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요리를 만든다.

 

 

이 말을 나의 음식에 관한 신조대로 바꾸면 이쯤되겠다.

최상의,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원형에 가깝게 쓰되,

최소한의 가미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이기 때문이다.

요리의 고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입이 짧아서 그런가 아무리 먹고싶어서 음식을 만들다가도,

음식 냄새를 너무 맡거나 하면 정작 먹을 수는 없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9월의 첫날 아침,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이 책을 읽는다.

아무리, 천고마비의 계절이라지만...

바디는 함부로 살찌울 수 없고,

우리 소울(=서울)이나 함께 살찌워 봅시다, 들~!

 

 

노래는 잔잔하니 청명한 가을날 아침에 듣기 좋지만,

가사는 곰곰 들어보면,

좀 청승 맞은 듯~!

반면 이곡은 경쾌한 것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책을 몬~ 읽게한다.

곡에서는 9월 다 가거든 그때 깨워달라는데,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라도 이 책을 꼭 읽어주셔야겠다.

왜냐구?

이만한 서울 푸드(soul food)도 없으니까~.

 

 

근데,

암만 생각해도,

난 말도 아닌 것이,

어쩔려고 이런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맛깔나면 여기서 멈출 수도 없고,

어쩌란 말야~--;

 

 그렇지만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조연의 존재가 좋은 영화를 만들곤 한다. 모든 배우가 송강호이기는 어렵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이문식이나 유해진도 나오고, 김수미도 있어야 영화의 소소한 맛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그런 캐릭터의 맛이 바로 신맛이고 쓴맛이다. 신맛은 혼자서 맛의 캐릭터를 드러내지 않는다. 순수한 신맛은 매우 고통스러운 화학적 돌출이다. 신맛은 단맛이나 짠맛과 어울려 놀라운 맛의 두께를 마련해낸다. 생각만 해도 혀끝에 침이 고이는 묵은 김치나 냉면의 시원한 동치미 육수도 딱 그런 맛이다. 신맛의 예각적 맛을 짠맛이 든든히 잡아준다. 우리 혀는 매우 둔감하고 이기적이며 감정적이어서 몇가지 맛의 복합성을 화학적 배합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우 주관적으로 반응하는데, 똑같은 신맛이라고 해도 짠맛의 배려가 없으면 어떤 경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 맛있는 군만두를 식초에만 찍어 먹는다고 해 보시라.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간장과 배합해서 쓰면 신맛의 아슬아슬한 각도가 슬쩍 눌리면서 입맛을 돋워주는 신비한 미각으로 변화한다. 물론, 맛이란 게 혀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혀도 정신의 지배를 받아 감각의 층위가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 화가 났을 때 혀의 반응이 모두 달라진다. 아버지에게 화풀이하느라고 일부러 짜게 한 것이 아니라, 혀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기능 이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랑하면 디저트가 유독 맛있는 것은 혀에서 단맛을 느끼는 미각돌기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8~9쪽)

 

"인생이란 한 번 사는 것,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인생의 쓴맛도 때로는 단맛과 만나면 기막힌 맛이 된다구. 초콜릿처럼 말이야."(10쪽)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그의 글 맛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보조멈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그의 전작들을 슬금슬금 장바구니에 담는다.

 

글이 어찌 그리 맛깔스러운가 했더니,

'기자로 일하던 중 이탈리아 영화에 매혹되어 무작정 이탈리아 요리학교로 떠났다'라고 책 날개 안쪽에 적혀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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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9-01 12:37   좋아요 0 | URL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는 것에 정말 동의해요 입맛을 자극하는 맛들 거기에 더해지는 추억은 오래가지요.
멋진 추억을 선물을 입맛에 손맛을 가졌다면 그리고 선물할 수 있다면
요즘들어 늘 제 음식이 맛없다는 가족들때무ㅡㄴ에 골머리 중이라 흑흑

sslmo 2012-09-11 11:2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 요즘은 어떠세요?
모쪼록 뱃 속의 꼬물이를 생각하여 암거나 자알~ 드세요. ㅋ~.
나도 참~, 먹을 걸 주지도 않음서 잘 드시란다~~~^^

이쁜 수제 비누의 솜씨로 미루어 보건데...
님의 음식솜씨도 좀 짱일듯~!

mira 2012-09-02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주말에 이책 금방끝내고 리뷰를 어떻게 맛깔스럽게 적나 이작가의 책을 읽었을때 느꼈던 맛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지 고민하고 있어요

sslmo 2012-09-11 11:23   좋아요 0 | URL
mira-da님, 반갑습니다여~^^

지금쯤 리뷰 올리셨으려나?
님은 어떻게 맛깔스럽게 표현했을지 보러가려구여, ㅋ~.
 
받아들임 -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타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바로 전에 읽은 '화담집'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의 '공(空)'도,

자연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도'도 집착을 버리고 비워내라고만 하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었다.

