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집은 내가 되고 - 나를 숨 쉬게 하는 집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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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조금 특이하다.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세이인데, 이게 마냥 흔히 볼수 있는 에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독특하다고 해야하나? 대부분의 에세이가, 저자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힐링을 주거나 위로를 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정확히는 본인이 좌절했던 경험을 극복하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다르다. 엄밀히 따지면, ‘공간 에세이’라고 해야하나? 아님 ‘내 집 마련일기’? 라고 해야하려나. 그러니까,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젊은이들의 꿈!인 내집마련 고군분투기 인 것이다. 




저자는 원룸부터 시작해서 전세를 전전하며, 내집이면서 내집아닌 남의집살이의 설움을 느꼈다. 분명 내 집인데 집 꾸미는 것 하나 쉽게 할 수 없음에 슬퍼했다. 내 집을 내가 원하는대로 꾸미는 방법은 단 하나, 내 명의로 집을 사는 것. 그렇게 저자는 본인의 소비습관을 바꾸고,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모두가 원하는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물론 비싼 땅에 지어진, 비싼 집은 아니다. 도심 한켠에 있는 구축, 작은 아파트. 하지만 저자는 그 곳에서 본인만의 공간을 꾸려나간다. 



사계절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나무가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고 꽃이 되었다가 낙엽이 지고 결국 앙상한 가지만 남는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집에 옹래 머물며 차분히 공간을 관찰하면 굳이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실내애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창문 앞이 뻥 뚫린 새 집에 살면서 계절에 따라 해의 위치가 바뀌고, 실내에 드는 빛이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시간이 몹시 흥미로웠다. p 065



과거에, 그러니까 내 집이 아닌 엄마집에서 살았을 땐, 집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1도 해본적이 없다. 일단 창 밖을 내다보면 옆 동의 아파트가 보였고, 아래는 차가 쌩쌩다니는 도로였다. 따라서 계절감이 느껴질만한 그 무엇이 1도 없었다. 물론 아파트 단지내에 심겨있는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당시의 나에겐 나무가 관심사가 아니기도 했고. 뭐, 언제나 방에 틀여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했으니 계절감이라곤 1도 느끼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결혼 후 온전한 내 집에서 살고 보니, 집에서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던 내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별로 햇볕이 들어오는 시간이 달랐다. 뿐만인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우리집 뒷산도 여러 색깔의 옷을 입은 것마냥 패션쇼를 해댔다. 집안에만 있어도 온전히 계절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겨울엔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소소한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고, 여름엔 여름느낌나는 인테리어를 하게 된건 덤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집에서도 조금만 관심을 두었다면, 계절감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텐데 말이다. 이런 차이는 아마도...내집이냐 아니냐에서 오는 차이가 아닐까 싶다. 


또래와 비교해 독립을 일찍 했고, 모든 걸 부모님 도움 없이 스스로 해왔기 때문에 자취 생활에서만큼은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을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방이 없는 것과 있는 건 엄청난 차이였다. 각 방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부터 정해야 했고, 원룸에 오래 거주했기에 가구가 워낙 단출해 새집에 맞춰 새로운 가구를 들여야했다. p 076



온전한 내 집을 갖게 되면, 집에 대한 애정도가 달라진다. 내 집에 대한 애정이 높아지니, 당연히 내 집을 어떻게 꾸밀지도 신경쓰게 된다. 여기는 이런 가구를 놓고, 저기는 저런 가구를 놓고, 이쪽에는 화분을 놓고, 저쪽에는 책을 꽂고 등등등. 엄마집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던 나만의 인테리어가, 내 집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걸 샀다는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기본 인테리어가 괜찮은 널찍한 집에 살게 되니 좁은 집에 끼어 살 때보다 인테리어에 대한 욕망이 더욱 커졌다. 지난날엔 일정 수준 이상은 아예 포기하고 지냈다면, 이 집에서는 어딘가 아주 조금만 바꾸면 훨씬 나아질 것 같은데 집주인이 아니라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답답했다. 나의 갈중을 해결해줄 방법은 가구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었던 브랜드의 가구를 사거나 한 번도 놓아보지 않았던 유형의 가구를 두며 집을 꾸며나갔다. p 078



결혼 후 난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서 신혼집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 유년시절에 살던 구축 아파트를, 엄마에게 제값주고(^^...1원 한푼까지 다 받아가는 우리 엄마..) 그대로 사서 가지고 있다가, 결혼 후에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뭐 그런 이야기? 솔직히 그 집은 너무 오래된 집이다보니, 신혼집으로 살기엔 문제점이 많긴 많았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이 담겨있던 집이었기에, 남들에겐 불편한점도 나에겐 너무 익숙했던지라 사는 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다만... 워낙 오래된 집이다보니, 오래된 아파트에서는 흔히 나오는 ‘재건축’ 이라는 문제로...... 내 집임에도 마음껏 꾸밀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T_T. 언제 부실지 모르니 가구도 당연히 사지 않았다. 인테리어? 역시나 하지 않았다. 정말 이 집을 오늘 부실지, 내일 부실지 모르는 시한부였기에, 가전이나 가구를 섣불리 살 수가 없었다. 결국 신랑이 자취할때 쓰던 소규모 가전제품들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고, 덕분에 우리 신혼집엔 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다. 이거 참.. 좋은건지 나쁜건지^_T...



대출조차 끼어있지 않았던, 오로지 내가 열씸히 내돈 모아 마련한 100% 내 집이었는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아이러니라니. 집 살돈 모으는 건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재건축’ 그 한 단어 때문에 의도치 않는 내 집마련 저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건축을 하게되면 추가금이 나오는건 당연지사니 말이다. 그뿐만인가? ‘재건축’을 위해 내 집을 부시게 되면, 나는 그 동안 다른 집에 들어가 있어야하니 그에 대한 비용도 당연히 필요해진다. 



동경하는 게 생기니 욕심이 생겼고, 욕심은 목표가 되었다.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저지를 용기가 생겼다. 살아지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만, 주체적으로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목표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보니 목표는 구체적일수록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목표를 만들고 그걸 달성하는 데서 보람을 얻고, 한 단계씩 성장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나는 전셋집을 얻는 과정에서 커다란 목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돈을 쓴는 방법도 바뀌었다. 커다른 목표들을 위해. p 085



그렇게 내 첫집은 ‘재건축’을 이유로 부셔졌고, 나는 급하게 아주 자그만 신축빌라에 전세로 들어갔다. 어차피 2년 지나면 재건축 아파트가 지어질거라 생각했으니, 전세를 구하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었다. 하지만 소오름돋게도,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재건축이라는게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게 아닌데, 중간중간에 문제가 엄청 생기는지라, 2년안에 끝날 수 있는게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난 그 2년안에 재건축이 끝날거라 믿고, 별 생각없이 눈에 보이는 전세집을 들어간거다. 후..... 



결과론적으로 내 첫집 재건축은 중간에 사건사고가 많아서, 오랜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전세로 들어간 신축빌라는 하 ㅋㅋㅋㅋ 왜 빌라살면 안된다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재건축은 세월아 네월아, 전세로 살고있는 신축빌라는 진짜 개쓸...ㄹ.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청약을 많이 시도했다. 내 자신이 또 대견한게, 내 청약통장은 무려 중딩때(^^)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통장이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서도 꾸준히 청약통장에 돈을 넣었다는 사실이다. 학생때는 달달이 2~3만원 입금이 고작이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알바를 시작하면서 월 정기 입금금액을 10만원으로 올렸다. 취업이후로는 중간중간에 더 많은 돈을 입금할 때도 있었다. 거기다 이와 별개로 적금도 참 열씸히 들었던 내 자신 칭찬해!



어느새 내 청약통장에 있는 돈은 N천만원. 거기다 무수히 많은 청약 도전 끝에 하나 성공! 그 집이 지금 사는 집이다. 뭐, 이 집도 말이 많긴 오지게 많다. 분명 대규모 단지의 아파트였고, 건설사 브랜드만 보고 ‘개이득!!!’ 이었는데, 알고보니 도시 재개발 조합이 시행하는 곳이었다. 하. 내 첫집 재건축으로 조합에 이가갈렸던 난데, 청약 당첨된 아파트도 조합아파트였다니. 근데 이 사실을 입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후 난 정말 건설사 브랜드가 좋아도, 조합 아파트는 절대 입주하지 말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다는건 안비밀. 왜냐고? 대다수의 조합아파트는 조합에서 남겨먹는게 많아서, 아파트 건축에 사용하는 자재가 구려진다. 뿐만아니라 조합장이 과하게 해쳐먹어서, 조합장만 수시로 변경되거나, 공사가 연기되는 등 정말 좋은게 하나도 없다. 재건축 조합과, 재개발 조합을 연달아 겪은 내 경험이랄까.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완공된지 2년되었는데, 곳곳에 부실시공으로 문제가 많고, 심지어 아직까지 등기가 안났다. 분명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이랄까? 헌데 대부분의 조합아파트가 부실시공과 등기지연 문제를 가지고 있다(그땐 몰랐지...T_T). 



