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골목길 역사산책
최석호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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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태교를 위해서 책을 읽을때 소리내어서 읽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눈으로 읽는 것 보다,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리내어 읽기 시작한 건, 일종의 태교의 일환이다보니 멈출 수도 없다. 다른 산모들은 뱃속의 아이에게 말도 잘 건네는데, 나는 아직 낯간지럽다고요T_T 우리  신랑조차도 맨날맨날 아가에게 인사하는데, 하 ㅋㅋㅋ 이러다간 내 새꾸가 아빠 목소리만 기억하고 내 목소리를 어색해할까봐, 마지막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소리내어 책 읽기였...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소리내어 책을 읽다보니, 글을 읽는것에 있어서 눈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차이점을 느꼈다. 뭐, 기존에 눈으로만 읽었을 때도 가독성이 뛰어난 글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확실히 소리내어 읽으니 달랐다. 가독성이 높다고 생각한 글 조차도, 소리내어 읽었을 때는 한 숨에 읽혀지지 않거나, 혀가 꼬이거나 막 그런 문장들이 있더라. 심지어 역사관련 책들은 워낙 어려운 단어들도 많다보니,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 책 『골목길 역사산책:한국사편』은 조금 달랐다. 소리내어 읽어도 문장이 딱딱 떨어지고, 간결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꼭 박종인 기자님 글을 읽을 때랑 비슷한 느낌! 그러고보니 이 책 저자가 박종인 기자님과 공동집필했던 『골목길 근대사』를 읽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듯?



이 책 제목 『골목길 역사산책』만 봤을 땐, 그저 골목길이나 동네길 또는 한 건축물에 얽힌 역사이야기를 일종의 해설사처럼, 또는 역사를 주제로한 여행에세이처럼 가볍게 이야기해주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가 책 속에 고스란히 녹인 모든 골목길은 대체로 내가 다 답사를 해봤던 곳인지라, 더더욱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약간 뒤통수 맞은 느낌! 내가 생각한것과는 달리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역사이야기는 정말 깊이가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봤다가 큰 코 다친격이랄까? 심지어 나 역시 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내용까지 있었던지라(화순 운주사!!!) 이건 뭐 이 책 들고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여기서 그냥 뻘하게 궁금한 점 하나. 이 책의 순서다. 뭐랄까, 시간순서도 아니고, 시간역순도 아니고. 뭐지..? 물론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낭 뻘하게 순서를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ㅋㅋ


이 책의 목차

1. 서울 남촌 대한민국길(근현대)

2. 전남 화순 고려길

3. 강릉 조선길

4. 경주 신라길





남촌 대한민국길 산책


저자의 서울 남촌 역사 산책길을 들어다본다. 나 역시 이 길을 걸었었는데, 그때는 너무 오래전이었던 지라 이 책에서 알려주는 서울로 7017이라던가, 통감관저 기억의 터 등... 대부분 조성 전 이었다는게 함정이다^_T. 뭐 어쩌겠나. 애기 태어나면, 애기랑 다시 가면 되지!


 

1911년 4월 ‘희망을 양식 삼고 곤란을 초석 삼아 마침내 집을 짓겠다’면서 경학사를 조직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실력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자주독립은 교육과 독립전쟁을 통해 달성된다. 나라 빼앗긴 망명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아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다.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新(신)과 망명지에서 흥왕하여 다시 일어나는 무장독립투쟁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興(흥)을 합친 이름이다. 이리하여 신민회에서 목적한 무관학교를 시작한다. p 033


신흥무관학교….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바로 그곳이다. 안동에 있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서울에 있던 이회영 6형제가 의기투합하여 만주에서 세운, 독립운동가를 키운 무관학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챕터의 주제는 서울 남촌이므로 석주 선생은 잠시 뒤로 빠지고, 서울살던 이회영 형제가 주인공이다. 


이회영 6형제는 서울에 있던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헐값에 팔아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이 먹이고 재우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무장투쟁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들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슬픈 사실은...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근현대사를 배울 때 이회영, 이시영 6형제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거나, 이시영이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다는 정도만 배운다. 이시영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형제가 어떻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가 항시 잊지않고 기억해야할,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분들인데 말이다.


(넷째)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11월 13일 대련에 내리는 순간 대련수상경찰서 형사들에게 붙들린다.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한다. 11월 17일 고문사한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대지 못한다.


첫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산을 돌봤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둘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셋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꼐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끊기 직전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 피난 중 이승만과 갈등을빚었다. 1951년 군 간부들이 군수물자를 횡령해 수만 국민방위군 청년들이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5월 9일 이시영은 부통령을 사퇴한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여섯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p 039~040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형제는 해방 이전에 사망한다. 사망이유가 너무 처참하다. 넷째 이회영과, 여섯째 이호영은 일제에 죽임을 당한다. 첫째 이건영은 일제 감시 속에서 죽었다. 둘째 이석영과 셋째 이철영은 가난으로 인해 굶주려 죽고,풍토병에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형제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걸고 지켰던 한반도에서 이승만의 독재와 민간인 학살에 충격을 받고, 부통령에서 사퇴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이시영, 이회영 6형제의 결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적에만 관심을 둘뿐,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체 왜? 왜 우리는 이들의 죽음은 왜 가르치지 않는걸까. 이들뿐만 아니다.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죽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홍범도 장군과 김경천 장군이 중앙아시아로 건너가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여기까지 일뿐. 해서 이런 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개개인이 독립운동사 관련한 책을 읽고 배울 수 밖에 없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빛나는 역사만 역사인걸까? 빛나는 역사를 이끌었던 주인공들의 아픈 역사는 왜 가려버리는걸까. 그 모든 것을 알아야만, 그 속에서 그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텐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교육에 새삼스레 아쉬울 따름이다.


안중근 의사 사후의 이야기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친일파들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다.


1963년 안중군의사숭모회를 만든다. 초대 이사장은 윤치영! 1938년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심기일전해서 친일매국한길로 달려간 인물이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원이 된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7년 안중군 의사 동상을 세우고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짓는다. 김경승이 만든 동상이다. 김경승은 1940년 <목동>으로 조선미술전람회특선에 오른다. 일제가 추진한 산미증산 계획을 주제로 한 것이다. 침략전쟁에 쓸 군량미다. p 062


해방이후 친일파들은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정권 아래서 반공을 외치는 애국투사로 변모했다. 살아있는 친일매국노였던 그들은 당시 살아있던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고 탄압했다. 이미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치적을 위해 이용했다. 안중근 의사도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매우 늦은감이 없진않지만 2005년에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위원회를 새로 꾸리고, 기념관도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친일매국노 김경승이 만들었던 도산공원 안창호 동상, 국회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있던 옛 전봉준 장군 동상도 철거되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를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였을 때 서울시가 일괄 매입했다. 미군정과 정부수립 초기 수도경찰청, 이승만 정권에서 안하무인 권력을 휘두른 특무대, 박정희 장군쿠데타 직후 중장정보부.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인주주의와 인권을 마음껏 짓밟았다. (……) 아시아 최초로 독재와 싸워 이긴다. 대한국인이 민주주의를 건설한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고문하던 국가안전기획부를 남산에서 쫓아낸다. 지금은 소방방재센터, 시청별관, 문학의집, 서울유스호스텔, 교통방송 등으로 쓰이고 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다. p 069 ~ 070


내가 남촌을 걸었을 때는 조성되지 않았던 그 공간, 일제의 약탈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스란히 조성한 그곳. 내가 이 곳을 걸었을 때는 끽해야 한양도성이나, 조선신궁 터(정확히는 삼순이계단) 정도였는데 말이다. 부끄러운 사실은 난 당시에 이 곳이 대한민국 시대, 군부독재의 인권유린 현장까지는 인지했어도, 일제강점기 통감관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다시한번 반성T_T..


관훈동 민씨는 민영휘를 말한다. 본명은 민영준이다. 일본국 세자가 조선을 올 떄 환영위원장을 맡아서 환영 행사를 주관한다. 1910년 정우회 총재로서 한일합방 찬성운동을 벌인다. 이자의 집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다. p 076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집, 또 다른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등이 모두 고스란히 보존되어 남산한옥마을에 있다. 헌데 남산 한옥마을에선 이 사실을 고지하고 있으려나? 서울 유명 관광지 북촌한옥마을은 친일파가 살았던 흔적을 싸그리 지웠는데 말이다. 친일매국의 흔적을 정부에서, 또는 지자체에서 나서서 지워주고 있으니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이렇게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거겠지.


예컨데 친일매국노 민영휘의 후손들이 남이섬을 운영하는 것처럼^^ 


남이섬이 친일매국노 민영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굳이 남이섬을 가서 그들의 재산을 계속 불려주는 행동은 딱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 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르고 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남이섬 역시도 지자체에서 나서서 친일매국의 흔적은 지우고, 관광지로 홍보해주는데 뭐!




운주사 고려길 산책


역시나 꽤 오래전이었나, 아빠랑 둘이서 화순 운주사를 갔었다. 운주사는 내가 너무 가고 싶었던 곳이라, 아빠한테 매일 가자고가자고 노래를 불렀더랬다. 물론 집에서 가기엔 너~~무 먼 곳이라, 외가집이 있는 영광에 갈 때나 갈 수 있었던 장소였지만. 여튼! 그렇게 가고 싶던 운주사를 가게되었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찰은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주로 부처의 가르침이나 불교 교리를 가지고 이름 짓는다. 운주사, 불교와 아무 관련 없는 이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에 운주사가 있다. 천년 된 불교사찰이 있는 동네 이름이 도암(道岩)이다. 불암(佛岩)이어야하는데? 맞닿은 마을도 도곡면이다. 불곡면이 아니네? 온통 도교다. p 093


고려시대에 도교가크게 일어난다. 도교에는 성수신앙 중 하나 태일신앙이 있다. 태일, 곧 북극성에 대한 믿음이다. 북극성은 하늘의 중심을 이루고 자연계와 인간계 현상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성수 북극성의 신격, 즉 별자리 신은 태일이다. 태일은 하늘의 황제로서 매년 한  차례  구궁을 순행한다. 구궁이란, 9개의 방위에 세운 황실 도교사원을 말한다. p 094


운주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기존의 사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온갖 석탑들과 석불이 즐비어 있는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저 불교 사찰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도교사원이라니, 하 ㅋㅋㅋㅋㅋㅋ 역시 어딜가든 뭘 보든 알고 봐야한다^_T...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운주사에 대한 내용은 천년고찰과 천불천탑, 도선국사 정도였..으니..까...하.....


