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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정진희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8월
평점 :
일본사를 공부하면서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부분이 있었다. 일본사를 공부할 때는 ‘류큐처분’, ‘전쟁의 전초기지’, ‘미군정’ 등의 단락적인 부분만 알려져 있는 곳, 오키나와의 역사이다. 지금 나에게 오키나와는 그저 일본이나 일본이 아닌, 일본 내에서도 엄청난 차별을 받는 섬이다. 헌데 이 책을 읽다보니 류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더욱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구나 싶었다.
난 지금의 오키나와가 아닌, ‘류큐’였을 때의 역사를 알고 싶었다. 우리 빛나는 문화재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수십, 수백번 이름이 나오는 그 류큐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류큐=유구)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8일 정묘 1번째기사 / 유구국의 중산왕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윤12월 28일 갑진 2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이 신하라고 칭하면서 예물을 바치고, 포로 8명을 송환하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9일 병오 1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 2월 16일 계사 1번째기사 / 진양에 우거 중인 유구국 산남왕 온사도가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오니 의복과 양식을 주다
-정종실록 6권, 정종 2년 10월 15일 병오 7번째기사 / 유구 국왕 찰도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치다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10월 19일 임자 2번째기사 / 유구국 중산왕 사소가 모도결제를 보내 조현하고 포로 14명을 송환하다
-성종실록 81권, 성종 8년 6월 6일 신축 1번째기사 / 유구 국왕이 내원리주 등을 보내어 글과 토산물을 보내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10일 을미 1번째기사 / 제주도 표류인 김비의 등으로부터 유구국 풍속과 일본국 사정을 듣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10월 24일 병진 2번째기사 / 김응남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의 사신이 와서 일본의 침략 의도를 보고하자 황제가 칙서를 내리다
조선왕조실록을 펴보니 유구에 대한 기록은 정말 너무 많아서 뭘 포스팅해야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류큐는 류큐는 신생 국가 조선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었고 그 이후에도 수 많은 사절을 보냈다. 그 뿐이랴? 조선왕조 실록에는 류큐의 역사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 2권에 있는 ‘유구국 중산왕이 망명한 산남왕의 아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류큐는 조선처럼 통일 국가가 아닌 최소 2개 이상의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뭐 잡소리는 여기서에 멈추고, 자세한 내용은 이제 본 책인 「신화로 읽은 류큐왕국」으로 돌아와본다.
책 처음에 나오는 부분은 바로 용어풀이다. 그리고 이 용어풀이가 정말 중요하다. 현재 오키나와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일본사에 익숙한 일왕가, 일본 신도, 창세신화 등 단어가 쓰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 역시 그런생각으로 이 책을 폈다가 호되게 당했다. 오키나와 아니, 일본의 영토가 되기 전의 ‘류큐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왕조, 종교체계가 있었다. 당연히 용어도 다르다.
일본 본토에서 신을 모시는 신녀(미코)들이 있었듯 류큐에도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직급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일본에서 각 지역을 통치하던 영주를, 류큐에서는 ‘아지’라고 불렀으며, 그 영토에 지어진 성곽에 대해서는 ‘구스쿠라고 부른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용어가 다르다.
용어풀이로 기본적인 개념을 머리속에 넣고 나면, 류큐국 중산왕조에 대한 연표가 나온다. 근데 이게 참 이상하다. 연표의 시작년도가 ‘1118년~’이다. 이 당시면 우리나라에선 고려라는 통일왕국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때는 당대 내노라하는 외척 집안인 인주 이씨, 이자겸이 권세를 주무를 때다. 이런 시기에 류큐라는 왕조가 시작된건가? 라는 생각이 스쳤더랬다. 하지만 책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은 조금 달랐다.