재건축 중인 내 첫집은, 내가 세 번째 집에 들어오는 동안도 무기한 연기되고 건설사 바뀌고 등등 여러 사건사고등으로 n년이 지나서야, 건물이 올라갔고, 올해 중으로 준공예정이다.



내 첫집과 지금 사는 집 사이에 낑겨살던 신축빌라 전세집은 ㅋㅋㅋㅋㅋ 역시 빌라는 살게 못된다.


 



 



뭐, 지금 집까지 오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찌저찌 난 내 집에서 살고 있다. 물론 내 첫집과 다르게 지금 집은 대다수가 은행지분(^^..)이지만 뭐, 대출도 자산이라니까?! 그려러니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집’이라는 것. 내 첫집과는 달리 부서질 걱정도 없기에,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데로 인테리어를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집 거실에는 소파도 TV도 없다. 소파가 있을 법한 자리에는 검은색 철제 다리를 가진 라운지 체어 두 개가 있고, 반대편 벽면은 빔을 쏘기 위해 아무것도 없이 비워놓았다. 여태 자취를 하면서 한 번도 소파와 TV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갑자기 그러면 소파와 TV를 사야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TV를 보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눕다시피 편하게 기대거나 아예 노워 있는 건 소파보다 침대가 훨씬 편했다. p 131


내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한건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광파오븐을 사는 것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는 신랑이 자취하면서 쓰던 아주 작디 작은 저려미 친구들인데다가, 너무 오래사용해서 거의 혹사(?)시키는 기분까지 들게했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을 보내고 새 친구들을 만나는데 얼마나 기쁘던지T_T!!! 특히 건조기, 와 건조기는 신세계였다.



가구는...... 남들 다 하는 소파를, 나는 사지 않았다. 나는 본투비 눕눕에 익숙한 사람이라, 소파를 사봤자 결국 바닥에 누워있을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소파를 둘 자리에 책장을 두자(!) 라는 마음에, 거실 양쪽 벽면에 책장을 설치했다. 완벽한 거실의 서재화랄까. 여기서 함정은 우리집에 있는 제일 작은방에도 2개의 벽면에 책장을 설치해버렸다는 것. 우리집은... 서재가...두곳이나 된다ㅋㅋㅋㅋㅋ



이 외에도 사지 않은 것들이 꽤 된다. 정말 혹사시킨 것 같아서 보내준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친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혹사중이기 때문에! 고로 난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들어간 돈이라곤 위 가전 4종, 거실과 작은방 벽면 붙박이 책장 설치정도? 세상 많은 시간을 들인건 명실공히 붙박이 책장이다. 내 책들이 오래오래 꽂혀있는 공간이니까! 후후후.




 



새 집에 입주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나? 내 심신에 문제가 심각해졌을 무렵, 난 집에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당시엔 식물의 ‘ㅅ’짜도 몰랐지만, 초록색을 보며 힐링하겠다는 생각으로 식물을 들인 것이다. 그리고 .... 엄청난 식물공부가 시작되었다.



환기가 어렵고 베란다가 없는 오피스텔에 살면서 오랜 시간 다짐했다. 언젠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 꼭 식물들을 집안에 두겠다고. 가구도 다 들어오지 않은 집에 나는 식물부터 들였다. p 150



일주일에 한 번 식물들을 베란다로 옮겨 물을 줬고, 햇빛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분갈이를 위해 배양토를 몇 킬로그램이나 구입했고, 액체  비료나 흙에 섞는 영양제도 샀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은 서툴다는 것을 무섭게 증명하듯 입주 한 달이 지났을 때쯤부터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p 153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식물이 자라는 건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고, 방법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반응이 느려 인내가 필요했다. p 154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식물관련 책은 1도 안읽었었는데, 식물을 키우다보니 식물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집에 맞는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도 하나둘 깨우쳤고, 내 식물들이 왜 죽어가는지도 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물키우기 2년차. 이제 나에게 분갈이는 껌이고, 비료주는 것도 껌이고, 식물 번식도 나름대로 자신있다. 그럼에도 간혹 죽이는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집에 식물이 있으면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조금 더 책임감이 생기고, 조금 더 환기와 채광에 신경을 쓰게 되고, 조금 더 행복해진다. p 155



문제는.. 식물을 키우면서 채광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을 거실 창가에서 키우다보니, 거실 창 커테은 언제나 묶여있다. 식물을 키우기 전에는, 거실에 있는 내 책들 색 바랠까봐 언제나 커튼을 쳐놨었는데. 결국 난 식물을 얻고 책의 색바램을 지키지 못했다. 흑흑흑.



그리고 깨달았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는 책을 두면, 책이 상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우리집에선 책과 식물을 분리할 공간이 없다는 더 슬픈 사실을T_T.



결국... 이사가 답인건가....하..



내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가꾼 집, 깨끗하고 쾌적한 집, 애정이 담긴 집에 사는 사람은 당연한 수순으로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농도가 짙어지고 집에 머물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안도감과 편안함 같은 감정들이 차오른다. p 182



지금까지 여러 집에 살면서 확실히 알게 된건, 내 집, 내 공간에 대한 내 애정이 나를 바꾼다는 사실이다. 나는 옛날부터 자타공인 집순이였다. 다만 과거엔 그저 나가기 귀찮아서 집순이였다면, 지금은 아니다. 지급은 내 집이 너무 좋아서 나가기가 싫다. 집안에만 있어도 놀거리가 넘처나고, 볼거리가 넘처나고, 무엇보다 가만히만 있어도 편안한 이 공간을 두고 밖에 나갈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누군가는 집안에만 있는 게으른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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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0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님의 파란만장만 집 장만기에서 결론은 조합아파트 가지마라네요 ㅎㅎ 피로님의 힘듦이 느껴지는데 읽는 저는 넘 재미있었어요 ㅎㅎ

피로 2022-02-07 13:34   좋아요 1 | URL
헛, 맞아요 ㅋㅋㅋ 결국 결론은 조합아파트는 절대 안된다!! 라는 점이죠..ㅎㅎ
 
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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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스테디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라틴어수업」의 속편이 나왔다. 「라틴어수업」이 저자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면, 이번에 발간된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신학교를 다녔던 저자가, 종교에 대한 생각을 엮은 책이다. 정확히는 종교를 포함했지만, 그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과거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난 종교를 따지자면 무신론자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지않고, 무속에서 말하는 귀신도 믿지 않는다. 뭐, 하지만 관심사가 관심사인지라 소름돋게도 난 국내 무속신앙 책도 읽었고, 전 세계의 신화와 관련된 책도 거진 다 섭렵했다. 물론 너무 잡다하게 읽어서 그런지 머리속에 남는 건 없지만. 즉, 나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믿지않고, 믿을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학문으로써 혹은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으로써의 종교는 공부하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 신학교를 다닌 본인이 깨우친 종교,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 종교를 믿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쓴다고 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써는 약간의 물음표가 떠다니거나, 이 책을 덮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저자의 전작인 「라틴어수업」을 읽어보았고, 물론 저 한권뿐이지만 저자가 어떤식으로 글을 쓰는지를 아주 대충은 느낄 수 있었고, 적어도 내가 혐오하는 방식의 종교를 옹호하는 글은 없을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추측은 맞았다. 이 책은 전작처럼 인문학책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 모습을 이해하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할지 이정표를 제시해주니 말이다.


최근 우연히 <나의 아저씨>라는 TV 드라마를 알게 됐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드라마 속 40대 주인공과 그 친구들을 보며, 자기 주위에 ‘저런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지는 않아서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요. p 026



나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누군가를, 이 혼란한 삶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생각의 어른’을 바란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성장에 비유한다면,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어가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p 028


아, 슬프게도 나 역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 주위에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뿐만아니라, 나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하던 그들 역시 진정한 ‘어른’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 주변에는 진정한 ‘어른’이 없다. 물론 나 포함해서 말이다.



