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2 : 반동의 시대 - 진실을 밝혀내는 박종인의 역사 전쟁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2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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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에 이어 2권 리뷰 시작!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역사책은 수험생들에겐 권장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시험을 합격하고 난 후에는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왜? 시험공부 중에 이 책을 읽으면 교과서와 모순된 사실에 혼란스러운게 첫번째. 두번째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우리 근대사가 전부가 아닌게 두번째. 분명 교과서에 실린 근대사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사실은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점을 수험자들은 모르기에 이 역사책은 절대적으로 모든 시험이 끝나고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컨데 ‘A가 B해서 C를 했다’라는 사실이 있다고 하자. ‘A가 C를 했다’는 말은 듣기가 좋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보기에 좋지 않은 ‘B를 해서’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우리 국사 교과서 특징이 나타난다. 보기 좋지 않은 ‘B를 해서’를 삭제하고, 바로 ‘A가 C했다’라는 문장으로 수정하는 것. B를 삭제하긴 했지만, 여튼 ‘A가 C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니까.


자, 이제 본격적으로 교과서가 은폐한 우리 근대사를 살펴보자. 2권은 동학농민전쟁부터 해방이 된 1945년까지다. 




만국박람회가 공식 개막하던 바로 그날, 조선에서는 복잡한 이력을 가진 공무원 하나가 전라도 고부군수로 임명됩니다. 이 하찮은 지방 관리는 이후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신임 군수 이름은 ‘조병갑’ 입니다. 5년 뒤 조선팔도를 뒤흔든 동학 농민 전쟁의 불씨가 된 사람입니다. 조병갑은 훗날 영의정이 된 조두순의 서조카입니다. p 027


부정부패 탐관오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 바로 조두순이 아닐까? 물론 그 시대 양반네들 대다수가 부정부패로 찌들어있었기에, 조두순보다 더한 인간도 분명 많았다. 조두순 이전에 세도정치하던 양반네들이 그랬고, 조병갑 이후에는 여흥민씨들이 그랬으니까. 그렇게나 탐관오리가 많았음에도, 유독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조병갑의 학정이 동학 농민 전쟁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국사책에는 없으나, 사실인 이야기 하나 더. 못살겠다 들고 일어난 백성들과 달리 고종은 끊임없이 조병갑을 감싸며, 조병갑을 최고중의 최고 수령이라 극찬했다. 왜?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조대비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가능한거였으며, 따라서 풍양조씨 일가는 고종의 (새로운) 외가였다. 세도정치를 끊어낼줄 알았던 고종시대는 놀랍게도 앞서 세도정치의 세력이었던 풍양 조씨와, 고종의 처가댁인 여흥 민씨 세력이 부정부패라는 말 조차도 그들에겐 먼지가 될 정도로 탐학과 비리, 가렴주구에 점철된 시대였다. 


조병갑을 끊임없이 감싸던 고종. 동학을 역당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처단하고자 청나라 군사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청나라군이 조선땅에 들어온 이유다. 청군이 조선땅에 들어오니,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조선 땅에 들어왔다. 동학은 당연하게도 섬멸되었고, 남은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조선을 니가갖니 내가갖니 하는 이유였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게된다. 


동학농민전쟁을 시작으로 조선의 식민지화까지. 조병갑이 바로 그 시작점에 위치한, 그래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거기다! 국사책에서 배운 동학 농민 전쟁의 발단은 분명 조병갑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에 제정된 동학 특별법에선 그를 가해자 신분에서 제외시켰다. 근대사 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 조병갑이 중요한 이유다. 따라서 특별법에 따르면, 조병갑 학정에 분노하여 처음 들고 일어난 고부봉기 참여자는 동학군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2020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조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를 말한다.”


1894년 2월 고부관아를 습격해 조병갑이 만든 만석보를 부순 첫번째 거병은 ‘동학농민전쟁(혹은 혁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 조병갑 또한 동학 농민 전쟁 가해자 명단에서 제외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관계가 있으니, 입을 다물겠습니다. p 036




고종은 전제군주권을 제한하려는 일본의 개혁안(갑오개혁안)을 끊임없이 반대하다가, 일본군이 철수한다고 하니 돌연 개혁안을 받아들이며 일본군 철수를 반대한다. 국사책에서 배우던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군이 거부하고 되려 경복궁을 점거하여 고종을 협박하며 친일정권을 세웠다’ 등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왜? 국사책에 실린 내용도 분명 사실이지만, 중간 중간에 지워진 사실들 때문이다. 고종이 부도덕하고 능력없는 지도자로 보이는 사실들을 생략하고, 남은 사실들로만 끼워맞추다보니 발생한 현상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 역사인지.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나라와 일본은 이른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1조의 내용은 이렇다. ‘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를 확인한다’. 공식적으로 청나라는 조선에서 손을 뗐으며,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한다.



