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배우는 조선 왕실의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5
우용곡 지음, 전인혁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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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있는 역사만화책이라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랑 35년(일제강점기) 세트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역사만화책이 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책 제목은 『만화로 배우는 조선왕실의 신화』. 조선왕조실록이 아니고, 그 외 조선사도 아니고, 무려 ‘신화’!!!!!! 알고 보니 이 만화책은 정확히는 ‘교양툰’으로 네이버 베도에도 올랐던 일종의 웹툰이었다...ㄷㄷㄷㄷㄷ



생각해보면 과거에 네이버 웹툰에서 무적핑크님의 ‘조선왕조실톡’을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었다. 이런 역사웹툰이 많이 나온다면 청소년들도 역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물론 박시백 화백님의 조선왕조실록도 어마어마한 역사만화지만, 아무래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웹툰과는 좀 무게감이 다르다고나 할까? 박시백 화백님의 조선왕조실록은 정통역사책같다면, 무적핑크님의 역사웹툰이나 이 책 우용곡님의 『조선왕실의 신화』는 정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또 가볍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 지장없는 상에서 뿌려진 MSG덕분에 역사이야기가 은근하게 스며든다. 고로 역사를 ‘암기’가 아닌, ‘이해’하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라고 해야하나? 진심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이만한 역사책이 없다고나 할까? 아,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성인들에게도 완전 제격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실의 ‘신화’를 다루고있다. 정확히는 조선에서 믿었던 신, 제사에 대한 이야기다. 서점에 널리고 널린 그런 조선사(사회,정치,실록 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남의 나라 신화는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예컨데 그리스/로마,북유럽 등) 우리나라의 신은 잘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리나라의 신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신이나 외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휴. 아니 뭐, 물론 우리나라에서 모시는 신도 태반이 중국신화에서 건너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우리의 신이 되지 않았나(그리스 신들이 로마신이 된 것 처럼)!



고로 모름지기 자국의 신을 먼저 알고난뒤에 남의나라 신화를 읽어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다. 



1) 신화의 탄생 - 길례와 사전: 의례를 통한 통치의 실현


2) 국토의 신 국사, 곡식의 신 국직 - 사직제 친행의 정치적 성격


3) 토지의 신 후토 구룡씨 - 후토신의 신앙 변쳔과정


4) 오곡의 신 후직 희기 - 후직 탄생신화 깊이 읽기


5) 유교의 귀신 - 유교에도 내세관이 있는 걸까?


6) 신이 된 제왕들, 종묘 정전 -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의 표상, 종묘


7) 해동 육룡이 나르샤, 사대고조 - 영영전에 모셔진 사연 많은 임금들


8) 국가와 백성의 수호신, 공신과 칠사 - 종묘 속 또 다른 사당 공민왕 신당


9) 농사의 신 신농씨 - 설렁탕은 선농제에서 유래한 것일까?


10) 양잠의 신 서릉씨 - 성세의 재현을 꿈꾼 영조, 정순왕후의 친잠례를 기획하다


11) 날씨의 신 풍운뇌우 - 기우의례 속에 나타난 주술성과 도덕성


12) 명산대천과 성황신 - 유교와 무속이 충돌한 종교 권력의 현장, 성황사


13) 악 해 독 - 산천 제례의 국가 제례 편입과 운영


14) 우사단의 여섯 신 - 기우제의 현장, 우사단


15) 문선왕과 제자들 - 소상으로 모셔진 공자를 대하는 어느 유학자의 시선


16) 동국 18현 - 도통과 문묘종사: 조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17) 단군왕검 - 민족의 시조 단군 인식의 발전상


18) 문명의 상징, 기자조선 - 인류 보편 문명의 전수자, 기자


19) 역대 시조묘 - 전국 시조를 기억하는 공간, 역대 시조묘


20) 관우와 전쟁의 신 - 관왕묘 제례와 ‘충’의 강조


21) 영성과 노인성 - 별에 대한 제사, 영성제와 노인성제


22) 말의 신 - 마제와 둑제의 여러 모습


23) 여제와무사귀신 - 재난을 방지하던 제사, 여제


24) 대한제국의 신들 - 미완의 제국과 함께 미완으로 남은 예서, 《대한예전》


 위 목차에서 보듯 조선왕실에서는 정말 많은 신을 모셨다. 물론!! 이 책에는 흔한 ‘창세신화’같은 건 없다. 책 제목 그대로 ‘조선왕실’, 그러니까 이미 중세에 들어선 조선에서 모시던 신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또 유교국가인지라, 우리 무속신앙에 대한 신들이 모두 나오는 것도 아니다. 제주도에서 모시는 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옛날 가택신들도 없다. 하지만 없는 신들은 일부일뿐, 이 책에서 알려주는 ‘조선’의 신들은 정말 어마무시하게 많다. 특히 중국신화를 즐겨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친숙한 신들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는 건 함정!



유교의 나라 조선, 조선 왕실에서는 여러 신을 모시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유교는 무신론이 아니었기에 유교를 받아들인 국가는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다만 같은 유교를 받아들였어도 지리적 위치나 국제 외교 관계에 따라서 모시는 신이 모두 달랐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 혹은 ‘왕조’의 계급에 따라 모실 수 있는 신이 달라지는 유교의 특성 때문이었다. 조선의 경우 개국 초기부터 조선식 사전(祀典)채계를 마련하여 어떤 신을 모실지 결정했고 (《세종실록》오례의, 《경국대전》예전) 그 결과 우리나라의 위인부터 중국 고사 속 성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과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p 011~ 014



 


 


유교에서 제사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행하는 것이었다. 즉 국왕이 종묘와 사직을 비롯해 국내외 각종 천신, 지기, 인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조선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위해 ‘예(禮)’로써 행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조선시대의 모든 제사는 국왕이 거행하는 국가 제례뿐만 아니라 지방관들이 행하는 주현제, 일반 사대부 및 서민이 집에서 행하는 가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를 위하여 지내는 행위라는 부분이 지속적으로 강조됐다. (……) 그러나 성리학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전통 제사를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음사’로 규정하자, 사전에서 삭제되거나 유교적 제사의식으로 대체되는 제사도 더러 생겨났다. p 024


유교에는 귀신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무속과 불교를 탄압하던 유교였기에, 난 은연중에 유교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 물론 내가 생각하는 귀신은 무속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악한 혼령이나, 빙의 뭐 이런 의미이다. 그도 그럴것이 유교는 무속이나 불교, 기독교 처럼 특정한 ‘신’을 믿는 종교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유학이라는 ‘학문’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그 학문을 토대로 통치하는 왕조가 많아지다보니 어느새 유학이 유교라는 종교가 되어버렸다고 해야하나. 여튼 참 독특한 학문이자 종교이다. 음... 종교라고 하는게 맞긴 맞는건가.


유교의 귀신은 여러가지 뜻을 포함하는데, 그 중 첫번째 의미는 음양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쓰인다. 둘째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일종의 혼백 개념에서의 귀신이다. 셋째는 제사를 지낼 때 존재 영역에 따라 천신, 지기, 인귀로 구분하는 개념에서의 귀신이다. p 076


유교에서 말하는 ‘귀신’의 의미는 그들의 학문적 이해를 위해 정의된 개념이다. 그 귀신 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존재를 ‘천신, 지기, 인귀’로 구분한다 


※명나라 때 저서 《삼재도회》에 따른 정의※


- 태양, 달, 별, 날씨 등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신: 천신(天神)


- 땅의 기운 혹은 땅의 신: 지기(地祈)


- 자기 자신과 가문과 생명적 근원이 되는 조상신: 인귀(人鬼)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천신은 말그대로 하늘신, 지기는 땅에 비는 것, 인귀는 조상귀신(...) 뭐 이렇다.




 


 



조선에서는 천신, 지기, 인귀에게 제사를 지냈다. 천신과 지기에게 제사를 지낸 주된 이유는 ‘농사’였고, 인귀에게 제사를 지낸 주된 이유는 ‘조상’이기 때문에. 유교에서 농사는 사람의 생업과 관련되어 아주 중요했고, 조상도 ‘효’를 다하는 주체로써 중요했다.



실제로 유교국가 조선에선 직업의 귀천을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제일로 쳤고, 그 다음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교류 방법 가운데 유교에서 가장 애용된 것이 바로 상례와 제례이다. 살아있는 자의 집을 양택이라 하는데 반해 죽은 자의 무덤을 음택이라 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동질적인 ‘집’임에는 틀림없다. 부부를 합장하거나 자손이 부모의 무덤 근처에 잇달아 묻히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죽은 자들의 공동생활이 지속된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그래서 집마다 사당이 있고 나라에도 사당이 있어 가묘나 종묘로 불리며 유교의 성전으로 받들여졌다. p 085


농사의 신, 신농씨


소는 오래전부터 농경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되어왔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신화 속 인물이 있으니 바로 최초로 농사법을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염제 신농씨이다. p 134



신농은 먼저 불을 발명하여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주변의 나무로 농기구를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굶지않도록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그 덕분에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 잉여 생산물을 팔 수 있도록 시장을 열어주었고, 혼인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마을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걸 주워 먹고 병에 걸려서 죽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농은 100가지 풀을 직접 먹어가며 약초와 독초를 가려냈다. (……) 비로소 신농은 동양 문화권에서 ‘농사의 신’이자 ‘불의 신’ 겸 ‘의학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p 138~141


중국신화를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한 신, 염제 신농씨. 농업을 중시하는 조선에서 소의 머리를 하고, 농사법을 발명했다고 하는 염제 신농씨는 핫하디 핫한 신이었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때부터 신농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신농은 조선시대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여 그 이름을 과시했으니, 민간에서는 영남성주굿이나 평산소놀음굿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왕실에서는 후직 희기와 함께 농사의 신으로서 선농단에 모셔졌다. 오늘날 선농단 근처에는 한약재를 전문으로 파는 약령시작이 있는데 의학의 신 신농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다. p 142~143


서울에서는 선농단에서 염제 신농의 제사를 지낼때 만든 탕이 설렁탕의 유래라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


유일하게 왕비가 진행하는 제사, 선잠례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 그 잠실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나오는 종착역. 바로 조선의 ‘선잠례/친잠례’다.


양잠이란 누에나방을 사육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일을 의미한다. 고치에서 빼낸 시을 가공하면 비단을 만들 수 있었으니, 비단은 옛날부터 삼베, 모시, 목면과 함께 옷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통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옷감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양잠을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양잠의 신 서릉씨이다. p 149~150


사극에서도 종종보았던 ‘친잠례’. 양잠에 대한 제사란 것 까지는 알았는데, 제사를 받는 신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냥 하늘에다 ’누에생산 잘하게 해주세요‘ 정도로 생각했을 뿐. 하하하. 친잠례때 제를 받는 사람은 양잠의 신 서릉씨이다. 참고로 서릉씨는 황제 헌원의 아내이기도 하다.


