그 중에서도 최소벌도리공 손에 길러졌다고 배웠다(그리고 지금도 학교에선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듯). 이렇게 배운게 당연한거였기에,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물론 설화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같은 느낌이었달까? 뭐 그렇게 나는 컸고, 이 책 저 책을 읽어보던 어느날  한국의 여신들에 대한 책을 읽다가, 신라의 여신인 성도산성모의 설화를 읽게 되었다. 어라, 이게 왠걸? 성도산성모가 박혁거세의 어머니란다. 비슷한 설화로 가야의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정견모주 설화도 있다. 



뭐 여튼 이런 이야기는 조금 마이너한 부분이다보니 학교에서는 당연히 가르쳐주지 않고, 일반적인 역사 교양서에도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평생 알지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까지도 이 책에 담겨있다. 뿐만인가? 과거 KBS에서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시작으로 한창 역사다큐를 방영해주었을때 나왔던, 역시나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이야기들도 이 책에 담겨있었다.


(과거 KBS 역사다큐 시리즈: 유인촌 역사스페셜 - 고두심 역사스페셜 - 한국사전 - 역사추적 - 한상권 역사스페셜)



난 유인촌 역사스페셜부터 한상권 아나운서의 역사스페셜까지, KBS 역사다큐 시리즈는 쭉 시청했던 사람이다(영상파일도 전부 보관중♡). 당시 몇몇 방송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예컨데 의자왕이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당나라로 끌려갔다던가, 문무왕릉비에 흉노족을 시조로 서술했다던가, 대마도로 끌려갔던 조선의 공주가 있던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내용들은 당연히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으니, 궁금해도 더 알수가 없는 노릇이었었다. 다 크고 나서야 다른 역사책들을 보면서 ‘아! 이런 내용이 더 있구나!’ 하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달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그런 부분들까지도 전부 언급하고 있다. 어째서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까지 말이다. 이 책을 한 15년만 빨리 읽었어도................내가 여러 책들을 전전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너낌적인 너낌. 허허허허.허허허.




 


 



정말 장점 수두룩한 이 책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바로 주석이다. 희태님은 머릿말에서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다루고자 했고, 부정확한 오류를 담지 않기 위해 각종 문화재와 문헌자료, 연구자들의 학술자료들을 참고했다고 했다. 그 흔적들이 바로 저 주석들이다. 난 책을 읽을 때 주석이 달려있으면, 하나하나 다 읽어보는 편인데, 와. 희태님이 이 책을 쓰면서 얼마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 한권 들고, 경주 답사를 다시가야겠네?! 아.. 근데 뿡뿡이가 어느정도 클때까진 힘든가...........하 ㅠㅠ 뿡뿡아 빨리 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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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이 필요할까 - 장재인 시선 집
장재인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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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이자 싱어송 라이터 장재인. 그녀의 이름은 들어봤으나, 그녀의 노래는 나에겐 좀 생소하다. 아니 애초에 노래를 안듣고 산지가 너무 오랜세월인지라. 진짜 어쩌다 드라마 한번 꽂히면, 드라마 OST 정도나 들을 뿐, 그 외의 노래들은 나에겐 매우 어려운 분야다. 그래도..... 내가 읽은 에세이의 저자인만큼, 노래 한곡 정도는 들어본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필모를 열씸히 검색 검색 또 검색. 그러다 아는 노래 한 곡을 발견했다. 내가 정말 애정하는 드라마 『킬미힐미』의 OST ‘환청’. 이 드라마를 보면서, OST가 드라마와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에 엄지척!을 했었는데,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들어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 책에 깔려있던 그녀의 오랜 사유와 아픔이 저 노래 한곡에 담겨있는건 아닐런지, 하고 말이다.




