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 5 - 흑역사 땅의 역사 5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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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 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5권』이 출간됐다. 뭐 정확히는 작년 11월에 출간되었으나, 당시에는 극강의 입덧지옥으로 책을 손에 쥘 수조차 없었던 시기였으므로T_T. 아주 임신 중기에 들어선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이렇게 내 책장, 박종인 기자님 전용칸(ㅋㅋㅋ)에 책 한권이 또 늘어났고!




얼마 안있으면 휴직시작이라, 집에서 할것도 없으니 독서로 태교를 해볼까 하는데, 그 시작으로 땅의 역사(독서!!) 정주행을 해볼까 한다. 나는 내 뱃속에 있는 호떡이가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준대로, TV매체에서 보여주는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사실들을 정말 그대로 믿어도 되는건지,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사실이 있는건 아닌지, 혹은 누군가의 헛된 신념으로 인해 미화된 내용을 배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비판할 줄 알며, 스스로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뭐...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수많은 책들에 둘러쌓인 우리집에서 자란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하ㅏㅏㅏ...


아첨을 위해 만든 선정비를

강물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땅의역사5, 54p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율을 집행하는 국가조직이 운영된다. 집행하는 자는 공무원이다.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국가가 필요한 세금을 거두려면 그 공무원의 기강이 서 있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명국가라면 응당 공무원계를 감찰하는 제도 또한 운영했고 운영한다. 예컨데 이런,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칠사는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바르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대전통편』, 「이전」)’ p 056



모름지기 한 나라를 운영하는 정부 집단은 청렴해야한다. 정부가 청렴해야만 국민이 마음을 놓고 세금을 납부할 것이다. 내 세금이 헛된 곳이 쓰이지 않는 믿음이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렴해야할 정부는 생각보다 많이 부패했다. 분명 해당 집단을 감찰하는 제도가 있음에도, 예나지금이나 유명무실한 것도 하등 바뀌지 않았다.




 


 


국내여행을 좋아하기에, 난 지금까지 꽤 많은 도시를 가보았다. 그리고 백이면 백, 해당 도시에는 꼭 역대 수령들의 ‘선정비’가 즐비해있었다. 산성입구, 읍성입구, 관아입구, 동사무소 입구 등등등. 장소야 달랐지만,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자기 도시에서 나뒹구는 선정비들을 한 곳아 모아 정비해두곤 했다. 



본디 선정비라는 것은 그 고을에 살던 백성들이, 고을을 다스리던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고을의 백성들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청렴하거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한 그런 수령들을 위해 백성들이 손수 세워주는 것이다. 그런 선정비를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것만 수백개인데, 그렇다면 조선엔 그렇게 좋은 수령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인가?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조선백성들의 삶은 세금에 허덕이다 죽거나, 혹은 스스로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키거나 그랬을텐데.



물론 아산 현감으로 부임했던 토정 이지함처럼 고을민들을 위해 애썼던, 좋은 수령들도 분명 있긴 했다.


안그런 선정비도 물론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과 죽산의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75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역대 조선 정부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p 057



민란의 시대, 19세기가 왔다. 조선왕국의 기저질환인 삼정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선정비는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했다. (…생략…) 대표적인 증거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비 조규순 영세불망비다. 멀쩡하게 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썬 오석으로 새 비석을 만든 뒤 비각 건립 명목으로 군민에게 1000냥을 뜯어낸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농민전쟁의 불씨가 됐다. p 058



하지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선정비군의 실상은 대체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대부분의 선정비는 수령들이 고을민들에게 강제로 만들게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강제 건립 선정비중 제일 유명한게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우게 한 지 아비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동학농민운동의 기폭제가 된, 바로 그것이었다.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

땅의역사5, 82p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반정(인조반정) 초에 공신들이 모여 맹세할 때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왕실 혼인을 놓치지말자(물실국혼)’와 ‘재야 학자를 추천하여 장려하자(숭용산림)’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형세를 굳게하여 명예와 실익을 거두려는 것이었다.(『당의통략』) p 083



숭용산림과 마찬가지로, 물실국혼은 단순한 의지 차원을 넘어 현실화된 계획이었다. 추존왕(사후에 왕으로 규정된 왕족)을 포함해 인조부터 고종까지 조선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숙종의 계비 경주 김씨 인원왕후, 경종비 청송 심씨 단의왕후, 추존왕인 진종비 풍양 조씨를 제외한 17명이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생략…) 노론은 숙종과 영, 정조, 순조 이후 세도정치를 거치며 크고 작은 부침속에서도 왕비만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다. 1623년 맺은 권력 수호의 맹세와 이후 목숨을 건 조직적 권력욕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초장기 독재의 근간이다. p 070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다 아는 사실 하나. 후기 조선은 서인이 권력을 쥐고 놓지 않았고, 서인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쥐기 위해 서로 분열하다가, 최종 승자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 만약 그들이 정치를 잘했다면, 이렇게까지 욕먹을이 없겠으나, 그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을 위해, 그놈의 소중화 조선을 위해서 살며 부패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망국행 기차에 탑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과거로 임용되는 공무원 조직과 상관없는 ‘산림직’을 신설했다. 재야의 ‘명망 있는 학자들’추천으로 뽑는 자리이니, 이 자리는 자기들이 산림이라 인정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해 5월 성균관에 종4품 사업이라는 관직이 신설됐다. 1646년에는 세자 교육직에 당상관인 찬선과 종5품 익선, 종7품 자의가 설치됐다. 그리고 1658년 효종 때 마침네 ‘좨주’라는 정3품 관직이 성균관에 신설됐다. 좨주는 산림을 위한 최고 영예직이었다. 산림에서는 성균관 최고직인 대사성보다 좨주를 높게 쳐줬다. p 087



첫 번째로 좨주에 임명된 사람은 송준길이었다. 두 번째 좨주는 송준길의 동학이자 거물 중의 거물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정조 때 좨주 송덕상과 송환기, 순조 때 송치규는 모두 송시열의 후손이었다. 현종 때 송계간과 철종 때 송래회는 송준길의 후손이었다. 고종 17년인 1880년 8월 28일 임명된 마지막 좨주 송병선은 송시열의 9세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보스와 정계 파벌의 연결수단이었따. 이렇듯 서인과 노론의 권력장악은 끈질기고 강력했다. p 088


서인이 부르짖던 소중화 조선의 시작은 병자호란 이후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고작 오랑캐 나라인 ‘청’에 굴복한 것에 대해 용납할 수 없었다. ‘청’에다가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뒤로는 조선은 명에 사대를 했으으니 명이 망했어도 조선이 섬기는 나라는 ‘명’이라고 외치며, 그렇게 사라져버린 ‘명’에 대한 충성심을 아로 새겼다. 