조선에서는 선잠단이라는 공간에서 매년 3월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선잠제례는 조선 왕실의 제사 중 유일하게 왕비가 주도하는 제사였고,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에 내잠실을 마련하여 왕비와 궁궐 안 여성들이 뽕잎을 따는 의식인 친잠례를 행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각지에 잠실을 만들어서 누에농사를 관리했다. 현재에도 ‘잠실’이라는 지명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p 158



(조선)왕실 여성이 국가 제례를 직접 주관한 사례는 정순왕후의 선잠례 이전까지 단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국가 제례참여는 원칙적으로 차단돼 있었고, 1683년(숙종22) 왕후와 세자빈이 종묘를 알현하는 제도를 시행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친잠을 시행할 때 굳이 경복궁에 선잠단과 채상단을 같이 만들어 왕후가 제사를 주관하고 친잠 역시 주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상징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p 162


조금 놀랐던 사실은 수 많은 사극으로 인해 조선의 왕비가 당연히 친잠례를 주관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록에 남은 조선왕비의 친잠례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였다는 점. 생각해보면 내가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친잠례는 중국사극(...) 이었고, 한국 사극에서는 최근에 종영한 ‘옷소매 붉은 끝동’ 이었다. 옷소매에서 친잠례를 주관한 사람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였고.



중국에서는 선잠례와 친잠례가 황후가 하는 중요 제사였지만, 조선에서는 선잠과 친잠이 구분되었었다고 한다. 심지어 고려 때 선잠제는 신하가 시행했기에, 친잠례는 거행하지도 않았다고. 고려때의 선례가 이러한데다, 조선 성종때 시행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오랫동안 친잠례는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영조 때 부활! 영조 때 친잠례가 부활한 건 단순히 잊혀졌던 양잠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라기 보단, 정치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중전인 정순왕후와 세손(정조)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양자의 화합을 도모, 백성을 위해 시행한다는 명분이었달까?


유교국가에서 살아남은 토속신앙, 성황신 및 산신


개인적으로 내가 궁금해하는 토속신앙(민간신앙/무속신앙)에 대한 이야기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성황신이나 산신, 용왕신이 있었고, 당산나무가 있었다. 각 개개인의 가정 안에는 가택신도 있었다. 이 책에서 가택신은 언급되지 않지만, 성황신을 비롯한 산신들이 언급된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대부분은 산과 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은 굉장히 한정적이었으니, 전근대만 해도 마을 이외의 지역은 미지의 영역이자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마을의 성황신에게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며 제사를 지냈고,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마을 밖의 산천신에게도 안녕을 기원하였다. p 177~178



 


조선은 국내의 이름있는 산과 강을 골라 제사를 지냈다. 특별히 중요한 19개의 산천을 선정해 ‘명산대천’이라 칭하고, 왕실에서는 이들을 소사의 예법으로 모셨다. p 180



이런 신들은 먼 옛날의 애니미즘 신앙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한국에서는 ‘산신신앙’과 ‘용왕신앙’으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산천신에 대한 제사는 지역마다 산발적으로 행해졌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음사로 취급되어 크게 위축되었다가, 나라에서 산천신을 유교식으로 관리하면서 명산대천의 제사가 정비된 것이다. 또한 성황신을 모시는 제사도 유교식으로 정비했는데, 원래 마을의 성황신들은 ‘인격신’으로써 그 지역의 유력 씨족이나 조상신의 성격을 띠었지만, 유교화를 거치면서 인격신적 요소가 사라지고 마을을 수호하는 기능적 개념만 남게 되었다. p 182~184


조선왕실에선 제사의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서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했다. 종묘나 사직은 ‘대사’, 신농이나 선농제례는 ‘중사’, 산신이나 수신제는 ‘소사’였다. 



조선왕조는 건국직후부터 성황신에 대한 사전을 마련하고 국가 제례에 편입해 제도화하고자 했다. 이는 지방 각 주, 부, 군, 현과 같은 행정 단위마다 성황사를 두어 지방관을 중심으로 제사를 거행하게 한 데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법제적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표면적인 모습이고, 실제 민간에서는 관이 주도하는 성황제와 별도로 고려시대 이래 무속이나 산신신앙과 융합한 성황신앙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 떄문에 유학자들은 민간 성황제 금지책을 마련하고자 ‘부정한 제사’라는 낙인을 민간 성황제에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p 187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유교적 예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간을 무력으로, 또 사상적으로 공격하면서 무속과 충돌했다. 어쩌면 유교과 예전과 같은 위상을 가지지 못하게 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일부 동제나 무속에 유교적 제례 의식의 단면이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p 190


유교국가 였던 조선에서는 민간신앙이었던 성황제나 산신제를 유교식으로 변경하고자 했고, 법제화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법과 실제는 다른 법. 특히 유학자들은 산신제나 성황제 같은 전통신앙(무속신앙)을 ‘음사’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무속뿐만이 아니다. 유학자 및 조선왕실은 불교도 탄압했다. 조선왕실에서는 사찰에 종이를 만드는 노역을 강제부과하였고, 유학자들은 스님들을 쫓아내고 사찰을 강제로 허물어서 서원을 짓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의 터는 기존 ‘숙수사’라는 사찰이었으나, 유학자들이 스님들을 쫓아내고 사찰을 허문뒤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이 백운동 서원은 최초로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이다. 이는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도래했을 당시, 한반도의 전통신앙을 이해하고 융합, 발전한 것과는 매우 대비된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에는 ...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현재 제대로 된 무속의 제사나 굿은 무형문화재로써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거나, 제주도에 남아있는 토속신앙 정도다. 


조선에 뿌리깊게 박힌 유교와 문선왕 공자


유교국가 조선, 그 ‘유교’를 창시한 사람이 바로 공자다. 물론 공자가 ‘유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유학’이라는 학문의 시조라고 해야할까? 여튼 공자는 본인이 깨우친 것을 이루기 위해 고대 중국의 여러나라를 돌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신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훗날 그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받들어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동남아시아 모든 곳을 유교국가로 만들어버렸다.


공자는 유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않고 등장하는데, 중국의 왕조들이 공자를 왕로 추존하여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자 공자에 대한 신앙이 유교와 함께 동북아시아 전체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p 218


그가 받은 시호는 총 4개다. 한나라 때는 ‘나선공’, 당나라 때는 ‘문선왕’, 송나라 때는 ‘지성문성왕’, 원나라 때는 ‘대성지성문성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보통 문성왕이라고 칭하는건, 공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죽은 뒤 왕이 되었다. 




 


 


비록 공자 자신이 살아생전에 본인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공자의 사상은 그가 남긴 저서(논어)와 제자들의 활동 덕분에 수많은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유가라고 불리는 유학자 집단은 공자의 등장에 힘입어 체계화 되었고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공자에 대한 국가 제사도 본격적으로 시장되었는데, 이후 공자에 대한 제사를 석전이라고 불렀으며, 유교를 받아들인 국가들은 각자 문묘를 설치하고 석전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삼국시대(신라)부터 공자와 제자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대성전과 각 지방의 항교마다 문묘를 설치하고, 공자와 여러 유학자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p 223~224


그렇다면 조선은 공자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받는 나라일까? 음, 애매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은 공자가 아닌 그의 제자 중에 제자 중에 제자 뭐 이렇게 거슬러 내려온 제자 ‘주자’가 자기식의로 정의한 학문을 받아들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주자학을 열렬히 신봉한 자가 조선에서 ‘송자’라 일컬어지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었다. 조선 중기부터 권력을 잡은건 서인(이후에는 노론으로 갈라짐)인데, 그들이 하는 꼴을 보면 말이다. 정말 공자가 원하는 유교세상에 이런거였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역신에서 민족의 신으로! 단군왕검


우리가 학교가면 무조건 배우는 단군왕검 이야기. 물론 단군왕검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일종의 ‘신화’이다(혁거세나 주몽이 알에서 나온것처럼). 예컨데 곰토템을 믿는 부족와 호랑이토템을 믿는 부족간의 알력다툼에서, 곰토템을 믿는 부족이 승리한.. 뭐 이런 이야기를 신비로운 설화로 탈바꿈한 것이라고나 할까?



확실한건 단군왕검 신화를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는 민족 공동체의식을 깨우치게 한다는 점이다. 근데 이게 참 웃긴게, 잘 생각해보면 한반도가 단일민족이라는 말부터가 참 어불성설인데 말이다. 


원래 단군은 평양 일대에서 모시던 지역신에 가까웠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단군을 시조로 하는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고 삼한의 백성을 모두 통합하는 시조신으로 섬겨지게 된 것이다. p 250



실제로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단군은 성황신이나 산신처럼 평양에서 믿는 일종의 지역신이었다. 한반도 내에는 정말 여러 고대국가가 있었고, 그 고대국가들 중 일부가 흡수/합병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되었다. 이 세 나라는 각각 별도의 나라였고, 따라서 각 나라의 건국신화(시조전승)도 별도였다. 물론 백제의 경우 고구려에서 갈라진 나라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다툼을 하는 등 그 두나라 사이마저도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알듯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 백제는 온조, 신라는 박혁거세! 더 들어가면 가야는 김수로왕을 비롯한 여섯왕이 있고, 예맥, 부여, 낙랑 등 수 많은 고대국가가 자기들만의 건국신화가 있었다.




 


 


단군이 한민족이라는 집단의 시조로서 보편적으로 인식된 것은 고려 말의 일이었다. 14세기까지 단군은 대체로 평양 지방의 신, 또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몽항쟁을 거치면서 단군은 공통된 조상이자 국가 시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점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p 253



조선 전기에 형성된 단군 인식은 조선 중기 사림의 등장과 함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춤하게 된다. 이때는 기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자로부터 출발하는 소중화 의식이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긍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7세기 중반 이후 다시 단군에 주목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p 254


평양의 지역신이었던 단군이 한반도 전체의 시조가 된 건, 몽골의 침입기인 고려 말때 시작된다. 우선 고려라는 나라는 한반도를 통일한 나라이다. 물론 그 전에 통일신라가 있기는 했으나, 통일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흡수하면서 백제/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을 지독히도 겪어왔다. 반면 고려는 완전한 통일국가다. 따라서 시조가 각기 달랐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시조가 필요했고, 그 시조로 선택된 인물이 바로 옛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었던 것이다.



조선도 동일하다. 심지어 조선은 옛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이라 칭했다. 다만 조선에서는 단군왕검만 시조로 삼은게 아니라, 기자조선의 기자도 시조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을 인정한다. 기자조선의 경우 당대의 역사서도 없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 중국계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왜 기자조선을 믿었던 걸까?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조선을 믿은 이유는, 한나라때 서적에 적혀있는 ‘기자동래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바로 ‘명분’ 이었다. 기자를 통해 조선이 문명을 받아들였고, 중국에 버금가는 ‘소중화’라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는 조선이 명에 사대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 명이 망하자 조선은 명나라를 잇는 국가라고 칭하던 조선이었음을 인식해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조선이 명나라를 잇는 국가(소중화/유명조선)라고 열렬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은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권력을 잡은 이들이다.


조선에서 인정한 역대 시조묘 팔전(八殿)


우리나라 국민들 중 태반이 모르는 역대 시조묘, 팔전에 대해 나왔다. 이야, 책에서 팔전에 대한 내용을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 유적지 답사를 할 때마다, 해당 지역에 시조묘가 있으면 찾아다녔던 나로써는 그저 반가울 따름!



동아시아에서는 한 국가가 멸망하면 이전 왕들의 후손들에게 세습 작위를 주고 선대왕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해주는 전통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옛 왕조의 후손을 찾아 시조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것을 역대 시조묘 라고 불렀다. p 270



(조선)태종 재위기 역대 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전에 중사로 등재해 제사를 시행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제사 대상으로 모신 역대 시조는 시대에 따라 강조하는 대상이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단군과 기자, 고구려 시조, 고려 시조에 대한 제사가 중시되었고, 백제와 신라의 시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백제 시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신라 시조와 관련된 제도가 정비되어 이들을 모시는 사당이 ‘전(殿)’으로 승격됐다. p 283


팔전(八殿)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건국왕(이자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 이전까지는 사당이나 신사 쯤으로 관리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왕실의 사당으로 격상시켰다.


