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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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필이 꽂히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러 사람의 시나 수필을 모아 놓고 해설을 하는 모음집이나 가이드 안내서 같은 건 또 별로다.

다양한 이들의 시 67편을 책 한권에 모아 놓았으니, 각자 다양한 개성이 두드러져서 통일된 일관성 따위는 느낄 수도 없는 것이 겉도는 느낌일까 우려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 시인의 그것이었기에 혹시나 했었는데, 기대는 날 저버리지 않았다.

이영광 시인이 선별한 시를 '홀림-떨림-울림'의 과정으로 수용ㆍ 해석해 내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시와 비껴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것이, 한데 어우러져 이영광표 시집이나 수필집 한권을 읽는 느낌이다.

그의 까탈스러운 시 편력을 엿보는 건데도 슬쩍 눈 흘기게 되기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 책은 그가 신문에 소개했던 시들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그가 신문에 시를 소개하려고 시집들을 모아 읽으면서 느꼈다는건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유난히 많이 나온단다.

큰 난리도 없고 배고픔도 덜한 이 시절이 외려 더 살기 어려운 시절인 탓은 아닌가 싶다며 눙을 친다.

그러면서,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왜 이리 멋진거냐, 아흑~--;

 

까탈스러운 시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냥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시의 자리에 사람이나 사랑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로 통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말해,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편력을 한꺼풀 들추고 봐야만, 시종일관 무심한듯 하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뚝심같은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겠다.

 

좋은 시는 우선 그저 좋다. 왜 좋은가는 그 다음이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느낌과 뜻을 골똘히 되짚어 수습하도록 만드는 그 찌릿찌릿한 수용과정을 '홀림-떨림-울림'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좋은 시가 많다고 했으나 마음껏 거두어 담지를 못했다. 어떤 것은 좋아서 겨우 좋다고 말해볼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참 좋은데도 어째서 그러한지 잘 말할 수가 없어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즐거운 비명과 괴로운 신음이 이 책의 겉살과 속살을 이루고 있다는 변명을, 꼭 드리고 싶다.('머리말' 중에서)

 

좋은 시는 저렇다고 하지만, 좋은 사람은 그저 좋다.

왜 좋은가 따위는 없다.

좋은 사람을 보면 그저 닮고 싶다.

번지고 스며 물들 듯이 그렇게 그렇게 닮고 싶다.

좋은 시와는 다르게, 좋은 사람을 두고선 그런 생각을 되돌려 한다는 것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얘기이다.

시를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되어도 그만이지만,

사람을 놓고는 상황 종료가 됐다는 것은 과거형이란 거고,

사람을 놓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다.

 

내가 왜 시도 아닌, 시 해석을 놓고 멋지다고 설레발을 치느냐 하면,

시가 없이 그의 해석만으로도 하나의 시나 수필 같은 것이 작품으로 내어놔도 손색이 없다.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 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다.(19쪽)

사랑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기를 발설하지조차 못한다.(23쪽)

 

         호 구 糊口

                 - 권혁웅 -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호구糊口"는 아무래도 전서의 비유겠지요. 봉투에 침을 발라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호구는 또 입맞춤이기도 합니다.  통째 봉해 보내는 입술은 그리움 전부를 간절하게 대표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전령이겠지요.

  호구는 원래 간신히 먹고 산다는 뜻이니,  이 시는 결국 사랑의 가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홀몸으로만 불탈때 사랑은 조바심치다 목숨을 잇기 어려운 극빈에 떨어지지요. 그러니 마음은 마음에게 전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 아래"는 정말 추신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매단 사람의 버둥대는 사지처럼 이 절박한 사랑의 몸체는 입술에 특명을 준 채 물러나 있거나 가라앉아 있을 뿐입니다. 몸 전체가 아니라 입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치지요. 추신은 그러니까, 연서의 본문이자 입술의 배후조종자이며 사랑의 무의식이라 해야겠군요. 무의식은 원래 추신을 닮았습니다. 짧은 석 줄, 결코 짧지 않군요.(43쪽)

개인적으로 처음보는 시였지만, 시와 시 해석 모두 다 넋을 놓았었다.

조바심에 달뜬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본 기억,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배달한다는 건 어쩜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일지도 모르겠다.

할말이 너무 많지만, 채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목이 매어 눈물을 꼴깍 눌러 삼킬 뿐이다.

마음을 마음에게 전할 수 있는 길은,

할말이 너무 많을 땐 그저 말줄임표(ㆍㆍㆍㆍㆍㆍ )가 제격인 셈이다.

 

옛날의 행운 -김성윤 군의 회상   

                    - 정현종(1939~ ) -


젊은 시절에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걱정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있었어요.

그걸 내놓고

먹으라고

먹으라고 했어요.

참 행운이었어요.


 

정말 저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없는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도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날을 무탈하진 않았어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던 거다. 이 시는 그 무언가를 "마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젊음은 모질게 노력해 갖추어도 한발 내디딜 곳이 마땅찮고, 우리 모두는 무엇이 죽이러 오는지 모르면서도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쫒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안 보이는데도 한 잔 술처럼, 두툼한 파전처럼 나누어 먹을 수 있던 것. 먹다보면 또 어떻게든 힘내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던,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이 보이지 않는다.