그저 미성년이 아닌 나이이며, 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나이, 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있을 뿐, 딱 거기까지다. 그러니까 다들 몸만 크고 나이만 먹었을 뿐, 생각의 성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근데 이게 내 세대만 그러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회사 동료들을 보자. 내 또래도 있으나, 나보다 한참 윗 세대, 심지어 정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대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진정한 ‘어른’은 없다. 다들 남탓하기 바쁘고, 남의 공은 자기 껏으로 가로채기 바쁜 사람들 뿐이다. 그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라고,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또 어떤가.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없다. 서로 비방하고 헐뜯기 바쁘고, 국민을 위한다는 쇼맨십만 보이니 말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더더욱 진정한 ‘어른’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나 역시도 왜 내 주변엔 ‘어른’이 없는 건지 슬퍼했으니 말이다.



헌데,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완전 정곡. 나는 진짜 ‘어른’이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내 스스로 그런 어른이 될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내 뒷 세대들도 이런 나를 보며, 진정한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세게 와닿았다. 어차피 내 윗세대에게 진정한 ‘어른’을 바라는건,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는 변화를 싫어하는 그들에게는 무리한 일이며,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내 스스로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 내 뒷 세대들만이라도 지금 내가 겪는 이 일들을 겪지 않게끔 하는 것.





어떤 시대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어느 시대라고 특별히 거룩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는 지나간 역사나 인류 문명의 자산에 쌓인 데이터를 통해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역사는 똑같지는 않아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참조할 만한 가장 좋은 예가 되어주지요. 그것이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겁니다. p 100



내가 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보다 더 나은 오늘, 내일로 향하기 위해. 단지 그 하나뿐이다. 그렇다고 역사에 기록된 모든 시대가 전부 잘났느냐? 그건 아니다. 일단 지금인 민주공화정시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왕조시대였다. 철저한 신분사회였고, 신분간의 계층이동은 불가했다. 뭐 오늘날에도 보이지 않는 신분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할말 없지만, 적어도 왕조시대였던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살기 좋아진게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수 많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역사적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대게 반복되었다. 분명 시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거의 비슷했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에 살고 있던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 귀하신 양반네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그놈의 양반운운하며, 어떻게든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픈 역사가 반복대는 와중에 무언가를 깨우쳤던 한 양반, 류성룡. 그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징비록’을 집필했다. 대부분의 아픈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권력층들의 부패와 무능, 외교에 대한 무지였으니, 앞으로의 역사에서는 이런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징비’하라는 의미로 책을 집필한것이다. 하지만 이런 ‘징비록’ 조차도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에게는 하등 소용이 없었다. 이후로도 아픈역사는 반복되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민주공화정 시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이 땅에서 한국전쟁 이후로 서로의 목숨을 죽고죽이는 ‘전쟁’은 사라졌으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외교, 정치, 사회, 경제 아주 전반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 피해는 역시나 국민들에게 가중된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고 있기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한다. 왕조시대에는 부패와 무능에 찌든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없었으나, 민주공화정 시대는 다르다. 적어도 국민들이 깨어있다면, 권력층을 끌어내릴 수 있고,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전 세계에 알릴 수도 있다. 뭐, 그렇다고 부패한 권력층이 스펙타클하게 바뀐다는 건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비록 오랜시간이 걸릴지언정 변할거라는 희망이 있다.



우선 종교의 자유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본권으로 여기에서 헌법상의 다른 기본권이 파생합니다. 세속주의 헌법을 채택한 우리나라 헌법 제20조도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 종교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 둘로 나뉩니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합니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서 종교 의식, 종교 선전, 종교 교육,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합니다. 다만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기본권이나 사회 공동체 질서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됩니다. p 131



우리나라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해서 누구는 불교를 믿고, 누구는 천주교를 믿고, 누구는 개신교를 믿고, 누구는 원불교를 믿는다. 또 누군가는 나처럼 종교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가 믿는 게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지탄해서는 안되며, 서로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유독 특정 종교에서, 그 특정 종교를 믿는 아주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길이 없다. 심지어 그 종교를 앞에서 정치까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 종교가 과거에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때, 당시의 선교사들은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 종교가 믿는 신 역시 대한민국 땅에서 자신을 믿는 일부 신자들이,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고, 혐오를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우리나라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가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국교로 삼지 않으며, 누구도 종교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상식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으려면 상대의 종교적 신념도 존중하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생략…)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혹은 종교적 가르침을 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신에게 기쁨을 주는 종교적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자 오만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고 말했던 의미를 그리스도교뿐만아니라 모든 종교 공동체가 모른 척 하지 않아야 합니다. p 136



난 종교, 신, 귀신 그 어느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교 사찰 답사를 좋아한다. 개화 당시에 한반도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지역 곳곳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당 답사를 좋아한다. 제주에 남아있는 우리의 무속신앙 흔적을 찾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외에 한국 땅에 있는 개신교의 흔적을 찾는 것은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마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개신교의 민폐와 부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세계사에서 배웠던 개신교는 종교개혁이래 구교(천주교)에 반발하며, 파생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배웠다.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개신교는 학문으로써 배움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개신교는, 글쎄. 내가 역사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 개신교 신앙에 심취한 일부 신자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며 비난한다. 뿐만인가? 그저 신을 찾는 독실한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정말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가져가는 행위도 있다. 오죽하면 부자교회, 세습교회라는 말까지 나올까. 거기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결탁까지. 이런 현상 역시 내가 역사속에서 배운 프로테스탄트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난 이래뵈도 초등학교 땐 교회를 몇년간 다녀봤고(친구따라), 중학교때는 성당을 다녀봤고(친구따라), 고등학교는 심지어 천주교학교인 미션스쿨을 다녔다. 뭐, 그와 별개로 어렸을 때부터 사찰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사찰에서 모셨다(친가 불교). 그러니까 이유야 어찌했든 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종교는 나름대로 겪어본 셈이다. 뭐 이 과정에서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종교를 믿고, 구원을 청하느니, 그럴 힘으로 나 자신을 믿고, 내가 번 돈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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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 - 낯선 곳에서 생각에 중독되다
김경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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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면 여운이 남는 책이 있고, 개운하게 ‘끝!’하는 책이 있는다. 이 책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는 전자에 속한다. 읽고 나서도 꽤나 여운이 남는다. 아무래도 내가 즐겨하는 여행하는 방식이 그 장소에 대해 사유하며, 고찰하는 인문기행이다보니, 같은 선상에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꼭 내 마음 같았나보다. 



이 책의 인문기행은 크게 유럽, 일본, 중국, 아시아, 한국으로 나뉜다. 모든 단락들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내 눈에 들어오는 기행은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이었다. 세계사, 한국사 가리지 않고 즐겨보는 나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와 일본사를 즐겨읽고, 동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다른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왔는지에 대한 생각도 자주하다보니, 아무래도 유독 더 저자의 일본기행과 한국기행을 눈여겨 본 것 같다.



인문기행이라는 것이 때로는 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저자는 양쪽 모두의 시선으로 여행지를 바라보았다. 물론 문학적 소양이 비교적 낮은 내 입장에서는 문학적 시선의 인문기행이 조금은 어렵기도 했지만,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인문기행은 어떤 부분에선 매우 공감한 부분도 있는 반면, 또 어떤 부분에선 저자와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내가 맞고 저자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감상 역시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쳐진, 편협한 시각은 위험하기 때문에, 여러 시선으로 바라본 뒤에 정말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도출하면 되는 것이다. 



일본 인문기행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괴물인가. 맹자와 순자가 수없이 교차하는 현세의 시간들이 광대한 실험장이다. 선은 악의 독성을 제거하면서 밝은 쪽을 향하는 특성이 있다. 악의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그 자체의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불에 타버린 금각사는 일본 국민들의 모금으로 재건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금각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 121


교토의 금각사는 사시사철, 그 어느때 가도 관광객이 바글바글한 핫플레이스다. 생각해보면 금각사도 여느 일본 사찰과 다를게 없는데, 유독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거 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금박이 씌워진 금각사의 모습 자체를 좋아하는 듯 싶다. 뭐 따지고보면 나도 화려한 그 모습에 끌려, 금각사를 두어차례 방문했으니 할말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금각사의 유래는 이렇다. 금각사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뒤 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950년에 한번 화재로 불타없어졌다가, 5년 뒤 재건했다. 





