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푸른사상 시선 8
송유미 지음 / 푸른사상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끓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ㆍㆍㆍㆍㆍㆍ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중에서 부분 발췌 -

 

우리집은 산 바로 밑이다.

쉽게 표현해서 왼쪽으로 5분 정도 산길을 따라 가면 산비탈에 서있는 아들 학교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5분 못되게 가면 자그마한 절이 있다.

집과 학교와 절의 꼭지점끼리 연결하여 가상의 마름모를 그려 우리집과 반대방향으로

10배 정도,20배 아니 100배 정도 잡아 늘이면 서오능이다.

 

이렇게 동네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이유는,

내가 이 동네 이 집에서10여 년을 살면서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를 며칠 전에야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 누가 부석사를 놀러간다고 자랑을 하는게다.

나는 그 전부터 가고 싶었던 선암사도 아직인데,

친구가 부석사로 놀러간다고 하니 마음이 막 부석사로 달려가는거다.

부석사로 향하는 내 마음의 부러움 따위를 마알갛게 비워내고 나니,

새벽 종소리가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이 떨리는 공명을 만들어내는 것마냥 한없이 가깝게 들린다.

 

부석사를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면서,

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내려다보는 눈맛을...그야말로 '무등'(비교할 바가 없음)이라고 자랑하는데,

난 이상하게 운주사의 와불이 생각나는거다.

운주사의 와불 또한 세계에서 하나뿐인 누운 불상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운주사의 '와불'은 일명 '머슴부처'라고도 불리우는 좀 슬프게 생긴 부처이다.

생각은 여기서 널을 뛰어 '송유미'란 시인이 쓴 '운주사 머슴부처'란 시가 생각나는 거다.

 

                        운주사 머슴 부처

 

  운주사 머슴 부처 한 분 돌 속에 장승처럼 서서 바람으로

눈이 덮인 산길을 자꾸 쓸고 있다 전생에 무슨 업보로 염병할

천연두라도 앓았던 것일까 왕곰보의 보기 흉하게 얽은 얼굴

에는 눈물이 살을 파고 들어 고름이 질질 흘러내린다 열반에

드는 일도 저와 같은 고역일 진데 이중 삼중 고행을 하는 머슴

부처 사람의 손때 묻은 가사자락도 몹쓸 담뱃불에 덴 흔적

ㆍㆍㆍㆍㆍㆍ부처들도 일하는 부처 노는 부처 공부하는 부처 따로

따로 어울리는지 외따로이 떨어진 외로운 산비탈에 서서 눈

길만 쓸고 있는 머슴 부처 팔이 달아난 줄도 모르고 싹싹 빗질

하는 아릿한 소리 눈이 덮인 산길에도 어느새 피가 배여 나와

황톳물에 섞여 질척거린다

이 시는 가만 몰입을 하다보면 정말 슬픈 시인데...한번도 제대로 몰입을 해준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밑에서 세번째 행의 싹싹 '빗질'이 거슬려서이다.

눈 덮인 산길이면 '비질'이 맞춤법에 맞는거겠지만,

시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싹싹 빗질'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산비탈에 누웠으니 땅을 비질하는거고,

그게 누운 머슴부처의 머리 부분이면 빗질이 되는건가?

 

암튼 나는 송유미의 시에 대해 잔뜩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그니의 시집 뒷표지 추천글에서부터 비롯되는데,

시인 고은에서부터 이윤택, 임헌영, 최재봉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사람들이 추천글을 쓰고 있어서였다.

거기다가 작품해설은 또 어떠한가?

내가 엄청 좋아하고 있는 철학자 김영민님과 이경호님이 하고 계시다.

뭐, '빛 좋은 개살구'나 '빈수레가 요란하다' 따위를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시를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나의 선입견이고 색안경이었음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첫 느낌은 뭐랄까?

좀 쓸쓸하고 고고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니 스스로 소외를 자초했다는 느낌이었달까?

근데 차근 차근 읽어나가다 보니,

그게 일상에서 동떨어지고 소외를 자초해서가 아니라,

쓸쓸하고 외로운 섬처럼 각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반어법이라는 걸 알겠다.

그러고나니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쓸쓸하고 고고하고 외롭게 이 감정들조차도 너도 느끼고 나도 느끼게 되면,

동지 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일종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살찐 슬픔으로 돌아다니다

                            -- 한 의자의 초상

 

  녹슨 햇살 분분한 철거를 기다리는 주공아파트 놀이터의

낡은 의자가 문득 말을 걸어온다 따뜻한 겨울 햇살에 조금씩 

살이 붙는 의자였다 그는 언제나 반기는 고향처럼 나의 육혼

을 팔베개해준다 나는 가끔 다과를 준비해 이웃 아줌마들과

함께 찾아가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런 날 그는 묵언승이 된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이었을까 비에 젖는 의자가 걱정스러

워 그의 이마에 매달린 빗방울을 하나 둘 닦고 있다 그러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습니다"*라고 내 귀에다

속삭였다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산을 쓰고 그곳을 산책한다 그

때마다 비닐우산은 바람에 날아간다 더 이상 젖지 않는 자의

환희를 교감한다 그렇구나 삶이란 각자의 밥그릇만한 존재의

휴지(休止) 되어주는 일이구나 마음이란 무량의 의자 비어 있

어서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의자이구나

 

 철거가 시작되자 포크레인 한 대가 집들을 과자처럼 부수

어 먹기 시작한다 그는 용달차 기사 옆자리에 올라타는 나를

향해 나뭇잎의 파란 손을 오래오래 흔든다

 

  비가 오면 나는 벌목의 피비린내 가득한 그 곳을 살찐 슬픔

으로 돌아다닌다

 

                                *오규원의 시,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때론 수다스런 이웃 아줌마가 그리울 때도 있고, 때론 내 얘길 들어줄 귀가 필요할 때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오지랖이란게 있기 마련이다.

언젠가 내가 엉덩이가 뚱뚱하다고 얘기했더니 한 친구는 '엉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었다.

말 그대로 엉덩이가 뚱뚱하여 내 엉덩이 면적만큼 의자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였는데 말이다.

비가 오면 내 엉덩이가 가리고 앉았던 만큼만 젖지않을 것이고,

내 마음이란 그릇도 마찬가지로 크기만큼만 받아들이고 채워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찌 보면 같을수도 있는 마음과 의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마음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비워내는 수고를 해야하고,

의자는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비워진 채로 준비되어진거고...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진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의자를 향하여 생물, 무생물 경계를 나누는 일은 어쩜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뿌리

 

 

쓸 만한 나사 하나 찾으려고 연장함 뒤적인다

한 번 어디엔가 박혔다가 튕겨 나온 나사는

다시 쓰기 어렵다 나사의 뿌리가 다쳤기 때문이다

화분에 옮겨 심다가 잘려나간 뿌리로는

다시 어디에 심어도 뿌리 내리기 어렵다

내가 통째로 그 자의 눈에 거슬려 뽑혀 나와

다시 그 자리의 틈을 파고 들기 어렵듯이

천직의 일자리를 잃은 무수한 나사들이 칼잠을 자고 있다

 

 

물질주의 뿌리가 없이는 가난한 민초의 생은

부평초의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가능한 한 뿌리를 융성하게 번식시켜야 하고

그 뿌리를 잃지 않아야 이 세상에다 쾅쾅

내 목소리의 뿌리내리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철면피로 망치를 잡아 쥐고

녹이 슬었지만 그나마 뿌리가 생생한 나사 하나 찾아

단단한 벽에 한 그루 나무를 심듯이 쾅쾅

집 전체가 무너지게 나사를 박는다

이 나사가 튕겨 나오면 집 한채 무너질 것이다

이보다 세상이 단단하니

뽑히지 않은 뿌리들은 더 손잡고 깊어 갈 것이다

이 시는 앞의 두 시들보다 더 어렵다, 적어도 내겐.