  늘 제멋대로인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 친구와 동료들과 겨루기 바쁜 우리가 저 "마음"이라는 것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까.

'마음'은 '젊음' 또는 '희망'의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수조 앞에서

             - 송경동(1967~ ) -


아이 성화에 못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강한 생각과 끓는 감정을 품고도 버티어내는 담담한 말은 더 강한 말이다. 이 시의 말들은 화장을 벗겨낸 우리 삶의 민낯이 킬링필드라는 난감한 진실을, 그걸 그저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의지를 담고도 흐트러짐이 없다.

  싸움을 사랑과 평화라 굳게 믿는 그는 감옥을 나와 또 '현장'에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성한 다리로 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과격하지 않다. 과격한 건 저 투명한 "관계"다. 저것은 관계가 아니다.

또 '송경동'의 저 시를 보면 '싸움'과 '사랑'과 '평화'는 모두 같은 근원의 말들인가 싶기도 하다.

 

또는, '시는 원래 살기 막막한 사람의 말'이기도 하다니까 모든 시는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독'이 다른 말로는 '경배'이고 다른 말로는 영광'이고 또다른 말로는 '홀릭'이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막막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쉬운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것일 테니까 시를 읽으면서 살면 되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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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3-06 06:54   좋아요 1 | URL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 담은 시는
이웃들한테도 좋은 이야기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2013-03-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8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녀, '쿨女'가 별명이지만,

삐쩍 말라 날카로워 보였으며, '나는 신경질적입니다' 하고 양미간에 내천(川) 자를 그린걸로 미루어, 그렇게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라는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위, 아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여느 때처럼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에 묻혀버렸다.

으레 하던 데로 하려는데, 그녀가 "상담 요청이요"하고 가로막는다.

자세히 보니, 입술은 부르트고 눈은 떼꾼한 것이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해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안되는 거네요...하다보니, 또 다른 그녀도 똑같은 증상으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의 체질은 외모가 드러내는 그대로...가 맞았는데,

교회 성가대에서 '솔로이스트'로 활동하면서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말투를 익혔던 거다.

한동안 허리가 심하게 아파서 성가대를 서지 못했었고, 그러면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열이 위로 몰린거였다.

 

또 다른 그녀는 '집파녀'로 불렸었다.

수도꼭지에 버금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하나, 둘, 셋...큐~!'하면 핑그르르가 아니고 '눈물 뚝 콧물 뚝' 떨구며 울어대는 통에,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도 울어서 우는 걸 직장 동료에게 들키면 벌금을 만원씩 내기로 했었는데, 벌금을 내기 위해 '집을 팔아야 할 정도'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어찌어찌하여 눈물을 흘리는 횟수는 줄었는데, 대신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중이 제머리 못 깎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제 자신은 돌아보지 못했었다.

 

ㆍㆍㆍㆍㆍㆍ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피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140~141쪽)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솔직히 이 책에서 저런 의도를 읽어낸다는 무척 소극적인 독서법이다.

빅터프랭클이 누구인가 말이다.

인간존엄성의 승리이며 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이고...이런 어려운 얘기들을 해야 겠지만,

그건 이 책을 이미 읽었거나 앞으로 읽게 될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고 깨달은 것은, 이 한마디로 함축할 수 있다.

Love will find a way.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길은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는 것.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ㆍㆍㆍㆍㆍㆍ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ㆍㆍㆍㆍㆍㆍ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 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ㆍㆍㆍㆍㆍㆍ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120~122쪽)

 

난, 빅터 프랭클의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읽었던 터라, 이런 자전적인 이야기가 주는 교훈적이어야 한다는데서 오는 일종의 거부감이 덜했다.

게다가 '자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감정과 무감각의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수용소'라는 상황과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익명을 사용한다던가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가까이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종교에 의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나무나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단지 한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은 굶주림과 수모, 공포 그리고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의 감정들을 삭인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런 깨달음과 교훈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의 '로고테라피'의 이론을 내가 얼마나 그럴 듯하게 생각하느냐, 나라면 임상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이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ㆍㆍㆍㆍㆍㆍ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79~80쪽)

 

그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견뎌내는 방법으로, 그는 '아내'라는 방법을 택했다고 했는데...

그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는데...

사실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으면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 얼마 안되어, 아내가 죽었다는걸 이미 알게 된다.

그러니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아내와의 대화가 아니라, 그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내는 가공의 인물이 되는 것인데..., 뭐~--;

 

난 그의 로고테라피를 임상에 적용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지만,

위의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내와 대화를 하는 상상으로 지옥 같은 수용소를 견뎌낸 그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현실적이고 논리정연한 이론을 정립한게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내가 평소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예쁜 말로 잘 정리해 놓은 것 같아서 옮겨본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84~185쪽)

흔히들...

육체적인 사랑만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안된다고 하고, 그건 탐닉이라고도 하곤 한다.

반대로 머릿속으로만 하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하면 안된다, 그건 상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고로,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라고 하는 말은, 말뿐인 '공허한 위로'인 것이다.

 

적어도 보고 만지고 냄새맡고 느낄 수 있어야 상처가 잘 아무는 곪아 터지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고로,

Love will find a way.

옆에 내가 붙여넣고 싶은 말은,

Love is physical...이다.

