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
히토쓰바시대학교 사회학부 가토 게이키 세미나 지음, 김혜영 옮김, 가토 게이키 감수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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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읽었다. 한일 근현대사를 다루는 인문학책이다. 단순히 한일근현대사를 나열하는게 아니라, 그로 인해 생겨난 갈등과 사회적 문제, 및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한일관계는 지금까지도 여러 문제가 잔존해있기에, 꽤 무게운 주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의 시작점이 근현대사에 기인하며. 이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 세대를 지나 미래 세대애까지 끊임없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아니 집단은 20대 일본 학생들이다. 



이 인문학책 『우리가 모르는건 슬픔이 됩니다』 는 한류를 좋아하는 일본 20대 학생들이, 살면서 배우지 못했던, 혹은 왜곡된 역사 공부로 인해 몰랐던, 자국이 숨겼던 가해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뿐만아니라, 가해국가에서 자라난 자기들을 비롯하여 다른 친구들이 가해 역사를 정확하게 ‘마주’하고 ‘기억’하기 위한 여정이다.

아래는 이 책의 추천사다. 추천사를 쓴 사람이 흥미롭다. 다름아닌 일본 역사왜곡에 맞서는 서경덕 교수다.

여기 멋진 일본 청년들을 소개합니다.
한류를 통해 단지 한국 문화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한일 역사를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 청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 추천사 中




한류를 좋아하는 일본 학생들 마음 속 한켠에는 찜찜함이 남아있다.  이 책은 그 찜찜함을 마주한다. 바로 한일 근현대사. 그들에게 한일 근현대사가 찜찜한 이유는 단 하나다. 이들은 우리와 달리 제대로 된 한일 근현대사를 배우지 못했다. 왜? 2000년 전후로 일본에서 ‘역사 수정주의’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단어만 봤을 땐 그럴듯한 ‘역사 수정주의’. 무엇이 문제일까?


1997년 일본은 고노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에 대해 사과했다. 이와 함께 일본 역사 교과서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등 일본의 가해역사가 기술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극우세력. 그들은 이런 내용들이 패배주의적 관점이라며 역사 수정주의를 내세웠다. 이후 지금까지 일본은 역사 수정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였고, 이로 인해 자국의 가해역사에 대해 올바른 교육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쉽게말하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는 자국의 가해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며, 더 나아가 피해국가 및 피해자들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운동이다.


그들이 가정, 학교에서 배운 일본 근대사는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일본을 제외한 여러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일본 가해역사’를 언급하고 있었다. 한국, 중국처럼 ‘반일’감정이 있는 나라가 아닌, 우방국이자 강대국인 미국을 비롯한 유럽권에서조차도 ‘일본 가해역사’를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국에서는 배워본적 없는, 일본의 가해역사를. 


배워본적 없은 일본 가해역사도 믿을 수 없는데, 내 최애가 소녀상 굿즈를 착용하거나, 일제강점기 시대극등을 출연한다. 심지어 내 최애가 일본 세계유산 등재에 부정적인 의견을 펼쳤을때,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말한다. 이때마다 한류를 좋아한 일본 대학생들은 마음 속 찜찜함과 마주한다. 찜찜함과 마주한 대부분은 일본 전체적 흐름인 ‘역사수정주의’를 따라 눈을 돌렸다. 하지만 몇몇 일본 대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마음 속 찜찜함과 마주하며, 대체 이 찜찜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일본 학생의 관점에서, 자국의 가해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문제가 비단 일본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당장 피해국가인 우리나라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일본 학생들처럼 우리나라에도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어린 학생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다. 그들 역시 마음 한켠에 찜찜함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일본과 달리 일본 가해역사를 직시하고 교육하고 있는데, 대체 왜?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일본 문화(정확히는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만, 난 일본 문화만 좋아하는게 아니라 역사도 좋아했다. 그 덕분에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마음속 찜찜함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내 나라에 대한 역사와, 내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언제나 일본 역사 왜곡에 당당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로 인해 나는 당당하게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다만 당당했다는 것.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은 대체로 한일역사에 눈을 돌렸다. 일본문화를 싫어하는 친구들은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일본 문화를 즐기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이쪽 마음도 알겠고, 저쪽도 마음도 알겠지만 솔직히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양쪽 한일 근현대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는 했으나 딱 그정도까지였으니까.

TMI가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이거다. 이 책을 쓴 일본 학생들이나, 우리나라 학생들 모두는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데 있어서, 한일근현대사에서 기인한 여러 문제점들이 산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생각보다 쉽다. 

한류를 좋아하는 일본 학생들이 찾은 문제 해결 방안은 이 책 『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에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한국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놀랍게도 해결 방안이 일본 과 다르지 않다. 이 책 제목에도 나와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 이 말을 요약해보자. 바로 ‘기억’이다. 기억하는 것이다. 단순히 피해역사를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기억’하고 목소리를 내야한다. 



