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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징비록 -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10월
평점 :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박종인 기자님의 신작이 나왔다. 그 제목은 「대한민국 징비록」. 어쩌면 전작 「땅의 역사 1,2」 연장선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혹은 TV에서 알려주는 찬란한 우리의 역사 속에 숨겨진, 처절하고도 뼈 아픈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기록된 역사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내용들 말이다. 그렇기에 읽다보면 누군가는 조금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당시를 살던 권력자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시대를 보는 눈이 얼마나 없었는지 너무 뼈저리게 느껴지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계속 아픈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참고로 본 책의 내용은 기자님이 최근까지 연재한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의 연장선이다. 뭐랄까, 읽으면서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ㅋㅋ 근데 확실히 화면으로 기사를 읽는 것 보다, 이렇게 종이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게 머리에 잘 들어온다. 아, 그래서 TV프로그램 ‘땅의 역사’는 언제 방송해주나요? 언제까지 기다려야해요?ㅜㅜㅜㅜ)
우리는 「징비록(懲毖錄)」 이라는 책을 알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된 영의정 유성룡이 집필 한 책이다. 따지고 보면 임진/정유년 전쟁의 책임은 철저하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던 무능한 왕이라는 사람에게 있는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성리학을 신봉한 나라가 왕에게 “니가 책임지세요” 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만만한, 전쟁 당시 피폐해진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던 열일했던 사람을 내친거다.
「징비록(懲毖錄)」은 참혹했던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의 전황을 기록하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쓴 책이다. 하지만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 아마 제대로 읽었다면, 이 때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이 정치를 했다면 적어도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임진/정유재란은 1598년에 노량해전을 끝으로 종전).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 「대한민국 징비록」은 어떤 내용일까? 유성룡의 징비록이 담고 있던 임진왜란 전후, 그리고 2백년 뒤 일제강점기 전후 이야기가 담겨있다. 약 4백년 전 조선을 침략한 일본, 그리고 1백년 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이야기다. 일본이 침략하기 전 전 그들은 대체 무엇을 준비했는지, 우리는 어떤 대응을 했는지, 어째서 3백년 만에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는지!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다. 알아야만 2019년 현재, 한국을 상대로 경제침략을 단행하려 한 일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1543년 일본은 이 해에 유럽에서 철포를 들여왔다. 그렇게 유럽과 교류를 하였다. 일본은 유럽에서 들여온 총을 국산화하였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였는데, 막강한 다이묘의 부대는 ⅓이상이 철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서원이 처음 건립되었다. 바로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은 명종 때 이황의 건의로 사액을 받아, 나라의 지원을 받는 ‘소수서원’이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된 바로 그 영주의 ‘소수서원’이다. 이후 조선은 ‘공자 왈 맹자왈, 죽은 자의 이야기’를 맹신하는, 성리학을 맹신하는 나라가 되었다.
1543년 일본은 서양과 교류하며 과학을, 상업을 발전시켰고, 조선은 죽은 자의 이야기 속에 갇혀 과학을 버리고 상업을 천시했다. 그게 임진왜란 발발 하기 불과 49년 전이다. (*물론 서원을 만든 이유는 있다. 당시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에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없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되야하는데, 죄다 인맥으로만 공무원이 되니 그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중종실록에 따르면 성균관이 텅 비어 도살장으로까지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재야 유학자들이 서원을 세운거다)