송시열 사후 그 제자들은 스승인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북 괴산에 명나라에 제사를 지낼 ‘만동묘’를 설치했고, 조선왕 숙종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낼 ‘대보단’을 설치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의 (서인)선비들이라는 것들은 죽은 뒤 자기 비문의 시작을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게 했다. 한마디로 ‘명나라의 신하 조선국’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들이 조선 후기 권력을 틀어쥐고, 놓지않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본인들을 위한 정치를 했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시작이었다. 주자는 금에 멸망하던 송을 살리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은 청에 핍박받는 조선을 살릴 학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송시열은 조선을 명의 계승자라 자처했다. 그는 소중화 조선의 주자였다. p 094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송시열도 있었고 어린 윤휴도 있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주자) 마니아였다. 윤휴는 공맹 사상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이비로 낙인찍었다. 윤선서가 윤휴를 두둔했다. 윤선거도 사이비라 낙인찍혔다. p 114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수였던 송시열. 그는 성리학, 그 중에서도 주자의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유학의 나라로 시작한 조선이었지만, 이 때 유학은, 공자와 맹자가 가르치던 유학이 아니라, 오로지 주자가 해석한 유학, 즉 주자의 성리학, 주자학만이 학문으로써 기능했다. 주자학이 아닌, 다른 이가 해석한 유학을 공부한이들은 사문난적으로 매도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 ‘고립’ 되었다. 그렇게 유학의 나라 조선에선,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아닌, 주자학이 점령했다. 한반도내에 뿌리깊게 잠식된 비뚤어진 유교사상의 시작이다.




의정부 산에는 공주님이 잠들어있다

땅의역사5, 138p


작년 6월,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라 불리는 곳을 발품팔아서, 겨우 찾았다. 족두리묘의 주인, 그녀는 바로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 다.





정묘/병자호란이 있은 뒤, 청은 조선에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중엔 공녀도 있었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를 하였는데, 청에서 이번에도 공녀를 요청했다. 정확히는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를 맞이하고 싶으니, 조선 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효종은 딸부자였다. 효종을 비롯한 종친들에게도 딸들이 있었다. 하지만 효종을 비롯하여, 날고기는 종친들은 자신들의 딸을 숨겼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143


효종이 딸을 숨기고, 종친들이 딸을 숨긴다고 한들, 청에서 조선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효종을 위한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효종의 10촌인 금림군 이개윤이다. 10촌이면 거의 남이나 다를바 없으나, 금림군 역시 조선 이씨 종친이었다. 금림군은 자신의 딸 이애숙을 바쳤고, 효종은 이애숙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에 봉하고 청나라로 보냈다. 양녀라고는 하나 옹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하였으니, 어엿한 조선왕과 조선왕비의 딸과 같았다.



금림군이라고 하여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보내고 싶었을까? 남들이야 이개윤이 눈에 멀어 딸을 바쳤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의 반응일 뿐이다. 뭐, 딸을 바친 이개윤의 진심은 본인만 알겠지만. 여하튼 청나라에 딸을 보낸 이후 오랜시간이 흐른뒤, 이개윤은 자신의 딸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왔다.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p 144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은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일반 여염집 아녀자부터 사대부가의 아녀자까지, 조선의 여자란 여자들은 대거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그녀들이 목숨걸고 힘들게 도망쳐오거나, 혹은 속환되어 조선땅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은 그녀들에게 너무나 냉정했다. 조선의 왕부터 사대부, 여염집의 남자들까지 그녀들을 ‘환항녀’라며 손가락질했다. 훗날 ‘환향녀’는 비속어인 ‘화냥녀’라는 말로 남았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p 145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족두리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의순공주의 정절을 높이사고, 동정하며 그 족두리를 천보산 자락에 묻었다고 하니, 그게 바로 현재 의정부 천보산 자락에 있는 ‘족두리묘’다.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제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건너가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이 되었고, 이후에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서까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청에 대한 복수심’과 ‘여인의 정절’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본인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이었음에도 말이다. 


허세의 제국-대한제국

땅의역사5, 156p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제국.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황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이미 서양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 모든게 일어나며, 흔히 말하는 근대국가로 바뀐 뒤였다. 심지어 이때 조선에 빨대꽂고 쪽쪽 빨아먹은 일본조차도 서양의 모든 문물을 배우며, 근대국가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오로지 ‘황제’인 자신을 위한 나라였다. 대한제국 헌법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온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5백 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르는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할지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서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옵시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로 개정하옵시고 

대사·특사·감형·복권을명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행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을 수여 혹은 체탈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주찰케 하옵시고 선전·강화 및 제반약조를 체결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대한제국 헌법





 


왕실 식재료 담당부서는 명래궁이다. 명래궁은 중궁전 소속이다. 1893년 명래궁 지출액은 444만 6912냥이었다. 이 가운데 식재료비가 354만 2335냥이었다. 이해 왕실에서 지낸 고사와 다례는 모두 29회였다. 연회 또한 37회였다. 1894년 2월에는 220만냥을 들여 왕의 생일 축하파티를 벌였다. 1853년 이래 균형을 유지했던 명례궁 수지는 1884년 이후 급속도로 적자로 돌아서 1893년에는 적자가 자그마치 150만냥이었다. 바로 이 1884년부터 1893년까지가 무당 진령군과 사내 이유인이 왕비 옆에 들러붙어 나라를 가지고 놀던 그 시기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는 계시에 국왕 부부는 꼼짝없이 나랏돈을 제수비로 바쳤다.(『매천야록』) p 171



1894년 갑오개혁 때 진령군은 거열형을 선고받고 기록에서 사라졌다. 처형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냥 사라졌다. 이유인은 죽을 때 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처형과 유배를 주장하는 상소에 고종은 처형은 유배로 낮추고, 유배는 몇 달만에 특사로 풀어주는 특별사면을 내리곤 했다. 귀에 발린 소리를 하는 이유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p 173



그 이유인을 정신문화연구원은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항일운동가’라고 적어놓았다. 애국계몽운동단체 보안회를 해산시키려 한 이유인을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다고 적었고(『횡성신문』) 또 다른 애국단체 공진회가 탐관오리 제1적으로 붙잡은 이유인(『윤치호 일기』)을 ‘공진회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며 마치 좋은 일을 한 듯 기록했다. 2011년 충주 온 산을 뒤져 이유인 무덤을 찾아낸 김봉균이 말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 논문을 쓰려다가 말았다”고. 그런 사람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p 177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비선실세’. 비선실세는 조선말에도 있었다. 고종과 민비의 뒤에 서서, 그들을 좌지우지하던 비선실세는 무당 진령군과 그의 양아들 이유인이다. 이들에 이야기는 몇년전까지 유명했던 비선실세 최순실 보다도 더 스펙타클하다. 정말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길!