동학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궤멸되고 청일전쟁 전선도 대륙으로 넘어가고 일본 승리가 확실시되던 그 겨울,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공사에게 “남아서 민란을 진압해 달라”며 소매를 붙잡고 있는 어느 유력인사의 육성입니다. 공사 이노우에는 며칠 줄다리기 끝에 이 요청을 수용합니다. 그 어느 교과서에서도 이 발언과 발언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일본군은 철수하지 말라’고 요청한 이 사람은 ‘조선국 국왕 고종’ 입니다. p 088



일본이 어디 조선이 예뻐서 자기네 병사를 희생했겠습니까. 더 이상 1876년 수신사 김기수에게 함께 근대화를 하자고 권했던 일본이 아닙니다. 여관방에 앉아 있으려는 김기수를 끌고 나가 견학을 시키며 “함께 나아가는 게 소망”이라고 역정 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없습니다. 1894년 12월 4일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고종을 ‘협박’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협박이 성공한 뒤 본국에 ‘임무 완수’ 보고서를 보냅니다. p 097



청이 조선에 손을 떼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식민지화 첫삽을 뜨게 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던 그 해변가. 그 해변에는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기념비 이름은 ‘조선통신사 상륙엄지지’. 선진국인 조선 사절단이 세련된 학문과 예술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고대에는 도래인이, 중세에는 통신사가 일본 땅에 수많은 선진문물을 전해주었는데, 그 관계가 이렇게 역전될 수가 있다니. 이게 오로지 침략한 일본 탓이라고 하기엔, 조선의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본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서양의 문물을 습득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지만 이를 스스로 날렸고, 날릴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명나라에 사대하며, 끊임없이 쇄국으로 치달았던 조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할 수 있었음에도 이 역시 날리고 쇄국에 박차를 가했던 조선. 쇄국을 했으면 자국민을 위한 정치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백성들은 굶어죽어도 본체만체 지식탐구조차 못하게 했던 조선. 동시대 바다건너 유럽에선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과 너무 대조되지 않은가.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


갑오개혁정부가 내놓은 200여 가지 개혁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신분제가 부활하고 문무 차별이 부활하고 연좌제가 부활하고 과부가 다시 평생을 수절해야하고 노비가 주인집으로 돌아와야하고 과거가 부활하는 끔찍한 세상이 돌아온 겁니다. 물론 이 같은 선언이 이 모든 구악의 실질적 부활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동력을 잃은 갑오개혁정부로부터 고종에게 역류하기 시작합니다. p 102



일본군을 붙잡기 위해 승낙했던 군주권을 제한하는 갑오개혁안. 일본군 잔류가 결정되었으니, 고종은 다시 군주권을 찾고자 한다. 왜? 고종은 언제나 왕인 본인만을 생각했던 사람이기에. 그리고는 대사면령을 내린다. 겨우 겨우 잡아들였던 민영휘, 민영주 등 여흥민씨 척족과, 동학농민전쟁의 근원인 조병갑을 포함한 풍양 조씨들.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그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측근으로 앉혔다. 예컨데 그 조병갑! 조병갑은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고종은 끊임없이 본인 안위만을 위한 정치를 한다. 그 중 고종의 이기심이 똘똘 담겨있는 아주 적은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이것만 읽어도 속에 분노가 들끓지만, 슬프게도 이는 발톱의 때만한 분량일 뿐이다. 이 이후의 내용은 부디 이 책을 읽어보시길. 



아관파천을 포함해 고종은 1907년 황제 퇴위까지 모두 일곱 차례 외국 공관으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미관파런과 영관파천 미수 각 1회,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직후 성공한 아관파천 1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미관파천 미수 1회, 1904년 러일전쟁 직전 미관파천 미수 1회화 1905년 러일전쟁 도중 미관파천과 불관파런 미수 각 1회, 도합 4개국 7회. 국가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마다 고종은 외국에 피난처를 의뢰합니다. 아관파천은 그 ‘7관 파천’ 가운데 유일한 성공 케이스입니다. 이를 ‘훗날을 도모한 망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관 1년 동안 팔려나각 수많은 국가 이권사업과, 도주 생활 청산 후 고종이 한 일들을 보면 ‘훗날 도모’ 같은 비전은 보이지 ㅇ낳습니다. 그저 그가 즐겨 쓰는 ‘이권 판매 조건부 권력 유지’ 거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p 115



1885년 묄렌도르프를 시켜서 러시아 보호국을 요청했던 그 짓을 또 합니다. 그리고 민영환은 ‘최대한 빨리 귀국해 보고해야 한다’며 즉답을 요구합니다. 개인 민영환이 아니라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민영환이 내놓은 조선정부 공식 요청입니다. 500년 대중 사대에 찌든 나라가 근대라는 격랑을 맞아 러시아로 사대 본국을 바꾸려고 합니다. 관모를 고집하며 대관식 참석을 거부하고 사요의 장인 식사 자리를 거부한 전권공사가, 곧바로 황제와 대신에게 보호령 본국이 돼달라고 거듭 요청합니다. p 123



민영환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던 4월 22일 고종은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뤈을 허용합니다. 민영환이 귀국길에 들른 연해주에서 조선 동포들을 만나고 있던 9월 9일 고종은 연해주 상인 보리스 브리네르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가합니다. 숱하게 판매된 이권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 보리스 브리네르는 러시아계 미국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입니다.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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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생활백서, 어두운 숲을 지나는 방법 폐교생활백서
로서하 지음 / 드루이드아일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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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폐교생활백서 출간! 예약 주문하고, 책을 받고 읽는 과정에서 여러번의 이슈가 있었다. 예컨데 폐교생활백서는 프로개님, 지박령님 각각의 시선으로 쓴 두 권이 세트인데, 서점 실수로 지박령님 책만 2권 받았다던가 하는 첫 번째 이슈. 이스터 에그 찾는답시고 하루동안 에세이를 1n차례 여러방법으로 무한 정독했다는 두번째 이슈. 하지만 결국 스스로 이스터 에그를 못찾고, 프로개님 힌트를 보고나서야 찾고나서 몰려드는 허무감이 세번째 이슈. 