고려와 조선에서 중국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더 풍성해졌다. 강역이 중국보다 작았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태일전의 규모를 9개에서 5개로 줄여서 운영한다. 화순이 속한 능주 권역은 고려 황후  공예태후를 배출한 지역이다. 공예태후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황위에 오른 유력한 고장이다. 방위로도 한반도 남서쪽이 위치함으로서 태일 오궁중 간궁을 세우기 적합한 곳이다. 북극3성을 상징하는 좌불, 입불, 시위불과 북두7성을 상징하는 칠성바위 등을 운주사 서산에 배치한다. 애초에 운주사는 불교사원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p 095


고려와 도교? 솔직히 이렇다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배울때도 그랬고, 나중에 한능검 공부할때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고려의 종교에 대해선 불교를 위주로 배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공부를 좀 해보니, 고려왕실에선 도교행사도 개최했고, 도교제단도 만들고, 심지어 개성 만월대에선 왕실에서 도교행사를 주최를 뒷받침하는 유물들까지 나오고. 세상에나!


그동안 학교에서든, 역사책에서든 ‘불교’ 또는 ‘유교’를 중심으로 가르쳤다. 그러니 나 역시 아주 당연히 운주사도 불교사찰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배운 것에 함몰되고 그게 전부라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편협한 시각을 가져버린 내 자신을 반성한다T_T.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던, 도선국사와 운주사 창건설화, 운주사 와불 미륵신앙도 자연스레 의심할 수 밖에 없게된다.


문헌 속에 등장하는 도선과 운주사의 관계는 1743년에 중간된 《도선국사실록》이다. 그  이후 이런저런 서적들이 이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운주사 명칭도 변화를 겪는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런데 한때 운주사를 ‘운행하는 배(運舟 운주)’ 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도선 설화를 수용한 것이다. 도선은 배 모양을 한 한반도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동쪽은 태백산맥이 터를 잡고 있어 무겁고 서쪽은 명야지대라 가볍다. 서로 균형이 맞지 않아 나라가 순조롭게 운행할 수 없다. 그래서 배의 중심에 해당하는 운주사 일대에 천불천탑을 세워 군형을 맞추려 했다. p 106


(고려)의종 4년 1150년 의종 황제는 최유청에게 도선의 생애를 기록하라고 명한다. 개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문장으로 전하는 것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최유청은 난감했다. 도선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데다가 알려진 바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동리산 선문을 개창한 혜철비문에서 도선의 탄생설화를 짓는다. 어머니가 태몽을 꾸고 낳은 혜철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도선도 그렇다. 동리산 선문 법통을 이은 선승 도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옥룡사를 세운 경보비문을 이용하여 도선 전기를 엮는다. 경보는 김씨 성을 가지고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하여 공부하고 옥룡사에 입적한다. 도선도 그렇다. 태조 왕건의 탄생과 고려 창업을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만들고자 한 고려 황실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도선국사 현창운동을 벌인 것이다. p 107


아니나 다를까, 도선국사의 운주사 창건설화도.....하 ㅋㅋㅋ 네, 문헌속에 최초로 등장한 운주사의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집필한 1743년. 심지어 도선국사의 생애까지도. 아..... 그동안 가려져있던 역사들을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새발의 피였다. 



불교적 관점으로 봤을 땐 이상하게 보이던 운주사가, 도교적 관점으로 보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운주사에 가서 원형 석탑을 보았을때, 심지어 석탑이 짝수층인걸 보았을때 ‘참 이상하다’ 싶기만 했는데. 처음부터 불교사찰이라고 배웠기에, 그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란. 휴.


동산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육층으로 보이는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을 칠층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육층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주석은 칠층석탑이란다. 원래 있었던 한 층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칠층석탑이라는 주장이다. 상식적인 주장이다. 사찰에 육층석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칠층석탑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탑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념대로 말한다. 땅은 음이고 탑은 양이다. 짝수는 음이고 홀수는 양이다. 탑은 양이니 홀수여야 한다. 그래서 6층이나 7층은 있어도 6층은 없다. p 123



많은 사람이 석조불감 안 석상은 지권인을한 붓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양보해도 저  손 모양은 불교의수인이랄 수는 없다. 석조불감 안 두  석상의 손  모양이 서로 다르다. 앞쪽, 즉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자연스럽게늘어뜨린모습이고 반대쪽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상은 손을 공손히모으고 있다. p 129


은하수 하늘길 남쪽 하늘에 육층석탑을 세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은하수 하늘길 원반육층석탑을보면 문제가 생긴다. 티베트 불교를 제외하면,짝수로 탑을 세우지 않는다. 한 층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으로밖에 달리 해석이 불가능하다. 머릿속에 도교가 없고, 불교만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 경우 탑신의 전반적인 비례가 어긋나야만 한다. 한 층이 없어졌으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흔적은 없다. 6층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답다. p 132


무엇보다 저자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하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천문관측술, 고려 고분벽화, 고려 시대 왕실에서 세운 도교사원, 도교제사, 수많은 도교 유물, 고려시대 천문도 등 정말 수많은 유물들로 말이다.


자 그리고, 대망의 운주사 와불 미륵불이야기!


운주사는 역사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온 유적지다. 아주 오래전부터 영산강 물줄기가 운주사 앞까지 어어졌었기 때문에 왜구들의 침입에 시달렸다. 이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에 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상감청자 100여  편을 찾았다. 고려중기12세기경에 조성했을  것이다. 홍치 8년이라 새긴 기와도 찾았다. 즉 연산군  1년 1495년에 중수했다. 운주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정유재란 때다. p 153


여기에 주민들까지 가세한다. 운주사에 있는 유물들을 가져다가 생활도구로 사용한다. 주민들에게 석탑과 석상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미륵의 환생이 아니라 담과 디딤돌을 위한 석재다. 운주사 평지는 생계 수단이다. 그리고 몇몇 주민들은 석탑, 석상들 중 값나갈 만한 것들을 가져다 팔기도 한다. 1980년 석탑은 18기로 4기가  줄고 석상은 70구로 1구가 준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미륵신앙과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엄청난 크기의 운주사 석탑과 석상이 무수하게 널려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민중  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정도 규모의 석상과 석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주민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강력한 권력집단이어야 한다. 따라서 운주사를 미륵신앙과 연결시킨 것은 문학적 상상일 뿐이다. p 155


정말 민중이 와불을 미륵불로 믿었다면, 민중들 스스로 이 절을 망가트리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제일 와닿는다. 하. 나는 여태껏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었던 걸까.


물론 운주사를 도교사원으로 이야기하는 건 저자의 추측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이건 당연히 이거지!’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편협한 시각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훌륭한 길라잡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강릉 조선길 산책

율곡은 공안, 선상, 군정 등 폐정에 대한 개혁을 경장이라 했다. 중쇄기에 접어들어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깨질 위기에 처한 조선을 새롭게 고쳐서 백상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방책이다. 선조는 오랜 구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율법은 구법이 아니라 악법이라 한다. 홍문관 부제학 미암 유희춘은 “이이가 상소한 바와 같이 공물, 선상, 군정에 관한 일을 강구해서 시행한다면 백성들이 곤고함에서 벗어나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아뢴다. p 184


율곡은 을사삭훈을 통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고, 개혁을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동서분당을 조제보합함으로써 그 폐해를 막고, 변방을 튼튼히 지켜 오랑캐가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무너지는 벽을 바로 세우고 깨지는 기와를 제대로 이어서 조선이라는 집을 반듯하게 하고자 했다. 퇴계나 선조는 율곡을 알았다. 많은 사람은 더불어 살았으면서도 율곡을 제대로 몰랐다. p 190


사림들이 대거 죽는 사화의 피바람과 함께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선조 재위기는 붕당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인과 서인들은 서로 내가 맞네, 네가 틀리네 하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이 힘들던 말던, 임진왜란이 코 앞으로 다가오던 말던 그들에겐 자신들의 논리만이 중요했다. 그런 상황 한가운데 율곡이 있었다.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의 국방을 생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류성룡 조차도 율곡을 비판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야, 류성룡은 율곡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율곡은 붕당을 뛰어넘어 망가져가는 조선을 바로잡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을 벌인다. 문성사를 짓고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율곡영정>을 설치한다. 김은호가 1965년에 그린 그림이다. 김은호는 1937년 애국금차회가 미나미 총독에게 전쟁헌금을 바치는 광경을 그렸다. 율국선생께서 살아계신다면 친일매국 화가에게 당신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친일매국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안중근 동상을 철거한 것은 지난 2010년 10월 26일, 2013년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2015년 국회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2021년 정읍시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등 김경승이 만든 동상 철거 및 교체가 줄을 잇고 있다. 이제 강릉치 차례다. 강릉시에서 친일매국노가 그린 영정을 제일 먼저 교체했으면 좋겠다. p 192


오롯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 있던 율곡을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 친일매국노들이 이용했다. 심지어 군사정권에서도 율곡을 이용했다. 심지어 친일매국노가 그린 율곡의 영정은 아직도 표준영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릉은 율곡이 태어난 곳이다. 율곡의 모친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의 고향이 바로 강릉이었다. 우리는 신사임당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기묘명현 신명화에게 신사임당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똑똑한 딸이다. 18세기 노론 중진들에게 신사임당은 아들을 잘 가르쳐서 성공시킨 어머니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배경으로 나온 주장이다. 20세기 권력에게 신사임당은 10만 양병을 주장하면서 상무 정신을 고취시킨 아들을 낳아서 잘 기른 현모양처였다. 유신 정국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내새운 새로운 해석이다. 그 중심에 초충도가 있었다. 신사임당을 신사임당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p 201


신사임당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녀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하지만 그 시각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신사임당’ 본인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본명조차 알려져있지 않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그녀의 ‘당호’일뿐, 이름이 아니다. 그래도 신사임당의 삶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신사임당과 같이 강릉에 근거를 두었던 허난설헌의 삶은 어땠나? 그녀는 초당 허엽의  딸이자, 당대 명문장가 허균의 누이였다. 허난설헌은 글을 참 잘썼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그녀의 행복도 끝난다. 그녀의 남편과 시댁은 조선에서, 그것도 한낱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그녀의 버팀목이었던 부친과 오빠, 자식들까지 줄줄이 잃고 그녀는 2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놀랍게도 허난설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허초희. 그녀의 동생인 허균이, 누이의 글을 엮어서 사방팔방, 외국에까지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조선 여성중 이름이 알려진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인 허초희. 하지만 그녀의 삶은 불행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삶, 결혼 후 그녀들의 삶과 죽음은 달랐지만, 결국 조선식 유교적 잣대에 좌우되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누이로 남아버렸다.