 


3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했다. 3월 29일 고종은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4월 17일 역시 미국인 모스에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4월 22일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권을 양여하고 7월 3일 프랑스 기업 그리러사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9월 9일 러시아인 ‘뿌리너’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자 19일부터 27일까지 경운궁에 가서 상복을 입었다. (『고종실록』) 그리고 23일뒤 경운궁으로 고종이 돌아갔다. 이게 아관 1년 동안 고종이 한 일이다. p 199



조선에서 궁을 버리고 도망갔던 왕은 셋있다. 선조(임진왜란, 아주 길게 1회)와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려 3회), 그리고 고종(아관파천)이다.



선조는 궁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돌아온 뒤,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이유는 전적으로 명나라 덕분이라 했다. 본인이 명나라와 가까운 의주까지 도망친 이유를 합리화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인조는 더이상 말하면 입 아프니 넘어간다. 그다음 고종, 고종은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 즉 아관으로 도주했다. 아관으로 도망간 고종은 그 기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참 놀랍게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으로 도망간 것 치고는, 너무 잘 살았다. 나들이 갈 것 다 가고, 일본 고위 인사들과 만남도 자주 가졌다. 아관으로 도망간 이유는 분명 일본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였을텐데 말이다. 심지어 본인 즉위 40주년 행사를 아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나라의 국고를 끌어다 썼다. 경복궁 (건물 약 500동) 및 경운궁(現덕수궁) 중건을 포함하여 평양에는 360칸 짜리 대 궁궐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관에 있던 그 기간동안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팔아넘겼다. 학교에선 서양에 각종 이권을 빼앗겼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달랐다.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무상으로 양여하지 않았다. 고종 본인이 원했던 현금지급이나 매해 일정금액 지급하는 조건을 달았다. 본인의 호위호식과 엄청난 궁궐공사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고종은 대외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뭐 좋게 말하면 순진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헛물을 겨케된 상황이 늘어났을 뿐이다. 특히 미국에 양여한 운산금광 채굴권은 미국인 외교관 알렌을 절대 신임한 고종과 민비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배웠을 땐 이 모든 이권이 서양에 강제로 ‘빼앗긴’ 이권이었다.



한 정권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한다고 해서 이를 칭찬한다면 잘못이다. 근대화의 시기에 법제를 정비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조치는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이를 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고종이 한 일은 장차 황제로 등극해 머물 황궁 설계와 이권 양여와 미래의 황제로서 평상시에나 해야 할 의전이었다. p 200



나라가 평화롭고 안전하며 국고가 탄탄하고 전제왕권 시대라면, 고종이 추진한 대규모 궁궐 공사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는 열강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던 서세동점의 시기였으며, 옆 나라 일본조차도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때였다. 고종이 정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조선의 왕이었다면, 주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조선이라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닌,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의 대환장파티는 여기서 끝이나지 않는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은 제국 선포 2년 6개월 뒤인 1900년 4월 19일 ‘훈장조례’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대한제국 훈장은 크게 일곱 등급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훈장은 금척대훈장이었다. 두 황제 광무제 고종과 융희제 순종은 모두 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황제들을 제외한 인물로 첫 번째 금척대훈장을 받은 사람은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헨리 친왕이다. 헨리 친왕 서훈 나흘 뒤 또 다른 외국 인사가 금척대훈장을 받았는데,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일본 후작 이토 히로부미다. p 264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세 가지 결정적인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기이하게도 그 세 고비마다 대한제국 황실은 훈장을 광범위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남발했다. p 267



(1904년 한일의정서를 맺은 직후) 이날 황제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비롯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황제가 조령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에 서훈하고 금척대수장을 주라.” 다음 날 황제는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와 시바후 사이치로에게도 훈장을 하사했다. 명분은 ‘친목과 친애의 뜻’이었다. p 269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을 의결했다. 나흘 뒤 황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따위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모두 10명이었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나라가 사라졌다. p 270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그 훈장을 지급한 시기와, 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고종’미화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망국의 왕이라 동정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거나, 심지어 고종이 아관으로 피신한 길(실제로 그길도 아니었지만)을 복원하며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리기도 했다. 고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보냈떤 특사들은 이런 연설을 했다. 그들은 연설에서 조선 정부의 학정과 부패를 낱낱이 고발했다. 하지만 이부분은 철저히 가려지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고종이 (황제국 조선의)자주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사실만 가르쳤을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헤이그특사 연설문 中



고종이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독립협회 지원에도 반전이 있다.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이 나오는 순간, 고종은 독립협회에 등을 돌렸다. 온갖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럼에도 고종을 망국의 왕이라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뭐,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최근이라면 최근부터 고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곳곳에서 나오는걸 보면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빛나는 역사만 배운다. 어떻게 보면 미화된 역사일수도 있고, 그림자만 철저히 가려진 역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빛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울점이 얼마나 있을까. 진정한 교훈을 얻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배우기 위해선 빛나는 역사가 아닌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림자 속의 역사를 알리고,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했었던 대표적인 역사서가 바로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에 집필된 바로 그 책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당시 조선의 일부 장수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조선이 무엇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는지, 당시 조선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선조는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가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물론 그 속에는 이순신 장군처럼 빛나는 기록도 있지만, 정말 슬프게도 그런 빛나는 기록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류성룡이 일부로 빛나는 역사를 축소한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도 그만큼 빛나는 역사가 없었기에, 당시의 조선은 부패할대로 부패해서 무능의 역사밖에 없었기에 그랬던거다. 



비참했던 7년 전쟁이 끝난후 류성룡은 무능했던 조선을 바로잡기 위해, 류성룡은 위정자들이 들춰내지 않는 잘못들을 속속들이 들어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지난 일의 잘못을 바로 잡아 훗날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서였다. 그래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임진/정유재란 발발한지 불과 50년도 채 안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류성룡이 훗날을 위해 집필했던 『징비록』은 조선 사회에선 널리 읽히지 않았다는 방증이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히려 임진/정유재란 이후, 인조가 재위하면서 조선정부는 더더욱 부패해졌다. 조선 정부의 부패는 한번씩 바로잡을 타이밍이 있었지만, 역시나 바로 잡지 못했고, 종국엔 일본에 의해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모든 일은 조선을 침범한 외세만 잘못한게 아니다.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패도 그에 못지 않은 잘못이다.



