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준의 말하기 수업 - 말하기에 자신이 생기면 인생이 바뀝니다
한석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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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하면 읽게 되는 장르의 책이 있다. 글쓰기와 말하기에 대한 책이다. 작년에는 주로 글쓰기(어휘력, 문해력)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이제 글쓰기에 대한 이론(?)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으니, 올해는 말하기에 대한 책을 주로 읽어볼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말하기 책은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이라는 책이다.



《프리한 19》로 익히 보아온 한석준 아나운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 옆에 오상진 아나운서, 전현무 아나운서가 있음에도 그가 하는 말은 이상하게 귀기울여 듣게 된다. 한창 TV를 볼 때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알았다. 내가 한석준 아나운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이유를. 그가 하는 말에는 품격이 있었다. 


다른 두 아나운서의 말에도 품격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석준 아나운서 말의 품격이 유독 돋보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청중의 입장에서 분석하자면, 그가 하는 말에는 항상 말을 듣는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었다. 배려와 존중은 과하면 상대방이 만만하게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석준 아나운서가 하는 말 속의 배려와 존중은 과하지 않는 적정선을 지킬뿐더러, 그 안에는 자신을 지키는 자존감도 있었다. 



살다보면 ‘말’하나로 무너지고, ‘말’ 하나로 흥하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말’ 잘못해서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왕왕있다. 비단 남의 일이 아니다. 말로 인해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장 내 기억속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오랜 지기가 있었다. 나에게는 ‘친우’라 꼽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서로를 알고 지낸 시기가 너무 오래되었고,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이였다. 뭐 이제와 돌아보면 나만 그런걸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난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 말은 아닌 것 같다고 그 자리에서 정정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가벼운 사과말은 커녕 ‘무반응’. 


나는 성격상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아닌 사람은 칼같이 쳐낸다. 오랜 지기라 생각했던 사람의 말과 행동. 칼같이 쳐내기엔 나에겐 너무 소중한 친우였기에 그저 실수라고 생각하고, 그가 가벼운 사과라도 하길 바라며 조금은 기다렸더랬다. 깨톡창도 수십번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연락은 없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 자기 필요에 의한 연락을 했다. 그 연락에는 내가 원하는 ‘말’은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만 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나보다, 하고. 그렇게 나는 내 원칙처럼 그와 연락을 멈췄다. 


말을 잘해서 나타나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말을 ‘잘해서’라는 의미는 그 말을 함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와, 사용한 언어 그리고 말 하는 사람의 태도다.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은 말 하나로 좋은 인연을 만든다.


나에게는 ‘지인’보다 가깝지만, ‘친우’라고 하기엔 1% 부족했던 그런 인연들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보다는 크지만, 그렇다고 마냥 크지는 않았던 그런 인연들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인연들이 내 속에서 크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이들과 이렇게 친했었나? 라고 돌이켜보던 날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언제나 다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말을 하는데 있어서 타이밍을 알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 잊었던, 내 호의를 잊지 않은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말을 건네던게 쌓이고 쌓이다보니, 어느새 나에게 이들과의 관계는 꽤 커져있었다.

음..? TMI가 길었다. 엄청 길었다. 뭐, 결론은 이거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누군가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품격있는 말은 그 누구라도 말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온다.






 

 발음을 좋게하는 데는 자음 훈련보다 모음 훈련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음을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자음을 틀리게 발음했을 경우 어떤 자음을 틀리게 발음했는지 확실히 드러납니다. 반면, 모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음을 틀리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발음이 부정확하네’라고 생각합니다. p 037

‘아’ 발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말의 ‘아’를 정확히 발음하려면 입을 위아래, 좌우로 크게 벌려야 합니다. 거울을 보면서 ‘아~’ 하고 소리내보세요. 어떤가요? 얼마나 입을 크게 벌려야 하는지 느껴지나요? 영어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영어의 ‘A’ 발음을 생각해봅시다. ‘A’ 발음은 우리말의 ‘아’와 ‘어’의 중간쯤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 때문에 영미권 사람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정확히 발음하기 어려워 합니다. 아예 소리 낼 줄 모르면 신경써서 배웠을 텐데, 소리 낼 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을 배우기 어려운 겁니다. p 038


참고로 책 본문 뒤에는 단기간에 발음이 좋아지는 모음 훈련법이 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달리 서술어가 가장 뒤에 나오기 때문에 말끝을 흐리면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낳을 뿐더러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비칠 우려도 있고요. 말끝을 흐리는 습관은 직장생활에서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업무를 분담하거나 보고할 때 말끝을 흐린다면 능력과 상관없이 신뢰감이 떨어질 테고, 그 결과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p 062