첫번째야 어쩔수 없지만, 두번째는 내 스스로 이토록 추리력이 없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고, 세번째는 정말 프로개님을 원망...ㅎㅏ..ㄴ. 아니 진짜!! 이건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보는 사람은 절대 찾을 수 없는 이스터에그인데?! 내 책은 늘 새책이었는데, 이스터에그 때문에 헌책이 되버렸다. 보고있어요 프로개님^_T? 

이스터 에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에세이 자체를 곱씹고 또 곱씹을 정도로 마음이 몰캉몰캉해졌던 지박령님 글이었는데! 정말 순수하게 공감하며, 나를 이입해가며 읽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이스터에그 존재를 잊고, 짧은 시간동안 있었던 이슈들도 잊고, 폐교생활백서를 처음 만났다고 나 자신을 속이고(....) 다시 읽기로 했다. 

내 마음을 몰캉몰캉하게 만든 지박령님의 힐링 에세이를..!





안식년이 주어진 프로개, 프리랜서였던 지박령. 식물들 사랑하면서도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프로개와, 프로개가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던 지박령. 그런 그들의 행보는 결국 폐교 생활로 이어졌다. 누가 봐도 불편함이 예견된 폐교생활. 

마트나 병원, 카페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려면 차타고 기본 30km는 나가야 하는 불편함. 행여나 생필품이 떨어지면, 남들처럼 쿠ㅍ 로켓배송을 시키지 못하고, 차를 타고 30km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곳. 심지어 생활 폐기물 같은 일반적인 쓰레기 처리도 어려울 뿐더러, 치안도 좋지 않은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과거로 돌아가도 망설임없이 폐교 생활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아파트에 살 때도 하늘은 있었어요. 작가가 되기 전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도 내 머리 위에는 하늘이 있었죠. 어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에도 큰 심상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하늘을 마주 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폐교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에요. 굉장히 불편합니다. 하지만 그 불편한 5년은 내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었어요. 그리고 나는 오후 2시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지금의 내가 좋습니다. p 032


보통 불편함을 대하는 자세는 두 가지로 나뉜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편리한 생활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불편함을 겪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생활 속 편리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불편함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 프로개와 지박령은 후자에 속했다. 그렇게 불편함을 감수하고, 소소한 행복을 주는 현실에 감사하며 그들만의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폐교생활을 수호하고(?) 챙김받고(??) 응원하던 존재들(!). 사방신과 수많은 식물들, 그리고 뒤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알았을까? 자신들의 삶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프로개 블로그에서 보던 사방신들! 책 속에서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평균 수명이 짧은 가재는 이미 용궁으로 가버렸다지만, 남은 사방신 친구들은 아직도 폐교를 수호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식물들. 이들이 폐교생활을 하려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한게, 바로 이 식물들이다. 음, 정확히는 수많은 식물을 가지고 오만가지 실험을 해보고자 한 프로개의 도전정신이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러고 보니 폐교에서 식물이 가장 많았을 때가 화분이 5천 개 가까이 되었던 때라고 한다. 와, 지박령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등짝 스매싱이 뭐야! 내 가족이었으면 날 쫓아냈을지도 모르는 스케일이다. 화분 하나 키우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닌데, 그 화분이 5천개 가까이. 심지어 같은 식물이어도 A는 이렇게 키우고, B는 저렇게 키우며 실험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쯤되니 식물 장인, 드루이드 프로개보다 그런 프로개를 옆에서 지켜보고 돌본(?) 지박령이야 말로 진짜 드루이드가 아닐까 싶다. 



하늘을 강조했지만, 이곳에는 초록 또한 가득합니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초록과 남편이 키우는 초록이죠. p 083

바람이 불어 포르르 흔들리며 햇살에 반짝이는 폴리안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p 088

막 수확한 깻잎의 향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아세요? 한 말만 먹어도 입안에 가득 퍼지는 딸기 맛은 어떻고요. p 172

이곳에는 내가 심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다람쥐와 바람이 씨앗을 부지런히 다르거든요. 옮겨진 씨앗들이 피워낸 꽃은 예상치 못한 순간 기쁨을 주는 것 같아요. p 130




종종 “네가 그렇게 사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살지 않으니까요. 또 모든 사람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 역시 압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 없고, 모두가 내가 쓴 글을 재미있게 읽지 않는 것처럼이요. p 140




폐교로 이사 오기 이전에는 날 전혀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단지 자연 속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변할 수 있냐고요? 자연보다는 거리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모든 것들이 멀어졌잖아요. 다른 가족도, 친구들도, 도시도. 한 발 떨어져서 가만히 바라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요. p 150