 

우연히 읽게된 화담집에서,

'공(空)'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보는 '태허'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고,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책이 마음챙김(mindfulness)에 관한 이 책 '받아들임'이다.

 

원제 'Radical Acceptance'는 '받아들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책 표지의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소제목이 더 나를 사로잡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 용어를 명확하게 짚고 갈게 하나 있다.

ㆍㆍㆍㆍㆍㆍ,고통(pain)이 반드시 괴로움(suffering)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159쪽)

이 부분은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모호하다.

'마음챙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pain과 suffering에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통이나 괴로움 등 뜻이 모호한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pain과 suffering이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게,

pain이 육체적 내지, 정신적 고통이라면 suffering은 마음의 고통 정도로 해석되는게 낫지 않을까 말이다.

 

한동안 이 서재의 제목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나서다'라고 했을만큼 'mindfulness=마음챙김'이 내겐 화두 같은 것이었다.

우연히 '화담집'의 '태허'를 만났고,

'태허'의 '멈출 지(止)'의 연장선 상에서 이 책 '받아들임'을 읽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마음을 어쩌지 못해 힘들어 할때면,

어떻게 해주지 못해서 안쓰럽다고 하시면서...그냥 바라보라고 하셨던 분이 계셨다.

그땐 그말 뜻을 이 책의 그것들과 연관시키지 못하고 그냥 서운해 하기만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 말뜻을 어렴풋이 깨닫겠고,

그러고 나니까,

그동안의 서운함이 다 소급되어, 위안이 되는 것이다.

 

암튼 서화담의 멈출 지(止)에서 받아들임의 멈춤으로까지,

'받아들임'의 그 고통과 괴로움을 넘나드는 선문답과 깨달음이 아슴아슴 눈물겹다.

 

이 책에서처럼 '받아들임'의 전제 조건으로 일단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이렇게 적고 있다.

진실에 의해 불타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자신이 나쁘고 사랑 받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도망가는 것이 더 나았다. ㆍㆍㆍㆍㆍㆍ우리도 로라처럼 대체로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안다. 반면 멈추는 일은 두려울 수 있다. ㆍㆍㆍㆍㆍㆍ

  다음 치료회기 때 나는 로라에게 멈춤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내면적 힘의 자리에서 용과 대면하는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분노가 북받칠 때, 그녀는 밖으로 향하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내면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고통을 만났을 때 소리치거나 뛰쳐나가는 대신에 멈출 수 있다면, 현명하게 대응하도록 이끌어줄 내적 힘을 발견할 것이라고 그녀에게 일러줬다. (101쪽)

 

멈추는 게 힘든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니...내가 간과한 것은,

단지 멈추는데는 '좋고 나쁘고'의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으니, 감정 또한 개입될 필요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멈추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투우에는 피신과 회복의 장소로서 멈춤과 아주 유사한 것이 있다. 사람들과 황소가 싸움 중에 경기장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안전구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황소는 거기서 기운과 힘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장소와 내면의 상태는 케렌시아(querencia)라고 불린다. 황소가 흥분하여 대응하는 한, 칼자루는 투우사가 쥐고 있다. 그러나 황소가 케렌시아를 발견하면 기운을 되찾고 두려움을 잊는다. 왜냐하면 황소가 자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멈추어 받아들인 다음, 마주하게 되는 것이 '조건없는 친절'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까지만 받아들이고 '예스'라고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노'를 날려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것이다.

내가 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두렵기 전'까지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조건없는 친절로 경험을 마주하는 특정 순간에 균형감각이나 회복 탄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예스를 시도하게 되면 두려움에 함몰될 수도 있다. 이때는 친구의 위안을 구하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처방된 약을 복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당분간은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노"라고 말하고, 우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만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대처법이다. (128쪽)

 

여기서 '예스와 노'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뭐가 어려울까 싶지만,

이를테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에 '노'라고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하려는 작업이, 그렇게 자학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라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욕구하는 자신에 대한 보상을 음식으로 하려고 탐식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위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하는 자기를 벌주려고 자신의 몸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 도 있다.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애당초 우리를 중독으로 몰고 간 사랑에 대한 갈망과도 단절되고 만다.

 

그녀는 강한 열망을 느꼈을 때 냉장고로 직접 가는 대신 자신의 스폰서에게 전화를 했다. 이 방법은 내가 '보조 멈춤'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선택지들을 탐색할 수 있었다.(210쪽)

  갈망과 과식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사라는 자신을 중독으로 치닫게 했던 고통스러운 자동반응의 연쇄를 차단했다.OA에서처럼 그녀가 음식을 대체물로 삼아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틀을 깨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욕구하는 자기의 존재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것이 사라의 변신을 이끈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비록 갈망이 일어날 때 의식적으로 용서하고 내려놓기를 게속해야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책망하기를 멈췄을 때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그녀의 능력은 더 이상 엄청난 수치심 앞에 무릎 꿇지 않게 되었다.(213쪽) 

'보조멈춤'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긍정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알라디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갔을지도 모르는,

중증의 질환으로 나도 한동안 고민했었다.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이 쌓여 책을 이고 살게 생겼는데도,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들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 분야는 수명이 짧다는 구실이 있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병이었다.