이후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위정자들, 국민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역사를 들추면 매국노라느니, 빨갱이라느니 매도하기 바쁘다. 이렇게 ‘징비’라는 단어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런 환경에서, 과연 우리나라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우리 근대사를 보면 대한민국 시기 군부독재를 비롯하여 전 정부의 국정농단, 현 정부의 독단 등 정권이 바뀌든, 이어지든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또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하며 희망을 가졌지만, 매번 배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다음 대선주자들의 행보를 보자니,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지 않은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희망도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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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족두리공주라 불리는 의순공주이야기 저도 참 서글프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피로님 신남이 느껴집니다. 피로님 글 읽으니 저도 넘 읽고싶어져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 ~ 호떡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건강하게 잘 크며 좋은 태교 하시길 바랍니다. 근데 호떡이 태명 넘 귀여워요 멋진 엄마세요 *^^*

피로 2022-01-20 07:30   좋아요 1 | URL
정말 의순공주 이야기는 언제 봐도 슬프더라구요 ㅠㅠㅠㅠㅠㅠ
요즘 역사로 호떡이 태교중인데, 좋은 영향이 가길 바라고 있어요 ㅎㅎ
 
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 - 끝나지 않은 마음 성장기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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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에세이가 있었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점점 물건을 줄이다보니, 어느새 미니멀리스트가 된 사람의 이야기. 의도치않게 미니멀리스트가 되고보니, 점점 환경문제까지 생각하게 된 이야기. 심지어 그 책의 일러스트도 저자 본인이 그렸기에, 더더욱 와 닿았던 이야기. 그 책은 거실에 있는 내 책장에 꽂혀서, 매일매일 내 눈에 밟혔고, 덕분에 내 소비습관도 점차 줄어들게 했더랬다. 그렇게 의도치않게 내 행동을 개선해준 책의 저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이번 신간은 지금을 사는 2030, 바로 나를 대변하는 이야기였다. 앞선 세대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누리고 자라왔지만, 정작 성인이 되고 나니 끝없이 펼쳐진 포기와 좌절, 실패에 둘러쌓인 2030. 하지만 이들을 위로해주고, 이끌어주어야할 어른들은 사실상 전무한 지금.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찾은 방법 중 하나가, 나만 이렇게 힘들다는게 아니라는 것. 알고보니 내 친구도 힘들고, 내 친구의 친구도 힘들고, 심지어 무언가로 인해 성공한 누군가도 나와같이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위안이 되어주기 시작했다. 




이 책 『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는 바로 우리끼리의 위안이고, 위로고, 힐링이다.



꿈을 포기하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이 꿈을 내려둘 좋은 기회 같았다. 이루기 전에 그만두는 편이 내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포기를 기회라 여기며 긴 시간 함께했던 꿈을 정리했다. 대신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꿈 때문에 내 근처에 얼씸거리지도 못한 다른 가능성을 살폈다.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떠올리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다짐이었다. p 023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두고, 나는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처음엔 그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나의 폭이 협소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짧은 순간에 번뜩이듯 낯설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배운 적 없고, 평소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를 리 만무했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꿈을 편히 내려두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다행이다. 좋아하는 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p 025



요즘은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할 수  있는일을 찾는게 우선이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꿈을 꾸지 않는 청년들도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꿈’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나만해도 이제는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이 할 수 없을 정도니 말이다. 



분명 교복을 입었을 땐, 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새내기때만에도 꿈에 부풀었던 것 같은데,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모든건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당장 내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찾아야했고, 그렇게 ‘꿈’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그리고 번듯한 회사에 취업했다.



나름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고보니, 별안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시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연차가 쌓이고, 내 자리가 확고해지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시작했나보다. 뭐,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었을때, 무엇을 하고 살아야하나? 라는 그런 노후에 대한 막연한 걱정도 한몫하긴 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꾸었던 꿈이 무엇인지는 당최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잘하는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다보니 당연히 ‘문자’를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게되고, 일본어를 꽤 잘하는 편이고, 역사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등등등. 이렇게 좋아하거나 잘하는 것을 나열하고 보니, 문득 어린시절 내 꿈들도 떠올랐다. 책방 주인도 되고 싶었고, 고고학자도 되고싶었고, 역사학자도 되고 싶었고, 여행작가도 되고 싶었다. 잊어버렸던 꿈들을 찾아내어, 지금 내 위치에서 사실상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내 ‘노후’까지도 생각해서 말이다. 저 꿈들의 조합에서 생각해낸 것이 국가자격증인 ‘관광통역안내사’  였다. 그래서 바로 관통사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선 공인된 외국어시험 점수와, 필기시험, 실기시험(외국어면접)이 있었다. 공인된 외국어점수야 아주 가볍게 패스할 수 있으니, 이건 껌이었고. 필기과목을 확인해보았다. 국사, 관광자원해설, 관광법규, 관광학개론 총 네가지 과목이었다.



국사랑 관광자원해설은 역사와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역시나 껌이었다. 남은건 관광법규와 관광학개론인데, 내가 또 (무늬만)행정학 전공자였으니, 법이나 개론따위야 달달 외우면 되겠지 생각했다. 워낙 ‘문자’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필기시험공부는 낙승이라 생각했다. 실기는 뭐, 필기 붙고나서 생각하면 될일이고. 그래서 출,퇴근전 필기시험공부를 두달간 빡세게 했다. 그리고 진짜로 필기를 덜컥 붙었다. 이후 남은건 외국어 면접인 실기시험. 그리고 시험은 보기좋게 망한.....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합격! 



현실문제에 가로막혀 포기했던 꿈들을 재조합해서 도전한 자격증시험을 보기좋게 합격하고 보니, 일단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걸 해야하는건가 싶었다. 마음같아선 자격증을 받자마자 회사 때려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여기서 다시 현실문제로 돌아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래도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대기업 월급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내 자격증은 다시 서랍속으로 고이 들어갔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자격증이 쓸 날이 올거라는 생각을 하게되니, 회사생활이 맘 편하진건 비밀아닌 비밀이랄까?



사람은 돈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상 제작비용을듣는 순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주는거지? 큰 기업은 통이 커도 너무  크다면서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셨다. 두둑해진 통장은상상하기만해도 짜릿했다. 그러나 곧 내가 제작해야 할 영상의 분량을 보고 그 금액을 이해할 수 있었다. p 075



결론이 나왔다. 내가 하면 안되는 일이다. 아무리 큰돈이 욕심나도 이건 아니었다. 정해진 일정까지 납품하지 못해 계약불이행으로 법정에 선 내 모습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이 불행한 상상이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p 076



하, 돈 앞에서 약해지는건 만고진리 불변의 법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때려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모름지기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언제나 가변성이 있고, 지금 내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벌 수 있을지 알수 없는 모험이다. 나 뿐만 아니다. 이는 회사를 때려치고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아주 무섭디 무서운 망령과도 같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기라도 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아 도전이라도 해볼텐데, 현실의 성공사례는 아주 극소수다. 대부분이 실패의 연속일뿐. 그래서 내가 계속 이 회사에 묶여서 1n년째 노예아닌 노예생활중인 것이다.