나는 금각사가 왜 불타 사라졌는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목재 문화재야 원래 화재사건이 자주 일어나니, 자연적인 현상이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금각사 화재는 방화였다고 한다. 심지어 이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금각사』도 출간되었다. 



실제 금각사 방화범인 하야시 쇼켄. 그는 금각사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그가 왜 금각사를 불태웠을까? 그는 방화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으니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겠다. 항소도 하지 않겠다.” 



금각사 방화를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던 그. 심지어 그곳에서 나고자랐던 그. 그는 대체 왜 금각사에 불을 냈을까? 소설 속의 방화범은 금각사의 미에 빠져, 금각사를 온전히 제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금각사에 불을 냈다는데. 실제 방화범은 대체 왜? 악한 마음을 품고 불을 냈던 것일까, 아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금각사를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을 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 있었던걸까.



궁금하니 우선 소설 『금각사』부터 읽어야겠다. 하하하.



‘여우사냥’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작전명이다. 국모를 찌른 칼, 히젠도 칼집에는 번개처럼 일순간에 늙은 여우를 베다라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사건에 가담한 56명의 낭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토오 가쓰야키는 이 끔찍한 범행을 잊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칼 히젠토를 절에 맡기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을 요청했다. p 124



1873년 고종 집권부터 난국을 바로잡고 조정을 일신하기 위해 1894년 김홍집 내각을 수립할 때까지 고위직을 자치한 민씨 일가는 51명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모친과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구한말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명성황후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팽창하는 일본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p  125



후쿠오카의 유명 관광지중 하나 쿠시다 신사. 그 곳에는 민비를 찌른 칼이 봉안되어 있다. 나 역시 후쿠오카에 갔을 때 이곳을 가면, 그 칼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들러볼까 싶었다. 아쉽게도 명성황후를 찔렀다는 크 칼, 히젠도는 볼 수 없었다. 과거에는 공개를 했었으나, 한국인들의 폐기 또는 인도 요청으로 전면 비공개가 되었다.



명성황후, 민비라 불리는 그 여자, 고종의 왕비였던 그 여자. 그에 대해 생각해보자.



저자는 민비를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 명성황후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저자와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민비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건 맞다. 하지만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것이 정말 ‘나라’였을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그랬을까? 적어도 민비가 죽기전까지의 행태를 본다면,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건 나라가 아니라, 자신과 고종의 왕권을 지키며, 즉 등골을 빼먹을 수 있는 순진한 백성들이 있는 나라였다.



저자가 말했듯 조선 말, 민씨일가는 고위직을 차지했다. 고위직이 아닌 직책에도 민씨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 행태는 관직매매, 백성에게 빨대꽂고 세금 빨아먹기였다. 민씨일가는 부패의 온상이었다. 물론 민씨일가가 권력을 차지하기 전, 안동김씨 세도기부터 이미 조선의 위정자들은 전부 부패했었다. 민비가 정말 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면, 고종과 권력을 잡았던 그 때, 부정부패를 척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바통을 이어받은듯, 민비와 고종, 민씨일가 및 수 많은 인척들은 계속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죽이겠다고 군대를 일으켰고, 심지어 외세까지 끌어들였다. 뿐만인가? 민비와 고종은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총애하여, 그 무당에게 온갖 재물을 얹어주며 옆에 끼고살았다. 대체 민비의 이 모습 어디에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민비는 조선의 백성들 손에 죽어야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백성들에겐 나쁜놈이었던 민비는, 더 나쁜놈인 일본에 의해 죽었다. 백성들은 이제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해야하고, 누굴 벌줘야하나? 민비가 일본의 손에 죽음으로써, 그에겐 ‘동정’이라는 면죄부가 생성되었다. 오죽하면 그를 미화하는 드라마, 뮤지컬이 계속 양산되겠는가.



민비가 일본 손에 죽었다고 면죄부를 주어선 안된다. 그는 고종과 함께 조선 망국행 급행열차에 브레이크를 부신 인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난 더욱 일본놈들에게 분노가 치민다. 일제로 인해 죗값을 치뤘어야할 고종과 민비에게 면죄부가 주어졌으니.



차디찬 돌 시비가 반가웠다.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의 명문사학 도시샤대학 캠퍼스 복판에서 시인 윤동주가 현세를 살고 있었다. 일본의 천년고도인 교토 시내 헤이안 신궁과 교토대 사이 가모가와강 안쪽의 교정은 영국풍 건물로 바뀌었고 흩어진 꽃다발과 종이학 몇 마리가 시비 제단을 지키고 있었다. 문학의 열망을 저버린 채 짧은 목숨을 마친 식민지 청년의 아픈 사연은 아직도 수용하기 힘든 역사의 현실이다. p 133



잊기는 쉬워도 잊히기는 어렵다. 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공간에서 나의 사고는 망각과 기억 사이를 분주히 들락거렸다. 그의 언어는 죽어서 명예를 지켰고 남겨진 사람들의 긍지로 부활했다. 그를 따라다니던 죽음의 십자가를 넘어야 오랜 이 갈등이 풀려날 텐데. 아직은 두 나라 사이에 가파른 비탈길은 끝나지 않고 있다. p 136



교토 도시샤 대학. 나 역시 신랑과 함께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간적이 있다. 위치를 모른 상태에서 윤동주 시비를 찾으러 갔을 땐, 왜 이리 외진곳에 있는가? 였는데, 막상 생각해보니 그리 외진곳도 아니었다. 내가 보았던 윤동주 시비는 그 옆의 정지용 시인의 시비와 함께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시비 앞에는 조그마한 태극기도 나부끼고 있었다.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갔을 당시에는 크게 생각치 않았던, 시비의 건립 취지를 지금와서 생각해봤다. 도시샤 대학의 윤동주 시비는 도시샤 대학 동문들과 재일교포,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즉 일본 민간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이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려고 모금활동을 하고, 운동을 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우리나라 근대사를 볼때마다 유독 느끼는 것 하나는, 정부가 주도해서 해도 모자를 일들을 대부분 민간에서 주도하고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도로 국민들에게 빚을 지는 정부라니. 매번 대통령이 바뀌면 변하겠지, 변하겠지 했지만, 슬프게도 역사는 반복되고, 변하지 않았다.



료마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메이지 유신 100년 만에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각색된 것이다. 1962년 4년 동안 <산케이 신문>에 연재된 8,000매의 원고는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혁명가의 풍운아였지만 19세기 말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가 수줍음을 잘 타고 시골 출신이라는 점, 놀라운 검술과 뛰어난 조정력으로 사츠마, 조슈, 도사번이 가담한 막부 반란군 삿조동맹을 성사시켜 유신이 무혈혁명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 일본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지만 32세의 젋은 나이에 살해되어 생을 마친 인생 역정은 스토리텔링의 완결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p 148~149



메이지 유신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개화기 청년들의 애국심과 결단이 빚어낸 성공이다. 공익에 헌신하고자 했던 젊은 선각자들이 유신의 물줄기를 잡아냈다. 후세들은 그들을 정확히 관찰하면서 옳은 평가를 내리고자 했다. 치밀한 분석과 따뜻한 시선이 유지되어야 가능한 영역이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p 150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메이지 유신’. 우리는 이를 보고 깨달아야할 점이 매우 많지만, 뭐 생략한다. 저자는 어디까지나 사카모토 료마를 찾아 간 길위에 있으니, 나 역시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난 저자가 들렀던 장소는 아니지만, 교토 가와라마치 일대를 걷다가 아주 우연치않게 사카모토 료마와 관련된 장소에 들른 적이 있다. 그 곳은 사카모토 료마가 괴한에게 습격받아 사망했던 그 장소, 오우미야 터였다. 그 장소에 서서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그는 당대에 있던 인물들과는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막부를 찾아가 대정봉환을 성공시켰던 사람이며, 근대화를 위해 나라의 문을 활짝 열게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드라마에 열광한다.