그때 그 분은 자처해서 '보조멈춤'이 되어주마고 하셨다.

 

나의 책에 대한 탐닉 또한,

정서적 결핍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라...

지독한 중독행독, 적어도 신간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까지는 여전히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과 이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은 ,

그런 욕구가 계속 일어난다고 해도,

그리하여 설사 책의 구매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고통이 반드시 마음의 괴로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욕구나 갈망을  제한할 때 우리는 괴로워 하게 되지,

그저, 멈춰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어떤 제약이나 제한을 느낄 것도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찌하면,

'보조멈춤'을 자처한 분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난 그걸 이 한 구절로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안는 자이며 안기는 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욕구라는 것 자체가 선악의 판단 대상도 아니거니와,

지금 이 순간 보조멈춤을 자처했다고 하여,

내내 '보조멈춤'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라는 법도 없다.

우리의 욕구가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욕구나 갈망에 있어서는 내가 '보조멈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안는 자와 안기는 자 모두 사랑의 의식으로 녹아든다.(302쪽)

 

이 책 전체를 통하여, 내게 가장 큰 용기를 준 건 아무래도 이 구절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원죄를 타고나는 것과 달리, 불교에는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라거나 본래 사악한 인간이라는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때 그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의 삶과 이어져 있고, 집착과 미움이 더 많이 소외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진실을 모른다는 뜻이다. 무지하다는 것은 의식의 순수성과, 우리의 근본적 선을 표현하는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 안에 근본적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347~348쪽)

사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이러면 아무래도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지하다고 해서 모두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배워고 깨쳐야 한다는 중압감이 뒤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으로 난 '학습'을 꼽고 싶다.

답습만 하게 된다면 그건 모방이지만,

학습을 통하여 분명히 좀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암튼,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엘리엇(T.S. Eliot)의 극본『칵테일파티』를 인용하는 것으로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알고 있던 순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후로 변했다ㆍㆍㆍㆍㆍㆍ.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370~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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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 있었다.

미안하다고는 해야겠는데 말은 안 나오고,

코 밑에서 알짱거리면서 엉뚱한 일로 딴지를 걸면서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사람 좋게 '헤헤~'거리면서,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할 태세였고,

이래저래 어쩔 줄 몰라하는 날 향하여,

급기야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음 다 보인다'고 하는 '관심법'까지 구사하는 거다.

아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그래...

내가 미안해서 쩔쩔매는 것을 모르나 싶은 것이 서운하여,

나무들 사이에 있을땐 숲을 볼 수 없다며 툴툴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가는 숲도 보이겠지라며 또 '헤헤~'거린다.

 

 

 

 

 

 

 

 

 

화담집
김교빈 지음, 서경덕 원작 /

풀빛 / 2011년 12월

 

 

그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청소년 철학창고'라는 부제를 단 <화담집>이었다.

그동안 화담 서경덕을 황진이의 요망(?)을 이겨낸 군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

성리학의 최고봉이나, 이기론의 중심 사상가 등을 외울때 서경덕을 제일 먼저 외웠으면서도...

한번도 그 서경덕으로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못 했었다.

때문에 황진이가 그토록 연모하고 어쩌고 하여도,

송도3절 어쩌고 하여도,

그런가보다 했을뿐 그토록 훌륭한 인물인지를 놓고는 심사숙고한 적이 없었다.

 

실토하자면...

옛날에 두꺼운 하드커버의 '화담집'을 한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채 본문을 들추기도 전 서문의 빽빽한 한자에 기가 죽어, 하품만 하다가 덮었었다~--;

그동안의 책들에서 서경덕은 둔갑술이나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선이나 도인쯤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이 책에선 인간 서경덕이 등장해서 좋았다.

 

어찌되었건, 인간이라고 해야 그의 심오한 학문세계를 가히 범접해 볼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인간적이라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군자일지라도...

그도 성리학자이기 때문에 성리학적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구태의연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지고 볶더라도 구태의연한 가운데 좀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게 좋지,

가끔 신선이나 도인이 부럽고 좋아 보일 때는 있겠지만,

신선이나 도인을 닮고 싶지도,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동안 내게 이와 기의 개념은 좀(=very much) 어려웠다.

기는 리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며 리와 기는 한 사물 속에 같이 들어 있다.(25쪽)

 

그러니 이와 기를 자유자재로 운용, 구사해야 하는 태극과 태허 개념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태극이 우주만물의 변화를 설명하고, 주역이나 우리나라 국기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성리학 전반에 걸쳐 두루 쓰였다면...