※시조묘 팔전※

- 숭령전: 전조선 단군묘 겸 고구려 동명왕묘 (평양/봉사손 성씨: 선우씨)


- 숭인전: 후조선 기자묘 (평양/봉사손 성씨: 선우씨)


- 숭렬전: 백제 온조왕묘 (경기 광주/봉사손 성씨: ??)


- 숭선전: 가야 수로왕묘 (김해/봉사손 성씨: 김해 김씨, 김해 허씨)


- 숭덕전: 신라 혁거세묘 (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박씨)


- 숭혜전: 신라 미추왕(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김씨)


- 숭신전: 신라 탈해왕(경주/봉사손 성씨: 경주 석씨)


- 숭의전: 고려 태조묘 (연천/봉사손 성씨: 개성 왕씨)


팔전은 각 시조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언제든지 가서 볼 수가 있는데 .. 여기서 함정! 단군왕검과 주몽을 모신 숭령전과 기자를 모신 숭인전은 평양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볼 수가 없다. 그 외 나머지 6곳은 언제든지 가 볼 수 있다.



내가 가본 곳은 숭렬전(백제 온조왕), 숭덕전(신라 혁거세왕), 숭혜전(신라 미추왕), 숭신전(신라 탈해왕), 숭의전(고려 태조왕건) 총 5곳이다. 어라? 이제 김해만 가보면 남한에 있는 시조묘는 다 섭렵이네? 허허허.



근데 지금와서 보니 온조왕을 모시는 숭렬전은 봉사손 성씨가 없다. 뭐랄까... 백제 후손이 없나? 그러고보니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과 그 가솔들은 당나라로 끌려갔었는데. 마지막 왕 기준으로 당시 백제 왕가의 성씨는 부여씨였는데, 음. 현재 남아있는 부여씨가 없나? 그럼 숭렬전 관리/제사 주체는 어디인가. 



거기다 단군왕검 및 주몽과 기자를 모시는 숭령전, 숭인전의 봉사손 성씨도 좀 특이하다. 난 숭령전은 당연히 고씨일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선우씨다. 알고보니 선우씨의 시조가 기자조선을 창건한 기자의 48대손 우평이라나 뭐라나. 다시말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안함!


1612년(광해군4) 이정귀가 오랑캐를 중화로 바꿔 예의와 문명을 퍼뜨린 공을 들어 평양의 기자사를 ‘숭인전’으로 고치고 선우씨를 후예로 저해 제사를 주관케 하며 비석을 세길 것을 청했다. 광해군은 이를 기꺼이 따르고 승지를 보내 제사를 시행하게 했다. 당시 선우식이 6품의 관직을 갖고 제사를 주관했는데, 대대로 자손이 그 직을 이었다. p 283



이 책은 역사책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이루어져있어서, 역사에 해박하지 않은 성인이어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어린자녀와 함께 읽어도 전혀 어렵지 않을 역사만화책이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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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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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있을 때는 ‘시업시간 전, 점심시간=독서시간’이라는 습관이 길러져서 매일 매일 책을 읽었었는데, 휴직하고 나니 이게 좀처럼 안된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아침 6시로 휴직 전이나 후나 같은데^_T... 이상하게 집에서는 책이 손에 잘 안잡혀서, 매일 정기 독서시간 습관을 들이는게 조금 힘들었다. 휴직한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독서시간이 정착된듯 하다. 매일 아침 신랑이 출근하고나서부터 오전 9시까지! 더도 말고 덜도말고 딱 책 1권을 다 읽을 정도의 시간! 아 물론 만화책 읽기는 예외다. 만화책은 독서시간에 포함하지 않고, 언제 어느때나 읽을 수 있는걸로 ㅋㅋ



다만 이 독서시간에 읽는 책들을 보면...내 독서편식이 대놓고 들어난다는 게 흠이랄까. 아무래도 우리집에서 제일 많이 있는 책이 역사책이라서 그런지, 매일 읽는 책도 역사책 투성이다(어디까지나 거실에있는 책장에 한해서 ㅋㅋㅋ). 뭐, 믿고보는 역사책이니까! 태교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ㅋㅋ



그런의미에서 오늘의 책은 권오영 교수가 쓴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이다. 원래도 한국 고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인지라, 고대사 관련 책이 집에 많기도 많다(특히 한일고대사). 이 책은 구입한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출판사 서평단을 하느라 읽지 못하고 계속 뒤로 미루고 미뤘던 비운의 책이기도 하다T_T. 권오영 교수님은 차클에서 백제사 강의하는걸 보고, 꼭 책을 읽어야지 했었는데. 이제서야 읽게되는 슬픈 사실...




요즘 경주 여행기 리뷰를 쓰면서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신라 6촌장’이다. 그저 막연하게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추대한 여섯 촌장이라는 사실과, 내 시조(ㅋㅋㅋ)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정말 신라에 6촌이 있었는지,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는지,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진적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조에는 “이(혁거세의 즉위)에 앞서 (고)조선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는 수수께끼같은 기사가 있다. 신라를 설명하는 데 난데없이 등장한 이 기사의 의미는 조양동 유적발굴과 함께 풀렸다. 조양동에서 발견한 사로국 물질문화는 평양 일대의 고조선, 즉 위만조선의 문화와 유사한 면이 많았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후 그 곳의 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각지에 정착한 것이다. 조양동 유적 발견 이후 대구, 경산, 영천 등 경상도 각지에서 비슷한 성격의 유적들이 발견됐는데 이들에서도 위만 조선계 문화의 영향이 드러났다. 자연스럽게 사로국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p 031


놀랍게도 신라 6촌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삼국사기』 의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말하자면 신라로 발전하기 전, 진한의 소국인 ‘사로국’의 유물이라고 해야하나? 『삼국사기』에 기록처럼 나라가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해온 흔적이 진한, 마한이 있던 지역에서 유물로 발굴된 것이다. 완전 언빌리버블! 역시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의 능력이란!



(창원 다호리 유적)이로 인해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게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나 『삼국지』등의 사료에는 전혀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세력은 변한의 구성분자로서 훗날 가야로 발전한다. 도굴꾼에 의해 처참하게 파헤쳐진 무덤이 변한과 가야의 역사를 밝히는 일 등급 자료로 변모한 것이다. p 034



다라국은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수수께끼와 같았던 왕국이다. 그런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유적을(합천군 옥전) 발굴조사하자 보물로 지정할만큼 호화로운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기원후 5~6세기 합천을 무대로 성장했던 다라국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고, 그중 금과 은을 이용해 용과 봉황을 장식한 고리자루칼, 금으로 만든 귀걸이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2020년 1월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초호화 장신구와 칼 여러점을 소유했던 인물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 즉 왕이 분명하다. p 043


심지어 기록상에는 없던 변한의 흔적까지 찾아내서, 고대사의 빈공간을 메꾸기까지! 그나저나 다라국은 또 어디인가. 음. 변한의 12개 소국 중 하나일까? 우륵의 가야금 12곡이 각각의 가야 연맹국가를 지칭한다는 말도 있으니, 어쩌면 다라국도 또 하나의 가야 연맹국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다라국이 위치한 합천 주변은 고령(대가야), 창녕(비화가야), 성주(성산가야) 등 현재 이름이 알려진 여러 가야의 도시국가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한국고대사에 관련된 당대 기록이,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게 없으니 주변국에 의한 왜곡이 쉽게 이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나마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엄밀히 따지면,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고려시대에 집필한것에 그치므로 당대의 기록이 아니니 말이다.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당대의 기록이 남아있기에,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것이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역사 왜곡을 행했고, 왜곡이 가장 심하게 이루어진 분야는 가야사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아주 조금 언급된 내용을 제외하면 가야에 관한 국내외  문헌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제 관학자들이 취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와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 그때 만들어진 논리가 임나일본부설이다. p 047



다행히도 땅속에서 더 이상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할 만한 보물들이 발견됐다. 김해 대성동 발굴조사를 진행하던 젊은 연구자들이 쾌거를 이룬 것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금관가야의 유물들은 같은 시기 일본의 것을 압도할 정도의 기술력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로 철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 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아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 051


요즘엔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이 많이 힘을 잃었으나, 과거에는 지금과는 달이 매우 강력하게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진구덴노가 가야를 평정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어 가야를 다스렸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일본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것은 그들의 당대기록인 『일본서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런 왜곡을 한 이유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도래인 덕택에 문명국이 되었다는 피해의식을 뒤집기 위해서이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는게 정당하다는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우리 땅에서 발견된 철기 유물과 일본 땅에서 발견된 철기 유물의 엄청난 질적 차이와, 우리 고고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로 인해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상상력이라는 것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다 가야는 철의 나라였다. 당대에 그 어떤 나라보다 뛰어난 철제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한반도 여러 국가를 포함하여 중국 및 일본까지 수출되었다. 이렇게 가야에서 수출된 철과 기술이 아니었으면, 제대로 된 철갑옷도 만들지 못했던 일본이 감히 가야를 다스렸다고 하니, 우리나라 학자들은 얼마나 기가찼을까?


(발해 효의황후, 순목황후 묘비는) 발해인들이 자국을 황제국가로 인식한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이 귀한 자료의 전모는 발굴조사 이후 여태껏 공개되지 않고 있다. 발해사를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깎아내리려는 중국 당국의 공식입장과 정면으로 상충하는 자료이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외부적으로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적 실물자료 없이 정치적인 의도로 작성된 당시의 문헌 자료로만 역사 연구를 시도한다면 얼마나 큰 왜곡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경고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p 059


일본의 역사왜곡은 수많은 유물과 증거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학술적으로도 반박가능하다. 다만 그놈들이 듣지를 않을뿐. 문제는 중국이다. 한마디로 ‘동북공정’. 중국땅에 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중국의 역사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실제로 중국은 고구려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흔적들이 중국 땅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유물을 숨기면 우리나라 학자들이 확인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 참으로 통탄스럽다..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 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p 078


난 간혹 오래된 무덤에서 인골이 나오면, 당연히 중요한 유물로 치중되어 연구가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헌데 아주 놀랍게도 인골이 고고학적 자료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비교적 최근 일이란다. 과거에는 인골이 입고 있는 수의나 부장품등만 유물로써 연구조사로 진행했을 뿐이며, 인골은 후손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골을 연구대상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인골을 하나의 유물로 구분하여 연구조사를 하고 있는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 않은가? 뼈 하나만으로도 성별, 유전자, 신장, 심지어는 식습관까지도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이 두개골 변형 풍습이 한반도 남부 진한에서 시행되었다고 기록돼있다.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편평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뿐이어서 실제 시행 여부를 밝힐 수는 없었는데, 인골 발굴로 사실을 밝혀냈다. (……)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 083


고대인의 ‘편두’. 신라 6촌에 이어 또 한번 기록이 유물로 증명된 순간이다.





물론 전승된 기록과 실제 발굴된 유물이 다른 경우도 있긴 하다. 