고독감, 소외감, 쓸쓸함으로 모자라서 존재론적 회의론까지 건드린다.

부평초는 연못에 떠다니는 부레옥잠을 일컫는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또는 잔뿌리 몇몇으로 간신히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고 살아간다.

 

나사못을 망치로 쾅쾅 내리치면 과연 나사는 박힐 것인가?

나사의 뿌리는 뿌리대로 망가지고,

나사못이 박힌 자리는 금이 가고 균열이 생겨 언젠간 무너지지 않을까?

나사가 튕겨나오면 나사가 들어갔던 틈이 내려앉아 무너질지도 모르지만,

나사가 한번 박혀 먹어들어가면 진짜 빼도 박도 못할 형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단추공장 뒤뜰로 통하는 길

  -- 정봉순에게

 

 

  아이 둘 딸린 주부 가장 그가 오늘 아침 제일 먼저 정리해

고돠어 단추꽃처럼 떨어졌다 그렁그렁 눈물이 솟구치는 그의

눈에서 단추보다 힘없는 눈물이 뚝뚝 손등 발등에 떨어졌다

잎을 위해 꽃이 떨어지듯ㆍㆍㆍㆍㆍㆍ바람은 멈추어 있는데

꽃이 떨어지듯ㆍㆍㆍㆍㆍㆍ

 

 

  만원 지하철 타고 이리저리 밀리다가 블라우스에 꽃단추가

떨어졌다 더 이상 세상에 밀리지 않으려고 손잡이에 매달려

가다보니 각양각색의 단추꽃들 힘겨운 매일 매일을 꼭꼭 여

미고 떨어질 듯 앙상한 나뭇가지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힘

겹게 매달려 있다

 

 

  살면서 단단히 여밀 수 없는 펑펑 썯아지는 눈물들 폭발하

는 분노들 원망과 미움들 꼭꼭 여미고 살다보면 내 몸 밖에서

우수수 꽃단추가 떨어진다 세찬 세상의 바람에 떨어지지 않

는 꽃이 어디 있을까 새소리는 시끄러운데 산이 깊듯ㆍㆍㆍㆍㆍㆍ

 

 

  이 무심한 꽃이 떨어진 빈자리에는 어떤 잎이 와서 매달릴

까 명퇴당한 늙은 남편의 실밥 날리는 와이셔츠 단추 구멍마

다 치밀어 올라온 목줄기 끝에 아침 연이슬 반짝인다 대책 없

이 친절한물과 달이 함께 흐르고ㆍㆍㆍㆍㆍㆍ

 

이 시는 슬프도록 서럽고 처연하지만 예뻐서 눈물났던 시이고,

개인적으론 '대숲에서'가 가장 좋았다.

 

                           대숲에서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일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 대가 있을까마는 대숲을 보고 있으면 쭉쭉

뻗은 뼈들이 흔들린다 어떤 소리의 뼈는 내공이 약해 잎을 흔

든다 그러나 잎들이 흔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흔든다 꺾

일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대나무의 신념이 서로를 흔들지 않

는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용맹정진 하늘을 향해 소리의

뼈를 쌓아가는푸른 수사들의 옆구리를 찌르면 파도 소리 난

다 살다보면 흔들리기도 꺾이기도 하는것이 세상 대숲을 보

고 있으며 바람이 흔드는 것이지 대나무 스스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흔들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대나무 텅 비어 있

어 누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대숲에 사는 청설모 다람쥐

들도 이 숲에 사는 지혜를 알고 있다 댓이 하나 흔들지 않고

마디를 타고 올라간다 수없이 흔들리는 내 안의 대숲 누가 들

어와 사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린다 까닭도 모르고 정신

없이 흔들리는 지친 소리의 뼈들이 탁탁 백 년 만에 핀 대꽃의

마을을 거쳐 사라진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 시를 읽고,

 '흔들리거나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살아야겠다~.'

뭐,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난 아무래도 범인(凡人)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수이다 보니,

우리들 대부분은 바람이나 나뭇가지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었다.

이 얘긴 바꾸어 말하면,

사람 누구나 다 비슷하게 쓸쓸하고 고고하고 외로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뜻일테고...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나 나뭇가지 같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을테지만,

(그냥은 아니어도~) 약간의 노력을 해서 우리의 의지대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것이 자연에 크게 거스르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보를 곱게, 제대로 쓰는 노력을 해야겠다.

 

그러고보니, '달콤한 인생'이란 뭐 별다른게 아닌것 같다.

우리가 자연스레 쓰는 마음보 하나 하나가 자연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

그게 바로 '달콤한 인생'이지 뭐 별다른게 있겠나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7-10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년 벗과의 대화
안대회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그러셨었다.

대학에 들어가 미팅이나 소개팅 할때 취미가 뭐냐 이딴 거 물어 보는 것도 웃기지만,

그런걸 물어봤을때 독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더 웃기는 거다.

그럴바엔 차라리 취미가 없다고 해라.

솔직히 대학에 들어가 미팅이나 소개팅을 해본 기억은 유감스럽게도 전무하시다.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어떤 국어적 지식보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미팅이나 소개팅 자리는 이제 요원한 일이겠지만,

설문지나 앙케이트 조사의 취미가 뭐냐고 묻는 빈칸을 만나거나 하면,

신중하게 한번 더 생각하는 척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라고 대답한다.

특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혼자놀기' 라고 한다.

 

이건 뭘 의미이냐 하면,

내가 '독서'를 유달리 좋아하는 유형이 아니라, 상당히 소극적이고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거다.

 

그런의미에서,

이 책 '천년 벗과의 대화'도 언뜻 보기에는 벗과의 교류를 예찬하는 책 같지만, 나 같이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저자 안대회선생은 좀 심드렁해 지실 수도 있을게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는 존재여서,

늘 누군가와 시간의 어떤 부분들을 함께 보낸다.

위로는 조부모, 선생님, 부모, 형제 자매, 자녀, 부부, 친구, 직장 동료 등...

옛사람들은 그 중 벗을 아주 중요시 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은 '경보'라는 벗에게 보낸 답장 편지에서 '벗과의 인연'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뒤에 나지 않아서 한 세상에 같이 태어났고,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서 한 나라에 같이 태어났으며,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 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요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서 함께 선비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 떨어진다면, 차라리 천년 전 옛사람과 벗하고, 백 세대 뒤의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의미를 짐작해 보자면, 연암 박지원은 인연이 좋고 감사하긴 한데 아무나 다 벗으로 여기진 않는다...고 튕기고 계신 중이시다.

더불어 나누는 대화나 함께 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천년 전 옛사람하고나 사귀어서 백 세대 뒤 사람에게 나쁜 본을 안보이고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하신다.

홀로 고고하게 책 속에서 벗을 찾겠다는 얘긴 즉슨 책이나 읽겠다, 이런 말일 게다.

 

한 시대 한 나라에 태어나서,

한 지방 한 마을에서 살고,

문인 출신으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벗으로 지내는 게 큰 인연이고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진정한 친구라면서 어떻게 주고받는 대화가 좀 구차하거나 하는 행동이 좀 천박하기로서니,

그걸 트집잡나 싶었다.

 

게다가 연암 박지원으로 모자라서,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친구라면 함께하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천박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동이 더럽지 않아야 할 것이란다. 의기투합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친구는 아니란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43쪽)'고 안대회 선생까지 거들고 나선다.

 

난 박지원이나 안대회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이 보이는 것에 미혹되기 쉬운 동물이니,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에 주고받는 대화와 하는 행동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 안에 들여 내 사람이다 싶으면 그쯤은 '암씨랑도 않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고 받는 대화와 함께 하는 행동이 구차하면 얼마나 구차하고 천박하면 얼마나 천박하다고,

사람을 그런 것들로 등급을 매기고 경계를 나눈단 말인가?