“말을 끝까지 정확하게 하면 너무 공격적으로 보이던데….”
말끝을 분명히 해도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를 겸비한다면요. 말을 끝까지 분명하게 마치면 존재감이 확실해질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상당히 지적인 느낌을 줍니다. 지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건 어렵지요. 그러니 어디서든 내가 만만하게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면, 우선 내 말버릇이 어떤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p 063

긴장해서 말이 빨라진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선 스스로 말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겠죠. 발음이 꼬이거나 숨이 차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현상 가운데 하나라도 나타난다면 ‘아, 내가 지금 말이 빠르구나’ 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그 다음 해결책은 말의 고삐를 당기는 겁니다. 이때 고삐는 호흡입니다. 말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심호흡을 하는 거죠.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충분히 쉬어도 1~2초 사이입니다. 이 정도는 청중이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호흡이라는 고삐를 당겨 긴장한 나 자신에게 진정할 여유를 주길 바랍니다. p 105


전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 급한 마음이 말이 빨라질 때도 있습니다. 스피치의 목적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럴 땐 차라리 내용을 줄이는 편이 낫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죠. p 106


긴장에서 말이 빨라지는건,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나는 긴장보다는 분노했을 때 말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왜 과거형인가,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기 때문이다.  


책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분노가 극심해졌을 때 나는 입을 닫는 연습을 했다. 그래야 입 끝에서 맴도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뱉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계속 연습했고, 지금은 꽤 개선되어서 예전처럼 분노했을 때 아무말을 내뱉은 일은 줄었다. 적어도 입 닫는 연습 이후, 지금까지 분노시 아무말 횟수는 0회인듯?


그날 마침 “힘내” 라는 말에 대해 각자 생각을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반응이 어땠을까요? 거의 모두 “힘내”라는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개중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사람도 있었지요. “힘내”라는 말 한마디로 힘이 날 것 같으면 왜 우울했겠느냐며, 그 당시에는 힘을 낼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p 125

우리말이 그렇습니다. 위로하는 말이 딱히 없습니다. 누군가의 부고를 듣거나 상갓집에 가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른 말을 하자니 ‘결례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지요. 결국에는 ‘복사-붙여넣기’를 하듯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p 126

“힘내”라는 말을 포함해 이런 위로는 모두 ‘말하는 이’의 중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헤아린 것이 아닌,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을 오히려 더 무력하게 만들고 말았죠. p 127

그렇다면 힘든 일을 겪은 이에게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요? 정답은 없지만, 위로하기 전에 다음 두 가지는 반드시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든 힘들면 연락해. 내가 곁에 있어줄게”처럼 내가 네 곁에 함께한다는 걸 전하는 것입니다. 힘낼 힘조차 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강요에 가깝습니다. 위로할 때는 영혼 없는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내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p 127


“거절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누구에게나 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기에, 상대방과의 관계가 혹시 틀어질지 몰라서, 언젠가 반대로 거절당할까봐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쉽게 거절하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거절 자체를 인정머리 없는 행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거절에 어울리는 서술어도 부정적어감을 주는 ‘당하다’ 입니다. p 153

잠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들어줘야 할 부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로 ‘부탁을 받는 이’ 입니다. 사실 상대방에게는 ‘가급적’ 들어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청을 받는 입장에서 ‘반드시’ 들어줘야 할 부탁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아 바로 거절해도 괜찮은 이유입니다. 만약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부탁이라면, 상대방은 내게 다시 부탁하거나 절실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그때 다시 고민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거절해도 됩니다. 거절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p 155

사실 거절해야 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리해서까지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어렵게 부탁을 했을까, 하면서요.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방의 감정을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요? 미안해하지마세요. 거절은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경계선 입니다. p 156


‘말’은 힘이 있고 위험하며, 그럼에도 불과하고 내 생활에서 뗄레야 뗄 수 없다. 사람은 평생 말을 안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고로 우리는 말하기 연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냥 말하기가 아닌, 말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을. 