 

 

 

 

 

 

 

 

 

 

 

 

 

 

 

 

 

 

Winterplay - You're in my heart

I didn't know what day it was
when you walked into the room
I said hello unnoticed
you said goodbye too soon
breezing through the clientele
spinning yarns that were so lyrical
I really must confess right here
the attraction was purely physical
you're in my heart, you're in my soul
you'll be my breath , should i grow old
you are my lover, you're my best friend
you're in my soul
my love for you is immeasurable
my respect for you immense
you're ageless ,timeless, lace and fineness
you're beauty and elegance
you're rhapsody, a comedy
you're a symphony and a play
you're every love song ever written
but honey what do you see in me
you're in my heart , you're in my soul
you'll be my breath , should i grow old
you are my lover, you're my best friend
you're in m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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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0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좋네요.^^

2013-03-03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서술 좋네요. 'Love will find a way.' 도 좋구요. 어쨌거나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죠..^^

하늘바람 2013-03-03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음악들으러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온답니다

순오기 2013-03-04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 햇살 좋은 3월에도 즐거운 일상 누리시기를...^^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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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함민복에게 기꺼히, 감히 실천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솔직히 그가 시에 쓴대로 실천을 하고 사는지 어떤지는 보지 않고, 접하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이런 시들을 쓸 수 있는 시인라면 실천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겠다는 걸 그의 삶을 보거나 접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겠으니 말이다.

 
함민복이 누구냐 하면 '긍정적인 밥'이란 시에서,

 

한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집 한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집이 국밥 한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했던 사람이다.

 

시를 feel 충만하여, 그리하여 말랑말랑해져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하는 걸 느낄 요량으로 읽는 나같은 사람한테는,

저 시를 모르고 읽을라치면,

요번 시집의 시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딱딱하기도 한 것이 읽기가 좀 버거울 만도 한데,

'긍정적인 밥'을 쓴 '함민복'이라는 걸 알고 읽게 되면, 시가 아름답고 서러워 눈물이 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와 신념대로 실천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소박하고 곤궁할지라도, 그래서 서러워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마음을 다잡아 먹고 읽어나갔는데,

그런 나를 초반부터 무장해제시킨 시가 바로 이 시였다.

당신은 담배를 피워 물어 영혼에 뜸을 뜨고 계신거였다지만,

이 시 한편으로 충분히 시인은 내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되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살며 풀어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살면서 내뱉었던 말들이 아니라, 살며 풀어놓았던 말이라고 하니...왠지 구전 이야기의 느낌이다.

풀어놓을때는 술술 잘만 풀리던 그것들이,

연기의 형상을 하고도 거두어 들일 때는 그토록 힘이 든 것인가 보다.

입가 쪼글쪼글 주름이 생기도록 힘껏 빨아 들인 후,

영혼에 바람을 넣어 뜸에 고루 불을 당긴다.

풀어놓을 때 칼날이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했던 말들이,

거두어 들일 때는 연기의 형상을 하여 부질없어진다고 해도,

눈을 지그시 감고 시간과 온도를 가늠해서

제대로 달구어 은근한 불로 밥에 뜸을 뭉근히 들이듯이 뜸을 떠야 한다.

말조심을 해야 하는 곳은 장소 불문이지만,

눈 지그시 감고 추억에 잠겨 있는 노파에게선 비껴가기로 하자.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이 시는 시집의 제목과 같은 표제시이다.

그리고 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듯 하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 실천하며 살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서럽고 눈물 나지만,

그 눈물을 초승달처럼 생긴 눈꺼풀로 자르고,

그렇게 그렇게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달이 차고 이울듯이, 삶 또한 영원한 도돌이다.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 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양팔저울'부분)

 

 

얼마전이었다.

무슨 말을 하다가 친구가 '나는 잘 해준 것도 없는데...'하는데 참 서러웠었는데 내색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나를, 내 자신을 보태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하고...그러면서 관계는 형성되는게 아닐까?

쌍둥이처럼 나를 닮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 닮은 친구...

친구의 모습에서 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친구에게 더하는게 나에게 더하는 것이고,

친구에게서 덜어내는 것이 내 자신을 에이는 듯 깎아내는 것인데...

친구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말로 해 무엇할까?

친구를 향한 집중은,

바로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것인데,

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대화가 부족했나보다.

아니면, 내가 내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나?

 

빨래집게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때

제 몸을 넌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빨래집게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루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대운하 망상

 

물이 법(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

 

개인적으로 '빨래집게''대운하망상' 같은 시도 좋았지만, 좀 어려웠다.

누구, 내게 조곤 조곤 해석해 주는 사람 어디 없을까,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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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2-28 16:27   좋아요 1 | URL
갑자기 시 좋아하던 20살로 절 데려다 주셨더랬어요
그랬군요 눈꺼풀은 눈물을 잘라냈군요, 늘 그렇듯
눈에 힘 꼭 주다가 눈꺼풀로 싹둑.