나쁜 와중에도 찾아보면 하나쯤 좋은 게 있다며. 나에게 시작이 되어준 그 기회의 빛은 어디서 온 걸까. 그건 이 잠들기 중의 하루 훔쳐보기에 있었다. 하루를 훑다 보면 내가 좋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내 생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해주는 촉매제들이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것들을 마주한 일. 그것이 시너지가 되어 내 눈을 뜨게 해줬다. 하루하루를 훑어보며 나 역시 그들처럼 좋아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많은 나의 하루들, 그 안을 이뤄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 역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p 031



시간이 꽤 흐른 요즘에 이십 대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그 날의 나에겐 매일 운동한 만큼 보기 좋은 건강함이 있었다. 이제는 보이건만, 왜 이전에는 온갖 부정적인 말이 앞선 모자란 ‘나’였을까? 왜 그런 ‘나’로 두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던 걸까? 그런 못난 형용사들은 단어 모양 그대로(이 단어들은 생긴 모양부터가 모나지 않았나!) 인간관계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아주 오래 나를 아픔 속에 내버려 두었다. p 038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십대란 상처와 아픔만 떠오르는 시간이다. 물론 그 상처와 아픔의 깊이는 각자 다르겠지만 말이다. 저자에게도 이십대는 상처와 아픔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상처와 아픔뿐인 이십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른인 지금과는 또 다른 긍정적인 ‘내’가 있었다. 그저 이십대였던 내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서른이 된 수 많은 사람들이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당장 나역시도 그러하니 말이다. 이십대를 살았던 과거의 ‘나’는 매일이 힘들었고, 왜 나는 또래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사에 치여 사는건지, 이놈의 회사는 왜이렇게 꼰대조직문화가 심한건지 매일매일을 힘들어했다. 헌데 서른이 넘어간 지금의 내가, 이십대의 나를 돌아보니 내가 생각한것 만큼 그렇게 힘든 삶도 아니었던거다. 오히려 취업이 잘 안되는 시기에 운 좋게, 어린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그저 또래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저 남들보다 어린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일종의 직장생활 첫경험으로 힘들었을 뿐이지, 오히려 취업이 된 것을 감사해야했던 부분이었다. 뿐만인가? 어느 조직이든 꼰대문화는 살아있다. 내가 그걸 몰랐을 뿐이다. 심지어 힘들어하는 내 옆에는 언제나 항상 내 편인 (구)남친(현 신랑)이 나에게 응원과 용기를 복돋아주었다. 그저 보는 시각만 조금 달리했으면 되었던것 뿐인데, 이십대였던 나는 어린 맘에 그러지 못했던 것 뿐이다.



그래도 이십대 후반에 진입하면서 조금은 달라졌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 보는 ‘시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힘들게 하던 모든 일들이 꽤나 하찮게 보였다. 이런 하찮은 일로 왜 전전긍긍하며 살았는지. 덕분에 나의 삼십대는 이십대였던 나와는 달리 여유가 생겼다. 





 


엄마와 나는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잘못한 이로 만들고, 나쁜 아이로 만드는 엄마의 화법에 고등학교 1학년이 됐을 무렵엔 엄마를 향한 모든 기대와 애정을 놔버렸었다.(‘어머니’라고 부르며 완벽하게 감정을 절단시킨 채, 마치 타인인것처럼 예를 갖춰 대했다. 그 어떤 마음과 기대도 없는 채로.) 나는 정말로 스물 세 살 이전까지 단 한번도 화를 내본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엄마의 화법에서 부당한 것에 대해 나의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다. p 058



엄마는 미래에 다가올 우리를 향한 편견(그 시절엔 더욱 심했던)과 한부모 가정이란 타이틀을 자식들에게 주고 싶지 않아 아픔 속 인내를 택했다. 우리는 괜찮았는데. 지금도 말이지. 그런 타이틀은 하나도 두렵지 않아.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둘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둘이어야 올바르게 자라고, 감정이 잘 채워진다 생각하지 않는다. p 097



내가 뭘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정말 그것만을 알기 위해 하루를 보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고 자꾸만 돌아가려는 관성도 심리 상담이나 치료를 통해 완화되는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방금 감은 머리를 역시나 말리지 않은 채 타자를 두드리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보단 내가 뭘 싫어하는지 아는 게 더 명확하지 않을까?’ p 112