우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미륵사는 무왕과 그 부인인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세웠다고 믿었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 서탑을 보수하다가 우연히 사리장엄을 발굴했고, 함께 출토된 사리봉영기에서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로 인해 연쇄적으로 거진 이슈가 있었으니, 익산 쌍릉의 피장자 문제이다. p 093



대왕묘에 무왕, 소왕묘에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묻힌것이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왕묘에서 발굴된 치아가 여성의 것이란 감정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대왕묘는 사택왕후, 소왕묘가 무왕의 무덤이란 주장까지 대두됐고 문제는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얽히고 설킨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선 곳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학교로 공동 조사단을 구성해 대왕묘를 다시 발굴했다. p 094


그 유명한 서동(마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 서동이 후에 백제 무왕이 되면서 선화공주도 당연히 무왕의 왕비가 되었고, 그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믿고 있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발굴된 유물에서 이 이야기가 아주 깨끗하게 손절당했다^_T. 나 진짜 이때 뉴스보고 얼마나 충격이 컸었는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택왕후로 인해 선화공주는 저멀리. 하지만 오랫동안 기록과 설화를 믿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죽하면 미륵사지 서탑을 사택왕후가 세웠지만, 미륵사지 동탑은 정말 선화공주가 세웠을 것이다! 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확실한건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덕분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 전해지던 익산 쌍릉까지도 피장자에 대한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물론 그 덕분에 쌍릉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이때 놀라운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발굴보고서에는 없던, 인골이 담겨있던 나무상자가 발견된 것이다. 인골 연구가 진보한 바로 21세기에 말이다.


연구결과는 대략 이랬다. 첫째, 팔꿈치의 각도, 목말뼈의 크기, 무릎 너비 등이 남성적 특징을 보인다. 둘째,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치를 볼 때 뼈의 주인이 수명을 다한 시기는 620~659년 사이일 가능성이 68퍼센트다. 셋째, 뼈 주인공의 신장은 161~170센티미터 정도로 당시로는 상당히 큰 편이었으며,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넷째, 젊어서 낙상한 결과 골반에 상처가 남아있고, 광범위 특발성 뼈 과다증이라는 희소한 질병을 앓았던 흔적이 있다. (……) 말년에는 누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택왕후가 사리를 봉안하며 남편인 무왕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 해가 639년이고 무왕이 사망한 시점이 641년이니, 왕후가 사리를 봉안할 때 무왕은 이미 앓아 누웠고 곧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 고고학자들은 대왕묘의 규모나 석재 가공 수준을 볼때 왕릉이 분명하다는 점을 증명했고, 역사학자들은 7세기 전만 고령으로 생을 마감한 백제왕은 무왕 외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골이 백제 무왕의 것이라는 데 의견으 ㄹ모았다. 정체 미상의 뼈가 백제 무왕으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p 096


덕분에 익산 쌍릉의 대왕묘는 이러이러한 합리적인 추론으로 무왕의 무덤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소왕묘는? 뭐... 아직 사택왕후의 무덤인지, 우리가 아는 선화공주의 무덤인지는, 아니면 의자왕의 생모인지, 그도 아니면 또다른 무왕의 왕비인지 알수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확실한건 지금까지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이 정확히 밝혀진 것은 백제 무령왕릉 하나라는 점에서, 쌍릉의 대왕묘가 무왕의 무덤이라고 밝혀졌다는 건 정말 고고학과 과학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속전속결로 발굴작업을 완료하는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국민들과 함께 발굴과정을 즐기는 방향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고 있다. 월성 북편의 쪽샘지구에서는 수년 동안 대형 고분을 조사하고 있는데, 고분 위에 우주선처럼 생긴 가건물을 씌워 비가오나 눈이오나 안정된 환경에서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도 일반인이 방문하면 언제든지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됐다. p 171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간단한 발굴조사만을 거친 채 성급하게 올림픽공원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과거 백제의 수도는 오늘날 펜싱장과 사이클 경기장, 수경 경기장, 조각공원으로 변모했다. 뒤늦게나마 백제 초기의 역사를 규명할 귀중한 유산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최근 정밀한 학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p 183


요즘은 유적지 발굴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발굴작업을 할때 무조건 ‘속전속결’ 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발굴작업의 원인은 대게 도로나 아파트건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도로공사든 아파트공사든 뭘 하기전에 매장문화재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하는데, 매장문화재가 있더라도 공사는 진행해야하므로 최대한 발굴작업을 빨리 끝내야만 했다. 빠르게 사진찍고, 빠르게 유물옮기고, 빠르게 유적지 파괴! 그 위에 도로를 건설하거나 아파트 건설! 심지어는 발굴작업으로 인해 공사기간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문화재가 출토된 것을 감춘 채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과거 우리나라 유적지 발굴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변하면서 문화재 발굴작업에 대한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지금은 속전속결이 아니라, 최대한 ‘문화재의 보존’과 ‘안정’을 목표삼아 발굴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전과는 달리 발굴작업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발굴작업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주 쪽샘지구 발굴작업은 일반인이 언제든 들어가서 볼 수 있기에, 나 역시 가보았는데... 하필 점심시간에 걸려서 못들어갔다는 슬픈 이야기T_T



조금 슬픈 사실은 이미 수 많은 고대사의 흔적들이 파괴되어 도로 밑에, 혹은 아파트 단지 밑에, 또는 빌라 주차장 아래에 잠들어버렸다는 점이다. 비교적 많은 고분들이 남아있는 웅진/사비 백제나 신라를 제외하면, 한성백제 및 가야의 왕릉급 고분, 심지어 삼한시대의 지도자 고분들이 파괴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거나 도로, 심지어 누군가의 논밭이 되어버렸다. 뿐만인가? 한국  최대 규모의 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된 춘천 중도. 고고학의 한 획을 그은 중도 유적은 다시 파괴되어 땅 아래로 묻혔다. 춘천에서 자랑해 마지않는 ‘레고랜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 ‘레고랜드’는 올해 개장을 앞두고 있다. 아무리 유물 발굴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해도, 땅속에 다시 묻혀버리는 유물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1988년 일본은 공단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팠다가, 대규모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정부는 이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공단 조성을 포기하고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곳이 바로 일본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지다. 우리나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막대한 돈이 오가는 도로건설, 아파트건설, 공단 조성이 더 중요하여 유적지를 땅속에 묻어버리는데 말이다. 참으로 대비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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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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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조선판 요괴열전이다. 심지어 무려 실록에도 기록된 요괴들의 이야기다. 조상님들 두루마기 입고, 갓을 쓰던 그 시절에 무슨 요괴야? 그냥 단순히 상상아니야? 라고 하고 싶지만..... 놀랍게도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 말이다. 



엄청나게 유명했던, 단순히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별에서 온 그대』, 『푸른바다의 전설』 의 모티브도 전부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기록에서 나왔다. #별에서온그대 모티브는 《조선왕조실록》, #푸른바다의전설 모티브는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서 나왔다.



자 그럼 본 책을 리뷰하기에 앞서, 맛보기용으로.... #별그대 #푸른바다전설 에 대한 이야기를 스윽 펼쳐본다.


"간성군(杆城郡)에서 8월 25일 사시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태양이 비치었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우레 소리가 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갈 즈음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에서 연기처럼 생긴 것이 두 곳에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형체는 햇무리와 같았고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멈추었으며, 우레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났습니다.


원주목(原州牧)에서는 8월 25일 사시 대낮에 붉은 색으로 베처럼 생긴 것이 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는데, 천둥 소리가 크게 나다가 잠시 뒤에 그쳤습니다.


강릉부(江陵府)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丈)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했습니다.


춘천부(春川府)에서는 8월 25일 날씨가 청명하고 단지 동남쪽 하늘 사이에 조그만 구름이 잠시 나왔는데, 오시에 화광(火光)이 있었습니다. 모양은 큰 동이와 같았는데, 동남쪽에서 생겨나 북쪽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매우 크고 빠르기는 화살 같았는데 한참 뒤에 불처럼 생긴 것이 점차 소멸되고, 청백(靑白)의 연기가 팽창되듯 생겨나 곡선으로 나부끼며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우레와 북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다가 멈추었습니다.


양양부(襄陽府)에서는 8월 25일 미시(未時)에 품관(品官)인 전문위(全文緯)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는 한 아름 정도이고 길이는 베 반 필(匹) 정도였는데, 동쪽은 백색이고 중앙은 푸르게 빛났으며 서쪽은 적색이었습니다. 쳐다보니, 마치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도는데, 모습은 깃발을 만 것 같았습니다. 반쯤 공중에 올라가더니 온통 적색이 되었는데, 위의 머리는 뾰족하고 아래 뿌리쪽은 짜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 한가운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흰 구름으로 변하여 선명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 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두 조각이 되더니, 한 조각은 동남쪽을 향해 1장 정도 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한 조각은 본래의 곳에 떠 있었는데 형체는 마치 베로 만든 방석과 같았습니다. 조금 뒤에 우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끝내는 돌이 구르고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 속에서 나다가 한참만에 그쳤습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0권, 광해 1년 9월 25일 계묘 3번째기사 - 강원도에서 일어난 기이한 자연현상에 대해 강원 감사 이형욱이 치계하다


위 기사가 별그대의 모티브가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주 멋진 외계인 김수현을 만날 수 있.ㅇ.....ㅋㅋㅋㅋㅋ 흠흠흠. 위 기사는 말그대로 기이한 자연현상을 기록한 것인데, 이 자연현상에 현대인들이 상상을 한스푼 첨가하여 멋진 판타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요괴에 대한 기록도 실려있는 《조선왕조실록》인데,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한 기사 쯤이야!



김담령이 흡곡현의 고을 원이 되어 일찍이 봄놀이를 하다가 바닷가 어부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어부에게 무슨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부가 대답했다.


“제가 고기잡이를 나가서 인어 여섯 마리를 잡았는데, 그중 둘은 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넷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나가서 살펴보니 모두 네 살 난 아이만 했고,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으며 콧대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귓바퀴가 뚜렷했으며 수염은 누렇고 검은 머리털이 이마를 덮었다. 흑백의 눈은 빛났으나 눈동자가 노랬다. 몸뚱이의 어떤부분은 옅은 적색이고, 어떤 부분은 온통 백색이었으며, 등에 희미하게 검은 무늬가 있었다. 남녀의 음경과 음호 또한 사람과 똑같았으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주름 무늬가 있었다. 이에 무릎에 껴안고 앉히자 모두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며, 사람을 대하여서도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하얀 눈물만 비 오듯 흘렸다. 김담령이 가련하게 여겨 어부에게 놓아주라고 하자, 어부가 매우 애석해하며 말했다.


“인어는 그 기름을 취하면 매우 좋아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습니다. 오래되면 부패해 냄새를 풍기는 고래 기름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요.”


김담령이 뺴앗아 바다로 돌려보내니 마치 거북이처럼 헤엄쳐 갔다. 김담령이 무척 기이하게 여기자, 어부가 말했다.


“인어 중에 커다란 것은 크기가 사람만 한데 이것들은 작은 새끼일 뿐이지요.”



- 어우야담 만물편:인어- (돌베게, p 764)


위 야사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수록된 이야기다. 이 일화를 찾을라고 간만에 책장에서 벽돌책인 어우야담을 꺼내서 읽었다. 후... 


다만 여기서 함정인 것은 어우야담 속 인어를 구출해준 김담령,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이민호가 맡았던 김담령은 실제로는 그리 착한 원님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위 야사와 드라마 판타지로 인해 완전 착한 인물인줄 알았던 김담령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여러번 나올 정도로 부패한 조선의 관리였다^^.....


여기까지가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리뷰전 맛보기! 이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저자가 머릿말에서 말했듯이 이 책에는 실록에 실린 총 20여 종의 괴물(또는 요괴)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실록에 대한 기록과 당대 상황을 서술하며, 진짜 괴물이었는지를 추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맘에 드는건....조선괴물지도! 