 



 과거 부모님 밑에서 살때는, 이 노예생활이 그렇게나 지겹고 싫었는데 말이다. 내 가정을 꾸리고 나니, 이 노예생활이 얼마나 다행인지. 휴. 노예생활 덕분에, 매달 정기적으로 내 통장에 찍히는 월급덕분에 나는 내 집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을 수 있고, 각종 공과금을 낼 수 있고, 내 가족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 



뭐, 노예생활이면 어떠하리. 내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토대만 되어준다면, 앞으로 몇년은 더 노예생활을 할 수 이..ㅆ.....읍읍^_T...



나는 자주 불안하다. 편안한 와중에도 한 구석에는 불안이 자리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까. p 139



불안은 대체로 나쁜 것으로 치부되어 하대당한다. 그래서 나도 불안을 싫어했다. 불안이 엄습할 때면 왜 자꾸 쫓아오냐고 밀어냈다. 하지만 불안이없었다면 얻을 수 없던 것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했으므로 불안을 끌어안기로 했다. p 140



살아가다보면 뭔지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올때가 있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회사생활 중 뭔가 께름칙하거나, 왠지 뒷맛이 구린 그런 일들은 퇴근후에도 계속 날 따라다니곤 한다. 그런 날에는 꼭 악몽까지 꾼다.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유독 심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다보니 일이 설었고, 심지어 선임자라는 사람은 내가 입사전에 이미 퇴사한 뒤였기에, 진짜 모든 일을 내 스스로 알아서 배워야만했다. 덕분에 입사 1~2년간은 불안감이 없던 날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 덕분에 난 생각보다 유능한(?) 직원이 되고야 말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난 내가 생각한 것보다 완벽주의를 지향했던 사람이었음을.







집에만 있으면 ‘될대로 되라~’라는 식의 마인드가 날 지배했는데, 이상하게 회사에만 가면 모든지 ‘완벽’해야하는 이상한 마인드. 그 덕분에 어느새부터인가 난 회사에서 해결사가 되어있었다. 하, 회사에선 눈칫껏 못해야하는데, 사회초년생인 시절의 나는 그 사실을 1도 몰랐다. 덕분에 1n년간 내 업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건 안 비밀^_T.....



적당안 안정감과 불안감이 나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 균형을 맞추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잘해내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이 불안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 불안에 응답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불안 덕분에 부지런이 움직이고 있다. p 141



뭐, 요점은 그거다. 불안감 덕분에 내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 과한 불안감은 내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적당안 불안감은 나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내 하루 일과에 지장이 줄 정도의 불안감이라면 떨쳐버리는게 맞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의 동행자로써 함께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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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줄 마음 처방전
오왕근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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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입덧지옥 3개월을 지나니, 이제야 좀  주변을 둘러볼 틈이 생겼다. 정말 이 3개월간은 그 어떤 책도 읽기가 넘 힘들었다. 그나마 기존에 서평의뢰를 받은 책만큼은 어떻게든 읽어내리려 애썼고, 정말 더럽게 힘들었다T_T. 이후에는 앉아있기조차도 넘 힘들어서 서평의뢰를 1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시간이 약인지, 진짜 3개월이 지나니 어느정도 수그러들었고, 여유도 생겼다. 이제 슬슬 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손에 집어 든 책이 내가 애정해마지않는 상상출판에서 출간된, 에세이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였다. 너무 늦게 읽은 감이 없진 않지만, 어떡하겠는가. 내 커..컨디션이...크흡ㅠㅠㅠㅠ



어떤 에세이든 저자의 이력을 보게되곤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이력보단... 띠지에 실려있는 얼굴이 꽤나 낯이 익었다. 알고보니 여러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었는데, 뭐 그 중에서 내가 봤던 방송이라고는 #놀면뭐하니 (유느...♡)하나. 그러니까 저자는 흔히들 말하는 무속인이라는 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꽤나 신선! 그도 그럴것이 난 우리나라 전통신앙을로써의 무속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점을 보러간적은 1도 없지만, 하하하. 하지만 생각보다 가짜무속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와 관련된  사건사고도 많이 발생하는 요즘인지라 모든 무속인을 다 믿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난 세상에는 가짜 무속인 99%와 진짜 무속인 1%가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 1%의 무속인이길 바라며, 이 책을 읽었다.



당신에게 사주팔자의 한계에 갇히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운이 안 좋으면 더 많은 노력을 하되 매사에 더 신중하고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면 된다. 사주가 안 좋아서 평생 고생한다는 말을 들으면 큰 욕심을 부리지 말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은 내 안의 욕심과 화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 p 21



어려서부터 사주팔자 한번 쯤은 보고 싶었으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결국 3n년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점집, 철학관, 타로카페 등 미래를 봐준다는 그런 곳은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분명 엄청 궁금한데, 가고 싶지 않은 그런 너낌적인 너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을 지도 모른다. 만약 점을 보러 갔는데,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면 그 이후의 내 삶에.... 그 부정적인 이야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을테니까. 반대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도 그렇다.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잘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인해 역시나 내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고로 나는 점을 보러 가지 않는다.



‘사주팔자의 한계에 갇히지 마라’



근데 놀랍게도, 무속인인 저자가 내가 우려하는 부분을 콕 집어주었다. 놀라운 이야기! 보통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가짜무속인(?)들은 돈을 더 요구하며 미래를 좋게봐주겠다는 등 그런 감언이설로 속이는 경우가 많던데(흔한 그알 애청자1), 저자는 정반대였다. 오래전, 마을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던 진짜 무속인들의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사람을 가려가면서 보냐고 따지듯이 물은 적이 있다. 당연하다. 나는 사람을 가려서 본다. 인연법이 없는 자가 잘못 들어오면 아홉의 선량한 목숨들이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신도 사람을 가려 사귀면서 대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람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가장 해롭다. p 048



와, 따지고보면 무속인이라는 직접도 어디까지나 서비스업이고 사람을 상대하며 돈을 버는 업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이야기는, 저자는 돈을 벌기위해 무속을 업으로 삼았다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보다 돈을 많이 들고오는 손님들도 그냥 돌려보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러한 마인드난 ‘돈’이면 다 될거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사람을 가려 사귀라고 조언하는 저자의 마음이 확 와닿았다. 당장 오늘만해도, 난 핸드폰을 들어서 여러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싹 지우고, 카톡에서도 차단했으니 말이다. 마음같아선 핸드폰번호를 싹 바꾸고, 진짜 내 사람들 몇몇이랑만 연락하며 살고 싶은데, 휴. 그건 일단 퇴사 이후에나 가능한 일인걸로...



