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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서점의 오월 - 80년 광주, 항쟁의 기억
김상윤.정현애.김상집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평점 :
요즘 세계뉴스에서 화두가 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미얀마 군부 쿠테타’다.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미안먀 국민을 탄압하며 학살하는 행동, 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건과 매우 오버랩된다. 한때는 광주사태로 매도되었던 바로 그 사건.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 민주화운동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직후)당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전국에 계엄을 선포하고, 광주를 고립시킨 뒤, 민주화를 열망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러한 광주의 비극과 신군부의 행태를 미얀마 군부가 그대로 답습한 것이, 바로 작금의 미얀마 군부 쿠테타라고 할까?
각설하고, 이제 곧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 41주년이 된다. 이 때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41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죽어갔던 그들이 열망한 ‘민주화’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보자면, 이 날은 민주화를 기념할 ‘41주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신군부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씨를 비롯한 학살자들이 사죄를 하지 않는 이상, 이 기념일은 계속 반쪽자리 기념일이겠지만(물론 사죄한 분들도 콩나듯 있습니다만).
서론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오늘 서평의 주인공인 책 「녹두서점의 오월」 때문이다. 이 책의 집필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다. 이 책의 집필자들의 가족 역시도 5.18 유공자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수 많은 이름들 모두 5.18 항쟁 당시 죽었거나, 혹은 실종되었거나, 혹은 살았으나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혹은 5.18 피해자의 유족들이다.
뉴스에서 5.18에 대해 가타부타 떠들어댄들, 당시의 피해자들 증언만큼 사실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5.18 관련 현장을 답사한다 한들, 당시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참상을 1%라도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까? 아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을 집필한 공동집필자들의 상황일지를 하나로 모으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이 어땠었는지, 그야말로 카메라로 쭉 찍은 것 마냥 이어진다.
5.18 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선,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중정 안가에서 군사독재를 이어가던 대통령 박정희가 살해되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이제 제대로된 민주국가가 들어설 것이라 희망하였지만, 그 희망은 전두환을 필두로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산산히 짓밟혔다. 전두환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하나회 출신 장교들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12.12.사태다.
1980년, 전국의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 민주화를 요구하며 학생운동을 전개한다. 특히 5월에 들어서 이 학생운동은 더욱 거세졌고 서울, 대구 , 광주, 부산, 인천, 목포 등 모든 도시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바로 여기서부터 광주 5.18이 시작된다.
1980년 5월 13일, 전국의 대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틀 뒤인 5월 15일, 서울역에 모였던 대학생들은 시위를 중단한다(서울역 회군). 본인들의 시위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였다. 그러나 광주에 있는 전남대는 시위를 중단하지 않았다. 전남대가 시위를 중단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대학생들처럼 민주화를 위한 걱정 때문이었다. 다만 그 결과가 달랐을뿐. 서울 대학생들이 신군부 세력에게 빌미를 줄까 걱정되서 시위를 멈췄다면, 전남대생들은 신군부가 민주화의 열기를 무시하고 쿠테타를 일으켜, 빨갱이 사냥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시위를 진행한 것 뿐이었다.
광주에 있던 녹두서점은 당시로 말하자면 이른바 금서를 유통하는 것은 물론,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민주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과 그의 아내 정현애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본인들이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녹두서점을 민주화운동의 상황실로 사용한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에 7공수여단 33대대와 55대대를 투입한다. 동시에 신군부는 예비검속을 진행하였고,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도 5월 17일 예비검속되어 505 보안대로 잡혀들어갔다. 하여 5월 18일 당시부터 이후의 사건 진행사항은 김상윤을 제외한 그의 아내 정현애, 남동생 김상집, 처제 정현주, 여동생 김현주, 김현주와 결혼한 엄태주 등이 민주화운동 중심에 서게된다.
※예비검속: 빨갱이(간첩)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말함. 이승만 정권 당시 예비검속이라는 미명하에 수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됨(제주43, 거창학살 등).