프레이야 2013-03-01 10:50   좋아요 1 | URL
함 시인은 참 선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산문집 '미안한 마음'을 읽었는데 거기 글들에서도 그런게 느껴지구요.
이 시집, 요즘 평들이 좋으네요. 멋진 하루 보내세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8:16   좋아요 1 | URL
나무꾼님 전 빨빠래집게,대운하망상 다 이해되어요. 어쩜 좋아요 ㅋ
제가 원래 독해력이 많이 딸리는데 언제나 제 멋대로 해석하니 이런 현상이. ㅠ
용서하세요.^^*
 
동양학을 읽는 월요일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매일 넉넉한 햇살을 받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백만불 짜리 두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을때는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모르다가, 제약을 받게 되어서야 우린 그런 일상이야말로 진짜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동안 조용헌의 책을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은 글에서 말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글을 읽는건데도 쫄깃하고 찰진 것이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예전에 어디에선가 '대한민국 3대 구라'라고 해서 백기완, 황석영, 방배추(또는 황동규)를,

'대한민국 3대 교육방송'이라고 해서 이어령, 김용옥, 유홍준을, 꼽는다는 얘길 주워 들었었다.

그때 '구라'와 '교육방송'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구라'라고 불리우는 쪽은 '눈높이'를 낮추고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말로 표현하는 구어체적인사람들이라면, '교육방송'쪽은 방송에나 나올법한 학술어를 문어체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봤었다.

그리고 그 중간의 어디쯤에 내맘대로 조용헌을 놓고 이쪽, 저쪽으로 저울질 했었다.

('구라'라고 하기엔 살짝 무겁고, '교육방송'이라고 하기엔 살짝 가벼운 것이 말이다, ㅋ~.)

 

암튼, '구라'보다는 '교육방송'쪽에서 무엇이든 하나라도 배우고 얻어가질게 있다고 생각했었던 난,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쑥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헌의 이 책은...글에서 말맛이 느껴지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금상첨화였다.

 

그런 조용헌이 이 책의 곳곳에서 나의 편을 들어준다 싶을 정도로 나와 취향이 겹치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로 눌러적은 글씨, ㅋ~.)

언젠가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난 글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홀라당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 좋은 글씨로 쓰여진 내용이 뭔가 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될게 없고, 그 글씨가 만년필로 적혀 있으면 그만이다.

그딴 걸 구별할 내공 같은게 내겐 없는고로, 좋은 글씨가 나쁜 내용을 담고 있을리는 없다고 믿는다~--;

정작 나는 만년필 촉이 종이를 긁을때마다 만들어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아 사용하지 못하면서,

종이에 반듯하게 새겨넣은 듯, 눌러 적힌 글씨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맘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필기구가 워낙 많다보니, 고가의 번거로운 만년필을 선뜻 얘기하기에는 좀 궁색하고 설득력이 없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학야녹재기중의學也祿在其中矣'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학문을 하면 녹봉이 자연히 따라온다'는 뜻이다. 30대 중반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기약 없는 보따리장수(시간강사)를 하러 다니던 시절에 수없이 되씹어본 문구이다. 나는 서푼짜리 보따리장수를 하기 위해서 공부했단 말인가?

  그러다가 깨친 사실이 '필야녹재기중'이다. 필筆을 받아야 밥이 나온다. 학學이 체體라고 한다면, 필은 용用이다. 체는 용을 갖춰야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필이야말로 인류 정신의 등불을 후대에게 이어주는 성스러운 신물이자 밥이 나오는 생계의 수단이다. 어찌보면 붉은색의 핏줄보다 필이 나오는 먹줄이 더 생명이 길고, 그 영향력의 범위도 훨씬 넓다. 먹물이 피보다 진한 것이다.

  나의 만년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런 직업적인, 그리고 정신사적인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ㆍㆍㆍㆍㆍㆍ

  조선조에 글을 썼다면 모필毛筆인 진다리붓을 애용했겠지만, 철필鐵筆의 시대로 바뀌면서 그동안 몽블랑 만년필을 써왔다. 해외여행 나갈 때마다 면세점에서 하누 자루씩 구입해놓고, 문장을 구상할 때마다 여러 개 만년필을 책상에 쭉 늘어놓는다. 느낌에 따라 이 필 저 필을 손으로 쥐어보면 생각이 잘 떠오른다. 만년필마다 촉감이 다르다. 어떤 촉감이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명품인 피나이더 만년필을 써보고 있는데 손에 쥐는 촉감도 좋고, 전체적으로 기품이 흐르는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208쪽)

 

이런 너스레로 시작하여,

자신을 당당히 직업적인 매설가로 자리매김 하는 것도 멋지다.

실은 매설가라는 직업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보다는 매설가라는 단어 자체가 멋진 것이고,

서상(書相)을 본다는 얘기나,

'부독오천권서 不读五千卷書 무입차실毋入此室'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독서 이력이 맘에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상(書相)까지는 아니어도 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책을 통하여 하나라도 주워듣고 배울게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묘한 동질감으로 미소짓게 됐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책(=경우의 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가 읽은 책과 똑같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이다, ㅋ~.

 

그래서인지,

'그만큼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방에 들어오면 할 이야기도 없을 뿐더러, 대화도 재미가 없다는 뜻이리라. 독서를 폭넓게 하지 않으면 나누는 이야기도 진부해지기 쉽다.(61쪽)'

수나라 때 최표의 글을 이렇게 해석하는 그가,

'출퇴근이 없고, 정년이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나도 되고, 승진과 인사고과 부담이 없어서 좋다(62쪽)' 등을 매설가의 장점으로 꼽은 그가,

고차의 맛을 얘기하며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다'고 하는 대목에선 왠지 서글퍼졌다.