나를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택은 굳이 거창할 게 없어요. 더 나은 걸 고르면 되니까요. 당장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그렇게 조금씩 더 좋은 걸 골라 나가면 되는거더라고요. 나와 친해지는 건 그래서 중요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기쁘고, 어떻게 하면 슬프고, 어떤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지를 알아야 나를 잘 돌볼 수 있으니까요. p 178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어두운 숲을 지나게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숲의 깊이와 어두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숲을 피해갈 수는 없어요. 그런데 내 숲은 유독 크고 울창해 보였어요. 어둡고 울창한 숲.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숲. 빛조차 들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런 숲이었죠. 하지만 불혹을 넘어선 지금은 알고 있어요. 어두운 숲 자체가 내 인생이라는 것을요. p 177



누구나 어두운 숲을 지나게 된다. 숲의 끝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언제고 또 다시 마주하게 될 어두운 숲. 그 숲 자체가 내 인생이라는 말에 지극히 공감했다. 나 역시 3n년을 살아오면서 어두운 숲을 수차례 헤쳐나왔기에. 더이상 숲에서 헤매지 않으리라!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시 숲 한 가운데 들어가있곤 했다. 


과거에는 수많은 이유로 어두운 숲에 빠져 헤매는게 너무 고단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더이상 숲에서 헤매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숲에서 헤매는 과정이 썩 나쁘지많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막연하게 날 힘들게 한 어두웠던 숲이, 사실은 내가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내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해주는 숲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두렵지 않다. 언제 어느순간에 힘에 부쳐 쓰러지도라도, 나만의 숲은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려줄테니까.



그리고 프로개의 연애 편지는...... 아아.... 보면 안될 혈육의 연애사를 본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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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껏 살고 있습니다 - 나만의 취향으로 가꾸는 작은 공간
지은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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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 ‘취향’ 뜻을 찾아보면 이렇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취향’의 뜻을 알았으니 이제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바로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왜? 자신의 취향을 바로 설명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본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는 뜻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취향을 바로 대답한다. 그 누군가는 연예인, 가족, 친구 등 모두다.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바로 대답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잘 모르는 모순을 안고 있다. 타인에게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무관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에세이 『취향껏 살고 있습니다』를 추천하고 싶다. 


취향이 확고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 ‘취향’ 덕분에 금방 회복한다. 위에서도 말했듯 취향은 본인이 하고 싶은 무언가(또는 좋아하는) 이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하다보면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취향이 있다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좋다는 이야기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취향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나만의 시간을 얼마 보내지도 못하고 잠든다는 게 억울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오기를 부리며 매일 늦게까지 시답잖은 일로 시간을 보내다 잠들었고, 아침이면 피곤해서 오늘은 진짜 진짜 일찍 잘 거라고 울먹이며 다짐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점점 흐려지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자기 일에 불평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p 026


차오르는 감정을 다 쏟아 내고 싶은 날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일기 앱을 연다. 그 순간만큼은 마음의 소리를 뭉뚱그리지 않고 직시하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내 마음을 마주하면 감당하기 힘들어서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다 쓰고 나면 마음이 정리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되기에 계속 썼다. 하루는 마음이 울적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문득 내가 ‘쓰는 사람’이라는 게 떠올랐다. 쓰면서 풀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내 머릿속 생각을 씀으로써 나와 떼어 놓을 수 있다는 건 나만의 피난처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p 047


현재 ‘취향껏 살고 있다’는 저자는 처음부터 취향이 확고했을까? 아니다. 저자도 그랬다.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훌훌 털어내지 못했다.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뭘 어떻게 해야 내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지 몰랐던거다. 그래서 주저 앉았고, 치열하게 고민해고, 찾아냈다.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힘든 상황에서도 헤쳐나갈 수 있는지를.


‘이 정도면 괜찮다’와 ‘여기라서 행복하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나의 돌파구가 이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취향껏 살고 있습니다. p 112


저자가 찾아낸 자신의 취향은, 본인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을 바꿔나가는 것. 한마디로 살고 있는 집 인테리어다. 마음속 여유가 없을 때마다,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저자는 자신이 사는 곳을 조금씩 꾸미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인테리어! 저자는 인테리어를 하며 안정을 찾았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에세이 곳곳에 멋진 사진으로 실려있다. 흡사 ‘오늘의 Home’에서나 볼법한 멋진 인테리어 사진들. 저렇게 멋진 집으로 꾸며낼 수 있었던 건, 저자가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나는 내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과거에는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 ‘취향’을 물어보면 즉답할 정도로, 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비교적 빠르게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형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요즘은 그냥 안으로 눌러담고 있다. 언젠간 이마저도 무뎌질 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고요하게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잠시 할 일로부터 떨어져 말랑해질 시간이 꼭 필요했다. 멍하니 있는 시간에는 과거의 일에 집착하지도, 오지 않는 미래를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현재에 머물렀다. (…) 한때는 그런줄 모르고 스스로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수없이 자책했다.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해서 잠시 멍하니 있었을 뿐이라는 걸 알게된 지금은 오히려 나에게 시간을 쥐여 주려고 노력한다. p 153


아이들은 세상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처음 경험하는 것투성이라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배워 나간다. 누구에게나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지만 그 때의 마음을 쉽게 잊곤 한다. 여러 번 해 본일은 쉽게 지루해지기 마련이고, 현실의 중압감에 시달려 어린 시절에 무엇을 좋아했는 지 떠올릴 겨를조차 없다. 나 역시 세상이 놀이터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거 간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채, 바쁘다는 걸 위안 삼아 살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무감각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세상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마음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p 170