일본은 ‘관용이 넘치는 상냥하고 친절한 나라’나 ‘문화를 받아들이며 진보해 온,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런 현실에 가담하는 것만은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 그 위화감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일본이 조선을 식민 지배한 시대의 이야기가 나왔다. 강의 중에 소개된 《문서 미나마타 민중사 제5권 식민지는 천국이었다》라는 증언집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안에는 식민지 지배자로서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노골적인 편견과 차별, 폭력 등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도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p 015

까끌까끌한 찜찜함, 나에 대한 실망 그리고 흔들리는 정체성. 과거에 저지른 일은 분명 폭력적이고 잔혹한 지배였는데, 어째서 나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 했을까. 어째서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알면 알수록 발밑이 기우뚱거렸다. 그래도, 그렇기에 더 알고 싶었다. p 016

케이팝 팬이라면 ‘위안부‘ 문제에서 ‘위안부’ 지원 기업의 굿즈를 착용한 한국 아이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에도 유명 케이팝 아이돌 팬이 있는데, 그 케이팝 아이돌이 착용한 ‘위안부’ 지원 굿즈를 제작, 판매하는 기업이 ‘반일’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또 부모님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설명하는 통에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린다고 털어놓은 지인도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는 이미 해결된 과거의 이야기이거나, ‘반일’의 상징으로 치부되고, 분명히 자주 들어봤지만 정작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p 037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1932년부터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까지 일본군이 아시아 각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삼은 제도이다. 보통 ‘위안부’라고 하면 한국인 피해자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텐데, 실제로 많은 ‘위안부’ 피해자가 한반도(대한민국, 북한) 출신이다. (…)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끌려가 ‘위안부’에 동원되었다. 예컨데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일단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업자를 선정한 뒤 업자가 여성들의 빈곤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다’라며 여성을 속이거나 부모에게 돈을 건네고 연행하는 방법을 많이 이용했다. 이것은 명백한 유괴와 인신매매다. 폭력과 협박을 이용한 연행(약취)도 있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업자는 어디까지나 군의 수족으로 움직였을 뿐, 여성을 해외로 이송하는 과정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제도 전체를 운영한 것은 일본군이었다는 사실이다. (…) 강제로 끌려간 ‘위안소’에서 생활은 처참했다. 여성들은 군의 삼엄한 감시하에 ‘위안소’에 갖혔고, ‘위안부’를 그만둘 자유도 군인의 성적 요규를 거부할 자유도 없었다. p 03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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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셀프 트래블 -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맹현정.조원미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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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을 하는 사람 중 많은 이가 스위스의 매력적인 풍광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위스 곳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 있는 유네스코 문화, 자연유산을 전부 합하면 무려 12곳이다. 



1. 장크트 갈렌 수도원: 유네스코 문화유산
2. 뮈스테어 성 요한 베네딕트회 수도원: 유네스코 문화유산
3. 베른 구시가지: 유네스코 문화유산
4. 벨린초나 3개 고성: 유네스코 자연유산
5. 스위스 알프스 융프라우-알레취 빙하-비취호른: 유네스코 자연유산
6. 산 조르시오 산: 유네스코 자연유산
7. 라보 계단식 포도밭: 유네스코 자연유산
8. 알불라, 베르니나 지역의 레티셰 철도: 유네스코 문화유산
9. 스위스 사르도나 지각 표층지역: 유네스코 자연유산
10. 라쇼드퐁, 르 로끌 시계 제조 계획 도시: 유네스코 문화유산
11. 알프스 주변의 선사시대 호상 가옥: 유네스코 문화유산
12. 르 코르뷔지에 건축물: 유네스코 문화유산



스위스의 정확한 국명은 ‘스위스 연방’. 수도는 ‘베른’. 우리나라에서 스위스를 직항으로 갈 경우 13시간, 경유는 15~20시간 걸린다. 시차는 하절기 서머타임을 적용하여 7시간 차이, 동절기는 8시간 차이가 난다. 제일 중요한 언어! 요즘이야 뭐 스마트폰 하나면 통, 번역이 쉽게 되서 상관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회화가 되면 좋으니까. 근데 약간 함정이 있다. 스위스 인접국가가 여러 곳이라 그런지 스위스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4개 국어라고 한다. 어유. 다 어려운 언어다. 역시 내 손안의 작은 번역기, 스마트폰을 사용해야...