천석군, 만석군, 명문가, 세도가 등에 관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하늘이 낸 부자는 3대에 걸쳐 적선을 하는 등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그가,

이 글을 원래 기고했던 게 ㅈㅅ일보라는 사실은 더 서글펐지만, 뭐 어쩔것인가 말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게 된건,

다독 뿐만 아니라 여행을 많이 할 것과 사람들을 만나볼 것도 권하는 대목에서 였다.

그는 여러 직, 간접 경험을 사고의 확장으로 보았다. 

괴팍한 스타일의 사람, 어느 분야에 10년 이상 몰입한 경험이 있는 자,  장인匠人, 정신세계를 탐험한 도사 등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하기되지 않는 독특한 사람들이니 일상의 시선으로 봤을때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한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중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목 뒤와 어깨 그리고 등 쪽으로 나 있는 경락과 혈 자리가 막힌다고 한다.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의 행동이다.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이다.(32쪽)'라고 힘주어 얘기하고 있는데,

자기 몸의 막힌 경혈을 그때그때 수시로 풀어주는 건, 도사를 꿈꾸고 쫒아 다녔으며 그래서 몸 공부야말로 한번 해볼 만한 공부라고 얘기하는 그에게나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나이 40에 이르러 하는 공부가...

머리가 굳어져 이해하고 깨우치는게 예전 같지는 않지만, 삶을 바라보는 혜안 같은 것이 느껴져 자득지미自得之味를 맛보겠던 터라, 그의 너스레와 설레발이 오랜 경험과 수련에 의한 내공에 의한 그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겠다.

 

그가 도사로 입성을 했는지, 의 여부를 헤아릴 내공이 내게는 없지만...적어도 그처럼 풍류를 즐기고 살면 도사가 부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10년 전, 고차의 맛이 뭔지도 모르는 무설지(無舌之輩였던 나에게 제주도의 석명石明 선생은 그 귀한 남인철병을 아끼지 않고 손수 우려 주었다. '비싸고 좋은 차'라는 설명도 일절 하지 않고 말이다. 인삼 향과 난향을 합쳐놓은 듯한 맛을 내는 남인의 맛은 마시는 순간 탈속 느낌을 갖게 했다. 몇 년 뒤 부산의 '아파트 다실'을 가지고 있는 마니주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남인철병 맛을 알게 되었다. 이 양반은 손이 컸다.

  살다보면 돈 때문에 만나는 인간관계도 있지만, 순전히 차 때문에 만나는 관계도 있다. 귀한 차를 사먹을 돈은 없는 처지에 차 맛을 알면 딜레마에 빠진다. 근래에 광주 무등산의 덕운 이병학 선생 다실인 보한재保閒齋를 알게 되었다. 보한재에 들어서면 벽면에 가득 쌓아놓은 발효차 덩어리들로부터 나오는 향이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얼마 전에는 새벽 한시 반까지 차 파티를 하였다. 마지막 코스에 나온 남인철병의 맛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것 같다. 바람이 바뀌는 전환기에는 차 한잔 하면서 바람을 음미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174쪽)

 

 여느 풍류가객과 시인묵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달빛을 사랑하는 데...

그가 풀어내는 너스레는 '문탠'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는데, 그럴 듯 하다.

 

ㆍㆍㆍㆍㆍㆍ태양보다 달이 더 좋아진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이다.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산속 정자에 앉아, 호수에 비치는 보름달을 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03~105쪽)

 

 ㆍㆍㆍㆍㆍㆍ동산 위에 뜨는 달도 볼 만하고, 강물에 비치는 달도 볼 만하지만,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에서 바다에 비친 보름달을 보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다.

  이 달맞이 고개에서 밤안개가 낀 날을 택해 보름달이 뜬 바다를 바라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몽환적 풍경이었다. 억만 년 전 태고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 말이다. 풍파를 헤치고 오면서 쌓인 마음의 주름이 이 해월海月을 보면서 쫙 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바다의 달이 주는 공덕이다.

  문탠 로드는 바다의 달을 보면서 걸어갈 수 있는 바닷가 언덕길이다. 신경을 많이 써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은 밤에 이 길을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바다를 끼고 걸으면 바다에서 오는 수水 기운이 머리의 열을 내려준다. 어떻게 머리의 열을 내리느냐가 중년의 관건이다. 내륙의 산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112~113쪽)

바다를 끼고 걷는 길, 산길, 호수를 끼고 걷는 길 들의 제각각 처방도 멋지고 말이다.

  제주의 올레길은 대부분 바닷가를 끼고 길이 나 있다. 약초도 해풍을 맞아야 약이 된다. 염기가 함유된 해풍을 온몸에 맞을 수 있는 올레길은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바닷바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작용이 탁월하다. 특히 화가 뭉쳐서 울화병 기운이 있으면 올레길이 좋다.

  지리산은 산길이라서 포근하게 품어주는 기운이 있다. '인자요산'이라 하듯이 산의 기운은 사람을 어질게 만든다. 기운이 충만해야 화를 안 내고 어질어진다. 기운이 모자라면 화를 자주 낸다. 산은 사람의 고갈된 원기를 보충해주는 작용을 한다.

