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쪽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8
한진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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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도슨트 신간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제주동쪽 이야기. 지금까지 출간된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보통 도시 하나당 한 권이었다. 제주 같은 경우는 제주시, 서귀포시로 나뉘어있는지라 당연히 그렇게 책이 나올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달까? 이 책을 읽고보니, 제주사람들은 옛날부터 동/서쪽으로 나눠살았고, 동/서쪽으로 생활방식도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 이런 관습을 무시하고 남, 북으로 제주시/서귀포시로 나눈 행정체계란!!!! 으이구!!!!




흠흠. 대한민국 도슨트 시리즈는 집에 세 권을(춘천, 신안, 통영편) 미루어볼때, 제주동쪽편도 인문/지리/역사가 총망라된 인문지리서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여행 취향이 역사 여행(인문학 여행)인 지라, 이 책에 대해 많은 기대도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중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이거다. 


“얼마나 많은 제주 역사가 담겨있는지, 이 책속에 내가 모르는 제주의 역사는 어느정도인지, 제주의 아픈 근대 역사를 얼마나 담고있는지.”



생각보다 많은 제주 여행서적은,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만 노래할뿐, 제주의 역사에 대해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제주의 역사를 얼마나 담고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걱정은 한낱 외부인의 기우였을뿐! 제주에서 나고자란 저자는, 제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책에 담고자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일러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유별하게 왕성한 무속신앙의 배경에는 척발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또렷한 이유가 있다. 뭍사람들은 제주를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고 부르지만, 제주 사람들은 풍재, 수재, 한재의 세 가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 삼재도라고 불러왔다. p 024



예컨데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는 점도 책의 첫머리서부터 짚고 넘어갔다. 실제로 한반도에 남아있는 신화의 고향은 대부분 제주도다. 본토는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속신앙이 무참히 밟혀나갔지만, 바다건너에 있던 제주도는 본토와 떨어진 만큼 그네들의 민속신앙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설문대할망, 소별왕과 대별왕, 금백조, 소로소천국, 궤네깃또 같은 제주 신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래될 수 있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제주 신화가 지금까지 지켜져왔던 이면에는, 제주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 본토와 떨어진 섬이다보니, 재해가 발생해도 정부의 구휼이나 지원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늘신이 노하지 않기를, 바다신이 노하지 않기를… 이런 식으로 본인들이 믿고 있는 자연신, 마을신, 성황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방법밖에 없었던 거다. 



지금까지 제주신화가 지켜질 수 있었던 건, 무사안녕을 바라던 제주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 덕분이었다.




성산을 비롯한 제주는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아름답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제주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제주 토박이들은 감탄 속에 한탄을 섞어 내뱉는다. 저 높은 한라산은 긴긴 한숨이 쌓이고 쌓인 것이고, 드넓은 제주 바다는 끝도 없이 흘러넘친 피눈물이 응어리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세월 변방의 보잘것없는 섬이라는 이유로 같은 탄압과 차별을 받아온 수난의 역사가 풍광의 아름다움 너머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p 030


제주가 ‘신들의 고향’이라 말하니 묘하게 신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그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이 무색하게, 제주의 아픔을 알게 된다.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제주지만, 제주 섬 전역에는 엄청난 아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는 몽고에 항쟁한다는 미명하에 삼별초군이 제주까지 밀고들어와, 제주는 원치않게도 대몽항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렸다(당시엔 고려왕조는 이미 몽고와 화해를 넘어서, 사돈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제주까지 온 삼별초는 권력을 놓지 못한 자들의 발악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감귤과 전복 진상으로 제주 농부들과 해녀들이 갈려나갔다. 귤나무에 핀 꽃 수대로 귤을 진상하지 않으면 치도곤을 맞다가 죽어갔고, 진상할 전복 수량을 위해 험한 바다로 나갔다가 해일에 휩쓸려 죽어가는 해녀들이 즐비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제는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진지동굴을 팠고, 들판에는 전투기 비행장을 만들었다. 겨우 해방이 되어 봄날이 오려나 싶었더니,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미명하에 제주 전역에선 4.3학살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제주는 황홀한 곳이지만, 눈부신 풍경 뒤 끔찍한 아픔이 숨겨진 곳이기도 하다. 광치기해변의 절경은 응달에 가려진 그림차처럼 은폐되었던 역사의 아픔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아픔의 배후에는 1947년부터 시작해 무려 7년 7개월 동안 벌어진 엄청난 학살 제주4.3이 있다. p 055


내가 제주도를 갈때마다 잊지않고 꼭 들르는 유적지가 있다. 바로 4.3 유적지다. 심지어 제주 여행을 갈때마다, 매번 두,세차례씩 다른 4.3유적지를 방문하고 있음에도, 아직 못가본 4.3유적지가 즐비하다. 왜인고 하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제주 4.3 학살은 제주 전역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바닷가(협재해변, 광치기해변 등)라던가, 성산일출봉, 각종 오름들도 모두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터진목과 광치기해변은 칠십여년 전을 기억하고 있을까? 거센 파도가 너럭바위에 부딪히며 쾅쾅거리는 소리를 낸대서 광치기라고 부른다는 말은 어저면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원혼이 통곡하여 가슴을 치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p 057



성산일출봉에서 터진목, 광치기해변으로 이어지는 제주 올레 1코스. 해안 드라이브코스로도 각광받는 이 해안가는 제주 4.3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다. 터진목 해안가에 가보면 ‘제주 4.3 성산읍지역 양민학살터 표지석’도 설치되어있다. 하지만 이 곳을 오는 사람들이라곤 유가족 정도일뿐이다. 내가 이곳을 들렀을 때도, 이 곳을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로에 해안 드라이브를 하는 차량들만 쌩 하고 지나갔을뿐. 조금만 신경썼다면, 이 곳에서 4.3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았았더라면, 이 곳을 지나는 차량들 중 못해도 30%정도는 차에서 잠깐 내려서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까? 당시 느꼈던 씁쓸함을, 다시한번 느낀다.



함덕리를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해변으로 돌진한다. 그러나 한 번쯤 이 아름다운 해변을 품은 마을은 어떻게 생겼을까 관심을 가져보라 권하고 싶다. p 160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풍광이 아름다운 제주 해변가 대부분은 4.3 학살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협재가 그랬고, 성산일출봉 일대 앞바다가 그랬다. 함덕해변도 4.3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함덕해변 주변에 있는 모든 곳에서 4.3 학살이 자행되었다. 서우봉이 그랬고, 북촌이 그랬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을 이르킨 일본군은 옥쇄작전을 세우고 자신들의 본토와 제주도에 최후의 진지를 구축했다. 동쪽의 일출봉부터 서쪽 끝의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뚫어놓은 진지동굴은 서우봉에도 무려 20여 군데가 남아있다. 서우봉의 참상은 진지동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근현대사의 참극인 4.3의 무도한 학살 역시 벌어진 것이다. p 166



제주섬 어딘들 4.3의피바람이 비껴간 곳이 있을까마는 북촌리의 아픔은 유독 핏물로 흥건한 늪처럼 어둡고 깊기만 하다. 일제강점기에도 북촌리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항일운동을 벌였다.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년들은 해방 이후에도 자치 조직을 만들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다. 하지만 이런 청년들의 활동을 불순하게 역니 경찰들과 간간이 마찰이 있었는데 1947년과 이듬해 사이에 경찰관 폭행과 납치, 살해하는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인명 학살은 1949년 1월 17일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북촌국민학교에서의 총격을 시작으로, 400명 넘는 주민들이 총탄의 희생양이 되었다. 사건이 있고 난 뒤 오랫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p 190



심지어 서우봉은 일제강점기 때도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서우봉 산턱과 해안절벽 곳곳에 일본군이 파놓은 진지동굴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난 함덕에 갔을 때, 함덕해변이 아닌 서우봉을 찾았었다. 일본이 파놓은 진지동굴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서. 하지만 서우봉 진지동굴 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우선 진입로가 덤불 속을 헤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과도 같은 샛길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산속에 있는 진지동굴은 두 눈으로 확인했지만, 해안가 절벽에 있는 해안진지 동굴은 결국 보지 못했다. 일반인이 가기에는 안전이 걱정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과하게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봤을 땐 서우봉 해안진지는 무작정 가기엔 좀 그랬다.




 



서우봉이 일본군 진지동굴만 있는게 아니라, 서우봉 자체로도 4.3 학살의 광풍이 불었던 곳이고, 제주 4.3유적지로 정비되어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최근 몇년간 4.3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아직 4.3 유적지를 일반인이 관광할 수 있을만큼 정비를 하기엔, 널리 알려져있지는 않은건가 싶었다. 널리 알려져야 찾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사람들 발길이 많아져야, 그만큼 유적지 정비가 될텐데, 휴..



그래도 서우봉 아래에 있는 북촌리 너븐숭이 유적지는 나름대로 정비가 되어있다. 북촌도 4.3학살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 전부 죽어서 무남촌이 불렸다. 뿐만 아니다. 여기서 아이들도 많이 죽었는데, 그 아이들을 매장한 곳이 4.3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는 너븐숭이의 애기무덤이다. 애기무덤 옆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구절을 새긴 비석들이 누워있는데, 이는 4.3당시 죽임을 당한 시신들을 형상화한 모습인지라, 당시 내 눈 앞에 있던 비석 하나하나를 전부 학살된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잊지말자.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한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해안절벽, 오름들. 멋진 풍광속에 들어있는 그 모든 곳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제주 사람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제주 전역이 4.3 학살터라는 것을.