알프스 산악지대가 펼쳐져 있는 스위스. 스위스는 알프스 산악 지역에 소를 키운다. 청정한 알프스 산악지역을 노니는 소 젖에서 만들어낸 치즈, 스위스 대표 음식 중 하나란다. ‘스위스’ 먹거리하면 오로지 초콜릿만 떠올랐는데, 초콜릿을 누를 정도로 치즈가 유명할 줄이야! 스위스 대표 음식 역시 알프스 소 젖으로 만든 치즈 요리라고 한다. ‘라클렛’, ‘치즈 퐁뒤’가 스위스 치즈를 이용해 만든 스위스 전통 요리중 하나다. 이 외에도 인접 국가의 영향을 받은 뢰슈티(독일), 브라트부어스트(독일), 필레 드 페르쉐(프랑스) 등이 스위스 전통 음식 중 하나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 스위스 하면, 여전히 초콜릿! 너도 나도 다 아는 린트, 토블론 초콜릿이라던가, 네슬레!!! 역시 나에게 ‘스위스=초콜릿’이다. 언제 먹어도 사랑인 초콜릿 ♡ 거기다! 스위스는 5~9월에 상시 초콜릿 열차를 운행중이란다. 몽트뢰에서 출발해 치즈의 본고장인 그뤼에르를 거쳐 네슬레 까이에 초콜릿 박물관이 있는 브록까지 가는 ‘스위스 초콜릿 열차’. 아... 타보고 싶다.


스위스 여행 시 체크해야할 부분 하나 더! 바로 매 달마다 있는 축제다. 알고보면 스위스는 축제의 도시!

1월 열기구와 스키, 2월 설상 경마, 3월 루체른 카니발 등을 시작으로 매 달마다 여러 축제가 펼쳐진다. 이 중에서도 제일 보고 싶은 축제가 있다면 역시 10월에 열리는 옥토버페스트. 술은 못마시지만, 맥주 축제 특유의 분위기는 좋다. 일본에서 즐겼던 맥주 축제가, 나한테 꽤 좋은 추억을 남겨서 그런가?




스위스, 취리히

거리와 골목을 따라 누비는 보헤미안처럼 사람으로 북적이는 취리히 중앙역을 정신없이 빠져나와 반호프 거리에 이르면 언제나 작은 숨을 한꺼번에 몰았다 큰 숨으로 내뱉곤 했다. 털을 빳빳이 세운 고양이가 주인이 건네는 따뜻한 손길에 단잠을 청하게 되듯, 나에게 취리히는 그런 존재였다. 사인물과 광고판에 눈길을 주며 거리와 골목을 누비도라면 세련된 그들의 ‘타이포그래피’에 스르르 빠져들곤 했다. 이 도시에서 만큼은 더 이상 여행객으로 남기보다 그냥 머물고 있는 공기 그 자체이고 싶었다. p 075



놀랍게도 난 스위스의 수도가 당연히 ‘취리히’라고 생각했다. 스위스 대도시이기도 하고, 국제공항도 취리히에 있으니까. 하지만 수도가 ‘베른’이라니. 하하하. 책으로만 본 취리히지만, 취리히는 내가 생각하는 ‘스위스’와는 사뭇 다르다. 취리히는 약간 현대적인 도시같다고 할까? 그럼에도 여기는 스위스. 아무리 대도시에 현대적인 도시 같다고 해도, 유럽 특유의 역사성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한국과는 달리 오래된 건물들을 보존하는 유럽 특유의 문화성이 반영되었다고 해야하나.

취리히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힐 정도로 삶의 질이 높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높은 소득 수준 때문이라기보다 문화와 환경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까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셀럽들이 이 도시를 즐겨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도시를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어서라니.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 또한 존중해주는 스위스 취리히 시민들의 시민의식을 높게 사고 싶다. p 076



스위스, 루체른

나에게 루체른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고 정겨운 도시이다. 스위스의 중앙에 위치하고 융프라우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 중 한 곳이기에 출장 중 자주 거치게 되었던 덕도 있었겠다. 평온해 보이는 루체른 호수와 ‘친구의 정’이라는 꽃말을 가진 제라늄이 흐드러지게 늘어뜨려진 나무다리 카펠교를 바라보게 된다면, 어떤 여행자라도 나와 같은 감정이 들게 될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루체른의 문턱은 낮지만, 한 번 발을 깊숙이 더디게 된다면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하기까지 한 루체른의 매력에 곧 취하게 될 것이다. p 169


예전에 예능 꽃할배에서 나왔던 ‘루체른’. 본지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속에 콕 박혀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카펠교’다.  루체른 호수 위, 14세기에 만들어진 나무다리. 그것만으로도 역사성이 있고 외견적으로도 충분히 멋진데, 그 다리를 꽃으로 장식했다. 이렇게 멋진 카펠교 옆에 있는 저수탑 ‘바서투름’은 또 어떠한가. 저수탑의 역사성도 있지만, 카펠교와 루체른 호수와 어울려진 그 모습은 루체른의 랜드마크란 바로 이거다! 라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야하나?