태허는 성리학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개념으로, 장자가 가장 최고의 경지로 말한 절대 자유의 개념이란다.

하지만 서경덕은 모든 만물을 의 변화로 설명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성리학에서 가장 궁극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태극보다는 최고 변화의 경지인 태허를 중요 개념으로 삼았다.

오히려 태극을 사물의 변화 속에 담긴 변화의 궤적 정도로 낮추어 보았다.

서경덕의 관점은 도교나 불교의 관점과 다르다.그는 비록 자연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장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도덕을 강조하는 유학자였다. 다만 일반 유학자들과 다른 점은 '내면을 닦는 공부'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공부'가 학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에서 공(空)을 강조했지만 서경덕은 빈 듯해 보이는 '공'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봄으로써 존재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자 했지만 그런 힘 또한 장자가 아닌, 맹자가 강조했던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도덕적 용기)에서 온다고 보았다.(58쪽)

 

암튼 서경덕은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나 보다.

열네 살때 <서경>을 배웠는데 그 다음 해까지 300회를 읽었다고 하고,

열여덟 살때 <대학>을 읽다가 "앎을 완성하는 것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깨닫는 일에 있다."라고 한 문장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먼저 사물의 이츠를 궁구하지 못한다면 독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하고 

날마다 책상 앞에 사물 이름을 한 가지씩 써 붙여 놓고 그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94쪽)

 

서경덕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린 인물이 있는데, 바로 이현주 목사님이다.

이현주 목사님의 <사랑 아닌 것이 없다 - 부제;사물과 나눈 이야기 >를 읽었던 터였는데,

그때는 많은 부분이 서경덕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 이옥의 글들을 읽다가...

과거 내가 열광했던 김탁환의 미문들이 이옥의 그것이란걸 알았을 때의 배신의 충격이랑 흡사 맞먹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서경덕의 그것은 이황의 그것과는 명맥을 달리, 이이의 그것과는 명맥을 같이 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것을 배워서 새 것을 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허는 빈 듯하면서도 비어 있지 않으니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빈 것 같은 기이다. '빈 것'은 끝도 없고 무한히 펼쳐져 있으므로 기 또한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 이미 '빈 것'이라고 해놓고 어째서 기라고 말하는가? 빈 듯하면서 고요한 것이 기의 본모습이고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기의 작용이니, '빈 것'이 비어 있지 않은 것임을 안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노자가 "있음이 없음에서 나온다."라고 한 것은 '빈 것'이 곧 기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또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틀렸다. 만일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한다면, 바야흐로 아직 아무것도 생기지 않앗을 때는 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빈 것'은 죽은 물건이 된다.

  이미 기가 없다면 또 어디에서 기가 생길 것인가? 기는 시작이 없으니 생겨남도 없다. 이미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겠는가?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떻게 없어짐이 있겠는가?

  도가에서는 허(虛)와 무(無)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적(寂)과 멸(滅)을 말한 것은 리와 기의 근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어찌 도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78~7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멈춰서서 깊이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서경덕이 개성 국립학교 선생으로 와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관자(大觀子) 심의에게 준 송서(送序)를 읽으면서 이다.

서경덕은 말처럼 가난하여 다른 선물을 줄 길이 없어서 《주역》을 읽다가 떠오른 글자 멈춤(止)에 대한 생각을 선물로 준 것이다.

글자를 선물로 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그토록 가난한 비참함이 될수도 있는것인데...

그걸 선물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받을 수 있는 마음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 마음만으로도 천하를 모두 얻은 것보다 호기롭고 넉넉할 것 같다.

 

서경덕의 그것이 그간의 것들과 다르게 와닿은 까닭은,

글자 멈춤(止)에서 사물의 사물됨이나 사람의 도리를 읽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서경덕은 그의 좋은 점을 높이 사면서도 "머물 만한 때면 머물고 갈 만한 때면 간다." 라고 했던 《주역》의 가르침을 끌어와서 벼슬이든 시 쓰는 일이든 자연의 법칙에 맡기라고 하고 있다.

 

태극과 태허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도 그렇고,

관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말들이다.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서 의미가 상반될 수도 있겠다.

이럴때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사람의 관점을 욕심내거나 탐내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 머물고 안주하느냐,

도움을 받아,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느냐, 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겠다.

관점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로는 책, 벗, 스승 등이 있겠다.

 

실토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불교나 도교적 얘기도 아니고, 성리학적 얘기도 아니다.

어떤 종교적 관점들을 통하여 예측하게된 미래를 놓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또는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닦아 가는데 있다.

 

  '기자이(機自爾)'란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꽃 필 때 되면 꽃이 피고 바람 불 때가 되면 바람 불며, 배고플 때가 되면 배가 고파 오는 그런 계기의 변화를 뜻한다.(74쪽)

 

태극과 태허를 얘기할때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관점과 기준이 되는 그 '무엇' 또는 그'누군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내게 그런 역할을 하는 이가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누군가'라는 거다.