더 과거로 가본다. 1450년에 독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 1492년 이사벨라 여왕 지원하에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같은 해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어 유럽 여러나라에 정착했다. 스위스로 간 유대인은 시계를, 네덜란드로 간 유대인은 동인도회사와 주식거래소를, 영국으로 간 유대인들은 자본가가 되었다. 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파한 이래, 그야말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1517년 독일에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1543년에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이 모두가 세계사 적으로 역사를 바꾼 일들이다. 그리고 이 일들이 나비효과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새 시장 개척을 위해 일본에 문을 두드렸고, 그 때가 바로 1543년이다. 일본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기술 발전에 온 힘을 쓴 반면, 조선은 ‘죽은 자의 이야기’에 갖혔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분명 우리 고려보다 발명은 느렸지만, 역사를 바꿨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수 많은 책들이 싼 값에 팔려나갔다. 지식이 그렇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반면 고려의 인쇄술은 오로지 ‘불심으로 대동단결!’ 그리고 권력가들의 지식 독점에만 이용되었다. 그리고 지식 독점은 조선, 구한 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592년, 임진년. 일본이 처들어왔다. 우리가 임진왜란에 대해 배운 것은 이렇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 선조에게 보고하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김성일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를 올렸고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택했다. 하지만 일본은 부산을 통해 쳐들어왔다. 전국시대 동안 무장만 잡으면 전쟁이 끝나던 일본군의 습성상, 조선 왕 하나만 잡기 위해 빠르게 한양까지 달렸는데 왠걸? 조선 왕 선조는 분조라는 이상한 수를 던져, 광해군에게 조정을 맡기고 수도와 백성을 버친 채 저 멀리 의주까지 도망을 갔더라.>
전쟁에 대한 내용은 뒤로 하고, 그 시작점만 봤을 때가 저거다. 근데 과연 저게 끝일까? 정말 일본의 전쟁의향을 저 때 처음 알았을까? 정말 어리석은 선조가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중 믿고 싶었던 보고서를 채택해서 무방비한 상태로 왜군을 맞이한걸까? 적어도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가기 전에도 이미, 일본 (대마도/규슈)에서 전쟁이 일어날 꺼라고 직접 와서 보고를 했다.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도 와서 이야기 하며 대비하라 했다. 그 뿐이랴 저 멀이 독립국이었던 류큐의 사신까지도 같은 보고를 했다. 하지만 2백년 평화에 젖어있던 조선 조정은 그것을 무시했을 뿐이다. 분통터지는 사실은 더 있다. 명종 때 이미 일본의 철포, 즉 조총이 조선에 들어왔었다. 대마도인이 조총을 가지고 와서 나를 받아주면, 조총 만드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1555년 5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했다.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 또한 맹력합니다.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중략) 다음달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때 남대문과 동대문 문루에는 만들어놓고 설치하지 않은 종이 뒹굴고 있었다. (중략) “이미 철재를 사들이도록 했으므로 윤허하지 않는다.” 사간원이 “철재를 시장에서 사들이게 하니 원망과 한탄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해도 듣지 않고 비변사와 홍문관까지 철포 제작허가를 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명종은 이렇게 답했다.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다.” (중략) 이에 세 정승이 “조선이 가지고 있는 중화기 천자총통, 지자총통 또한 잡철로는 만들 수 없다”고 거들었다. 명종이 딱 부러지게 답했다.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억지임을 알았는지, 명종은 “이 말은 삭제함이 옳겠다”고 사관에게 일렀다. 사관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삭제함이 옳겠다’는 말까지 실록에 기록해버렸다. _P 051
참고로 명종 때는 그 유명한 ‘여인천하’ 시대였다. 명종의 엄마는 불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문정왕후였고, 그녀의 올케가 그 유명한 정난정이다. 불교를 신봉하고 정권을 주무르던 문정왕후에게 커다란 범종을 녹여 조총을 만드는건 아니될 일이었다. 뭐 평화에 찌들었기 때문에 그랬겠지, 라고 정신승리를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왜구가 호남을 침략했던 을묘왜변이 일어났던 때였다. 조선초에 단절됐다 생각했던 왜구들이 다시 들성이던 그 때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그리고 다시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거란 정보가 정말 많이 흘러들어왔지만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듣지 않았다. 무시했다. 조선에 리더는 있었지만 리더십은 없었던거다. 선조가 무능하다고 욕을 먹는 건 전쟁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 뿐인가?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의병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였다. 자기는 저 멀이 의주까지 도망갔으면서 백성들이 일본에 항복하고, 도망가는 건 역시나 역모로 간주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던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100% 졌을 전쟁이었는데 선조는 그런 이순신 장군을 그저 시기, 질투로 대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상처뿐인 승리일지언정) 승리의 공을 목숨걸고 싸운 수 많은 장수와 의병이 아닌, 오로지 명나라에 있다고 했다. 전쟁 후 공을 치하할 때 목숨 걸고 싸운 장수들인 선무공신보다, 자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 갔다는 호성공신을 그렇게나 치하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무능한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 조선의 리더는 리더십이 없었던거다.