이러고 앉은 나는 하는 말과 행동이 지독히 세련되지 못해서,

다시 말하면 지독히 촌스러워서  아직 그런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ㅋ~.

 

유유상종(類類相從)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대화가 구차하다는 얘기는 내가 내뱉는 말 또한 구차하다는 얘기일테고,

그의 행동이 천박하다는 얘기는, 응하는 나의 행동이라고 해서 고상할 턱이 만무하다.

그러니 나의 경우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하더라도 좋은 거다.

 

암튼, 이런 글을 읽다 보면...지금 내 곁에 벗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 땡큐를 날리게 된다.

지금 내 곁의 벗이 천년 전과 백년 후를 넘나드는 귀한 인연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되겠지만 곁에 있을땐 그 소중함을 금방 까먹는다.

내게 문제는 그것이다.

 

여기서, 내가 중심을 잡아 생각을 할 것이, 내가 빠지면 안되는 논리적 오류의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벗(=친구)에 비견되는 걸로 책을 꼽았다는 것이지, 책에 비견되는 걸로 벗이 꼽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책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소극적이고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일수록, 책만 읽고 사람을 소외시하다가는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만으론 건전한 인격이 형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여러번 보았다.

특히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 논리 등을 만났을 때,

'곡학아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색다른 경험과 가르침이 적절히 맞물릴 필요가 있는데,

책만 읽어서는 나와 다른 사람의 색다른 경험을 만날 기회도 없고 의견을 조율하고 가르침을 받을 기회도 없어진다.

책이 주는 건 당위론적인 질문과 대답이어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데...

생물인 사람은 얼마든지 이렇게 저렇게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다.

당위론적이라는데서 고인 물을 끄집어내고,

고인물은 썪기마련이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친다.

 

책이 만들어내는 논리구조는 매번 일정한데,

생물인 사람의 삶은 이리저리 움직여서 논리구조가 틀어지기도 하고, 뒤엉키기도 하고, 멈추섰기도 하고 늘 가변적이라는 거다.

인격형성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칠지 짐작할 수 없어서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긴 바꿔 얘기하면, 천년 전과 백년 후를 넘나드는 책에 비견될 정도로...

나의 인격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벗이니까 이런 것 저런 것 따져가며 신중해야 한다는게 저들의 입장인 것이고,

이 논리는 뫼비우스의 띠 마냥 돌고도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간에 책(=천년 벗)을 향하여서는 괴벽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보이면서,

사람은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날 한번쯤 반성할 필요가 있다.

 

천년 벗을 향하여 이런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벽을 갖기도 하는데,

꽃이 되기도 하고 차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기도 한다.

 

병에 꽂는 꽃은 너무 풍성해도 너무 빈약해도 안 된다. 종수는 많아야 두셋이면 충분하다.

꽃 아래에서 향을 피워서는 안 된다. 차를 마실 때 과실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차에는 참맛이 있어 단맛 쓴맛이 아니듯 꽃에는 참된 향기가 있어 향 연기가 아니다.

차를 마시며 보는 것이 최상이고, 대화를 나누며 보는 것이 그 다음이며, 술을 마시며 보는 것이 최하이다.

ㆍㆍㆍㆍㆍㆍ

내가 보기에,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세상 사람은 모두가 벽(癖)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약 진정으로 벽이 있다면 그 속에 푹 빠져 즐기느라 성명과 생사도 모조리 좋아하는 것에 맡길 터, 수전노나 관리 노릇에 관심이 미칠 겨를이 있을까 보냐?(59쪽)

 

반면 사람이 책과 과하게 친하게 지내면, 다른 뭔가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운동을 싫어한다거나 소극적이라거나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단적인 예로,

이 책에는 병 중에 있거나 고독했던 많은 사람들이,

병과 싸우거나 고독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집어삼키듯 읽은 걸로 되어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들은 책은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책을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 싶다.

병과 싸우거나 고독에 대항하기 위해 읽는 책은 지식 습득의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인격형성에 미친 영향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격형성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없단 얘기는 곧, 병이나 고독으로 대치 될 수 있는 치열한 자기내면과의 싸움에서는 실패하였다는거다 .

툭하면 병에 잡아먹히고 고독에 침몰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암튼, 그래서 난 이 책을 내 맘대로 해석하고 싶다.

'천년 벗과의 대화'는 맘에 안 드는 벗 대신 책을 택하겠다...뭐, 그런 꿀꿀한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좋은 책을 재껴 놓을 정도로 소중하게 내게 온 벗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야 겠다...

뭐, 이런 역설을 담고 있다고...ㅋ~.

 

오랫만에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면서 고졸한 문장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 수 있어서 좋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2-07-09 12:49   좋아요 0 | URL
내 안에 들여놓은 사람
이란 말이 참 좋네요 천년벗과의 대화란 제목도 참 좋고요
행간은 안 읽고 낱말만 주워읽는 하늘바람입니다

차트랑 2012-07-09 14:40   좋아요 0 | URL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
저는 친구를 그렇게 말하고 싶더라구요.

'내 안에 들여놓은 사람'은 더 마음에 드는 표현인걸요^^
연암은 참으로 정녕 멋진 분입니다..

2012-07-09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2-07-10 00:12   좋아요 0 | URL
저도 가끔은 독서를 좋아하는 제 성격을 사교성 부족으로 인해서 생긴 정신적 결핍을 어느 정도
해소(또는 극복)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제 스스로 생각하곤 해요.
그래도 그러한 성격 형성의 이유를 내 자신 스스로의 문제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좀 서글퍼지기도 하네요, 저도 아직 제대로 미팅이나 소개팅해본 적도 없는데,, ㅜㅜ
제가 예전에 오프라인 독서모임을 가져본 적이 있어서 느꼈는건데, 정말 성격은 제각각이더라도
취향과 취미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기분이 좋고 말이 통하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몇 몇 분들과
인연을 유지하고 있고요 ^^

숲노래 2012-07-10 05:16   좋아요 0 | URL
번역을 왜 '구차'로 했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천 년 벗을 말하는 대목에서 '구차하다'는 좀 다른 뜻이리라 느껴요. 나도 '구차하게 굴며 말하는' 사람은 동무로 안 사귀거든요. 그러나, 내가 동무로 여기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말투가 거칠든 개구진 짓을 하든 어리석은 짓을 해서 크게 손해를 보든 대수롭지 않아요. 그러나, '구차하게' 구는 사람이 기부나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리 마음이 끌리지 않아요.

어떤 생각, 어떤 마음, 어떤 사랑, 어떤 삶인가를 돌아볼 노릇이겠지요. 그리고, '책'이라 하더라도 먼 옛날과 오늘날은 서로 다른 자리 다른 뜻일 텐데, 옛사람 책읽기를 다루는 오늘날 책들은 '책'을 제대로 못 짚는구나 싶기도 하네요...

루쉰P 2012-07-10 13:57   좋아요 0 | URL
허유 ^^ 날씨는 더운데 전 무얼 찾아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양철나무꾼님 저 돌아올거에요 ^^ 반드시!

2012-07-13 11:17   좋아요 0 | URL
재밌는 글이에요.
책과 벗. 둘 다 참 좋은 거잖아요? 근데 벗(사람)을 얻지 못하면 (할 수 없이) 책과 사귀고, 이런 우울한 얘기가 아니라, 벗만큼이나 소중한 책, 책보다 더 소중한 벗. 이런 얘기라서 이 페이퍼가 좋네요.
처음에 글 읽으면서 끝이 이렇게 갈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어요. ㅎㅎㅎ
사실 저는 박지원의 저 글을 '벗이 드물어 책과 사귀는 자'에 대한 위로의 글로만 대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책과 친구하는 것에 대한 경계 부분도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책과 친구하면서 고고한 사람이 되는 건 정말 너무 쉬운 일입니다. 쉬운 만큼 함정이 있구요.^^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 / 현실문화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매일은 아니어도 출근할때 종종 지나다니는 길이었지만, 길 옆으로 공터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엊그제 보니 그 공터에 이런저런 꽃과 풀들이 싱그럽게 피어올라 자라 나고 있었다.