 

때로 관점을 갖고 고민하게 될때,

누군가와 한편인가를 놓고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게,

그 누군가를 내게 거울인양 비추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합집합, 교집합, 부분집합의 빗금으로 나타낼때 마냥...

자연스럽게 나와 누군가를 제외한 나머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선비들이 왜 거문고를 가까이했는지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됐다.

선비들은 늘 거문고를 가까이했다. 그 까닭은 거문고가 한자로는 금(琴)인데, 그 발음이 잘못된 행위를 삼가한다는 뜻의 금(禁)과 통하기 때문이다.

  먼저 앞의 두 시는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이고 뒤의 두 시는 줄 있는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다. 줄 없는 거문고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줄은 소리를 내는 도구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 듣는 것보다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이 한 단계 위다. 이는 글자를 통해 써진 의미를 보지만 글자의 조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들 속에 담긴 의미를 보는 것과 같다.

더불어, 소리를 통해 듣는 것과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에 대해서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때론 소리와 소리 사이의 적막도 의미 있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즘은 사물의 중심을 일부러 살짝 흩고, 어질러 놓는다.

그렇게 하여, 무게 중심을 바꾸게 되면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무엇 하나 사소하고 소홀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럴거라 믿는다.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간 숲도 보이겠지~.

 

  

 

   청소년 철학창고 세트 - 전30권
   플라톤 외 지음, 송재범 외 옮김 /

   풀빛 / 2012년 3월

 

 

이 시리즈의 책은 '근사록'에 이어 두번째인데, 가볍고 이해하기 쉽다.

단점이라면 한자가 병기되지 않아서 의미가 모호한 경우가 있다.

화담집은 '김교빈'님의 풀이가 단연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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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2-08-24 18:58   좋아요 0 | URL
오늘은 좀(very much) 어려운 내용이군요.
무식한 저로서는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사옵니다.
언급하신 이현주 목사님의 책은 저도 살짝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저 옛날 서경덕 조상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다 이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배운 게 조금(a little) 있는 듯 합니다! ^^
 
함부로 애틋하게 - 네버 엔딩 스토리
정유희 지음, 권신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난 그러니까,

우리말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더욱 아니다.

어떤때는 말로써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고 있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때도 있다.

그런 주제에,

처음 저 제목을 보고 좀 껄끄러웠다.

그러다가 이내 나처럼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강조를 하고 어필하기 위해서,

서로 상반되는 두 단어를 사용했음으리라 짐작하게 되었지만, 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제목은 좀 아니지 싶다.

어떻게 '함부로'이면서 '애틋하게'가 될 수 있냔 말이다.

 

암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건...

보고 싶을 때 보고싶다고 애기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 부러워서 괜히 딴지를 걸어보고 있는 것이다, ㅋ~.

 

누군가 보고 싶어서,

살짝 돌 뻔 하거나 환장할 뻔 하거나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나란 사람은 그걸 표현하는데는 참 인색하다 싶었는데,

이 책에선 흐드러지고 넘친다.

그걸 엿보고 한 자락이라도 배워 갖고 싶었다.

 

그게 정 여의치 않으면,

이 책에 씌여진 글들을 좀 옮겨 적으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카타르시스라도 느껴볼까 하고 시작하게 되었다.

근데, 이 책에는 '보고싶다'의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 뿐만 아니고,

처방도 나오는데,

그게 꼭 '다리를 원하거든 너의 '가장' 이쁜 목소리를 다오'하는 <인어 공주>의 마녀 feel이다.

커다란 종이 봉투에 구멍을 두 개나 뚫고 그걸 쓴 후 한참을 돌아다니는 거 라든지,

주전자, 낡은 액자, 책상 다리, 삼각자, 전화기 등...딱딱한 것들을 죄다 깨물어보는 거 라든지,

한쪽 벽에 점을 찍고 계속 보고싶은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중얼대는거 라든지...

 

 

그런데 황당무계하고 흐드러지고 넘치는,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흘러 넘치는 이 책이 좋은건 말이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자기 감정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냥 그렇게 가만히 옆에 있어줘 라고도 하고,

날 보러 와  라고도 한다.

 

어쩜 내가,

'보고싶다'거나 '그래, 그냥 그렇게 가만히 옆에 있어줘'라거나 '날 보러 와'라고 얘기 못하는 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후에 오게 될 것들이 자신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오게 될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여라도,

머저리 같은 이 사람이라고 무모한 사랑의 마음이 없을쏘냐

너를 생각하고 염두하며 하염없이 골몰하느라 내 생생하던 마음에 붉은 물이 들었다.

이런 진심이라도 만나게 되면 그땐,

나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상처를 남기게 되고...그렇게 되면 그땐,

정말 제대로 대책 없어진다는 걸 알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엄밀히 얘기하자면,

이 책이 좋은게 아니라,

이 책의 젊음이,

그들의 젊은 마인드가,

다시 말해 그들의 눈치보지 않음이 좋고 부러운 것이다, ㅋ~.