그런 사람들에게 한석준 아나운서가 쓴 말하기 수업 책인 『한석준의 말하기 수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는 한석준 아나운서가 아나운서 시절부터 지금까지 갈고 닦은, 꾸준히 지키는 말하기 원칙이 담겨있다. 그 뿐만인가? 말하기 방법을 어떤 식으로 고쳐야 하는지도 알려주는 그야말로 말하기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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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어를 곧잘 한다. 내 일본어 실력은 자격증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JLPT N1은 기본이고, JPT 800점대가 나온다. 심지어 일본어 관광통역사 자격증까지 있다. 자랑하고 싶은게 있다면, 학원을 다닌 적 없고 오로지 일본어를 독학으로 했다는 것. 거기다 관련 전공자도 아닐 뿐더러, 지금 하고 있는 일이랑도 일절 상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 함정은 있다. 어려서부터 역사더쿠였기에 한문을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중학생 때부터(!!) 일본 만화와 성우에 미친듯이 빠져버렸다. 그렇게 남들이 말하는 이른바 슬기로운 더쿠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일본어를 익히게 되었달까? 더쿠생활의 끝을 달렸던 고등학생 때는 졸업하면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는 꿈도 꿨다. 슬프게도 이 꿈은 그저 꿈에서 끝났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나빴다고 해야할지. 나는 워킹 홀리데이는 커녕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했다. 그저 그런 회사에 취업했다면, 언제든지 때려치고 내 꿈을 쫓을 수 있었을텐데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내가 취업한 회사는 남들이 들으면 ‘오올!’ 하는 이른바 대기업이었다. 회사를 때려치고 꿈을 쫓기엔 아쉬울게 많을 정도로. 그렇게 난 평범하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덕질은 자연스레 안녕! 일본어는 취미생활이 아닌, 내 가치를 증명할 도구로 사용했다. 


어느새 직장생활 1n년차. 길다면 긴 기간 직장생활을 하며 결혼도 하고, 신혼도 즐겼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낳았다. 지금의 난 ‘육아-회사-육아-회사’ 무한 반복이다. 육아와 함께 내 시간이 사라져서 그런가? 요즘들어서 부쩍 잊고있던 꿈이 떠오른다. 내가 포기했던 수많은 선택 중 하나,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이 책은 두 번의 워킹홀리데이로 일본과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워홀이 끝난 뒤에는 세계여행을 하며 여행을 업으로 삼은 저자의 기록이다. 과거의 내가 포기했던 삶이다. 지금의 내가 가끔씩 부러워 하는 삶이기도 하다. 


‘일본어도 안 되는데 일을 어떻게 구할까?’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오자마자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구하러 다녔다. 전화로 일을 구할 만큼 일어도 안됐고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는데 사람을 구합니까?’라는 일본어만 외운 채 무작정 가게에 찾아갔다. 역시 외국인이 일어도 못하는데 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 일본에 올 때 ‘절대로 한국인들과 어울리지말자’, ‘한국 가게에서는 일하지 말자’ 라고 굳게 다짐하고 왔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인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자신을 인정하고 동유모 사이트(한인 커뮤니티 카페)를 검색하며 ‘아카사카’라는 지역의 한국 가게에서 일하기로 했다. p 025


보통 언어는 3개월 단위로 계단처럼 오른다고 한다. 항상 도서관에 갈 때 또는 길을 걸을 때 한자 간판이 유독 많은 일본에서 언젠가 간판을 읽으리라 다짐했었는데 신기하게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간판에 있는 글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순간 누군가 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지만 내 눈과 머리로 간판을 읽고 있다는 걸 의식했을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역시 언어는 꾸준히 하면 는다. p 030


며칠 동안 검색해서 일본 카페와 식당, Bar 등에서 면접을 봤다. 결과는 단, 한군데도 흔쾌히 OK 하는 곳이 없었다. 면접을 보니 일본어 실력이 일할 정도는 안 됐나 보다. 갑자기 일본어 실력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작아지기 시작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치욕을 또 한번 느꼈다. 너무 자만했던 걸까? 좌절했다. 그렇게 이틀을 술 먹으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던 찰나, 에비스의 몬쟈 가게에서 연락이 왔다. 나를 채용한다는 합격 통보였다. p 049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워홀은 보통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실제로 한창 더쿠생활을 하던 그 때,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일본어 능력자들이 선택했던 길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읽고 꽤 놀랐다. 일본어를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 워홀을 선택한 저자였기에. 무모하다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용기와 추진력에 박수를 치고 싶어졌다. 언어를 모른 상황에서 외국행을 택했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언어를 습득하여 외국에서 생활하겠다는 의지를 담보로 한거니까.



실제로 저자는 3개월만에 일상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늘었고, 두번째 직장은 온전한 일본 가게였다. 서비스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은, 정확히 자연스런 일본어 응대를 못하는 사람은 취업이 어렵다. 헌데 그 어려운 길을 해냈으니, 이 정도면 저자의 의지와 실행력은 정말 박수받을만 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생각이 많아졌다. 원하던 일본 가게에서 일도 하고 일본어도 늘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내 마음속의 불안함은 남아 있다.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과 달리 학교도 휴학하고 일본에 왔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을 과연 잘하고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모든 물음의 끝은 결국 내가 정하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도 생각이 많아진 만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p 071



