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산문.시편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주영숙 엮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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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란 황홀한 제목에 홀려서였다.

한동안 좋다고 설레발을 치고 다니던 사람 중에 '김탁환'이라는 사람이 있다.

난 한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의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탁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탁환의 그것들은 과거,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들을 적절히 이용하였고...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인물들이 마치 그 시대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유연할 뿐만 아니라,

정황 묘사가 마치 그려낸듯 상세하고 성격묘사가 섬세하고 적나라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유명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작품들이 개연성 있게 읽혔었고, 그래서 재밌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옥의 작품집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분명 처음 접하는 사람이 맞는데, 그 글들이 낯설지가 않은 거다.

알고보니 김탁환이 젊은 실학자들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쓴 소설에서,

젊은 실학자들 뿐만 아니라 이옥의 글들도 인용하였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좋아서 숨이 넘어가게 설레발을 쳤던 김탁환의 필력은,

젊은 실학자들과 이옥의 것이었던 셈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김탁환이 시들해졌다.

 

또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를 통하여 연암 박지원의 작품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오랫만에 김탁환 소설들을 떠올리고 비교하게 되었다.

 

요번에 느끼게 된건...

젊은 실학자를 비롯한 연암의 글들을 김탁환이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고 인용했다고 하여서,

우리가 그 진부함을 놓고는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의 한문해석능력과 필력을 놓고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거다.

그동안은 비교대상이 없어서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고,

이제 주영숙이라는 비교대상이 나타나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김탁환은 탁월하다는 거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쯤되면 연암의 글들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싶을텐데,

주영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은 모두 한문이어서, 오류도 많고 문학적인 해석도 아니다.

솔직히 제대로 된 해석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고 얘기되어지고 있다.

 

암튼, 이쯤되면 번역자나 해석자라기보다는 편저자라고 봐야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원작의 느낌과는 많이 달라진다.

이건 바꾸어 얘기하면,

내가 김탁환의 소설들 속에서 연암을 비롯한 젊은 실학자의 그것을 만났다고 하여 시들해질 필요가 하등없다는 것이다.

연암은 연암이로되, 편저자가 김탁환이냐 주영숙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작품으로 얼마든지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영숙은 한글전용세대인 우리들을 위하여,

친절하게 전부 한글로 해석해 놓으려는 수고를 하였나 본데...

그래도 한문을 곁들어 의미가 간단명료해지는 경우에는 한문을 같이 적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의미가 모호할 뿐더러 자칫 가볍기까지 하다.

 

편저자 주영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애인 문학상인 '곰두리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어서 확인해 보니,

어렸을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다.

구태여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내가 일부러 찾아본 이유는 그니의 폭넓은 오지랖 때문이다.

다시말해, 다방면에 재주가 두루두루 출중하기 때문이다.

한 국문학 박사이면서 외래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다가,

한국화 화가이며,

전통공예가이며,

시조, 평론 등으로도 수준을 인정받은 문인이며,

시와 소설도 쓰는,

그야말로 다방면에 걸쳐 화려한 이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들머리에서,

'연암처럼 소설도 시도 그림도 시늉이나마 해봤으며ㆍㆍㆍㆍㆍㆍ'나자신'이 적임자' 라고 해서,

웬 자만(?)인가...했었는데,

후학으로써 막중한 임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력과 경력이 화려한 그니라면 가능도 하겠다.

 

암튼, 연암의 글들을 갖고 쓴 글이니...그의 글들 얘기를 좀 해야 겠다.

  그래서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위험하고 안 하고의 상황 판단은 오로지 귀로만 쏠려 있다. 귀가 벌벌 떨면서 마음을 두려움에 가두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들음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ㆍㆍㆍㆍㆍㆍ말에서 떨어졌다 하면 바로 강물 속이다. 그리 되면 나는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으며,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으리라. 이처럼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나자, 비로소 내 귀에서는 강물소리가 사라졌다. 무려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너는 동안 조금도 걱정이 되질 않앗다. 마치 자연스레 앉았거나 누워 아무 거리낌도 없이 활동하는 것같이 여겨졌다.

ㆍㆍㆍㆍㆍㆍ

  소리와 빛은 바깥에 있는 사물이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눈과 귀에 누를 끼쳐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방해한다.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저 강물보다 더 험하고 위태로운 곳이 많지 않던가. 보고 듣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되질 않던가?

  나는 곧 나의 산속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집 앞 시냇물 소리를 들어보면서 시험해보리라. 그래서 자기 몸가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스스로 자기의 총명함을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일야구도하기」(20~21쪽)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야구도하기'가 처음이었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는 자는 귀나 눈에 얽매이지 않고, 귀나 눈을 믿는 자는 보고 들음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이 된다는 이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하는 연암의 이러한 경계를 김탁환과 주영숙을 비교하면서 깨닫게 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일야구도하기'를 읽으면서 의아하였던 것은,

'조선의 후기 실학자'로 분류되는 그에게서 '서경덕'의 그것과 같은 '성리학'적 사상의 근간이 느껴져서였었는데...

혹 내가 잘못 헤아린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주영숙도 책 끄뜨머리에 언급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미녀가 머리를 숙이면 부끄럽다는 것이고, 턱을 고이면 한(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생각에 잠긴 것, 눈썹을 찡그리면 수심에 빠진 것, 난간 아래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이며, 파초 밑에 앉았으면 꿈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그녀가 서있기를 반듯이, 앉아 있기를 조각처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양귀비가 치통을 앓고 번희가 머리칼을 만진다고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미인을 관찰해 보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으면 부끄러워한다는 표현이고, 턱을 고이고 있으면 뭔가 한스러워한다는 표현이고, 홀로 서 있으면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표현이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으면 시름에 잠겨 있다는 표현이다. 뭔가를 기다린다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뭔가를 바란다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그녀더러 서 있는 자세가 재계하듯 깔끔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같은 부동자세가 아니라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귀비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요염하다고 희롱하거나 손바닥춤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157~158쪽)

위의 것은 김탁환의 소설 중에 등장하였던 글이고, 밑의 것은 주영숙의 것이다.

한편의 한문으로 된 시를 갖고 번역한 것일텐데,

글쓴이의 필체와 개성에 따라 이렇게 다른 글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옮겨보았다.

 

연암 박지원이 형제들과 함께 밀랍으로 된 꽃을 만들어 판다는 건 어디선가 보았었다.

다른 형제는 부지런하고 재주가 좋아 그럭저럭이었는데,

연암은 재주가 다른 형제들만 못하여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했었는데, 근간이 되는 이런 글을 보니 반가웠다.

  촛농은 꽃잎이 되고 고라니 털은 꽃술이 되고 부들 꽃가루는 꽃술의 구슬이 되는데, '윤회화輪回花'라 부르지요. 왜 '윤회화'라 일컫느냐고요? 원래 나무에 붙어나게 마련인 꽃이 자기가 밀랍이 될 걸 어찌 알았겠으며, 밀랍은 벌집이 있기 마련인데 자기가 꽃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꽃잎 다섯장이 말려 있으면서 꽃술이 나와 있지 않은 '노전'과 꽃잎 석 장은 떨어지고 남은 두 장도 떨어지려 하나 꽃술만은 싱싱한 '원이'도 영락없이 진짜 매화입니다. 꽃잎 다섯 장이 벌어진 모습 또한 아주 자연스럽지요. 오직 땅에 박히지만 않았을 뿐 바로 자연의 정취를 볼 수 있지요. 황혼의 달 아래, 비록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은 없지만, 가득히 눈 쌓인 산중에 옛 선비가 누워 있는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말고요.