어렵사리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마을 해녀들은 또다시 물옷을 입고 바다로 나섰다. 다시 학교 재건 기금을 모으기로 한 온평리 해녀들은 이번에는 아예 마을 바당밧 한 구역을 ‘학교바당’으로 정해놓고 거기서 채취한 해산물의 판매대금은 무조건 학교를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제주 최초의 학교바당이 만들어졌다. p 072



‘제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제주를 지금까지 먹여살린 해녀들 이야기다. 



조선시대 끝없는 귤 진상 요구와 전복 진상요구로 귤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던 제주의 남자들은 알음알음 제주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제주에 있던 행정관들은 귤나무에 핀 꽃의 갯수까지 세서, 그 수만큼 귤을 수확하지 못하면 치도곤을 쳤다. 전복도 마찬가지다. 일정 수량을 채우지 못해도 치도곤을 쳤다. 배를 몰던 제주의 남자들은 그렇게 제주를 떠나갔다. 하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제주에 남아있었다. 그 가족들을 먹여살린 사람들이 바로 제주의 여자, 해녀다. 제주 여자들은 그렇게 물질을 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고, 제주를 먹여살렸다.



일제강점기가 되고, 수탈이 시작되었다. 참다 못한 제주 해녀들도 뭍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일제에 저항하였고, ‘해녀의노래’를 부르며 항일운동을 하며 제주 바다를 지키고자 했다. 해방 후에는 제주의 아이들을 위해 나섰다. 제주의 아이들이 공부할수 있는 공간이 없자, 해녀들이 물질을 하여 나온 수익을 학교 건설을 위해 쓰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해녀들이 벌어온 수익으로 제주 온평리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하지만 학교 내 공덕비에는 학교설립을 해야한다는, 대외적으로 나서던 남성 독지가들의 공로만 드높였다. 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비용을 마련한 해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몇몇 정의로운 사람들이 불합리하다고 성토를 한 후에야, 해녀들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 옛날부터 제주를 먹여살리던 해녀였지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가부장제를 이겨내기엔, 제주 여성의 지위는 너무나 초라했다. 


하도리는 물론 제주의 해녀들은 서로를 제 몸처럼 아꼈다. 막 물질을 시작해 솜씨가 서툰 애기잠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수확물이 쥐꼬리만큼이었다. 애기잠수의 풀이 죽은 모습을 본 상군해녀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이 잡은 전복이며 소라를 하나씩 밀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묵직하게 해줬는데, 이렇게 서로를 배려해 해산물을 나눠주는 것을 개숙이라고 했다. 개숙개는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모여들어 애기잠수의 망사리를 채워주던 갯바위다. p 144



그럼에도 제주 해녀들은 물질이 숙명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가족을, 제주를 먹여살렸다. 제주 해녀란, 제주 그 자체다.



‘북녘을 사모해 그리워한다’는 뜻에서의 북녘은 단순히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포구가 뭍과 제주를 오가는 범선과 사람들로 북적대던 조선시대, 그 시절 관원으 신분으로 제주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색당파의 패권 다툼 속에 죄인이 되어 제주로 귀양 내려온 유배객들도 많았다. 제주에 발을 딛게 된 이들은 항상 바다 건너 북녘이 사무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면 이 정자에 올라 아득한 수평선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특히 죄인의 몸인 유배객들은 하루하루가 시련의 나날인 탓에 연북정의 단골손님으로 돌계단이 닳도록 오르내렸으리라. p 247



요즘을 사는 우리는 힐링을 위해, 좋은 곳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제주를 간다. 이 모습을 조선사람들이 본다면 아주 까암짝 놀라고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제주는 제일 최악의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죄질이 나쁠수록, 왕이 죄인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로 배속된다. 그중 제일 끝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는 한양에서 970리나 떨어진, 오늘날로 말하면 390km나 떨어진 곳이다. 이렇게 먼 만큼 유배지인 제주까지 오는 중에 객사할 수도 있다. 배를 타고 제주에 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운 좋게 유배지인 제주까지 왔다한들, 언제고 유배가 풀릴지 기약이 없었던 것이다.





제주로 유배를 왔던 대표적인 유배인으로는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조의 손자: 석철, 석린, 석견), 은언군(철종 조부),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개화파 박영효(결국 친일파) 등이 있다. 광해군은 제주에서 천수를 다해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석철과 석린은 제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서 죽었다. 아니 살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암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에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다. 친일파는 생략.



한마디로 조선시대에 제주는 역모죄에 달하는 중죄인이 오는 최악의 유배지였다. 제주로 유배왔다가 해배가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렇게 유배지로 각광받던 제주를, 우리는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자발적 유배’를 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





이 책으로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 하나, 제주는 먹방, 힐링뿐만아니라 인문학 여행으로도 최고의 여행지라는 것!


아, 제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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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 맛의 멋을 찾아 떠나는 유럽 유랑기
문정훈 지음, 장준우 사진 / 상상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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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었던 프랑스 미식여행기 「진짜 프랑스는 시골에 있다」의 후편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진짜 스페인은 시골에 있다」.



알고보니 이 책의 저자들이 프랑스를 여행한 후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책으로는 ①프랑스편, ②스페인편 나눠서 출간한 것이다. 하긴 프랑스와 스페인, 두 나라를 한 권에 담았다면, 편집되는 분량이 정말 어마어마 했을 것 같기도. 프랑스와 스페인을 나눠서 출간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인듯!


앞서 프랑스편을 읽으면서 프랑스 사람들의 토종닭 사랑과,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그러다보니 스페인도 왠지 프랑스의 토종닭처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토종 식재료(?)가 나올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난 스페인에서 나오는 옴춍옴춍 유명한 돼지고기를 알고 있잖아? 심지어 내가 좋아하고, 가끔 사먹는 그 돼지고기! 이베리코 돼지가, 스페인 그니까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고 자라는, 스페인 토종돼지라는 거!! 그러니 분명 이 책안에는 이베리코 돼지고기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이베리코 돼지의 이야기를 알면, 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흐흐흐.


스페인편 여행에세이를 읽으려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은 어떤 나라인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음,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이라곤 윤식당과 꽃보다 할배에서 본게 전부네? 아니 근데, 내가 여행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보는데 있어서, 좋아라 하는 장르는 사적지 답사를 제외하고는,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같은 장르인데. 음,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은, 내가 원하는 장르의 스페인은 아니었다. 허허허.



하지만! 이 책에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같은 장르니까, 왠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스페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스페인 먹거리에 정말 진심인 뭐 그런 내용이랄까?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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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식사 패턴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스페인 친구들에게 우리나라는 보통 아침 식사를 7시쯤, 점심을 12시, 저녁을 6시나 7시쯤 먹는다고 하니, “너희는 영국 애들이랑 비슷하게 밥을 먹네?”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p 032


스페인 문화 중의 하나인 시에스타는 점심을 먹고 해가 저물때까지 쉬거나 낮잠을 자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진 스페인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골로 가면 여전히 시에스타가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p 187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1일 3끼를 먹는게 기본이다. 그런데 스페인은 좀 달랐다. 스페인은 무려 1일 5식을 하는 나라! 


잠에서 일어난 뒤 오전 7시쯤 아침을 먹고, 출근하고 나서 10시 반쯤 아점을 먹으며, 2시에 (성대한) 점심을 먹고, 오후 6시 쯤 점저를 먹고, 밤 9시에 본격적으로 저녁밥을 먹는 총 1일 5식을 하는게 이들 식사 문화라고 한다. 이거 참. 놀랍고 부럽고. 아 정확히는 놀랍고 20%, 부럽고 80%. 아니 무슨 위대한 장을 가진 나라인가? 아님 소소하게 먹는다는 아점과 점저가, 내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더 소소한 양인건가? 아니 뭐 그냥 부럽다 ㅜㅜ


근데.. 1일 5식을 하면 살이 안찌나?? 아님 이들은 움직임이 많나? 사무직은 다 똑같은 사무직일건데? 아님 살쪄도 한국처럼 막 과하게 신경쓰거나 그런 나라가 아닌건가. 1일 5식하는 것도 부럽고, 그게 당연한 문화라는 것도 부럽고, 걍 다 부럽다. 세상엔 맛있는게 넘처나는데, 나도 1일 5식이 당연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허 ㅜㅜㅜㅜㅜㅜ


근데 심지어 저렇게 먹는데, ‘시에스타’라는 낮잠 타임까지 있다고? 물론 도시에선 사라져가는 문화라지만, 와....... 스페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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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사 예절!


1. 양손은 반드시 보이게 테이블 위에 올려둬야 한다. 절대 아래로 내리면 안된다. 이유는 테이블 아래에 칼을 쥐고 있을까봐. 스페인에서 식사를 할 땐 손을 테이블 위의 식기 근처로 두는 것이 좋다.


2. 빵은 보통 접시 위가 아닌 테이블보에 올린다. 한국인에겐 어색하 룻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선 빵을 식기 옆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프랑스에서도 바게트를 바구니에 넣어서 내기도 하지만, 그냥 식탁보 위에 올려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3. 2와 이어진짜. 빵을 수프나 소스에 찍어 먹으면 스페인 사람들의 세상은 멸망한다. 한국사람으로 치자면 김칫국물에 마른 멸치를 말아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에 적신 빵을 네게 먹여버리겠다’라는 것은 스페인에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다.