그런데 그런 사카모토 료마가 지금처럼 유명해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작가 시바 료타로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그는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을 인물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었을 인물을, 수면 위로 올리는 힘. 일종의 스토리텔링(물론 그 인물 자체의 일생도 중요하겠으나). 그것이 바로 이름을 남기느냐 아니느냐에 차이 인듯 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다. 위대함과 추악함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빛나는 역사가 되기도 하고 불편한 과거가 되기도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초석으로 성공한 메이지 유신은 결과론적으로 일본에게는 빛나는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에겐 일제강점기의 초석을 다진 사건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 인문기행


임금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항복하지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추위와 배고픔이 지쳐있던 백성들은 어둠을 틈타 성을 넘나들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에워싼 산성은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을 텐데 가만두어도 죽거나 항복할 것임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최명길과 김성한의 불꽃 튀는 언어의 칼날들이 겨울 눈송이들을 녹였으리라 짐작된다. 병사들의 수어장대와 사방 방어대열에 정신없던 순간에도 최고 의결기구인 임금의 어전회의는 남한산성 초라한 피난처 현장에서 끝까지 우왕자왕하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생략…) 그리하여 마침내 삼전도 항복이라는 치욕을 역사에 남긴 안타까운 임금 인조. 이마가 찧기고 백성들을 볼모로 잡혀가는 쓰라린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상처는 어쩌면 당파싸움과 세력대결로 세월을 보낸 조선사회의 예고된 비극이었다. p 286


부모님과 남한산성을 걸었던 경험이 있다. 성벽위를 걸으며 느꼈던 것이, 인조는 대체 왜, 조선의 백성들을 지옥에 빠뜨리는 그런 결정을 하였는가 였다.



인조가 대외적인 눈이 밝았더라면, 전 왕의 외교술의 반의 반만이라도 따랐더라면, 어쩌면 병자호란이라는 슬픈 전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투로 인해, 조선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인조는 거짓으로 중무장한채, 망해가는 명나라만 울부짖었고,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 끝은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결국 제대로된 리더의 부재로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에 노예로, 공녀로, 볼모로 끌려갔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 내에서는 오랑캐엔 청나라에 사대를 해야하는 반발심에, 죽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기조가 널리 퍼지면서, 대부분의 사대부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대충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뜻인 ‘유명조선’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새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 눈에는 조선의 백성들은 없었다는 이야기. 



청령포는 불어난 강물에 포위되어 더욱더 외딴섬으로 변해 있었다. 폭염이 지나가는 길목에 이곳으로 나들이를 온 피서객들은 그저 즐거워 보였다. 애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느지 흐르는 동강은 말이 없는데. 소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룬 단종어소에 들어서니 콧등이 찡해온다. p 315



수양의 못된 행태를 보다 못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 복위를 추진했지만 사건이 중간에 탄로 나 가담자 전원이 참혹하게 참살되었다. 역사는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단종은 상왕을 내놓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그해 음력 6월 22일 창덕궁을 나선 단종은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6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700리 영월 유배길에 올랐다. p 316



조선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된다. 조카를 내리치고, 왕이 된 삼촌 세조. 그로 인해 이미 조선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으며, 왕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세상이 막이 올랐다. 바로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영월에서 단종의 흔적을 따라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에서 제일 쓸데없은 물음인 ‘만약’을 수도없이 되뇌었다. 만약 단종의 나이가 더 많았다면,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만약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죽지 않았다면, 만약 소헌왕후와 세종이 연달아 죽지 않아서, 문종이 연달아 상을 치루지 않았더라면, 등등. 수많은 ‘만약’이 머리속을 떠다녔다. 



생각해보면 난 영월뿐만 아니라 세조와 관련된 유적지, 사육신과 관련된 유적지 참 많이도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단종과 세조,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가 머리속에 많이 남아있다. 그와 함께 ‘만약’이라는 물음도. 하지만 만약은 쓸데없는 가정일뿐,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1653년, 효종 4년 시기에 은둔국가었던 조선 땅으로 낯선 이방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이다. 제주목사 이원진응ㄴ 한양에서 내려온 박연(벨트브레)의 통역 도움으로 조사를 마치고 10개월 만에 이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이 사실을 눈치챌까 봐 조선은 전전긍긍했다. 사신단이 올때마다 하멜일행을 가두거나 남한산성 등지로 피신시키고는 했는데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생략…) 결국 임금은 하멜 일행을 부안과 강진에 분산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전라도로 옮겨진 이들은 잡초를 뽑거나 새끼를 꼬는 잡역에 동원되었다. 1666년 7월 나가사키로 탈출하기까지 11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냈다. p 320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53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호가 일본 규슈의 분고 앞바다에 표착했다. 본래 에라스무스호라고 불렸던 리프데호는 1598년 동방무역을 위헤 로테르담을 출항한 5척의 선단 가운데 한 척이었다. 전국시대 혼란한 천하를 통일하고 이 소식을 접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직접 배를 보내 이들을 불렀다. 포르투갈어 통역으로 이뤄진 자리에서 이에야스는 애덤스에게 네덜란드 선박의 항행 이유와 유럽의 정세등을 질문했다. 이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조총을 전수받은 일본에는 선교사와 상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던 때였다. (…생략…) 고민 끝에 애넘스를 외교 자문역으로 임명했다. 마음을 연 애덤스는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영국,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을 알선했다. p 321



국내 1위 여행지 제주에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나 역시 그곳을 가보았고, 그 곳을 가보니 더더욱 징비없는 우리나라의 태도에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왕조국가인 조선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다.



동시대에 네덜란드 인이 들어왔던 조선과 일본,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온갖 근대화 선진기술로 무장한 네덜란드인을 상대로 조선은, 그들을 죄인취급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들을 통해 각종 선진 기술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들을 통해 외교통로까지 만든다. 조선은 세계를 향한 문을 꽁꽁닫았고, 일본은 세계를 향한 문을 열었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이 가능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며 조선을 포함하여,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삼고 괴롭혔다. 꽁꽁 문을 닫았던 조선은 당연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암울했던 기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체 어떻게 네덜란드인을 대했던걸까? 당시 일본의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인 윌리엄 애덤스에게 미우라 지역의 영지를 하사했다. 한마디로 미우라 지역의 영주대접을 한 것이다. 조선이 하멜일행을 전라도로 유배보내어 죄인처럼 노역을 시킨것과는 아주 대비된다.



사실상 미우라 지역의 영주가 된 애덤스는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이름 역시 일본식으로 바꾸었으니 그가 바로 일본에서 유명한 ‘미우라 안진’이다. 



같은 시대, 같은 기회가 주어졌던 조선과 일본. 책에서야 하멜과 애덤스를 일화만을 이야기했지만, 조선에는 참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기회가 오는 족족 알아서 걷어차버린 것이 조선 왕실이고, 조선의 사대부였다. 결국 이 모든것이 얽히고 설켰다. 그 결과가 1900년대의 조선과 일본이다. 



여기서 또 다시 의미없는 물음을 떠올린다. 만약 조선의 위정자들이 징비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이 물음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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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의 한국현재사 - 역사학자가 마주한 오늘이라는 순간
주진오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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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현대사책을 읽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이긴 하지만, 저자가 지난 정권부터 현재 정권까지 본인이 썼던 글을 한데 엮어 낸 책이라고 보면 된다. 예컨대 지난 정권에서 문제가 정말 많았던 위안부합의, 국정교과서집필이나, 극우 단체의 건국절 논란, 점점더 악화되는 한일관계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마디로 역사책이긴 하나, 역사적 사실에 비춰 저자 본인의 생각이 담겨있는 책이다.



많은 역사책이 역사적 사실에 비춰 저자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들이 많으니, 이런 점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저자의 모든 말을 따르거나 공감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이 역시 한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정통 역사학자이며, 왜곡된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 맞다. 해서 많은 글들이 공감되고,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글을 읽은 내 개인적인 감상이다. 대체적으로 저자의 글의 큰 궤는 공감하지만, 극히 일부분은 ‘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르구나’ 싶었던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맞고 내가 틀리거나, 내가 맞고 저자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읽은 사람 스스로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이승만은 살아남고, 박용만은 잊힌 이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박용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절친한 동지였고 미국에서 유학한 뒤 독립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완전히 결벌하게 되었습니다. (…생략…) 이승만은 4.19 혁명의 결과 하와이로 쫓겨난 뒤, 비서에게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바로 박용만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p 035



박용만은 1913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성대한 환영행사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파국은 곧 시작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여자 기숙사를 짓겠다며 모금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민회의 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전시켜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음 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는 국민회를 강하게 공개비판하고 각 지역을 돌며 추종자들을 모아 박용만 지지파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국민회를 장악합니다. p 038


이 책으로 하여금 처음 알게된 이름 ‘박용만’. 