꽃과 풀이라고 여겼던 건 눈여겨 보니 상추, 고추, 호박...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 사이 보랏빛 예쁜 꽃이 내 발길을 붙들어 잠시 멈추어서 보니, 

그렇게 이쁜 보랏빛으로 피었던 건, 

거창한 이름의 꽃이나 풀들이 아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고 또 먹기도 하는 흔하디 흔한 가지의 꽃이었다. 

내 발길을 붙들었던 것이, 가지의 꽃이었다는 사실이 어떤 깨달음을 줬다.

쉽게 접하게 되고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는 가지라는 거무튀튀한 채소의 꽃이 그렇게 예쁘게 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순간,

행복이 뭐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마음을 열고 눈 떠 바라보기만 하면...행복은 우리 옆에 늘상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깨닫게 되었달까?

 

그리고 그 무렵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을 읽게 되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어느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는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여자가 늑대와 같이 뒹구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녀를 알게 된게 음악을 통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보다 한살 많은 그녀의 곡에 대한 해석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으며, 음악 세계라는 것이 방대하면 얼마나 방대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나이에 관계없이 매혹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렇게 매혹적인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부모나 스승 등 숨은 공신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이 책은 여행기의 성격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여행기인지 소설인지,

그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인지 상상한 바를 쓴 글인지, 도통 모르겠었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이긴 하지만, 글도 수준급이어서 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고 성찰하게 하는 바도 컸었다.

때문에 경계를 나누다보면,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분류해야 될지 글을 쓰는 작가로 분류해야 될지 혼란스러워지는데,

이런 느낌을 연예인 구혜선과 첼리스트 장한나에게서도 받았었다.

예술도 종교처럼 어떤 경계를 넘고 나면 하나로 통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성긴 그물 망을 자유자재로 왔다갔다하는 바람이나 공기와도 같아서

경계를 나눠 이름 붙이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었다.

 

암튼, 그녀는 피아니스트로 이름 붙여졌다.

피아노 곡을 해석하다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극복하기 위해 오른 여행 길 위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들과 보대끼면서 얻은 깨달음을 '특별 수업'이라고 명명한다.

 

살면서 내가 보통 이상의 넘치고 과분한 복을 받았다고 느낀 경우가 세번쯤 있었는데,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친구를 만났구나 싶었을 때...

그들을 통하여 습관처럼 물들기도 하고, 보고 배우고 익히고 가르침을 받기고 하고,

닮고 싶어 흉내내다 은연 중에 스며들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나를 한뼘 성장시키고 나아지게 한다 싶어 무한 감사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엘렌 그리모 - 그녀는 나랑은 좀 다른데,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 아찔한 공부로부터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고 얘기하며 그녀 자신 내부에서, 그녀의 음악에서 행복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에게 배우는 것이됐든, 스스로 배우는 것이 됐든 이 모두 '도를 닦는 과정'이고,

어떤 형태로든 배움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으면 그걸 '득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를 통하여 배우고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경우라서,

여느 때는 책도 사람 못지 않은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라서,

스스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거니와 스스로를 가르쳐서 나아질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나랑은 좀 달랐고,

그래서 독특했으며,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 -'득도'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랑은 다르게, 득도했거나 도통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은,

고백하자면 이 책을 시작부터 한참 난해하게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몇 번을 되풀이 해서 읽고, 툴툴거리며 주위 사람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야 그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ㆍㆍㆍㆍㆍㆍ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16쪽)

예를 들면, 위의 문단에서...

그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징(깨끗하고 맑다)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라는게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명료한 소리가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 말아야 한다'는 부분도 그랬다.

여기서 이렇게 얘기되어지는 곡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C플랫 단조이고, 그 중 3악장은 우리에게 장송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암튼 번역이 이상한 건지 아님, 엘렌 그리모 - 그녀가 애시당초 이상하게 쓴건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정말 멋진 직업이지요! 특히 평범한 교사에서 한 사람의 '스승'이 되는 마술 같은 순간엔 더욱 그렇지요. 청년기의 우울한 하늘에 담황색 번개 같은 빛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는 거죠."(42쪽)

 위의 문장도 도대체 뭐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낙원이 원래의 에덴동산 낫다는 데 내기합시다.(47쪽)

->그 낙원이 원래의 에덴동산보다 낫다는 걸 두고 내기합시다.

위 문장은 이 정도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50쪽의, '어떤 청년과 처녀가 있었답니다.' 란 문장에서도 청년이란 단어보다는 '총각'이란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면, '청년'의 뜻으로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 나이가 20대 정도인 남자를 이르나 때로 그 시기에 있는 여자를 포함해서 이르기도 한다.'라고 되어있는 반면,

'처녀'는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여자'라고 되어 있고, 내가 제시한 '총각'은 '결혼하지 아니한 성년 남자'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제가 되찾고 싶었던 건 죽음이란 걸 모르는, 순간과 그 평화, 시간의 음악, 다시 말해서 침묵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의 무구함이었어요."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았었나 보죠?"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경솔함을 후회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은 죽음을 아는 상태이고, 죽음이란걸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 천진난만, 순진무구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데...

그녀는 '그동안 삶을 사랑하지 않아 딱 죽고 싶었다가 다시 살고 싶어진거냐?'고 묻고는 이내 후회하나 보다.

 

이런 부분은 트집을 잡자면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다.

 

암튼 이 책의 내용 '특별 수업' 과 직접 연관이 있는 내용을 발췌 요약해 보면 이렇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공부하고 심화시키는 데 만족하지 말고, 적절한 때에 전인미답의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열의를 배움이라고 하는데, 배움의 과정엔 열의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기엔 현재 있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과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만을 가져야 한다.

 

또 좋은 학생(=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학생)을 순간을 타는 곡예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재미있다.

 

이전의 지식을 답습하는데 만족하지 않는 학생,

그렇다고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학생,

현재 존재하는 걸 포착할 채비가 되어 있는 학생,

순간의 신비를 관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 등이 좋은 학생이란다.

"아! 교육!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답니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ㆍㆍㆍㆍㆍㆍ얼마나 큰 자기희생이, 상호적인 희생이 필요한지요. 교사는 자기 학생을 억누르지 말아야 하고, 학생은 교사를 배신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상호 교환, 신뢰, 타인에 대한 사랑 속에 헌신하는 걸 뜻합니다. 자기희생이란 상대에게 주는 것이지만 또한 상대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스승은 수련이 끝났다고 판단하면 제자를 떠나보냅니다. 이런 떠나보냄 속에는 자신을 넘어서 달라는 권유가 담겨 있지요.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는 이런 청출어람이 없다면 그 전수는 실패인 셈이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인류의 발전은 없는 셈이지요."(46쪽)

그녀가 교육을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서 좋았던 점 한가지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에 이르기까지...상호신뢰만이 아니라 상호희생도 필요하단

다.

난 한번도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질 못했었다.

언젠가 한학기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엄청 스트레스였었다.

내가 아는게 열개라면 열개를 다 내어놓으면 안될 것 같아서 쭈삣거렸을 뿐더러,

그나마 개중 몇개라도 내놓으면 허전하고 헛헛해져서는 다시 책을 들입다팠었다.