실록을 보면 이 괴물들이.. 전국 방방곡곳에서 나오는데, 독자들이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한반도 지도상에 각 지역별로 괴물들이 출몰(?)위치를 표기한 것이다. 이런건 책 페이지 말고도, 별도 족자형식(?)의 부록으로 줘도 좋을 것 같은데...ㅋㅋㅋㅋㅋ



조선의 괴물지도


1. 전쟁으로 쇠락한 지네호텔: 오공원 (충청도)


2. 천하의 전우치를 골린 여우: 흰 여우 (전라도)


3.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4.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5. 남해를 붉게 물들인 별: 천구성 (경상도)


6.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7.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8. 부처가 된 세조의 경고: 생사귀 (전라도)


9. 성종의 관심을 끈 땅속 귀신: 지하지인 (서울)


10. 중종을 떨게 한 연산군의 그림자: 수괴 (서울)


11. 인종이 죽자 나타난 검은 기운: 물괴야행 (황해도)


12. 사도세자를 향한 저주: 도깨비 (전라도)


13. 정조의 마음을 어지럽힌 사슴과 곰: 녹정과 웅정 (경상도)


14. 조선이 빅풋은 벽곡의 달인: 안시객 (강원도)


15. 바다 건너 거인의 나라: 거인 (강원도)


16. 행운의 상징, 불행의 상징: 금두꺼비 (강원도)


17. 전쟁을 끝낸 사슴 발의 여인: 녹족부인 (평양)


18. 코끼리, 얼룩말 그리고 불가살이: 박과 맥 (평안도)


19. 호랑이를 떨게 한 사자: 산예 (함경도)


20. 만인의 피를 마신 뱀: 만인사 (함경도



 풍년과 흉년을 예언한 행운의 편지: 삼구일두귀 (전라도)


조선판 행운의 편지(?) 주인공 삼구일두귀. 머리는 하나요, 입이 세개 있는 요개라는 뜻이다. 전라도지방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내용대로라면 삼구일두귀가 처음 내려온 곳은 함평이 아니라 능성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삼구일두귀는 능성의 한 부잣집에 내렸다. 이상한 모습에 겁먹은 부자는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우호를 표하기 위해 밥을 대접하는 듯 하다. 삼구일두귀는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 당시 유행한 이야기에서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는 것은 종종 신비롭고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듯 싶다. p 045


확실히 옛날엔 팩트체크(?)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더라, 한양에서 멀디 먼 전라도에서 일어나는 요괴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기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테니, 장계를 받는 그대로 실록에 기록했다는게 딱 느껴진다. 허허허허. 실록이란게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아주 중요한 보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쓴거고, 사람이 쓴만큼 주관적일 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뭐 여튼 너무나 생소한 삼구일두귀라는 요괴. 그냥 생소한 요괴로 끝나면 거기서 끝날텐데, 실록엔 그 뒷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런 내용이!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문이 퍼진 과정이 꽤 흥미롭다. 특히 149세 먹은 승려라는 인물의 행적이 눈길을 끄는데, 8월 3일자 기록은 앞서 5월 26일자 기록보다 이를 더욱더 자세히 소개한다. (생략) 즉 나이 많은 승려가 직접 전라도에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운남성 원광사라는 절에 살던 어느 노인이 149세가 되어 세상을 뜬 후 그 혼백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백은 미래에 난리가 난다고 예언한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 중에 무당이 있는 것을 보면, 무당이 굿하는 중에 혼백이 씌웠다고 하면서 말이나 노래로 사람들에게 전한것일지 모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예언이 편지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편지에는 예언 외의 다른 말도 쓰여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 여기 적힌 내용을 한 번 전하면 한 몸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두 번 전하면 집안이 재난을 피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세 번 전하면 태평한 시절을 본다. p 047~049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7명에게 보내야~’ 라고 하는 한때 엄청 유행했던 그 행운의 편지가 무려 5백년 전 조선에서도 성행했었다니!!!!!!!!!!


유행은 돌고돈다더니, 이런 거까지도 돌고도나보다.




가뭄과 홍수보다 혹독한 농부의 적: 강철 (경상도)


나에겐 일요 웹툰(합격시켜주세용/이온)에서도 종종 만나서 익숙한 깡철이가 나왔다!!! 완전 반갑반갑 !!!! 웹툰에선 용이 되기 위한 선발과정에 참가한 이무기............이무기인가, 이무기사촌인가, 뭐 여튼 그런 격의 캐릭터로 나온 깡철인데!!! 크 ㅋㅋㅋㅋㅋㅋㅋㅋ


조선 후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괴물을 꼽는다면 단연 ‘강철’이라고 생각한다. 강철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로 소, 말, 용 등을 닮았다고 묘사된다. 괴물 이야기치고는 기록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고, 전국 각지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강철 이야기는 한 두해 동안 잠깐 돌고 만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이상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 그러다보니 이수광, 이익, 이덕무 같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도 짧게나마 강철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다. p 055



강철 이야기는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듯 싶다. 물론 완전히 맥이 끊겨버린 것은 아니다. 18세기 전국적으로 아주 유명한 괴물 이야기였던 만큼, 흔적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최근까지 전승된 민속놀이로, 농사를 망치는 재해를 쫓아달라고 기원하는 ‘꽝철이 쫓기’가 있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 실린 사례를 보면 경상북도 일대의 농민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며 산 능선을 돌았다고 한다. 꽝철이가 산 능선에 앉는 버릇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꽝철이를 쫓고 풍년을 빈 것이다. 꽝철이는 조선시대 기록에 등장하는 강철의 발음이 변형된것으로 보인다. 다른 민속놀이에서도 강철을 용이 못 된 이무기 비슷한 것으로 보고, 꽝철이, 깡철이 등 변형된 발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p 056



이렇게 보면 강철은 어떤 특정 자연 현상을 상징하는 괴물이라기보다는, 농사를 허망하게 망치는 재해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홍수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폭우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하고, 가뭄 피해가 큰 지역에서는 강철을 열기와 메마름의 원인으로 본 이야기가 유행한 것 아닐까. p 059



웹툰에서도 깡철이가 뜨겁고(?) 불을 잘 쓰던데, 오. 진짜였어!! 심지어 조선시대에 제일 핫했던 친구였어!! 특히 농사가 흉작일때는 더더더욱 핫하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친구였어!!!! 하지만 그것도 다 한철. 농업이 주였던 조선과는 달리 현재 대한민국에선, 깡철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T_T..


심지어 농촌인구가 줄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 마저 줄어들고 있으니. 조만간 깡철이도 사라질듯 싶다. 주거형태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 가택신들이 사라졌듯이...




고래기름보다 좋은 인어기름: 인어 (강원도)


위에서 드라마 #푸른바다의전설 및 어우야담으로 언급했던 인어이야기! 무려 출처는 강원도다. TMI이긴 하지만, 춘천에 있는 할머니댁에 갈때마다 의암댐에 인어상을 매번 봤었다. 그 당시에는 왜 뜬금없이 서양의 인어(?)가 왜 춘천에 있지? 라는 물음표가 엄청 떠다녔었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던거였다니..! 아 물론 강원도에서 발견된 인어들은 우리가 아는 서양의 이쁜 인어공주가 아닌, 중국의 교인쪽에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조선시대 이야기에서 인어는 신비롭고 고결한 바다의 왕족(서양인어)도 아니고, 선원들을 유혹하는 마법적인 매력을 지닌 괴물(세이렌)도 아니다. 좀 희귀할 뿐이지 그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 낚시꾼에게 붙잡히고, 어부는 ‘기름 짜는 것’으로 인어의 쓸모를 말한다. 얼굴은 사람처럼 생겨 김담령에게 깊은 동정심이 우러나게 할 정도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인어를 대하는 태도는 여느 물고기를 대하는 태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고래기름은 상하면 냄새나지만 인어기름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p 083



조선의 인어 이야기가 이 한 편 뿐인 것은 아니다. 역시 《어우야담》에 짧게 실린 것으로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도 있다. 간성, 그러니까 지금의 강원도 고성에서도 인어 한 마리가 잡혔는데, 피부가 눈처럼 희고 여성처러 ㅁ생겼으며, 장난을 치니 깊은 정이라도 있는 듯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 놓아주니 다시 돌아오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여성 인어가 남성 뱃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유럽권에서 유행한 인어 이야기와 좀 더 비슷해보인다. 강원도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인어를 목격했다는 사례가 있다. 예를들어 18세기에 활동한 학자 위백규의 《격물설》에는 “근년에 어부가 인어를 잡았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확한 장소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주로 호남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하면, 전라도의 남해안이나 서해안이 배경이지 않을까 싶다. p 084



인어이야기가 널리 퍼진 데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중국 고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고전에는 예로부터 ‘교인’이라고 하는 바다에 사는 사람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교초’라는 매우 신비로운 옷감을 짠다거나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문학의 소재로 좀 과할 정도로 자주 사용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작가들도 시를 지으며 교인이나 교초 같은 말을 즐겨 썼다. p 086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후기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울릉도의 ‘가지어’를 바다에 사는,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은 아닌 동물로 소개한다. 가지어는 울릉도, 독도에 사는 바다사자의 한 종류인 강치를 일컫는 말인듯 하다. 《동사강목》이 강치를 어린아이와 비교하고 기름짜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수염이 있다는 것도 강치의 모습과 닮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인어 이야기는 뱃사람들이 강치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나 귀여운 모습을 신기하게 여겨 말을 전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p 089



조선이나, 옆나라 중국이나 양쪽 모두 ‘고래기름보다 인어기름이 낫다’라는 말이 꾸준히 나온 것을 보면 인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나보다. 다만 당시에는 과학 연구가 발달하지 못했기에 ‘사람과 비슷한 물고기’로 보았을 뿐이랄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발견된 인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도 저자와 비슷한 생각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말한 인어는 독도의 강치같은 바다사자는 아니었을까하고.



하지만 인어가 사라졌듯, 강치도 사라졌다.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놈들은 마구잡이로 강치를 사냥해서 강치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강치 지방은 기름으로 이용하고, 살과 뼈는 비료로 이용하고, 살아있는 생물은 서커스용으로 학대했다. 그렇게 우리 동해안에 살았던 강치는 인어전설만 남긴채 사라졌다는 슬픈 이야기.