루체른만큼 스위스다운 곳이 또 있을까?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깨끗한 도심의 모습과 시내 너머로 보이는 알프스의 명산들, 푸른 초원 그리고 도시를 둘러싼 아름다운 루체른 호수까지. 스위스다운 요소들로 가득한 곳이 바로 루체른이다. p 170


여행책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구성도 알차고 정보도 많지만, 역시나 제일 큰 매력은 요 맵북!!!! 여행 다닐때 여행책 한권 들고다니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게 바로 이 맵북!!!! 정말 칭찬해, 셀프트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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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교사 위광조
꿈몽글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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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법과 제도는 선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학교폭력 처벌 법 또한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졌든지간에, 그 법과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꼭 있다. 이 소설  『학폭교사 위광조』 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불과 몇 년 전만에도 언론에서 ‘학교폭력’ 보도를 접하면 남들처럼 가해자를 보며 욕하고, 피해자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학교에서 학폭을 은폐한다는 보도를 보며 학교를 욕했다. 그게 끝이었다. 나에게 학교폭력은 남의 일이었으니까. 그렇지않은가. 난 이미 학교를 언제 졸업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그저 그렇게 사는 성인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학교폭력 보도만 봐도 지레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뿡뿡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될테니까.



장편소설 『학폭교사 위광조』를 다 읽고, 조금 당황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학교폭력’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헌데 책 속에 나온 학교폭력은 내가 알고 있던 학교폭력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매 챕터마다 충격이었다.



절대 학교폭력이 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어떤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인데, 학교폭력으로 둔갑했다. 피해학생 부모가 학교폭력이라고 신고하면, 피해학생이 금방 떠올리기 어려운 그저 그런 일상적인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대로 실제로는 학교폭력 가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신고하여, 실제 피해자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둔갑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소설 첫 챕터부터 충격적이었고 씁쓸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놀면서 ‘메롱’하고 뛰어갔는데, 메롱을 한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왜? 메롱을 받은 내 아이가 입은 정신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꺼냐며, 소리치는 자칭 피해학생 어머니로 인해서. 피해학생은 그 일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왜? 그저 친구와 노는 일상적인 시간이었으니까. 언제나처럼 같이 놀았을뿐인데, 한명은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고, 또 한명은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었다. 고작 ‘메롱’하고 뛰어갔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와 그 부모의 마음을 감히 내가 헤아릴 수 있을까. 



학교폭력 신고 가이드 북에는 ‘사소한 괴롭힘’도 학교폭력이라고 규정한다. 사소한 괴롭힘. 피해학생이 괴로움을 호소한다면 사소한 괴롭힘도 학교폭력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는게 문제다. 친구들끼리 놀다가 ‘메롱’, ‘이 바보야’ 몇 마디 했다고 그게 사소한 괴롭힘이 되는게 맞는건가? 심지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는 친구들과 놀면서 나오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인데 말이다. 그저 부모의 잣대로 이를 학교폭력으로 규정짓는다는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부모라면 모름지기 내 자식을 보호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 보호가 과보호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자녀의 인생을 파탄낸다면 생각한다면 이런 진상 부모짓은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적어도 과거 내 부모는 이런 진상짓을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난 올바르게 컸다고 자부한다.



‘메롱’ 한마디만으로 내 아이가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학교 폭력 신고를 하는 부모 밑에서 자녀가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사소한 다툼도 견디지 못할 게 분명하다.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문제는 이런 일이 이미 과거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사회초년생이 된 아이들을 살펴보면 부모 의존도가 높은 부류가 굉장히 많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사회초년생들의 부모 의존도, 사회적으로 미숙한 사례가 많이 보도되고 있기도 하고.


광조도 안다. 학교폭력 신고는 신고한 사람이 절대적인 갑의 위치다.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광조의 교직 선배가 그렇게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이다. 조금만 수틀리면 그들은 ‘학교폭력을 은폐하려는 학교의 옹졸한 행태’로 학교의 모든 노력을 평가절하하게 된다. 그들과 학교가 적이 되는 순간, 모든 법의 화살은 학교를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할지언정 광조는 자기가 만난 첫 번째 학교폭력 사안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p 054


두번째와 세번째 챕터는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왕따, 그러니까 제대로 된 ‘학교폭력’에 대한 사안이었다. 다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왕따를 주동한 아이 모친은 학교폭력전담위원회 위원이다. 이 엄마는 자기 아이가 문제행동을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자기 아이가 학폭 신고 가해자로 접수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쳐, 학폭전담위원에 나선 것이다. 즉, 내 아이 문제행동을 고칠 생각을 한 게 아니라, 내 아이가 언젠가 학폭 가해자로 신고 될 수 있으니, 그 때 내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학폭 위원이 된 것이다. 