 

  나는 그대에게 먼저 매화 한 가지를 팔아서 그 값을 정하고 싶소. 만약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거나, 꽃술의 구슬이 구슬답지 못하거나, 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서도 성긴 그림자가 생기지 않거나, 거문고와 짝지어도 기이한 흥취를 자아내지 않거나, 시에 넣어도 운치가 나지 않거나, 하나라도 이런 점이 있다면 영원히 마다하셔도 끝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을 거요. 이만 줄이오.  .「매화를 파는 편지」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묘비명을 잘쓴 묘비명의 달인이었다는 것은,

'문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글재주가 비상하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연암 자신의 묘비명은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슬퍼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고 그저 멍청해진다'처럼,

이렇게 슬픔 속에 마냥 침잠해 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잠시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문도'라고 찬사가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슬픔 속에서도 즐거움을 길어올리고,

눈물을 유머와 해학으로 승화시킬 줄 안다.

 

  대체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죽음이 '사춘'처럼 참혹하고 몽직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기억은 얼마 되지 않는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대니, 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이렇지는 않았겠다. 이토록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지경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으리라.

  몽직이 나를 따라다니며 더불어 노닐었어도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거나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다. 그러나 달 밝은 저녁이나 함박눈 내린 밤이면 그는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가끔 달빛 아래를 거닐며 서글픈 생각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몽직이 와 있곤 하였다. 어쩌다 눈 내리는 날엔 문득 몽직이 생각났고,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정말로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61쪽)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하게 하려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늘아래 존재하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라고 일컫는다. 대개 '(참)진'이라 말하거나 '(닮을)초'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거짓)가'와 '(다를)이'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 이해하긴 어려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고, 한자의 글자체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용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음이 비슷한 것'은 내면의 의도요, '외형이 비슷한 것'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188쪽)

 

그러니 '창신(새롭게 창조함)'한답시고 재주 부릴 바엔 차라리 '법고(옛글을 본받음)'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

                                                                                        - 박제가(1750~1805)의 초기 문집 「초정집」서문

 

'창신'과 '법고'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학문이 아니어도...글을 읽고 쓰는사람이면,

아니면 하루 하루 새롭게 나아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두고 두고 되새길 만하다.

창조라는 것은 모름지기,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방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연암 박지원과 편저자 주영숙이 가장 잘 어울린다 싶었던 장르는 '시편'이었다.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연암 박지원은 남성 화자인데 반해 주영숙은 여성의 필치를 그대로 살려내고 있어서 살짝 겉도는 느낌이라면,

시편의 경우는,

사설시조의 형식을 따르느라 그랬는지 어법이나 필치 등 그니 특유의 어조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돋보인다.

 

 

(이 그림도 주영숙의 것이다.)

 

 

유춘동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두는 것 같아라

불지 말라고 비바람더러 당부했다가 되레 꾸짖음만 받았다오,

두어라,

꽃꽂이 익힌 이래로

이 골짝 삼백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거늘

  (시편, 219쪽)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 게 아닐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어떤 모양이건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건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울 수 있다면 나는 으레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못 내겠지. 아하, 이제야 알았다.

 

  이른바 그렁그렁 이 눈물이란 배워서는 만들 수 없다는 걸.

         - 「사장士章 애사哀辭」중에서(220쪽)

난 눈물이 많다.

그냥 조금만 슬프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처음에는 그냥 놀리기만 하던 직원들이 언제부턴가 내가 울때마다 벌금을 받기에 이르렀고,

그 벌금이 액수로가 아니라, 횟수로 집을 팔아야 할 정도라고 하여 '집.파.녀'라는 별명을 하사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벌금을 감당하기 버겁다거나, 놀림을 받는게 창피하다고 하여서 눈물을 숨길 수도 없다.

다시말해 울고 웃는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다.

난 눈물이 그렁그렁에 한가지를 덧붙인다면,

콧물이 '뚝뚝~'을 들겠다.

코끝이 시리도록 콧물을 뚝뚝 떨구고 우는 건 정말로 억지로 되는게 아니다.

 

억지로 웃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면 예쁘겠다고 하였더니,

일부러 이를 드러내고 웃으려 애쓰는 친구가 있다.

쉽지 않은 일일텐데, 나를 위해 노력해주는 그 친구가 마냥 고맙다.

 

친구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한마디 귀뜸을 한다면 말이다.

눈물이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어떤 눈물은 마음 한켠이 저릿 저릿 아프기도 하지만,

그럴때는 울면 나무들 나이테 생기는 것 마냥 마음에도 결이 생길 것 같았는데,

어떤 눈물은 단지 감동적이어서 흐르기도 한다는 거다.

그런 눈물은 마음의 찌든 때를 짝 쓸어가 버리는 것이 카타르시스라 할 수 있겠다.

아프게 울거나 웃으면 상처로 남지만,

때론 울거나 웃고나면 시원한 것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정 표현을 남발할 필요도 없지만, 감정 표현에 인색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타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와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감정을 드러내 말하거나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내 속을 알지 못한다.

입장 바꾸어,

타인의 속도 내가 미루어 짐작하는게 엉뚱한 오해이거나 착각인 경우가 있다.

엉뚱한 오해나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하는것인데, 어째 우리는 어색한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리움

 

저물녘 용수산에 올라 그대를 기다렸는데 오시지 않더이다.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밤이 깊어 달빛 비친 강물에 배를 띄워 돌아와 보니,

정자 아래 고목나무가 하얗게 사람처럼 서 있어서

나는 또 그대가 먼저 와 계시는 줄로 착각했다오.(220쪽)

그리움이란 시를 보게 되면,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리워도 그립다 말을 할 수 있기를 한가,

흐르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강물에 비친 달 그림자만 좇아야 하니 말이다.

 

 

필운대의 꽃구경

 

나비가 꽃을 놀린다고 하필 극성이라 나무라는가,

도리어 나비 따라 꽃을 만나러 달려가는 사람들은 어쩌고

아지랑이 노는 저 너머에 한낮의 봄이 푸릇푸릇

자줏빛 언덕머리 우물가에선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에 먼지가 자욱하고

 

새 울음 서로 다른 거야 제멋대로라도

이곳저곳에 꽃이 피는 건 하늘의 뜻이라네.

이름난 뜰에 앉아 둘러보니 소년 머리 하나 없고

서글픈 백발노인들은 작년과 또 다르네.(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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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를 위한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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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손석희를 듣는데, '말.말.말'코너에서 '검붕'과 '멘붕'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나운서 출신의 그가 '검붕'과 '멘붕'을 버벅거리며 발음한 후,

검붕은 '검찰붕괴', 멘붕은 '멘탈붕괴'하고 풀어서 얘기하는걸 들으면서 좀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존경하는 분에게 "멘.붕.임~--;" 하는 문자를 보냈을때가 떠올랐다.

