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정재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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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자국 건너 한발자국, 발에 치이는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천년고도 교토. 일본 천년의 역사와 현대의 발달한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일본의 명소 중에 명소다. 덕분에 세계 각국에서 인기있는 관광지로 손 꼽히는 곳이다. 물론 나 역시도 이러한 교토를 너무나 좋아해서 근 3년간 해마다 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갈 때마다 한반도에서 넘어간 도래인의 흔적을 찾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런 교토에는 1592년,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욕이 가득 담겨있기도 하다. 실례로 이곳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귀와 코가 묻혀있는 코무덤(이총)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재 빨리 그 틈을 파고들어 천하를 평정했다. 그는 관백의 자리에 올라서 일본 천하를 호령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 통일을 넘어서 대륙으로 넘어올 욕심을 들어냈다. 그 욕심을 공공연하게 들어냈음에도 2백년간의 평화에 찌들어 있던 조선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렇게 7년간 전쟁이 시작된다. 임진왜란 관련 포스팅도 관련 사적지를 다닌 답사기에 있으니 패스 !

뭐 여튼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를 자기의 거주지로 삼고 대륙 평정 계획을 위해 착착착 실행에 나선다. 도로정비를 했고 자기를 위한 궁궐(니죠죠)을 세웠다. 교토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지금의 교토가 되었다. 물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도요토미에 대한 유적이나 이런건 많이 파괴되었다고는 하나, 교토의 도시 구조는 도요토미가 일군 그대로의 모습이다.

아 또 하나 ! 일본의 유명한 벚꽃놀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것도....^^...뭐 한낱 꽃나무인 벚꽃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만은 하하하


서양 열강들이 아시아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일본에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된다. 일명 메이지 유신이다. 이때 일본은 서양의 문물 받아들이면서 철저하게 근대국가로 나아간 반면,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시절 일본의 권력은 교토에서 도쿄로 넘어갔었다. 그때 한번 교토는 크나큰 위기를 맞았었지만 니시진, 은의 무역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더랬다. 헌데 시간이 지난 뒤 메이지유신 - 왕정복고가 된 후 일왕의 거주지가 교토에서 도쿄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 교토는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교토 사람들은 비와호 수로공사 등을 하면서 또 한번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비와호 수로공사 때 개설된 유명한 장소로는 난젠지 수로각, 인클라인 등이 있다. 지금은 단풍명소로도 각광받는 곳이다. 

본격적으로 일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조선 점령의 야욕을 들어내고, 그 계획을 착착 실행한다. 하필 그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해 망가질때로 망가진 상태에서, 쇄국정치라는 커다란 한방까지 날린 상황 ^^.. 나라의 발전시계가 최소 이백년 이상 거꾸로 돌아갔던 때였다. 그렇게 일제의 야욕은 착착 진행됬고 대한민국 역사 상 최고의 암흑기가 찾아온다.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포스팅도 워낙 자주 했으니 일단 패스.. 하..

세계 제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미군의 감시하에 군대도 보유하지 못하는 나라로 바뀌었다. 일본 땅에는 원자폭탄도 2번이나 떨어졌다. 경제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일본에 의해 짓밟힌 우리나라보다 더 할까냐만은 ㅡㅡ..)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에게 또 한번 기회가 온다. 바로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이다. 한반도는 또 한번 전쟁의 땅이 되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을 PICK하여 경제적으로도 이끌어주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공급을 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일본의 경제는 활활활.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제 대한민국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했다. 문제는 그 선상에 있었던 한일협정. 이 한일협정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 했을 당시에 대한 모든 문제가 봉합되버렸다. 이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사죄, 배상문제 포함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에게 과거에 대한 일에 대하여, 제대로 된 사죄 한번을 못 받은 바보같은 나라가 되었다. (할말하않)