그는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보듬은 이승만에게 배신을 당하고, 결국에는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으며, 독립운동 노선 차이에 의한 참극으로 보고있다고 한다.



이승만과 박용만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돌 빼낸다’, ‘검은 짐승은 거두는게 아니다’ 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레 떠오른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웠던, 지금도 배우고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이승만. 그 자리는 원래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 후 1918년 회계감사에서 이승만의 부정이 드러나자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인사들을 폭동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이승만은 법정에서 그들이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어 위험한 반ㅇ리 행동을 하고 일본 함선을 파괴하려는 무리’라고 증언헀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모함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생략…) 결국 참다못한 박용만은 1918년 이승만의 독선과 야욕을 비판하며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고 말았습니다. p 040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안이 나오자, 이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자임하였고, 이를 승인하도록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을 고집하면서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상하이에서의 집무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상하이에 나타난 것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위임통치 건의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갈등만 벌이고 몰래 돌아갔습니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배신했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강심장의 소유자였습니다. p 041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측에 한인 군사부대 창설을 제안합니다. 박용만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1910년대부터 준비했지만 이승만에 의해 뿌리가 뽑힌 노선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방해와 파괴공작이 없었다면 박용만이 양성했던 조선인 군사력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승전국의 대우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p 042


어떤 사람이든 공,과가 함께 있다. 해서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할때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를 해야한다. 공이 많다고 과를 희석해도 안되고, 과가 많다고 공을 없애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어떠한가? 그에겐 공, 과가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기는 충분히 공으로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초대 대통령 재임 후는 누가봐도 과였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기 조차도 정말 ‘공’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든다.



물론 미주로 건너갔던 청년 이승만과 박용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배우는 국사책에는 없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학교 국사시간에 꼭 배우는 내용중 하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독립문, 그리고 서재필이다. 내가 학교에서 ‘독립문’에 대해서 배울때, 당시 국사 선생님은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독립문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 ‘독립’했다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당시 선생님은 독립협회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이 만들었다거나,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2대 회장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가 배웠던 독립협회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중계몽을 위한 단체였는데, 이런 단체를 조직한 사람중 하나가 매국노인 이완용이고, 심지어 그 이완용이 회장을 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엔 아마도 기존의 역사교육관과는 너무 달랐을테니 말이다. 근데 왠지 지금도 이런 사실은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유독 빛에 대한 찬양을 중시하고, 그림자에 대한 반성은 축소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징비가 안된다는 것.


첫째, 독립협회는 서재필이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재필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독립협회를 조직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관료들입니다. 특히 이완용은 당시 자신이 대신으로 있던 외부에서 독립협회의 창립 총화를 거행했고 건립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 후 이완용은 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완용이 왜 나중에 친일파로 돌아섰는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지, 있었던 역사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한 것이 아닙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이 서울로 들어올 때 맞는 문으로서 속방외교의 상징이었는데, 이미 청일전쟁으로 서울에 침입한 일본군이 헐어버려 독립문 건립 당시에는 아래 기둥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독립협회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입니다.


p 049


심지어 독립문을 세웠을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을 시기다. 일본이라는 모리배가 너무 무서우니, 내 뒤에있는 강한 형아 집에 들어간것이다. 이 무슨 얼어죽을 자주독립국인가? 심지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을 그 무렵, 아주 자유로운 삶을 사셨다.





셋째, 독립문의 건립목적은 조선이 여러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독립문 건립이 발기되던 1896년 7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독립문의 건립은 어디까지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논리에 말려들어간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이미’ 독립국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주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청을 몰아낸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다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독립신문>과 관련된 서재필의 업적이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독립신문>발행은 갑오개혁 시기에 정부가 추진한 사업으로 일본의 방해를 막기 위해 미국인 서재필에게 진행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서재필은 당시 미국인 필립 제이슨, 한국명 ‘피제손’으로 활동했습니다. 정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했음에도 그는 <독립신문>을 자신의 소유로 등록했고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에 팔려고 했던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p 050



아! 잠시 삼천포로 흘러갔지만, 독립협회, 독립신문 등을 배우면서 중요하게 배우는 인물 서재필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금 생각을 해봐야한다. 서재필은 조선에서 한국인 서재필이 아닌, 미국인 피제손으로 살았다. 미국인으로 살고자 했고, 계속해서 미국인으로 살았으며, 미국인으로 생을 마치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국사시간에 서재필에 대한 찬양아닌 찬양을 하는 것일까. 이건 흡사 고종의 밀명을 받은 헤이그 특사가 작금의 조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연설하는데 있어서, 조선 정부와 고종을 비판한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도, 사면도 없다.


얼마전에 전 대통령 노태우씨가 죽었다. 근데 뉴스를 듣고 있노라니 너무나 이상했다. 나는 분명 전두환씨, 노태우씨가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전두환 씨, 노태우 씨라고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 전직 노태우씨, 이렇게 말이다.



만약 전두환 전대통령, 노태우 전대통령, 이런식으로 부른다면 이건 대통령 예우가 박탈당한 사람을 부르는게 아니라, 말그대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하며 부르는 말이다. 헌데!!!!! 대다수의 뉴스에서 노씨의 죽음에 대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참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에는 광주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줄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보도지침에 따라 언론 검열이 시행되어, 보도되지 않거나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Voice of Korea>라는 미국의 단파방송을 통해,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략…) 다시 개교된 후 학교로 돌아온 많은 학생들의 얼굴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을 보았습니다. 역사공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지원해 다녀왔던 복학생이, 다시 역사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p 062



전두환은 분명히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반성과 사죄도 하지 않았던 그를 쉽게 사면해주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심판을 어정쩡하게 하고 넘어가니, 이런 역사의 죄인들이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망언을 함부로 떠들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을 내린적이 없다고 계속 억지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권한만 무제한 행사하고, 책임은 지지않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p 063



그런데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한열이에게 직격탄을 쏜 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발사수칙은 45도 각도로 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격탄을 쏘았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생략…) 이제와서 그런 것을 따져 무엇하느냐고 할지 몰라도 당시에는 왜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연세대 교정에서는 이한열 추모비를 다시 세우는 제막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않았던 시외에 가담한 대학생을 죽이는 살인정권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p 074



광주 민주화운동, 6월항쟁 과정에서 정말 많은 국민들이 죽었다. 국민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은 분명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다. 하지만 그 뒤에는 2인자 노태우씨가 있었다.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서 6월 항쟁 당시 사람들은 전두환, 노태우 모두를 끌어내리길 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씨가 ‘대통령 직선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물론 다른이유도 있지만), 국민들이 그렇게 끌어내리고 싶어 하던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 지금까지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당최 이해가 안간다. 어떻게 내 부모, 형제, 친구들을 죽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는지? 진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물론 노씨는 전씨와 다르게 그 자녀가 수시로 민주항쟁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해왔다. 이 부분에선 분명 전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박탈되었던 대통령의 예우를 받는 것이 맞는것인가? 심지어 정부에서 나서서 노씨의 국가장까지 치뤄주었으니, 참 경악할 노릇이다. 아무리 그가 전두환씨와 다르다고 한들, 결국은 노씨 자신의 직접적인 사과라던가, 학살에 대한 배후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채 죽었다. 자녀들의 사과와는 별개로 그 자신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다.



정부에서는 국민통합이다 어쩐다, 별별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국가장을 시행한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놓았다지면, 결국 정부는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했던 주범 중 한명을,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으나, 전직 대통령이었단 이유로, 그 자녀들이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해왔다는 이유로 국가장을 결정했다. 이런 선례를 만들었으니, 아주 나중에 전두환씨나 탄핵된 박근혜씨 역시, 노씨처럼 여러 이유를 늘여붙여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우리 스스로의 잘못된 역사를 풀어낼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할 수 있는가? 비단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군부독재 과정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고, 정부는 알면서도 눈을 돌린다. 심지어는 구속되었던 전씨나 노씨를 사면해주었다. 그런 우리나라다. 



일제가 죽인 우리 국민들은 눈앞에 보이고, 우리 정부가 죽인 우리 국민들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런 선별적인 역사 해결방법이 과연 정당한게 맞는걸까?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과 고종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정말 이번 정권 초기에 대한제국과 고종을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더랬다. 대체 어디를 봐야 고종을 개혁군주로 볼 수 있고, 자주 독립을 위해 애쓴 군주로 볼 수 있는지 말이다.