4. 스페인 대부분 지역에서는 빵에 버터를 발라먹지 않는다.그냥 먹거나, 아니면 올리브 오일에 적셔 먹는다. 딱딱한 빵에 생마늘을 막 비비고 토마토를 막 비벼서 먹는 건 괜찮은데 버터는 이상하단다.


5. 스페인에서도 다른 서양 국가들의 식문화처럼 기본적으로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를 든다. 대론 오른손에 포크를 쥐고 왼손으로 빵을 쥔 채 빵을 나이프처럼 쓰기도 한다. 물론 스페인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오직 스페인에서만 통하는 식사매너임을 기억하자.


6. 술로 건배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봐야한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지 않으면 7년 동안 재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7. 식사 중에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고 눈치 주면 안된다. 스페인에서 밥을 먹으려면 시끄러워야 한다. 싸우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건 절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의 절정에 이른 순간이다.


8. 7과 이어진다. 옆 테이블이 시끄러운 것을 참으려면 우리 테이블도 끝없이 떠드는 수 밖에 없다. 가능한 말을 길게 하고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 스페인의 식사는 누가 더 시끄럽게 먹는지 겨루는 자리다.


9. 정말 중요한 매너다. 식사를 하며 그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좋으나 스페인 내전, 프랑코, 바스크와 까딸루냐의 독립 관련 주제는 피해야 한다. 스페인 가정 대다수에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시절로 인한 상처가 있다. p 076~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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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소고기는 태어난지 2~3년 되는 소를 도축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 소고기는 이런 내 상식을 아주 싸그리 무너뜨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우를 28개월에서 33개월을 기른 후 도축한다. 미국에서는 보통 24개월까지만 기른다. 돼지는 6개월 정도를 기른다. 그런데 소의 수명은 대략 20년이고, 돼지는 10년이다. 우리가 이들을 더 오래 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경제성’이다. p 158



엘 카프리초에서는 최대 19년 된, 몸무게는 더 이상 늘지 않지만, 자신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삶의 최고치에 달한 소를 쓰기도 한다. 오래, 그리고 천천히 기른 맛의 성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p 159


소의 수명이 20년이라는데, 그 수명까지 꽉 채워 키운 소를 도축해서 먹는단다. 이렇게 오래 키우면, 그만큼 경제성이 떨어질텐데, 이게 가능한일인가?아니 근데, 경제성이 없으면 이렇게 소를 키울리 없고, 소고기도 팔리가 없을테니, 와. 진짜 놀라웠다. 


쎄시나는 스페인 북부 지역에서 먹는 소고기 숙성 햄이다. 소고기로 하몬을 만든 셈이다. 그러면 그렇지.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 염장 숙성을 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소고기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좋은 품질의 하몬을 만들려면 데에사라 불리는 관목림 지역에서 방복해 기른 이베리코 돼지가 필요하다. 이 지역에는 데에사가 없는 반면, 초워넹서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소고기를 염장 숙성한 쎄씨나를 즐겨먹는다. 추측건데 한국사람들은 하몬보다 쎄씨나를 훨씬 더 맛있게 먹을 것이다. p 169



두터운 지방을 포크로 쿡 찍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호세의 말처럼 식감이 느껴졌고 육향이 흘러넘쳤다. 평소 같으면 먹지 않고 접시 한쪽에 쌓아둘 지방에서 이런 식감과 향을 느낄 수 있다니! 천천히 오래 기른 맛의 정체를 알게된 순간이었다. p 173


처음엔 경제성이 없었을, 소를 오래오래 키우는게 가능했던 건 역시나 ‘요리’였다. 오래키운 소고기를 내놓라하는 음식으로 만들어냈고, 그 소고기를 맛보기 위해 스페인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비싼 값을 지불한다. 그게 선순환되어, 소도 제 수명을 다 채워서 살 수 있게 되었고, 스페인 사람들은 더 맛있는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캬. 멋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스페인 먹방의 메인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베리코 돼지고기! 


한창 저탄고지 할 때 미친듯이 먹었던 육즙 좔좔인 이베리코 돼지고기! 그리고 육즙 좔좔에 맛도 좋은 만큼...쵸끔 비싼(T.T) 이베리코 돼지고기! 정말 이베리코 돼지고기는 극찬 오브 극찬해도 아깝지 않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돼지고기다.



요 이베리코 돼지는, 스페인의 재래돼지다.


데에사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다.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스페인의 재래돼지 이베리코를 방목하여 키우는 곳도 데에사다. 이베리코 돼지 중에서도 데에사에서 뛰어놀며 털가시나무와 코르크나무가 떨어뜨리는 도토리를 주워 먹고 자란 녀석들만이 최고 등급인 베요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고기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육향의 정체가 데에사가 만들어낸 도토리다. p 205


이베리코 돼지는 ‘데에사’라고 불리는 너른 자연에 방목해서 자라는 재래돼지다. 그곳에서 도토리를 먹으며 자란다. 물론 사료를 먹이며 키우는 이베리코 돼지도 있긴하다. 하지만 사료를 먹이는 양이 많은 만큼, 이베리코 돼지의 가치는 조금씩 떨어진다. 얼마나 방목하여 키우는지, 혹은 사료를 먹이며 키우는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제일 높은 등급이 베요타, 그 다음이 세보 데 캄보, 마지막이 세보.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는 삶의 대부분을 데에사에서 방목되어 도토리를 먹고 자란 애들이고, 세보 등급은 삶의 대부분을 사료를 먹고 자란 애들. 이 등급들의 맛은 천차만별이며, 당연히 그 가치도 다르다. 베요타는 당연히 비싸고, 비싼만큼 맛있다. 



우리나라도 이베리코처럼 재래돼지가 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재래돼지라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제주도 흑돼지. 하지만 제주 흑돼지와 이베리코 돼지를 비교하면, 음 뭐랄까. 우리 재래돼지는 그렇게 유명하지도, 그렇게 각광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역시나 ‘경제성’과 ‘효율성’. 새끼를 많이 낳지도 않고, 빨리 자라지도 않는 재래돼지는 경제성도 떨어지고 효율성도 떨어지니 당연히 아웃될 수 밖에 없었다. 새끼를 많이 낳고, 빨리 자라는 외래종을 들여와 개량에 개량을 거쳐,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가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재래돼지의 입지는 줄어들대로 줄어들었다.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기에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비싼 가격에 판매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데에사를 없애거나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기 대문이다. 이베리코 돼지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p 207


스페인도 과거엔 우리처럼 빨리 자라고, 많이 낳는 개량형 돼지가 주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재래돼지의 소멸(?)에 위험을 느낀 쉐프와 농부들이 하나, 둘 재래돼지를 복원 및 키우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입지까지 올라갔다. 오랜기간 방목하며 키우는 만큼 자본이 많이 들어갈텐데도, 농부들은 그걸 묵묵히 감수했다. 쉐프들은 그런 이베리코 돼지로 세계적인 요리를 만들어냈으니, 그 유명한 하몽이다. 



과거 일본 여행때 하몽을 먹어봤는데, 와..........! 바다 건너 온 것도 이리 맛있는데, 본 고장에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ㅜㅜ



자, 그러면 스페인 하몬이 맛있는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몬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염장 건조해 숙성한 음식을 말한다. 포로 떠서 건조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건조 숙성시킨 다음에 칼로 얇게 저며 먹으니 돼지 뒷다리 육회라고도 할 수 있다.(생략) 어떤 돼지로든 하몬을 만들 수 있지만, 하몬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돼지 품종이다. 스페인 재래돼지 이베리코로 만든 하몬이 최고로 여겨진다. p 238


스페인의 재래돼지를 지키려는 농부들과 쉐프들의 협동은 하몬을 세계최고의 요리로 올려 놓았다. 하몽이 세계적인 요리가 된만큼, 이베리코 돼지는 농부들에게도, 쉐프들에게도 어마무시한 수입원이 되었다. 



많은 방송에서 우리돼지 한돈 광고를 그렇게 하면서, 실상 그 한돈은 우리 재래돼지가 아닌 많이 낳고 빨리 자라는 개량형 돼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재래돼지를 이베리코 돼지처럼 상품화시키지 못하는 걸까. 씁쓸할 따름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베리코 돼지고기로 만든 하몽처럼, 우리나라 재래돼지로 만든 세계적인 돼지고기 요리를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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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만색 역사공작단 - '역알못'부터 '역덕'까지, 만인을 위한 고퀄리티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미디어팀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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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역사교양서적 또는 전문서적을 고를 땐, 생각없이 아무 출판사의 책을 보진 않는다. 어떤 출판사는 정말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을 알기 쉽게 알려주는 곳도 있는 반면, 또 어떤 출판사는 역사를 왜곡한 글을 서스름없이 출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관련 책을 고를 때는, 다른 장르의 책들보다도 더 엄격한 눈(!!)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몇몇 출판사의 역사책은 진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바로 사들고 온다. 서해출판에서 출간된 책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입하는 책 중 하나다. 믿고보는 출판사중 한 곳이랄까?




그래서 이번에 읽은 「만인만색역사공작단」도 서해출판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내용도 확인안하고 바로 구매했더랬다. 책을 받고 나서 벽돌만한 두께에 압도되었다는 건 나중 이야기.