이 엄마는 내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삼고, 반 친구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새끼 지킨다는 명분으로 학폭 위원이 되었고, 실제로 자기 아이가 학폭 가해자로 신고되었을 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자기 권력을 사용하기에 급급했다. 때마침 피해학생의 부모가 일이 커지길 바라지 않기에, 학폭신고가 무마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 아들이 학폭 가해자로 신고된 것이 앙심을 품은 이 엄마는, 다른 학부모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기 아이가 괴롭혔던 피해학생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했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학교폭력 신고 제도를 아주 제대로 악용한 사례였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어버렸다. 가해자가 된 피해학생은 즉시 분리 조치되었다. 학교폭력 신고가 들어가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즉시 분리해야한다는 법률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돌림 피해학생은 갑자기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었고, 학폭 분리조치로 인해 교실에서 쫓겨나야 했다.



만약 첫번째 학폭신고 때 피해학생 부모가 제대로 대처했다면, 피해학생이 가해자로 둔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학교폭력 사건들은 언제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불리한 상황만 일어났더랬다. 이러한 사례들을 학습했던 피해학생 부모는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느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 결과, 피해학생은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교실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해 교실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따돌림을 주도했던 진짜 가해학생이 되었다. 선생님은 실제 따돌림 당했던 학생을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가해학생과 그 엄마가 더 힘이세다는걸, 어린 아이들은 배웠다. 가해학생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교실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학교폭력 피해자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지열은 학교폭력의 성립 조건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직 4학년에 되지 않은 아이의 입에서 ‘학생이 피해를 입으면 무조건 학교폭력’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지열의 보호자는 진단서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단 듯이. 그렇다. 이것은 지열과 지열 보호자만의 판단이 아니다. 배후엔 누가 있을까. 이것도 금방 떠올랐다. 윤성의 모 최현정은 학교폭력 전담기구 위원으로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p 134



담임교사의 지시를 바로 따르기보다 윤성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법과 제도에 따라 윤성은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었고, 법과 제도에 따라 담임교사는 아이들을 지킬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교실 속 학생들은 모두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p 139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학교폭력 신고 이후에는 학교와 선생님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마 과거 학교폭력을 은폐하던 수많은 학교들로 인해, 은폐할 수 있는 구멍 자체를 막기 위함이리라. 취지는 이해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가 정말 단 하나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학교폭력 신고 전에 학교폭력 과정을 알고 있음에도 이에 개입할 수 없고, 학폭 신고 이후에도 누군가의 입김으로 사건이 유야무야되면 이 역시도 학교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학교폭력 신고를 위한 법과 제도가 외려 악용되어, 선량한 아이들이 피해를 입고, 선량한 아이를 도와주려던 선생님들의 권위마저 떨어뜨렸다. 우리나라 교육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아니, 알고 있음에도 외면하고 있는거겠지. 훗날 뿡뿡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나는 내 아이를 어떻게 보호해야할까? 벌써부터 눈앞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했듯, 나는 이 소설들이 정말 소설이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학교폭력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데, 이런 일들까지 실제하는 거라면 대체 내 자식을 어떻게 학교에 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말 이 소설책 저자들이 말했듯, 소설이길 바란다. 아무리 이 소설이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집필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저 소설이기를 바란다. 제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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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안쪽 - 속 깊은 자연과 불후의 예술, 그리고 다정한 삶을 만나는
노중훈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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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행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신랑과 정말 많은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시작한 초반에는 대놓고 ‘난 여행객이다!’ 라는 아우라를 뽐냈다. 맛집도 검색해보고, 핫플레이스도 검색해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인드가 변해갔다. 여행객보다 현지인처럼, 핫플레이스를 찾기 보다 동네 산책을 하며, 여유를 즐기는 쪽으로.



그래서 그런가? 옛날엔 여행을 가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빠릿하게 움직였다면, 마인드가 바뀐 뒤로는 우선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발을 딛은 그 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 마을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를. 이런 식 여행은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오늘 리뷰하는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는.



"풍경의 안쪽"



이 책은 《풍경의 안쪽》은 여행작가 노중훈 씨가 기록한 여행에세이다.

거창하게 늘여놓자면 이렇습니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풍경도 기쁘고 좋지만 풍경의 겉면에만 머무르지 말고 발품과 마음 품을 팔아 안쪽으로 조금 더 진입해보자. 진입해서, 풍경을 일별하고 돌아가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풍경의 안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p 004



정말 제목을 잘 지었다. 그어떤 표현보다 마음에 들고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저자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나도 자주 써먹어야겠다!!



▶ 중국 쓰촨 :: 매운 요리보다 더 얼얼한 풍경

중국 쓰촨. 대중적으로 보면 매운 요리로 유명한 지역이다. 약간 더쿠의 시선으로 보면 삼국지, 시선 두보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푸공주, 푸바오가 돌아갈 ‘자이언트 판다 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 안녕 푸바오T_T...