대번에

"멘홀 속에 빠졌다구?"하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다.

멘홀이 붕괴되어 그 속에 빠진 위험천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셨던 게다.

'말'이란 건 생각이나 느낌을 누군가 대상에게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인데,

'멘.붕.'이 '멘탈 붕괴'의 줄임말인지, '멘홀 붕괴'의 줄임말인지...를 놓고,

내가 그분과 어떤 사회적인 약속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혼자 마음 속에 담아 두고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우리는 내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누군가에게 나타내어 표현하고 전달하게 된다.

이때, 나와 그 누군가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가 다르다면,

사회적 합의나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줄임말이나 은어, 속어 따위로 인하여...

'말'이 생각이나 느낌을 누군가에게 나타내어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를 위한 글쓰기 공작소'라는 이 책은,

내 생각이나 느낌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한 책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교감과 소통에 관한 책이라고 하고 싶고,

교감과 소통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 삶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화두이기도 하지만,

교감과 소통이 필요한 제일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라고 하지만 말 안하고 눈빛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없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은 글쓰기 책이라고 되어 있지만,

인생 지침서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고,

사랑에 관한 명언집이나 아포리즘이라고 봐도 좋겠다, ㅋ~.

 

이 책은 나(=자신)의 언어상태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신은 개구리다.

당신의 부모님도 개구리다.

개구리는 개구리다운 생각과 언어를 반복한다.

개구리에겐 꿈도 없을 뿐더러 개구리 언어를 고집한다.

개구리가 공주나 왕자가 되기 위해선 사랑의 입맞춤이 필요하다.

공주와 왕자는 공주와 왕자의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이 책을 사랑에 관한 명언집이나 아포리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한 이유는,

개구리가 공주나 왕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걸로 '사랑의 입맞춤' 을 꼽고 있기 때문이다.

개구리에게 사랑의 입맞춤은, 공주나 왕자로 변신하는 열쇠다. 이 입맞춤 없이는 자신의 온전한 제 모습을 되찾기란 불가능하다. 강렬한 사랑에 빠져야 우리는 고양된다.

  사랑이란 단순히 어떤 멋진 대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빠지면 웃음이 많아지고, 여유와 너그러움이 생기고, 마음 씀씀이가 넉넉해지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기꺼이 자기 헌신을 감수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자신이 먼저 사랑스럽게 변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도 스스로가 사랑스럽게 변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에 빠지고 싶은 진짜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면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이 신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스스로 매혹적인 사람으로 변한다.(16쪽)

 

이 부분을 곱씹어보면,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분홍분홍*^^*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는데도 분홍분홍*^^*해지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란다.

'기꺼이'나 '스스로'라는 단어만으로도 벅찬데...

이 분홍분홍*^^*한 신비한 에너지가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난다는 걸 깨닫게 되면 얼마나 황홀할까?

 

우리는 사랑이 주는 변화의 초점을 '나' 아닌 '상대방'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상대방을 사랑하는 주체는 '나'인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웃음이 많아지고,

나에게 여유와 너그러움이 생기고,

나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해지고,

내가 미래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내가 기꺼이 자기헌신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상대방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랑의 주체가 상대방 자신이라는 얘기이다.

 

이렇듯 사랑을 하는 주체가 '나'인 것이 중요한 이유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언어로 표현할때,기계적으로 정리해버리거나, 통속적인 일상어로 속화시키거나, 감상적 도취와 과장된 자기미화의 감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자신이 실질적으로 느낀 정서를 최대한 그대로 표현하는 실질언어로 표현할때야 비로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겪은 경험의 실질적 내용 그대로를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모습은 자신감 있어 보이는 미남이지만, 심층태는 '부끄러움을 심하게 타는 신경증 환자'일 수 있다.ㆍㆍㆍㆍㆍㆍ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솔직하게 평가할 때는 그가 어떤 생각과 언어로 행동하느냐를 잣대로 삼아 판단한다. 인간은 언어로 의식하고 사유하며, 심지어 무의식조차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야말로 한 사람의 사유의 실질적인 작동방식이어서, 아무리 예쁜 미인일지라도 속악하고 천한 문법을 사용하면 속악하고 천한 여자로 읽힌다. 아무리 점잖은 교수일지라도 강의 내용이 식상하고 게으르다면 실질적으로는 식상하고 게으른 식충이로 여겨진다.

  한사람이 사용하는 말투, 억양과 음성, 문장구조와 내용은, 그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고 만나는 가장 실질적인 방식이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실질태다. 그의 직업, 나이, 재산, 학벌과 무관하게,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개 같은 놈이거나 개만도 못한 놈이거나, 그저 평범한 사람이거나 존경할 만한 어른 등등으로 가름된다.

  그럼에도 평소 사람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일상언어의 실질태는 개구리 언어다.(23~24쪽)

 

  의미가 대충 비슷하다고 이제까지 관용적으로 관습적으로 상투적으로 써 왔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문장 길이나 문법구조뿐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태도, 가령 어휘나 악센트나 억양까지도 새롭게 다듬고 바뀌어야 한다. 말투와 자세까지 변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언어 사용의 실질적인 변화 없이 사람이 변하는 경우는 없으며, 사람이 변하면 그 사람의 언어 또한 변한다. 내가 변하지 않고 문장 기술만 훈련하는 것은 글쓰기 공부가 아니다. 이제까지의 나와는 다른 새로운 나로서의 모험을 시작하는 경험이어야 비로소 '창작으로서의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30쪽)

그런 의미에서...'세살 버릇 여른까지 간다'는 속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의 언어를, 말투와 자세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쉽지 않은 걸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사랑에 빠져서...

누군가를 사랑할 때면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그 신비한 에너지를 직접 경험해 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글쓰기'를 얘기하면서 '사랑'을 얘기할 수 있는 이유이고,

글쓰기 책이지만, 인생지침서나 사랑에 관한 명언집 내지는 아포리즘이라고 불리워도 좋은 이유이겠다.

 집필과 독서는 참으로 독특한 의사소통 방법이다. 말하는 사람은 혼자 골방에 앉아 쓰고, 듣고자 하는 사람 역시 혼자 자기 골방에 앉아 읽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귀 기울임으로써 모든 사람이 귀 기울이도록 말하는 길이 열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나는 길이 열렸다. 지금 말하면서 먼 미래에게 전하는 길이 열렸고, 먼 훗날에도 귀만 기울이면 오래전에 살았던 이의 생각을 알아채는 길이 열렸다.

  가히 놀라운 충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간관계란, 멀리 있어도 말이 맞으면 가깝고, 가까이 있어도 말이 어긋나면 멀다. 만나도 말이 깊이 통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 것이고, 말이 깊이 통하거나 서로를 자극하면 떨어져 있어도 만난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그런데 책이라고 하는 물건이 시공간의 제약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서로 연결시켜 놓았다.(38쪽)

이 책 전체를 통틀어서 밑줄 긋고 별표 꽁약~* 그려주고 싶은 구절을 분홍색 바탕체로 바꿔보았다.