경주 신라길 산책


요즘 블로그에 경주 여행기를 쓰는 중이라서 그런지, 경주 신라길 챕터가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혹시나 여행기를 쓰면서 이 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ㅋㅋㅋ



빅토리아 황금보검, 북방 초원을 가로지른 금관, 서역 너머 로만글라스 게다가 오직 신라에만 있는 높은 굽다리 줄무늬 유리잔, 인도 합금강철 기술등은 신라가 오랜 시간 참아내면서 쌓아온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를 응용하여 신라 유리를 만든다.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신라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게 한다. 왜에서 표주박을 허리에 메고 바다를 건너온 호공은 재상이 된다. 서역 사람이 원성왕 괘릉을 지킨다. 아랍 사람이 왕 앞에 나와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p 248


유독 동시대 다른나라와는 달리, 이국적인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나라 신라. 그 덕분에 신라 관련 역사다큐도 엄청 봤더랬다. 뭐, 가야도 신라만큼은 아니지만 이국적인 유물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음. 이 챕터의 주인공은 신라니까!


신라 고분에서 저기 바다건너에서나 나올법한 로만글라스가 발견되고, 황금보검이 나온다. 북방 기마민족 문화에서나 볼법한 동복이나, 황금문화,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들이 나온다. 원성왕릉에 세워진 서역인 석상과 사산조 페르시아 서사시에 실려있는 ‘바실라’ 이야기. 우리의 다른 고대국가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신라의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물들이다.



천마도를 그린 말다래 소재를 보면 쉽게 출처를 알 수 있다. 자작나무다. 신라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했다. 천마도 말다래  출처는 신라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천마도라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날개는 없다. 천마가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아니다. 애초에 질주하는 백마였기 때문에 구름이 아니라 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백마 몸에 초승달 반점! 중국와 유럽 천마도에는 초승달 무늬가 없다. 초승달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 문양에 등장한다. p 264


천마도로 유명한 말다래에서도 북방 기마민족의 향기를 찾을 수 있다. 날개가 없다거나, 초승달반점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천마도의 소재 자작나무다. 


알타이 산맥에 있는 쿠르간은 신라 고분보다  최대 1150년을 앞선 적석목곽분의 원조쯤 된다. 나무무덤방 위쪽에 돌무지가 있기 때문에 나무 무덤방이 썩으면 돌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함몰된다. 대릉원 고분은 무덤방 바로 위에 돌무지가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무덤방 안으로 돌이 많이 들어온다. 파지리크 고분은 무덤방과 돌무지 사이에 봉토층이 있었기 때문에 함몰될 때 돌이 적게 들어왔다. 양자 모두 돌무지 무덤때문에 도굴꾼이 건드리지 못했다. p 267


알타이 산맥무덤방은 삼림지대, 즉 자작나무로 뒤덮인 언덕에 정착한 부족장이 사는 통나무집 ‘타이가 하우스’다.  (……) 신라사람들은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했다. 타이가 하우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린 말다래, 자작나무로 만든관모. 모두 천마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 시각으로 보면 신라는 하얀나무 나라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좋아하니 백목이라 불렀다. 일본말로 발음하면 신라와 백목 모두 ‘시라기’다. p 268


난 한일고대사에도 관심이 많다보니, 도래인 관련 일본원서도 곧잘 읽곤 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우리 고대국가들을 읽는 이름을 보면서,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건가 궁금할 때가 많았다. 고구려는 코쿠리, 백제는 쿠다라, 신라는 시라기, 가야는 가라. 고구려나 가야는 보자마다 대충 느낌을 알았다. 쿠다라는 곰나루 혹은 큰나라 에서 어원이 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라기는 당최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일본이 왜 신라를 시라기로 부르는지에 대한 것을 언급하다니!!!


저자의 말대로 하얀나무(백목)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시라기다. 하얀 자작나무 껍질을 좋아하던 신라인, 하얀나무, 시라기. 오 뭔가 그럴듯하다. 맞는 말인것 같기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짜 맞는 것 같다. 일본이 신라를 부르는 이름에서 조차도,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나타난다는게 정말 신기하다면 신기하달까?


대릉원에서도 옴총 유명한  황남대총이다. 근데 이 황남대총의 유물들로 인해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인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서 금관이 나와서 피장자가 남자라 생각했는데, 같이 출토된 허리띠에 ‘부인대’라고 적혀있었다. 반대로 조금 작은 남분에서는 금동관과 유해 일부가 출토되었다. 남분의 유해를 확인해본 결과 남성이라고 특정되었다.


알타이  고산지대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북분에 아내를, 남분에 남편을 매장했다. 그래서 황남대총 북분에 장신구가 많다. 반대로 남분에는 무기가 많다. 그런데 북분이 남분보다 크다. 북분 왕비릉을 작게 만들고 남분  왕릉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부장품도 북분이 훨씬 많고 값지다. 게다가 금관은 북분에서 나오고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온다. 왕비릉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왕릉에서 금관이 나왔어야 한다. 왜 서로 뒤바뀌었을까? p 272


일단 황남대총이 왕릉급 고분, 심지어 쌍릉인건 확실한데, 남성의 유해는 남분에서 나왔다. 조금 더 큰 북분에선 남분보다 더 귀한 금관과 피장자가 ‘여성’이라고 칭한 금제 허리띠가 나왔다. 다름아닌 황남대총에서 혼돈의 카오스같은 상황이 일어난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기마민족 문화를 근거로 가지고 왔다. 수많은 기마민족 향기가 짙은 유물들이 신라고분에서 넘처나게 출토되고 있으니(황남대총포함),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금동관과 남성의 유해가 나온 조금 작은 남분은 왕릉이고, 금관과 금제허리띠(부인대)가 나온 큰 북분은 왕비릉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정때문에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왕릉과 금동관에서 해법을 찾는다. 결과적으로 최대 왕릉을 만들어서 김씨 세습왕조 제2대 왕으로서 예를 갖췄다. 박씨나 석씨와 더불어 왕권을 돌려가질 필요가 없는 김씨 세습왕조를 이제 막 시작했다. 안착시키기 위해서 내부 싸움을 덮어야만 했다. 그러나 왕관이 아니라 금동관으로 격을  낮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당대를 죽였다. 힘든 왕위쟁탈전을 치른 만큼 앙금도 쉽사리 가라앉이 않았다. 게다가 왕비 아류부인의 아버지는 왕인데 실성마립간의 아버지는 제2관등 아찬이다. 같은 혈통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 왕비 아류부인은 왕관을 쓰고, 왕 실성마립간은 금동관을 쓴다. 이렇게 힘든 내력을 지닌 왕릉과 왕비릉이다. p 278


우선 현재 학계에서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5세기 무렵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다수설은 눌지왕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실성왕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당대의 왕위 다툼 속에서 찾는다. 그 속에서 왕릉이 더 작고, 왕비릉이 더 커진이유가 들어있다.


(※우선 당시 신라의 왕 명칭은 마립간이지만, 통칭 왕으로 칭하겠다.)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는 이렇다. 내물왕은 사촌동생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내물왕이 죽자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왕이 왕위에 오른다. 실성왕은 왕위에 위협이 되는 내물왕의 세 아들을 견제한다. 감시하기 위해서 내물왕의 장자 눌지를 자기 딸 아로와 결혼시킨다. 내물왕의 차남 미사흔은 왜에 볼모로 보내고, 내물왕의 삼남 복호는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과거 내물왕이 본인에게 그랬듯이. 이후 실성왕의 사위가 된 내물왕의 장자 눌지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인인 실성왕을 죽위고 왕위에 오른다. 왕이 된 눌지는 박제상을 보내 볼모로 잡혀있는 둘째와 셋째를 환국시킨다. 


여기까지가 당대 왕위 다툼의 역사다. 이후 눌지는 장인이면서,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는 실성왕의 왕릉 조성을 위해 고심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왕릉이고 뭐고 때려치고 싶겠지만, 이 시기는 김씨 세습왕조를 견고하게 다져야 했던 시기이니 만큼 실성왕의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해야만 했다. 해서 왕릉을 거대하게 조성하되, 사적인 마음 한 스푼 담아서 왕릉보다 왕비릉을 더 크게 조성한다. 물론 명분도 그럴듯 했다. 실성왕의 부친은 6두품 출신이지만, 실성왕비의 부친은 미추왕(초대 김씨왕^^)이었으니까! 그래서 왕비릉은 크게, 왕릉은 작게 라는게 저자의 추론이다.



근데 이게 또 빠져든다. 하하...하하. 원래 고대사라는게 남아있는 당대  기록이 없다보니, 발굴된 유물로 추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하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단 지금은 저자의 추측에 한표 던지는걸로...ㅋㅋㅋㅋㅋ


경주에서 유명한 최부자댁. 교촌마을엔 최부자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경주 최부자댁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다. 흡사 독립운동가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 처럼.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자본금 100마나 원을 출연해서 백산상회를 경영한다. 자본금 기준으로 당시 조선 10대 재벌이다. 백산상회는  자본금을 빨리 잃기 위해 세운회사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했다. 회사는 곧 망한다. 최준 선생은 기뻤다. p 303


최준선생은 광복을 맞자 전 재산을 털어서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1947년 대구대학교 세우던 해에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잣집을 비롯해서 논과 선산 등도 모두 대구대학교에 내놨다. 1964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로 찾아 온다. “대구대학교를 한수 이남 최고 대학교로 만들겠다”고 한다. 최준은 아무런 대가 없이 대구대학교를 이병철에게 넘긴다. 이병철은 대구대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1966년 한국비료는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일으킨다. 삼성이 갖고 있는 회사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대구대학교를 박정희에게 헌납한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12월 청구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합쳐서 영남대학교를 만든다. 최준 선생 모든 재산은 박정희에게 넘어갔다. p 304


독립운동을 열심히 지원한  최준 선생은 해방이후에는 교육을 위해 모든 재산을 털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삼성을 세운 이병철에 입 바른 말을 하며 꽁으로 가져갔고, 이병철이 가져간 최준 선생의 재산은 다시 박정희에게 고스란히 상납되었다. 반면에 최준선생의 손자는 그 박정희 정권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아,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최준 선생의 모든 재산을 탈취한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때 ‘타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쓰는 일본군이었던 박정희는 그렇게 독립운동을 한 최부자집을 몰락시켰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월정교다. 월정교 복원 공사 시에도 가서 봤었고, 복원 된 후에도 가서 봤던 월정교다. 월정교 관련 포스팅을 할때 이게 정말 복원이 맞는건가 욕을 한참했던 그 월정교다.