아무래도 예비맘이 된 이후로 육아와 관련된 매체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은 문제행동이 많은 아이들의 원인은 부모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장과정이 달라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물론 아이들의 기질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제일 중요한건 부모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부모는 그닥 좋은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런 부모밑에서 잘 커준 저자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아야 할 정도랄까? 내 아이가 고학년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받았는데, 내 엄마가 내편이 아닌 ‘니가 잘못한거 아니야?’라고 말했다면 나 역시도 저자처럼 부모의 애정을 포기했을 것이다. 오히려 저자처럼 성장하기보다는, 엇나갔을지도. 물론 저자의 엄마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는 점은 참작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 아이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것은............ 저자의 결핍은 아마 여기서 시작된게 아닐까?



어린날의 슬픔과 아픔, 결핍은 성인이 되어서도, 한 사람을 잠식하고 힘들게 하는데, 그 시작이 부모라는 점은 더더욱 본인을 옭아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된 저자는 부모를 사랑한다.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선, 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반드시 치유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 그래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치유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이겨냈다는 사실이 정말 존경스럽고 멋지다. 



그래도 저자는....한번 오은영 박사님과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T_T;




 


당시 스물셋, 만 스물하나의 나는 산부인과를 가본 적이 없었다. 굳이 가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도 했고 분명 나도 꺼리는 마음이 있었을 거다. 나는 산부인과 검사를 하기로 마음 먹고 병원에서 검사를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내가 임신 중단을 했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짧고 간단하고 누구나 하는 기본 검사가 왜 그런 형태로 발전한거지?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소문이 이런 식으로 나는 거구나 하고. p 218



여성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병원이 있으니, 바로 산부인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여성들이 산부인과를 들어가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의 경우는 대중에게 노출된 가수였기에, 그 시선이 아주 황당한 루머로 이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산부인과 가는 것을 너무나 꺼려했다. 생리통이 그렇게 심하고, 심지어 기절까지 했던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산부인과라는 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의문점이 생겼다. ‘산부인과는 여성이 태어나면서 죽을때까지, 일생을 찾아야하는 병원인데 왜 어린 여성이, 미혼여성이 가면 안되는 듯한 시선으로 보는걸까?’ 하고 말이다. 물론 난 그 이후부터는 문제만 생기면 산부인과에 들락날락 하곤했다. 내가 아프다는데 뭐 어쩔꺼야?



오히려 어린 여자아이가, 미혼 여성이 산부인과를 가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그런 시선을 만든 이 사회가 비정상일뿐이다. 



저런 비정상적인 시선들은 사회 곳곳에 깔려있다. 이 나라 사람들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건지, 아니면 쓰잘데없는 오지랖이 넓은건지.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그런 관심과 오지랖이 들이 한데모여, 부정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나아진 편이라고는 하지만, 도찐개찐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을 다 읽고보니 저자가 어떤 삶을 걸어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앞으로 ‘환청’이라는 노래를 듣게되면, 그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OST가 아니라, 가수 장재인의 노래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아마 장재인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 노래를 저렇게까지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다만, 앞으로 장재인의 음악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잠긴게 아니라, 조금씩이나마 흩어져, 그녀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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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우리는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아방(신혜원)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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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의 임산부가 되고 보니, 가만히 있어도 숨쉬기조차 힘들어서 이제 독서는 언감생심이다T_T. 그럼에도 1주일에 한 권은 읽어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저 노력일 뿐. 하. 앉아있는것도 힘들고, 누워있는 것도 힘들다보니 이런 에세이조차도 읽는데 오랜시간이 걸렸다는게 함정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꿋꿋하게 다 읽었다는 나에게 박수를!!