왕건으로 이어지는 용의 계보: 용손 (경기도)



지금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요괴들은 대체적으로 자연환경이나, 생소한 동물을 비유한 거라고 한다면... 용손, 즉 용의 자손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용의 자손, 어쩌면 지금도 성씨를 바꿔서 근근히 살아남았을수도 있다. 이렇게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건, 한반도에서 용의 자손이 약 5백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기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나라, 왕건이 세운 ‘고려’를!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 또는 유럽이나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활용할 법한 소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동안 용의 자손, 즉 ‘용손’이 있다는 괴물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려시대에는 임금이 바로 용과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p 096



용손은 천명이 다하고, 선리는 부창해 영화하도다. 천년 전에 그 징조가 심히 밝았도다. 하늘이 열어주어 우리 임금이 점치었또다. 아름답다! 천만 년의 태평을 열어놓았도다.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이요, 높고 높은 화악이로다. p 097 (인용 《태종실록》)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살면서 아들 넷, 딸 하나를 낳았는데, 용녀가 집 가운데 우물을 파고 늘 우물 가운데를 통해 서해에 왕래하며, 그 남편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갈 터이니, 절대로 보지 마시오” 했다. 그 후 작제건이 창틈으로 엿보니, 용녀가 딸을 거느리고 우물가에 이르러 함께 황룡으로 화해 구름을 일으키고 우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남편을 꾸짖기를 “어째서 언약을 어기시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딸과 더불어 용으로 변해 우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아니했다. p 104 (인용 《세종실록》)



정말로 1,000년 전에는 서해에 용이 살았고, 그 딸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근거는 없지만 용의 딸이라는 저민의의 정체가 사실 해적은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본적이 있따. 왕건의 할아버지뻘이라면 장보고가 해적을 물리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다. 특히 장보고가 몰락한 후 해적은 신라의 중요한 사회 문제였다. 거타지 이야기에도 선원들이 옛 백제 땅 출신 해적들을 방비하괒 고민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작제건이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저민의는 용의 딸이 아니라, 용의 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해적이었을 수 있지 않을까. 저민의가 이끄는 해적 무리가 다른 무리와 파벌 싸움을 벌이다가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데, 화살을 잘 쏘는 작제건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상대편을 물리친 사건이 용손 이야기로 신비롭게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p 105



그러니까 한마디로 작제건이라는 사람이 서해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나았는데, 그 아이가 왕륭이다(1대용손). 왕륭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왕건(2대용손)이다. 즉 왕건의 할머니가 용이고, 왕건은 용의 손자라는 이야기. 이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대대손손 왕씨가 왕이되니, 왕씨가 용손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심지어 야사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은 본인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왕씨 혈통이 맞다며 겨드랑이에 있는 용의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뭐 이렇든 저렇든 한 나라를 세우는 왕 치고 출생의 비밀이 없는 왕은 없으니, 고려 왕씨의 용손 전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는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저 이야기가 정말 진실이라면,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 땅에는 용손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조선초 살아남아 성씨를 바꾼, 고려왕씨의 후손은 현재도 살아있으니, 그들 모두가 용손이 아닌가! 물론 용의 피가 1천년의 세월만큼 엄청엄청 옅어졌겠지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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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1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어가 안 예뻐서 ㅎㅎㅎ 그러고 보면 산해경에도 인어아저씨가 나오지 서양쪽의 인어공주 모습은 없는듯합니다. 곽재식작가님 정말 다양한 주제에 관심이나 지식이 많은 듯 해요. 책도 재미있게 쓰시고 ~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피로님 *^^*

피로 2022-02-24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산해경에서 나오는 인어아저씨가 고대 한반도에서 알고 있는 인어였쬬 ㅎㅎ
현대에 와서 서양의 인어공주 이야기가 흘러들어오면서, 우리 머리속에 인어의 모습이 공주님으로 고착된것같아요 ㅎㅎ

mini74 2022-03-08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 축하드려요 ~~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피로님^^

피로 2022-03-09 09:3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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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여행에세이다. 여행에세이는 언제 읽어도 좋다. 다만 그 감정이 코로나19 전과 지금이 매우 달라졌다. 코로나19 전에는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오! 여기 찜콩. 여기도 가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읽었더랬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생활방식이 싸그리 바뀌어버리고, 여행도 쉽게 갈수 없게 됨으로써 나에게 여행에세이는, 조금이나마 여행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대체제가 되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이번 책 『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다만 이 책에선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 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나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같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 이야기가 왕왕 나오고, 그 이야기속에서 아주 진하게 가족에 대한 애정이 풍겨나오기 때문이다. 조금은 부러울 정도로.



저자의 가족애는 이 책의 구성에서 나타난다. 보통 글과 사진작가가 다를경우 친구나 동업자(?)인 경우를 자주 보았는데, 이 에세이의 사진작가는 저자의 부친이었다. 정말 에세이를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는 가족과 여행을 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함을 느끼는지 느껴진다. 정말... 책을 읽으면 저자의 가족에 단 한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 책만큼은 저자의 가족들이 너무 궁금해졌다. 가족간의 사랑이 어느정도가 되어야, 좋은 장소를 보면 가족과 함께 가고 싶고, 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어머니가 주식으로 쌀이 아닌 파스타를 줘도 오히려 이해하며 맛있게 먹고, 남매간에 이렇게 화목할 수 있을까?



나도 저자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더랬다. 대부분이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여행이 많았지만, 언제나 어딜 가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가 당연하게 운전대를 잡았고, 엄마가 지갑을 챙기고, 나는 여행코스를 짰다. 물론 이 가족여행에는 언제나 동생은 없었다. 



동생, 그러니까 엄마아들이 내 여행계획에 없는게 아주 당연했다. 말이 동생이지, 뭐 나에게는 그저 혈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어려서부터도 그렇게 우애가 좋지 않았고, 둘이 성향차이도 너무컸고, 서로를 이해못했다. 심지어 엄마아들은 내 인생에 수차례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아마 내 엄마아빠의 양육방식이 문제였을거다. 엄마아빠 눈에 나는 고작 한살 어린 남동생을 챙겨야하는 장녀였으니까. 그러니까 80-90년대 가정에서는 흔히 보였던, 장녀-남동생 양육방식이었다. 아마 지금 오은영박사님이 보면 솔루션을 받아야 할 가족이었을지도. 



그래서 그런가, 나에겐 ‘동생’이라는 존재가 딱히 없었다. 엄마아빠야, 내 엄마아빠니까 사랑하지만, 글쎄. 저자처럼 저렇게까지 애틋하고 살갑고, 좋은 걸 보면 생각날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여도, 성장과정에서 나도모르게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좋은 걸 보면 생각나고, 보여주고 싶은건, 혈연이 아니지만 나에겐 정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우리 신랑뿐. 아! 몇달 뒤에 태어날 내 새끼까지 포함해서!



아, 뒤늦은 깨달음! 생각해보니 저자와 나는 그저 ‘가족’의 범주가 다를뿐, 그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같은 결이다. 난 결혼 후 신랑와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항상 좋은 걸 같이보고,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서로 사진찍어주는 거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고! 이렇게 보니 저자의 가족애가 이해된다.




 


 



여행하면서 알게 됐다.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수 있으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을. 입장료를 지불하고 여행 경비를 내고, 시간과 돈을 쓰면서 말이다. 지금껏 나의 취향을 지켜준 얼굴들이 스쳐 갔다. 어릴 적 고모가 우리에게 사줬던 해리포터 책값, 거기에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며 넣어준 초등생 필독서들. 그리고 같이 먹으라고 사준 간식들까지. 그때는 어려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돌아보면 전부 지켜진 마음이었던 거다. 당시 고모가 어린 조카들에게 준 책은 그냥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세상에는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런 세계도 있어’라고 말하며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끔 해준 선택권이었다. p 024



와, 계속해서 놀란다. 나에게 고모라는 존재는 선물을 줬다가, 자기 자녀 태어났다고 빼앗간 존재일뿐이었는데. 그때 내 동심은 바사삭이었는데. 하하.



여튼!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려면 돈이 든다는 사실은 어렸던 나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내 취향들을 보면, 돈도 오지게 많이 들었더랬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책을 사기엔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론 턱없이 부족하고, 그러다보니 대여점에서 빌려 읽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심지어 대여료도 역시나 돈이 나가기에, 그 돈을 벌려고 얼마나 우유배달을 했던가^_T(울 엄마님은 나에게 용돈을 주는게 아니라, 노동의 대가로 시급을 주었음..)



그렇게 열씸히 돈 모아서 책 빌려읽기! 그러다 머리통이 좀 커지니 내 시급도 올라가서, 받는 돈도 많아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책 사들이기! 하필 이렇게 머리통이 커졌을 땐, 만화책에 빠져있을 때라 만화책을 그렇게 사모았다. 그것도 원서로. 나름대로 일본어를 혼자 깨우쳤고, 그러다보니 원서를 읽기 시작하고. 근데 또 원서를 사면 국내판보다 금액이 비싸서, 또 돈이 쭉쭉쭉......T_T.... 거기다 장난감까지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돈을 버는 족족 내가 좋아하는 걸 위해 써버렸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려면, 그만큼 금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걸 너무 어렸을때 깨달은 불쌍한 나.



근데 또 아이러니한게, 내가 좋아해서 내 돈써서 샀던 것들을, 흥미가 떨어져서 되파니까 세상에 이게 또 돈이 되네? 그 어린나이에 제태크를 시작했고, 그렇게 내 돈 써서 산걸, 다시 되팔아서 돈을 조금 더 벌고, 또 그 돈으로 그때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는 무한 반복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다 커서도 이러고 있다는 것...ㅋㅋㅋㅋ



다만 과거에는 유형의 것들을 좋아해서 되팔면 돈이 되었지만, 지금은 여행같은 무형의 것 들을 더 좋아하게 되버려서....재테크가 잘 안된다. 하...




 


여름밤의 남산,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삐걱거리던 그에게 우리 좀 설렁설렁 살자던 나.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너무 주먹 꽉 쥐고 살지 말자며, 어린 동생을 챙겨야 하는 맏이말고 그냥 너답게만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이었는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의 끄덕임은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p 078



몽골로 떠나게 된 데에는 오래된 친구의 채근도 있었지만, 나때문이기도 했다. 초여름이었던 그 무렵, 나는 한 사람과의 권태로운 관계를 정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만 생각했던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마음이 끝나버린 것과 별개로 지난 기억을 충분히 애도해야 했으니까. 잔잔하게 남은 감정은 치우려고 하면 할 수록 마음에 잔열을 남겼다. 그래서 떠나자는 친구의 말에 기대 도망치듯 몽골로 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p 082



학교를 벗어나 사회에 내던져서,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시련(?)들과 마주하면서 머리속이 복잡할때가 참 많았다. 그럴 땐 여행이 참 좋은 것 같다. 그것도 오랜 친구와 훌쩍 떠나는 여행은, 가족과 떠나는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도 힘들었던 사회초년생시절 어느때였나, 내 오랜 친구와 훌쩍 여행을 떠난적이 있었다. 한번은 당일치기 군산으로, 또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아! 여행은 아니지만 정말 현실도피를 하고 싶어서, 고등학생 때 이 친구를 무작정 끌고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창덕궁이었나 ㅋㅋ)으로 향했던 적도 있었다. 답답한 수험생활을 벗어나고자 했던 그때였는데, 왜 하필 도피처로 나는 궁을 선택했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이 외에도 공연보러가자고 이 친구를 끌고가고, 어디 가자고 또 끌고가고. 정말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때마다 여기저기 많이도 끌고다닌 것 같다.



결혼 후에는 내 오랜 친구와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수험생 시절 훌쩍 궁으로 떠났던(?) 그때처럼, 매년 여름 차를 끌고나와서 서해바다를 보러가곤했다. 정확히는 오이도를 지나, 서해바다를 품은 시화나래휴게소를. 요 몇년 간은 코로나때문에, 서로 안전상(?) 비대면으로만 연락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가끔 서로 줄거 있으면, 마스크쓰고 문앞에서 주고 쿨하게 헤어진다.