집필과 독서가 없었다면, 바꾸어 말하면 글을 쓰고 읽을 줄 몰랐다면...

사람들은 대화상대를 찾아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나가야 했을 것이다.

이곳 알라딘서재도 마찬가지이다.

책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모인 사람들이 글을 쓰기도 하고 쓴 글을 읽기도 하고,

자기집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넷 상을 오가며 생각을 주고받는다.

쓰고 읽기- 고급스럽게 표현하면 집필과 독서-를 통해서 성향과 생각을 파악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소통은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소통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바꾸어 애기하면, 그게 누구든지 간에... 자기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향하여선 마음을 열어갖게 된다는 말도 될테고 말이다.

  언어는 '문자언어, 출판언어, 창작언어' 등에 의해 보다 세련되게 정련되는 역사를 걸어 왔다. 개구리가 '입말언어, 일상언어, 일반언어'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공주 왕자의 언어는 '출판언어, 창작언어'를 통해 자신의 언어 솜씨를 업그레이드 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공주다운, 왕자다운 언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독서를 통해 '출판언어, 창작언어'를 자기 것으로 육화하는 동시에, 실질적 정직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아마도 우선은 수다를 떨거나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보는 시간부터 줄여야 한다. 뉴스나 신문의 대부분이 관습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접촉이 제로 상태일수록 좋다. 반면 좋은 책을 찾아 읽는 독서 시간과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 헤매는 습작시간을 극대화해야 한다. 글쓰기 솜씨는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선택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수행하느냐, 얼마나 기꺼이 즐겁게 이어 가느냐 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온다.(52~53쪽)

 

근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뉴스나 신문의 대부분이 관습 언어를 시용하기 때문에 접촉을 덜하면 덜 할수록 좋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뉴스나 신문 같은것은 문자언어 또는 출판언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관습언어'로 분류된다는 것이 특이했다.

 

만약에 나에게 이 책을 읽은 느낌이나 소감을 정리해 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무리 개떡이나 콩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분홍분홍*^^*해 지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개구리 언어를 접고 '사랑의 입맞춤'을 통하여 왕자나 공주로 거듭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사람이 지금껏 개구리 언어를 구사하였던 사람이었다면,

일부러 사랑의 입맞춤 따위를 해서 왕자나 공주의 언어로 거듭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그냥 편안하게...앞으로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고 싶다.

'그래서'또는 '그렇기때문에'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건 참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또는 '있는그대로'또는 '본성'그대로'라는 허울 아래 이렇게 저렇게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기꺼이 사랑하고 싶다.

때문에 나의 이런 발언은 이 책의 취지랑은 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고 삶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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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2-01 07:35   좋아요 1 | URL
저는 신문을 끊은 지 열 해가 넘었고, 방송을 끊은 지 스무 해가 넘었어요.
그저 들여다볼 적에는 저 스스로 길들여지지만,
숲을 바라보며 살아가니 늘 숲내음을 사랑할 말이 샘솟더라구요.

양철나무꾼 마음을 빛낼 좋은 모습을 들여다보시기를 빌어요.
'책'에서도, 이런저런 자잘한 책보다는
'삶을 사랑스레 북돋울 만한' 알맹이들을 기쁘게 찾아서
마음을 빛내는 말을 누려 보셔요.

차좋아 2012-12-03 12:32   좋아요 1 | URL
최근 알라딘 서재를 다시 찾아왔는데 길었던 잠행 탓인지 조금 어색하여 이웃님들 서재 마실 다니며 며칠 서성였어요. ㅎㅎ
그래서 제 마음도 조금은 분홍분홍 ^^*

감은빛 2012-12-04 13:57   좋아요 1 | URL
역시 훌륭한 소개글이네요!
관심 갖고 있던 책이예요.
분홍분홍 *^^* 은 어떤 상태일까요?
일단 먼저 사랑에 빠져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빅토르 E. 프랑클 지음,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처음에 난 '빅토르 프랑클'을 '프리모 래비'로 착각하였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남았으나,

끝내 그 무엇인가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 '프리모 래비'와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에 대해서 일깨워주려했던 사람 '빅토르 프랑클'

그런데, 뒤로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참 많이 닮은 듯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 읽은 뒤에는 '빅토르 프랑클'이라면 아우슈비츠에서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혹독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로고테라피'에 대해서는 몇번 들어봤었다.

'삶에서 희망을 놓아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이다.'고 얘기하던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아무 의미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이란 결국 삶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하여,

삶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불안을 객관시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맞서려고 하여,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음은 물론 삶의 희망을 놓지 않도록 하였었다.

그리하여, 본인 자신도 80세까지 암벽등반을 즐기며 90세에 회고록을 쓰고도 2년여를 살다간...직접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처음 가졌던 '프리모 레비'와의 비교는 싹 사라졌고,

이 사람 '빅토르 프랑클'은 凡人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자서전이나 일대기 따위는 좀처럼 안 읽으려 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사람의 자서전이나 일대기는 좀 널리 알려지고 읽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 좋았다.

네 살 무렵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막 잠들기 직전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일어나 앉았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평생을 쫒아다니며 나를 괴롭혔던 의심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삶의 허무함이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깊은 사색 끝에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것은 결국 여러가지 측면에서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존재의 허무함이 존재의 의믈 파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속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것 속에서 허무함을 물리치고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든 무슨 일을 겪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과거 속에 묻어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것을 다시 없앨 수는 없다.(25~26쪽)

네살 때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 나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나이 90에 이루러서 쓴 회고록이니까 미화시킨 부분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친구에게 이 애기를 했더니, 친구는 다섯살 때부터 기억이 난다는 거다.

죽음은 3학년이 되어서야 생각을 했으나,

어려서부터 자의식이 강한 꼬마였으며,

무려 일곱살 때 세상은 하나인데 인식은 각기 다르다는 칸트 뺨치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헐~, 천재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다시 증기선을 타고 도나우 강으로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밤중에 갑판에 누워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안의' 평형 원리를 살펴보면서, '아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열반의 경지를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열반이란 '내면에 타오르던 온갖 불들이 완전히 꺼진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61쪽)

 

 

불혹을 넘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별이 총총한 하늘'은 고사하고,

'내 안의'평형원리나 '아하체험'은 물론 '열반'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이론을 정립하고 있지 못하였는데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그린 본인의 자화상)

 

ㆍㆍㆍㆍㆍㆍ내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만약 내게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만화가로서의 재능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도 그렇지만, 만화를 그릴 때에도 제일 먼저 인간의 약점을 포착한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또는 적어도 심리치료사로서, 현실적인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자발적인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볼 줄 안다. 그리고 비참한 상황을 뛰어넘어 그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끌어내고, 그와 동시에 얼핏 보기에는 의미없는 고통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업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근본적으로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본질적으로 로고테라피는 이런 확신으로부터 논의되고 체계화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신의학에 대한 욕구가 없는데 재능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무엇이 어떤 이에게 정신과 의사라는 자격을 부여하는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정신과 의사가 되도록 부추기는지에 대해서 한번쯤 의심을 해보라! 미성숙한 사람이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정신의학이 타인에 대한 권력을 갖게 하여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은 권력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는 지식의 매커니즘은 나에게 제일 먼저 타인에 대한 권력을 부여하기 마련이다. 가장 눈에 띄는 예 중의 하나가 최면술이라고 할 수 있다.ㆍㆍㆍㆍㆍㆍ(72쪽)

 

그 친구도 만화도 잘 그릴 뿐더러 사람의 심리나 심중을 헤아리는데 밝다.