 

때문에 난 오늘도 이 책에,

씌여진 글들을 소리내어 읽으며,

그림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젊음을 최대한 가까이서 흡입하고 수혈하며 자위하려 할 뿐이다.

사로잡히다

 

 

만날 수 없거나 만나지 않아도

그대 소식 내게 닿을 길 없어도

어디에서인가 숨 쉬며 기꺼이 살아만 있어도

그렇게나 좋을 사람이 있다

 

 

심봉사 같았던 내 영혼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그대라는 기이한 괴물한테 사로잡힌 탓에

그대의 존재감이 내겐 너무나 벅차

그대를 털끝만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

 

 

결국 그대가, 날 사랑하기에는 글러먹게 생긴 존재일지라도

그대는 이미 내 머릿속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걸

난 나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는 그대를

내게서 몰아낼 묘책도 전혀 없으니ㆍㆍㆍ(86쪽)

 

눈물커피

 

 

네가 혼곤한 아침을 깨우며 마시는 모닝커피는

전날 밤 내 눈물로 드립한 것인 줄 알아라

나른한 오후 3시에 네가 홀짝대는 홍차는

오전의 내 그리움을 우려낸 것이로다

너라는 삭풍으로 인해 온종일 흔들리던 나는

어느덧 구름으로 뭉쳐지다가

이윽고 비 되어 메마른 대지를 적신다

 

 

여우의 약삭빠른 전술로 노련히 사랑을 셈하는 당신

나 언제든 당신에게만큼은 자나 깨나 한결같은,

사시사철 우직한 미련곰탱이로 그대에게 임하리라 (112쪽)

 

Cat mode

 

 

사람들은 참 어리석기도 하지

'인연'이라는 걸 빙자해서 애써

관계를 연명해가곤 하니 말이야

 

 

고양이들은 인연을 구걸하거나 적선하지 않지

관계의 연을 기억할 때는 복수가 필요할 때뿐

새날이 밝았다

오늘도 신선한 우유가 배달 될 테지?

그리고 적당량의 일조량과 졸음도

신난다! (212쪽)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는 보고싶어도 보고싶다는 소리를 못하는 나를 눈치는 챘으나,

내가 흡입하고 수혈할 수 있도록 나눠줄 만큼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인지,

이런 돌멩이를 하나 건네주었다.

 

 

히야~, 돌멩이라니~!

하긴 루비나 사파이어나 에메랄드나 다이아몬드, 이딴 것들도...

다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전에는 한낯 돌멩이에 불과하였으리라.

이 돌멩이의 용도가 송곳 대용인지 은장도 대용인지 미련한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알 수 없는지라,

난 얠 이렇게 가지고 논다.

그러고보면 나 혼자놀기의 달인?

자, 그럼 지금부터 혼자놀기의 진수를 감상해 보시겠습니다여~!

 

 

그러고 보면,

이 책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사람 모두, 혼자 놀기의 달인들이 아닌가 싶다.

감각적인 글이나 그림 따위는,

혼자 앞서도 독선이나 독단으로 비춰져,

자칫 본질을 흐릴 수도 있으나...

뭐, 내 개인적인 취향까지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말이다.

 

 

젊다는 건 변화무쌍하다는 의미이다.

변화는,

나와 남이 다름을 인정할때 바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말하면, 변화==>감정에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거==>자연스러운 거, 자연의 원리.

자연==>변하는 거.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변하지 않는 가운데 변하는 부분이 있는 그런 것.)

내가 육체적으로 젊은가를 놓고라면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지만,

젊게 살려는 마음을 먹고 사는가는 다른 문제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어떤 때는 실체도 알 수 없는 언어의 의미나, 마음 씀씀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망한 그리움 따위에 연연해 한다.

차라리 '사물'을 관찰하고,

사물의 실체 속에서 자연을 느끼되,

자연에 이렇게 저렇게 법칙들을 만들어서 자연의 원 뜻을 훼손시키고,

그 안에 사물의 실체나 도덕성 따위를 가두는 것을 경계하여야 겠다. 

 

암튼, '함부로'와 '애틋하게'가 관련된 '보고싶다'타령을 내 맘대로 재해석하다가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어차피 삼천포로 빠진 김에 가제트도 마저 구경하자.