  충북에 있는 괴산호의 둘레를 도는 산막이길은 약 4킬로미터 거리이다. 호수의 물은 바닷물과는 다르다. 소금기가 없는 호수의 물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섬세하게 다듬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 세계에서 받은 깊은 상처는 인간의 말(언어) 가지고는 치유가 어렵다. 어떤 말을 들어도 회복이 안 된다. 언어도단의 치유 방법이 필요하다. 그때는 대자연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하는데, 그 대자연은 청산리 벽계수이다. 청산리 벽계수에 들어가 푸른 산을 보고, 녹색 빛깔의 맑고 투명한 계곡물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씻어내야 한다. 결국에는 청산과 벽수가 인간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구라'가 되었든지 '교육방송'이 되었든지,

너스레가 되었든지 설레발이 되었든지, 간에...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고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것은 그들은 몸소 경험하고 체화하여 이미 일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몸소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적용을 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책에만 나오는 그것들은 글자 이상의 의미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것이다.

본인이 몸소 경험하고 체화한 것을 글로 썼기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사도 달인도 자연 앞에서는 작기만 하고 속수무책인가 보다.

아래 문장이 왜 그리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봄이라서인지, 아니면 내 닉의 '양철'을 포함하고 있어선지 모르겠다, ㅋ~.

 

  대낮에 듣는 빗소리와 저녁에 듣는 빗소리의 느낌도 시시각각 다르다. 새벽에 듣는 빗소리는 대자연 속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가 양철이라고 하는 인위의 금속에 부딪히면서 내는 그 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정화해주는 작용을 한다. '놀아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가버린' 중년의 허탈감을 달래주는 우주의 거대한 기타 소리라고나 할까.

  봄비와 양철지붕은 자연과 문명의 오묘한 궁합이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은 조물주가 봄을 색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양철지붕으로 떨어지는 봄비 소리는 삶의 때를 벗기도록 해주는 하늘의 선물이자 천상의 음악이다. 옛 선비들은 초가삼간에 살았기 때문에 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묘한 빗소리를 몰랐을 테지만, 21세기에 사는 나는 이 양철지붕 삼칸 집에서 봄비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랜다.(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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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2-27 19:42   좋아요 0 | URL
저도 조선생처럼 '筆也祿在其中' 론자입니다. 생업의 도구는 제일 좋은 물건으로..
문제는 제 생업의 도구가 이것 저것이라 지름신이 늘 저와 함께하신다는 것. ㅎ
만년필은 저도 좋은 놈으로 몇 개 가지고 있죠. 호사취미지만 때때로 그 만년필로 제법 큰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있으니
'필야녹재기중'의 실현이라고도...ㅋ

아무개 2013-02-28 08:43   좋아요 0 | URL
저는 뭐랄까 주말 오후 제 고양이들과 뒹굴거리거나 아이들 쓰담쓰담 하다가 가끔씩 울컥~하곤해요.
왠지 묘하게 슬픈데 행복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그런 생각이 들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아마 그럴때가 제가 느끼는 일상의 소중한 때가 아닐까 싶네요.

전 개인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것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양철'지붕에 톡톡~떨어지는 빗방울소리 듣는것은 좋아라해요^^

하늘바람 2013-02-28 10:32   좋아요 0 | URL
글씨가 안좋아 카드한장 못보내는 일인이 얼굴 빨개졌어요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는데, '토요일에 만난 사람' 코너에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강신주가 나왔다.

요며칠 심심함이 극에 달했었다.

딱히 마음 둘데가 없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했으며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왜 사는 지를 모르겠는 채로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렇게 그렇게 지냈었다.

강신주 식으로 얘기하면 타자와의 소통부제로 괴로워했고,

이지누 식으로 설명하자면 지독한 고독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강신주는 가뭄에 만난 단비였다.

출근 시간 부랴부랴 움직이느라 제대로 못들은 부분을 나중에 다시 듣기로 들었는데, 역시나 '강신주'였다.

다소 '센 발언'도 서슴치 않는 것이 솔직한 성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고,

철학이라는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도 '박사'랍시고 심각하게 무게잡고 얘기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전에 그가 알튀세르를 좋아하여 이메일 계정을 'contingency'로 한다는 소릴 들었었는데,

오늘도 contingency와 eventuality가 적절히 버무려진 그런 것이었다, 아흑~!

 

오늘 라디오를 듣고 그가 더 좋아 졌는데,

강연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강연이 끝난 후엔 듣고 싶어져서...

보통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어서 였고,

첫 단행본이라는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을 풀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강신주가 아니라 '인간' 강신주를 엿본것 같아서 였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려면 내가 변해야 되고 내가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어가지고 우리가 대개 소통의 문제가 지가 안 변하면서 소통하려고 할 때 폭력이 돼요. 그러니까 타자와의 소통이라고만 얘기하면 이상하고 주체의 변형이라고 하면 지 혼자 수행하는 거고 그런데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진짜 그 사람한테 마음을 열면 내 자신이 변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경험을 장자가 딱 포착을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뭐라고 그러죠. 이거 어렵다, 개념이 너무 철학 개념이 한 4개 정도 들어가니까. 그래도 이걸로 하자, 이 제목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손석희'도 '강신주'도 '이지누'도 아닌, 내가 심심하다는 거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강신주'를 들으며,

'고독'을 수행처럼 지켜낸 '이지누'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심심함이 극에 달해 바닥을 쳤다는 얘기를 하려니,

왠지 라디오를 헛 듣고 책을 헛 읽은것 같지만서도...