고려 때 문신 김극기는 월정교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반월성 남쪽 토령 강에 무지개 모양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에 비추었네. 용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는 땅에 드리우고 무지개가 하수를 마시매 허리는 하늘에 걸치었네. ”


월정교를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한 것으로 봐서 월정교는 반월교 또는 홍예교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교각 위에 수평으로 다리를 만든 직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p 308


그래도 꾸역꾸역  이해하려고 애썼다. 당대의 역사기록도 없고, 월정교의 원형을 추론할 수 있는 유물도 없으니 어쩔수 없었을거라고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데 왠걸, 고려시대 한 문신이 월정교에 대한 글을 남겼다. 월정교는 무지개 모양 다리라고. 그니까 한마디로 홍예교라고. 적어도 지금같은 일자 모양의 교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면 신라는 홍예, 아치형모양, 반달을 좋아했다. 반달은 점차 차올라 보름달이 된다. 그래서 신라는 점차 차오르는 나라였다. 신라의 도성 이름도 반월성이었고,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석굴암 본존불 입구도 반달모양 홍예교다. 물 위에 있는 홍예교가 달빛을 받아, 물에 비치면 원형이 된다. 가득찬 보름달이다. 


그런데 월정교를 홍예교로 만들지 않고 일직선 들보교로 복원했다. 월정교 주변 석재를 발굴했다. 다리 난간을 만들 떄 사용했던  홍예교에 해당하는 부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호남성에 있는 회룡교를  본떠서 들보교로 복원했다. 홍예교일 수도 있고 들보교 일 수도 있다. 사료는 별로 없고 유물은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월정교 복원은 우리 몫이 아니다. 서두르지말고 후손들에게 맡겨야 한다. p 309


하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월정교는 일자 모양의 교각이다. 나라에서 월정교 복원에 앞서 모델로 한 것이 중국에 있는 회룡교라고 한다. 아니 대체 왜? 왜때문에 갑분중국? 원형을 추론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본 뜬 것이 중국의 다리라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 이렇게 된거 이 책의 전작들도 한번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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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9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아이 가졌을때 해리포터 많이 읽었어요. 남편이 아이가 링가 디움 레비오사! 이러면서 나오는 거 아니냐고 ㅠㅠㅠ 역사로 하는 태교 👍 좋은데요 *^^*

피로 2022-03-14 12:03   좋아요 1 | URL
태교랍시고 열씸히 책을 읽고 있기는 한데, 얼마나 아이에게 영향이 갈지는 모르겠어요 ㅠㅠ
 
인현왕후전 - 환국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비운의 왕비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5
작자 미상 지음, 조재현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서평은 서해문집에서 출간된 고전문학인 ‘오래된 책방 시리즈’ 중 15번째인 #인현왕후전 이다. 서해문집에서 출간되고 있는 ‘오래된 책방 시리즈’ 내 개인적으로도 애정하는 시리즈라, 매번 신간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구입하고 있다. 참고로 오래된 책방시리즈는 고전소설(또는 고전문학)의 원문을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읽기 쉽게, 우리글로 옮겨서 출간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시중에 나와있는 『인현왕후전』에 대한 책을 보면 원문에는 없는 MSG가 첨가되어 있는 경우가 아주아주 많다(대표적으로 장희빈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아주 자세하게 쓰여있는 뭐 그런 이야기?). 뭐, 인현왕후전 자체가 일종의 ‘소설’이기는 하나, 그래도 당대에 기록된 사료이기도 한데, 여기에 더 많은 MSG를 뿌린 것이 시중에 널려 있는 『인현왕후전』이랄까? 예를 들자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보고, 나관중이 MSG를 미친듯이 첨가하여 소설 『삼국지연의』를 집필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문을 그대로 우리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책이 상당히 얇은 편에 속한다. 뭐 오래된 책방 시리즈가 대체로 책들이 얇다. 『고대일록』이나 『서유견문』, 『매천야록』처럼 우리 글로 옮겨도 페이지수가 방대한 고전도 있긴 한데, 뭐. 아무리 두꺼워봐야 벽돌책정도는 아니니 역시나 읽을만 하다. 여기서 함정은...내가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계속 사는 것과는 별개로,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지금까지 읽은거라곤 오늘 서평을 쓰는 『인현왕후전』을 포함하여 『발해고』, 『하멜표류기』, 『동도일사』, 『징비록』 총 5권이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24권까지 나왔는데, 독서 진척률이 너무 저....저조하다. 허허허. 이거 참. 출산하기 전까지 전 권 다 읽을 수 있겠지...ㅋㅋㅋㅋ




인현왕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조선의 왕비중 한명이다. 그도 그럴것이 수많은 드라마에서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간혹 여기에 숙빈 최씨의 이야기까지 들어가는 경우도 있긴 하다. 뭐, 주연이 셋이든 넷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인현왕후의 이야기는 동일하다.



숙종이 장옥정이라는 나쁜 요녀에게 빠졌다. 옥정이 아들을 낳자, 그 아들을 세자로 봉하고 옥정은 희빈에 봉해진다. 장희빈에게 빠져있는 숙종은 결국 착하디 착한 본처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옥정을 중전에 앉힌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흐른뒤, 숙종이 본인의 잘못을 깨닫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쫓아냈던 인현왕후를 불러와 다시 왕비로 복권시킨다. 왕비로 복권된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저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렇게 숙종은 요녀에게 빠진 로맨티스트, 장희빈은 요녀, 인현왕후는 현모양처로 그려지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숙종은 재위기간 내내 왕권강화를 위해 조정에 수많은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우는 ‘환국’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환국’이란, 대충말하자면 숙종이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줬다가 뺏는 등 본인의 입맛에 맞게 신하들을 좌지우지 한 것이라고 보면 쉽다. 바로 이때 서인측의 사람이 인현왕후였고(+숙빈 최씨), 남인측의 사람이 장희빈이다. 숙종은 장희빈을 예뻐하며 남인에게 권력을 주고, 서인을 대거 숙청시켰다. 그와 함께 인현왕후는 폐위. 6년 뒤  인현왕후가 복권되면서 서인이 권력을 잡고, 남인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와 함께 장희빈은 사약. 숙종 사후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왕이 되긴 하였으나, 이미 서인 세력이 조정을 잡고 있은 뒤였다. 경종은 후사가 없었고, 이복동생인 연잉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그가 바로 영조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의 아들이다. 숙빈최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서인측의 사람이었다.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다시피 계속해서 서인이 권력을 잡았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인현왕후전』은  어디까지나 서인, 즉 승자의 기록이다. 정말 장희빈이 그토록 악녀였고, 요녀였는지 이 책만으로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뭐, 실록에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긴 하지만, 결국 실록자체도 승자의 기록임으로. 무엇보다 왕실 내의 저주행각이야 뭐 드문일도 아니었고. 아니 그것보다 저주한다고 정말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아, 이건 요즘의 가치관이니 패스!


《인현왕후전》은  《인현성모민시덕행록》과 《인현왕후성덕현행록》 두 본으로 나눌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사건 전개나 내용의 흐름, 문장 표현까지 흡사하다. 다만 《인현왕후성덕현행록》은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일을 두고 강하게 반발한 ‘박태보’를 자세히 기술해, 작품 전반부에는 내용의 중심이 인현왕후보다 오히려 박태보에 기울어지는 느낌이다. 《인현왕후성모민씨덕행록》은 박태보에 관한 내용이 소략한 대신, 작품 말미에 다시 박태보를 언급함으로써 박태보의 충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인현왕후전》을 누가 썼는지 작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면 인현왕후의 측근이 지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현왕후의 궁인이나 혹은 서인의 세력 후예라 추정한다. - 인현왕후전에 관해 中


내가 인현왕후전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초등학생때는 만화책으로 된 인현왕후전을 읽어보았고, 중학생때는 청소년용 인현왕후전을, 고등학생때는 무려 세로쓰기 였던, 그 옛날 울 엄마님이 읽었던 인현왕후전을 읽었더랬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 내용들은 기억이 나는데, 확실한건 내가 읽었던 모든 인현왕후전에는 수많은 MSG가  첨가되어 있었다는 것! 원문은 이렇게 짧고 간결한 것을...심지어 원문에는 어릴때 읽었던  책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바로 인현왕후전에서 충신이라 일컬어지는 박태보 이야기. 세상에, 이번에 읽은 원문 고전 인현왕후전은... 부제로 ‘충신 박태보전’이라 붙여야 할 정도로 박태보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았다.


슬프다! 예로부터 충신과 열사로 죽은 이도 많지만 박태보의 충성스러운 절개는 용봉과 비간 이후 으뜸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이 세상에 가득해 천추만세 후에도 금석에 새겨 널리 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죽었다고 하리오마는, 칠십되시는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계셨으니 지극히 참혹한 일이었다. 박태보의 죽음을 보고 장안의 선비와 백성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으며, 간신이나 소인배마저도 감탄했다. p 075



아름답다! 박태보의 충성은 고금에 없는지라, 후세 사람들의 본받을 바로다! p 144 (인형왕후전 제일 마지막 문장^^)


분명 책 제목은 인현왕후전인데, 박태보에 대한 이야기를 몇 십페이지. 심지어 책을 끝내는 마지막 문장마저 박태보의 충성. 인현왕후전을 작성한 이가 인현왕후의 궁녀든, 서인세력이든 그 누구든 정말 확실한건, 박태보와 큰 인연이 있는 사람이거나 혈연이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마저 든다. 분명 내가 읽은건 인현왕후전인데, 기억에 남는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충신 박태보와 박태보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숙종뿐..^_T



박태보를 빼고 인현왕후전을 논한다면, 뭐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인현왕후는 아주 신비롭고 성스러운 어린시절을 지나 아주 어질고 현숙한 왕비다. 반면에 장희빈은 그저 간사하고 교활하며 약삭빠르고 민첩한 요녀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했던 숙종은 어떻게 묘사될까?