인생을 살면서 온전히 ‘여행’만 한 적은 없었다. 여행이란 것은 짧게 다녀올 때 휴식의 개념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스태미나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여행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매일 보는 풍경들과 만나는 낯선 사람들은 일상이 되었고 그게 내 삶 속의 일부분이 되었다. 아름다움, 즐거움, 멋진, 무서움 온갖 단어의 의미를 정한 기준은 무엇일까? 무언가의 ‘기준’을 정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일반화된 논리이지 정답은 아니라는 것. 결국은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번 여행을 통해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없는 ‘꿈’을 찾았다. p 098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1년. 2014년 3월 6일 ~ 2015년 3월 6일. 많은 사람을 만났고 추억을 쌓았다. 내 인생에 있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스물네 살의 일본 워킹홀리데이 생활. 아마 이번 워킹홀리데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쳇바퀴 돌듯 바쁜 일상을 살 것이다. 그렇지만 꿈은 더 커졌다. 내 꿈을 위해 달려가 보려 한다. 10년 후 미래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p 116



잠깐의 여행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려두고 장기간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면, 누군가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며 걱정이라는 이름의 오지랖을 부린다. 물론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걱정하는 그들이 간과하는 점이 있으니, 바로 세계여행을 선택한 당사자다. 그들 역시 앞날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여행을 택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겠다는 의지다. 뭐, 간혹 욜로★만 외치는 머리가 살짝 백지인 소수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저자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을 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고, 또 그려낼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도 모든것을 뒤로하고, 세계로 떠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금은 누군가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을 그 선택이, 훗날 자신들을 걱정해주었던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더 멋진 어른이 될 시작점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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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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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들었던 고등학생 때, 한창 세계사에 빠져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를 가르치던 세계사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교과 진도에 맞춰서 본인이 답사여행을 다녀왔던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을 공부할 때는 로마 답사 사진을, 중세 유럽을 공부할 때는 유럽에 있는 중세 건축물 앞에서 찍은 사진등을 말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사 더쿠였던 나에게, 중세 유럽 건축물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세 한국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뾰쪽뾰쪽한 첨탑이라니! 성당 안을 오색 빛으로 물들이는 스테인글라스라니! 정말 신세계였다. 



하늘 드높이 위로 솟은 높은 첨탑과 그 위에 있는 십자가. 누가봐도 수평보다는 수직성을 강조한 건축물. 그런 건축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고 배운 그때부터 나는 고딕 성당에 대한 로망이 생겼더랬다. 하지만 그저 로망일뿐! 난 지금도 고딕 성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저 그런 머글이었다. 하지만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덕분에 적어도 고딕 성당 머글 신분은 벗어난 듯?!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 미술사학자인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역사를 물리적 시간의 불가분한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고 단절된 시대들의 진행단계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게 역사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게 바로 시대의 통일성이다. 시대의 통일성은 역사에 포함된 예술, 문화, 철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현상 등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해당 시대의 건축 양식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양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바로 떠오른 건 10세기 ~ 11세기 고대 로마의 건축 양식을 부활과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로마네스크 양식, 12세기 왕가의 지지를 받아 외곽에 있던 교회건물들이 도시안에 들어서며 덩달아 부유층에 지지를 받으며 교회 권한이 커지면서 유행한 고딕 양식, 14세기 교회권한이 줄어들고 흑사병 유행을 거치면서 유행한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역사는 단절된 시대가 연속되는 진행과정이며, 각 시대마다 어떠한 분야든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게 맞구나 싶다.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고딕이 고트족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고딕’과 ‘고트족’은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이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명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딕 양식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 008


초기 고딕 성당을 대표하는 상리스, 누와용 대성당을 거치며 고딕 성당은 본격적으로 수직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성당이 바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이르러 성당 규모도 웅장해지고, 앞서 지어진 초기 고딕 성당의 한계를 극복하며 구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 위용은 워낙 대단해서 당대 유명 작가였던 빅토르 위고도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주제로한 여행기와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뉴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는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딕 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한 12세기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대중화되고, 그에 따라 신학의 영역에서 마리아론이 발전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구세사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관련된 마리아의 협력에 집중되었던 관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건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많은 주교좌성당이 성모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성모 마리아 성당, 곧 노트르담 대 성당이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입니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보통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을 말하는데, 앞에서 언급된 상리스 대성당과 누와용 대성당, 그리고 랑 대성당 모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p 067


『레 미제라블』(1861년)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는 그보다 20년 전인 1831년에 『파리의 노트르담』을 출간했습니다. 위고는 스물 세살이 되던 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여자의 자격으로 샤를 10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 대관식은 여느 왕처럼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평소 고딕건축에 관심이 많아떤 위고는 랭스 대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어 그 후 건축여행을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기를 집필하였는데, 그중 ‘프랑스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파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문화유산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특히 고딕 성당의 훼손에 대한 그의 우려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잘 나타납니다. p 075