위의 저 내용대로라면, 만화뿐만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으로나...

상대의 약점을 포착하여 그 약점을 이용하여 상대를 지배하고 조종하여 우위에 서고 싶은,

어떤 권력 같은 것을 가질 수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따뜻할 뿐더러,

사람의 심리나 심중을 헤아리는데도 곰살맞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엔 빅토르 프랑클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권한, 즉 '타인에 대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만화를 그릴때 인간의 약점을 포착하는 그 섬세함으로 상대의 심리나 심중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상대의 심리나 심중을 헤아리고 배려한다는 저변에는,

꼭 도돌이처럼은 아니어도,

어딘가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는건 않을까?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희망을 갖게 하고,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가 하루하루를 살게 한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결심을 존중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한 생명이라도 살리고 싶은 내 원칙도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나 스스로 배신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동반 자살을 기도한 노부부가 우리 병원으로 실려왔을 때였다. 아내는 죽고 남편은 사경을 헤맸다. 나는 남자를 살려야 할지 갈등을 하다가 결국 애써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자가 목숨을 구하게 되면 홀로 아내의 무덤에 가야 할 텐데, 내가 그 책임을 질 수 있을지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치료가 불가능하여 오래 살 수 없으면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 고통 속에도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원칙적인 가능성은 극도로 신중하게 보여줄 수 있고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 한계 상황 속에서 자아실현의 영웅주의는 단 한 사람에게만, 즉 자기 자신에게만 요구해야 한다. 그와 같은 문제적인 상황은 '나치한테 고개를 숙이느니 차라리 강제수용소에 가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한테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주장은 일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안전한 외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이 다 끝난 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결을 내리기는 쉬운 법이다.(118~119쪽)

그의 소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난 여기에 하고싶은 얘기가 참 많지만 말줄임표로 대신한다.

시어머니의 임종을 바로 옆에서 지키면서 품위 있는 죽음과 존엄사 등에 대해서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직접 겪게되자 이런 것들은 교과서에서 배울때와,

사회적 문제가 되어 회자될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와닿았다.

그러니 본인이 흠뻑 담금질 하지 않고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러니저러니 함부로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빅토르 프랑클, 그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는 이 회고록 말고도, 몇권의 책을 더 낸 사람이다.

글쓰기에 관해서도 그에게 배울게 참 많은데,

이걸 글쓰기라고 해야할지, 그의 삶의 방식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작가 생텍쥐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완전함은 더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생략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완벽주의자임을 고백한다.(172쪽)

나는 완벽주의자여서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편이다. 물론 내 자신의 요구를 항상 스스로 충족시킨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충족되면 그 안에서 성공의 비밀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공의 이유를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아주 작은 일도 가장 큰 일을 할 때처럼 철저하게 하고, 가장 큰 일은 아주 작은 일을 할 때처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한두 마디 짧은 논평을 할 때면 조목조목 세밀하게 따져 본 뒤에 메모를 한다. 그리고 수천 명이 모인 곳에서 강연을 할 때면 원고를 꼼꼼하게 준비한 뒤, 마치 열두 명 앞에서 발언을 할 때처엄 편안하게 한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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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1-27 14:35   좋아요 0 | URL
요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는 중인데,
회고록이 나온줄 몰랐네... 실존주의 상담에서 워낙 추종하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에도 팬이 많은데
얼마 전에 제자가 와서 강연회를 했거든. 그런데 그때는 실망한 사람도 좀 있구... 프랭클 본인이야 돌아가셨으니.

인용 문구 참 좋다... 오늘 장바구니 채우는 중인데, 이 책은 사야겠네. 에잇, 블랙홀, 나무꾼.

루쉰P 2012-11-28 12:2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죽음의 수용소>는 저도 꽤 전에 읽었어요. ㅋㅋ

sslmo 2012-11-30 22:28   좋아요 0 | URL
난 오늘 시작했음, 죽음의 수용소. ㅋ~.

목감기는 좀 어떠신가?

2012-11-27 16:12   좋아요 0 | URL
와~ 빅터 프랭클. 좋아요. "과거 속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니!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무의미가 이 삶을 파괴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아요. 인간에겐 참 힘겨운 싸움이 놓여 있네요. 누구에게든.
다른 인용구들도 다 좋군요. 당분간은 못 읽겠지만 필독목록에 이 책을 올려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저 씩씩하고 따뜻한 확신이 좋아요. 글이 좋은지,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좋은지..라고 할만해요. 진짜.^^
(늘 좋은 책 소개, 고마워요. 양철나무꾼님.)

sslmo 2012-11-30 22:32   좋아요 1 | URL
전 섬님처럼 현실적인 것도 맘에 들어요.
'당분간은 못 읽겠지만 필독도서 목록에는'하는 식으루다가...ㅋ~.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만 정리해보니,
(관심 없어 던져버린책 말구여) 책장으로 두개예요.
최소한 360여권은 될텐데 하루 한 귄씩 읽어도 앞으로 일년치가 있는 거잖아여~--;

아무개 2012-11-28 08:20   좋아요 1 | URL
엇 저도 빅터 프랑클이 노년에 자살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그런 말은 없네요.
어디서 어떻게 그렇 잘못된 정보를 접했을까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 읽고 자살한 심리학자 따위라니 뭐 이랬는데 아이쿠!!!!!!!!!

딱 만원짜리 책을 한권더 장바구니에 담으려고 했는데 아주 딱입니다^^


루쉰P 2012-11-28 12:16   좋아요 1 | URL
노년에 자살한 사람은 프리모 레비 같아요 ^^

sslmo 2012-11-30 22:33   좋아요 1 | URL
이힛~^^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구나~!

2012-11-27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2-11-28 12:22   좋아요 1 | URL
빅터 프랑클은 저도 참 좋아합니다! 엘리 위젤, 프리모 레비, 빅터 프랑클은 홀로코스트의 작가 중에 참 좋아하는 삼인방이에요. 그 중 프리모 레비만 빼고 두 분은 계속해서 살아가며 악과 악과 계속 싸워가죠.

사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프리모 레비인데 그의 죽음에 대한 마음은 조금이나마 이해는 하지만, 자살은 납득을 못 하겠더라구요~~

돌베게에서 자서전을 번역 중이라고 하는 데 그 책을 꼭 읽고 싶어요...

sslmo 2012-11-30 22:34   좋아요 1 | URL
프리모레비 자서전여?
아~, 기대되는군여, ㅋ~.

2012-11-29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30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2 0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구를 구해요 - 나무 심기 파티
펠릭스와 친구들 지음, 김시형 옮김 / 노란상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때, (아니 내가 학교를 다닐때는 국민학교였다.)

내가 배우던 교과서에 주요 등장 인물은 철수와 영희였다.