오늘 리뷰를 올리는 이 에세이 『꼭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는 표지 삽화부터 톡톡튀는 것이, 꼭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저자 필명이 ‘아방’인데. 혹시 아방가르드의 그 아방일까? 뭔가 책 곳곳에 실려있는 톡톡튀는 삽화들도 그렇고 말이다. 이런게 바로 아방가드르하다는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인가! 물론 난 아방가르드의 정확한 정의는 모르지만, 하하하.하하하ㅏ...하하.



확실한건, 저자는 청춘을 그림에 바친, 10여년 째 그림을 그리고, 그림 수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명화(?) 라던가, 그런쪽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흔하디 흔한 일러스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뭐랄까, 독창적인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물론....난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상권이 말을 들으니 알 것 같다. 왜 스친 미술학원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그럴 거면 안 가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건지. 하고 싶은 대로 못 해서였다.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건데 이래라저래라 잔말이 많았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못 그려도 즐겁게 그리던 마음이 꼬맹이 시절 동네 미술학원과 학교를 거치면서 쪼그라들었다. 노란색 돌멩이를 보고 멋지다고 말해주는 이는 왜 없었을까? 태어났을 때는 모두가 예술가라 했것만 이런 확경 덕에 예술성을 더 발휘하지 못하고 무난하게 자란 것이다. p 024



누군가 전화로 “수업은 작업실 같은 데서 하나요?”라고 물으면 “홍대 술집이요”라고 말할 때 너무 재밌었다. “술집이요?” 하고 한 번 더 되물으면 자신 있게 “네, 술집이요!” 하고 다시 대답할 때 나는 굉장히 도도하고 자신감 넘쳤다. 가끔 대관이 어려울 때는 멤버 아버지 회사에 딸린 직원 휴게 공간, 멤버가 다니던 피자 회사의 가맹점, 멤버 집에서 경영하던 디자인 카페에서 수업을 한 적도 있다. 덕분에 아주 다양한 곳에서 수업을 진행해보았고 장소마다의 장단점과 특징을 살려 멤버들과 소통하는 경험도 늘었다. p 058



확실히 이 에세이에 실려있는 저자의 그림들을 보면 ‘다르다!’ 라는 느낌이 든다. 기존에 보던 일러스트와는 다른 느낌이랄까? 



간혹 인★ 돋보기를 보다보면 수많은 일러스트와 일상툰들이 많이 뜨는데, 분명 그리는 사람이 다르므로, 일러스트도 다른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적이 많았다. 다들 같은 학원(?)에서 배웠던건가 싶은 생각도 들기도 했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거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다 똑같은건지(?) 그림을 그리는 저자의 눈에도 다 똑같아보였나보다. 



생각해보면, 어렸을적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도 획일적인 미술수업을 했었다. 선생님이 보여준, 혹은 당신이 그린 풍경화를 보며 따라 그리라고 한다. 그 풍경화를 보며 그린 내 그림과 당시 학원에 있던 다른 애들이 그린 풍경화는, 분명 서로 다른 사람이 그린 다른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같은 느낌이 들었더랬다. 같은 풍경화를 보며 그려서 그런건지, 아니면 당시 미술수업을 하던 선생님의 지도방식이 획일적이었던건지. 어릴때부터 나름 오래다니던 미술학원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학원을 다니면서 그림 그리기에 대한 내 마음은 점점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그림그리기에서 멀어지며, 그렇게 오래다니던 미술학원을 때려쳤고, 반대로 내 마음가는대로 할 수 있는 공예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각종 공예를 섭렵한건 더 나중의 일.



반면에 획일적인 미술수업(?)을 거부하던 저자는 그림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 철학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오롯이 자신만의 그림, 누군가의 그림과 비교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갈 수 있도록 오픈형(?) 미술수업까지 시작! 만약 내가 저자에게 미술수업을 받았다면, 그림그리기라는 취미를 그렇게 단칼에 버리지는 않았을텐데^_T...