세상에 팔과 다리가 쑥~쑥~ 길어지는 가제트형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단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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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8-19 21:34   좋아요 1 | URL
몸은 안 젊어도 마음이 젊으면 젊은 사람이지요~

하늘바람 2012-08-20 01:55   좋아요 1 | URL
ㅎㅎㅎ
돌멩이 갖고 놀기 재미나네요
잊었던 걸 상기시켜 주셨어요
제가 권신아를 넘 좋아했다는걸
왜 전 그걸 잊고 있었을까요
아 그링이 넘 좋아서 까무라칩니다.
전 늘 외국 나가는 사람한테 말하지요
돌하나만 주워와라.
제주도 갈때도 돌하나 꼭 주워 오는데
사실 그럼 안되는데~
웬지 돌들 자세히 보면 이쁘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거 같아서리
그런데 그 주워왔던 몇몇 돌들 어디로 갔는지.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이일훈.송승훈 지음, 신승은 그림, 진효숙 사진 /

  서해문집 / 2012년 7월

 

이 책을 시작한 건 '이일훈'님 때문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분의 '뒷산이 하하하'를 접하게 되었는데 좋았던 터라,

한번 필 꽂히면 전작을 두루 섭렵하는 나의 취향에 맞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를 읽어 주셨다.

그런 후에 읽게 된 이 책은, 어떤 의미로든 좀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건축가야 집을 건축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손 쳐도,

송승훈 샘이야 (이때까지는 ''책.따.세'의 일원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냥 국어샘일 뿐인데,

집을 지을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속물스런 나는 돈과 연관시켜 생각이 이리저리 널을 뛰었는데,

땅값에, 설계비에, 건축비에...비용이 만만치 않을텐데 하는 기우(杞憂)가 주를 이뤘다.

 

책을 읽다보면,

송승훈샘이 왜 이런 집을 짓게 되는 지,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하게 되는지,

가 조곤조곤 설명되어 있어...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고 눈물 바람을 하게 되지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처럼, 그건 또 그때뿐이고...

평범한 소시민인 나로서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일확천금을 갖게 되지 않는다면,

평생 꿈꿔볼 수조차 없는 그런 집이어서 읽는 내내 부러움으로 배가 아팠던 것도 사실이다.

암튼 이 책은 중심을 잘못 잡아 읽으면 얼마든지 당혹스럽고 불편한 책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건축가인 이일훈님과 건축주인 송승훈샘이 지은 이 집의 이름은 '잔서완석루'이다.

해석해 보자면, '낡은 책이 있는 거친 돌집' 이라는 뜻이란다.

건축가 이일훈 님이야 '채나눔' 이라고 하여 '불편하게 살기, 밖에서 살기, 늘려 살기' 따위를 주창하신 분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송승훈 샘의 그것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송승훈 샘은 국어샘 답게 서재에 힘을 주려고 하셨는데,

서재는 공부를 하는 장소이므로 너무 편한 것보다 다소 긴장감이 드는,

어찌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장치들을 해달라는 대목에서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송샘의 책을 대하는 자세를 미루어, 나의 책을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됐다.

 

이 분이 꿈꾸고 계신 집은 이 분이 그리는 삶에 대한 이상향을 반영하고 있고,

이건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삶의 근원적이고 궁긍적인 문제, 즉 자아성찰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는것 같다.

다시말해, 삶이란건 외부로만 무한히 열고 소통하려 해서 되는게 아니라,

그와 보조를 맞추어 안으로 자기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삶은 넓고 풍요롭고 풍성한 동시에 안으로 충분히 깊이 있어야 한다.

 

발상을 조금 바꾸어,

건축가 이일훈 님의 이 물음들을 꼭 짓는 집에만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집을 꿈꾸고 계신가요?"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나요?"

 

인터넷에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이라면 한 번씩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 같고,

의미를 더 축소시켜 집을 '서재'에 국한시켜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서재를 꿈꾸고 계신가요?"

- 책을 보관하고 쌓아두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읽고 생각을 키우고 나누고 발전시키는...말하자면, 열린 소통의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나요?"

- 넓고 깊게, 풍요롭고 풍부하게.

 물에서 뜨기 위한 전제조건은 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소통의 전제 조건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통의 아우라나 파장이 얼마나 넓고 깊세 미칠 수 있는지 따위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멋드러지게 대답해야 겠지만...어디까지나 준비된 답변일 뿐이고,

읽지 않은 책들로 날마다 책탑을 쌓고 살아가는 일개 중생일뿐이다.

책탑은 날마다 높아지고,

난 야한 생각을 할수록 머리카락이 빨리 긴다는 속설을 믿어 매일 꾸준이 야한 생각을 해서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다.

머리카락을 드리우면 왕자님은 아니어도 누군가 책탑에 갇힌 나를 구하러 와줄것만 같다, ㅋ~.

 

요즘 책 정리를 하고 있다.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책은 더더욱 그런고로, 책들은 그렇게 쌓여 책탑을 이루는 형국이었고,

이게 심각한 사태구나 하는것을 깨달은건 우리 아들의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일기장이나 비밀노트 따위를 안버리는거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초1때의 알림장이 그대로 책꽂이에 꽂혀 있는 거였다.)