그래서인지, 난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뭇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에 그때의 추억을 되살려 감정 이입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밤 한 철수 씨는 백의 종군하여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고,

이제 한 영희 씨가 나오는 일요일밤 '거지의 품격'만을 기다리는데,

그것도 어째 예전같지 않고 심드렁하다.

 

엊그제 누군가에게

'하긴 단거 별로 안 좋아하나 보더라, ㅋ~.'

하는 문자를 보냈더니,

'단거...위험...'

'danger'

이런 답장이 돌아왔다.

내가 '혈당수치도?'

이렇게 되묻자,

'혈당완전정상'

'근데 danger 그래서 깜.놀.'
'썰렁개그'

'단 거'

'환자를 많이 봐서 내가 자꾸 걱정되나분데'

그때서야 난 '아하~, 그 당거..., ㅋ~.'할 수 있었다.

 

비단 환자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몸의 건강 상태는 살뜰하게 챙기면서,

그 몸 건강 상태의 근간이자, 기본이 되는 몸 아닌 다른 것들...

흔히 인간과 대응되는 개념으로서의 자연, 다시말해 지구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

 

"지구를 잘 대접하라. 이 땅은 너의 부모가 준 것이 아니라 너의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지구는 우리 조상이 물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디언 속담(39쪽)

 

라는 속담을 많이 접했으면서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책 제목 '나무 심기 파티' -'이제 우리가 지구를 구해요'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이 책은 알라디너'감은빛'님의 소개에 혹하여 구해 보게 되었는데,

'헐~' 어린이 용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나무를 심는 것과 지구를 구하는 게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놓았다.

지구온난화, 온실 효과, 그때 만들어지는 온실 가스 등 , 그 중에서 가장 흔하고 중요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순환과정이 사진과 도표들과 함께 실려있어서 보고 이해하기 쉽게 되어있다.

난 읽고 제대로 감동받아 주시기만 하면 될 뿐이다, ㅋ~.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면 다들 이렇게 말해. "기후 변화 때문이야." 또, 한여름에 집중호우가 내리고 강물이 흘러넘치면 TV에서 종종 이렇게 얘기해. "이번 날씨는 기후 변화가 원인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미쳤다고 해서 곧바로 기후 변화와 관계있는 것은 아냐. 기후와 날씨는 전혀 다른 말이거든.

ㆍㆍㆍㆍㆍㆍ한마디로 기후라는 건 30년 동안 지구 전체의 날씨를 모두 합쳐 평균을 낸 거야. 그래서 날씨, 즉 기상은 느낄 수 있지만 기후는 느낄 수가 없어.

하지만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지 않아요?

그래, 날씨와 기후는 대기권에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같긴하지. 하지만 이 두가지는 아주 다른 거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40쪽)

 

기후 변화를 늦추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죠?

기후를 바꾸는 요인은 크게 두가지야. 자연과 인간이지. 자연이 하는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제외해야 겠지.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은 충분히 바꿀 수 있어.ㆍㆍㆍㆍㆍㆍ지금 쓰는 에너지를 아끼는 것도 중요하고, 대체 에너지를 쓰는 것도 중요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 우선, 내가 하는 작은 일들이 모두 기후 보호에 큰 보탬이 된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 그래야 작은 일부터 하나씩 실천에 옮길 수 있어.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두 손 놓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 돼. 남이 크고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걸 부러워할 필요도 없어. 환경을 지키고 자연을 보호하며 사는게 훨씬 멋있으니까.(42쪽)

 

암튼,

이책을 통하여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가장 좋았던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도 작은 것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지만 올바른 행동이 모이면 '긍정적인 흡인력'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었고,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은 '집에서 할 수 있는 기후보호' 란 장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대신 자전거를 탄다든지, 절전형 조명등을 쓴다든지 하는 얘기는 한번쯤 들어봤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냉장고로 하는 기후보호 분야에서,

냉장고를 가스레인지나 화기 옆에 놓는 것은 안 좋은 생각이라는 얘기는 어찌보면 당연하게 들리지만,

냉장고를 설치하는 장소가 주방이고,

우리나라의 집 구조상 주방이 그리 넓지 않은 것에 미루어,

가스렌지 등의 화기와 냉장고를 떼어놓는 건 미리 염두에 두지 않으면 쉽지 않다.

아직 따뜻한 음식을 냉장고에 곧바로 넣는 것은,

갑자기 냉장고 내부 온도가 높아져서 그 열을 식히려고 전기를 많이 쓰기때문에 안 좋은 방법이고,

난방을 하지 않는 베란다에 냉장고를 놓는 건 좋은 방법이란다.(냉장 온도를 2도만 높게 설정해도 15%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단다.)

 

반대로 요리를 할때도 기후를 보호할 수 있는데, 방법을 잘만 지키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가장 쉬운 건 냄비 뚜껑을 덮고 요리하는 거다.

또 보통냄비보다 압력솥을 쓰면 40%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오븐도 잘 닫고, 너무 자주 열어보지 않는다.

한번 열어볼때마다 20%의 열손실이 있단다.

뜨거운 물을 끓일때는 가스레인지보다 전기주전가가 낫다.

 

쓰레기를 줄여도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일 수 있단다.

쓰레기를 줄이면 수거 요금도 줄어들지만 1kg마다 320g의 이산화탄소가 덜 생기는데,

아예 쓰레기가 안나오도록 노력하면 기후 보호는 더 잘 될테지.

 

여기서 사소한 차이가 나지만, 결과적으론 큰 차이가 나는 중요한 용어를 알게 됐는데,

재사용과 재활용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유리병 재사용 횟수는 8번으로,

독일 50번, 핀란드 30번, 일본 32번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페트병은 독일,네덜란드, 덴마크 등에서는 재사용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재활용되지만 유리병처럼 재사용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는 곳을 바꿔도 기후 를 보호할 수 있는데,

건물과 집을 잘 짓고 수리해도 기후를 지킬 수 있단다.

여기서 '잘'이란 단열 창문, 단열 마감재 같은 기술적인 내용을 얘기한단다.

 

그밖에도,

전기를 친환경대체에너지로 바꾸는 방법,

밥상 위의 기후 보호라고 하여 칼로리가 적은 밥상, 유기농밥상, 기후 보호 밥상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장바구니 속 기후 보호라고 하여 '로컬 푸드(local food)'즉 '지역 먹을거리'를 얘기하고 있다.

'지역먹을거리'를 얘기할때는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에서 재배된 것'

에 덧붙여 '제철에 자라고 수확한 것'이라는 '기후친화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이런 행동을 실천하기에 앞서, 책임감을 갖고 절약하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아끼고 사용하는 것이 생활의 당연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 물어보거나 고민하고 따질  필요가 없이 그런 태도가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지금보다 몇 십 배의 효과가 생길거란다.

 

이 책의 103~104쪽에는 우리 친구들이 말도 안되는 공격에 멋있게 대처하는 법이 소개되어 있고,

독일의 아홉살 펠릭스가 시작한 것이, 어떻게 학생운동 Plant-for-the-Planet으로 발전했는지의 과정도 나와 있다.