이런 식으로 조선의 왕이, 조선 조정이 무능력해지고 일본과 격차가 벌어진 건 아주 조그마한 차이다. 생각의 차이, 기술의 차이. 같은 조총을 받고 조선은 저기 어딘가에 짱박아 놨고, 일본은 국산화 했다. 조선은 오래전에 죽은 공자왈 맹자왈을 읊고, 주자를 맹신했다. 성리학에 대한 해설은 ‘주자학’만 있을 뿐이며,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이나 반발이 있으면 사문난적이라 매도하며 내쳤다. 일본은 어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선비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그 때 일본에 성리학이 펴졌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단행하긴 했어도, 네덜란드와 무역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성리학은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서학이 있었고 근대과학도 같이 발전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 군주 명을 받아 공자와 주자가 일본을 공격해온다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철포를 들고 공자와 주자의 목을 쳐 깨뜨리리라 _P 144
당시 일본의 주자학자 아사미 케이사이의 말이다. 과연 이 말이 조선 조정 한 복판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우암 송시열이 들으면 어땠을까? 바로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거나 참형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이렇게 앞뒤 꽉 막힌 조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에도 과학이 꽃을 피웠던 시기는 있었다. 바로 역대급 성군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 재위시절이다. 세종은 수 많은 천재들을 불러 모아 조선 과학의 꽃을 피웠다. 해시계가 나왔고, 물시계가 나왔다. 역법도 나왔다. 하지만 전승되지 않았다.
1550년 11월 흠경각 수리공사가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 하나가 문제였다. 관상감 책임자 이기가 공사를 마치고 명종에게 보고했다. “(이 그릇은) 옛날 성인들이 권계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옆에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겠나이다.” 명종은 “그리 하겠다”라고 답했다. 때는 7년 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이라고 사액한 지 8개월 뒤였ㄷ. 물그릇에 빗물이 고이듯, 어느 틈에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덕목 수행’용으로 변경이 된 것이다. _P 083
세종이 꽃 피운 조선의 과학은 그렇게 사장(死葬)되었다. 보면 볼 수록 암울함의 극치다. 어쩜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선은 살아 있는 학문을 갈갈이 찢어 쓰레기통으로 버리고, 죽어있는 학문만을 따랐다. 그래도 하늘은 공평한 지, 이후에도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몇번 있었다.
첫 번째는 병자호란 이후 청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두 번째는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의 저자 하멜이 제주도에 당도했을 때, 세 번째는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했을 때, 네 번째는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다.
1636년, 청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아담 샬 이라는 천주교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학문, 새로운 문화, 새로운 기술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조선에 왔는데, 정작 아비라는 사람 조선의 왕 인조는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외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심지어 며느리에 손자들까지 죽였다. 이렇게 첫 번째 기회가 날라갔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길에 제주도에 표류했다. 그 안에는 첨단 항해술, 과학기술, 무기술은 물론이요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 하펠 포함 36명이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들을 그저 죄인취급 했다. 그들은 13년 간 조선에서 노역을 했다. ‘풀 뜯기’,‘땔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 되기’, ‘구걸하기’ 등이 전부였다. 13년 간 조선 정부는 최첨단 기술을 전수 받을 기회를, 자원을 그렇게 통으로 날려버렸다. 13년 간 지옥같은 삶을 산 하멜은 조선을 겨우 탈출하여 원래 목적지인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당시 일본 공무원은 하멜 일행을 향해 강도높은 조사를 했다. 그 당시 하멜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한다.
“조선인은 전 세계에 나라가 12개 뿐이라고 생각한다. 옛 기록에 나라가 8만 4000개라고 적혀 있지만 태양이 한나절 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 비출 수 없기 때문에 지어낸 얘기라고들 했다.” _P 125
18C 후반, 즉 조선 후기 소현세자가 가지고 들어왔던 새로운 학문 ‘서학’은 종교로써 꽃 피운다. 천주교다. 충남지방을 위주로 천주교 신자가 급증하였다. 당연히 서양에서 천주교 신부들도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의 개혁군주 정조대왕님은 이를 용납하지 못하였다. 성리학 체계를 위협하는 기독교 서적들은 전부 불태웠다. 조선판 분서갱유다. 또한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유별난 천주교 박해, 학살의 시작은 바로 이 때부터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뿐만 아니다. 이 당시 책쾌 대 학살극도 벌어진다. 백성들이 그나마 싼 값에 책을 볼 수 있는 건 책 장사치, 책쾌들 덕분이었는데 이 때 씨가 말랐다.