무후사는 촉나라 황제 유비와 불세출의 전략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다. 6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나라 강희11년(672)에 중건되면서 지금의 골격을 갖췄다. 무후사가 흥미로운 것은 주군과 신하를 함께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유일무이한 경우라고 한다. 제갈공명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지극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하긴 무후사라는 이름도 공명의 시호인 무향후에서 따온 것이다. p 050

육중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판다. 널리 알려졌듯이 중국인들의 판다 ‘집착’은 유별나다. 언젠가 판다 배설물을 비료로 사용해 수확한 녹차의 가격이 50g에 우리 돈 390만 원으로 책정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청두 교외에 판다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자이언트 판다 기지가 있다. 하루에 100m도 이동하지 않을 만큼 게을러터진 나머지 종족 보존의 의무마저 저버린 판다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p 053


사흘 밤, 나흘 낮 동안 쓰촨을 활보했지만 하늘은 회색의 엄숙한 낯빛을 좀처럼 풀지 않았다. 유일하게 청명한 날씨를 만난 곳은 어메이산이었다.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은 여러모로 남달랐다. (…) 얼른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순식간에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사진도 이렇게 멋진데 실제로 보면 인생이 바뀔것 같아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이백은 “어떤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도 어메이산에 비할 수 없다”고 칭찬했다는데, ‘형식주의자’ 두보라면 어떤 논평을 내놓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p 058

개인적으로 쓰촨은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다. 위에서 말한 더쿠적 시선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랄까? 특히 저자가 갔었던 무후사. 유비를 모시는 사당은 중국 여러 지역에 있지만, 쓰촨의 무후사는 그 많은 유비 사당 중 두 번째로 큰 곳이라 한다. 기본 대륙 스케일 중에서도 두 번째로 크다하니, 감히 상상이 안간다.


당나라 시인, 시인중에서도 시선이라 일컫는 두보가 기거했던 초당도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근데 꽤 고단한 삶을 살았던 두보가 기거했다고 하기엔, 지금의 두보초당은 큰 규모의 정원을 거느린, 너무 잘 꾸며진 장소가 되었다. 이건 흡사 ‘초당’이라 이름하고, 초가는 없는 다산 초당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예능 〈신서유기〉에서도 나왔던 러산 대불이다. 러산대불의 규모는 뭐 말해 뭐해. 대륙 스케일은 바로 그 자체다.





▶ 몰타 몰타, 고조, 코미노 :: 지중해의 섬나라에서 보낸 아흐레

몰타는 어디..? 솔직히 말하면 처음 듣는 나라이름이라 약간 동공지진.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온다. 확실

한건 일반적으로 유명한 여행지는 아니라는 것. 적어도 한국에서는. 바로 이 점이 저자를 몰타로 이끌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내가 모르는 곳. 무지의 장소. 그렇기에 푹 쉴수 있는 곳.


나를 몰타로 이끈 것은 무지였다. 몰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어쩌면 오랜 세월 직업 여행가로 살아오며 남루해진 마음을 환기시키기에는 ‘익명’의 공간이 제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하룻밤 숙박료는 3만원이 조금 넘었다. 슬리에마의 호텔은 형편없었지만 그 형편없는 숙소를 몇 발짝만 벗어나면 탁 트인 지중해가 반겼다. ‘걸인의 숙소 왕후의 바다’ 였다. p 104

일요일 아침, 고민한 것도 없이 몰타 섬 동남쪽의 어촌 마사슬록으로 향했다. 일요일마다 어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문패는 어시장이지만 해산물을 비롯해 갖가지 농산물과 공산품이 집결했다. 한가지 서운한 점은 누가나 견과류 같은 간식거리 이외에 끼니를 때울 만한 음식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안으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천시장과 마주한 식당들 중 한 곳을 골라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굴, 홍합, 오징어, 조개 등을 한 그릇에 담아낸 해산물 믹스는 익숙한 맛이었다. 익숙해서 편안했고, 편안해서 일요일 오전이 한결 나른해졌다. p 110


딱히 갈 곳이 있지는 않았지만 숙소로 복귀하기에는 시간이 일렀다. 대충 지도를 본 다음 222번 버스를 타고 ‘옆길’로 새기로 했다. ‘우연히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격언이 진하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p 112


인접한 코스피쿠아, 센글리아와 함께 쓰리시티의 일원으로 묶이는 비토리오사는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덩치가 작았다. 두 번에 걸쳐 산책했는데 역시 골목 탐방 시간이 제일 말랑말랑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길에서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어다녔고, 베란다의 빨래는 조속조속 졸았으며, 이름 모를 예술가는 밤늦도록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p 114



생각해보니 나도 비슷한 이유로 선택한 여행지가 있었다. 다름 아닌 롬복. 롬복은 당시만해도 딱히 알려지지 않았던 여행지였다. 당연히 롬복에 가서도 한국말을 듣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완벽한 익명의 공간이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바닷가에 누워서, 바다 위 어선을 보곤 했다. 근처 시장을 걸어보고, 현지인들의 삶을 보았다. 분명히 낯선 곳인데, 그곳에서 난 편안함을 즐겼다. 나에겐 정말 큰 모험이자 도박이었던 롬복여행. 그 여행은 대 성공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저자의 몰타 여행기는 다른 챕터보다 유독 공감이 간다.