지금은 전 세계 수많은 나라가 동참하는 국제 네트워크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이제 Plant-for-the-Planet은 나무만 심지 않고,

어린이 세계시민으로 공정무역과 착한 초콜릿 등,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그 밖에 우리나라의 나무 심기 운동 이야기에 대해서도 잘 정리되어 있다.

식목일의 유래와

소년환경 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조너선 리와 '어린이 평화 숲'에 대한 얘기가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하승수 녹색당 운영위원장의 '추천사'를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맺음하고 있다.

얼마 전 유엔에서 나온 '세계 행복 보고서'를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돈만 아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후 변화를 걱정하고 나부터 실천하는 사람이 기후 변화 같은 것은 모른 체하면서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보다는 행복할 것입니다.(199쪽) 

 

이 말을 요즘 내 삶에 대입시켜보면 이쯤이 될것 같다.

철수 씨와 영희 씨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으려 하지 말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 핑계 대지 말고~--;)

내 스스로 철수 씨와 영희 씨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겠다.

그런데, 현실의 난...

지금 내겐 그 어느때보다도 얘네들이 위안이고 희망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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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1-25 04:48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제대로 못 느껴서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나 큰도시에 몰려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니까
이 몰린 사람들이 쓰는 지구자원 때문에
지구가 아프답니다...

'조선일보'에조차 기사로 나온 이야기이던데,
서울 강남에서 한여름 30분만 냉방기 온도를 2도인가 낮추어도
핵발전소 두 군데를 안 돌려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서울사람이 '문명'을 얼마나 덜 누리려 하느냐에 따라
참 크게 무언가 달라진다는 소리가 되기도 해요...

sslmo 2012-11-27 14:01   좋아요 1 | URL
말이나 글로 하긴 쉽지만...실천하긴 참 힘든 일들을 실천하고 계신 된장님을 보면서 배워야 할텐데 말예요~, 꾸벅(__)

감은빛 2012-11-26 12:02   좋아요 1 | URL
밥 먹으러 나가기 전, 노래 잘 들었습니다.
역시 양철님께서 정리해주시니 쉽게 이해가 잘 되네요! ^^

sslmo 2012-11-27 14:03   좋아요 1 | URL
헤헤~^______^
정리는 감은빛님이 쉽게 잘 해주신거죠.
저는 걍 옮겨적기만, ㅋ~.
암튼 대박 나셔서...담 쇄에는 꼭 이름 석자 실리시길~!

2012-11-27 16:16   좋아요 1 | URL
"아무리 위대한 일이라도 작은 것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작지만 올바른 행동이 모이면 '긍정적인 흡인력'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좋은 말이에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지구에 폐 덜끼치는 세목' 잘 배우고 갑니다. ㅎㅎ
마지막, 파란 위안- 예쁘네요.^^
 

울애인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신 후, 휴일이라도 집에 있는 걸 볼 수 없다.

학교에, 학원에...뭐 그리 바쁘게 움직이는지,

마땅히 할일이 없어진 난 방바닥에 누워 이리저리 떼굴거리다가 보면, 낙동강 오리알이라도 된듯 처량맞게 느껴진다.

 

엊그제 저녁 그러니까 날씨도 꾸물거리고 기분도 꿀꿀하고 하여,

남편과 목욕탕에 갔다가 'ㅁ면옥'이라는 설렁탕집에 들려 양곰탕을 먹었다.

남편은 연애할때 이후로 잘 안하던,

밥을 말고 파를 적당히 넣고 소금간을 하는 풀서비스를 제공해 주셨는데,

문제는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파를 안먹는 바람에,

남편이 부어준 파를 하나 하나 골라내야 했다.

남편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겉으로는 파를 골라내며 번거롭게 되었다고 툴툴거리다가,

이렇게 예쁘게 생긴 '하트파'도 발견하게 되었으니,

제대로 기분전환이 되어주셨다, ㅋ~.

 

어제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손석희의 목소리를 잠을 깨우는 기상송쯤으로 가족들과 아침밥을 먹는데, 낙동강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아들~, 잘 들어봐봐.

 저기도 엄마랑 똑같은 심정의 사람이 또 있나보다~."

아들은 가뜩이나 작은 눈이 잠에서 덜 깨, 거의 달라붙어서는 나를 간신히 쳐다본다.

"엄마, 4대강 사업 문제점 얘기하고 있는건데...

 엄마랑 4대강 사업이랑 뭐가 이심전심인데...?"

"지금 낙동강 오리알 어쩌구저쩌구...기러기 아빠처럼, 오리알 엄마 얘기하는 거 아냐?"

"무슨...?

 4대강 가운데 낙동강의 칠곡보가 물받이공이 주저앉아 보가 붕괴될 위기라는 거잖아~."

"......--;"

"난 엄마 엉뚱한 소리하는데, 보가 붕괴되는게 아니라 멘탈이 붕괴될거 같음~--;"

하는데, 나는 아무소리 못하고 밥그릇에 코를 박는 수 밖에~--;

 

나는 가방에 김선우를 주섬주섬 집어넣고 출근 준비를 하는척 할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 집어넣은 책은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이었다.

 

 

 

 

 

 

 

 

 

 물의 연인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ㆍ이어서 하늘 여기저기를 찢어 놓듯이 번개와 천둥이 쳤다. 손바닥의 담쟁이들이 엽맥을 곤두세우고 소스라쳤지만 괜찮았다. 너와 함께였으므로. 너는 주방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장관이야, 저런 자국! 번개 친 자리들, 하늘은 죄다 기억할 게 틀림없어.

  지구가 생긴 이래 모든 번개 친 자리들을?

  너는 내게 다가와 으깬 감자와 야채에 크림소를 얹은 샐러드를 한 입 넣어 주며 물었다.

  물론이지, 상처잖아.

  꽃일 수도.

  전선처럼 바지직거리는 꽃잎을 단?

  짜릿해. 안드로이드가 된 것 같아.(10쪽)

프롤로그부터 이렇게 감각적으로 시작한다.

책 뒷표지의,

'여기, 강을 파괴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에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흐르는 사람들이 있다.

 매혹의 정염과 관능적 미학이 살아 숨 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그녀, 사랑을 노래하다.'

라고 되어있는걸 새삼 인용할 것도 없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소설이다.

그냥도 충분히 재밌게 읽히는데,

4대강을 돋을새김하여, 주제를 무겁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작가 김선우가 4대강 반대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소설이 이를 전달하려고 일부러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작위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될테고,

그러다 보면 본질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비껴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했었다.

그냥 매혹과 정염과 관능적 미학이 살아 숨쉬는 사랑을 노래한 책이라고 해도...

충분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었다.

사랑해. 말해줘. 사랑한다고 말해 줘.

빗방울처럼, 아주 작게 속삭였던 것 같다.(11쪽)

숨이 막힐 것처럼 감미로운 비린내가 둘의 몸에서 동시에 피어오를 때면, 너와 함께 마지막까지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물처럼. 삶이. 사랑이.