위고는 대성당의 양식을 평가하기를 순수 로마네스크 양식도 아니고 순수 고딕 양식도 아니며, 과도기적 양식의 성당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기둥은 로마네스크로 세워졌지만, 반원 아치 대신 포이티드 아치가 얹히면서 그 양식이 전체를 지배했는데 그 뾰족하기로 치면 후대의 포인티드 아치만 못하였다고 비평합니다. 이를 육중한 로마네스크식 원기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합니다. 위고의 관찰은 매우 예리한데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전성기 고딕 성당에 속하지 못하고 초기 고딕의 완성 단계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p 078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장엄하고 숭고한 건축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답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손 쳐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카룰로스 대제)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린 채 인간들이 존경할 만한 기념물에 가한 무수한 훼손의 흔적 앞에서 한숨을 참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유명한 성당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명하지만, 실상 성당의 권위(?)가 있는건 랭스 대성당이다. 프랑스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성당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랭스 대성당은 초기 고딕의 수직성과 수평적 비례를 중시한 고전 고딕을 융합시킨 건물로 전성기 고딩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5세기 초에 세워진 랭스 대성당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곧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영향을 받아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가 496년에 이곳에서 아리우스파에서 개종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세례는 유럽의 나라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도를 국가 체계의 기틀로 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왔습니다. p 124


성당의 수직화는 구조적 경량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플라잉 버트레스의 밴딩 모멘트를 해결하지 못해 육중한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졌는데, 랭스는 부르즈 대성당의 보강 방식을 받아들여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벼우면서도 강하게 만들었고, 버트레스의 단면도 줄였습니다. 플라잉 버트레스 기능이 강해졌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트리포리움의 높이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당의 벽체도 얇아졌고 창문의 크기도 넓어지면서 경량화를 배가시켰습니다. p 128


고딕 성당은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거치면서 고딕주의의 절정인 랭스 대성당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는 누와용 대성당, 랑 대성당 그리고 부르주 대성당의 고전주의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함께 걸음’ 덕분에 웅장하고 찬란한 고딕 성당이 지금도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습니까? p 130


동방박사 유골함이 봉헌되어있는 쾰른 대성당은 독일에 있다. 그 자리에 처음 성당이 세워졌던 시기는 비교적 오래전인 4세기 였지만, 여러 개중축을 거치다가 13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소실된 그 자리에 새로 성당을 지으니, 그게 바로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그저 멋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라고 하기엔, 쾰른 대성당에 지금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지는 과정이 꽤나 흥미롭다.


당대 독일 도시 쾰른은 로마네스크 전통이 깊었던 지역주의가 눈에 띄는 도시였다. 반면 인근에 있는 프랑스는 고딕 양식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은 쾰른처럼 지역주의도 있었지만 프랑스처럼 보편주의도 있어서, 이 두개가 적절히 공존했지만 쾰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쾰른 성당은 순례성당으로 이름났고, 해마다 순례객이 늘어나자 성당 확장을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의 권력을 나눠가졌던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세 곳의 눈치를 쾰른 대성당은 어떤 방식으로 성당을 확장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쾰른에 만연한 지역주의를 따라가자면 신성로마제국 처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야했지만,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은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게 될 경우, 독일에 있는 다른 성당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미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고딕 성당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쾰른은 고딕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냥 고딕 양식이 아닌, 기존의 고딕 양식을 뛰어넘은 새로운 고딕양식을. 그렇게 탄생한게 지금의 쾰른 대성당이다.


쾰른 대성당에는 116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서 봉헌된 동방 박사의 유골함이 있습니다. 이 성 유물은 황제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얻은 것으로 밀라노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후 대성당은 유골함을 금으로 다시 제작하여 1225년에 완성하고 그로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유골함을 보기 위해서 쾰른 대성당을 순례했습니다. 그렇게 쾰른 대성당이 순례 성당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부터 성당은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p 208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책 『고딕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으로 건축 양식이 변화하던 시기의 당대 신학과 철학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건축사적 세계사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고딕 성당, 전성기 고딕 성당, 후기 고딕 성당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별 유명한 고딕 성당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건축학적으로, 세계사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여기서 시야를 조금 더 넓히고 싶다면, 저자의 전작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관한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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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까지만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식량난이 사회적 문제였다. 따라서 생산성이 높은 품종을 개량하고, 대체 음식을 만드는 게 화두였다. 그런 과정에서 장기 보관이 쉽고, 이동이 쉽고, 그 자리에서 먹기 쉬운 가공식품들이 무수히 개발되었다. 문제는 가공식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수많은 합성첨가물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보존제, 발색제, 방부제, 합성 조미료등은 기본이고 설탕 및 소금이 과하게 들어간다. 이런 가공 과정에서 식품 원형의 맛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다량 섭취했을 때 몸 속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가공식품이 일상화되기 전,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1970년대까지만해도 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질병은 코로나19처럼 결핵, 천연두, 콜레라 같은 감염성 질병이었다. 하지만 가공식품이 일상화된 지금, 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질병은 당뇨, 류머티즘, 치매, 각종 염증성 질병이다. 너무 흔하게 발병하는 위염, 장염, 치주염, 피부염 기타 등이 모두 염증성 질환이다. 이렇게 염증성 질환이 일상화가 된 이유는 위에서도 말한 합성 가공식품의 대중화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서구적인 식습관이 있다.