인생은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도 없고 상대도 없다. 소중한 존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두 변해버리고 만다. 자식이 대학에 합격해야만 행복한 것일까? 반드시 아파트를 사고 원하는 회사에 취업해야만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순간을 즐길 수 있다. p 168



‘인생은 순간이다.’



진짜 오백프로 공감한다. 살기가 너무 팍팍하고, 삶이 너무 힘들고, 내집마련하기가 너무 어려운 지금의 현실. 이 현실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오로지 눈 앞의 목표를위해 열씸히 노력하고, 아둥바둥하며 사는게 요즘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가 없다면, 과연 무슨의미가 있을까 싶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 과정에서 ‘나’는 사라진 그 느낌. 내 삶속에서 내가 사라졌기에, 그래서 현대인들이 번아웃이 자주오는건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우리 부모님들은 본인들의 삶을 희생하며, 자식을 키웠다. 그래서 난 항상 부모님께 감사하고,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듣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안타까움도 있다. 분명 내 엄마도, 아빠도 본인들의 삶이 있었을 건데, 나와 동생을 키우느라 그 삶을 온전히 영유하지 못한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부모들은 내 삶은 뒤로하고, 자식을 위해 사는것이 맞는것일까? 하는 그런 의문이 요즘들어 더더욱 많이 든다. 나는 내 새끼가 나오면, 우리 부모님이 그러하였듯 내 삶은 뒤로 한 삶을 살게 될까?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온전히 내 이름으로 불리는 삶을 살고 싶은데 말이다.



앞으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온전히 내 몫이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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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 그림으로 남긴 순간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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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 얼마만의 여행에세이인가. 심지어 예전에 읽었던 『혼자, 천천히, 북유럽』(아래 리뷰!!)의 저자가 펴낸 두번째 에세이다. 시중에는 여행에세이도 워낙 많기에, 이 책을 그저 코웃음 치고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 저자의 여행에세이는, 다른 여행에세이에서는 볼 수 없는, 단연 돋보이는 매력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름하야 여행드로잉.



보통 여행에세이라면 저자들이 찍은 여행사진이 반 이상을 할애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대신, 사진보다 더 많은 여운을 담고 있는 수 많은 그림들이 담겨있다. 그렇다. 저자의 여행방법은 바로 그림이다. 언제 어디서든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는 것. 이게 바로 저자의 여행방법이고, 여행지를 마음속에 담는 방법이다.



앞서 읽었던 북유럽 여행에세이도 좋았지만, 이번 여행에세이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솔직히 북유럽은 아직 안가본 사람이 더 많다. 심지어 요즘 같은 시국에 해외여행은 언간생심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씩은 가보았을 제주도다. 수학여행이든, 신혼여행이든, 우정여행이든, 가족여행이든, 그 어떤 이유로든 말이다. 심지어 2년째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이 허락되는 곳은 유일하게 제주도, 한 곳이다.



그런 제주도를 저자는 화폭에 담았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방문했던 그 곳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진으로보는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날의 기분까지도.






사실 북촌리는 제주 4.3사건의 상흔이 깊은 마을 중 하나다. 1948년 12월 16일 군경에 의해 24명의 주민이 희생된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만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마을 인구가 약 1,500명이었다고 하니, 마을 사람 셋 중 하나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가족을 잃은 슬픔마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다. p 047



제주 북촌은 나에게 제주 4.3의 잔혹성을 느끼게 했던 곳이다. 너븐숭이에서 시작해서 서우봉까지 이어지는 제주 4.3 학살의 흔적. 특히 너븐숭이에는 제주 4.3 당시에 덧없이 스러져간 어린 생명들의 애기무덤이 남아있다. 학살한 그들은 제주도민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고한다. 나는 그저 학살대가 ‘도민들을 잔혹하게 죽였구나’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더랬다. 헌데, 북촌 너븐숭이에서 본 애기무덤을 보는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그저 ‘잔혹하게 학살했다’라고 쉽게 말하기엔, 너븐숭이에 있는 애기무덤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너븐숭이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가면 저자가 그린 북촌포구를 만난다. 북촌포구 왼쪽에는 서우봉이 있다. 제주 4.3당시 북촌 너븐숭이 일대와 바로 이곳 북촌포구 및 서우봉 모두 학살의 현장이었다. 특히 서우봉은 제주 4.3이 일어나기 훨씬 전,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해안동굴진지를 수십곳이나 파놓은 곳이기도 하다. 물론 동굴진지를 직접 만든사람들은 단연코 강제징용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파란물결 넘실대는 북촌포구, 하지만 해방 이전의 아픔과 해방 이후의 아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녕리는 섣불리 해안도로를 개발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마을안의 올레길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미로처럼 구불구불 뻗어 있는 골목길을 걷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 마을ㅇ의 길은 해안선을 따라 이어져 곧 김녕성세기해변에 닿았다. 터키석을 갈아 넣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바다와 눈부신 하얀모래, 그리고 이것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짙은 갯바위의 조화가 가슴을 뛰게 했다. p 052 ~ 054



제주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그 중에도 한 곳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김녕 성세기 해변을 꼽을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에 처음 갔을 때, 우연하게 들렸던 성세기 해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우리가족은 그곳에서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한평(?)짜리 카페인 쪼끌락에서 김녕라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신랑과 둘이서 다시찾은 김녕 성세기 해변은 부모님 모시고 갔을 때와는 조금 달라진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큰 변화는 카페 쪼끌락이다. 대규모 카페가 되어있었다. 사장님이 돈을 많이 벌었나봐...!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서 여자는 곧 해녀였다. 가난에 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린 몸을 이끌고 거친바다로 나가야 했다. 가까이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멀리는 대마도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원정 물질을 나갔다. 1920년에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해녀 어업 조합’이 탄생되었지만, 일본인이었던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가 조합장을 겸임하게 되며 오히려 수탈 기관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 082




제주는 단연코 여자, 그러니까 해녀들이 많든 섬이다. 