  

화려한 여행지를 쫓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번지르르한 여행지 겉면에 머무르지 않고 풍경의 안쪽으로 들어가보자.
지금껏 생각치 못한 여행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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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1 일제침탈사 바로알기 8
안해룡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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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역사가 있다. 바로 내 나라가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졌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시기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빼앗아갔다. 크게는 나라를 빼앗아갔고, 세부적으로는 인적자원, 물적자원, 천연자원 그리고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자리잡은 역사 문화를 빼앗아갔다. 일제가 빼앗아간 것들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날이 새도 모자를 정도로 많다. 





이 역사책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1』은 그런 일제 침탈사 중에서도 인적 자원 침탈, 그 중에서도 일제 산업현장에 ‘강제동원’된 노동자를 이야기한다. 





강제동원. 지난 정권 때도, 현 정권 때도 강제동원은 한일 외교에서 단연 중요한 문제다. 지난 정권 때 우리나라 재판부는 일본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했고,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한국에선 반일운동이 거셌다. 당연히 한일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현 정권은 정반대다. 재판부가 아닌, 정권에서 나서서 제3자 변제를 이야기하며,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기업이 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일본의 사죄는 커녕 일본을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덕분에 현 정부와 일본 관계는 좋다못해 그야말로 최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바라는건 배상도 배상이지만,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생존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이제 몇 분 안남았다. 지금까지 일본은 사죄 및 배상은 커녕, 외려 자신들이 왜 사죄를 해야하느냐고 반발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려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고 으시대고 있다. 놀랍게도 현 정권은 이런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 정권이 보호해야할 사람은 일본이 아닌, 자국민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임에도 말이다. 뭐, 여기서 각설하고.





그렇다면 일본은 왜 자신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 및 배상의 의무가 없다고 나오는 것일까? 그 근거가 있는건가? 슬프게도 그 근거가 있다. 심지어 그 근거는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와 배상을 강제할 수 없는 강력한 족쇄가 되었다. 다름아닌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과 맺었던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청구권협정’이다.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을 살펴보면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 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일간의 재산, 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는 등의 조항이 있다. 이 조항 덕택에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자행한 수많은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무효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강제동원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 피해자, B·C급 전범, 독도문제, 문화재 환수등 등 모든 문제를 지금까지도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일본 기업은 1910년 한일병합 이전부터 조선인을 고용해왔다. 위험한 업무에 낮은 임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탄광과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댐과 발전소 건설 현장의 노동력 부족도 심각했다. 특히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 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p 016




조선 땅에 이른바 ‘모집인’이 나타난 시기가 이때다. 그들은 감언이설로 조선인을 속여 대한해협을 건너게했다. 일제 산업현장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값 싼 불쏘시개였다.



일본 내 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보호장구도 없었다. 고노마이 광산에서 발생했던 사고를 보자. 일본인 갱내 근무자가 19.2%가 상해를 입은데 반해, 조선인 갱내 근무자는 53.5%나 되었다. 심지어 고노마이 광산에서 사망한 근로자는 대체로 조선인이었다. 갱내 사고사가 제일 많았고, 근무 환경으로 인한 폐결핵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가 뒤를 이었다. 광산 측에선 조선인 근무자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 불능이라 판단되면 바로 귀국시켰다. 명백한 책임 회피였다.



하나오카 광산에서는 함몰사고로 일본인 11명과 조선인 12명이 갱내에 갇혔다. 광업소 측은 갱도 피해를 우선시 해 ‘조난자들을 순직한 것으로 보고’하고 구출작업을 중지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렇게 광산에 생매장 되었다. ‘재해 보고서’에 따르면 순직한 조선인 노동자중 3명은 광산에 도착한지 겨우 20일 된 이들도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들 시신은 차디찬 광산 갱도에 묻혀있다.



일본 내 발전소나 수로 건설 공사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되었다. 발파 작업 등 위험한 작업 최전선에는 언제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다. 센다쓰 발전소 건설된 조선인 306명은 대부분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에는 13~15세의 소년들도 있었다. 이 306명 가운데 259명이 일본 패전 후 고국으로 귀국하였지만, 그들은 정당한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게 바로 일본 제국주의 산업환경에 강제동원된 대다수 조선인들에 대한 처우다. 