류큐는 1118년 중산왕조(순천왕통~)이 시작되기 전 까지 여러 지역에서 각각의 지배자, 즉 아지가 있었다. 뭐 고려로 치면 호족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옛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립되기 전 군장국가들이 넘쳐났던 삼한시대라고 해야하나?뭐 여튼 그런 시대였다. 물론 그 때도 중산왕조는 있었나보다. 다만 그 중산왕조는 류큐 창세신화와 연결된, 하늘의 후손인 천손가 25대까지 그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 그러다 순천왕통으로 넘어오면서 군장국가들이 싹 정리되고 중산왕조 하나로 합쳐지는 뭐 그런 왕조시대로 넘어온다. 이후 17C에 일본 규슈지역 사쓰마번 (시마즈家)에서 류큐를 침공할 때 까지 중산왕조는 계속 이어진다. 근데 이상한게 ... 이 왕조가 혈연으로 이어진게 아니라는 점이다. 순천왕통이 끝난 다음, 과거 류큐를 만들어 초기 중산을 다스렸다는 천손氏이 후손 영조 왕통이 들어서고, 그 다음에는 혈연관계 1도 없는 그냥 농민의 아들인 찰도 왕통이 들어섰다가, 그 다음에도 역시나 혈연관계 1도 없는 찰도 왕통, 제 1상왕조, 제 2 상왕조가 들어선다. 이거 참 신기하기 그지 없다. 어떻게 한 왕조 안에서 여러 왕통이 들어설 수 있지? 나라이름 바꿀 생각이 없었나...?
아, 근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류큐의 역사서라고 알려져 있는 『중산세감』, 『채탁본 중산세보』, 『채온본 중산세보』, 『류큐국유래기』등이 전부 일본 규슈, 사쓰마 침공 이후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신화의 문자화, 다시 말해 사유나 관념, 상징으로 향유되는 신화가 이야기의 형태로 기록될 때, 그것은 신화를 즉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는 신화 일반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_P 175
이 책에서는 각 왕통의 시조들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시조들은 하늘(天)과 연관이 있다. 아 중산왕조를 시작한 순천왕통은 좀 다르다. 순천씨의 부친은 글쎄.... 일본 본토에서 호겐의 난 때 이즈오시마로 유배를 당한 미나모토 다메토모 라는 것. 미나모토는 겐지氏라고도 불리며, 당시 일본 일왕가의 방계가문이었다. 아 근데 또 일본 일왕은 창세신화로 보면 또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니, 결국 하늘의 자손인건가?
근데 이런 순천씨의 이야기는 정말 실제일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류큐의 역사서는 사쓰마의 류큐 침공 이후에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는 류큐를 상대로 일류동조론을 펼쳤다. 아마 순천씨 이야기가 그 일류동조론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1백년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를 상대로 일선동조론과 내선일체론을 펼쳤던 것 처럼 말이다.
뭐...무튼 영조 왕통의 영조는 순천씨 이전의 천손氏의 후손이니 당연히 하늘의 자식이며, 찰도 왕통의 시작인 찰도는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설화에 나오는 선녀가 엄마다. 제 1, 2 상왕조의 시조는 죄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왕이다. 근데 또 미묘하게 이 하늘의 선택 혹은 하늘의 후손이라는 일화를 보면 우리의 왕조 신화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유교에서 나오는 그런 하늘(天)의 느낌이랄까?
조선과 거의 겹치는 역사적 시간위에 존재했던 류큐왕국은 동아시아 책봉-조공 체제의 일원이었고 동아시아 문명권의 공통적 문화기반이었던 유교와 불교, 한자문화를 공유했다. 동아시아 중세 왕조 국가로서의 일반적 특성을 지닌 듯 보이지만, 왕국을 지배한 류큐 왕권의 주요 기조 가운데 하나는 고유의 신화적 논리였다. _P 019
그럴수 밖에 없었던 거였다. 류큐라는 나라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독립국가였다. 또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웃 국가와의 교류가 절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옛날 장보고가 해상무역에 통달했던 것 처럼, 류큐 역시 해상무역에 일가견이 있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배를 타고 중국까지 가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고, 한반도에도 주기적으로 왔었다. 그러니 중국과 한반도에 퍼져있는 유교적 세계관이 류큐에 도입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외부적으론 해상무역 활동으로 어엿한 동아시아 일원이었던 류큐, 내부적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이 늦었기는 하지만 하나의 왕조로 통일해가고 있었던 류큐였다. 그들 나름대로 평화적으로 살았겠지만, 아 물론 왕조를 통일해가는 과정이나 왕통이 변경되는 과정에선 분명 피튀기는 혈전이 있었겠지만(중산왕 연표를 보면 각 왕들이 재위기간이 정말 짧..다..), 적어도 외부인 입장에서 류큐는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것 같다. 그러다 일본 규슈세력 사쓰마번(시마즈家)가 류큐를 침략한거다. 왜? 당시 일본은 임진/정유재란에서 패배하고 그 활로를 모색했어야 했으니까. 그 방안 중 하나가 바로 류큐였다.