모든 그림은 장점이 있다. 못 그리는 게 아니고 장점을 발견하지 못한 거다. 자기 그림의 장점을. 하도 사람들 그림을 많이 봐서 그런지 남의 그림의 무수한 장점과 특징은 잘도 알아낸다. 문제는 내 그림의 장점을 찾는게 어렵다. 아니 왠만큼 뭔지 알고는 있으나 수시로 잊어버린다. 다 그런가 보다. 내 건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p 073



근래 내가 들은 수백 마디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해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다. 최근에 만난 친구들은 사진작가, 대기업 디자이너, 도시공학 박사, 영상 디자이너, 출판사 직원의 신분으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30대다. 요즘 우리의 대화는 “뭐 먹고 살지?”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뭐 먹고 살지?”를 거쳐 “그래서 뭐 먹고 살지?”로 똑같이 끝난다. 뭐 하면서 먹고 살지? p 106



- 다음은 2020년 2월의 메모.


걸핏하면 길을 잃는다.


아니면 길을 자주 찾기 때문에 그만큼 자주 잃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갈래의 길을 가졌나.


아니면 이 길에 대한 확신이 두텁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사실 길이 아니고 왜 가야하는지 이유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애초에 길이 없었던 걸까. p 107



내 그림의 장점 찾기. 다시말하면 ‘나의’ 장점 찾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특히나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요즘 2030 청춘들은 더더욱. 계속 포기하는 일이 늘어나다보니, 장점은 커녕 자기의 단점만 더 크게 보이고, 단점만 보다보니 자존감이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 슬프지만 이게바로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현실에 계속 빠져있다보면, 삶은 더더욱 우울해지고 피폐해지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기에 더더욱 나만의 장점을 찾아야한다.



매일 나의 장점을 한가지씩 적어보거나, 매일 내가 잘한 행동을 하나씩 칭찬하거나, 뭐 이런식으로. 그렇게 매일을 반복하다보면 적어도 힘든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 스스로를 인정하다보면, 그토록 찾아해메던 길이 내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한 가지를 착실하게 해온 이유는 그만두고 다른 걸 할 용기가 없다는 것 외에 하나 더 있었다. 열정이 남아있어서다. 그림에 10년간 정성을 쏟고 기꺼이 소중한 것을 내어주며, 무언가를 아끼지 않았던 건 열정 때문이었다. 열정이란게 있기 때문에 시간과 돈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열정은 청춘을 대표하는,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빨간색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하는 작은 불씨, 최소한의 연료랄까? p 143



한 가지를 10년간 해왔다는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다. 나는 한 회사를 무려 12년간을 다녔다. 아니, 아직도 다니는 중이다. 내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니었고, 이렇게 오래할 생각도 없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을 근무할 수 있었던건 무엇이었을까. 아마 나 역시도 이 일을 너무 오래해서 다른 걸 할 용기가 안났던게 첫번째고, 나름의 대기업이라 남들보다도 더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다는게 두번째일 것이다. 일에대한 열정은 없었지만, 그 일에 대한 보상으로 들어오는 월급을 모으는 열정이 있었고, 빠르게 돈을 모아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열정 때문이다.



조금 슬픈 사실은..... 이렇게 12년간 착실히 회사생활을 하다보니 내 20대는 회사생활을 제외하면 남는게 없다는 것. 또래들이 놀러다닐 때 조차도 나는 회사에 있었으니까! 물론 그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또래보다도 빠르게 집도, 차도, 결혼도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30대가 된 지금은 아이를 잘 키워야한다는 새로운 열정의 씨앗이 움텄기 때문에, 아마 난...... 이 회사를 또 10여년은 계속 다닐 것 만같은 불안한 예감이 드는건 왜일까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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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쓰는 날들 - 어느 에세이스트의 기록: 애정, 글, 시간, 힘을 쓰다
유수진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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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은 에세이들은 대부분 여행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여행에세이에 질려가는 와중에, 간만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에세이를 읽었다. 얼마전에 출간된 에세이 『나답게 쓰는 날들』 이다. 저자 스스로도 본인을 ‘에세이스트’라 칭하는, 이 책에 실려있는 글들은 그야말로 ‘에세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글이었다. 