그런데, 모두 나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자기가 가진 걸 하나라도 더 내어주고 싶어하고,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배출하는데서 보람을 찾는 그런 스승도 존재하기는 하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희생이란, 상대에게 주는 것이지만 또한 상대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도 그랬고...

청출어람 청어람 관련, 수련이 끝났으면 제자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부분도 내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새의 날개를 꺾어 곁에 두려 하기보다는 편히 쉬었다가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는 시의 한구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스승에게서 특별한 그 무엇을 기대했나요?"

"오! 그럼요.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지만요. 저는 어떤 전수, 어떤 깨우침을 기대했어요. 제게는 깨우침이 필요했어요.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했던 만큼 스승이 저를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게 해주기를 기대했지요."(54~55쪽)

 

실은 윗 부분은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우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는 언제고, 스승에게 무언가를 기대고 의지하고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 저는 기다리고 있어요. 적어도 바라고 있지요. 솔직히 말해서 제 기다림은 줄곧 막막한 채로 남아 있지요. 하지만 막막한 기다림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특징 아닐까요?" 하고 말하며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다림 없이는 인내할 수 없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저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는 편이랍니다."

"무엇을 기다리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악을 더 잘 해석하는 거죠. 작품의 열쇠를 찾는 것, 그럼으로써 사랑을 찾는 거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ㆍㆍㆍㆍㆍㆍ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드무아젤? 당신은 음악을 해석하는 것 이상으로 그걸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56~57쪽)

 

내가 아둔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라는 문장에서 '그걸'이 가리키는 게 무엇일까 혼란스러웠다.

그게 '기다림'인지 '인내'나 '조바심'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그러다가 61쪽에 이르러 '음악을 경험해 보라는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그 곡을 연주하면서 나는 음악의 진실이란, 음악을 통한 실존의 진실이란 행복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행복의 비극성을 단숨에 간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기쁨과 행복은 고통과 삶 사이의 화해, 죽음이 제기한 그 모순적인 일치에서 생겨난다는 것을.(68쪽)

설정 자체가 그런 것이겠지만, 그녀가 여행에서 이런저런 누군가를 만나다는 것도 그랬고,

그렇게 만난 누군가와 똑 참하게 적절하고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도 번역과 더불어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저는 릴케의 <어떤 피아니스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막 읽은 참입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인 마그다 폰 하틴베르크는 시인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의 해나 꽃 핀 나무처럼 그저 존재하는 대신 뭔가를 요구하지요. 자연은 '그 대신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지 않은채 인간을 키워주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자각할 줄 아는 누군가를 아직 만나지 못하신 것 같아요. 스스로가 자기 실존의 성취이자 약속인 만큼 자신이 성취한 것 속에 결여된 것이 그저 존재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누군가를 말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왜 당신이, 당신과 나눈 행복한 대화가 떠올랐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지요.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이 창조해 낸 작품을 좀 더 잘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ㆍㆍㆍㆍㆍㆍ

 우리는 또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지요.경험에 의거해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아니 당신의 기다림에 특별히 걸맞은 자유의 정의를 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유란 몸을 통해 그 몸에 국한되는 것 이상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 생각을 통해 그 의식에 국한되는 것 이상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을 다른 말로 정신이라고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정신은 육체와 더불어 살고, 육체는 정신과 더불어 삽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삶을, 자신의 삶을,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체는 정신을, 자신의 정신을, 지금 여기의 정신을 살아야 하는 거죠.

ㆍㆍㆍㆍㆍㆍ음악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선 당신의 삶이 음악의 연장선상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드무아젤.(93~95쪽)

이 부분은 언뜻 보기에는 인간과 자연의 대비처럼 보였지만,

찬찬히 읽다보니 스승과 제자의 대비, 또는 좋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대비로도 읽혔다.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들의 존재는 하나의 강을 이루는 많은 지류처럼 나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는 순간 일종의 공생 관계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내 존재가 사랑하는 이들의 생각과 심장과 음악과 풍경과 시선으로 화한 것 같은 영매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어떠하든 간에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고 당신이 결코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나의 영혼은 서로 닮아 있다. 자유로운 가운데 영원히 그러하리라.(105쪽)

부모나 스승이나 친구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도 상관없지만, 자연과도 같이 아무 조건이나 요구사항없이 나를 키워주는 이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런 이와 나의 영혼은 어쩜 서로 닮아 있을 지도 모르고,

그런 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만으로 엄청난 행운이자 행복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불현듯 내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귀한 관계일수록 - 늑대와의 관계는 얼마나 경이롭고 귀하며 특별한가 - 깨어지기 쉽고 통제하기 어려운 법이다.

 사고나 파경을 피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볼더의 그 사전을 통해 나는 특정한 행동 양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이후 우리에 들어갈 때면 나는 언제나 그 규칙을 되새긴다. 머릿속에 내가 아닌 늑대의 표현방식과 리듬과 관점을 주입시킨다. 늑대가 내게 보여주는 우정의 표시는 멋진 선물이다. 하지만 늑대가 아무리 너그럽다 해도, 심지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 해도 나로서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어떤 순간 관계에 극도의 집중력을 기울이는 법, 온 신경과 근육을 강하게 긴장시키는 법을 배웠다. 늑대와의 관계에서 효과적이었던 이 방법은 음악과의 관계에서도 유효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언제든 무력감이 솟구칠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절망이 엄습할 수 있다. 그럴 때면 온 힘을 기울여 자신을 통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환기시켜야 한다. 그런 빛살, 그런 열정, 그런 문장 없이는 자신 안에서 그 무엇도 완벽해질 수 없다. 내게는 그것이 음악과 늑대인 셈이다.

 어떤 행위 속에, 어떤 생각 속에 완벽하게 몰입하기 위해서는 강한 에너지와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 모든 상황, 무수한 상황들을 모두 통제한다는 것은 충족시키기 어려운 바람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 없이 기적은 과거에도 일어날 수 없었고, 지금도 일어날 수 없을 터.(134~136쪽)

이건 언젠가 내가 고민했던 Let it be와 Let it grow의 관계랑도 닮았다.

대상이 사람이 됐든지 동물이 됐든지 간에 시작을 하기만 했다고 해서 상호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건 아니다.

시작을 했으면 줄곧 일정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거다.

적어도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건 긴장이라는 말로 대치되어도 좋을텐데...

끊어지기 일보직전까지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활시위가 아니라,

적당히 통통 튕겨지는 경쾌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잘 조율된 현의 그것이고...

그건 적당히 가슴 떨리는 설레임이고,

그런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만, 저는 감상적이지 않은 사랑을 본 적이 없답니다."

"정말 딱한 분이군요!" 하고 하마터면 나는 입 밖에 내어 말할 뻔했다.

 ㆍㆍㆍㆍㆍㆍ

"문학 속에서나  영화 속에서 감상이 아닌 사랑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현대 회화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욕망과 쾌락과 기쁨과 섹스, 나아가 자기애 뿐이죠. 자기 파멸에 정도의 자기 열중과 자아도취 말입니다. 또한 비명과 고뇌와 고독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뇨? 대문자로 시작되는 특별한 사랑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시대의 퇴물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죠. 우리 시대는 현대적 형태의 사랑에 대한 훌륭한 실전 매뉴얼을 만들어냈으니까요."

"무척 신랄한 말이군요."

"하지만 현실을 반영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그렇거든요."

 ㆍㆍㆍㆍㆍㆍ

"저는 삶이 제게 주는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당신 말에 따르면 사랑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무엇에 만족한단 말인가요?"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으니까요. 이도 아프지 않고 마음도 아프지 않다면 말이죠. 제겐 아스피린도 있고 향정신성 약도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골칫거리를 찾아나서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ㆍㆍㆍㆍㆍㆍ

 ㆍㆍㆍㆍㆍㆍ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누가 사랑 같은 걸 한답니가? 혹시 사랑을 하는 이가 있다 해도 사랑이 무슨 보상을 해준답니까? 실리와 선의 중에 무엇이 최고일까요? 나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선의 곧 사랑이 지성의 증거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지요? 반박하려 하시지 마세요.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옳은 건 아니에요. 사랑이란 잘 모른다고 해서 과소평가할 게 아니거든요.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은신처, 자신의 거점을 갖고 있어요."