급기야 책을 이고 자야 되는건 아닐까 걱정되어, 난 자못 심각하게 왜 안버리냐고 묻자,

우리 아들 曰,"버리는 건 줄 몰랐어~--;"

 

책은 단지 책꽂이에 꽂아놓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읽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책은 돌려 읽고,

생각을 나누고,

생각이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건드리고,

그게 어떤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책을 어디다 내팽개쳐 버렸는지도 모를 수도 있고,

보이기 위해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아는 놓았으나 읽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

책을 그저 뚝딱 읽어버리고 말았을 수도 있고,

책을 읽고 이런저런 일련의 과정의 변화를 거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나는...마다했다고 우기던, 서재에 연연해 온것이 된다.

이제 책탑을 허물고 걸어나와,

책을 읽고,

책에서 배운대로 실천하도록 해야겠다.

 

비록 나의 그것은 송승훈 샘의 '구름배'같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구름배 같으면 좋겠습니다. 구름이 부드럽게 감싸 안고 공기 잘 통하는 하늘로 사람을 두둥실 띄워가는 듯 편안한 방이길 꿈꿉니다.’ (32쪽)

 

삶이란 것이 몸으로 통과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듯이,

책도 자기가 읽고 감동 받았을때,

그 감동이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체화하는 과정을 겪었을때,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독서가 된다.

 

독서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독선이나 독단에 빠지는 것이다.

그랑제의 소설 <검은 선>에도 그런 사람이 나오고,

프레드 바르가스의 소설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에도 보면,

책을 누구보다도 많이 읽지만, 해석을 자기 마음대로해서 독선이나 독단에 빠진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니 책을 읽는 사람들은 계속 자신을 돌아봐야하고, 주변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서재는,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않고 타성에 빠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이중적인 잣대가 된다.

 

집이란 '어드메 한 구석 기둥을 부여잡고 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말이 책을 읽는 내내 입가를 맴돌았다.

이 말은 이렇게 저렇게 바꿔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둥 대용의 친구와 책은 그럭저럭 확보한 셈이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하려나?

 

 

그런 의미에서 이일훈 님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도 많은 물음을 던지는 그런 책이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일훈 지음 / 사문난적 /

 2011년 1

 

숲 닮은 도시가 갖춰야할 최소한의 덕목은 '경계'를 없애는 일이다. '영역' '구획'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숲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자연의 공간의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 나무와 바위 사이에도, 계곡과 능선 사이에도 경계가 없다. 숲이 숲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 경계 없는 자연공간들이 바로 숨통이기 때문이다. 모든 흐로고 지나가는 것들이 그 경계 옶는 사이에서 작용하고 존재하므로 숲과 나뭉와 동물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럼 도시는? 그 반대다. 경계를 확보하려고 혈안이다. 영역 표시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구획을 지어야 마음을 놓는다. 개체의 구획이 전체를 죽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구획된 경계는 불통의 공간이 된다. 건물이 두 체면 불통의 공간도 두 배가 된다. 그 사이를 허물어 나무 심고 사람이 다니면 그게 바로 소통이다. 숲은 자연이 소통되는 상태다. 숲 닮은 도시를 꿈꾼다면 모든 것을 통하게 하라. 그러면 아무도 콘크리트 숲을 욕하지 않으리.

 

숲이 말한다. 경계를 없애야 숲이 된다고.

도시에 묻는다. 우리는 오늘 몇 배의 불통을 참고 있는가.(40쪽)

 

자연이란 말의 의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진 무엇'이라는 정의(定義)이다. '~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이 자연스레 다가왔다'하는 자연스러움은 역시 사랑의 묘사에 제격이다. 하는 이도 모르게 저절로 맺어지는 사랑이 있는가 햐면 꾐ㆍ 설득 ㆍ도전ㆍ 쟁취의 사랑도 잇다. 저절로 이루어진 사랑이 자연의 숲이라면 계획된 작전 같은 사랑은 인곡 숲이다. 모든 사랑이 다 소중하듯이 숲도 자연이든 인공이든 다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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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2-08-16 20:37   좋아요 1 | URL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읽고 소통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언니 서재 정리하실때 제게도 좋은책 보내주세요.ㅋㅋ

하늘바람 2012-08-17 01:25   좋아요 1 | URL
한 때 책으로 집을 도배하던 떄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어느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 책은 장식용이 아니라고.
그다음부턴 책을 가능하면 모으지 않으리라 하고 있지만
그게 참 안 되더이다^^
오늘 이상하게 님 생각 많이 했는데
님이 페이퍼를 올리셨네요^^
전 사실 책을 뒤죽박죽 정리 못하기의 달인인지라
어떤 서재를 꿈꾸냐 하면 정리 안해도 되는 서재?
과연 그런 서재가 있을런지.

라로 2012-08-18 00:06   좋아요 1 | URL
이일훈, 잘 모르는 작가인데 여기서 알게 되었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지만 도서관에 자주 못 가는 사람이라 언제 읽을지 장담은 못 하겠어요.
하지만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읽고 있자니 꼭 만나고 싶네요!!^^

2012-08-19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