모든 깨달음은 그렇게 오더라,

소통과 고독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으려면,

일단 소통과 고독을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관독일기 : 잠명편
 이지누 지음 / 호미 /

 2008년 11월

 

하지만 고독이란 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또 고독을 견디고 이겨 내며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스스로 해야 할 일일 뿐 누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하는 일이 있는 반면 혼자 이루어야 하는 일도 허다히 많다.(64쪽)

그렇다고 내가 그동안 심심함이나 고독 따위는 전혀 몰랐었냐 하면...그건 또 아니다.

다만 그런 내게, 소통의 즐거움과 더불어 고독의 굳건함을 알려준 친구가 여행중이신 고로,

홀로 남겨진 나는 그전보다 더 심심함과 고독함을 뼈 아프게 느끼고 있고,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널을 뛰어 날 홀로 내버려 둔 친구를 향하여 '직무유기'라며 툴툴거리고만 있다.

 

잠箴은 자신의 허물을 예방하고 반성하며 결점을 보완하려고 짓는 글이고,

명銘은 스스로를 반추하며 새기는 글을 말한단다.

이 책 <관독 일기 :잠명편>에 나오는 조선 시대의 숱한 사상가와 문장가(장유, 신흠, 김집, 이규보, 안정복, 조익, 이식, 윤휴, 허균, 보각 선사, 원랑 대통, 낭혜 무염 등) 의 글들을 이지누의 날 선 해석으로 접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상차림을 '내가' 주체가 되어 고루 누리기 위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을 맛보았다.

 

이지누는 담담하게 읊조리듯 얘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고독이 자신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오는 것이란걸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 고독을 견디고 이겨내는 굳건함을 지키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지누의 그것들은 너무 날이 선 듯하고 반듯하여 좀 부담스러운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푸른하늘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말이다.

좋아할 순 없어도 존경할 순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몸은 신身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테고, 거울은 오늘 실레마을에서 바라보며 윤대녕 형에게 마음 속으로 선물한 것과 같은 푸른 하늘일 것이다. 누구라서 그 하늘에 자신을 비추어 스스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생각보다 인정하는 마음이 더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 깊이 인정하지 못하면 고치는 것 또한 겉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87쪽)

게다가 그의 글이 반듯하고 사실적인 기술이라고 해서, 문체까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지는 않다.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기품을 잃지 않아, 미려하고 그리하여 시적 감상에 젖기에 충분하다.

그의 '서정'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른 점은, 직접적인 경험과 체험에서 나온 사실의 기록이라서 한결 애틋하고 살가운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나뭇잎 지는 소리는 빗소리와 달라서 자꾸만 두리번 거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빗소리는 대개 일정하여 오히려 그 소리가 그치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지만 낙엽 지는 소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순하게 떨어져 내린다고 해도 그는 일정하지가 않다. 또 마른 잎이 바위나 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소리는 바람 부는 대로 들쑥날쑥하여 제멋대로이다. 더구나 무엇엔가 집중하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누군가가 숲 속을 걸어서 나에게로 오는 것 같은 환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91쪽)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면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가는 길이다. 그 지독한 외로움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버리고 말지 싶다. 비록 고독할지라도 홀로 이루어야 할 것들을 참구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은 절로 진정한 벗이 될 것이다.

서로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기만 한 진정한 벗이란 한두 명일지라도 족한 것이다. 새로운 벗을 사귀거나 그것을 지키려는 것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혹독할지라도 단절의 고독을 만드는 것이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날 위를 홀로 걷는 고독을 내 안에 지니지 않은 채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107쪽)

 

암튼 이지누를 읽으면서,

홀로 고독해지는 것을 지독히 두려워 하면서도 고독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엿보았는데, 이게 수행자의 그것이라서 멋지다기 보다는 왠지 처연해서 눈물이 났다.

게다가 친구가 잠시 잠깐 곁에 없는 것으로도 극도의 심심함과 지독한 고독으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내가,

벗이 동시대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 지독한 고독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걸 강신주는 본인이 더 힘들어봐야 된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자기가 힘들어봐야 그것보다 적게 힘든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떤 걸로 힘들구나' 하는 것들을 대충 알게 되고,

그래야 자신이 힘들게 고민하고 살아왔던 걸 철학이나 문학이나 이런 걸 통해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단다.

하지만, 위로를 한다든가 하진 않는단다.

때때로 보면 지나치게 어떤 힘든 것도 아닌데 오버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야단도 많이 쳐야 되고 욕도 좀 하고 그래야 돼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안아주세요. 이런 것도 있어요. 위로 받으려고 해요. 무슨 위로를 해요. 위로를 하긴, 다 힘든데 살기가.

그런데 말이다.

내 입장에서 보기에는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그렇지만, 의연한 사람도 인간다운 매력이 없기는 매 한가지다.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에서...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이 곁에 있어서 더욱 고독하고 쓸쓸해지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심사다.