그 날의 증언
5월 18일 자정(정현애)
생각해보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잡아갈 것 같았다. 또 남편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주어야 다른 사람들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p 051
5월 18일(김상집)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바로 내 뒤에서 “윽”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의 욕설이 들렸다. 그들은 무조건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을 휘둘렀다. 총검을 찌르고 곤봉을 훅훅 휘두르는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정신없이 청운학원 뒷골목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리려고 돌아섰는데, 도망쳐 온 일행 중 바로 내 뒷사람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 찔렸어” 그러고는 순간 ‘푹’하고 고꾸라졌다. p 157
나는 시위대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황을 안내하면서 소식이 닿는 주변인들에게 호주머니에 칼을 가지고 다니라고 말했다. 공수들이 길에서는 물론 집 안까지 쳐들어와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머리를 두들겨 패서 실신시킨 다음 짐짝처럼 차에 던져 실었기 때문이다. 공수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려 곤봉에 맞아 기절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암매장될 수 있으니까. p 159
5월 18일, 공수부대는 전남대 교문앞을 막으며,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렸으니 귀가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돌아가지 않고 하나, 둘 모이더니 300명 정도로 불어났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고함을 지르며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정현애)
방금 9시 뉴스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 군인들의 희생이 많다. 민간인 부상자는 두 명 정도 났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폭력 앞에서 살기 위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다니! 수없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부상자가 고작 두 명이라니! 주택가의 함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보도에 기가 막힌 시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탄식이었다. p 077
5월 19일, 신군부는 광주에 11공수여단을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 55대대와 11공수여단 61대대, 62대대, 63대대가 들어왔다. 이 모습만 보자면, 광주에 대테러가 일어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자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학살부대였다. 이들은 광주를 고립시키고, 대외적으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5월 20일(정현애)
나중에 이름을 전옥주로 바꾼 전춘심은 시위에 참여한 이유가 동생 때문이 아니라 조카 옷을 사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시민들의 참상을 보고 시위 차량에 올라 방송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후일 마이크를 잡았던 전춘심은 계엄사에서 간첩으로 몰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p 084
5월 20일(김상집)
갑자기 MBC 방송국 건물 뒤쪽 1층에서부터 4층까지 불길이 확 솟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화염병의 화력만으로는 그렇게 한거번에 불길이 솟을 수가 없었다. 분명 군인들이 MBC방송국에서 철수하면서 방화한 것이라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생략) 그동안 잔인한 공수들만 봤던 시민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왔을까’하는 마음에 그들이 끌고 온 장갑차와 탱크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도청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장갑차로 시위대를 밀어붙였다.
5월 20일, 신군부는 또 한번 11공수여단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 16대대, 직할대를 추가로 증파한다. 이로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총 3,400여명. 광주시민들은 너나할 것없이 모두 금남로로 나왔고,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저항하는 시민들도 시시각각 불어났다. 특히 이 날은 택시운전사들도 시민 투쟁대열에 동참하여, 그 유명한 자동차 시위행렬을 진행한다.
광주시민들은 군인들이 설마 자국민에게 발포를 하지는 않을 거라며, 믿고 있었지만. 이날 군인들은 광주 세무서, 조선대 앞에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들어 발포하였다.
5월 21일(김상집)
나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단 발포 후 군용트럭이 시내에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운동권이 겁을 먹고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있는 동안, 시민들은 어느새 지원동 탄약고와 화순탄광의 무기고를 털어 단단히 무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무장한 시민들이 공수들을 응징하기 위해 광주 시내로 진입한 것이다. p178
5월 21일, 신군부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광주사태는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에 기인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1시경에는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공수부대는 일제히 총을 들고 무차별 발포를 시작한다. 이런 공수부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꾸리기 시작했다.
5월 22일(가두 방송:김상집 with 윤상원, 김광섭)
광주시민 여러분!
살인마 전두환 일당은 국민투표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민주일정의 약속을 어기고 5월 18일 자정을 기해 제주 일원까지 비상계엄을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을 예비검속했습니다.
전두환 일당은 이미 5월 17일 밤에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에 공수들을 투입하여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했습니다.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어제는 대낮에 수만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공수들은 집집마다 난입하여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구타하여 초주검으로 만들고, 팬티만 입힌 채 끌어가고 있습니다. 총으로 쏘아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 죽인 사람들을 군용차에 싣고 어딘가에 암매장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당하고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살인마 전두환 일당과 공수들에 대항하여 총을 들고 싸웁시다. 그리하여 공수들을 광주 밖으로 몰아냅시다.
계엄군이 물러난 22일, 광주의 치안은 ‘시민군’이 맡았으며, 그 흔한 도둑질조차 없었다. 오히려 추후에 있을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며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은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 시간대에 외곽으로 물러난 계엄군은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를 원천봉쇄하며, 이 곳을 통과하려고 하는 시민군을 보면 무차별 사격을 하고 있었다.
5월 23일(정현애)
나는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을 경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성명서 문안을 작성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오판하여 북한이 휴전선을 넘어온다면 광주 시민들이 앞장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곘다는 내용이었다. p 111
5월 25일(김상집)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는 광주시민들의 요구와 상관없이 강제로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을 해제하면 곧바로 계엄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광주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 분명했다.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총기 회수 결사반대’를 외치며 궐기대회에 참여했다. <투사회보>에 실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글은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궐기대회에서 낭독할 때마다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 인사들이 총을 드는 것을 막무가내로 반대했다. p 200
5월 25일까지 계엄군들은 계속 광주 외곽에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 난, 광주는 공식적으로는 무정부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래없이 평화로웠고, 질서정연한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등은 시 자체에서 해결하고, 병원에서 혈액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들이 몰려와 헌혈을 앞다투어 하는 등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기까지 했다.
하루가 지난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한다. 도청안에 있던 시민군은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것을 예상하고 많은 사람들을 내보냈다.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십시오
시민군 윤상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청 밖으로 내보내고, 끝까지 도청을 지킨 시민군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장엄하게 산화하였다.