윤허하다, 라는 말은 훨씬 뒤에 떠올랐다. (12쪽)

 

  살살 움직여 줘. 아프지 않게. 상처가 많으니까. 물처럼 흐를 수 있게.(139쪽)

 

아ㆍㆍ! 탄성이 나오는 와이강을 모두들 굽어보았다. 무위암에서 내려다보는 와이강은 자궁 속 태아를 감싸듯 와이산과 산자락 마을들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ㆍㆍ우리의 몸이 저렇게 흐르는구나, 강물이 흐르듯 피가 흐르는 존재가 생명이구나, 싶은 통찰이 푸른 하늘의 황금빛 햇빛처럼 찰나에 쏟아졌다고나 할까.. 푸르고 희고 검고 붉고 노란, 가장 원초적인 색들이 가장 적절하게 제 기운들을 풀고 당기며 흐르는 강. 사람들이 흔히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지되어 있는 적막한 화면이 아님을 유경은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흐르는 풍경, 흐르는 색들, 흐르는 물결, 흐르는 모래들, 흐르는 새들, 꽃들, 풀들, 흐르는 바람ㆍㆍ 몸들ㆍㆍ 흐르는 인생ㆍㆍ.

   어떤 앎은 그런 식으로도 오는 것이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마음이 유경과 요나스를 똑같이 훑고 지날 때ㆍㆍ.

  이렇게 아름다우니 누구든 이곳에서 마음 내려놓고 쉬면 병 같은 거 나을 수밖에 없지!

  맞아요, 할머니. 나도 잘 흘러가야 할 것 같아요. 사랑해야 하니까요.

  사랑해야 하니까.

  그의 입을 통해 처음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약사여래는 여전히 와이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요나스, 이제 어쩌지? 약사여래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경이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린다.(197~198쪽)

 

4대강 얘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치유와 사랑을 지니고 있는 것이...바로 강과 물의 속성인데 말이다.

그래도 '작가의 말'을 빌어 '영롱한, 하나씩의 물방울인 우리들'이라고 해주어서 좋았고 고마웠다.

 

암튼 소설은,  

프롤로그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연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먼저번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의 소설 버전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소설은 우리에게 잘 흘러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잘 흐른다는 것은 막히거나 넘침없이 제대로 흐른다는 것이고,

그건 사랑이나 삶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일게다.

난 이 흐름을 '소통'이라고 슬쩍 바꾸고 싶다.

 

물의 속성이 흐르는 것이지만,

바꿔 말하면 흐르는 것이 막히게 되면 차고 넘칠 것이고,

차고 넘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순리를 역행하는 것 쯤이 될 것이다.

순리를 역행한다는 것은 '불통'이다.

순리를 역행하고 불통이 되는 순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 마수의 그것으로 변하고 만다.

상처 또한 묵직하고 치명적이다.

 

마지막의 김연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린 파괴에 파괴로 맞서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물의 속성처럼 흐르는 것이 막히게 되면 차고 넘치겠지만, 흐르면서는 씻기고 떠내려갈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에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또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기 때문에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소통과 불통이,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물이 나가온다면,

상처를 활짝 열고 물에 내맡기고 볼 일이다.

잘 정화된 물이어서 상처를 씻고 소독을 해서 아물게 할지,

곪게해서 덧나게 할지는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그리고 곪더라도 결국 옹이라는 훈장을 남긴다.

 

분위기를 바꾸어, 스스로 불통을 도모한 이가 있어 옮겨본다.

스스로 꿰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멋지다, ㅋ~.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이지누 지음 / 알마 / 2012년 8월

 

 

더구나 아늑한 것은 물론 고요하기까지 하니, 산중 선방이 따로 없다. 굵은 바람에 서로 부딪히는 나무들을 선실에서 사용하는 간당 틀로 삼아 선에 들고 다시 나갈 때까지 아처럼 고요한 곳에서 말을 그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더냐. 명나라의 운서 주굉(1535~1615)스님이 말하지 않았던가. 세간의 술이나 식초 따위들은 갈무리해둔 지 오래될수록 맛이 좋은 법이라고 말이다. 그 까닭은 단단히 봉해 깊이 넣어두므로 다른 기운이 스며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서 주굉스님은 옛 선사의 말을 전한다. "20년 동안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후에 어찌 부처를 이루지 못할 것이냐"고 말이다. 그말을 전하며 주굉스님도 한마디 거든다. "아름답다, 이 말씀이여!"

  외롭고 높으며 쓸쓸한 정령치 마루의 마애석상틀 앞에서 열네댓 차례쯤 머물고 대여섯 밤을 자고 난 후에야, 나는 주굉스님의 마지막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는 이곳에 부처님을 뵈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멈추러 오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녕 몰랐다. 말을 멈추려면 생각부터 그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대뜸 말은 멈췄지만, 그것은 단지 말할 상대가 없는 것일 뿐 나 스스로 말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말은 내 속에서 풍선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웃자란 말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날부터 마치 종기처럼 흉측한 모습을 하고 겉으로 돋아났으니, 그 무슨 꼴불견이었을까. 그렇게 진세塵世를 떠돌다 다시 이곳으로 향하기를 예닐곱 차례, 그때서야 깨달았다. 말을 그친다는 것은 곧 남을 향한 것은 거두지만 나를 향한 것은 더욱 넓고 깊게 펼쳐야 하며, 내 속에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삭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 단순한 진리조차도 산중 선방이 고요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깊이 참구해 급히 깨달으라고 했거늘, 스스로를 깊이 참구하기에 고요함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고요할 때에는 고요함도 모르고, 또한 고요하지 않음도 모르는 법이다. 움직임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전의 고요함을 아는 것 아니겠는가. 진세에 머물지 않았다면 이 고요함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지 못했을 터이니, 아! 나에게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고요는 참으로 넓고 깊은 선물이자 아름다운 것이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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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1-21 03:51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대로 굳이 4대강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아도 글이 참 좋네요. 김선우 시인이 4대강도 그렇고, 강정 문제도 그렇고 관련해서 좋은 글들을 많이 썼긴 하지만요. (참..이제 그분은 푸른기와집 떠나시면 그뿐입다만, 그가 망가뜨린 이 산천은 도대체 어찌 되려나요?)

프레이야 2012-11-21 09:17   좋아요 1 | URL
상급학교 진학한 애인과의 대화가 늘 재미나요. 전 그런 애인도 하나 없고 ㅎㅎ 하나밖에 없는 재치있는 애인과 하나밖에 없는 애정돋는 남편분과 오늘도 행복하게요.~~~ ♥

숲노래 2012-11-21 09:55   좋아요 1 | URL
오늘도 즐겁게 예쁜 이야기를 빛내는 하루 누리셔요

루쉰P 2012-11-21 11:30   좋아요 1 | URL
아,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그 시가 너무 좋네요. 노래는 지금 듣고 있어요. ㅋ 애인과 아들과 사이좋게 사시는 게 전 그게 정말 무한한 사랑인 듯 보입니다. ㅋㅋㅋ
아 근데 노래 부르는 가수 예쁘네요. ㅎㅎ 오전 근무가 여유가 있어 ㅋ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요. ㅋㅋ

감은빛 2012-11-21 11:42   좋아요 1 | URL
책 뒷표지 문구에 대한 말씀들 저도 공감합니다.
나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문구 하나 때문에 부담스러워 이 책을 외면할 이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양철님의 일상이야기 늘 재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