이태진 교수의 ‘고종이 정조를 계승해 민국이념으로 통치했다’는 주장은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유지를 위한 레토릭일 뿐이며, 그 자체를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군주의 이념적 기반으로 내세우기도 어렵습니다. 대한제국이 수행했던 개혁사업의 결과가 민에 대한 수탈 강화로 나타났다는 점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합니다. p 105



1873년 20세에 친정에 나서서 30여 년을 다스렸던 군주가 아무런 사상적 발전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1876년부터 이루어진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고종은 대체로 개방론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조선 사람들이 고종과 김옥균, 박영효 정도밖에 없다’고 파악한 1882년 일본의 자료는 어떻게 볼것입니까? (…생략…) 물론 고종의 한계와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 나타난 문제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반드시 고종 자신에게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간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문제도 함께 지적해야합니다. p 109



고종이 정말 개혁군주였다면 자신의 인척과 본인의 부패에 눈을 감지 말았어야했다. 자기 아비의 정책을 전부 돌릴게 아니라, 취할건 취하고, 문제가 있는 건 버렸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기 안위를 위해 여러 강국에 매달려서는 안되었고, 자기 안위를 위해 자기 백성들에게 총구를 들이밀어선 안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그 모든 것을 했다. 본인도 부패했고, 본인의 인척들도 부패하여 백성들이 살기 힘들다고 일어나니, 그 백성들을 향하여 개틀링건을 발사했다. 심지어 그 백성들을 짓밟기 위해 외국세력을 불러들였다. 대외적인 눈이 너무 어두워, 서양국가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민국으로 나아갈때, 그는 되려 황제국가를 부르짖었다.





본인 아비의 패착인 경복궁 중건을 보고 무언갈 배웠어야했는데, 고종은 더했다. 저 위에 새 궁궐을 짓고, 멀쩡한 전각들을 수시로 개보수했다. 칭제를 기념하기 위해 나랏돈을 쏟아부어 잔치를 준비했다. 그런 돈을 준비하기 위해 저 나라에 이걸 팔고, 이 나라에 요걸 팔고, 하나둘 팔아가며 본인 안위를 위해 살았다.



고종이 외척과 측근세력들을 통해 정치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 개혁주도세력, 이데올로그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황제가 정부 관료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 국정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 관료들이나 망명자들의 행태를 보면 고종이 그런 방식으로 운영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종에게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 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하나, 전적으로 그에게만 몰아가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p 111



그런 의미에서 난 저자와 달리 고종에게 모든 죄를 묻고 싶다. 엄밀히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좋은 정치를 위해 인재를 뽑아 관료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할 의무가 있다. 측근들이 부패하다면 물갈이를 해서라도, 바른 정치를 펼쳤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 실패 책임을 묻는 것을 떠나서, 그는 앞서 나라를 환란으로 몰았던, 백성들을 죽음앞으로 내몰았던 선조와 인조, 그 두 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전 왕조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당시 분명 나라의 기본은 ‘백성’이었을텐데 말이다. 조선왕조 5백년간 정말 백성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왕은 얼마나 있었을까?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하여


역사교과서 왜곡이 단순히 역사교육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선 한국 정부가 곧 발표될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또다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여론에 밀려 강경 대응을 하고서는 슬그머니 후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150



이러한 한일문제의 본질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일본 극우세력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에 패배한 것일뿐,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식민지에 시혜를 베푼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의 왜곡을 자행하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는 여러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p 152


얼마전에 이런 뉴스를 들었다. 일본 국정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명칭을 그냥 ‘위안부’로, ‘강제징용’은 그냥 ‘징용’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그저 ‘유감’을 표명했을 뿐이다. 일본에서 유네스코로 지정된 군함도도 그렇다. 일본이 군함도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그저 ‘유감’으로 대처할 뿐이다.



저자는 몇년 전 ‘또다시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뒤늦게 여론에 밀려 강경 대응을 하고서는 슬그머니 후퇴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는데, 결국 또 반복되었다. 우리정부는 언제나 유감으로만 무장할뿐, 이렇다할 대응이 없다. 오히려 민간에서 나서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도망간 선조와 들고 일어난 의병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중국이나 미국등에게는 ‘일본의 전쟁범죄’라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식민지배를 당했던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점을 확인해 둡니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중국과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의 패배자로서, 전쟁의 책임을 인정했고 전범재판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사과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강제 동원에 대해서는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p 155



“한일관계 갈등의 책임은 한국에 있다”는 로버트 샤피로 전 미국 사무부 차관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본의 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게 함으로써 미국 내의 여론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 1904년 제 1차 한일협약의 결과, 미국인 스티븐슨을 외교고문으로 채용하게 한 것과 같은 수법입니다. 고문을 독식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나아가 미국도 일본을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를 나무라는 적반하장이 계속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과 정부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p 156



일본이 꾸준히 역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몇가지를 꼽자면 역시나 뒤에 있는 미국형님들이 아닐까. 그나마 트럼프 정부때는 트럼프가 일본을 꾸준히 무시해서 조금 통괘한면도 있었으나, 다시 일본에 우호적인 바이든이 집권했고 말이다. 바이든 집권 후 우리정부는 트럼프때와는 달리 일본과 우호관계를 도모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는게 사실이다. 미국의 은근한 압박도 있고 말이다. 



물론 외교를 위해서라도 인접국가인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왜곡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일본을 상대하면서, 변함이 없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참 뭐라고해야할까. 한일협정을 맺어서 모든 배상의 기회를 날린 박정희 전 대통령만을 욕하기엔,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전 대통령들이 잘한게 뭐가 있나 싶다. 결국 저자의 말처럼 계속 같은 모습이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은 역사왜곡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서양국가에 많은 돈을 뿌려가며, 자신들을 위한 외국학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한국에 있는 극우세력도 동일하다. 역사왜곡을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가며, 타국에 있는 학자들의 입을 빌려서 역사왜곡을 기정사실화하고자 한다. 이는 일본이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하는 동력이며, 우리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힘을 못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쯤되면 역사왜곡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바뀌어도 진작에 바뀌었야했는데, 지금까지도 그저 ‘유감’으로만 대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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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쯤 나 혼자 어디라도 가야겠다 - 가볍게 떠나는 30가지 일상 탈출 여행법
장은정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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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위드코로나를 실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불안한건 매한가지. 백신을 맞았다고 한들 돌파감염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백신맞았다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다가 무증상으로 남에게까지 전파하는 민폐족도 여전히 존재하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아무리 위드코로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그럼 우리 안전을 위해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하나? 슬프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당장 내 생계가 달려있는 자영업자나 직장인들은 어쩔수없이 직장을 또는 가게로 출근을 해야하니까. 애초부터 우리는 위드 코로나였던거다. 아무리 코로나가 유행을 펼쳐도, 우리는 꾸준히 회사로 출근을 해왔으니 말이다. 그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밖에 없다.



코로나가 만연한 2년간 (재택은 개나줘버린)회사에 꾸준히 출근하고,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와도 나는 멀쩡했던 이유는 내 안전은 내 스스로가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도 동일하다. 내 안전을 내 스스로가 지킬수만 있다면, 코로나는 무서울게 못된다. 코로나시국이라고 여행을 못간다는건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다(회사도 출근하는데 여행쯤이야).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내 안전을 내가 지키고,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다닌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행에세이 『하루쯤 나 혼자 어디라도 가야겠다』는 사람들이 밀집하는 여행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흔하디 흔한 핫플을 소개하는게 아니다. 말 그대로 나 혼자 훌쩍 떠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지친 나에게 치유를 주는, 사람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그런 여행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여행 테마는 4가지로 구분된다. 



1. 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서: 나를 회복하는 휴식 여행


2. 길 위에 길이 있다면: 마음을 치유하는 걷기 여행


3. 봄날의 미술관을 좋아하나요? : 취향 따라 떠나는 테마 여행


4.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감성여행




각 테마별로 7~8곳의 여행지가 담겨 있으며,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고로 사람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사람이 없는 여행지, 자연을 벗삼을 수 있는 여행지, 시끄러움과는 동 떨어진 한적한 여행지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만하다.





봄에는 어디를 가도 화사하지만, 오직 봄에만 마주할 수 있는 유난히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 밑이 최고다.


1년 중 가장 화려하고 낭만적인 계절인 가을,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고 은빛 억새가 춤을 추는 곳으로 찬란한 가을을 맞으러 떠나보자.