분명 이 친구와 나는 성향이 꽤나 다른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맞는 건..... 전생에 부부였나 ㅋㅋㅋㅋㅋ




 


여행의 끝은 언제나 조용하다. 분명 어제까진 낯선 나라의 골목을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둘러 덮고 있다. 승객들 모두가 잠들어 조용한데,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여행의 꼬리가 소란스러운 꿈처럼 사부작사부작 밟힌다. 내일부턴 원래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겠지. p 094



여행의 끝자락에 <ONCE>를 다시 꺼내는 건 반복되는 나의 여행들이 이 영화와 닮은 것 같아서다. 떠나고 싶어 근질근질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시끄러운 이벤트는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현실로 돌아가는 사랑과 닮은 것 같아서.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두고 왔던 삶을 이어갈 내일의 나와 닮았다. p 095


아, 여행의 끝. 여행의 끝은 정말 싫다. 여행의 시작과 여행의 끝은 그 방식이 언제나 같다. 예컨데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면 시작과 끝도 비행기, 국내여행이라면 시작과 끝은 자동차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쩜 여행의 시작과 끝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나 다른지.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내가 있던 현실과는 다른 이세계로 향하는 느낌이랄까? 반면에 여행의 끝은 정반대다. 계속 이세계에 있고싶은데, 목덜미를 잡혀서 어쩔수 엎이 현실로 끌려오는 느낌. 진짜 딱 그런 느낌이다. 내가 몇일간 낯선곳을 걸어다니며 여행을 했던 기억들은 꼭 꿈인 것마냥, 그렇게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여행의 끝. 



하지만 여행의 끝이 안좋은 것만은 아닌것이, 여행의 끌을 지남으로써 나에게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꿈꾸게 한다. 팍팍한 현실을 살려면, 언제든 여행이라는 쉴틈이 있어야하니 말이다^_T..




 


여행만 끝나면 여행을 마쳤을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낸다. 처음엔 그저 여행을 기념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뭔가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 걸 모으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다.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을 수집하자는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나의 엽서 여행은 시작됐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상점에 들려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p 148



때로 여행은 물건으로 기억된다.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기억하고 싶다는 핑계로 값을 지불하는 느낌이지만, 물건이 지닌 깊이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니까. 처음에야 여행지에서 데려왔다는 낯선 신기함에 매일 들여다보지만, 삶은 언제나 정신없이 빠르고 여행의 기억은 바쁜 일상에 쉽게 잊힌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잊고 지냈던 여행의 물건이 다시 보인다. 아! 여기 있었구나. 그제야 정신없이 흘러가던 하루를 멈춰 세운다. 이거 거기서 샀었지. 맞아 나 그곳도 갔었지, 한 호흡을 쉬게된달까. p 164


나는 여행을 기념할만한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마그네틱, 팜플릿, 입장권 밖에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마그네틱을 사고, 팜플릿이랑 입장권은 티켓북에 정리하는걸로 내 여행을 기록하곤 했다. 그런데! 엽서라니!!!!!!!!!!! 와, 나는 왜 저자처럼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엽서와 국제우표를 사서,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 여행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과거의 내가 보낸 여행엽서를 받을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여행은 끝났지만, 다시금 여행이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것만 같다. 하, 이런 좋은 방법을 진작에 알았다면 해외여행, 국내여행 가는 족족 미래의 나에게 엽서를 보냈을텐데. 그러고 어느 날 그 엽서를 받으면 괜시리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서 기뻤을거고, 다시없을 여행 기념품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을텐데T_T 역시 여행 고수들은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이런건 기억해놨다가 잘 써먹어야지!



아... 여행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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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 -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아손 그렙스트 지음, 김상열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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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태교★는 외국인이 바라본 1904년도의 대한제국의 모습이 담긴 「스웨덴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거다」 라는 책이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구입하고는 방치해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는건 안비밀! 그도 그럴것이... 조선후기-특히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책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해도 위정자들의 행태와 일본놈들의 행태에 분노만 차오르는지라, 읽으려고 해도 섣불리 손이 안간게 사실이다. 자기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들춰보는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를 피하고 외면할수록, 역사를 무시하고 왜곡하는 일본놈들과 다를바가 없으니!



서애 류성룡의 말처럼 ‘잘못된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훗날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아무리 어두운 자국의 역사라도 꼭 읽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 아손 그렙스트는 스웨덴 사람이자 기자이다.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손은 도쿄에서 본인이 원할만큼의 취재를 할 수 가 없었다. 왜? 러일전쟁의 무대는 러시아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학교 근현대시간에 배웠듯 러일전쟁은 조선 땅이 주 무대였다.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인데, 전쟁터는 조선 땅이라는 아이러니(자매품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청일전쟁도 조선 땅에서 일어남). 



이게 도쿄에 가있는 아손이 러일전쟁에 대해 제대로된 취재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손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던 지역, 그러니까 조선으로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리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기자들에게 전시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았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 때!!!!! 일본으로 파견을 온 스웨덴인 장교가 나타났다. 그는 아손에게 조선으로 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기자라는 신분은 잊어버리시고 보통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역상으로 위장하는 것이지요. 개항지에 있는 사업 동료들을 찾아간다고 하세요. 요코하마의 수입상에게서 상품의 견본을 구하고 낯가죽을 두껍게 해두세요. 나가사키를 지나 부산, 제물포로 가세요. 거기에서 수도 서울은 바로 코앞입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원적인 문화 민족들 중 하나를 대할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수도 중 하나와 접할 수 있을겁니다. 일본에 합병되기 바로 전의 코레아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전쟁 후 코레아의 운명은 일본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p 022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아손은 외국인이라는 본인의 국적을 무기삼아, 신분을 기자가 아닌 ‘상인’으로 위장하였고, 그렇게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아손.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부산은 생각보다 더 낙후되어있었다. 정확히는 조선인이 사는 촌락들이 말이다. 반면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부산뿐만이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시를 하나둘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사람 살기 좋은 땅은 일본인들이 빼앗아가고, 조선인들은 낙후된 지역으로 몰렸던 것이다.


부산에서 받은 코레아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불결했으며, 가옥은 낮고 볼품이 없었다. 일본에서처럼 상점이나 눈길을 끄는 오래된 절도 없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으며, 문밖에는 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쌓여 있고, 털이 길고 측은한 모습의 개들이 쓰레기 주위에 모여 먹을만 한 것을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하수도가 있는데, 끈적끈적한 바닥에서 온갖 종류의 오물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는 머리가 더펄더펄한 애들이 놀고 있었는데 어제 그제 세수한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p 033



조선 땅을 하나둘 차지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속내는 스웨덴 사람인 아손의 눈에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코레아의 해변 촌락을 가로질러서 인력거꾼은 길이 더 넓고 비교적 깨끗한 시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생활력이 강한 일본 종족의 제국주의 근성은 코레아인들의 멸망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마음속으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은 코레아인들의 개혁된 장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것이었다. p 034



만약 조선후기 양반네들이 자신들의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면서 점차 근대화를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분명 조선에는 일본놈들이 근대개혁을 했던 시기보다 더 빠르게, 몇 차례나 근대화 및 개혁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가 오는 족족 차버린건 조선정부와 사대부라 불리는 양반네들, 그러니까 조선의 위정자들이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정신머리가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개혁할 의지가 있었다면 일본놈들이 저렇게 쉽게 조선 땅에 발을 디딜 수는 없었을텐데. 이게 내가 조선후기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분노하는 이유다.





조선땅에 들어온 아손은 조선의 사회상을 사진으로 정말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사진은 그가 쓴 조선 풍물지, 바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가히 놀라울만하다. 이렇게나 많은 조선말기의 사진이 남아있다니! 


코레아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또한 신체가 잘 발달되었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따. 똑바로 치켜올린 얼굴은 거침이 없이 당당하였따. 걸음걸이는 힘차 보였으며 의식적으로 점잔을 빼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들의 몸놀림은 일본인의 특징인 벌벌 기는 비굴함과 과장된 예의 차리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p 032



코레아의 고유화폐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노임이 매우 싸고 빈곤이 확산되어 있기 때문인지, 코레아 화폐 단위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액의 동전 종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100캐쉬에 해당하는 1냥은 스웨덴 돈으로 환산하면 10외레가 된다. 1냥은 10전, 1전은 10푼, 마지막으로 1푼은 다시 10의로 나누어진다. 만약 10크로나에 해당하는 노잣돈을 소액권으로 휴대하려면 1만 캐쉬의 동전을 준비해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동전을 100개 단위로 매듭을 지어 실에 꿴 다음 가지고 다녀야 하니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p 075



더 놀라운 사실은 아손이 경부선 철도의 첫번째 승객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침략정책, 그러니까 우리나라 물자를 일본으로 보다 빠르게 옮기기 위한 일환으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 말이다. 그 철도에서 아손은 일본인 대위와 만났고, 한양으로 오는 내내 그와 많은 대화를 하였다.



“코레아의 선비는 어떤 까다로운 사람의 눈에 노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그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옷을 자기 손으로 입어서는 안 되며 담뱃불도 스스로 켜서는 안됩니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이는 말안장에 제 힘으로 오르는 법이 아니고, 또 다루기 힘든 조랑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하더라도 누가 와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는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비는 사사로운 장사에 관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장사가 바로 노동인즉, 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 예절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으로 속이려 들지는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론으로 결론을 맺는 논법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출된 결론이 옳은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래도 양반들은 기죽는 일이 없지요. 만약 사람들이 그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다른 논리로 반박을 한다면 그는 예를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고, 미심쩍어 하는 사람을 석득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설득시켰따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p 056



우리는 계속되고 있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토의를 했는데, 코레아인들이 일본인들을 왜 눈엣가시처럼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 원인 중 코레아 내의 모든 비경작지와 모든 국내 자원을 일본인들이 유용할 수 있따는 일본 당국의 발표가 제일 컸다. 코레아 사람들은 땅에 대한 애착심이 무엇보다도 강하다. 농업은 생명의 원천이라 만약 농사가 다른 민족의 손에 의해 행해진다면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종말이 다가온다는 증거였다. 일시적 점령이라는 게 결국 강탈로 끝날 것이고, 보호를 받는다는 처지에서 대일본제국에 합병이 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p 081



일본인 대위의 말에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그가 하는 말이 대부분이 사실이라 반박불가하다는게 슬플따름이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 답게, 선비들은 죽은 자의 말이나 되뇌이며,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몰락한 양반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게 몰락한 양반이라할지라도, 양반놈들은 앉아서 글자만 읽을뿐이며, 그 양반들의 부인이 삯바느질등의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니까. 뿐만인가? 이놈의 양반들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송시열^^). 정신승리는 또 얼마나 잘하나. 겉으로는 청나라에 조아리면서, 뒤로는 명나라를 계승했다며 몰래몰래 제사를 지내는 꼴이라니(역시나 송시.ㅇ...). 



일본놈들은 이런 조선의 양반네들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혼마 규스케가 쓴 「조선잡기」만 읽어도, 일본놈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기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조선의 문화와 생활습관 등에 대해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은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국에서는 근대화 개혁을 차근차근 시행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조선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시간에 일본놈들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수단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던거다.





 


 



한양에 도착한 아손은 통역꾼인 윤산갈을 대동하고 이곳저곳을 관찰했다.


내 꽁무니를 바싹 쫓는 윤산갈을 대동하고 코레아의 이 신기한 수도에서 나는 첫 번째 산보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엠버얼리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접거리는 사람은 전혀 없었으나 길 찾기가 쉽지 않았따. 꽤 넓은 몇 개의 거리들이 시내를 관통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완전한 미로를 방불케 했다. 큰길의 대부분이 최소한 60미터 이상의 폭을 가지고 있었고,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그 폭이 원래 6미터가 안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의 한 가운데로는 하수도 역할을 하는 도랑이 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 주위로 점점 작은 건물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급기야 짐을 실은 두 마리의 소과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들로 변했다는 것이다. p 096



서울의 광채가 다른 지방을 절대적으로 압도하고, 모든 코레아 사람이 꼭 서울에 살고 싶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서울 내에서만 궁과 임금의 눈길을 끄는 것이 용이하고 또 눈길을 끌게 됨으로써 공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또한 공직자의 신분으로서만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획득할 수 있다. (……) 지방의 백성들은 과세 부담이 큰 반면, 서울 사람들은 완전한 세금 면제를 받는다. 서울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조합을 형성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지만, 지방은 직인제가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각각의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관의 권력 남용이나 일반사람들의 사기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 p 107


역시 예나 지금이나 수도는 수도인가보다. 심지어 저때는 서울 살면 세금이 완전 면제라니. 이러니 사람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들어가려하지!!