정말 엄청난 두께에 압도되어서 바로 읽지는 못하다가, 이제사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는데, 헐!!!! 이건 더 두꺼웠어야 했던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보니, 이 책을 집필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고, 이 책이 실은 팟캐스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에 두번 놀랐다. 팟캐스트나 유튜브랑은 별로 친하지 않은 나에게는 좀 생소한 뭐... 그런 너낌적인 너낌이랄까? 거기다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 사실이 참 많았다는 사실에 세번 놀랐고, 지금까지 난 무엇을 공부했는가 하는 자괴감까지..흐엉뮤.뮤..ㅠ



각설하고! 이 책의 내용은 정말 방대하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제대로 모르는, 학교에서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내용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특히나 각각의 내용은 모두 해당 분야에 대한 전공자가 썼다는 것. 그렇게 많은 양의 내용을 담다보니 책이 벽돌만한 두께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아니 근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는 것이, 책이 더 두꺼웠어도 되지 않았을까싶고. 2권도 나오면 어떨까 싶고. 이정도로 전문적인 내용들이면, 팟캐스트도 들을만한 매체인건가 싶고. 뭐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내 맘에 쏙 들었다는 이야기!



정말 책의 모든 내용을 다 옮겨적고 싶은게 내 마음이지만,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독자의 1인으로써, 절대 그러면 안되니..ㅋㅋㅋㅋㅋ


내 주요 관심분야인 고대부분에 대한 내용만 옮겨와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 근데, 진짜 이렇게 역사를 보는 관점을 뒤집어주고, 기존에 통용되던 사실이 실제는 허구라는 점을 파고드는 이런 책은 정말 많이 읽혀야 하는데...




교과서와 상식 너머 이야기, 가야


분명 존재했던 고대국가이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존재감이 낮은 나라 가야. 낮은 존재감으로 인해 학교에서조차도, 가야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은 정말 한정되어 있다. 수로왕이라던가,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옥, 철의 나라, 중앙집권국가로 변하지 못해 결국은 백제와 신라에 흡수된 연맹국가 가야. 더 나아가서 신라에 흡수된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이 김유신(구형왕의 증손)이라는 것. 진짜 딱 여기까지다.


역사교과서를 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에 비해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아주 적고, 그나마도 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려나 잊히고 있다. 이렇게 보면 가야란 나라가 겪는 설움은 잊힌 나라의 그것, 다시 말해 또 다른 망국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p 019



여기서 내가 아는 가야를 조금 더 보탠다면, 일본 규슈지역 곳곳에는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다거나, 가야의 공주가 일본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일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거나 뭐 그런 정도랄까? 하지만 가야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도, 관련된 내용이 별로 없어서 알래야 알 수 없는 나라이다. 


이런 와중에 여러 가야 연맹이 있었던 지역들이, 서로 나서서 관광유치 명목으로 ‘ㅇㅇ가야’를 들먹이기 시작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각 도시들이 말하는 ‘ㅇㅇ가야’를 세어보면, 그동안 배워왔던 6가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난 언제가 떠날 <가야역사여행>을 위해, 가야연맹이 있었던 지역들 및 고분군들을 아주 대략적으로 조사해봤는데, 와. 가야가 6개가 아니라니.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거지? 싶었다.


6가야 연맹설이 흘러간 옛이야기가 돼버린 이유는 그 학설이 가지는 여러 가지 모순 때문이었다. 애초에 <본조사략>의 내용은 고려의 태조가 5가야의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므로 설령 6가야 연맹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가야국이 맹주이던 시기 6가야 연맹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소가야는 지금의 경남 고성에 있었고 <본조사략>에만 등장하는 비화가야는 지금의 경남 창녕에 있으므로, 두 가야는 다른 나라였다. 그렇다면 이 기록들에 등장하는 가야난 6가야가 아니라 7가야가 된다. p 025



날 충격에 빠트린 6가야의 실체는, 결국 7가야였다. 아니 근데, 암만 7가야라고 하더라도, 뭐랄까? 내가 생각하던 남해안에 위치한 가야와는 사뭇 다른 위치에 있는 가야들까지 나오니 이거 참,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었다.


알다시피 신라 말에는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부활을 선언하는 등 반 신라적인 관념이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다. 자연스럽게 옛 가야 지역에서도 신라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것이고 이 지방의 유력자들은 스스로를 옛 가야의 후예라고 말하며 자신의 근거지를 ‘ㅇㅇ가야’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나 백제와는 별다른 연고를 찾을 수 없었던 지방의 유력자들이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가야’라는 역사 속의 이름을 소환했을지도 모르겠다. p 027


왜 생뚱맞은 지역까지 ‘ㅇㅇ가야’라는 이름을 쓰는가!에 대한 내 궁금증을 아주 시원하게 날려주는 대목이었다. 후고구려를 표방한 궁예나, 후백제를 표방한 견훤만 봐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는데. 사람의 편견이라는게 이렇게나 무섭다. 가야는 그저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낑겨있는 연맹국가라고만 생각했던 편견, 그 편견이 내 시야를 막고 있었던 거다.



궁예나 견훤이 그러했듯, 다른 지역에서도 ‘ㅇㅇ가야’의 후예라며 들고 일어났을 거라는 가능성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시대는 정말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영웅들이 들고 일어났는 시기였는데 말이다. 이럴때 보면 난 참, 남의 나라 전국시대 명장들은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왜 우리나라 전국시대 명장들에게는 소홀했는지. 하, 반성!



앞서 확인한 6가야 가운데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의 이름을 가야금 12곡의 나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가야 지역에는 6가야 말고도 수많은 나라가 백제도 아니면서 신라도 아닌 작은 나라로서 자국의 정체성을 지키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대표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김해와 고령의 가아였으므로, 그 나라들과 그들이 존재했던 지역이 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본다. p 035


가야금 12곡이 가야 연맹체를 나타낸다고 했던 내용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때 마침 이 책에서 그 내용이 나왔다. 그럼 결국 가야연맹은 6가야도 아니고, 7가야도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ㅇㅇ가야’ 소국들까지 포함하면 진짜 12가야가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백제와 신라는 처음부터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에서 시작했고, 신라도 진한의 여러 소국에서 시작했다. 가야연맹체 역시 변한의 여러 소국들이 모여서 시작된걸테고. 아, 그러고보니 변한은 12개의 소국가가 있었는데, 가야금 12곡과 변한의 12국가. 음..? 가야도 진짜 12개인걸까?


정말!!!! 왜 가야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나 없는 것인가..ㅜㅜ


<삼국사기>에 기록돼 전해지는 가야 관련 기록들은 가야를 멸망시키고 지배층을 받아들인 신라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사료에는 가야 여러 나라의 이름이 거의 전하지 않고 단지 가야라는 하나의 집단이 신라와 경쟁하다가 패배해 흡수된 것처럼 적혀있다. 그것도 가야사의 파편에 불과한 적은 분량이다. 가야 관련 기록은 오히려 <일본서기>에 더 풍부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문헌기록을 통해 가야사를 공부하려면 <일본서기>를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일본서기>에 가야사 관련 기록이 많은 까닭은 그 역사서의 편찬에 이른바 ‘백제3서’가 한반도 관련 주요 자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백제3서’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제출됐다고 상각되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말한다. p 040


결국 가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백제의 역사처럼 국내가 아닌,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참고해야한다는 사실이 참 슬플따름이다. <일본서기>에 대한 요약, 정리된 책은 몇번 읽어봤지만, 아무래도 완역본이 아니다보니. 완역본을 사야되나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심지어 내 관심사가 ‘한일관계사’라는 점에서, 더더욱 <일본서기> 완역본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 근데 또 생각해보면 완역본이 시중에 나와있어서 주문만 하면 되는데, 난 대체 뭘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다 읽을 자신이 없어서 구매를 망설이는 걸까. 대체 뭐지..허허.


가야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일 수도 있다. p 042


지금까지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낑겨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화합이 안되서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지 못했기때문에, 결국 힘쎈 국가에 흡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편견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가야는 중앙집권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못느껴서, 연맹국가로 남아있었을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신라가 삼국통일 후 한반도 북쪽의 국경을 대동강 이남으로 한 것도, 어디까지나 대동강 이북 땅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관점의 다각화, 발상의 전환. 말만 하지말고 실천을 좀 해야지. 일해라 뇌야!!!




역적인가 영웅인가, 시대의 문제아 연개소문


내가 학교에서 연개소문을 배울땐, 분명 대당 강경파로 배웠다. 심지어 KBS 사극에서 나왔던 연개소문도 대당 강경파였던걸로 기억한다. 거기다 자기 상관이었던 고구려 왕까지 시해하고, 권력을 붙잡은 사람. 나에게 연개소문은 딱 그랬다. 왕까지 죽여가며 쥔 권력을 국내에서도 휘둘렀지만, 어디까지나 선을 과하게 넘지 않았고, 대당 정책에 있어서는 언제나 강하게 나갔던 뭐 그런 인물로 기억한다. 심지어는 한반도 일제강점기 때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람이이고 했다.