사쓰마의 침략과 간섭으로 왕조의 독립성에 심각한 훼손을 입게되었지만, 류큐 왕조는 지속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으로 중국과 교류를 차단당한 일본 막부가 류큐를 그 통로로 남겨놓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사쓰마 침입 이전 류큐 왕국은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던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일본 막부는 류큐 왕국을 존속시키는 한편 자신들의 세력을 노골화하지 않음으로써, 류큐와 중국 간의관계를 유리하게 활용하려 헀던 것이다._P 178
조선왕조실록에도 사쓰마의 류큐 침공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다.
※조선왕조실록※
또 유구(琉球)와 일본 양국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구는 일본에 소속되었는데, 남경과 복건 사람들이 또한 양국과 서로 왕래하고 있다." 하였다.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1652년 청 순치(順治) 9년 / 정의현에 표류한 중국 상인에게 중국·일본의 상황을 물어보다
이렇게 류큐는 중국이 아닌, 일본에 조공을 하는 류큐번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1879년 일본 메이지 정부 ‘폐번치현’의 일환으로 류큐번은 사라지고, 오키나와 현이 생긴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류큐 처분’이라고 부른다. 지들 멋대로 류큐라는 지역을 처분한거다. 그 이후? 오키나와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영토에서는 유일하게 전쟁영토가 되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한 오키나와 전투가 있었던 지역말이다(오키나와 전투로 오키나와 주민이 최소 ⅓이상이 학살당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 어떤 전쟁을 하던 자국이 아닌 남의 나라에서 했는데, 오키나와에서 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를 자국 영토가 아닌 식민지로써 혹은 처음부터 전쟁기지로 사용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류큐 라는 역사를 지닌 채 일본의 일부가 된 오키나와는 일개 지방이 아니라 제국 일본의 내부 식민지 였다._P 026
하지만 ‘평화의 나라’로 환기되곤 하는 류큐도 실제가 아닌 이미지에 가깝다. 류큐 왕국 역시 여느 왕국처럼 투쟁과 정복 위에 세워진 국가였고, 왕권을 둘러싼 피의 쟁투와 그로 인한 왕통의 변화도 겪었다. ‘평화왕국 류큐’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 제국 일본의 패전 이후 실시된 미군정, 섬 곳곳에 설치된 미군 기지로 인해 상존해온 전쟁에 대한 공포 등 평화롭지 않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빚어낸 또 하나의 허상이다. _031
지금 일본에게 오키나와는 또 다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말이다. 지들이 일으킨 전쟁인데!!!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당연히 “일본이 피해자다”라고 생각하는거다. 물론 오키나와 한 섬만 봤을 때는 전쟁의 피해지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죽었던 수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누구 손에 죽었나?라는 측면에서 보면 대체 가해자는 대체 누구인가? 싶은거다. 학살당한 수 많은 오키나와인이 일본군인 손에 강제 자살당했다. ‘미군에게 잡히는 수치를 당하느니, 그냥 죽어라’ 라는 미명하에. 일본은 그 점을 묵살하고 있다. 오로지 오키나와의 ‘전쟁의 피해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원폭을 맞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함께.
오키나와라는 섬은 전쟁의 피해자는 맞지만, 그게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의 피해자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아우 걍 도쿄올림픽 망해라 하고 저주를 퍼붓고 싶어졌다.
근데 또 이렇게 일본을 욕하자니, 오키나와와 비슷한 우리 제주도의 역사를 봤을 때.... 참 꽁기꽁기 하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