 

책을 통틀어 이지누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부분은,「대대례大戴禮」의 '무왕천조'편에 나오는 무왕이 반우에 새겼다는 명과 관련해서 인듯하고, 나도 그랬다.

사람에게 빠지려면 차라리 물에 빠지겠다. 못에 빠지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수 없다(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遊也 溺淤人 不可求也).

글을 읽고 참으로 묘한 마음이 일어나 선뜻 책상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그 울림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 오늘까지 읽은 글들이 어느 것 하나 허튼 생각으로 대할 것이 없지만 이토록 크게 마음을 흔든 것은 없었다. 글을 읽고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왕은 사람에게 빠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무왕의 그 큰 생각에 빠져 버렸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여전히 나는 진정되지 않았다.(292~293쪽)

하지만, 이지누는 금방 진정이 되지 않아 이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는데,

나는 물보다는 사람에게 빠지는 쪽을 택하겠다.

물에 빠졌을 경우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것은 수영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고, 수영을 하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사람에게 빠지면 쉽진 않겠지만,

내가 그(녀)를 닮고 배울 수도, 그(녀)가 나를 닮고 배울 수도 있을 것이고,

구할 수 없어도 물들어 닮고 배우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여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게 강신주의 첫 단행본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에서 얘기한 '자신이 변해야 되고, 자신이 변해야 타인과 소통하는 게 동시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지누가 너무 좋아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차에 작은 맞춤법 오류를 발견하였다.

솔직히 다른 책이라면 눈도 꿈쩍하지 않고 넘어갈 일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그것이다 보니 작은 걸 갖고도 호들갑이다.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일테고,(아흑~, 어쩔거야. 인간적이어서 멋지잖아~--;)

나도 인간이니까 호ㆍ불호를 놓고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것이다, ㅋ~.

 

ㆍㆍㆍㆍㆍㆍ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끓는 한을 머금은 채 한 세상 넘어간 곳에서 뱉어 내는 것만 같았다. 비록 천대받던 무가이었을지라도 소리에 기품이 넘쳤고 몸짓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거늘 이제 또다시 그 소리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사람의 일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사람이 내는 소리와 몸짓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절절하게 보여 주던 고인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부르던 소리를 들으며 북망산천 먼 길을 떠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처연한 마음이 생기고 슬픔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애도의 마음을 펼쳐 놓은 채 잠이 들었다.(141쪽)

 

위 문단에서 빨간 글씨 '애끓다'의 용례를 보게 되면,

'애'가 끊어질 만큼 슬플 때는 '애끊다'를, '애'가 부글부글 끓을 만큼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울 때는 '애끓다'를 써야 한단다.

박병천 선생의 소리는 애(창자)가 끊어질 듯이 슬픈 소리였으니, '애끊다'가 적절하겠다. 설혹 부글부글 애가 끓는 통한의 그것으로 들렸다고 해도, 뒤에 나오는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끊어지지 않고' 와 '문맥 상 호응을 이룰 수 있도록 '애끊다'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또 한군데, 

ㆍㆍㆍㆍㆍㆍ"도에 가까워진 사람은 말수가 적어진다"고 했거늘 그 많은 말들을 밖으로 토해 내지 않고 어디에 새겨 두었을까. 그것은 마음 속일 것이다. 달아나지 못하고 갈라지지 않게 굳게 붙들어 둔 마음 말이다.

번연히 알고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러나 그 마음 다스리고 보존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이토록 마음에 대해 많은 경계의 글들이 넘쳐나는 것 아니겠는가. 날마다 돌아봐야겠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맹자」'고자 상 告子 上'에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놓친 그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學文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는 말이 나오지 않던가. 공부를 한다는 것,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본성을 깨닫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 싶다.(243쪽)

 

 

학문(學問)-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

학문(學文)-≪서경≫, ≪시경≫, ≪주역≫, ≪춘추≫, 예(禮), 악(樂) 따위의 시서ㆍ육예를 배우는 일.

 

따라서, 저 상자 안의 빨간 글씨는 學問이 되어야 맞는다.

 

 

 

 

 

 

 

 

 

 

 

 

 

 

 

 

 

 [수입] Joni Mitchell - The Studio Albums 1968-1979

 [10CD 리마스터 디럭스 박스세트]
 조니 미첼 (Joni Mitchell) 노래 / Warner / 2012년 10월

 

 

Love is touching souls
Surely you touched mine
Cause part of you pours out of me
In these lines from time to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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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4 00:0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글들이 많아서, 다시 또 읽고 있어요. 전 타자와의 소통에 문제가 많은편이라, 제가 바뀌지 않고, 상대도 바꾸지 않고, 포기쪽을 선택해요.ㅜㅜ 사람한테 빠져서 미친듯이 살았던 20대도 생각나고,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이 나는 글이에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5:29   좋아요 1 | URL
강신주 목소리를 들으셨군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맞아요. 하지만 인간인지라 그게 맘대로 안 될때면 저도 꿈꾸는 섬님처럼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말아요. 사람 사귀기는 힘들지만 놓는 것은 한 순간이더군요. 강신주식 장자를 읽을 때의 그 바람결 냄새가 아직도 선하옵니다. 정통 장자를 학문하는 사람들이 마구 욕하는 그 상황까지 전 재밌게 생각했어요.
심심함을 가장하시는 나무꾼님 언제나 잘 계시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