연개소문을 대당 강경론자라고 간단히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개소문은 집권 이후 수차례 당에 외교적 유화책을 시도했다. 굳이 당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구상은 서쪽으로는 당과의 관계를 현상 유지하는 대신 남쪽 신라 전선에서 성과를 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신라가 이미 당과 긴밀하게 연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그 자체로 당이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명분이 됐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천인공노할 역적으로 규졍하며 전쟁을 시작한 이상, 연개소문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대당 강경론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시대의 상황이 연개소문에게 대당 강경론자로서의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p 063


그런데....!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파가 아니었다는, 뒷통수 제대로 후려치는 이야기T_T.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자기의 왕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최대한 당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는게 중요했을 것이다. 고려를 없애고 조선을 세웠던 이성계도, 반정을 일으켰던 인조도 전부 자기네들이 앞선 왕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명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명나라, 청나라에 각각 사신을 보내는데 주력했으니 말이다. 왕을 죽이고 이제 막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자기 권력을 안정화시켜야하고, 그러려면  굳이 당을 자극하면서까지 전쟁을 초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연개소문은 당태종에게 도교 수입을 요청하며, 도사를 보내달라고 하는 등의 대당 유화정책까지 펼치기도 했고. 와. 다시 한번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의 편견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싶다.



남생은 급히 고구려 옛 수도인 국내성으로 달아나 세를 규합했다. 그러니 이미 중앙 권력을 장악한 동생들에게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신변 안전을 고민하던 남생은 결국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망명하고 말았다. p 069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서로 분열하여, 고구려 멸망 급행열차를 탔다는 건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장남이었던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여, 몸소 고구려를 물리치는 선봉장으로 나서기도 했고. 아니 근데! 이 안에도 스토리가 있었다. 연개소문은 살아생전부터 후계자를 장남 연남생을 지목했로, 연남생은 차근차근 후계자 수업을 받았으며, 연개소문 사후에는 아비의 뒤를 이었다. 연남생의 동생들도, 당연히 자기 형이 아비의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잘 따랐던것 같다. 그럼 대체 왜 연남생 3형제가 갈라졌는가? 이유는 이간질을 하던 간신들이었다.



연남생 3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던 간신들이 있었고, 서로간의 믿음이 있었던 3형제지만, 의심이 한번 시작되니, 그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동생들이 형을 치게되는 상황, 연남생의 당나라 망명은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배경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상황이 있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것처럼, 백제도 나다연합군에게 멸망했는데, 백제의 멸망과정에는 신라의 이간질이 있었다. 정확히는 백제 내부를 혼란에 빠트릴 사람, 백제 내부에서 이간질을 할 사람, 신라는 그런 사람들을 백제로 보냈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해동증자라는 명칭에 호까지 의자(義慈)라고 붙었던 백제의 마지막왕. 그가 훗날 폭군의 대명사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신라 사람들 손에 의해서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유는 의자왕때문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오로지 승자 신라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 멸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신라의 이간책이 있었다. 



당시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2충(성충, 윤충)을 제거하기 위해 간자들을 여럿 보낸다. 뿐만 아니라 의자왕의 눈을 가릴 여자도 백제로 보낸다. 뭐, 여자에 눈이 먼 의자왕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든 저렇든 신라의 이간책에 백제가 넘어갔다. 대망의 백제 멸망 당일,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백제 장군 예식진이 의자왕을 나포하여, 성문을 열고 당나라로 투항한 것이다. 예식진이 신라쪽(혹은 당) 이간책에 넘어간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뭐. 고구려 멸망 전 연남생 형제의 난 배경이나, 백제 멸망 전 히스토리가 겹쳐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백두산정계비 대소동, 그리고 간도의 정체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중,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부분이 바로 간도였다. 나에겐 독도가 우리땅인 것 처럼, 간도도 당연히 우리땅이었는데 일본의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땅이라 생각했으니까.



뭐.. 생각해보면 예전에 대마도도 우리땅이라 생각했는데, 조선전기 관리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 땅에 대마도를 편입시키지 않은 게, 다름아닌 조선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렇게 뒤통수가 얼얼했었다. 그런데 믿고 있던 간도 땅마저, 아니 이건 우리땅이 아니란걸 떠나서, 일본이 독도가 지네 땅이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뒤통수가 아프다 못해 없어진 기분. 하..


중국이 ‘우리 땅’인 백두산을 ‘중국 땅’으로 빼앗아 가려 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다. 백두산 전체 면적의 4분의 3 정도 그리고 백두산 천지의 절반 정도는 원래부터 중국 영토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지리적으로 어느 한 나라에만 속한 산이 아니라, 중국과 북한 영토에 걸쳐있는 산이다. (생략) 지리산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걸쳐 있는 산이다. 지리산을 경상남도만의 산이라거나 전라남도 혹은 전라북도만의 산이라는 식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백두산 역시 마찬가지다. p 080



앞서 <산해경>의 불함산이 숙신씨의 땅에 있다고 한 기록, <신당서>의 태백산이 속말말갈이 사는 곳이라 한 기록을 살펴봤는데, 그 기록에 등장하는 숙신과 말갈이 바로 여진족의 전신이다. 백두산은 여진족이 대대로 살던 곳이었고, 그들에게는 신성한 장소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감안한다면 중국 측에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고 표기하는 것을 역사 왜곡이라 문제 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백두산과 장백산 모두 충분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지명이며,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p 085



나는 당연히 백두산은 우리 땅이고, 중국이 우리 땅을 빼앗아 가는거라 생각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뭐만 뜨면 죄다 지네나라꺼라고 우기니까, 백두산 같이 민족의 영산이라 생각하는 건 더더욱 뺴앗아 가는거라고.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 마음에 안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와, 내 뒤통수 누가좀....치료해줘요. 너무 아파 죽겠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백두산이라는 표현보다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애초에 장백산도 백두산의 또다른 이름이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그 이름을 혐오했나.



1711년(숙종37) 양국 국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청의 강희제는 관리를 파견해 해당 사건의 실상을 조사하도록 명하는 한편, 이 참에 양국 국경선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p 087



백두산정계비와 관련해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부분은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이 된다”라는 구절이다. 서쪽으로 압록강이 국경선이 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동쪽 토문강’의실체가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간도 영유권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데, 백두산정계비에서 언급하는 ‘토문’이 송화강 지류가 돼야만 그 남쪽 지역에 해당하는 간도 전역이 우리나라 영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종실록>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주장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에서는 시종일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며, 이 입장을 관철하는 것을 목표로 청과의 정계작업에 임했다. p 097



백두산정계비와 청과의 국경선 문제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다시 불거졌다.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봉금령을 내려 오랫동안 이 곳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880년 무렵 봉금령을 해제했는데, 이때 만주의 행정체제를 정비하던 청 정부는 여진족이 오랫동안 땅을 비워놓고 있는 사이에 수많은 조선 사람이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 조선인이 정착해 살고 있던 곳이 바로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p 098



두 나라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이라는 것까지는 합의가 됐지만, 국경의 기준이 되는 두만강 상류의 지류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란이 발생했다. (조선) 이중하는 두만강 상류의 주요한 세 지류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홍토수가 기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청 측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홍단수를 기준으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홍단수 북쪽 지역에는 이미 100여 년간 살고 있던 조선인의 거주지가 존재했다. 결국 청 측은 홍토수와 홍단수 사이 중간에 위치한 석을수로 안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중하의 입장은 강경했다. p 100


조선 숙종 시절, 그 유명한 백두산정계비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국경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을 보면 더 충격이다. 지금 우리가 줄창 주장하는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라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 국경 기준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숙종실록>등 당대 조선의 여러 자료를 보더라도 명확히 사실이 아니다. 1887년 제2차 조,중 감계회담 단계에서 조선측도 이미 포기한 주장이었다. p 104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 우리의 잣대로, 간도 땅을 우리 땅이라 하기 위해 ‘땅내놔라!’하고 도적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진짜, 이러면 정말 독도를 탐내는 일본과 다른게 하나도 없잖아? 



이 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바뀌며, 1903년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는 등 간도 지역에 대한 실력 행사와 행정통제를 시도했다. (중략) 초기에는 일본도 대한제국의 기존 주장을 수용해 청나라와 대립했다. 하지만 1909년 결국 일본은 청과 간도협약을 맺으며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간도 영유권에 대한 청 측 추장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p 101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지멋대로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땅을 청에게 준것이므로, 일제강점기에 맺은 이 협약은 그 자체가 무효이며, 따라서 간도땅은 우리땅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간도에 간도관리사를 파견한 것부터가, 조선정부가 남의 땅을 내 땅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밖에 안되니까. 아 또 속에서 천불이.....



일본을 상대로 할때마다 언제나 우리나라가 피해국가였다보니, 무슨 일만 있으면 다 우리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게 문제였나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상대로 가해국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꽤 있는데 말이다. 필리핀의 코피노 문제라던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던가. 이쯤에서 떠오르는 한 단어, 내로남불. 휴.........



백두산정계비는 천지에서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산 중턱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천지는 무조건 중국 영토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중국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천지를 절반이나 양보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천지를 절반이나 양보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 측이 기존에 확보하고 있던 영토를 크게 내어준 조약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 내부에서도 협상 대표였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p 103



게다가 1960년대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진 국경 조약은 양국의 특수한 동지적 관계를 바탕으로 북한에 유리한 형태로 체결되었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p 105


분명 난 중국을 싫어한다. 오히려 ‘착한 짱*는 죽은 짱*뿐’ 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 중 하나다. 언제나 주변국에 민폐만 끼치고, 그 주변국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려고 하는 나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 간도 땅도 우리나라 땅 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일본스러운 느낌이 되어버린 이 상황.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이 부분은 읽지나 말껄. 이제 더이상 간도는 우리(만의) 땅, 백두산도 우리(만의) 산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흉노의 왼팔을 잘라라! 첫 왕조의 마지막 순간


이 책을 읽을때마다 자꾸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하나씩 제거되는 느낌이 드는건 왤까T-T. 이번엔 고조선이다.