일본은 과거부터 수많은 자연재해가 일어난 나라이다. 과연 그런 나라의 땅에서 천년 전의 역사를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일본의 가옥 특징은 목조 건물이다. 하여 지진에 취약하고, 화재에 취약하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선 수많은 대지진과 대화재가 일어났다. 하여 천년 전의 가옥, 사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자연재해에 전부 아스라지고 말았다. 하여 매번 복구하고, 또 복구한 그러한 도시가 교토인 것이다. 뭐 따지고보면 우리나라도 경주를 천년고도라고 부르니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교토의 사람들의 칠전팔기 정신을 꽤 높이 사고 싶었다. 도시의 동력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정말 너무 탁월했다. 심지어 그 위기가 여러차례 왔는데, 그 모든 것을 다 기회로 바꿨다는 것이 정말 와.. 오뚜기정신인가 ㄷㄷ
진짜 정말 이런 면은 확실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뭐 ... 나만 그렇게 생각하면 뭐하나 ... 매번 일본의 안좋은 점만 배우고 좋은점은 1도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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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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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기 전 까지, 딱 겉으로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일본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만큼 나도 모르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물론 일본인이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조선인들 끼리의 살인사건, 조선인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연쇄살인 사건, 근대의 정조와 사랑이야기, 몰락한 왕조와 부패한 귀족의 이야기, 신 여성의 이상과 현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혼돈과 혼란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위에서 말하는 조선 귀족은.. 조선을 일본에게 송두리째 가져다 바친 친일파들에게 주어진 작위이다. 일본이 그들을 조선귀족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도 후하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 대부분의 조선 귀족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함정 ㄷㄷㄷ
재산을 탕진하고 이왕직, 총독부에 돈 달라고 생떼를 부린 조선귀족(친일파) 중에는 당시 순종의 장인이었던 윤택영도 포함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꽤 많은 친일파의 재산이 광복 전에 탕진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랄까. 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토지왕이나 몇몇 친일파의 재산은 꽤 오랫동안 남아서 그 자손들의 배를 불려준 것도 사실 ! (남이섬은 민영휘 자손의 땅이라죠^^?)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안기영 교수에게는 이성규라는 아내가 있었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교원 생활을 하던 이성규에게 반한 안기영은 그녀에게 끈임없이 구애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시대가 으레 그렇든 아무리 신여성이라도 결혼을 하게되면 가부장제도에 갖혀서 사는 삶을 살게 된다. 이성규 역시 그랬다. 심지어 남편 안기영기 해외로 유학을 떠나면서 집안의 생활비, 남편 안기영이 남긴 빚까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이성규는 고된 삶을 버텼다. 안기영이 유학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남편이자 음악과 교수였던, 독립운동가였던 안기영은 조강지처를 납두고 본인이 가르치던 제자 김현순과 눈이 맞은 것이다. 거기다가 너무 뻔뻔하게도 안기영과 김현순은 해외로 도피한다. 심지어 애까지 낳고 살고 있었다. 

당시의 형법에는 간통죄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간통죄는 '부인 및 그 상간자의 간통에 대하여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하여 남편의 간통에는 면죄부를 주었다. 즉 남편이 젊은 여자와 같이 살고 있어도 조강지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소름돋는 사실 하나는 1930년 일본의회에서 남편의 간통죄를 처벌대상으로 하자는 문제가 올라왔었는데, 당시 첩을 둔 의원들의 조직적 반발로 입법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남녀 모두의 간통죄가 처벌대상이 되었는데, 이 역시 웃긴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해당 법안의 투표를 진행한 국회의원 수가 110명이 었는데 찬성이 57표, 반대가 56표 였다고 한다. 딱 1표 차이로 간통죄가 입법화 된 것이다. 아! 하지만 이런 간통죄도 2015년에 폐지되었다.

이 외에도 이 책에서는 오랫동안 인문학에서 금기시 되어왔던 명사들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위에서 언급한 안기영도 그렇지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박희도의 삶도 그렇다. 당대에는 친일보다 성추행을 더 금기시 했나보다. 박희도의 친일행적은 현대에 들어와서 속속들이 밝혀졌지만, 그가 전 조선을 뒤흔든 '여 제자 정조 유린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책은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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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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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규슈를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서 답사를 하고 있었다.

북부는 요시노가리, 히젠나고야성, 가라쓰, 아리타, 이마리, 나가사키, 다자이후

남부는 사쿠라지마, 심수관, 기리시마, 남향촌 등등


뭐랄까 내용 자체는 새롭다! 라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자세히 적혀있는 느낌이랄까?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이름을 최대한 기억하려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내가 알고있던 이삼평, 심수관, 백파선, 박평의 말고도 다른 도공의 이름이 실려있었다.