생계를 책임지던 제주 남자들은 조선시대에 귤 진상과 전복 진상에 시달리다 섬을 떠나갔다. 남자는 떠나갔지만, 가족은 제주 섬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주 남자가 떠나가니, 남은 가족을 먹여살리는 사람은 제주 여자들이 되었다. 제주 여자들은 바다속에 들어가 물질을 하며 가족을 먹여살렸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도 여전했다. 제주는 해녀들이 먹여살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인가. 사람까지도 수탈되던 시대이다. 일본인들은 제주 해녀들도 핍박했고, 제주 해녀들이 물질해온 해산물도 수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당할 제주해녀들이 아니었다. 거친 물살과 함께 살아온 그들이다.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1932년 최초로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하도리는 해녀들의 항일운동 역사가 숨쉬는 장소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곳도 현대사의 아픔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제주 4.3 당시 성산읍에는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의 특별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산읍을 비롯하여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 억울하게 잡힌 주민들을 터진목 인근에서 총살했다. 비뚤어진 맹목적 이념은 이처럼 거대한 비극을 만들어냈다. p 104


성산일출봉,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해안길.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곳이며, 관광지로도 핫한 장소다. 저 세곳을 다 가지는 못했더라도, 하다못해 성산일출봉만은 찍고 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이 장소들 모두 제주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 장소는 모두 학살의 장소였다. 



성산에서 터진목으로 가는 해안도로 옆, 인적이 드물고 수풀이 우거진 그 곳에는 ‘제주 4.3 양민 집단 학살터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위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성산일출봉 헤안절벽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만든 해안진지가 지금도 남아있다. 성산일출봉 주차장 인근은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동백을 흔히 ‘토종 동백’이라 부르고 있지만, 정작 이 관목의 학명은 Camellia Japonica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식물에 일본의 국가명이 포기된 까닭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관목의 학명이 Camellia Japonica가 된 이유는 17세기에 일본을 방문했던 독일 태생의 식물학자 엥겔베르트 캠퍼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서양인 최초로 일본에서 보았던 동백나무에 대한 묘사를 했다. 이것이 1753년에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칼폰 린네가 동백나무의 학명을 명명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p 136


겨울에 제주를 갔다면 꼭 봐야할 것이 있으니, 바로 동백군락지다. 지금까지 화분으로나 봐온 동백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나 역시 위미리 동백군락지를 가서, 동백나무에 에워쌓여있자니 꼭 동화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동백의 영어명이 카멜리아라는건 알았는데, 그 뒤에 자포니카가 붙는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동백은 제주에 널리 분포되어있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도 동백이 있는데, 푸른눈의 서양 식물학자들이 17세기에(그러니까 1600년대) 일본에 있는 동백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학명에 자포니카가 붙었던거란다. 서양 식물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동백을 보았던 동시대에, 우리나라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조선은 서양인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다. 아니, 배척했다고 해야하나. 그러니 서양 식물학자들이 조선에 와서 동백을 보고 싶었어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시관은 1653년에 네들란드 상인 헨드릭 하멜이 일행들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할 당시 타고 온 스페르웨르라는 이름의 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멜은 난파된 이후 15년이 지난 1668년에야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국 후 그가 쓴 <하멜표류기>는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p 282


위 동백 이야기와 조금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양 식물학자가 일본에서 동백을 보았던 그 시기에, 제주도 그러니까 조선의 탐라에도 서양사람이 들어왔다.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의 ‘하멜’이다. 우리나라는 하멜이 유럽에 최초로 조선을 알렸다고 과시한다. 제주 용머리해안에 있는 저 하멜전시관에도 동일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해서 난 하멜전시관을 갔을 때,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는 사실, 그거 하나 자랑하려고 저 큰 전시관을 만든 것인가? 정말 그뿐인가? 하멜표류기를 잘 따져본다면, 조선에서 하멜일행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본다면, 저거 하나 자랑하자고 저 큰 전시관을 세우는데 막대한 돈을 쓴 것이 그저 어리석어보일 뿐이다.



당시 하멜은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좌초되어 제주로 오게된 것이었다. 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외국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도 조선에 들어오면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외국인들. 그렇다면 조선은 외국인이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흡수해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조선에서 서양인들은 그저 푸른 눈의 원숭이였을 뿐이었으니까. 심지어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다른 죄인들처럼 삼남지방 곳곳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약 13년간 하멜일행은 조선에서 온갖고초를 겪었고, 그 중 살아남은 일부가 겨우 빠져나와 원래 목적지였던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하멜일행은, 일본 관리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대부분은 조선의 국방, 식량, 문화재등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백년뒤 일본이 조선에 처들어오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나는 제주도 여행이 정말 좋다. 그저 관광지로써만 좋은게 아니다. 만약 관광지로써만 좋았다면 제주를 두번, 세번 찾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저자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제주 풍광이 너무 이뻐서, 그림그리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지만, 그저 이쁘기만 했다면 저자가 이토록 제주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제주는 아름다운 풍광만큼, 그 속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저자도 나도 제주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제주로 떠나고픈 마음이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니. 내년에 날 좋은 날에 제주로 날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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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22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다 가본 곳. 다시 또 여러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곳. 그것도 드로잉에다 ! 당장 담아갑니다
정성들인 리뷰에 좋은 여행에세이 소개 고맙습니다 ^^
 
꼭대기의 수줍음 매일과 영원 3
유계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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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책을 읽을 때 출판사를 유심이 보는 편이다. 우연히 읽었는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다른 책들도 한권, 두권 읽어보다가 어느새 내 책장의 한켠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반대로 정말 마음에 안드는 책이라면(특히 역사왜곡이 들어간)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에 눈길한번 주지않는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민음사는 전자에 속한다. 민음사 책을 몇권 읽어보진 않았으나, 이런 책을 출판했다면 믿고볼수 있는 출판사라 생각했다. 다만, 민음사는 내가 즐겨있는 장르와는 조금 다른 문학쪽 출판사다보니, 민음사 책을 읽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뿐^_T 그래도 민음사에서 나오는 에세이(또는 수필) 류는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중 하나다보니, 이렇게 또 한번 민음사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에세이의 저자는 시인 유계영 이라고 한다. 현대 시인이라고는 나태주 시인님밖에 모르는 나로써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뭐 어떠한가. 나는 시를 읽으려고 이 책을 읽은게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녹아든 에세이를 읽으려했던 거니까.