다시 가공식품이 일상화되기 전으로 돌아가보면,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들은 찌고 삶고 데치는 요리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식재료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먹는 음식도 한정적이었고, 먹는 시간도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가공식품의 일상화되는 그 시점에 발맞춰 전 세계적으로 보다 빠르고 편리한 삶을 지향하고, 식량난이 사라지며 잉여 농산물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먹는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노동을 하기 위해 먹었다면, 지금은 즐기기 위해 먹는다. ‘먹는 행위’가 노동이 아닌 여흥을 위한 행위로 바뀐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먹방’, ‘미식’, ‘맛집찾기’ 등이다. 


거기다 요즘 사람들에게 핫한 음식들은 위에서도 말한 서구적인 조리법으로 만든 음식들이다. 기름으로 볶거나 튀기고, 직화로 한 요리들. 혹은 정말 맵거나, 달거나, 짠 요리들. 먹방 프로그램에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요리들이 주로 나온다. 요리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불맛이 중요하다며 직화를 하거나, 튀기거나 볶는다. 거기다 설탕을 과하게 넣기도 한다. 직화든 튀기든 직접 조리한 요리는 가공식품보단 몸에 좋겠지, 하고 안심하고 먹기엔 이런 요리들도 건강에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이라고 기름에 볶고, 직화한 요리를 안먹었을까? 옛날 사람들도 분명 먹었다. 다만 그때는 식량 자체가 귀했을뿐더러, 넘쳐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요즘처럼 무분별하게 먹지 않았을 뿐이다. 귀한날, 잔칫날이나 되야 먹던 음식이었다. 반면에 현대인들은 이런 류의 요리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다.


그렇게 가공식품과 서구식 음식에 길들여진 우리 몸에 남은 건.... 독소다. 당독소. 이름부터 ‘독’이 들어간다. 이름값을 하려는건지 모르겠지만, 당독소는 몸에서 각종 염증질환을 일으키는 대표주자였다. 


 

당독소가 혈액이나 조직에 축적되면 우리 몸에 교란이 일어나 과도한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심혈관 질환, 당뇨, 암 등과 같은 만성질환을 유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백내장, 황반변성, 녹내장, 제3신경통, 치주질환, 역류성 식도염, 위무력증, 수전증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독소의 해로움이 신체적 영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울증을 심화시키고 불안을 높이며 학습능력을 떨어뜨리는 등 심리적 정신적 인지적 문제와도 연관이 깊다. 당독소라는 단어에 독소, ‘독성물질’이라는 의미의 ‘toxin’이 포함된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직한 용어인 셈이다. p 035


당독소는 조리 방법의 문제와 서구화된 식습관과 연결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습관적으로 먹어 과잉 에너지가 누적되면 당독소, 활성산소, 염증이 많아진다. 정제된 탄수화물 같은 당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섭취할 때 남은 당과 찌꺼기들이 혈관과 체내의 곳곳에 쌓여 당독소가 된다. 그런데 당독소는 자연적으로 소모되지 않고 체외로 잘 배출되지도 않는다. 분해가 잘 되지 않는데다 체내에 머물면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내기 바쁘다. p 054



당독소는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에 중독이 되기 쉽고 탐닉을 일으킨다. 끝없는 자극 추구와 즉각적인 보상 체계는 뇌의 도파민을 과도하게 활성화시켜 자제력을 약화시킨다. 당독소가 높은 음식들은 쉽게 중독되는 특성이 있다. ‘아는 맛이라 더 맛있는 맛’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당독소 자체가 마약처럼 중독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당독소가 중추신경계를 자극하여 탐닉하게 만들고 대사질환과 퇴행성질환 발병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연구가 유명 저널에 발표되었다. p 065


과일을 몸에 좋은 것으로만 인식하고 건강을 위해, 체중조절을 위해 섭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일은 초콜릿과 다를 바 없는 당 덩어리다. 달달한 음식이 없었던 100년 전 사람들에게 과일은 귀하고 좋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칼로리가 풍요롭게 남아도는 잉여 시대에 살고 있다. 끼니마다 몸에서 필요로 하는 에너지 이상을 섭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일이 몸에 좋다는 옛말만 믿고 따르는 것은 몸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다. p 083