 ㆍㆍㆍㆍㆍㆍ우리는 이제 타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뿐입니다. 버스나 열차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셨습니까?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가방을 움켜쥐고 단추를 목까지 꼭꼭 채우고 있습니다. 타인이 공포의 대상인 겁니다. 이제 우리는 말을 건네는 것조차 겁냅니다. 더 이상 마음대로 말할 권리도 없는 겁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155~157쪽)

좀 길지만 이 부분을 옮겨 적은 이유는,이 책 처음에 나왔던 그녀의 가치관이 이랬었기 때문이다.

이랬던 그녀가 여행 길에서 만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가고, 그걸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한다는 설정이 작위적이지만 의미는 충분히 있다.

"ㆍㆍㆍㆍㆍㆍ그 이듬해 여름, 저는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었습니다. 천사의 날개가 갑자기 꺾이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재앙인 이 사건을 통해 저는 제가 어디 있는지, 제가 처분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음악도, 예술도 처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단숨에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은 처분 가능한 것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은 제게도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가장 깊숙한 우리 존재를 환기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저는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긴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위해 살지는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가장 기본적인 것만으로 만족하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파리를 떠나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기본적인 것은 정말이지 적더군요.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저는 희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재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 말입니다."

"자유라고요?"

"그렇습니다. 자유,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것을 사랑으로 거부하고, 원하는 것, 받아들일 만한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권 말입니다. 저는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빛에 도달했습니다. 사고가 있기 훨씬 전부터 제 눈은 이미 멀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악착같이 스스로를 채우려 들었고, 제 경력이나 찬사, 자아도취로 변한 그 절대적인 완벽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줄곧 가속기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그와 더불어 저 자신도 휩쓸려 가는 그런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단번에 음악이 제 몸을 통해, 제 마음을 통해 되돌아오더군요. 번개처럼 말입니다. 이제 저는 매일같이 연주를 합니다만, 오직 저만을 위해 연주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ㆍㆍㆍㆍㆍㆍ

"혹시 당신의 슬픔도 그 연원이 같지 않을까요?ㆍㆍㆍㆍㆍㆍ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제가 완벽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제가 완벽을 추구했던 건 음악을 구현해 내는 제 능력을 믿지 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은 사물을 뒤쫒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진실을 뒤쫒고, 음악을 뒤쫒고, 낙원을 뒤쫒는 데에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기 밖에서 찾습니다. 거기에는 그것들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을 찾기 위해서는 영혼의 명징 속으로, 우리 존재의 내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야 합니다. 피상적이고 경박한 세상이 들어오도록 당신이 방치한 바로 그 균열을 틈타 슬픔이 찾아옵니다.ㆍㆍㆍㆍㆍㆍ"(235~237쪽)

이 얘기의 화자는 아까 바로 위와는 또 다른 사람이지만, 이것 또한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녀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에게서 이런 얘기들을 듣는 것도 그렇고,

그걸 흘려버리지 않고 자기 삶에 대입해 비교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전반이 의미가 있다.

 

그녀의 여행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구절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내 집에, 내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한 셈(241쪽)이었고,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닫아 건 코모의 그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243쪽)는 걸 깨달았으니 그걸로 충분한 거다.

 

책의 끝부분에 가면, 그녀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처음 그녀가 '스스로 배우는 것이고, 스스로 배우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어깃장을 놓은 것은 아래의 깨달음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나를 풍요롭게 해주고 각성시켰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웅장한 교향곡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면 그런 심오한 관점이, 청중이 없는 그런 연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 예술, 음악, 자연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인이 광야에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완벽한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44쪽)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청중은 아닐지라도,

내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나무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됐든, 예술이 됐든, 음악이 됐든, 자연이 됐든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오늘 한권의 책을 허름하게 읽을지라도,

같이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이지 행운이고 행복이지 싶고,

그 누군가와 그런 관계를 시작하였다고 해서 상호적인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닐진데,

그 관계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함께 노력한다는 사실이 더 행운이고 행복임을 알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트랑 2012-07-03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읽어본 관계로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저는
그리모를는 철학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녀의 연주 역시 철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구요

제게 그리모는 건반위의 철학자이고
성스러움을 주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알브레이트 마이어는 베를린 필의 오보 수석이라고 그러더군요
그의 독집 앨범도 국내에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주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들...하데요^^
이 페이퍼에서 그리모와 마이어의 연주를 듣으니
참 좋습니다.. 양철나무꾼님..

글샘 2012-07-04 07:19   좋아요 0 | URL
무지 많은 생각들을 담고 있는 글이네요. ^^
엘렌 그리모의 여행이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현주 목사님의 '물과 나눈 이야기'처럼,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는 창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꼭 여행지에서 만난 그 사람들은 진짜 실존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자기 마음과의 대화일 수도 있잖을까요?
행복을 찾으러 꼭 어디로 가야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말이죠.

하늘바람 2012-07-04 09:56   좋아요 0 | URL
가지는 꽃도 보라색이군요
넘 곱네요 가지꽃은 첨 봐요

나는 불현듯 내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저 부분의 내용이
참으로 많은 밤을 속상하게 했던것같습니다

2012-07-06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7-06 06:29   좋아요 0 | URL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못 배우고 못 가르치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나한테' 가장 좋은 스승이자 제자가 돼요.
양철나무꾼이 둘레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양철나무꾼 스스로 '좋은' 마음과 생각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으로 바랄 때에 찾아오고,
생각으로 지을 때에 찾아나서요..

2012-07-06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의 상식』에서 조선의 4대 명산으로 금강산과 지리산과 구월산과 묘향산을 꼽으며 서산대사의 의견을 빌어 그 중 최고가 묘향산이라고 한 까닭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통해서도 에울러 짐작된다. 소설의 한 대목에 작중 인물이 금강산과 묘향산을 비교하다가 "금강산에서는 간혹 사람이 상하기도 하지만 묘향산에서는 그런일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을 덜 다치고 덜 상하게 하는 산이야말로 명산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덜 상처 주고 덜 상처받는 것이야말로ㆍㆍㆍㆍㆍㆍ좋은 삶이 아닐까?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2년 5월

 

 

며칠째 '김별아'의 '괜찮다, 우리는 꽃 필 수 있다'를 들고 이리저리 떼굴거린다.

난 '김별아'의 소설은 잘 모르겠는데...

지난 번에 읽은 산행에세이와 겹쳐 요번 에세이도 찰기어린 것이 먹고 나서 한참 후까지 든든하고 속을 平하게 해주는 찰밥을 먹는 것 같다.

그림도 예뻐 찾아보니, 일러스트 정윤미라고 되어 있다.

솔직히 홈페이지의 것들은 책만큼은 아닌데,

책의 것들은 은근히 시선을 끄는 것이...화려하지 않지만 정겹다.^^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고 앉은 것은 "사람을 덜 다치고 덜 상하게 하는 산이야말로 명산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덜 상처 주고 덜 상처받는 것이야말로ㆍㆍㆍㆍㆍㆍ좋은 삶이 아닐까?"하는 저 구절 때문이다.

그냥 생각했을때는 사람을 덜 다치게 하고 덜 상하게 하는 산이야말로 명산이라는 저 말이 그럴듯 한데,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니까, 그렇다.