이미 일본 땅에 20년 가까이 정착한 상태에서 귀국한다는 것은 정부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포로였다가 귀국한 다음 자신들이 받게될 처우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도 했던 모양이다.

-178p


임진왜란의 다른 이름은 도자기 전쟁, 당시 일본 장수들은 수 많은 도공들을 사로 잡아갔다포로로 잡혀갔던 도공들은 임란이 끝난 직후 까지만해도 머나먼 타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정치도 안정화가 될 무렵, 포로로 잡혀간 도공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많은 도공들이 터를 잡았던 사쓰마번에서는 도공들을 사무라이 계급과 동일 대우를 해주며 지원해주었다.


조선에서의 그들은 도자기를 구우면서도 온갖 부역을 했어야 하는 천대 받는 아무개였는데 일본에서는 그들을 장인으로써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것이다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고향으로 돌아와라! 한들 누가 가겠는가 돌아가는 그 순간 그들은 다시 모진 일을 감내해야하는 아무개가 되는 것인데그들은 그렇게 일본에 남아서 도자기를 빚었고, 그 도자기는 서양에 곳곳에 널리 알려지며 명품으로 자리잡았다.


다른 단락은 감정의 동요가 없었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조선이라는 나라의 무능력함에, 한 치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조선에 치를 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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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靈探偵八雲10 魂の道標 (單行本)
카미나가 마나부 / KADOKAWA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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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9권이 발매된 뒤 장장 5년 만에 나온 신간이다. 즉 이 5년간 작가님은 야쿠모 문고판 발매와 각종 신작만 발행하고 있었다. 문고판을 사고 있으면 신간이 나오겠지, 작가님의 새로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나오겠지 하고 기다린게 벌써 자그만치 5년 이라니.


아무래도 5년만에 나온 신간이다보니, 앞에 내용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소설(일반판)은 두꺼우니까 문고판으로 8,9권을 읽고나서야, 10권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서다 보니.... 확실히 한글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걸린다는게 함정


나나세 미유키로 인해 왼쪽눈의 시력을 잃은 뒤의 야쿠모는 본인의 존재가치에 대해 생각을 하다못해 저 멀리 심연의 끝까지 떨어진 듯 싶었다. 진짜 읽는 내 몇 대 쥐어 패주고 싶을 정도 ㅠㅠㅠ 하루카가 야쿠모가 자기를 두번 다시 안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까지, 정말 온 감정을 다 토해내며 울부짖고 나서야.......그때서야 내가 알던 그 야쿠모로 돌아왔다. (소설의 반페이지가 지나서야 .....하 하루카 넘나 큰일한것. 반 페이지까지 읽는데 넘나 진짜 쥐어패고 싶었다 ㅠㅠㅠㅠㅠㅠ)


정말 진짜 생각보다 야쿠모가 정신을 차리는게 너무 오래 걸렸는데, 아마 야쿠모를 바꿀수 있는 하루카가 각성하기까지가 오래걸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루카 역시 자신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떠날까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였으니까.

다만 야쿠모 보다는 강인한 사람이었기에, 보다 빨리 본인의 약한 모습을 마주하고 야쿠모를 정신차리게 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물론 그 와중에, 너무나 감정적이다 보니 야쿠모에 대한 본인의 진심까지 토해내고야 말았다.


야쿠모의 "내가 상냥하다는건 망상일 뿐이야" 라는 이 한마디에 완전 빡친 하루카는 "나는 망상을 좋아한게 아니야 !" 이렇게 되받아치고야 만것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제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라는걸 깨달을진데 두뇌회전이 빠른 야쿠모니 말 다했죠. 하하하 (뭐 그렇다고 이 둘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거나 그런 건 없다는 걸 미리 밝혀 둡니다ㅋㅋㅋ)