살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이 저자에겐 글을 쓰는데 있어서 특별한 주제나 다름 없었다. 나역시도 문득, 내 일상을 글로 써내려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진 않았지만, 나 따위가 무슨 글을 쓰겠냐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접었더랬다. 헌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굳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나를 위해 나만의 글을 쓰는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한 편씩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의 ‘이미지’라는 건, 사실 연예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자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조금 더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과 덜 두드러졌으면 하는 모습이 있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이 이미지라는 게 주로 우리 스스로에 의해 씌워진다는 것이다. p 036



사람마다 가질 수 있는 캐릭터가 여러 개임을 인정하면, 우리의 일상은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강한 사람을 지향하지만, 원래 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약하디 약한 사람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p 038



가끔 주변에서 ‘너 답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들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나 다운게 대체 뭐지?’ 나는 3n년을 살면서도 지금까지 나 다운게 무엇인지,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정의를 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도 나를 모르는데, 왜 주변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를 보고 ‘나 답지 않다’고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생판 남인 그들은 나를 그렇게 잘 안단말인가? 하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나를 잘 모른다. 그저 그들은 나를 보면서, 본인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에 나를 끼워맞추고 있을 뿐이다. 본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람에겐 단 한가지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로봇이 아닌이상에야, 이런 모습도 있는가 하면, 저런 모습도 있다. 하지만 꼭 사람들은 어떠한 성향에 자신을, 또는 타인을 맞추려고 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해 mbti같은 각종 성향테스트가 유행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성향테스트가 정말 정확했다면, 우리가 인간관계를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저 한 사람에 대해, 본인이 정한 틀에 맞추지 말고, 이 사람에겐 이런 면모가 있구나, 저 사람에겐 저런 면모가 있구나- 하고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정도까지만 해도 세상사는데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최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어휘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가 비단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주로 짧게 편집된 영상들을 자주 보다 보니, 계속 해서 짧은 콘텐츠만 소비하고 있음을 느낀다. 문해력은 단순히 긴 글을 잘 읽고 못 읽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하는 역량과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역량 등 무수히 많은 문제를 포함한다. 문해력은 곧 나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다. 나는 그래서 청소년들이 꼭 글을 쓰면 좋겠다. p 090



내가 이 에세이를 읽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이 있었다. 조만간 리뷰 예정인, EBS에서 출간한 『당신의 문해력』 이란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며, 요즘 학생들이, 아니 학생을 포함하여 2030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지. 젊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뭐, 잘 생각해보면 내 블로그에도 간혹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니 문해력이 없는 사람들의 덧글이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 포스팅에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내용을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는 댓글을 다는 핑프들이 종종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 핑프들은 긴 글은 읽기 싫으니, 덧글로 한줄 요약해달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블로그 포스팅 글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그것조차 읽기 싫어하는 것을 보면 참- 심지어 이런 핑프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요즘 세대들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해력에 대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추후 관련 포스팅을 할 예정이므로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취업 준비생 시절에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로 찾은 게 독서였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책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고, 직장인이 된 후로 돈이 드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독서를 멈출 수 없었다. 독서의 진짜 매력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 126



취미는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무엇인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푹 빠질 수 있다는 건, 작가 사사기 쓰네오의 말처럼 ‘어떠한 일의 무게를 알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취미를 갖는다는 건, 점점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p 128



저자의 말처럼 ‘독서’는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이다. 더 나아가서, 독서는 위에서 언급한 ‘문해력’을 기르는데 최적의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고, 또다시 문해력 이야기!..........는 여기서 패스하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취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서 ‘ㅇㅇ키트’ 같이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경우가 월등히 많아졌다. 뭐, 그런 키트조차도 스스로 구입한거니, 직접 찾아낸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보통 저렇게 손쉽게 취미생활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고싶다는 이유로 여러 장르의 취미생활을 구입하곤 한다. 그게 과연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취미생활’이라는 정의가 바뀌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까. 