과당은 우리 몸에 물과 영양이 부족할 때 저장모드로 바뀌는 데 필요한 일종의 메신저다. 그런데 우리가 밖에서 필요 이상으로 이 신호를 많이 보내면 일련의 작용이 계혹 쌓여 탈수가 가속화되고 당독소가 누적되어 피로해질 뿐만 아니라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뱃살이 는다. 세포 바깥에 있는 물이 자꾸 줄어들어 피부와 점막이 건조해지고 갈증과 식욕이 촉진된다. 몸에서 발생하는 대사열을 식힐 물이 사라져 열증과 메마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탈수, 열압 상승, 염증이 반복되면 신장 또한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맘 놓고 즐길 수 있는 단맛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p 084



요근래 스트레스를 푼다고, 입이 심심하다고, 별별 이유로 단걸 너무 많이 먹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이 책 『당독소 쇼크』는 말 그대로 정말 쇼크였다. 정제 탄수화물이 몸에 안좋다는 사실도 알고, 가공식품을 많이 먹으면 안좋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몸은 왜 자꾸 몸에 안좋은 음식만 탐닉하는지, 하.


당독소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삶고 찌고 데치는 요리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러한 요리 방법으로도 맛있는 식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쉬운 예로 흔한 음식 재료인 달걀부터 바꿔보자. 달걀은 어떻게 해 먹어도 맛있지만 내 몸을 생각한다면 프라이보다 삶아서 먹는 것이 좋다. 스크램블을 볶을때보다 쪄먹을 때 당독소 함량을 최소화 할 수 있다. 프라이와 스크램블은 물론 튀기고 볶은 음식을 아예 먹지말라는 게 아니다. 기존의 방식을 조금만 더 줄이는 대신 삶아먹고 쪄먹고 데쳐먹는 방식을 늘려보자. 내 몸이 먼저 좋은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p 071


날 닮아서 뿡뿡이가 계속 단걸 찾는건가 싶기도 하고. 지금이라도 식습관을 조금씩 바꿔나가야하는데, 이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가 않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건강한 돼지가 되려면..... 단것 2개 먹을 때 1개 먹는거로 줄여나가는 것 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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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산책시키기 - 당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10가지 방법
벤 알드리지 지음, 김지연 옮김 / 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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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손 꼽을 만큼 적게 읽는 책이 있다. 근데 매 년 꼭 한 권씩은 읽는다. 바로 철학책이다(근데 리뷰는 잘 안올림^_T ). 


오늘 읽은 철학책은 『바나나 산책시키기』. 제목부터 남다른 이 책 탄생과정은 이렇다. 저자는 오랜기간 신경발작과 불안증세로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다 ‘스토아 철학(스토아주의)’을 만나면서, 일상이 달라진다. 저자는 일상속에서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였고, 그로 인해 저자를 괴롭히던 신경발작과 불안증세는 사라졌다. 


스토아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걸 목표로 한다. 스토아 철학에는 여러 가지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지만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을 최대한 잘 살아 내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인생의 파고를 헤려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다. p 035


일반적으로 ‘철학’이라고 하면 일단 ‘어려운 학문’, ‘졸린 학문’ 같은 편견과 함께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런 편견을 바꾸기 위해 저자가 철학 입문서를 썼으니, 그게 바로 이 책 『바나나 산책시키기』다. ‘스토아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가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철학책 입문서인 것이다.


나 역시 철학책이라곤 입문서 몇 권 읽어본게 다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철학책 중에선 이 책이 제일 쉽고 다가가기 쉬웠다(그래서 리뷰도 쓰고!). 학창시절 세계사 및 윤리 공부할 때 미친듯이 외웠던 시험 암기용 ‘스토아 철학’이 아니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행복’이란 개인의 내면과 책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교의 그것과도 비슷해서 그런지, 스토아 철학이 더 쉽게 다가왔다.


스토아 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래 4가지 기본 덕목이 필요하다.



※스토아 학파 4가지 기본 덕목※

1. 지혜: 분별력이라고도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또한 살면서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이다.

2. 정의: 타인을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능력이다. 나에게 목소리를 높힌다 하더라도,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

3. 용기: 집념과 인내, 정신력으로 대표되는 능력이다. 고난과 역경을 마주할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도 신념을 지킨다. 

4. 절제: 자기 통제력이다. 본인의 감정을 다스릴줄 안다.