다코베야란 훗카이도 개척을 위한 죄수노동이 폐지되면서 토목 공사등에 필요한 노동자를 ‘좋은 일이 있다’고 속여서 데리고 와서 감금 상태로 장시간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노동 고용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노동자의 함바를 통칭 ‘다코베야’, ‘감옥베야’라고 불렀다. ‘다코’는 일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p 023



다코베야는 일본 정부와 대기업에는 채택하기 좋은 제도였다. 일본 정부는 값싼 노동력을 신소하게 동원하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청부제도를 묵인해왔다. 정치헌금이나 담합금은 원청에서 중청, 다시 하청으로 이어지는 자금의 먹이사슬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청회사는 원청회사가 청부받은 공사 예정 가격의 3할 정도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공사 현장에서는 하청 회사의 ‘다코베야’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강제해야만 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도망간 다코베야 노동자는 사기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p 025



 
가혹한 노동 현장에서는 공사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빈번했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된 위령비나 추모비는 많지 않았다. 건설 당시만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터널이었던 시미즈 터널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관동과 관서를 나누는 조에쓰선 시미즈터널 부근 순직비에는 조선인 이름이 없다. 1920년대 조에쓰선 건설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됐고,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석의 ‘기억’에는 남기지 않았다. (…) 일본에 세워진 위령비와 추모비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애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으로 분리되었다. 해방 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위령비에서마저 분단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p 018



기본적으로 일본 내 세워진 위령비는 일본 정부가 아닌 해당 일본 기업이나 민간에서 세운게 대다수다. 그들이 위령비를 세운 목적은 하나다. 이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근무자들을 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뭐 그 속에는 일본 특유의 사후관이 반영되어 있을테지만, 그건 각설하고라도 이런식으로나마 위령비를 세운건 후세대로써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조금 씁쓸한 지점이 있다. 일본 기업이 위로하는 혼은 일본인 근무자 한정이다. 자기네들이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던 사실을 지우고자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깔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 씁쓸했다.







그나마 일본 기업이 아닌,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일부 위령비(또는 추모비)는 공사현장에서 죽어간 조선인 근무자들 이름이나, 관련된 내용을 비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나 역시 조금은 위로받았다. 아래 비문은 다자와후 주변 덴카쿠지에 건립된, 착한마음모임이라는 일본 민간단체에서 세운 ‘조선인 무연불 위령비’ 비문이다.

센다쓰발전소, 나쓰세발전소 댐 공사에는 1944년 이후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 공사 중에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이 땅에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국의 흙이 된 조선인 무연고자가 묻혀있다. 가장 불항핸 시대에 발생한 통한의 역사를 가슴에 새겨 정화하고자 모금을 통해 이 비를 세운다. p 066





이 책 저자가 찾은 위령비 중 하나인 ‘도쿄도 위령당’은 나도 방문했던 장소다. 도쿄 료고쿠 요코야미초 공원에 자리한 위령당이다.



조그만 동네에 있는 공원으로 관광객 발길은 당연히 없다. 현지인들은 이곳이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을 위한 추모하기 위한 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곳을 굳이 찾아갔다. 관동대지진 당시 죽어간 일본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아니. 그렇지 않다. 공원 한켠에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원 중앙에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한 일본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당이 기세 높게 세워져있고,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는 공원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곳을 찾았던 당시 나는 거대한 위령당을 보고 당황했었다. 지들이 학살한 조선인을 추모하는 비석은 공원 한 켠에 조그맣게 만든 반면(그나마도 일본 민간단체에서 겨우겨우 만든), 관동대지진때 죽어간 일본인을 위해선 이렇게 거대한 위령당을 지어놨구나! 하며 분노를 했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어간 자기 동포들의 죽음은 그렇게 슬퍼하면서, 관동대지진 때 유언비어를 퍼트려 자기들이 학살한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은 저 커다란 위령당에 없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일제 침탈사는 언제 봐도 분노스러운 역사다. 잊고 싶지만 절대 잊으면 안되는 ‘우리’ 역사다. 우리마저 잊으면, 이 역사는 가해자 일본이 원하는 데로 없던 사실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문득 독일 사례가 떠올랐다. 



1970년 12월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방문 당시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이후 2013년 1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폴란드 방문 당시 유대인 게토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독일은 끊임없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향해 사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과를 그만둘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메르켈 총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할 것입니다. 나치의 범죄는 무한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 및 침탈한 가해자이며, 현재 일본은 한국과 함께 할 외교 파트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오랜시간 독일이 몸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현 정부는 그런 일본을 감싸주는 상황에서 나를 비롯한 국민들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일본이 식민지배와 침탈 역사에 사과를 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바람으로 끝날 것 같아서 괜시리 마음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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