에세이 『취향껏 살고 있습니다』, 하루가 견디기 버거워진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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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 : 몰락의 시대 - 진실을 밝혀내는 박종인의 역사 전쟁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 1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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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의 역사책이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책 오자마자 바로 읽고 리뷰쓰고 그랬겠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한 워킹맘이다보니 책 읽는 것도 한 나절, 포스팅도 한 나절이다. 일단 1권 다 읽었으므로! 1권만 빠르게 리뷰하자면, 아니 근데 이 책을 빠르게 리뷰하는게 맞나 싶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곱씹어서 읽어야 하는 역사책인데! 대신 교과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공무원 시험을 앞둔 수험자들은 당장 이 책을 읽으면 안된다. 왜? 이 책은 기자님 말마따나 불온한 역사서니까.



이 책 제목은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이다. 부제는 ‘이거 보고 공부하면 시험 다 떨어지는’ 근대사 강좌다. 그런데 대학 합격, 공무원 수험 시험에 합격한 다음에는 꼭 읽어라. 그래야 똑바른 대학생이 되고 나라를 생각하는 경찰과 공무원으로 살 수 있다. 그때는 시험에 붙으려고 외웠던 교과서 속 역사는 다 잊어버려도 좋다. 아니 잊어버려라.p 005 서문 中




서문에서 훅 들어온 경고! 당장 대학이나 공무원 시험을 앞둔 사람들은 절대 읽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혹자는 역사를 왜곡했나?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겠으나, 대답은 NO다. 오히려 이 역사책은 왜곡과는 동 떨어진, 진실만은 이야기하는 책이니까. 고로 수험생들이 보는 교과서에 있는 진실도 분명히 이 책 속에 있다. 다만, 교과서에 없는 진실‘도’ 담겨 있다는게 문제다. 교과서에서 삭제된 역사,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 아니? 왜곡도 아니고 분명한 사실인데 왜 교과서에는 없다는 말인가? 아래 내용을 보자.​




1.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있는데 ‘최초의 국한문 혼용 신문을 만든 사람은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라는 말은 없다.

2. ‘문예부흥을 일으킨 위대한 군주 정조’라고 적혀 있는데, 그 정조라는 인물이 ‘성리학 이외 학문은 철저하게 탄압하고 사상 검열을 한 지식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없다.

3. 청일전쟁 때 “철수하겠다”는 일본군을 고종이 소매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는 사실은 적혀있지 않다.

4. ‘명성왕후를 간악한 일본인이 잔혹하게 죽였다’는 있고 ‘동시대 많은 조선인들이 민비 암사를 시도했다’는 없다.

5. ‘고종이 헤이그밀사를 파견했다’는 있는데 이보다 10년 전 고종이 민영환을 러시아에 보내서 ‘조선은 러시아 보호국이 되기를 원한다’고 애원한 사실은 없다.

6. ‘을사조약을 고종이 결사반대했다’라고 적혀 있는데, ‘을사조약 직전 고종이 일본 공사 하야시로부터 뇌물 수수’라는 사실은 없다.

7. ‘고종이 조약체결을 두고 이토 히로부미와 담판을 벌였다’라고는 적혀 있는데, 정작 조약 체결 뒤 ‘고종이 “절대 돌아가지 말고 나를 위해 일해달라”고 이토 히로부미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 사실’은 적혀 있지 않다.




위 문장들은 전부 진실이다. 다만 각 문장의 앞 내용은 국사책에서 많이 본 내용이고, 뒷 내용은 초면일 것이다. 왜? 우리는 언제나 모든 문장의 앞 내용만 배웠기 때문이다. 왜? 문장의 앞 내용만 공부하면 한글을 창제하고 문예를 부흥했던 찬란한 조선을 간악무도한 일본이 침략했다라는 역사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문장의 뒷 내용까지 같이 공부하면 배움이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이 무자비하게 쳐들어오며 시작된 전쟁이다.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사실이 있다. 임란이 일어나기 전 명종때 조선에 이미 조총이 들어왔다. 심지어 대마도인은 원하면 조총기술을 전수하겠다고 했다. 거기다 대마도와 류큐에서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올것 같다는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백년 평화에 찌든 조선과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 결과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 하지만 우리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이 쳐들어왔다는 것만 배웠을 뿐, 뒷 내용은 배우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은 오로지 간악한 일본인 탓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뒷 내용까지 배우게 되면 여기에 무능력한 조선 위정자들의 책임도 들어간다. 찬란한 선비의 나라 조선에 오점이 생기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많다. 조선은 사실 세계와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두번째 하멜이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세 번째 천주교(서학)이 퍼졌을 때, 네번째 제너럴 셔먼호가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조선은 세계와 교류하고, 자발적인 근대화를 할 수 있는 여러차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는 매번 조선의 왕과 양반들이 반기지 않았다. 반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라 문을 꽁꽁 걸어 잠궜다. 



만약 이 네 번의 기회 중 한번이라도 조선의 왕이, 양반들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면, 백성들을 생각했다면, 우리 근대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도 없었을 것이며, 당연히 이념논쟁과 한국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슬픈 가정이지만. 