요컨데 ‘고조선’은 본래 <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섰던 말로,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 이해하는 <제왕운기>의 관점이 현재 우리의 고조선 인식의 출발점이 됐다. 현재는 세 조선을 모두 합쳐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삼국유사>의 관점에 따라 고조선과 위만조선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후자의 입장이 우세한 경향을 보인다. p 185


당시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고조선’의 명칭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짜를 붙여서 고조선이라 부른다는 거였다. 당시에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에 대해선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뭐 언젠가 배웠으니 이 세 조선에 대한 내용도 내 머릿속에 있는 거겠지? 뭐 여튼. 태조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고조선’이라면, 그 용어의 사용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야 하는게 맞는데, 실상은 고려 때 쓴 <삼국유사>에서부터 사용한 용어였다. 고로 태조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말 자체가 허구!!!!!! 아 진짜 나한테 왜이러는거야 ㅠㅠ



뭐 기자조선, 기자동래설이야 현재는 허용되지 않는 내용, 한나라 이후 후대 사람들에게 덧붙여진 허구라는 것은 알고 있던 내용이라 다행이랄까.


고조선은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과 같은 이웃 국가의 옛 기록을 참고할 수 밖에 업사. 물론 <사기:조선열전>은 그 구체성과 당대성이라는 점에서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사료를 독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기:조선열전>이 위만조선 이전의 역사보다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채야한다. p 187



한나라의 위만조선 침략 이유였던 ‘외신 의무 불이행’이란 명분은 껍데기였고, 알맹이는 사실 한나라 건국 초기부터 너무 견디기 버거웠던 흉노와, 그 흉노의 동쪽에서 서역에 준하는 영향력을 발휘한 위만조선의 관계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저 양자가 밀접한 것만으로도 한나라는 대단히 신경쓰였을 텐데 앞서 살펴봤듯, 위만조선은 진번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복속시켜 규모도 커지고, 한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인구까지 늘려 나가며 무서운 속도로 국세를 키우고 있으니, 앞서 진무라는 사람이 언급했듯, 얼른 먼저 제압해서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할 존재로 인식했을 것이다.  p 201


고조선(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했다는, 아주 간단한 부분만 알고 있었을 뿐, <사기>에 어떻게 기록되어있는지는 1도 관심이 없었던 나를 반성한다. <사기>는 분명 당대의 기록물이자, 당시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역사서지만,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입장에서, 한나라의 시선에서 작성된 기록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한다. 고로 <사기>에 쓰여있는 고조선(위만조선)의 침략행위는, 어디까지나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합리화시키는 내용인 것이다. 예컨데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의자왕을 폭군으로 비하했던 것 처럼.


차츰 조선의 내부에서 투항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결국 조선의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버렸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 살해된 다음인데도 수도는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의 신하였던 성기가 다시 맹렬히 한나라를 공격하는 등 마지막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이에 한나라는 마지막 방책으로, 투항한 조선인들을 회유해 장군 성기를 죽이도록 시켰다. 마지막 전사 성기가 죽음으로써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끝나게 됐고, 바로 이것이 첫 왕조의 마지막 순간이 됐다. p 203



한반도 역사상 첫 왕조, 고조선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보니 새삼 씁쓸하다. 그저 ‘한나라에 멸망했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고나니, 결국 한나라의 손아귀에 놀아난 꼴이아닌가. 내부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것도 마음에 안들지만, 외부의 이간책에 휘말려 자국을 흔드는 꼬라지도 참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근데 참 슬프게도, 외부의 이간책에 휘말려 망한 나라가 많다는 것.


아니 근데, 난 한무제 드라마도 봤는데... 왜 동시대였던 고조선에 대해선 1도 생각이 없었을까. 하 이래서 무지가 죄인가. 아니, 무지가 죄일리가 없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알수 없는게 당연한거니까. 죄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죄라고나 할까. 후, 반성..




정말 모처럼만에 아주 제대로된 역사교양서를 읽어서, 이런 책은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그나저나, 요즘 학교에선 국사시간에 어떤 내용을 가르칠까? 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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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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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쓴 저자는 유퀴즈에 출연했었던, 종양내과 의사다. 그를 찾는 환자들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삶이 얼마 남지 않는 말기암 환자들이다. 이 의사가 말기암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완치가 아닌, 환자들의 기대여명을 조금이나마 늘려주는 것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늘상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만나고, 환자들의 기대여명을 늘려주기 위한 치료를 하고, 늘상 자신의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간에 만났던 환자들과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에세이, 이 책은 분명 에세이다. 하지만 흔히들 힐링 에세이라고 말하는 ‘다 잘될거야!’, ‘걱정마!’ 라는 어줍잖은 위로를 담은 그런 에세이가 아니다. 오히려 읽다보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거나, 갑작스레 슬픔이 몰려와 눈물이 나오는 내용도 있었다(회사에서 읽다가 눈물이 훅 올라와서 큰일날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제일 깊이 생각했던 점은 ‘죽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드는 것일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p 063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날을 받아두지 않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친다한들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를 감사히 여기며, 무엇을 하든 허투루 보내지 않아야 하는데, 난 내 삶을 진심을 다해 살고 있는 걸까? 싶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보내고,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은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 난 내 삶을 후회없이 살고 있는게 맞는 걸까? 이 챕터를 읽고서,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삶이란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나?



택시 모는 제 동료 중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도 있어요. 아침만 해도 반갑다고 인사했는데 저녁때 장례식장에서 만나니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렇게 갑자기 가지 않고 죽을 준비까지 끝내 놨으니 저는 얼마나 다행이냐 싶더라고요. 행복한거죠. 안그래요 선생님? p 094


폐암 4기 환자의 보호자였다가, 나중에는 흉선암 환자가 되어 항암치료를 받았던 환자. 기적인지, 원래 그럴 운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암치료 후 완치되어 일상을 살며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환자. 이 사람의 남긴 “죽을 준비까지 끝내놨으니” 라는 말을 자꾸 되뇌게 되었다. 죽을 준비란 대체 무엇일까. 1차원적으로 본다면 자산, 보험 등 나를 둘러싼 행정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 있을 테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분이 말한 죽을 준비는, 내가 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말하는게 아닐까 싶어졌다. 아니, 왠지 꼭 그런 느낌이었다. 


여기서 다시 떠올랐다. 외국에서는 죽기 전 6개월의 시간은 치료를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그 말이.



그 어머니는 그날 미처 신발을 태우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며칠 뒤에 결국 새 신발을 새로 샀다고 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비싸서 사주지 못했던 브랜드 신발이었다. 그녀는 낡은 슬리퍼를 끌어안은 채 새 신을 따로 태우며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죽은 아이의 신을 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기도 한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가슴에 아이를 묻었을 것이다. p 124


회사에서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차올랐던 부분이다. 가슴아픈 죽음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그 중에서도 채 꽃피우지 못한 어린 아이의 죽음은 정말 담담하게 지나치기엔 너무 어렵다. 이렇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이들도 그렇고, 정말 갑작스럽게 사건 사고로 죽어간 아이들도 그렇다. 2014년이 있었던 비극적인 세월호 사건.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정말 많은 인원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그 때도 그랬다. 유독 아이들의 죽음에 더 아파했었다. 특히 어른들이 곧 구해줄거라는, 가만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며 기다리던 그 모습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나와 만난 젊은 환자들이 암을 극복한 뒤에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친구도 있고, 눈을 돌려 해외에 있는 기업에 취직한 친구도 있다. 운 좋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경우도 더러 있고 일찌감치 자영업을 모색하는 친구들도 있다. 대개는 부모의 지원이 가능한 경우였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경우 여전히 백수이거나 혹은 취준생으로 지내고 있다. 그들 가까이에서 지켜본 현실은 훨씬 비정했다. p 128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완치 판정을 받은 이들에겐 언제나 꽃길만 펼쳐져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더 슬픈 사실은 꽃길조차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완치 판정을 받는다면, 그들에겐 진짜 꽃길이 펼쳐진다. 끝날뻔한 생을 다시 얻었으니, 그야말로 제 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니, 공기 좋은 곳에 살며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본다. 오로지 내 건강 하나 챙겨가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저런식의 행복한 제 2의 인생은 남일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다시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한다. 분명히 죽음에서 살아돌아왔는데, 다시 살길을 걱정해야한다는 아이러니. 얼마나 슬픈일인지.



하지만 이렇게 슬픈 현실도 현실이다. 당장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 앞에, 스펙이 짱짱한데 암 완치경험이 있는 취업준비생이 있다면?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 사람을 채용하라 말할 자신이 없다. 완치되었다고는 하지만 혹시나, 회사에서 근무중에 암이 다시 발병한다면? 심지어 그 사람이 회사의 고된 업무로 암이 발병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와. 정말 생각만해도 눈 앞이 핑 돈다. 비정한 현실이지만, 결국 현실은 현실이다. 더 슬픈건 이런 현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 씁쓸하다.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환자가 된 그 교수님이 아직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던, 여든 초반에 돌아가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참 멋진 사람으로 기억했을 텐데. 10년의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생각해보면 마음이 어지러웠다. 혹여 가족들도 그를 힘들게 봉양했던 노인으로 기억하게 되면 어쩌나. 내가 항암치료를 너무 열심히 해서 팔십 평생 쌓아온 그의 멋진 인생을 망쳐놓은 것이 아닌가. 돌아보면 그를 치료해온 그 기간 동안 몇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때 돌아가더라면 환자나 가족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p 254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 분명 누군가에겐 유효한 말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유효하지 않은 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에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돌아오자마자 다시 살 길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환자가 되어 10년간 부질없이 생을 연명한 교수님도 그럴 것이다.