5월 27일(정현애)
어떻게든 ‘간첩’으로 몰려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서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엇던 터라, 나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이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YWCA에서 서점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들었구먼”
방을 뒤지던 군인이 라디오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윤상원이 서울에서 사용했던 고물라디오 였다. p 143
5월 27일, 계엄군은 광주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을 차단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광주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한 뒤, 도청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계엄군은 도청진압작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계엄군이 작전을 개시 한 지 약 1시간 30여 분만에 도청은 진압되었고, 광주 시내는 초토화가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 5.18에 대해서, 바로 여기까지만 알고 있을 확율이 높다. 광주 5.18을 주제로한 각종 매체들이 대부분 여기까지만 그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 뒷이야기를 알기 위해서.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작전 그 후.
대한민국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던 그 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예비검속당하여 사전에 끌려간 사람들을 비롯해서 말이다. 녹두서점의 주인 김상윤의 죄명은 내란주동자, 김상윤의 아내 정현애의 죄명은 폭도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게 아니었다.
-내란주동자 김상윤
잡혀 들어온 이양현이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있는 방으로 오게 되어 여러소식을 들었다. 윤상원이 죽게 된 과정도 자세히 들었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과 이양현은 민원실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이 도청 뒷담을 넘어 습격하는 바람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총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바로 솜이불을 펴 그 위에 윤상원을 엎드리게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섬광이 번쩍하며 불꽃이 퍼진 것으로 보아 화염방사기를 쏜 것 같다고 했다. p 228
내가 3과로 옮길 무렵 신군부는 소위 광주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배후 조종에 의한 내란으로 몰 것인지, 아니면 아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할 것인지.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울 보안대 본부에서 특수공작 총괄임무를 맡고 내려온 홍성률 내령이 ‘광주를 빨갛게 색칠하면 영원히 화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폈고, 이를 신군부가 받아들여 광주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가 철회되었다고 한다. p 229
이제 각본은 명확히 드러났다. 광주사태는 김재둥의 배후 조종으로 일어난 일이고, 정동년은 김대중의 뜻에 따라 그에게 받은 자금을 활용해 윤한봉, 김상윤, 김운기를 포섭해 광주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정동년은 이미 5월 17일 김대중에게 자금 500만원을 수령한 사실을 자백헀고, 양강섭의 자백으로 선거자금 53만원을 김상윤에게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김대중-정동년-윤한봉-김상윤-김운기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확보된 셈이다. p 239
신군부는 광주항쟁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리려고 했던 원래 그림은 ‘빨갱이’였다. 광주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철회되었다. 대신 차선책으로 당시 민주인사 중 한명이자, 전두환의 눈엣가시였던 김대중(15대 대통령)과 엮어서 ‘내란죄’라는 그림을 덧칠하였다.
-폭도 정현애
유치장에 잡혀 온 여성들이 한 일들은 매우 다양했다.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 시민군에게 김밥을 나누어 준 아주머니, 수배자를 숨겨주다가 들어온 여성들도 있었다.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여성 선교사도 있었다. 강진에서 잡혀 온 여성은 여관에서 “광주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많이 죽였다더라”고 말했다가 ‘유언비어죄’로 잡혀왔다. p 263
수사관들은 “사형수가 다섯 명 정도는 돼야 한다”는 전두환의 수사방침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 남편이 사형당하는 것은 아닐까. p 265
군인들은 우리에게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한 후, 우리를 상무대 강당으로 데려갔다. 강당에는 그날 석방될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군인들의 일장 연설을 듣고 상무대를 나섰다. 연행된 지 꼭 100일 만이었다. 나를 마중 나온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니는 “일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며 위로해주셨다. p 270
서점은 이제 구속자 석방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 구속된 사람들의 아내이거나 누나들이었다. p 272
그러나 군사법정은 증거물을 모두 기각시켜 버렸고, 증인들을 재판 3일 전에 모두 정보기관에 강제로 끌려간 분들도 모두 수모를 겪으며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또한 신군부는 증인으로 채택된 극소수의 증인들도 회유하거나 크게 위협을 가한 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 나온 증인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구속자들과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는 너무 황당하여 증인들에게 몹시 화가 났으나, 나중에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p 276
군인들에게 잡혀갔던 많은 사람들이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은 내란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군사재판에서 사형, 무기징형등의 형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뒤 많은 이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자유롭지 못했다. 평생 참혹했던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하고, 평생 눈 앞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잔상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전두환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을 비롯하여 그 측근들은 아직도 떵떵거리며, 권력을 쥐고 5.18을 왜곡하고 있다.
“이 기록유산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죽음을 조사하고 묘사하기조자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인권 침해에 대하여 설명하며 극도의 역경과 박해를 넘어선 인간승리에 대한 기록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당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로슬린 러셀이 한 말이다. 과연 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기억하는 5.18에는 잊힌 부분은 없는걸까, 왜곡된 부분은 없는걸까. 이제 스스로에게 답을 구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