추운 겨울에는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며 자꾸만 움츠러 들지만, 겨울 특유의 공기와 분위기가 그리워 자꾸 떠나고 싶어진다. p 018~019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음 뚜렷하다고 하기엔 지구가 너무 아파서, 4계절의 구분이 의미가 없게 되었지만 뭐 여튼. 4계절이 뚜렷하다는 가정하에! 우리나라의 산천은 매 계절마다 다른 색을 뽐낸다. 봄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녹음이 푸르르고, 가을엔 노란물결 빨간물결이 넘실대고, 겨울은 앙상하지만 다음 봄을 기다리는 생명들이 보인다. 바뀌는 4번의 계절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해서 오늘의 모습은 오늘밖에 볼 수 없다. 봄꽃을 보고 싶다면 봄이 가기전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하고, 화려한 단풍을 보고 싶다면 겨울이 오기전에 빠릿빠릭하게 움직여야한다. 계절별 여행지는 그러한 부지런함이 뒤따른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MBTI는 그 결과를 100%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분석을 마주하면 소름이 돋기도 한다. 나를 파악하고 나의 성향에 맞는 장소를 찾아 훨씬 더 의미있고 기억에 남는 여행을 만들어보자. p 021






이 책에서 조금 당황했던건, 요즘 세대(?)를 노린 듯한 MBTI유형별 추천 여행지다. MBTI는 나에게 어려운 그것이기에...^_T.... 


그래도 Z세대라 불리는 아이들에겐 익숙한 MBTI이니, 한번쯤 참고하여 여행지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산속에서 디지털 디톡스 -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



내년 쯤 부모님 모시고 가보려고 했던, 내 맴속에 꽁꽁 숨겨놨던 여행지가 대뜸 나타났다. 여긴...나만의 비밀여행지였는데!!!!!!!!!!!!!!!!!!!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리조트라고?”


강원도 홍천의 힐리언스 선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리조트라니, 어째 낮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궁금해졌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숲속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어떨까. p 054



그렇게 24시간 강제적 디지털 디톡스가 시작되었다. 휴대폰 대신 프런트에서 받은 지도를 손에 꼭 쥐고 객실로 향했다. 산속 숲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니 저 멀이 숲속동이 보였다. 객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쉬니 짙은 풀 내음이 몸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p 057


내가 꽁꽁 숨겨놨던 여행지, 웰니스 여행의 대표라고도 말할 수 있는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을 말한다. 



퇴근 후 집에만 오면 카톡절대무시를 시전하고 있는 나에게 얼마나 알맞은곳인가? 난 정말 내 핸드폰에 카톡도 안왔으면 좋겠고, 전화도 더이상 안왔으면 좋겠다. 특히 회사사람들의. 그냥 우리 신랑과, 엄마아빠, 내 절친 몇명의 연락만 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정말 나에게 딱 알맞는 여행지인데, 여기. 올해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 가보질 못했다. 하..^_T....



내년엔 꼭 가봐야지!



※객실내 유전선화 사용 가능, 데이터 신호는 가을동 2층 비지니스센터와 선이공방




 


섬을 잇는 섬티아고 순례길 - 신안 기점, 소악도



개인적으로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한적한 산성길이라던가, 왕릉 뒷편 숲길, 혹은 작은 시골마을길을. 물론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하루왠종일 걸어야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건 싫다. 그냥 적당히 한두어시간 걷다가 쉬다가 하는 것을 좋아할 뿐.



그런의미에서 신안 순례길로 가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물론 나는 종교는 믿지않는다. 종교를 믿을바에야, 돈을 믿거나 나를 믿을뿐.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한국에는 섬티아고 순례길이 있다. 전라남도 신안의 1,004개 섬 일부에 12사도의 이름을 딴 12개의 예배당을 짓고 섬과 섬을 연결한 순례자의 섬, 일명 ‘섬티아고 순례길’이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으며 하루 두 번 만조 시간이 되면 몇몇 길이 사라져 꼼짝없이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조금은 느리고 불편한 섬의 시간마저도 이 순례길의 일부다. p 124



섬티아고 순례길은 종교를 떠나 길 위에서 나를 돌아보고 사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하는 곳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노둣길을 따라 고요한 바다 위를 걷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치유를 얻는다. 곧곧에 안내판과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p 124



순례길에 의미를 두는게 아닌, 걷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나이기에 신안의 섬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집에서 목포까지 가는 길이 워낙 장거리고(라고해봤자 서해안고속도로 따라서 쭉...), 목포에서 또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하니 배멀미가 있는 우리 신랑에게도 꽤나 모험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나쁘지 않을까 싶다. 목포에는 외가 친척이 살고 있어서 숙박도 문제가 없고 말이다. 후후후.




※목포 송공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섬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되는 대기점도 선착장에 도착. 대기점도 선착장 부근에더 전기자전거를 대여할 수도 있다(유료).



 


안락하고 비밀스런 독서 - 서울 프라이빗 책방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한다. 요 몇년간 책에 대한 나의 행동을 분석해보자면, 책을 읽는 행위보단 책을 모으는(사는) 행위, 책장에 책이 끝없이 꽂혀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뭐 어떤이유든간에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이 많이 있는 곳은 더 좋아하고, 그래서 서점을 좋아한다. 하지만 보통 서점은 대형서점이 태반이고, 대형서점은 사람이 많아서 잘 안가게된다. 그래서 가끔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동네책방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으로 가득한 공간은 작은 천국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 공간에 베어 있는 은은한 책 냄새, 책 읽기 좋은 편안한 의자와 조용한 음악, 공간의 모든 것이 책과 책 읽는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p 150



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책방, 채그로.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책방 겸 북카페다. 채광이 좋아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햇살이 들어온다. 책을 사지 않아도 별도의 이용료없이 온종일 머물며 책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독서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라는 주인장의 마음이 담긴 공간이다. p 154



슬프게도 우리동네에 있는 동네책방(겸 카페)도 찾아가보았을 때는, 대부분의 책이 구매를 해야만 읽을 수 있었기에 동네책방에 대한 내 인식은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여행에세이에 나와있는 서울의 동네책방들을 보자니, 조금 달라보인다. 내가 우리동네에서 가보았던 상업에 찌든 책방이 아니라,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곳 같달까?



코로나이래로 서울은 최대 기피장소였기에, 당분간도 서울을 갈 일은 없겠지만(위드코로나를 한다고 하면 더더욱). 한 2~3년 후에는 맘 편하게 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외: 청담동 소전서림, 연희동 엄마의 서재, 후암동 후암서재 등.



 


녹차 향기로 가득한 피크닉 - 하동 차마실



하동!!!!!!!!!!!!!!! 진짜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던 곳인데, 이상하게 하동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대체 왜지T_T...


우리나라에서 차 재배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하동은 차의 고향이라 불린다. 서기 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쌍계사 주변에 심은 것을 시초로 1,200여 년에 달하는 차의 역사와 문화가 이곳에 스며있다. p 256



SNS를 뜨겁게 달군 그곳, 매암제다원


1968년부터 3대째 차를 덖어 온 다원으로 SNS에 검색하면 수만 개의 인증사진이 뜨는 하동의 필수 여행지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연둣빛 차밭과 향긋한 차향, 그리고 다원 입구의 운치 있는 목조 건물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산림국산하 임업시험장 관사였다가 해방 후 다원의 소유가 된 건물로 95년의 세월을 버틴 적산 가옥이다. p 258



여기는 정말 두말할 것도 없다. 올해는 이미 글렀고, 내년에는 꼭 가봐야지 싶다. 너른 산과 차밭이 있고, 상대적인 거리감으로 다른 여행지에 비해 사람들도 그닥 몰리지 않을테니. 평일에 적당히 연차내고 슝 다녀와봐야지.


아무리 위드코로나라고 해도 사람이 밀집한 곳, 밀폐된 곳은 위험하다. 백신여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내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 점만 유의한다면, 코로나 따위는 무섭지않은 여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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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1-2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
작년에 여기 예약하려고 굉장히~~애썼으나 인기가 많아서 기회가 없었는데, 요즘은 어떠할까요?^^ 좋은 책 소개해주셨으니 다른 여행지도 살펴봐야겠습니다

피로 2022-01-29 15:44   좋아요 0 | URL
어머, 여기 예약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였군요 ㅠㅠㅠ
언제한번 가봐야지 싶었던 곳인데, 예약하기 어려운 곳이면.......주기적으로 눈팅해야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