이제 『사라진 근대사 100장면1 - 몰락의 시대』를 살펴보자. 1권은 영정조 시대부터 고종시대까지를 다룬다. 리뷰에선 조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영조, 정조시대. 정말 ‘르네상스’ 였는지, 그 속살만 살짝 벗겨보고자 한다.




숙종이 망하고 사라진 명나라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숙종의 아들 영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중원 문화가 오랑캐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중원을 조선이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 날이 1749년 5월 9일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 계승국, 소위 황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1776년 4월 22일, 영조가 죽자 정조가 즉위했다. 어떻게? 청나라 황제에게 허가 칙령을 받아서.



술을 금하고 사치를 금함으로써 영조시대 50년은 마진을 남길 상품 생산이 금지되고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고급 생산기술 개발 작업도 정지돼버렸습니다. 영조는 왕실 비단 생산을 금지시킵니다. 금실로 수놓은 비단 옷감도 금지됐습니다. 왕실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기계 문직기를 아예 폐기해버립니다. 무늬비단 제조 기술은 조선이 망할 때 까지 복원되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화려한 가체를 버리고 족두리를 써야했습니다. 가체 금지령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조치였는지 결국 7년 뒤에 해제합니다. (…) 값비싼 청화안료를 쓰는 청화백자를 금지하고 질 낮은 철화백자만 생산하라고 명합니다. 금주령도 강화합니다. 앞으로 제사상에 술대신 예주를 올리라 합니다. 예주는 식혜입니다. (…) 영조는 국정지표 이행 여부를 점검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인 날이면 신하들과 차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차 이름은 ‘송절차’ 입니다. 그런데 이 차를 마시면 영조는 늘 취해버렸다고 합니다. 이름만 차 였고 실제로는 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p 028~029



각종 산업을 막고, 경제행위조차 막아버린 결과 조선은 가난해졌다. 얼마나 가난해졌는가? 어사 박문수가 청나라 밀수 어선 단속을 위한 군함을 조성한다고 하니 돈 없다고 짤렸다. 가까웠던 과거에 호란이 있었고,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면 왜란이 있었던 나라에서 말이다. 가난해지기만 했느냐? 아니다. 지성도 없었다. 조선은 서점이 없었다.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 했는데, 책을 파는 가게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책을 구했는가? ‘책쾌’라는 책장사치를 통해서 구했다. 영조는 책쾌 금지령을 내렸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새로운 지식까지 얻을 수 없게 막아버렸다. 



비단 영조만 그랬는가? 아니다. 정조도 그랬다. 아니, 정조는 영조와 조금 달랐다. 새로운 지식을 들여오돼, 정조 본인이 독점했다. 독점한 지식을 꽁꽁 숨겼다가, 필요한 범위에 한해서 신하들에게 찔끔찔끔 알려주었다. 



정조는 4품 이하 당하관에게만 호박 갓끈을 일체 금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이라는 공동체에서 사치 풍조가 만연했다고 하는 계층은 ‘신분이 낮은’ 계층에 한정돼 있습니다. 당상고나 이상에게는 이 ‘사치’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그런데 여자들은 사치를 명목으로 한 겹 더 심한 차별과 규제에 얽매입니다. 재질이 뭐가 됐든 남자들은 갓끈을 맬 권리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가체가 아예 금지되고, 아무런 장식 없이 허연 족두리만으로 미모를 자랑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p 071~072



지도자가 권력과 지식을 독점했다. 백성에게는 사치를 규제하다는 미명하에 모든 경제활동을 막아버렸다. 여기서 함정이 있다면, 영조의 금주령에는 본인은 제외였고, 정조가 말하는 사치 규제는 신분이 낮은 계층과 조선 여자 전원에게만 해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조선 르네상스의 속살이다. 



이렇게 조선을 빈국이 되어가고 있을 때, 바다건너 영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국에선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하여 관성, 가속도, 작용과 반작용의 원칙을 발견했다. 영국은 과학이 발전하고 있었고, 과학이 발전하자 자연스레 상업도 발전하며 결국엔 증기기관차를 만들어냈다. 그 옆나라 프랑스는 어땠는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시민 동의 없는 세금 징수는 불가하다며,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조선에서는 생각치도 못할 일이다. 왜? 출판, 인쇄, 독서의 자유가 보장된 유럽과 달리 조선에선 그 모든게 불법이었으니까. 어쩌다 책쾌에게 책을 사서 읽다가 걸리면 바로 사형이었으므로.



8년 전 《북학의》에 부국강병책을 쏟아부었던 검서관 박제가가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박제가가 올린 병오소회는 이러합니다.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이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인하여 망한다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하여 쇠퇴할 것이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기계가 없다. 여인들은 일이 끊겼다.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시키지 않은 말을 타고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진흙더미 집에서 지내니 온갖 제조업이 끊겼다. ‘세상이 나빠져서 백성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p 062 



정조가 아끼던(?) 북학파에선 여러 개혁안을 올렸다. 위 내용은 북학파로 유명한 박제가가 쓴 개혁안 중 일부다. 북학파가 올린 개혁안은 대체로 중국과 통상하고, 서양인에게 기술을 받고, 상업을 장려하자 였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개혁안들을 모두 거절했다. 외려 북학파와 다른 개혁안들을 채택했다. 중국인과 왕래금지, 이단 서적 수입 금지 같은 폐쇄적인 개혁안을. 그와 함께 당시 들어오던 서학(천주교)를 핍박&학살하고, 성리학 외의 학문은 모조리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이른바 조선판 분서갱유, 문체반정이다.