나도 분명 나이대로 보면 요즘 젊은세대라 할 수 있는데, 참 이상하게도...... 내가 아닌 또래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코로나가 하루빨리 끝나 다시 가까워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우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전에 우려되는 것들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굳이 남의 몸을 세게 밀치며 접촉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몸이 밀려나 분해도 ‘사람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에요?’ 라고 한다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몸을 밀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저 사람의 몸과 닿지 않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전에도 부딪히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p 137



난 개인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꽤 반겼던 사람이다. 워낙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다보니, 더더욱 그랬다. 실제로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정말 필요 이상으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본인이 가까워지고 싶다면, 가까워지고픈 그 사람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하거나, 양해를 구해야하는데 그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그들이 굳이 가까워지려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다. ‘그러고 싶으니까’. 이런 모습들을 보면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이들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라진 지금, 저런 몰상식한 어른들이 다시 나올까 두렵다. 



요즘 아이들이 읽는 책 중에는 사람간의 적당한 거리(경계선)에 대한 동화책도 많다고 한다. 이런 경계선 동화책은 아이들이 아니라, 머리만 커버린 요즘 어른들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서른이 넘어가고 사회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알고 지낸 사람들이 꽤 많이 쌓였다. 그러면서 때로는 내가 가진 명함이나 전화번호의 수가 열심히 살았다는 징표 같기도 했다. 그러다 언젠가 친구 목록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이 가득찼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41



이 구절을 읽고, 내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살펴보았다. 우와, 사람 참 많다. 근데 태반이 회사 또는 거래처 사람이다. 정말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지만, 회사생활을 하는 한 지울수 없기 때문에 계속 가지고 가는 친구목록인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좁은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친구라고 칭하는 사람도 진짜 소수의 인원밖에 없다. 이름만 아는 사람은 친구라 생각하지 않기에, 주기적으로 연락처에서 지우곤 한다. 가족에 대해서도 예외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난 내 엄마아빠에게도 그런데, 다른 친척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심지어 누군가가 내 연락처를 남에게 함부로 알려주는게 싫다.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즉,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량은 정말 좁다. 많이 쳐줘봐야 서른명 내외? 



1n년간  회사생활을 해왔지만, 퇴사를 한다면 1순위로 해야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서른명 내외의 사람들에게만 내 번호를 알려주는 것! 다만 언제쯤 이뤄질지는....잘........^_T.....



내가 항상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것은 취업 준비생 시절부터였다. 1일 1이력서를 제출해야 내일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잠들 수 있기 때문에 1일 1이력서는 내 나름의 규칙이었다. 채용공고를 찾지 못한 날이면 심한  우울감을 느꼈고,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 게으름이라는 벌레에 물릴까 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 덕분에, 결국 취직도 하고 많은 프로젝트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조차 내려놓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필요하다. p 207



항상 움직여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저자랑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저 학교 졸업후 운 좋게 나름 대기업인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여 쉼없이 1n년간 달려오면서, 그 1n년간 학습된 강박관념이었다. 남들은 청춘이라는 20대 초반부터 난 이 회사에 얽매였고,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얽매여있다. 물론 이 사실이 싫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 또래보다 내집마련도 월등히 빨랐고, 내가 원하는 삶을 더 빠르게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지금까지 계속 쉼없이 달려오다보니,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잊었다. 뭐.. 잊은건지, 처음부터 몰랐던 건지는 알수 없지만.



회사에서 휴직을 한 후, 난생 처음으로 길고 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휴직 전까지만해도 빨리 휴직 당일이 되길 바랐것만, 막상 쉬기 시작하니- 집에서 난 무엇을 해야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내 생체리듬은 오랜기간 회사생활로 인해 새벽같이 눈을 뜨는데, 그때부터 잠잘때까지 난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약간의 우울감(?)까지 왔고, 그렇게 한달을 버티고 나서야, 그때서야 온전히 ‘쉼’과 ‘여유’를 받아들였다. 



굳이 아무것도 안해도, 내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저 가만히 있고, 주위 환경을 둘러보고, 창 밖 하늘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한달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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