여러사람들 틈에 있을 수록 나는 납작해진다. 변기의 용도는 유일할 것 같지만 의외로 쓰임이 다양하지.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혼자가 된 사람들이 변기 뚜껑 위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던데. 나는 가끔씩 변기에 앉아 우는 사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다. p 017



맞다. 우리집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일 뿐이지만, 사회에 나가서, 회사 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그저 변기가 아니게된다. 저자가 말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시간’이 바로 변기위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사회초년생들이 한번씩은 거쳐갔던 변기위의 그 시간이, 아주 당연하듯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서럽던지. 회사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위에 앉아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어른처럼 보이던 회사 언니들이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저자가 그랬다. 되도록 소리내어 울음으로써, 누군가가 이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을 연민의 눈초리로 봐주었으면 한다고. 나역시도 그랬고, 회사언니들도 그랬듯이 그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내 우는 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했던 그 마음. 물론 지금이야 눈물이 메말라서, 누가 뭐라그러면 기계적으로 웃으며 ‘네네~’ 하고 뒤돌아버리거나, 그건 내가 한게 아니라고 되받아치는게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은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생각하다가, 그래서 나는누굴까 생각하다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알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나 싶다. 산다는 것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한 뒤에 또 오해하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나인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아무것도 참을수가 없을까. 나를 가리려고 직접 골라 쓴 가면을 물끄러미 본다. 자기 자신의드라마를 위해 조금도 화를 참지 않는 낭만주의자가 겸연쩍은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다. p 018



책을 읽다보면, 그런생각을 자주 한다. ‘저자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무슨 의도일까?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는걸까?’ 이런 류의 생각말이다. 어렸을땐 안그랬던 것 같은데, 역사책을 자주 읽게되면서(특히 역사왜곡하는 사람들의 책 포함해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관심을 갖게되었달까? 문제는 굳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 없는 가벼운 글들이나, 힐링을 위해 읽는 에세이나 수필집을 읽을때도,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아! 이런 의도인걸까?’하는 나만의 답을 내리고는 하는데, 이 에세이는 도무지 모르겠다. 근데 막 의도는 모르겠는데, 묘하게 글의 흐름이 친숙하다. 뭐랄까. 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어 흘러가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 내가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 저자는 그 의식의 흐름을 말이 아닌 글로 옮긴 느낌이랄까. 아, 어쩐지 뭔가 친숙했어. 이런 글.....!!



처음에는 달리는 말을 보고 싶었던 거다. 거르나 이 땅에서 질주하는 자유를 누리는 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경주마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지옥에서 쉴새없이 달려야 하는 말 또한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경주에서 꽃마차 끄는 말이 쓰러졌던 사실이 떠올랐다. 학대로 쓰러진 검은 말이 재작년에 죽었다. 죽은 말과 두 마리의 말들이 더 구조되었다. 구조 이후 다른 삶을 살게 된 말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 또한 말들에게 고통이라면, 꽃마차가 사라진 거리라도 직접 보고 싶었다. 아무리 포개도 자양이 되지 않는 슬픔을 좀 덜기 위해서. p 034



뭐라고해야하나,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저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무언가 눈에 딱 틀어왔을때, 그 무언가에 대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질것 같은, 꼭 나와 같은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과거에 해미읍성에 놀러갔다가, 한켠에 주차(?)되어 있던 꽃마차가 있었다. 꽃마차. 꽃으로 장식된, 말이 이끄는 수레다. 한마디로 그 꽃마차 앞에는 끈으로 고정되어있던 살아있는 말 한마리가 있었다. 그 말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심지어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습의 말이 그렇게 불쌍해보일 수가 없었다. 더 슬픈건, 그 때 그곳은 비가 오고 있었다.



꽃마차와 말. 누군가의 눈에는 해미읍성을 방문한 관광객을 위해 비치된 일종의 관광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이 비를 맞고 있던 말던, 건강하던 말던 아랑곳하지않고, 오로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할만을 시켰을 것이다. 간혹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나 처럼 말이 가엾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우리는 그 말을 구할 수 없고 구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말은 누군가의 사유재산일 것이고, 누군가의 사유재산에  관여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유재산을 다시 웃돈주고 사오거나, 아니면 그저 옆에서 말만하는 오지랖일테니.



결국 나는 해미읍성 한켠에, 꽃마차와 함께 묶여있던 그말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딱 거기까지었다. 그 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욕심에 희생되는 가엾은 동물들이라는 생각만, 말만 한 또 다른 이기적인 인간이었을뿐이다. 



단지 앞에 회오리감자 푸드트럭이 와서 사 먹으러 갔다. 트럭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강아지 호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이럴 때 좀 화가난다. 사람은 사람만 보려고 한다. 이 세상에 사람만 정당하게 존재하는 줄 안다. 눈 앞에 확보된 세계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안다. 동물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달라! p 050



에세이를 읽는 내내 저자는 동물에 우호적인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물론 저자의 말처럼 동물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하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해미읍성 한켠에 묶여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말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위의 저자의 에피소드를 무작정 편들수만은 없다.



푸드트럭앞에서 저자의 강아지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를 비판하는듯 써내린 저 글, 저 글은 오롯이 애견인의 입장만 생각하고 쓴게 아닐까? 누구나가 애견인들처럼 강아지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어렸을때 커다란 진돗개에 물린 경험이 있기에, 내 앞에 어린 강아지가 있다면, 일단 멀찌감찌 떨어진다. 저자의 강아지를 보고 놀란 그 여자는, 나처럼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아닐지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어땠을까.



당장 내가 사는 단지를 보면, 세상에세상에 개반 사람반이다. 산책을 하러 나가면 정말 여기는 큰개, 저기는 작은 강아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다. 물론 그 개들을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 개티켓을 잘 지켜준다면 나도 할말은 없다. 그런데 왜때문에, 목줄(또는 몸줄)이 없이 개 혼자 저 앞에 걸어가고 개주인은 뒷짐지고 슬렁슬렁 걸어가는걸까. 자기 개가 화단에 큰일을 치루면, 그걸 처리하지않고 그냥 무시하고 가는걸까. 심지에 엘레베이터 안에서 개를 바닥에 두고, 사람을 보고 짓든 말든 신경쓰지않는 견주들을 보면 나는 이런사람들을 보면서 ‘개가 개를 키운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일반화를 하진 않는다. 개통령처럼 개와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가는지, 개에 진심인 사람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개통령의  바이블을 따라, 사람과 공존할 수 있게 개를 키우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물론 개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통제로 인해 힘들겠으나, 사람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으니.



하지만, 저자의 저 글은 묘하게... 저자의 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물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일반화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강아지를 무서워해도, 내 뒤에 누군가의 강아지가 있다면 놀라지말고 꾹 참으라고 하는 듯한 뉘앙스. 내가 좀 과하게 생각한걸지도 모르지만, 그냥 좀 그렇게 느껴진다. 내가 개를 안키워서 그런가....^_T..





이 에세이는 나에게는 묘하게 친숙하면서, 묘하게 달랐다.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어떤 생각은 저자와 비슷했지만, 또 어떤 생각은 저자와 대척점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분명 저자는 시인이랬는데, 나와 닮으면서도 닮지않은 이 사람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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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