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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책장에 꽂혀 있던 지 한참 된 책이었다. 학창시절 외삼촌에게 선물로 받았다. 당시에는 책 속에 있던 용돈 5만 원에만 온 정신이 집중되어 책은 뒷전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2019년 현재. 이제서야 읽었다. 요 근래 나의 관심사가 임진왜란 이어서 그랬을까, 책장에 있던 이 책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이순신 장군 본인이 작성한 일기를 토대로 각색된 소설이다. 주인공은 이순신 장군 본인이며, 시점 역시 이순신 장군 본인의 시점이다. 작가는 글이 시작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오로지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이순신의 장계, 임금의 교서, 유시를 인용한 대목들은 대체로 이은상의 『이충무공전서』의 문장을 따랐다. 그러나 글쓴이가 지어낸 대목도 있다. 그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한다. 해전(海戰)의 사실은 대체로 『난중일기』에 따랐으나,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글쓴이가 지어낸 전투도 있다. 그러나 이순신 스타일의 전투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인물지>와 <연보>에서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사실이 아닌, 사실에 기초한 소설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대체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겨오고자 했지만, 전개상 지어낸 부분도 있으니 부록인 <인물지>와 <연보>를 보고 독자 스스로 소설과 사실을 구분하도록 했다.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믿을 독자를 위한 배려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정말 소설인지, 이순신 장군 본인의 자서전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실적인 내용 투성이었다. 이는 그만큼 작가님이 글을 잘 쓴다는 이야기다.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
의금부 도사에 따르면,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죄목은 조정을 능멸했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조정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P24
소설은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이 곧 부산으로 넘어오니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토의 머리를 가지고 오라 고. 이순신은 명령을 거역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넘어 온다는 정보를 믿을 수 없음이 첫째요, 추운 겨울바다에 며칠이고 진을 펼치며 모르는 적을 기다리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판단이 둘째다. 하지만 선조는 가토의 머리를 원했다. 자신을, 아니 자기의 나라 조선을 지켜주는 수군이 몰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토의 머리를 원했다. 이순신은 명령을 거역한 죄로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고, 이순신의 자리를 원균이 꿰찼다. 그리고 칠천량 앞 바다에서 조선의 수군은 궤멸했다.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한 결과다. 더 기가 찬 건.... 백의종군 하고 있는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여 일본군과 싸우라고 한 것이다. 원균과 함께 궤멸된 수군과 말이다. (*칠천량해전 :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배)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 P66 ~ 67
얼마전 나의 포스팅에 달렸던 덧글이 있었다. 왜 선조가 의병장을 죽였냐고. 난 이 질문을 그 때, 그 곳에 있던 선조를 비롯하여 많은 정부 관료들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당신들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죽였냐고. 그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한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인데 그렇게 죽일 수 밖에 없었냐고. 왕이 죽이라고 했다고 그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당신들은 사람이기는 하냐고.
세계 그 어디를 둘러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백성 스스로가 목숨을 걸었던 경우는 없었다. 조선의 백성은 달랐다.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낫을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일본군을 상대하였고, 이겼다. 그들의 승리는 조선의 백성들에겐 기쁨이고 환호였다.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에게는 아니었다. 일본에 맞서기는 커녕 의주로 피난을 간 선조에게 의병은 혓바늘 같은 존재였다. 임진년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선조는 많은 의병들을 역모죄로 처형시킨다. 일부 의병은 그것을 피해 산 속으로 숨었다. 정유년 전쟁이 다시 터졌을 때, 그 누구도 의병이 되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선조가 무엇을 무서워 하는 지를. 본인도 언제든 임금의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해서 그는 원했나보다. 임금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을 수 있기를..
이제 서울 백성들 중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터이다.
살아남은 백성들이 마땅이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하거늘, 상복 입은자를 볼 수 없으니 괴이하다.
난리중에 강상이 무너지고 윤기가 더럽혀진 탓이로되, 내 이를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서울의 각 부는 엄히 단속하여라 - p193, 선조의 교서
임진왜란이 터지자마자 선조는 발에 모터라도 달린냥 빠르게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간다. 20일 만에 부산에서 한양으로 진격한 일본군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환도했다. 그러면서 저런 교서를 내렸다. 정확히 전쟁이 아직 끝난 상황도 아닐뿐더러, 전 국토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집마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많고, 산 자가 적기에 입에 풀칠할 여력도 노동력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구휼미를 내려주는 건 고사하고, 윤리규범을 지키게 엄히 단속하라니 ..