조선의 르네상스의 속살이다. 슬프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조가 직접 선택한 며느리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다. 심지어 정조는 김조순을 순조 옆에 찰싹 붙여놓고 죽었다. 조선 백성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안좋아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더 안좋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김조순을 필두로 한 세도정치 시작이다. 백성들이 죽지 못해 살던 세도정치가 끝났다 싶었더니, 이번엔 여흥 민씨들이 세도정치 때보다 더한 패악질을 시작한다. 서글프게도 이게 바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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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셀프트래블 - 기타큐슈·벳푸·유후인,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김수정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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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책 셀프트래블 시리즈 신간이 나왔다. 이번엔 일본 후쿠오카 편! 개인적으로 일본 여행을 즐겨했던 지라, 신간이 너무 반갑다. 왜? 지금은 육아로 인해 일본여행을 못.......하^_T. 그래도 내년 이맘땐 우리 뿡뿡이와 함께 일본에 있을거니까^^ 그걸 목표로 여행적금도 들어놨고!!


뿡뿡이와 일본 여행을 가게 된다면 후쿠오카 or 오키나와를 생각중이나, 아무래도 가본 곳이 더 나을 것 같아서 후쿠오카로 기울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후쿠오카 여행책이 내 손에 딱! 이거슨 필시 후쿠오카 여행을 가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내가 후쿠오카 여행을 갔던 시기는 2019년 4월이었다. 동행자는 신랑과 친정부모님. 그렇다. 부모님과 함께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 난 워낙 부모님 모시고 여행을 자주 다녔었고, 부모님 모시고 일본 여행도 처음이 아니었기에 여행은 내내 즐거웠다는 스아실! 무엇보다 난 파워 계획형에, 융통성 오조오억개에다가, 관관통역사(일본어) 면허를 소지한 일본 여행에 최적화된 사람이라는 것!



어머! 여긴 꼭 가야 해 !!
 
 
▶ 후쿠오카 대표 명소 베스트 8
1. 하카타역: 유후인, 벳푸, 나가사키 등 규슈 곳곳으로 향하는 다양한 열차가 오가는 역, 하지만 단순한 기차역이라기보단 대형 쇼핑몰과 백화점이 결합된 복합쇼핑센터다.
2. 커낼시티 하카타: 여행 목적이 쇼핑인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방문해봐야 할 필수 코스. 건물 중앙엔 180m의 인공운하가 만들어져 있으며 중앙 무대에선 다양한 문화이벤트가 열린다.
3. 텐진: 후쿠오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다. 후쿠오카의 최신 트렌드가 궁금하다면 텐진역 주변의 상점을 둘러보자.
4. 나카스: 해가 지기 시작하면 나카스강을 따라 알록달록한 포장마차 ‘야타이’가 하나둘 나타난다.
5. 오호리 공원: 후우오카의 오아시스. 거대한 호수를 중심으로 일본정원과 후쿠오카 성터를 산책할 수 있다.
6. 후쿠오카 타워: 해변가에 자리잡은 일본 타워 중 최고 높이를 자랑한다.
7. 우미노나카미치 해변공원: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는 자연친화적 공원이다.
8. 다자이후: 1,300년 전부터 규슈를 관할하던 관청이 있던 곳으로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인 ‘다자이후 텐만구’, 일본 4대 박물관으로 알려진 ‘규슈 국립박물관’,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고묘젠지’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 후쿠오카 근교 명소 베스트 5 
1. 벳푸 지옥온천: 뜨거운 증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무시무시한 지옥을 닮았다고 해서 지옥온천이라 불린다. 에메랄드빛 바다 같기도 하고 새빨간 핏물 같기도 한 일곱 가지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온천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다.
2. 모지코 레트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JR 모지코역. 아인슈타인 박사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숙박했다는 모지 미츠이 클럽. 오렌지색 팔각탑이 아름다운 오사카 상선 건물 등 메이지시대부터 쇼와시대까지 번성했던 모지코의 과거 건물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3. 코구라성: 에도시대 초기 건축물로 1608년에 완공되었다. 성 내부에는 고쿠라성과 기타큐슈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최상층인 5층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고쿠라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따.
4. 하우스텐보스: 커다란 풍차와 색색의 튤립이 가득한 정원까지. 중세 네덜란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일본의 3대 테마파크 중 한 곳이다.
5. 긴린코: 후쿠오카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이동하면 만나게 되는 작은 온천마을 ‘유후인’을 대표하는 명소다. 호수 바닥에서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다.


셀프트래블 후쿠오카에서 말하는 명소는 어지간해선 한 두 군데는 꼭 가보자. 아니 가볼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특히 대표명소는. 왜? 후쿠오카 도심 관광지는 하카타역과 텐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안갈래야 안갈 수가 없게 되어있는 그런 구조랄까? 보통 숙소(호텔)나 쇼핑몰도 하카타, 텐진 주변에 많다보니 더욱 그렇다. 내가갔던 호텔도 텐진에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하카타역 보단 텐진을 추천!! 나카스강, 텐진중앙공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낮에 산책하기 딱 좋고, 밤에는 야타이(포장마차)가 우루루 나타나서 구경하고 현지인 체험하기도 최고다.