'사람을 덜 다치게 하고 덜 상하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인간 중심의 편협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자연은, 산은...명산이라는 수식어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두지않았었는데,

인간들이 그들의 편한대로, 그들의 편리대로, 그들에게 이로운 대로 맘대로 이름붙여 놓은게 아닌가 싶다.

 

사람을 덜 다치고 덜 상하게 한다는 건, 기준이 사람이었을 때에만 '덜과 더'를 구분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자연이나 산은, 사람이 덜 다치고 덜 상하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연 그대로인것이다.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덜 다치고 덜 상한다는 건...

자연이, 산이...잘 품어갖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너무 깊고 깊어 웬만한 사람이 접근할 수조차 없어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않고,

그래서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어 명산이 되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산세가 험해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고 자시고 할 것없이 전혀 품어가질 수 없어서 천형 그대로의 산세를 간직하고 있게 되는 것도...자연이나 산의 입장에서는 명산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갑자기 언젠가 아침  손석희 방송에서 들었던 산악인 엄홍길님의 말이 생각났다.

 

 

 

 

 

 

 

 내 가슴에 묻은 별
 엄홍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3월

 

 

저는 그 동안 많은 8000미터의 산을 도전하면서 수 없이 많은 생과 사를 넘나들었거든요. 진짜 그 과정에 여려 명의 동료들을 잃고 그런 사고를 경험하고 50대를 경험하면서 좌절도 경험하고, 제 자신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경험하면서 생각할 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어떤 제가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 더 얘기하자면 8000미터 고도라는 것을 만났을 때는 인간의 능력으로 밟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결국 산이 저를 받아 줘야하고 산이 허락해야하고, 신이 저를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히말라야 모든 어떤 산이든지 마찬가지기 때문에 저는 모든 산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산에 올라갈 때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산에 올라가야지, 순리를 역행하고 거기에 어떤 욕심을 내고, 사심을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절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에야 산이 선택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항상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이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진인사대천명을 들먹이는 것도...

너무 나이 들어 진인사대천명을 얘기하는 것도...부족하거나 넘친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러고보면, 어쩜 나는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의 시기가 아니라,

'그대들 맘껏 꽃 피워라. 심도를 충분히 낮춰 배경이 되어주겠다'의 시기인것도 같다.

 

무엇이고 사람 위주의 입장에서 바라봤을때는 '덜과 더' '부족하거나 넘치는'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해야 했던 것들인데,

입장을 조금 바꾸어 자연과 산을 그 자리에 대입시켜 보았을 뿐인데, 참 한없이 넉넉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명산의 자리에 '좋은 사람'을 대입해 보는 것도 재미  않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2-06-24 22:24   좋아요 0 | URL
명산...사람을 덜 다치게 하고,덜 상하게 하는 산이라..
끄덕끄덕~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군요.^^

다비치의 이해리네요? 순간 이해리의 옆모습만 보고서
예전에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의 장혜리라고 생각하면서 들었네요.ㅋㅋ
개인적으로 이해리의 목소리 참 좋더라구요.
책도 책이지만,나뭇꾼님은 노래 선곡도 참 잘하세요.

2012-06-24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6-24 23:02   좋아요 0 | URL
야~ 내가 좋아하는 이해리다~ ㅋ 다비치 좋아요~~ ^^

좋은 사람도... 인간의 욕심으로 얻을 수 없는 거군요. ^^ 그렇네요...

숲노래 2012-06-25 05:23   좋아요 0 | URL
사랑스레 살아가면 좋은 사람이겠지요..

사랑스레 누릴 수 있고 바라볼 수 있으면 좋은 산일 테고요..

cyrus 2012-06-25 21:33   좋아요 0 | URL
저는 세월이 변해도 늘푸른 녹음을 유지하는 산이야말로 명산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줄 주는 아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요.
글 마지막 이해리 노래 잘 듣고 갑니다. ^^

차트랑 2012-06-26 00:36   좋아요 0 | URL
높은 산을 오르는 분들께서
자연을 대상으로 도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적으로는 안타까운 표현이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자연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인간 스스를 자연에서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요^^
자연과 인간은 괴리되어야 할 관계가 아닌데 말입니다.

자연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용어가
저는 바로 그 도전이라는 용어에서 출발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답니다.

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어떤 산을 명산이라 말하는 것 처럼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페이퍼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난 그동안 세 종류의 나무들을 모두 보리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혼동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빨갛고 조그만 열매가 열리는 보리수,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나그네에 나오는 보리수,

그리고 부처님이 그 나무 아래에서 해탈하였다는 보리수,

어떤 때는 보리차를 끓이는 그 보리까지 이 보리로 혼동할 때가 있을 만큼...

백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도 타성에 젖어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절실하게 느낀 예가 없었다.

 

먼저 슈베르트의 가곡에 나오는 나무는 원어로 Lindenbaum이고 해석이 보리수로 되어있지만 오역으로 보인다.

Lindenbaum은 피나무류이지만, 보리수나무가 됐을때는 밑에서 단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Lindenbaum정도 되어야 그래도, 가지마다 많은 추억이 걸려 있는 우물가 나무 곁을 지나 마을을 떠나는 한 실연한 젊은이의 심정이 될 수 있다.

샘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이 스쳐가는 나뭇잎들의 수런거림 등이 묘사된 이 노래를 수없이 부르고 들었지만,

결국 절실하게 부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해탈하였다는 나무는 보리수가 아니라, 인도 보리수라고도 불리우는 '반얀나무'이다.

멀리서보면 수천그루가 모여 숲을 이룬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숲은 단 한 그루의 반얀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반얀나무 가지들은 위로 올라가다 구부러지는데, 그 구부러진 가지가 땅에 닿으면 다시 뿌리가 되어 번져 나간다고 한다.

단 한그루로 숲을 이루는 나무.

그런 나무 밑에서 부처님은 해탈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곽재구의 이 시집 '와온바다'를 만났다. 

 

 

 

 

 와온 바다
 곽재구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2년 4월

 

 

 

 

와온바다가 먼저였는지, 선암사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님, 그 둘다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 둘 모두 였을 수도 있다.

 

나무

 

인간인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모르는 이들은

만행 중인 바람이

나무의 심연을 헤적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무는 제 앞에 선 인간에게

더덕꽃 향기 짙은 제 몸의 음악을

고요히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춤을 출때

잎사귀 하나하나

다른 춤의 스텝을 밟는다

인간인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다가 홀연 당신 또한

온몸에 푸른 실핏줄이 퍼져나간 은빛 이파리가 된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

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

눈보라가 되거나

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먹기와집 마당을 뒤덮는 채송화 꽃밭이 된다

 

 

이 시를 읽다가 선암사 와송이 보고싶다는 생각을 주체할 수 없어 어쩌지 못할 무렵,

시인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간 듯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이란 시를 '짜잔~'들고 나타난다.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예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 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난 '와송'하면 꼬리를 물고 생각나는 나무가 있는데, 그게 이 페이퍼를 시작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은 '반얀나무'이다.

 

나는 일찍이 사람이 나무뿌리 같은 걸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무뿌리 또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한심한 생각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이날 밤 나는 사람이 나무를

사람이 밤 열차의 쓸쓸한 뿌리를

사람이 먼 밤하늘의 별과 별들의 노래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노인의 빛나는 뿌리를

누운 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반얀나무' 중 일부


참, 이상하게도 난 시인이 '와온바다'를 노래하는 그 순간에도 선암사와 그 곳을 버티고 섰을 (이름을 아는 와송과 이름을 모르는 그 밖의...) 나무들이 생각났다.

 

근데 또 참 이상하게도 시인은 어떤 이유에선지, '반얀나무'를 '벵골보리수'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러가며 시를 쓴다.