과거에야 평균 수명이 60세에 불과해서, 만 60세 만 되어도 오래 살았있음에 감사하며 환갑잔치를 열며 기뻐했었다. 하지만 지금 평균수명은 80세를 훌쩍 넘어서, 오래 사는게 감사함이 아니게되고, 기쁨이 아니게 되었다. 본디 암이라는 것은 오래 살면 살 수록, 어쩔수 없이, 누군가는 걸릴 수 밖에 없는 병이다. 장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질병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건강한 식습관에,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한들, 내 몸속에 있는 세포들 중 어딘가에선 분열 중에 암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뿐만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식주 해결이 기본이다. 이 의식주 해결을 위해선 경제적 자본이 필요하다. 만약 나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나를 돌봐야 하는 누군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게 된다. 결국 경제적 자본이 없다면, 오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채 부질없이 생을 연명하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지우며 ‘기대여명’을 최대한 늘리는 치료가 정말 올바른 답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삶을 산다는건, 다들 당연하게 ‘살아간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죽어가는’ 것이다. 모두 죽음을 앞에 두고, 하루 하루를 지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삶을 ‘죽어간다’라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라고 말한다.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기에,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인해, 정작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 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삶은 언제나 찬란하고, 죽음은 언제나 슬픈 일일까? 누구든 한번쯤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봐야할 시간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이 해답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니,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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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피로 2021-07-08 06: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7-0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피로 2021-07-08 06: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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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미술관련책 이 2권 있다. 그중 한 권이 #방구석미술관 1권이다. 아마 당시에는 시리즈로 나올 예정이 없어서 그랬던건지, 1권이라는 표현이 없었다. 그런데! 방구석미술관 2권이 나왔을 줄이야. 하. 시리즈는 다 모아야 적성이 풀리는 나인지라, 방구석 미술관 2권도 냉큼 집에 들였다.




일단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모르고 2권을 들고왔는데, 막상 펴보니, 오옷? 개인적으로 1권보다 더 마음에 드는 주제였다. 바로 ‘한국의 현대미술’!!


물론 방구석미술관 1권의 주제였던 서양미술도 꽤 좋았지만, 그래도 난 한국인인지라 ㅋㅋㅋㅋ.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자주 접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근대화가과 관련된 장소도 몇번 가보기도 했다보니. 이미 한국 근대화가에 대한 관심도는 맥스! 



 이 책에 실려있는 한국 근대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옥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 총 10 명이다. 이 열명 중에서도 내가 제일 관심이 있던 화가는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세 명. 물론 다른 화가들도 관심이 가는 건 같았지만, 그 중에서도 왜 이 세명을 골랐는가 하면, 아무래도 극명하게 대조대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중섭은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졌고, 가족과 만나기를 희망하다가, 그 희망이 꺾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주변에는 사기꾼들만 득실거렸고, 결국 그는 삶에 지쳐 사랑하는 가족과는 만나지도 못한 채 본인의 생의 불꽃을 꺼버렸다.



나혜석은 분명 당시로 따지면 깨인 생각을 가진 신 여성이었다. 가부장제를 반대하고, 남편에게 평생 자기만을 바라보고, 전처의 자녀와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해달라고 요청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두번이나. 이건 무슨 말로도 미화를 하면 안되는 것이며, 그녀는 그녀 스스로 가족들을 배신한 것과 다름없다. 배신의 결말, 나혜석은 집에서 쫓겨났다. 자식도 볼 수 없었다. 응당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근근히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행려병자로 죽었다. 



김환기는 위 두 사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사랑하는 김향안과 결혼 후,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했다. 여느 화가들이 그렇듯, 재정상태가 궁핍했지만 그들은 똘똘뭉쳐 이겨냈다. 이 부분이 재정환경이 힘들어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과는 다른 행보이다. 뿐만 아니다. 두 사람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을 때, 둘이 같이 유학을 간게 아니라, 아내인 김향안이 먼저 떠났다. 그녀는 먼저 프랑스에 도착해, 오로지 남편 김환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찾아다녔다. 유학길에서 외도를 한 나혜석과 다른 점이다. 김환기와 김향안은 서로를 아끼며 사랑했고, 그 힘으로 힘든 환경을 헤쳐나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


우리에게는 ‘소’ 그림, ‘은박지’ 그림으로 잘 알려진 이중섭. 그의 일생을 이 책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일상에서 조선어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한글로 그림을 그리던 열여덟의 중섭은 “원통하다. 이렇게 안타까운 것을 어떻게 하느냐”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는 중섭의 작품 속 서명에서 ‘ㅈㅜㅇㅅㅓㅂ’을(1945년 이전까지는 ‘ㄷㅜㅇㅅㅓㅂ’)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명을 한글 외에 다른 언어로 쓰지 않았습니다. p 018



그가 그림 속 서명을 한글로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일제강점기,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한글을 놓지 않았고, 한국적인 마음을 놓지 않았다. 처음보는 이중섭의 모습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상황.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밝고 희망찬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의 편지에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화가로 성공해 꼭 재회하겠다는 의지, 한국의 화가로서 한민족의 정수를 자신의 예술에 담아 세계에 전하겠다는 포부가 절절히 담겨있습니다. p 031


 


통영에서 중섭은 소를 포함해 많은 걸작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합니다. 이미 심신이 기진맥진해져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중섭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나 품에 안아야 했죠. p 036



1951년 이중섭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에, 제주도에서 한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이중섭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이 때가 제일 행복한 때였다. 1954년, 형편이 더더욱 안좋아져,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뒤, 가족과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정말 먹고 살 밥도 구하기 힘들 정도였고, 실제로 가족 부양조차 힘들어질 정도였지만, 그 가족 덕분에 희망을 품고 살았다.


그림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거라던 실날같은 그의 희망이 끊어졌다. 희망이 끊어지자 그의 그림도 변했다. 희망을 품고있었던 이중섭이 그린 소는 굳센 기강을 드러냈다면, 희망이 사라진 이중섭이 1956년에 그린 소는 기운이 다하여 겨우 서있는 모습이다.


전쟁후 사회적 시스템이 안정되기 이전에 전시를 강행한 화가에게 돌아온 건 그 빈틈을 노린 비열한 자들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내려가 남은 작품들로 전시를 열어 보았지만, 판매 성과는 보잘것없었죠. 이렇게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p 040


내가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어!


놀고 공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단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 세상을 위하여


또 자신을 위하여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처럼 모시고 다니고


이 꼴이 뭐야?


이중섭 평전 中 


이런 이중섭의 모습을 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화가란 그림을 그려 밥벌이를 해야한다지만, 그조차도 힘들다면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먹고 살 궁리를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의 바람대로 그림으로 밥벌이가 가능했다면 좋겠다마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니까. 한 집안의 가장이던, 가족을 사랑했고, 가족과 함께하길 바랐던 가장 이중섭이, 먹고 살수 있을 만큼이 될때까지 화가 이중섭을 버리고 노가다라도 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잠깐이라도 붓을 내려놓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했다면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대신 우리가 아는 근대화가 이중섭은 사라졌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중섭은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하지만 그 속에서 가족과의 행복을 그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을까?하는..



나혜석


내가 알고 있는 나혜석은 조선 말, 가부장적인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집안이 부유해 신교육을 받았던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위치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가부장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던 나혜석은,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여성이라 생각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녀가 생전에 머물렀던 장소에서 그렇게 나혜석의 이름을 알게되었고, 막연하게 비련한 여성이라 생각했었다.


이제 혜석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99%의 사람들이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살아가고 있던 그때, 혜석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신여성의 삶을 스스로 살며, 조선 여성들에게 신여성의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여성과 남성의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조선사회에 소개하는 삶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죠. p 059



무엇보다 나혜석은 글도 썼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글을 말이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나혜석 <경희>《여자계》 中



지금이야 일처일부가 당연한 일이고, 첩을 두는 놈은 썩을놈이고, 불륜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행태이지만, 조선시대에서는 그게 너무 당연했던 일인지라, 나혜석처럼 이렇게 말하는 여성이 나올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해석은 다른 글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부부사이 평등한 관계를 주장하고, 자녀들도 성별게 관계없이 평등하게 키우자고 합니다. ‘조선 여자도 사람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해석의 주장. 그녀는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을 기고하며 자신의 여권론을 펜을 통해 조선사회에 침투시키기 시작합니다. p 062



당대 기준으로는 정말 별났던 신여성 나혜석을, 끊임없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박우영. 