예로부터 위대한 황제와 총명한 군주(왕)라도 한번은 참소를 듣거니와, 숙종대왕의 성스럽고 신령한 덕과 문무를 겸비하신 뛰어난 자질로도 장씨의 유혹에 빠져 이토록 나라의 근본을 어지롭게 하심은 실로 의외였다. p 085



대장공주와 명안공주가 후를 뵙고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전하의 은덕이며 중궁의 성덕임을 말하며 즐거워하셨다. 오로지 전하의 은혜를 감사드리며 축원할 뿐 지난 6년 동안의 고초에 대해서는 말씀을 내지 않으시고 모두가 전하께서 총명하신 덕탁에라 말했다. p 099



경자년 6월 초파일 묘시에 전하께서 경희궁 응복전에서 승하하시니, 이때 춘추가 예순셋이었다. 온나라가 망극하였으니, 그 성덕과 큰 도량, 신묘함과 문무를 견비하심이 만대의 뛰어난 군주셨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참소에 속은 군주는 많았으나, 오래지 않아 의혹을 풀고 분명히 깨달으셔서 밝고 환하며 올곧으셨던 분은 숙종대왕께서 역대 제일이셨다. p 141


아주 잠시 잠깐 요녀의 유혹에 빠졌을 뿐, 결국 그 모든것의 잘잘못을 깨달았으니, 밝고 올곧은 역대 제일의 대왕이란다. 애초에 밝고 올곧은, 사리분별이 똑바른 사람이었으면 요녀에 빠질일도 없지않았을까요, 허허. 이거 참. 하지만 뭐 어떡하겠나. 조선은 엄연이 유교국가이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왕의 위엄이 굳건해야하니! 근데 숙종으로 인해 수 많은 서인들이 숙청당했으니, 서인 입장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든 집고넘어가야겠고, 근데 그러자니 왕을 상대로 ‘니가 잘못했잖아!’라고 하지는 못하겠고. 결국 그 책임은 오롯이 장희빈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뭐, 장희빈의 아들이 왕(경종)이 되었다고 한들, 경종은 힘이 없었고 권력은 서인이 잡고 있었으니 장희빈을 악녀로 몰아세우더라도 서인 입장에선 부담이 1도 없기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경종의 후계자는,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서인측 사람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으니까.


이때 숙인 최씨가 왕자(훗날  영조)를 탄생하셨는데 이미 세 살이었다. 기상이 비범했으므로 전화와 후께서 매우 사랑하셨다. 후께서 밤낮으로 어루만지며 아끼시기를 마치 친자식처럼 하셨다. p 105


그러니 이렇게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훗날 왕이 될 명분까지 만들어주지 않았겠는가. 정말 서인들의 치밀함이란!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을 사랑하고 섬겼던 네 여인이 잠들어 있다. 결혼 뒤  채 2년도 못 살다 간 인경왕후는 남편 숙종을 얼마나 이해하고 사랑했을까? 두 번째 왕비인 인형왕후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떄, 숙종은 용포자락을 모두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혼전앞에 서서 무려 네차례에 걸쳐 직접 지은 제문을 읽으며 통곡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는 인현왕후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미리 인현왕후 봉분의 오른쪽을 비워두라 명한다. 그렇다면 인현왕후는 그토록 무섭게 자신을 내쫓아 6년 동안 치욕의 세월을 살게 한 숙종을 깨끗이 용서했을까? 세 번째 왕비로 들어와 전전긍긍하며 남은 세월을 보낸 인원왕후는 어땠을까?



무엇보다 명릉의 건너편, 키 높은 나무들에 앞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대빈묘에 있는 그녀, 장희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약을 거부하는 자신을 모습을 보고, ‘숟가락으로 억지로 입을 벌린 뒤 약을 들이부어라’라고 궁녀들에게 명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보다, 죽어서까지 숙종과 인현왕후가 함께 있는 모습을 음지에서 지켜보도록 한 후손들에게 서운타 할지도 모른다. -옮긴이 머릿말 中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인에게 휘둘리던 우유부단한 남자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으로 골치아파하던 부친 현종을 보고 자라며, 신권이 강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왕권강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왕이었다. 해서 어린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정치오백단이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기싸움을 하던, 떡잎부터 다른 노련한 왕이었다. 그런 숙종이 왕권강화의 카드로 내밀었던게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 여인을 사이에 두어 서인과 남인사이를 저울질 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추가로 들이민 카드가 연잉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였고.



뭐, 지금 관점에서 보면 숙종은 일종의 나쁜남자st일지도. 적어도 이후에 누군가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드라마를 만든다면(+숙빈 최씨), 서인 입장에서 쓴 그토록 뻔한 이야기는 지양했으면 좋겠다(심지어 질려!!!). 오히려 숙종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가 왕권강화를 하는 과정에서 궁중 여인들과 서/남인을 저울질 하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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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씨남정기도 한 몫했던거 같아요. ㅎㅎ장희빈을 당파싸움과 숙종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하더라고요. 서해문집의 오래된 책방 시리즈 좋은데요 *^^*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씨남정기도 한 몫 했어요 ㅎㅎㅎ
일단 기존의 역사서들이 전부 승자의 기록이다보니, 장희빈만을 악녀로 몰기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ㅠㅠ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 오늘 만난 고양이, 어디서 왔을까?
바다루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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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태교 책은 1년전에 출간된 『기기묘묘 고양이 한국사』. 물론 나는 고양이를 키우진 않지만, 고양이 자체는 꽤 좋아라하는 편이다. 뭐랄까, 고양이는 독립적(?)이면서도, 묘하게 기품있고, 고고해보인달까? 다만 나보고 키우라고 한다면, 그건 또 싫지만 말이다.



과거에 고양이에 대한 세계사 책은 여러번 읽은 적이 있었다. 덕분에 고대문명권에서 고양이는 어떤 존재였는지, 중세 서양에서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에 대한 것도 꽤나 잘 알게 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계사적으로 보는 고양이에 대한 내용이다보니(심지어 저자도 외국인이고), 한국에서는 시대별로 고양이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 속의 고양이라고는 숙종이 애지중지한 고양이 ‘금손’의 이야기 정도? 진짜 딱 그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 속 고양이는 별 다른 이야기가 없는 줄 알았을뿐이고. 하하. 그러다 이 책을 보고나니,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양이는 꽤 오랫동안 한국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지금처럼 ‘반려묘’써의 인식이 생겨나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우리 역사속 고양이를 이야기 하기 위해선, 그 고양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고양이의 조상은 누구인지 거슬러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부분은 패스! 대충 동아시아에 남아있던 원시 고양이들은 환경에 맞춰서 진화를 거듭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삵’이다. 가끔 칡(ㅋㅋㅋ)이라고 읽는 경우도 많은, 바로 그 삵! 야생 호랑이, 사자, 표범등이 사라진 지금의 한반도에서 자연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삵’이다.


고양이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극적인 여정을 거치는 동안, 동아시아에 남아있던 또 다른 원시 고양이들은 삵속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한다. 지금도 동아시아 일대의 야생에 널리 서식하고 있는 삵은 사막에서 험난한 진화의 고비를 넘은 고양이와 달리 온대기후 지역의 숲에서 살았다. 비교적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차지한 덕분인지, 순탄하게 동아시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p 035




그렇게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은 원시 고양이 중 일부는 삵이 되고, 또 일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양이로 진화하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삵과 고양이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아쉽게도 한반도 사료는 없으나, 중국 한나라 저서에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 고양이가 들어오기 전까지 살쾡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한자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로 고양이를 가리키는 ‘猫(묘)’와 삵을 가리키는 ‘狸(리)’가 고대에는 서로 구분된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세기의 한자사전인 《설문해자》는 “묘는 리의 일종”이라 적었고, 3세기의 한자사전인 《광아》도 “리는 묘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곧 묘라는 글자 자체가 원래 삵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중국에 고양이가 널리 전파된 뒤에 비로소 삵과 분리되어 고양이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고양이와 삵을 하나의 범주로 보는 시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양이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가리(家狸)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p 041



고양이와 살쾡이 사이에서 벌어진 ‘진화의 게임’에서 고양이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부적인 원인은 다양한데, 거시적으로 봤을 때 가장 먼저 ‘시간’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살쾡이와 인간의 공존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아시아의 고양이들은 그보다 두배 이상 앞선 기원전 7500년경에 이미 인간과의 공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더 오랜시간 인간과 접촉한 고양이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시간이 많았다. p 048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에는 한반도 고대국가인 ‘부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이 한반도에 사는 고양이(또는 삵)의 최초 기록이다.


아쉽게도 고대 한반도의 사람들이 살쾡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후한서》에는 부여의 특산물로 ‘豽(놜)’이라는 동물의 가죽이 나오고, 이 동물은 표범과 비슷하지만 앞발이 없는 짐승이라는 주석이 추가되어 있다. 주지하듯 삵은 가죽의 점박이 무늬가 표범과 비슥하기 때문에 ‘놜’은 바로 삵을 가리킨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앞발이 없다는 주석은 삵이 앞발을 감추고 앉은 자세에서 비롯된 오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식빵자세’라고 부르는 모습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일 것이다. p 066


한반도의 고대국가 부여는 고구려보다 더 위에 위치해있는, 지금의 만주지역에 있다. 적어도 중국 2세기 저서에 삵에 대한 언급이 된 것으로 보아, 이미 같은 대륙에 위치했던 부여에 삵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무엇보다 부여의 특산물이 삵이 가죽이라고 하니, 삵은 꽤나 자주 출몰하는 동물이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반려묘같은 인식이 아니라, 그저 사냥당하는 동물에 불과했지만.



이제 고양이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 설명 가능할 것 같다. 9세기 전반, 장보고 선단이 이끄는 중국, 신라, 일본인의 교류는 이전까지와 달리 전방위적이고 무제한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살던 고양이 일부가 빈번하게 해상을 넘나드는 상선을 잡아타고 신라와 일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을 것이다. 특히 다자이후는 장보고 선단이 일본과 교역하는 창구였으니, 우다 덴노의 일기에 언급된 고양이가 이 다자이후에서 왔다는 말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또한 신라와 일본의 귀족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이라고 하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수요가 컸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고양이도 덩달아 큰 사랑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p 074



고양이에 대한 한국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이 남긴 “아계부”라는 시다. 아침이 되어도 욹지 않는 닭을 꾸짖은 이 시에는 삵과 고양이가 서로 다른 짐승으로 나뉘어 등장하고 있으며, 고양이는 개와 대구를 이루어 대등한 짐승으로 나열되어 있다. 곧 고양이가 살쾡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손목과 김부식의 글 가운데 무엇이 더 먼저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두 사람의 기록이 한반도에 살던 고양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언급이라는 점이다. p 077



그러나 김부식의 시는 직접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 고양이를 기른것으로 짐작게 하는 방증만을 전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고양이에 대한 한국 최초의 ‘증인’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집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 분명히 이름을 남긴 한국 최초의 집사는 그보다 한 세기 뒤의 인물인 이규보가 된다. 그가 남긴 글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에는 “검은 아기 고양이를 얻다”라는 시가 실려있는데,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이 일품이다. p 079



우리나라 최초의 고양이 기록은 《삼국사기》 편찬으로 유명한, 고려시대 학자 김부식이다. 그가 최초로 고양이를 언급했다. 키웠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언급’만 한 정도였다. 반면에 고양이를 키웠다는 최초의 기록은 김부식과 같은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의 시에서 나타난다. 적어도 기록상으로 언급된 우리나라 최초의 고양이 집사는 ‘이규보’ 다.