이번엔 후쿠오카 먹거리 편! 
후쿠오카! 바로 먹방여행의 성지다. 왜? 돼지 뼈를 진하게 우려내,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맛는 돈코쓰 라멘. 돈코쓰 라멘이 시작된 곳이 바로 후쿠오카다. 그 유명한 이치란 라멘 본점이 바로 이 곳에 있다. 일명 곱창전골(!)인 모츠나베도 후쿠오카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그뿐만인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 후쿠오카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명란젓은, 지금은 일본인 밥도둑 멘타이코가 되었다. 

돈코쓰 라멘, 모츠나베, 멘타이코. 모두 내가 후쿠오카 여행을 갔을 당시 꼭 먹고 말리라! 생각했던 음식들이다. 그리고 전부 먹고왔다♡ 위 세 음식에 더해 호르몬 정식까지! 역시 후쿠오카는 먹방 여행의 성지!!! 



하우스 텐보스
한창 일본 여행을 다니던 n년 동안, 굳이 일본 테마파크를 왜 가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나라 테마파크도 뒤지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음.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알겠다. 가야돼... 외국 여행을 가면 꼭 그나라 테마파크를 가야해... 고로 우리 뿡뿡이와 후쿠오카를 가게되면 나는 무조건!!! 하우스텐보스는 필수다. 숙소도 하우스텐보스 안에 있는 호텔을 이용할거야!!!!!!


중세시대 네덜란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대형 테마파크로 규모나 시설, 만족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의 3대 테마파크로 불리는 곳이다. 파크 사이사이로 로맨틱한 운하가 흐르며 운하를 따라 멋스러운 유럽식 건축물들이 줄을 잇는다. 봄이면 플라워 로드에 튤립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화원이 펼쳐지며 여름엔 파크 곳곳에서 시원한 물 폭탄이 터진다. 가을에는 핼러윈 축제, 겨울엔 크리스마스 축제까지. 매일매일이 새로운,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추천한다. p 054 (시즌별 특별공연, 각종 어트랙션, 어드벤쳐 파크, 크루즈 등)



여기서부턴 내 추억여행이 가미된(?)
후쿠오카 여행 이야기



1. 도심: 하카타, 텐진
후쿠오카 여행 시작은 명실공히 하카타, 텐진 도심여행이다. 내가 다녀온 곳은 (식당 제외)하카타역과 텐진역은 기본으로 찍고 하카타 아사히 맥주공장, 나카스강변(+영빈관), 텐진공원, 스미요시 신사, 라쿠스이엔, 오호리 공원(+후쿠오카 성터) 이다. 그때가 겹벚꽃이 한창이던 시기다보니, 나카스 강변과 텐진공원, 오호리공원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텐진공원에서 자그마한 지역 축제가 열려서, 열씸히 구경하고! 무엇보다. 부모님 동반 여행이었기에 일부러 자연친화적(?)인 곳을 찾아다닌 면도 있다. 

물론 하카타 아사히 맥주공장은 예외ㅋ. 일본을 가면 꼭 그 곳에 있는 맥주공장을 가야하는 그런게(?) 있다보니, 이건 순전히 내 사심이 오백프로 반영되었던 여행지다. 다만 그때는 사전 예약을 해야만 관람가능했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고....?


2. 외곽1: 다자이후, 유후인, 벳푸
렌트카를 이용한 여행이었으면 좋았으련만, 후쿠오카는 처음이었던 나. 신랑과 둘이서 일본을 다닐 때는, 대중교통 이용해서 외곽여행도 자주 했는데 후쿠오카 만큼은 조금 어려웠다. 차마 부모님 모시고 저~~ 멀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자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쿠루쿠루 버스’ 예약이었다. 일종의 당일치기 패키지 상품이랄까? 결과적으로 대 성공이었던!

역사더쿠로서 다자이후는 내가 너무 가보고 싶었던 곳이고, 유후인과 벳푸는 부모님께 꼭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었다. 당시 쿠루쿠루버스 노선에 다자이후, 유후인, 벳푸 세 곳을 하루에 갈 수 있는 노선이 있었던건 나에겐 정말 천운이었던 셈. 

물론 패키지다보니 시간적 제약은 있었다. 예컨데 난 다자이후에서 다자이후 텐만궁 뿐만 아니라, 국립박물관, 미즈키 유적을 꼭 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건 답사를 목적으로 신랑과 둘이 왔을때나 가능한 목적지^_T. 패키지 여행에선 다자이후 텐만쿵이 고작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님과 함께한 여행이었으니까. 

쿠루쿠루 버스가 아니었으면 힘들게 대중교통 이용해야했을 유후인과 벳푸도 편하게 왔으니 얼마나 좋던지. 유후인 긴린코 호수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벳푸 지옥온천 규모에는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내가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온지가 벌써 5년이나 지났다니. 요즘 강산은 5년 마다 한번 씩 변한다던데? 그래서 이 책에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구나!! 새로운걸 보니 더더 후쿠오카 여행을 가고 싶고. 하.... 뿡뿡이 얼른 크자 ㅠㅠㅠ 엄마 손잡고 후쿠오카 가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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