나혜석이 결혼 조건으로 ‘일생을 나만 사랑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박우영의 전처의 딸과, 시어머니와는 별거하게 해달라’ 였다. 나혜석을 열렬히 사랑했던 박우영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이 조건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은 박우영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낳았음에도 조선 최초(?) 워킹맘의 삶을 이어간다. 심지어 워킹맘의 삶을 요즘말하는 4컷툰에 그려 기고도 한다. 심지어는 본인이 낳은 삼남매를 ‘별거를 요청했던’ 시댁에 맡기고 해외 유학길에 떠났다. 물론 이는 남편 박우영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그런 우영을 배신했다. 


남편 박우영과 같이 유학길에 올랐던 나혜석, 남편이 업무차 베를린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녀는 홀로 파리에 남아 미술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녀는 박우영의 친구인 최린과 외도를 해버린다. (최린: 민족대표33인이었으나, 훗날 변절하여 매국노가 된다)



그렇게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첩을 여럿둔 남성들을 비판하고, 남편에게 자기만을 사랑하라는 조건을 달았던 나혜석이, 남편의 친구와 외도를 했다. 외도는 미화시키면 안되고, 미화시켜서도 안된다. 그녀는 본인 스스로 외도를 함으로써, 그녀가 말하던 모든 것들은 싸그리 물거품이 된 거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 박우영은 이 사실을 참아주었다. 사람은 한번은 실수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호화롭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자마자 촌구석에서 갑자기 맞이한 궁핍. 여기서 혜석은 다시 최린을 떠올립니다. 당시 최린은 천도교의 수장으로 국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죠. 혜석은 최린에게 경제적 도움을 구할 요량으로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최린의 측근을 통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내용으로 왜곡되어 우영의 귀에 들어가고, 결국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p 081



나혜석은 또다시 최린을 만난다. 정확히는 최린에게 다시 구애의 편지를 보낸다. 이로써 박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했고, 나혜석이 본인을 포함하여 자식들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혜석은 변명할 여지도 없고, 나혜석을 동정할 여지도 없다. 그녀 스스로 자초한 파국이니까.


이후 그녀는 혼자였다.


나혜석. 그녀는 모든 것이 헐어진 자신의 마음속에 최후의 빛과 색을 채우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죠. 세상과 단절에서 오는 고립감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밤을 지새우는 시간이 누적되며 그녀는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생략) 우영은 경찰을 통해 혜석이 대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혜석은 개성에서 여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는 딸 나열이 머무는 집에도 찾아갔지만, 이미 우영의 당부를 들은 집 주인의 만류로 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p 093



1948년 차디찬 칼바람이 불던 12월 어느 날,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자제원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추정 연령은 65~66세. 그러나 실제 나이는 53세 였습니다. 연고지와 이름을 묻는 의료진에게 여인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12월 10일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이었습니다. p 095



혼자가 된 나혜석의 삶은 쓸쓸함과 아픔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를 동정하기엔, 그녀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 본인 스스로 내뱉었던 말들을, 본인 스스로가 무너뜨렸고, 본인 스스로가 가족들을 배신했다. 그렇게 나혜석은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사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우리 4남매도 크게 다쳤다. 다 부상자요 불구자 신세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80대 노인이 된 아들 김진이 회고하며 한 말입니다. (생략) 아버지 김우영 역시 세상의 수군거림 속에 남은 생을 의욕없이 살았다고 기억합니다. 딸인 나열 역시 “나혜석 같은 사람은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무책임함을 동생 진에게 토로했습니다. p 096



그녀는 나열을 보자마자 두 손을 와락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네가 혜석이 딸이야?” 라고 묻습니다. 알고보니 그 여인은 과거 해석과 3.1운동의 초기 확산을 함께했던 박인덕이었습니다. (생략) 나열은 극구 사양했지만 ‘어머니 친구는 어머니나 다름없다’는 박인덕의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의 무게를 느끼며 휘청이게 되죠. 그 이후 인덕은 나열에게 미국으로 전액 장학금 유학을 제안합니다. p 097



남아있는 나혜석의 가족들도 그 삶이 불행하긴 마찬가지였다. 자기 부인이, 자기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살아낸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나혜석이 죽은 뒤, 나혜석의 자녀들은 자기들을 버린줄 알았던 엄마 나혜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흔적에 도움을 받게된다. 그렇게 나혜석은 죽어서나마 그토록 바라던 자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외로울지언정, 아무리 궁핍할지언정, 나혜석이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자기길만 갔다면, 어쩌면 나혜석은 이토록 비참힌 말로가 아닌, 지금보다도 훨씬 더 이름있는 화가가 되었을거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뒤엎는다.



김환기


앞서 이중섭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저 암울하고 암울했던 내 머릿속을 아주 개운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준 화가가 바로 김환기다. 진짜 와, 이 책 속에서 단비같은 존재였달까....흑흑흑


둘의 결혼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혼에 세 명의 자식까지 딸린 환기를 동림의 집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환기의 집안 역시 과부인 동림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렇지만 이런 난관이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진’ 둘의 결합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김향안. 환기의 성(김)과 환기의 아호(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p 239



앞서 이중섭이나 나혜석처럼, 김환기도 그 시작은 비슷했다. 한국사에서 제일 암울했던 시기에, 부유했던 집안에서 성장하고, 집안에서 반대하던 미술을 공부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까지도 굴곡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후 부터, 김환기는 앞의 그 둘과는 매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전에 김환기가 사랑하던 사람, 김향안을 먼저 알아야 한다. 김환기는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고, 김향하는 사별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돌싱(?)이 된 둘이 만나게 된 과정은 생략하고, 만나게 된 후 사랑에 빠지자 양 쪽 집안에선 당연히 결사 반대! 김환기 집안에선 한번 결혼한 여자는 반대했고(정작 자기 아들인 김환기는 이혼경력에, 심지어 애가 셋인데?), 김향안 집안에서는 애가 딸린 집안에 시집간다는 점에서 반대했다(이건 좀 이해가 가는 부분). 



하지만 기어이 김환기와 김향안은 결혼을 했다. 전처의 자식 및 시어머니와는 별거를 요구한 나혜석과는 달리, 김향한은 김환기와 전처 사이의 딸들과 시어머니에게도 참 잘 한것으로 보여진다. 거기다 남편인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도맡았다. 


세 딸과 시어머니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향안, 그녀라고 남편의 수집열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향안은 그것이 환기가 ‘조선의 미’를 탐구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이해하고 있었죠. 사실 이해를 넘어 향안은 백자항아리가 가진 특유의 오묘한 멋과 미를 환기와 함께 공감하며 진심으로 즐겼습니다. p 241



뿐만아니라, 김환기가 미술에 매진하면 할 수록 집안의 재산이 거널날 수 밖에 없었음에도, 김향안은 끝까지 김환기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심지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자, 본인도 미술을 공부하며 진심으로 즐겼다. 이러니 남편 김환기는, 더더욱 부인 김향안을 사랑하고 아낄 수 밖에.


향안은 다음날 바로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발급받습니다. 사실 환기뿐 아니라 향안 역시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했죠(그래서 향안은 전쟁 중에도 틈틈이 불어를 독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던 1955년 4월, 향안은 홀로 파리로 향합니다. 환기가 파리에서 화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죠. 파리에 도착한 향안은 환기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파리에 있는 수많은 화랑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합니다. p 248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애정, 신뢰, 존의로 언제나 변함없이 환기를 신실하게 지지해주는 향안이 있었습니다. 환기의 예술이 잘 자라도록 말없이 지켜주는 부처같은 향안. 환기는 그런 아내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글쓰기 대신 박화점에 나가 일하는 아내를 기쁘게 하고자 환기는 하루종일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도닳살 수 있는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 모든 혼을 아낌없이 불사릅니다. p 256


거기다 김환기의 미술 지원을 위해, 김향안은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고, 심지어는 본인이 먼저 프랑스로 날라가 김환기가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뒤, 김환기를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앞서 나혜석은 유학을 떠나서, 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을 버리고, 외도를 선택한 모습과는 매우 대비되는 부분이랄까.



환기가 가장 사랑했던 그 행위를 차곡차곡 이어가며, 향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뉴욕, 파리, 브라질, 한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엽니다. (생략) 그렇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장성시킨 엄마는 2004년 비로소 환기 곁으로 향합니다. p 264



그래서 그런걸까? 나같은 미술 문외한이 본 김환기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애정이 담뿍 담겨있는 것 같다. 언뜻 보면 차가울 것만같은 파란 배경의 달항아리 그림 조차도 정말 따듯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던 희망을 잃어버린 이중섭의 그림이나, 나혜석의 그림과는 매우 대조된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걸까?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 -김향안



한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대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세 사람. 우여곡절끝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세 사람. 이렇게 시작이 비슷했던 이중섭, 나혜석, 김환기, 이 세명은 시작은 같았지만 끝은 달랐다. 이중섭과 나혜석의 끝은 불행했고, 김환기의 끝은 행복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서로 다른 인생의 회오리로 빠지게 했을까. 



대체 이중섭의 무엇이 가족을 바다건너 보내버리는 선택을 하게 했고, 나혜석의 무엇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외도를 선택하게 한걸까. 그들은 왜 김환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가족을 곁에 두는 선택을 하지 못했던걸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불행한 길로 이끌었던 걸까?


그게 무엇이든, 이중섭, 나혜석과는 달리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 곁에 두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삶을 살았던 김환기는 눈 감는 그날까지 행복했고, 사랑하는 김향안이 있었기에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김환기를 만났을 이중섭과 나혜석.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길을 가면서도 다른 길로 들어선 김환기를 보며,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회고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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