검은 아기 고양이를 얻다 -이규보


가닥가닥 털이 파랗고

동글동굴 눈은 푸르고

모습은 범 새끼 같으며

울음은 사슴을 겁준다

붉은 끈으로 매어 두고

누런 참새로 먹이 주니

발톱 세워 들쑤시다가

꼬리 치며 점차 따르네






외환 -이색


추위 두려워 손님을 돌려보내고

불가에서 고양이와 친하노라니

득실이 서로 절반이어서

중화가 절로 새로워지네


위 시는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이 지은 시다. 


이색이 1381년 겨울에 지은 이 시에서 고양이는 단순히 쥐 잡는 짐승에 머무르지 않는다. 손님을 돌려보낸 아쉬움과 고양이와 노는 즐거움이 서로 상쇄된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색은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나아가 고양이와 교감하여 중화, 즉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마음을 새롭게 빚을 수 있다고 예찬을 한다. 그에게 고양이는 존재 자체로 일상 속에서 기쁨을 주는 친구였던것이다. 이규보와 이제현 같은 앞선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이색의 관점은 고양이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의 등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애묘인’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다. p 101



고려 말 사대부들의 구심점이었던 이색이 애묘인으로서 보인 모습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이색의 문객을 자처하면서 정몽주나 권근과 가깝게 교류하던 쌍매당 이첨이 집에서 고양이를 몇 마리 길렀는데, 한번은 이 고양이들이 공동으로 새끼에게 젖 먹이는 광경을 보고 시를 지었던 모양이다. 그 시를 읽은 권근은 이첨에게 새끼 가운데 한 마리를 주길 부탁하는 시를 써서 보냈다. 이것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고양이 분양 기록이다. p 103


고려 중기 문인인 이규보에 이어서, 목은 이색까지. 고려말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애묘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극에서 제일 많이 접하는 시대가 바로 고려말, 즉 여말선초인데...당시 고양이에 대한 기록을 남긴 고려말 학자들은 사극에서 정말 많이 보았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애묘인이었을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치 못했다. 



이쯤되면 사극에서 목은 이색, 이인임 같은 당대 사람들이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궁디팡팡하는 장면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랄까. 당대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말이다.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점차 들어난다. 심지어 고양이 중성화, 고양이 입양에 대한 기록까지 나타난다. 물론 고양이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애묘인’으로써 사고판건지, 아니면 단순히 ‘가축’의 의미로 사고팔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 기록에서(선택요략, 이순지) 우리는 조선 초부터 정묘라는 이름으로 고양이의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고양이를 거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이 구매와 고양이 들이기가 서로 구분되어 있어 전자는 ‘매매’이고 후자는 ‘분양’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말과 소도 구매와 들이기가 따로 있는 것으로 미루어 둘은 지금의 ‘계약’과 ‘인수’에 상응하는 단어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거래절차가 있었을 만큼 당시 고양이를 사고파는 일이 활발했던 것이다. 고양이 매매와 중성화의 존재는 고양이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특정한 고양이를 골라 기르고 번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p 115



조선에서 고양이가 지닌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재산을 지켜 주는 동물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에서 재산을 불러오는 동물로, 더 나아가 행운을 가져오는 존자개 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가깝게는 일본의 마네키네코가, 멀리는 유럽의 장화신은 고양이 민담이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p 127



놀라운 사실은 고양이가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재산이 많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도 고양이가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로 추앙받던 고양이지만, 그 반대로 고양이를 이용한 저주행위도 조선에서 왕왕 이루어졌다. 재산을 지켜주는 동물이 저주를 위한 재물로 이용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라니.


한국에서 고양이 저주는 광해군 시기 계축옥사의 일환으로 처음 나타난다.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언급된 역모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의 보모 덕복, 덕복의 조카 김순복, 다시 그 아들 김응벽이 줄줄이 국문장으로 끌려오게 되었는데, 김응벽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충격적인 자백을 토해낸 것이다. p 155



다른 미신도 대체로 쥐와 고양이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도둑’이라는 말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고양이를 쪄서 도둑을 저주한다는 속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귀신이 된 고양이가 쥐로 비유되는 도둑에게 붙어서 괴롭히길 바란 듯 하다. 여기서 “고양이를 찐다”는 문구가 고양이를 산 채로 가마솥에 넣어서 죽인다는 뜻인지, 아니면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구해다가 찐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자라면 고양이 귀신이 도둑보다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에게 먼저 달라붙지 않았을까? p 164


심지어 고양이를 이용한 조선판 짝퉁사건(사기극)도 있었다.


성종 25년에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지방에서 공납품으로 올라온 삵 가죽 사이에 고양이 가죽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삵의 가죽은 선사시대 인류의 사치품이었고, 조선시대 공납품 목록에 들어갈 만큼 가치 있는 물건이었으나, 고양이 가죽은 그렇지 않았다. 1295년에 고려가 몽골에 바친 물건 가운데 노란색 고양이 가죽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서로 비슷한 동물인 삵과 고양이의 가죽이 이토록 가치가 다르다 보니, 지금으로 따지면 ‘조기’를 ‘굴비’로 둔갑시켜 파는 식의 사기가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p 174


한반도 고대국가였던 부여의 특산품의 삵의 가죽이었듯, 조선에서도 삵의 가죽은 사치품으로 인기가 있었나보다. 다만 야생에 사는 삵을 잡기가 어려우니, 고양이 가죽을 삵의 가죽으로 둔갑시키는, 일종의 짝퉁판매가 생겨나곤 했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애묘’를 넘어선, 실학자들의 고양이 관찰에 대한 기록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익의 탐구가 언제나 관찰과 비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익은 고양이의 눈동자가 묘시(5시~7시)와 유시(17시~19시)에 둥글어지고, 오시(11시~13시)와 자시(23시~1시)에 가늘어진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고양이의 동공은 낮이 되면 감지하는 빚을 조절하기 위해 작아지고, 밤이 되면 최대한 많은 및을 감지하기 위해 커진다. 따라서 깊은 밤인 자시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커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익이 그답지 않게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적은 건 밤중에 고양이의 눈을 관찰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밤에 고양이를 관찰하더라도 주위에 등불을 켜 두었을 테고, 따라서 고양이의 눈동자는 일정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p 189


물론 지금처럼 과학적인 관찰까지는 어려웠겠지만, 당대에서는 고양이 눈동자 파악에 대한 획기적인 성과였을 것이다.



거기다 고양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캣닢에 대한 기록까지 있다. 특히 이 캣닙에 대한 기록은 조선을 훌쩍 지나 1100년, 우리 역사로 따지면 고려 초정도의 시기에 중국 송나라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이미 오랫전부터 개박하(캣닢)의 효과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100년경, 송나라의 한자사전인 《비아》에서 처음으로 “박하가 고양이를 취하게 한다”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 정보는 반세기 뒤에 일상생활의 각종 지식을 모은 《분문쇄쇄록》에 다시 한번 수록되었다. 조선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고양이의 특별한 개박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조선 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과 그보다 앞서 편찬된 《의침촬요》는 모두 이 책을 근거로 “고양이가 박하를 먹으면 취한다”라고 기록한다. p 194


고양이가 캣닙을 좋아한다는건 비교적 근대에 들어와 확인된 거라 생각했던 내 편견을 반성한다^_T...


묘마마라는 말은 ‘고양이 마님’ 또는 ‘고양이 엄마’ 정도의 뜻이어서 지금의 캣맘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로 묘마마가 돌본 이 고양이들은 그녀가 집안에서 키운 것이 아니라 도시의 밤거리를 자유롭게 떠돌던 길고양이였다. 이 점은 묘마마의 죽음으 ㄹ애도한 고양이가 집 안에서 밖을 향해 떠난 것이 아니라 집 밖에서 떠났다는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의 가옥은 완벽히 닫힌 공간이 아니었으니, 묘나나는 자신이 사는 곳에 찾아온 길고양이를 융숭히 대접하고 고양이들은 집 안팎을 넘나들면서 그녀와 살았을 것이다. 묘마마의 이야기는 고양이 애호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모습과 함께 고양이로 넘쳐 나던 도시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p 240


더 충격적인건.............캣맘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와 이건 좀 충격. 여튼 이렇게 이땅에서 아주 오랜시간 사랑받던 고양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전만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고양이를 요물로 보고, 가까이오면 멀리 내치고 그랬을까? 내 어릴적 기억속에 있는 할머니들도 고양이를 좋게 보지 않았고 말이다.



고양이, 골칫거리가 되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고양이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를 교정하려 했던 박인의 글에 묘사되는 것 처럼 “닭을 잡아다가 뜯어먹는” 고양이는 때론 “집안사람들이 괴로워하며 회초리로 등을 때리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글에도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를 잡아 죽이려 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녀석들에 대한 적의는 몇몇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p 262


하긴 현대에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이라고 오죽했을까. 나만해도 랜선으로 고양이를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 눈앞에 고양이가 있는건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말이다. 옛날엔 눈 앞에 고양이가 있으면 눈맞춤도 하고 그랬는데 하. 그런데..그도 그럴것이...‘캣맘’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다 한두마리 길고양이가 보이는게 아니라, 캣맘들이 지네집도 아닌 공간에 길고양이들 밥준다고 고양이를 불러 모으면서 시작된 것 같다.



어느새 고양이 천국이 되고, 밤마다 고양이 울부짓고, 특히 고양이 짝찟기 철엔 와.. 그 소음이 소음이 진짜. 그뿐만이 아니다. 캣맘들이 방방곡곡에 있는 길고양이들을 불러모은 덕택에, 겨울마다 내 차 속에 고양이가 들어가진 않았을까 걱정꺼리도 한가득. 아니, 정말 길고양이 밥챙겨주는건 좋은데, 그럴거면 지네집앞에서 해야지 왜 공적인 공간에서 그러는걸까? 심지어 남의 집앞에서도 그러고. 신축아파트에 살면 좀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왠걸? 맘같아서는 면상을 보고싶은 캣맘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고양이밥그릇, 물그릇을 가져다놓았다. 내참, 길고양이 챙기는 것도 상식선에서 챙겨야지. 휴.