진실이 하나 둘 풀리면서 표면위에 올라온건 이기심에 가득찬 나쁜 어른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무참히 짖밟인 어린 영혼들. 문제는 그 어린 영혼들 사이에는 야쿠모의 아버지인 '운카이'도 있었다. 10권에서는 절대 악이라 생각했던 '운카이'의 과거가 전편보다 더 많은 부분이 들어나있다. 문제는 '운카이'의 과거는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까지 절대 악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이래서 이렇게 절대 어둠이 된걸까'라는 일종의 이해와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너무 안타까운 과거라는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운카이처럼, 야쿠모가 혼자였다면 (잇신이나 하루카 등이 없다면) 운카이 처럼 그 많은 일을 겪었다면...아마 엄청난 절대 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과연 11권은 또 언제 나올까 싶고..... 확실한건 11권에서 나나세 미유키의 타겟은 아마 하루카가 될 거 라는 것일까나. 하 ㅠㅠㅠㅠㅠ 최소 5년은 군말 않고 신간이 나오길 기다리겠습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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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2 - 치욕의 역사, 명예의 역사 땅의 역사 2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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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역사의 아이러니

경상도 사람 박성빈은 농학농민군의 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생포가 되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아서 초야에 묻여 살았다. 박성빈에게는 아들 여럿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박상희는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총살당한다. 박상희의 동생도 남로당원이었다. 박상희 동생은 형이 죽고 2년 뒤 여수, 순천에서 벌어진 군부대 반란 사건에 가담하여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된다. 그가 바로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다. 그의 정권 하에 경제가 발전된 부분은 분명 있으나, 그가 독재를 한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도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권에서 쿠테타로 규정되던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그 였다.

 

구한말 의병장, 우국지사 최익현은 동학을 동비라고 비하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고, 동양평화론을 말했던 안중근 의사는 동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황해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을 토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독 눈에 띄던 동학군 일원 한명은 죽이기 아깝다 하여 살려주고, 가까이 지냈는데 그 자의 이름은 김창수 이다. 김창수는 훗날 한국인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이다)

 

현대인들에게 동학동민운동은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민초들의 '혁명'이다. 하지만 당시를 살던 (양반)독립지사들에겐 그저 조선의 질서를 망가트리려 하는 천민들의 쿠테타였다. 반면 해방 이후 정권의 독재자가 된 한 남자에게는 혁명이었다.

역사는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당시의 시선 - 당시의 사회를 살던 눈으로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수 백명의 일반인이 군인의 손에 학살당했다. 이 와중에도 본인들이 일으키는 학살 극이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은 인지 했는지, 인민군이나 무장공비로 변장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총을 빗 맞아서, 시체 더미 속에 있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생존자가 나왔다. 군부에 의해 은폐되었던 학살 사건은 생존자들 덕분에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진다.

-사람이 총을 쏘니까 막 내 위로 엎어질거아니야. 그 사람들이 막아줬어

-어머니는 저쪽, 우리 형은 요쪽, 피만 위에서 내리 쏟아진 거 그것만 덮어 썼지.

-그냥 위에서 막 뭐 넘어지니까 막 피가 입으로도 눈으로도 다 들어갈 거 아니야.

-사람의 피가 참 냄새가 지독해. 어째 그런고, 그래도 거기서도 냄새가 지독하단 생각은 들어


거챵 양민학살과 관련하여 당시의 관계자들이 법정에 섰다. 누구는 무기징역, 누구는 징역 몇년. 하지만 1년 뒤 전원 특사로 풀려난다. 그리고 그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두루 요직을 거쳤다.

 

당시에 거창 박산골에서만 희생된 사망자는 719, 그 중 15살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은 364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희생되었던 박산골은 3년간 출입이 통제되었다. 통제된 기간 동안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은 작은 유골 100여구를 몰래 빼어나 다른 곳에 암매장했다.

 

거창학살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여 집단분묘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에서는 거창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전부 구속한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거창 사건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의 역사 2권은 1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내용이 많이 있다. 친일파에 대한 분량도 상당하며,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에 대한 부분도 상당하다.. 

 

TV조선에서 방영된 '땅의 역사'에서 거창 양민학살에 대하여 조명했을 때, 박종인 기자의 울분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마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창 양민학살사건, 여순 양민학살사건,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규정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학살 사건을 본다면 아마... 그래서, 너무 잔혹하고 믿고 싶지 않아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자행한 일이라는게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은 걸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때의 국가의 모습은, 국민을 학살하던 국가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과 다를바가 없었기에... 일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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