ㆍㆍㆍㆍㆍㆍ

나무의 긴 팔 하나가 나를 붙든다

나무 이파리들이 한숨처럼 가벼이 흔들린다

작은 벌레들이 나무 이파리의 가장자리를 고요히 갉고 있다

우리는 떠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한몸으로 바람 앞에 뒹구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인연의 눈이 있다

ㆍㆍㆍㆍㆍㆍ

서로 연결된 끈은 지니지 못해도

시체를 하루 세 끼 먹을 열정은 지니지 못해도

너는 가난한 내 시를 기억하고

너는 나와 함께 떠나지 못하는

세상의 어느 곳이든 함께 있는 마음 안에 머물 것이다

                    '구근이 가게 앞 벵골보리수에게' 중 일부

 

시인에게 나무는 엄마 대신의 위안일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는 시도 있다.

ㆍㆍㆍㆍㆍㆍ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시간이 부러웠다

 ㆍㆍㆍㆍㆍㆍ

                                         '무화과' 중 일부

이렇듯 바다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나무는 바람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리고 시인은 그런 바다와 나무와 바람을 하나인듯 넘나든다는 거다.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바로 전에 읽은 안도현의 시집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곽재구 시인의 그것은, 사평역에서 때도 치열하다기 보다는 따뜻했지만...

요번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따뜻하다고 해서 치열한 것보다 덜 묵혀둔 것도 아니고 덜 우러나온 것도 아니라는 걸 이 시집은 보여준다.

오히려 삶의 구비구비에서 만날 수 있는 체험과 연결되어 시쓰기의 밑거름이 되는 동시에

체험이 없는 자기복제야 말로 경계하여야 할 것임을 오랫만의 시집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이 안도현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너무 잘 쓰려 욕심부리지 않아서라고 해야 하려나?

 

밀어

 

달천에서 상봉 오는 길에 돌개바람이 불었다

주꾸미구이집 플라스틱 의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나무들에서 푸른색 열매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무와 바람은 억센 포옹을 하는 듯도 보인다

저런 식의 밀어도 우두커니 사랑스럽다

어린 열매를 다 떨군 뒤에도 바람은 나무 곁에 머물며 해와 달의 비늘을 반짝일 것이다

 

참 소박하고 작지만, 그래서 예쁜 시도 있었다.

 

여뀌꽃밭에 사는 바람은

 

키가 작고

얼굴도 작고

손도 작아서

 

내가 그이의

작은 손을

가벼이 잡을라치면

 

마른 풀밭 위

무릎을 접어야 하는데

 

그때쯤엔

그이 또한 환히 웃으며

내 눈썹 위

어린 초승달 하나를 띄우기도 하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시는 '칠카하르'라는 시였다.

'칠카하르'는 네팔과 가까운 인도의 국경도시란다.

 

칠카하르

 

 당신이 나를 이곳에 오라 불렀나요? 칠카하르, 어두운 불

빛들이 이제 막 도착한 새벽 열차를 향해 뽀얀 입김을 불어

넣어주고 송장처럼 나란히 누운 산 사람들의 막막한 꿈을

바라보고 있네 길, 시간, 운명, 세월......사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삶의 눈망울들은 파란 밤하늘 곳곳에 땀띠처

럼 솟구치고 어디선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적을 끌며

오네 너무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고 그보다 많은 것

을 당신에게 받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지요 천천히 새벽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어둠속에 송장처럼 누워 바람이 기

차의 레일을 쓰다듬는 소리를 듣습니다 칠카하르, 당신에

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삶

이라면 난 차라리 당신에게 어둠이 레일 위에 튀기는 고요

한 불꽃들을 보여드리지요

이 시를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신들의 봉우리>라는 소설이 생각났고,

그 소설의 주인공 산 같았던 사나이 '하부'가 남겼던 마지막 말도 생각났다.

 

그렇다.

이미 온 힘을 다하고 있을때는 힘내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다.

말이 필요없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이 필요없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레일 위를 튀기는 고요한 (하지만 미욱한) 불꽃들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 위로가 되는 건 말이 아니라, 소박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행동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 말이 필요없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이 한마디의 위력은 믿는다.

"꿈꾸어 봐~"

내가 '꿈꾸어봐'라고 했더니, 어떤 이는 '상상해'라며 '하부'의 원전을 들이대는데 말이다.

상상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막막한 순간에도 꿈꾸는 건 가능하다는 이 시'칠카하르'를 읊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꿈길 밖에 길이 없다는 황진이의 '상사몽' 버젼이기도 하고 말이다.

 

암튼, 인도 기행 후 쓰여진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일초들>이 생각나게 하는 시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도 좋았다.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86,400초란다.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

 

미스티 가게 앞

자전거를 멈춘 연인들은

 

세월이 잠시 그들 곁에

멈춘 것을 알지 못하지

 

페달 위에 올려진

푸른 밤의 발 하나

 

죽은 시인의 언어들이

페달 위에서 가벼운 탄식을 올리는 동안

 

남은 한 발이

지상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입맞춤하네

 

한초

한초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은 흘러가지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보낸

한초 한초를 싣고

 

우리는 또

반딧불이 날아오르는 산티니케탄 대로를 달려가지

 

때문에 당신이 내게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고,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시간이란 걸...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2-06-18 20:08   좋아요 0 | URL
웅산도 음반이 여러개군요. 딱 하나 같은 거 보여요.ㅎㅎ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좋아 두고두고 읽었던 옛날옛적(ㅋㅋ)을 떠올립니다.
님이 가장 좋다시는 시도 좋으네요. 그의 산문집, 패스했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져요.
읽을 건 많고 눈도 아프고 힘은 딸리고,,, ㅋ 조용한 저녁에요, 양철나무꾼님^^

책읽는나무 2012-06-18 20:23   좋아요 1 | URL
비가 내려 멈춘 조용한 저녁에 참 잘 어울리는 페이퍼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시들도 좋지만,마지막 문구들이 순간 가슴 설레었어요.^^
웅산 음반 맨 첫 번째 것만 가지고 있는데 음반을 참 많이 냈네요?
노래 참 잘 부르는 가수에요.
편안하게 시도 읽고,노래도 듣고 가네요.
님도 편안한 밤 되세요.^^

글샘 2012-06-18 22:44   좋아요 1 | URL
너무 많은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고 그보다 많은 것
을 당신에게 받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병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지요(칠카하르)

페이퍼를 읽다 보니 내일 결근하고 확 선암사로 가고 싶은 생각이 몰려 옵니다...... ㅠㅜ

비로그인 2012-06-18 23:41   좋아요 1 | URL
때문에 당신이 내게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한초 한초가...

가장 따뜻한 시간이고,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시간이란 걸...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할 뿐이다.



저는 바다로 갈까봐요.. 확~~

하늘바람 2012-06-19 10:10   좋아요 1 | URL
아웅 마음을 흔드는 페이퍼네요 어떻게해요 책임지셔요^^

차트랑 2012-06-19 19:56   좋아요 1 | URL
시를 잘 읽지 않는 제게(이건 좀 별로인걸요)
시를 접할 기회를 이곳에서 접하게 됩니다.

저도 시를 읽지 않으면서
시를 읽지 않는 사회를 뭐라하곤 하지요..
시와 함께하는 삶은
결코 때묻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입니다...


2012-06-20 23:37   좋아요 1 | URL
푸른 밤의 발이 얹힌 한 페달과 다른 페달의 대비가 눈에 들어옵니다. -시인이 탄식하는 일 초와 연인이 사랑하는 일 초가 번갈아 한 땀 한 땀 세월을 수놓고 있는 것.

오로지 우리를 위해 멈춘 따뜻한 일 초 일 초들.. 이 일 초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렇게 헤매고 살지는 않겠지요.

오랜만에 왔어요. 양철님. 여전히 잘 계시는 듯 합니다. 페이퍼를 읽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