항왜, 순왜라는 단어가 있다. 항왜는 투항한 일본인을 이야기하며, 순왜는 일본에 협력한 조선인을 이야기한다. 7년이라는 전쟁 속에서 많은 항왜와 순왜가 있었다. 조선과 전쟁을 왜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군이 항왜가 되었다. 선조는 일부 항왜 에게는 관직까지 주며 조선의 군인으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여담이지만 대부분의 항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북부 지역으로 쫓겨난다.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후 인조 재위 때 대부분의 항왜가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순왜는 지금으로 치면 친일파, 매국노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이면을 잘 보자. 수 많은 순왜들은 대게 힘없는 백성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지켜 주었어야 할 나랏님이 먼저 그들을 버렸다. 심지어 저 멀리 의주까지 도망갔다. 나랏님은 명나라까지 들어가려고 했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은 얼마나 허탈했을까. 그 뿐이 아니다. 선조는 자기 아들들을 각지에 보내어 의병 활동을 독려하라고 했다. 세자였던 광해군이야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임해군, 순화군은 다르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그들은 의병 독려는 커녕 부녀자 겁탈과 민간 수탈을 자행하였다. 참다 못한 마을 주민들은 일본군에게 조선의 왕자를 그대로 넘겨버린다. 과연 이들을 나라를 버린 매국노라고 욕할 수 있을까?
선조는 순왜에게 이런 교서를 내린다. 다시 돌아오면 처벌은 면하게 해주겠노라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본인은 제 한목숨 부지하려고 의주로 도망갔으면서 말이다. 기가 차고 코가 찰 노릇이다.
잘못된 정보를 주며 수군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던 선조의 명령, 그 명령을 어겼다고 죽여도 시원치 않다며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켰다. 원균이 조선 수군을 몰살시키자 마자 과인의 잘못이라고 얼굴을 싹 바꾸며 이순신을 복직시켰다. 복직시키고 얼마 안있어 조선의 수군은 힘이 없다며 육군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런 선조의 명령을 다시 어길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이순신은 전과 달랐다. 앞서 백의종군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엔 보고서를 작성하여 선조에게 올린다.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다고... 그렇게 승리한 전쟁이 명량해전이다.
정유년 가을에 나는 타격 방위를 설정할 수 없었다.
조정은 장님처럼 적의 먼 외곽을 더듬고 있었다.
강화 협상의 신기루 속에서 경상 해안 쪽의 점점 더 강력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명의 천자가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밀통해서
내 함대가 아무 곳도 조준할 수 없고 내 칼이 아무것도 벨 수 없게 되는 환영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 P260
선조가 천군이라고 부르며 치켜세운 명의 원군. 그들은 일본과 협상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인 조선은 뒤로 뺀 채 그들끼리만 쑥덕쑥덕. 그리고 협상이 체결되었으니 일본군이 조용이 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주라고 했다. 백골이 강토를 뒤덮었다.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을 평화롭게 보내주라고 하다니. 명나라의 말이 백 번 옳다는 선조는 조선의 왕이 아니었다.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정유일기)
7년 전쟁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은 그 곳에서 전사했다. 주군에게 버림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싸웠다.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에 흔한 애도의 말 조차 하지 않았다. 비문은 커녕 시호 조차 내려주지 않았다. 그의 시호 충무공은 인조가 내려주었고, 비문은 한참 뒤 정조가 내려주었다.
수 많은 책, TV방송을 통하여 임진왜란을 보았고 들었고 공부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기적이어서 이순신 장군을 이해하지 못한다. 왕이 자기를 질투하여 죽이려 했고, 버렸고 또 버렸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선조를 등지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라는 이유만으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 수군의 총 대장이었던 이순신, 그는 조선의 군대 1/3을 호령하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왕을 갈아 엎을 수 있었을 뿐더러, 민심도 이순신 그를 향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살면 저렇게 우직하게, 오로지 한 길만 갈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이순신 장군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병신년에 의병장 김덕령이 장살되었을 때 나는 내가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식을 분명히 알았다.
김덕령은 그렇게 죽었다. 천하가 임금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곽재우는 거듭된 심문 끝에 겨우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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