 



아손은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조선의 여성’에 대한 내용에 할애했다. 그도 그럴것이 스웨덴을 비롯한 서양에선 조선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미 두세기나 앞선 18세기 프랑스 여성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뭐, 동서양의 막론하고 여성의 인권이 한참 뒤쳐져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나 달랐다. 



조선 못지않게 오랫동안 왕정이 이어진 서양권에서는 여성이 한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왕의 정부로 권력을 잡고 있던 경우도 많았다. 일반 백성조차도 여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저 참정권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서양과는 달리 동양은 달랐다. 한 왕조가 무너질때마다 혹은 왕이 무능할때마다 그 곁에 있는 여자를 탓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나마 천년전에 있었던 신라의 여성군주들을 보며,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은 그릇된 주자학에 매몰되어,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오롯이 대를 잇는 도구였고, 정쟁의 도구였으며,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패’였다.



1592년 일본의 히데요시가 코레아를 침략했을 때 수많은 남자들이 목숨을 잃어 조정에서는 모든 남자 노비를 노비의 신분에서 면제시켜주고, 그 이후로는 단지 여자만 노비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제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남자는 노비로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여자는 아직도 많은 수가 노비의 신분에 얽매여 있다. 대개의 경우 여자 노비는 남자 친척의 죄에 대한 대가로 자청해서 노비가 되었거나 노비 신분을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p 164



노비가 되는 네 번째 경우로, 한 여자가 너무 가난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할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잘사는 이웃을 찾아가 집과 옷, 연료,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을 노비로 제공한다. 이상한 것은 자유의사에 의해 노비가 된 여자들의 지위는 일반노비들보다 한층 낮다는 것이다. 일반 노비들은 돈으로 자신의 자유를 다시 살 수 있는 반면에 자유의사로 노비가 된 여자들은 이럴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p 165



코레아 여성들에게 지워지는 가장 큰 의무는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 최대의 염원이며, 항상 여자 측에 책임이 돌아가게 마련인 자식 없는 결혼 생활은 이혼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딸들을 매우 일찍 시집보낸다. p 178



학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코레아 여성의 교육은 기껏해야 가사를 돌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층 계급 여서으이 대부분은 한글에 숙달해있으며, 그 중 소수는 수박 겉핥기식이기는 하지만 한문도 깨친다. 중산 계급의 여자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예외적인 일에 속하고, 비천한 계급의 여성들 중에서 다만 점쟁이나 무기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다. p 184



나는 결혼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코레아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에 대해 취하는 공경스러운 태도를 두 눈으로 목격한 후, 여성이 어릴 적을 빼놓고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찌 않고 낮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 전의 여자들은 누구누구의 딸이라든지 누구누구의 누이라고 일컬어진다. 혼인한 후에는 친정 사람들은 그녀가 시집간 도시의 구역 명이나 마을 또는 동네 이름을 따서 그녀를 호칭하고, 그녀의 시부모는 그녀가 혼인 전에 살았던 곳의 이름으로 며느리 이름을 대신하여 부른다. p 187



아손이 이렇게 조선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많은 글을 쓴건,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그 어떤 조선의 전통보다도 조선의 여성들의 모습이 실로  ‘문화충격’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스웨덴에서 자신의 아내나 딸, 누이,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호칭한다고 상상해보라! 스웨덴 여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따. 그녀들은 단지 불평과 불만에 차 있으며 자신의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다. p 188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서 여성은 얼마나 되는가? 그 여성 위인들 중에서 그녀들의 당호가 아닌 ‘이름’이 남아있는 경우는 또 얼마나 되는가? 



자,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시대가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들은 많다. 물론 옛날에 비하면 정말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네 엄마들을 보자. 우리 엄마들은 본인의 이름은 잊힌채, 아직까지도 ‘ㅇㅇ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번엔 조선 왕실이다. 아손은 독일인 의사인 분쉬박사를 만났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분쉬 박사가 갑작스레 앓아누운 태자비(순명효황후 민씨)를 진찰하려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분쉬박사의 진찰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여자라도 외간남자와 얼굴을 맞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조선의 관습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분쉬박사는 태자비의 진찰을 거부당하고, 대신 조선의 남성 의원이 태자비를 진찰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태자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코레아에서 가장 의술이 좋다는 남자 의원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 의원은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대신 벽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아 진찰을 해야했습니다. 가는 비단 줄을 환자의 손목 주위에 바짝 감아 벽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의원의 손에 전달되었고, 이런 식으로 그 의원은 진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의원은 조그마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태자비의 아픈 배를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의원의 손이 태자비의 배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겹의 비단 헝겊과 그 위에 또 솜으로 누빈 일곱 겹의 두꺼운 이불을 태자비의 배위에 얹혔습니다. 결국 이 남자 의원은 자신의 동료 여 의원들이 내린 결론과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악귀가 태자비의 배를 처소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 속에서 악귀가 빠르게 자라고 있기 때문에 얼른 손을 써서 악귀를 몰아내지 않으면 수습하기 곤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섞인 진단이었습니다. 의원은 그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문 중 한 문짝에서 빼온 나무로 탕약을 끓이도록 처방을 내렸는데, 아침마다 환자가 이 탕약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을것이라고 했지요.” p 199



아무리 조선의 왕실 의원이라도 남성은 남성. 당연히 제대로 된 진찰은 하지 못했고, 심지어 진찰뒤 병명이라는게 ‘악귀’에 쓰여있다는 것이다.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이 ‘악귀’라니. 심지어 처방전이 성문의 문짝을 탕약으로 끓여서 마시게 하라니. 이건 뭐 건강한 사람도 죽어나겠다. 결국 태자비는 죽었다.


황족일 경우 그 시신은 깨끗히 씻기고 수의가 입혀진 다음 적어도 다섯달 동안은 서늘한 방에 보관된다. 그동안에 장례식에 드는 비용에 충당할 목적으로 온 나라에 걸쳐 돈이 모금되는데, 대게 스웨덴 돈으로 200~300만 크로나는 족히 된다. 동시에 수천 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어 장례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제작하고,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파견된다. p 202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든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 내 두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p 210



태자비가 죽었으니, 당연히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오죽하면 아손은 그 광경을 수차례 사진으로 담았고,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거라고 했을까. 물론 일반적인 왕정시대였다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동원에 비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할 시대니까. 하지만 태자비 장례식이 거행된 날은 다름아닌 1905년 초이다. 



대한제국의 왕실의 위험을 세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과 인력을 갈아넣어 태자비 장례식을 거행한 같은 해 11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아손이 본 태자, 그러니까 순종은 참으로 못생겼었나보다. 아니 근데 지금의 내가 봐도 못생기긴했다. 고종도 뭐. 분명 조선 초기만해도 세자가 잘생겼니, 왕이 잘생겼니 하는 말들이 실록에 꽤 남아있었는데. 언제부터 조선 왕실의 외모 유전자가 후퇴했나. 역시 완전한 방계로 틀어버린 선조때부터였을까, 으흠. 아님 또 다른 방계로 틀었던 철종때였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보였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것 같았고, 무슨 악독한 괴물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따.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배알할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주신 지고한 황제 폐하이자 코레아 군대의 대원수를 고국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 없을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p 219



고종과 대면한 아손을 보면, 고종의 답정너 성격이 아주 제대로 나타난다(반대로 아손의 처세술도ㄷㄷ). 그러니 자기 부친이 하려던 개혁마저 다 뒤로 엎어버렸겠지. 저러니 민비와 손붙잡고 무당말에 휘둘리며, 척족들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줬겠지. 다시한번 느끼지만 고종은 오롯이 자기의 권력과 무사안위만 중요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종이 자신의 무사안위에 급급하는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백성들-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나태한-은 그동안 속수무책인 채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 이들은 일본인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황제와 황태자를 1년씩이나 가두어두다시피 했을 때도 나서서 멍에를 벗기기는 커녕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못한 가련한 백성이었다. 이런방식으로 왜국(난쟁이족)은 승리를 하게 되었다. 조선 안에서는 이제 사실상 왜족이 군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의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방법은 조선 민족의 수천 년 전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하게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p 255



전통적으로 문자는 양반네들의 전유물이었으니, 일반 백성들은 글공부를 할 수 없었다. 배움이 무기인데, 나라에서 나서서 배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기를 들 수가 없었다. 뿐만이랴? 양반네들의 세금탈취에 허리 필 세도 없이 일만해야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백성들이 작정하고 들어온 일본인을 상대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인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만약 이 십자가들이 보존될 수만 있다면, 이것들은 일본인들이 코레아를 강점한 동안에 저지른 가장 악랄한 행위에 대한 경종이 될것입니다. 바로 이 하얀 십자가가 서있는 곳은 세 명의 코레아 농부들이 일본인들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데 대한 항거의 뜻으로 최근에 완성된 철로를 부수려다가 발각되어 무참히 총살을 당한 장소이지요. 이 십자가 세 개에 몸이 묶인 세 명의 불쌍한 ‘죄수’들이 여기에 서 있었고. 땅이 울퉁불퉁한 저쪽에 일본 군인들과 그들의 지휘관이 정렬해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발사 명령이 떨어졌고 군인들은 57발의 총탄을 날렸습니다. 코레아인들은 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지요. 또한 시체를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시체는 이곳에 엿새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매장하기 위해 시체를 옮길 때는 독수리와 육식 조류들이 얼굴을 파먹어 신분조차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말 없이 서서 이 비극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코레아에서 본 일본인의 인상은 일본에서 받은 그들의 인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물의 외면이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곳에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일본의 잔인함과 냉정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p 267



정말 충격적인건, 이 책에 일본인이 조선의 백성들을 총살하는 사진이 무려 4컷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가련한 조선의 백성들, 왜 일본인에게 총살을 당했어야했나?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일본인들이 강제로 조선 땅을 빼앗아가서, 항의하고 싶어도 항의할 방법이 없어서 철로를 부수려고 했는데 일본인에 발각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십자가 기둥에 묶고, 57발의 총탄을 달렸다. 3명을 죽이는데 57발의 총탄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총으로 난사를 했다. 이렇게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갈동안, 조선의 위정자라는 것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휴....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리더’가 누구냐는 점이다. 이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리더’로 뽑으면 안될 사람들을 가릴 수 있는 눈은 나름대로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말이다. 매번 우리나라의 리더가 될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 왜 뽑으면 안될 사람만 수두룩한지. 대선 이후 다음 5년도 우리나라는 왠지 암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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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22-02-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놀랍네요. 예전에 일본이 조선을 연구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조선을 은근히 칭찬하더군요.. 아마 자기들끼리는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욕하고. . 하지만 당시 양반 문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네요. 꼭 읽어 보겠습니다. 일단 제 페이퍼에 남아 두겠습니다.

피로 2022-02-19 09:26   좋아요 0 | URL
왕조시대에는 귀족문화와 같은 양반문화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세계가 발달하면서.... 변해가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말 양반문화가 더더욱 공고해졌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