어찌보면 스토아 철학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이런 기본 덕목들을 모두 갖춘 사람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도 기본 덕목 4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도 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스토아 철학을 이해하고 실천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마주할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을 실제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 지는 분명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다음 단계에 집중해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제쳐두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을 때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 p 047


스토아주의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만으로 본질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똑같이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선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되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다. 스토아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이다. p 050


사람들은 실제보다 인생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 막상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 좌절하고 실망하게 된다. 스토아 철학은 이에 대해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인생에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계획은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p 052


스토아 주의가 알려주는 좌절과 실망을 피하는 법은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거나 미리 어떤 결과가 나와야 마땅하다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되 언제나 결과는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어떻게 대응할 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 p 053



스토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은 ‘불편함’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발적 불편함’. 일부러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는거다. 예컨데 침대가 편한 사람이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잔다거나, 숨쉬기 운동이 다인 사람이 고강도의 운동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 이미 편리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문물을 발달시켜, 겨우 편리한 삶을 영유했는데 다시 불편하게 살라고? 잘 생각해보자. 불편하게 살았을 땐, 사람들은 불편함을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게 편리해지면서,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이를 참아내지 못한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힘든일, 고난이나 역경에 대처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자발적 불편함’ 실천은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실패와 거절, 고난과 역경에 대한 예방접종이다. 



요즘 두돌 아가를 키우고 있어서, 육아 관련 정보를 많이 보는데 유독 뇌에 내리 꽂힌 문장이 있었다. 하정훈 쌤이 한 말인데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나지만, 요점은 이랬다. 아이는 불편하게 키워야 한다고. 근데 정말 맞는 말이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게 되면 나중에 커서 불편한 상황에 마주했을 때, 이를 이겨낼 힘이 없다. 간혹 신입사원 부모가 회사로 전화해서 “우리 애가 어쩌고저쩌고”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게, 바로 아이를 너무 편하게만 키웠기 때문은 아닐런지.



자발적 불편함은 스토아 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자 내가 스토아주의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개념은 단순하다. 일부러 자기 자신을 힘든 상황에 노출시켜 미래의 고난과 역경에 대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인생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p 087


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 개념을 각자의 삶에 적용할 때 발휘한 창의성이 마음에 든다. 정신력을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환 일들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일부러 추위나 더위를 견디며,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않거나, 고강도의 운동을 하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행위들이 그렇다. p 088


하지만 결코 가학적인 형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발적 불편함은 우리가 강인해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며, 미래를 준비하고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p 090



‘자아 성찰’도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다. 어찌보면 거창해보이지만, 알고보면 제일 쉬운 일이 바로 ‘자아 성찰’이다. 아침에 눈떠서, 혹은 저녁에 자기전에.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낼건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냈는가, 후회된 일은 없었는가, 이 일에서 내가 얻은 바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명상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글을 쓸 수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모닝 루틴’, ‘미라클 모닝’. 이 역시 ‘자아 성찰’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다. 아침에 눈 떠서 아침 밥을 먹기 전에, 운동을 가기 전에, 출근 전에 등 무언가를 계획하고 꾸준히 그 일을 하는 것. 이런 모닝 루틴 하나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성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와 개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선하고 덕 있는 인격을 기르는 것은 스토아 철학의 필수 요소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다. p 158


본질적으로 자기 성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지혜, 즉 인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상과 가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사상과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p 159


나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자기 성찰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학파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했기에 자기 성찰은 스토아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동시에 지혜도 키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독서다. p 161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살아있다는 것이,

숨쉬고, 생각하고, 즐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특권인지 생각하라.

아우렐리우스


이 외에도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챕터가 있었으니, 바로 격렬해진 감정 다스리는 법이다. 격렬한 감정이라고 하면 분노, 우울, 슬픔 여러 감정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역시 ‘분노’가 아닐까? 최근 몇년간 사회면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분노’ 조절을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정말 비일비재했으니까.


스토아 철학에서는 격렬한 감정이 일어났을 때, 이를 억누르지 말라고 한다. 어떤 감정이든 억압하게 되면, 반작용으로 인해 더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런 해결책을 내놓았다.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그 기미를 빠르게 포착하라는 것이다. 포착했다면, 그 감정에 집중하지 않고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면 된다. 아래 로마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사례처럼.


물론 이렇게 주의를 분산하는게 근본적인 대처 방법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감정 조절이 가능해졌다면, 그 후에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내면의 감정에 집중해야, 격렬한 감정을 일으킨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는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아테노도루스는 황제에게 분노를 다스리는 비법을 전수했는데, 화가 나면 일단 알파벳을 거꾸로 외운 다음에 반응하라고 했다. 그야말로 사건과 반응 사이에 쉼표를 찍는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p 228


어려울거라 생각했던 철학은,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오히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일부는 이미 내 삶에 녹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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