결국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일부 몰상식한 인간들이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 그런게 아닐까.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도, 역시나 일부 몰상식한 개주인때문이고. 정말 개든 고양이든 사랑하는건 좋은데, 제발 상식선에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조선 후기 고양이를 배척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단순히 개체 수가 증가해서만이 아니었다. 인구가 밀집되며 도시라는 하나의 거대한 소비 주체가 등장한 뒤 창고의 쌀을 갉아먹는 쥐의 심각성도, 그 쥐를 잡아 주는 고양이에게 느끼는 고마움의 크기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중한 노동의 산물이자 생계였던 농촌에서와 달리 도시에서 쌀이란 돈을 주고 사면 그만인 상품이었다. p 268



여러 요소가 중첩되면서 고양이는 한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사실조차 잊혀진 채 사람들 곁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심지어 개항기에 이르면 단순한 도둑을 넘어 요물이자 괴물로까지 인식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고양이 사랑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된다. p 270


흠흠.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캣맘으로 인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현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니, 이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양이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본디 고양이는 농촌에서 쌀을 갉아먹는 쥐를 잡기 위해 들여오기 시작한 동물이다. 헌데 도시화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촌이 점점 쇠퇴했다. 반면에 도시화로 인한 상공업이 발달하며, 쌀을 돈주고 사먹는 시대가 왔다. 힘들게 농사지어서 쌀을 얻는게 아닌, 손쉽게 돈으로 쌀을 사는 시대. 그런 시대가 되니 쌀을 갉아먹는 쥐가 있더라도, 굳이 힘들게 쥐를 잡는대신 쌀을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고양이가 필요 없어졌다는 뭐 그런 이야기랄까.



참 다행인 사실은 우리 역사속의 고양이는 서양에 비하면 잔혹한 참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ex 마녀사냥;고양이는 마녀의 종). 다만 서양처럼 시대에 따라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 가죽을 얻기위한 일종의 사냥동물에서, 농사를 망치는 쥐를 잡기위한 보안책으로, 이후 무료함을 다스리기 위한 반려동물의 위치까지 올랐다가, 도시화로 인해 다시 냉대받는 위해동물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고양이는 역사상 수많은 집사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엄청한 혐오를 받고 있기도 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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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는 강아지와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듯 합니다 ㅎㅎ 저도 강아지를 키우지만, 유투브론 고양이를 보는 랜선 집사랍니다 ~
 
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1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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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으로 임용한 교수님을 늠나 좋아하는지라,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폐지되었을 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더군다나 토전사 폐지 이유가 마땅치 않았고, 폐지될까 전전긍긍했던 전 정권도 아닌 현 정권에서 폐지된 것이 정말 어이가 없었더랬다. 토전사는 전 세계의 전쟁사를 돌아보면서 ‘리더’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토전사를 그렇게 폐지해놓고 매주 주말 마다 토전사 재방 틀어놓는 국방TV 진짜-_-... 뿡이다. 흠흠.




이 책은 조선을 유린했던 두개의 전쟁 중 하나인 #병자호란 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하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드라마나 영화로도 자주 다뤄졌던 이야기인지라, 행여나 주제가 새롭지 않다고 이 책을 외면하는 독자들이 있을까 걱정이다. 이 책은 그저 ‘병자호란’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게 아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대 역사서에서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서술했는지, 전쟁 상황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전쟁 준비가 되있긴 했던 것인지…. 거기다 제일 중요한, 당시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이 책의 성격을 말하자면, 뭐라고해야할까? 대충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집필했던 《징비록》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했던 이유는, 더 이상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훗날 환란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슬프게도 이 《징비록》은 조선에서는 널리 읽히지 못했고, 임진왜란이 끝난지 채 50년도 안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외침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반복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조선같은 왕정시대가 아닌, 공화정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징비록》이 널리 읽히지 않아, 동일한 이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 처럼 말이다. 그때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더하면 더했지 과거보다 더 빠르게 세계 정세가 돌아가고 있다. 해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대통령)의 자질과 사상, 행동력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곧 있으면 대선이 코앞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를,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작금의 대선후보들 행태를 보면 역대급 비호감에, 정책은 사라졌고, 네거티브 천국이지만.



여튼 그나마라도 제대로 된 리더를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깨달아야 한다. 어떠한 리더가 국민에게 좋은 리더인지를.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약 40년간 조선은 더욱 망가져갔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 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하는 자도 없는 저들의 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 정복할 수는 없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p 035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 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p 045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정권에서는 당시 세력이 커지던 여진족 누르하치를 만나고 돌아왔다. 하지만 여진족을 만나고 돌아온 신충일은, 불과 십년도 채 지나기 전 일본에 다녀왔던 조선의 사신단과 다를바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얕보았던 조선은 그렇게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그렇게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난 뒤, 이번엔 여진족으로 갔던 조선의 사신들은 일본에 갔던 그때처럼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조선의 국방력이 튼튼해서 여진족을 무시한거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역시도 아니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 7년간의 전쟁에서 배운 것이 없었다. 류성룡이나 허균같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말이다. 하지만 권력은 언제나 소수가 아닌 다수에 있다.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 조차도 조선의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혁할 수 없었다. 광해군이 아무리 왕이었고 북인의 힘을 믿고 있었다 한들, 전체적인 권력은 서인들이 쥐고 있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7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조선은 2백년간의 평화에 젖어있어서 ‘국방력 강화’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의 건국은 분명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건국 후 이백년간 조선은 무신을 무시하고 문신을 우대하였다. 점점 무신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그에 따른 국방력도 약화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양반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여러 편법을 동원했다.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은 군역이 면제되기에, 평생 과거를 준비한다는 미명하게 군역을 회피했다. 노비들도 군역이 면제되기에, 가짜 노비행세를 하는 양반들도 허다했다. 무엇보다, 전쟁 시 군인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평생 군인생활을 했던 무신이 아닌, 글자만 주구장창 읽는 문신들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능양군이 왕이되었으니 그가 바로 인조다. 그나마 다행인건 인조 재위기에 ‘국방력 강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권력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서인계열 인사들은 3년 전에 사망한 남한산성 수축과 수어청 건립의 공로자 이귀에게 찬사를 보냈다. 최초로 남한산성의 가치를 발견하고, 중부지방의 거점으로 삼자고 건의한 이는 강골형 무인 이서였다.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이귀가 이서의 건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강단있게 밀어붙였지만, 산성 축조 과정에서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 뒷담화의 주도자들이 산성에 피란해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p 185


반정공신이었던 이귀, 그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수 많은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전쟁에 대비해 물자를 비축하고, 수어청의 병사들도 엄선해 선발했다. 이귀는 죽기전까지 남한산성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남한산성에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해두었던 건, 그가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인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이었는지, 군 지휘체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슬픈 사실은 권력을 잡고 있던 공신세력 중에는 이귀 같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김류뿐 아니라 비변사 대신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성,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문제를 알면서도 비변사 대신들이 국왕과 정치인의 눈치를 보느라 방치한 것일까? 그냥 총체적인 무능일까? 누구도 단 한마디의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p 197



이 나라의 전쟁은 4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바뀐 건 조총 뿐이다. 군복은 커녕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병사들, 불안감에 병사들만 들쑤시고 다니는 장교들, 모두가 아마추어인 장병들…. p 288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들 태반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징비를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당시 왕이었던 선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히려 ‘명’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는 결국 40년만에 반복되고 만다.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인조는 3월 3일 후금의 사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의식을 거행하고 후금과 조선이 형과 아우가 된다는 맹약을 한다. 유일한 성과라면 후금이 명과 단절하라는 조건을 철회한 것이다. p 079


청나라, 그러니까 후금이 조선으로 처들어온 건 두 번이었다. 첫번째가 정묘호란, 두번째가 병자호란이다. 두 호란 사이에는 약 9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에 패배했으며,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후금 입장에선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고, 실제로 조선에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만약 당시 정세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았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정세를 읽지 못했다. 후금에 아주 제대로 뒤통수를 가격했다. 스스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조선의 왕이 내가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정묘호란 때 맺은 약속을 지켰다. 오히려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도 나를 비난하다니 어이가 없다. 그러나 좋다. 교역을 끊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건 당신들의 자유이고 선택이다. 난 아쉬울 것 없다.”



척화파는 이런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정의라면 반드시 상대에게 강요해야 하고, 몸에 좋은 음식은 상대방이 싫어하더라도 강제로 먹여야 한다. 그게 성리학의 정의관이고, 사대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하다 보니 척화파는 당시 홍타이지의 답변을 허세가 들통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세개 나가니 저들도 꼼짝 못한다고 보았다. p 105


후금의 홍타이지는 황당했을 것이다. 군사력도 얼마 안되는 나라가, 갑자기 뒤통수를 쳐대니 말이다. 하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최우선 목표는 명나라를 쳐부수는 것이였고, 조선은 후금을 칠 힘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당황한건 조선의 사대부들, 정확히는 척화론자였다. 무릇 조선의 양반들은 본인들과 논리가 다르면, 무슨일을 쓰더라도 본인들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다가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던게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정묘호란 패전 이유를, 명분론만 외치던 자신들에게선 찾지 않고 외려 주화론자들 때문에 민심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인조는 비변사에 이런 비장한 메세지를 보냈다.


“이기도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의 병사들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 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 만약 오랑캐가 침략해오면 과인이 오랑캐의 앞길에 진주하여 장사를 격려하고 평안도에 사는 군인과 백성을 위로하겠노라” p 103



인조도 뒤따라 즉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사복시(궁중의 가마와 말을 관장하는 관청) 마구간에 말은 있는데,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인 말구종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조선은 체면이 중요한 양반사회였다. 말구종을 구하지 못한 인조는 정오까지도 출발하지 못했다. 보다 못핸 대신 하나가 간신히 사간원의 하인 2명을 데리고 와서 말고삐를 잡게 했다. p 175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인조는 또 도망갔다. 겉으로는 본인이 앞장서 나서겠다고 하던 사람이다. 그렇게 인조는 재위기간 중 무려 세 번이나 궁을 버린 임금이 되었다(첫번째 이괄의 난/공주, 두번째 정묘호란/강화, 세번째 병자호란/남한산성). 선조도 고종도 궁을 한 번밖에 버리지 않았는데, 인조는 무려 세 번이다. 세 번을 모두 궁을 버렸다. 궁을 버렸다는 건, 백성들을 버리고 오롯이 본인의 안위만을 걱정하여 도망갔다는 말과 같다.