“선왕(중국 요/순 임금)의 옳은 말씀이 아니면 노자, 석가, 제자백가가 모조로 이단이다.” _ P 189
(※사족이지만 우리가 성군으로 말하는 세종, 정조 역시 그림자가 있다. 다만 업적이 워낙 크다보니 그 그림자가 가려져 있을 뿐. 세종은 우리 땅에 있는 은광을 폐쇄하고 산업 발달을 막아 사방이 꽉 막힌 조선이 되는 시초를 만들었다. 또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종모법을 실시했다. 서얼등용으로 박수 받는 정조는 천주교 박해 뿐만 아니라 서얼들을 ‘광대로 기른다’라는 말을 남겼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평양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고, 배를 불태웠으며 선원을 죽였다.
그리고 1871년 제너럴 셔먼호의 복수를 겸하여 미국이 강화도로 쳐들어온다. 신미양요다. 조선은 쇄국을 지켰고 이 전쟁은 승리한 전쟁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조선 정부는 관심이 없었다.
반면 1853년 미국 흑선이 일본을 향했을 때 문을 열었던 일본과는 대비된다. 물론 아무 계획 없이 통상을 했다면 문제가 되었겠으나, 일본은 이 때까지도 계속 네덜란드를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자국 내 과학, 상업발전도 시키면서 말이다. 그리고 1876년, 일본은 강화도로 처들어왔고 조선 최초의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정부에 복귀한 지도자들은 영국에서 취한 산업과 미국에서 취한 언론과 스위스의 교육과 독일의 법률을 그대로 정책에 적용했다. 영국에서는 광업을 배웠다. 산업혁명 기초가 석탄과 철에 있음을 이들은 깨달았다. (중략) 그리고 이들이 찾아낸 서양 근대화의 힘은 교육이었다. 사절단이 정치 및 경제 분야 이외에 관심을 기울인 분야닌 교육 부문이었다. _P265
다름아닌 일본의 이야기다. 미국에 문호를 개항한 일본은 사절단을 꾸려 유럽 여러나라를 돌아다니게 하고 배워오게 했다. 일본을 돌아온 이들이 혁명을 일으켰으니 그게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우리에게는 이가 갈리는 일제강점기의 신호탄이자, 제국주의의 서막이었다.
이 뒤의 이야기, 그저 이가 갈리고 답답한 이야기 향연이다. 왜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지 못했는지, 왜 우리는 수 많은 기회를 발로 차버렸는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논하지 말라고 하기엔, 동 시대 다른 나라들은 우리와는 너무 다른 길을 걸었다. 과연 이를 두고 현대의 시각으로 논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기껏 수입한 최첨단 무기를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에게 쏘고, 그것도 모자라 외국 군인까지 대리고 온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국정농단을 하던 무당 진령군의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던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혁을 한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부국강병을 위해 써야할 나라의 세금을 자기 황제 즉위식을 위해, 조선 왕 즉위 40주년을 위해 몰빵한 고종이 조선의 왕이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에 ‘회답겸쇄환사 → 통신사’를 수 차례 보낸다. 일본은 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워갔다. 일본이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이 조선을 능가했을 때 일본은 더이상 통신사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조선은 소중화사상에 빠져있었고, 세도정치가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의 시계는 과거로 돌아가버렸다.
개방과 교류, 다양성과 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의 열쇠다. _P 381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징비를 하고 있을까? 아니 하고 있기는 한걸까? 여당, 야당 모든 정치권 인사들은 전부 징비를 하고 있을까? 적어도 작금의 상황을 보면 전혀 아닌 것 같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어보인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인사들은 일본 우익 뉴스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외치고 있으니, 징비는 커녕 매국을 하고 있는 사람이 더 많겠다. 거기다 가짜뉴스를 많이 퍼트려서 이제 뭐가 진짜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정도다. 정치권 인사들은 대체 뭘 하는 지 모르겠고, 오로지 국민들만 나서서 징비를 하는 꼴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내가 사는 이 나라가 내 나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가지 않고 사지 않으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것밖에 없고, 무엇보다 100년전 일본의 총칼로 유린당하던 때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에 비하면, 아주 쉬운 일이니까.
개방과 교류, 다양성과 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의 열쇠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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