그나마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피난길에 웃지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다른 왕실사람들을 먼저 강화로 피난보냈다. 본인도 뒤따라 강화로 가려고 했으나, 말 고삐를 잡아줄 하인이 없어서 (^^) 피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강화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 때, 조선에 리더는 없었다.


인조는 책임져야 할 일은 책임지는 리더였다. 일반적인 행정에 관해서는 그랬다. 하지만 조금만 수위가 높아지면, 절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결정도 회피했다. p 205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화의를 하든 전투를 하든 전하가 결정을 내리셔야지요. 전하가 이러시니 관료들이 별것도 아닌 일까지 전부 결재를 받는다고 찾아옵니다. 매사가 의논만 하다가 끝나고, 장수들은 매일 날씨 핑계를 대고, 국가의 중대사와 군사비밀을 하인과 심부름꾼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른 비판이었지만 인조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인조의 대답은 기록이 없다. 회의가 끝나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p 269



조선 왕이 여진족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 충격은 이해가 가지만 책임 있는 리더라면 항복 협상 중 산성에 있는 군인과 백성의 철수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명분 논쟁만 하다 이 문제가 쏙 빠졌다. 질서정연하게 산성으로 들어와 남문을 사수했던 수원 병사들은 성을 나서자마자 절반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p 358


모름지기 한 나라의 임금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다. 신하들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한다. 또한 국제정세에 항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공과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하고, 책임질 때는 책임질 줄 알아야하고, 치하를 할땐 해야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당시 조선에는 그런 리더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런 리더가 없어서 왜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는데, 불과 40년도 안되어 같은 이유로 되놈들에게 국토가 유린되었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았고, 그 댓가는 백성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중시한 건 ‘명분’이었다. 그 명분으로 본인이 왕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무늬만 명분이다. 인조가 중시한 명분은 입맛에 따라 달랐다. 뿐만이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선, 다른 정치가들과 기싸움을 할 수 있는 노련한 정치감각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누군가를 믿어야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내쳐야한다. 하지만 인조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역시나 반정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정이란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서 왕을 갈아치우는 일인데, 본인이 왕이 된 이유가 그 신하들 덕분이었다. 허나 그 신하들이 언제 자기의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서 믿어야할 사람을 믿지 않았고,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었다. 적어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주변엔 인재들이 있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조는 그 인재를 선택하는 안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재를 보는 눈 마저도 없었다.



그 결과가 정묘호란, 병자호란, 아들인 소현세자의 죽음, 손자인 석철/석린의 죽음, 며느리 강빈의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인조였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명분론에 함몰된 척화파


조선의 리더였던 인조만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인조 주변을 둘러싼 척화파 역시 부패할대로 부패한 암세포였다. 


홍타이지가 거의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명의 망조, 천명이 명을 떠나 후금으로 왔다는 의견에 대해서 조선은 시치미로 일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편지에 대놓고 쓰지는 못했지만 척화파의 논리는 한결 같았다. 부모가 범죄자에 주정꾼이라 해도 부모는 부모다.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할뿐이다. (……) 이후 후금은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가 된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정한다. p 142



《산성일기》는 이 패전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이것이 삼전도의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의 절반은 왜곡이다. 병사들은 이 패전의 원인이 아마추어 제갈량들에게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척화파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군사작전에 정치가 개입하면 없던 사단도 벌어진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데, 근절하기가 어렵다. p 280



김상헌이 냉철한 반격을 하자, 인조의 사위로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신의성까지 뛰어들어 분위기를 망친다.


“비단과 금은보화를 줄 수도 있고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p 323


척화파는 정묘호란 때부터 주구장창 ‘명분’을 주장했다. 황제국은 오로지 명나라 하나 뿐이며, 조선은 명을 배신하면 안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그들은 입으로만 싸웠다. 백성들이 후금 군화에 짓밟혀도 그들은 끝까지 ‘대명의리’를 주장하며, 후금과 싸우기를 주창했다. 



이쯤되면 궁금하다. 척화파라고 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유학을 배운 성리학자다. 유학은 모름지기 인본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백성들의 죽음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잘난 ‘명나라를 향한 사대’를 위해서. 이쯤되면 그들이 정말 유학자가 맞는것인가? 백성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주기 위한 공맹의 말은 그렇게 소리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은 그저 본인들 입맛에 맞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에 그쳤다는 이야기다.


척화파에게 주화파는 추구하는 정책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양심과 정의감이 결여되고 무능력을 넘어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축이었다. 독전어사들이 손에 손잡고 성벽에 올라 참견을 하고, 무장과 다투고, 매일같이 왕에게 달려가 제갈량 흉내를 낸 데에는 공신 그룹과 주화파에 대한 음모론적 불신이 가득했던 탓도 있었다. p 366


임진왜란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던 (동인)학봉 김성일과 (서인)우송당 황윤길. 이유야 어찌되었든 동인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보고하였고, 서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거라고 보고하였다. 결과론적으로 서인 황윤길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은 본인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 그는 1차 진주대첩을 진두지위하였다. 그렇게 죽을때까지 앞장서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후 40년도 채 지나지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할거라던 서인세력은 광해군 재위기에도 끝까지 권력을 잡았고, 광해가 본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능양군을 끌여들어 반정에 성공하여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인조다. 반정공신이 된 서인들중 강경파들이 대거 척화론자였다. 척화론과 반대로 청과 화친을 하여, 안정을 도모하길 이야기했던 주화론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화론자들은 인조를 포함한 대다수 척화론자의 명분론에 이길수가 없었다. 결국 전쟁은 터졌고, 조선은 유린되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발발 후 척화론자들은 학봉 김성일처럼 본인들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다했을까? 슬프게도 아니었다. 그들은 병자호란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명분론’을 내세우기 바빴다. 그렇게 입싸움으로 질질 끌다가 조선은 항복했다. 



병자호란, 그 후 북벌과 명에 대한 사대 그리고 정신승리


인조는 임시궁에서, 병사들은 성벽에서, 충청사단의 병사들은 차디찬 땅속에서 1637년 신년을 맞았다. 행궁에서는 늘 하던대로 망궐례를 올렸다. 명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린 것이다. 명이 구원병을 보내준다거나 하는 기대는 아예 접었지만 그래도 망궐례는 했다. p 315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기 바로 직전, 인조는 행궁에서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 때의 명나라는 이미 망해가던 나라였다. 명나라의 황제는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환관들이 쥐고있었던, 망국행 급행열차를 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인조를 비롯한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본인들이 모신 황제국 명나라를 울부짖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었다(삼배고구두례). 그렇게 조선은 후금, 아니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봐도 예견된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실제로 조선은 날이 갈수록 명분론이 강해졌다. 공식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사적 문서, 묘비 등에는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계속 사용했다. 명의 연호는 1644년 숭정 17년으로 끝나는데, 조선에서는 그 다음 해를 숭정 후 원년으로 삼았다. 새로운 연호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나중에 거의 종교적 근본주의처럼 된다. 예전에 필자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 바위에 쓴 낙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대명의 유민이라고 적어놓았다. p 368


그렇게 대패한 전쟁을 두고, 인조와 사대부들은 나라를 개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징비를 외치던 류성룡같은 인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신승리의 끝을 달리기 시작했다. 실력으로는 청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속으로 욕하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창덕궁 으슥한 곳에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대보단’을 건립했다. 청나라에 걸리면 끝장이기에, 정말로 찾기 어렵게 궁궐 저 으슥한 곳에 건립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을 설립했다. 지금의 충청도 괴산에 위치한 ‘만동묘’가 그것이다. 심지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죽을 때 세우는 비석의 첫머리를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으로 시작했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명나라의 신하 조선’,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뜻이다. 



인조를 시작으로 조선의 왕들과, 조선이 망할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던 서인들은 그렇게 겉으로는 청에게 조아리면서, 속으로는 이미 망한 나라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공고히 해나갔다. 그들이 명에 대한 사대에 공을 들이던 그 오랜 시간동안, 그들에게 조선의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의 이야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될 경우,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국민들의 삶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과거와 달리 현대는 리더를 우리의 손으로 뽑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손으로 뽑는 리더라고 전부 올바른 리더일 수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선 방식은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닌, ‘차악’을 뽑는 방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해야하는 우리로써는 그나마 나은 리더가 누구인지 고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잘못된 리더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아야하고, 거기서 배워야한다.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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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28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토크멘터리 좋아하는 일인입니다. 아쉽죠. 도대체 왜?! 황금알을 낳은 거위를 죽여버린걸까요. ~ 선조 인조. 신하도 버리고 백성도 버리고 ㅠㅠ전 전쟁후에 자기 결혼부터 챙긴 선조가 쪼금 더 한 수 위가 아닐까 합니다. ㅠㅠ 피로님 말씀처럼 그 때 조선엔 리더가 없었던 거 같아요 ~
 
흔들림 없는 역사인식 - 조선인 강제 연행·원폭 피해자의 편에 서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지음, 전은옥 옮김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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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모든 시간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인과 중국인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일본인인 그는 일본의 식민지배의 피해를 당한 그들을 위해, 자국 일본과 맞섰다.

이 책은 내가 서평을 쓰는 것보다, 저자의 한마디 한마디를 옮겨적는게 나을 것 같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물리적 피해는 똑같을지라도, 조선인의 피폭은 (일본인의 그것과) 질적인 차원에서 다르다”고 지적한 바 있따. 여기서 “질적인 차이”란 “일본인 피폭자는 침략전쟁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입장을 비껴갈 수 없지만, 조선인 피폭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없는데 원폭 지옥에까지 내던져진 완전한 피해자다”라는 오카 씨의 말 속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p 019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따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드으이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

과거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어야할 한국 정부가 입을 닫고있을 그 때, 일본인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 자국 일본을 향해 끝없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정부는 재일동포의 피해배상을 위해서 일본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적어도 국정농단이 있던 전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면 곧 임기가 끝나는 현 정부는? 글쎄, 역시나 전 정부와 다를바가 없다고 느껴진다. 난 아직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농락한 윤미향을 감싼 현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는 동안 현정부, 전정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더 슬픈건 곧 들어서게될 새 정부에도 큰 기대감이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선 후보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적어도 그들은... 일본에 피해를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인물들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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