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못갖춘마디 문예중앙시선 15
강연호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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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휴일이라고 까무룩 잠이 들었었나 보다.

찜질방을 가자는 남편의 말에 평상시처럼 가죽재킷을 팔에 꿰고 줄레줄레 따라나서니 대책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다.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의미를 깨달았는데,

다들 반팔 반바지 차림인 것이 계절은 어느새 봄을 건너 뛰어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딴 사람들이 보면 적어도 한 계절 정도는 잤는 줄 알겠다, 그치?"

하는 내 물음에서 여름에 대한 기대감을 눈치챘는지,

"모터싸이클족 보면 사시사철 가죽으로 쫙 빼고 다니던데...너도 이 참에 모터싸이클만 하나 장만하면 되는데 말야, ㅋ~."

하며 낄낄거린다.

암튼, 난 기온과 비례해서 액티브해지고 기분도 업 되는 모양이다.

이 시집을 얼마전에 선물 받긴 했는데, 누구인지 그 진가를 몰랐다.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이영광이 뒷표지에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표현한게 눈에 띄었으니 망정이지,

저걸 못봤다면 천년만년 먼지더미 속에 덩치로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끙~--;

근데, 이영광의 저 표현은 틀렸다, 버릴 말을 찾기 어려운게 아니라 버릴 말이 없~다!

 

그의 약력을 찾아보니,

  196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비단길』(1994),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1995),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 『기억의 못갖춘마디』(2012)가 있다. 2012년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라고 되어있다.

 

벌써 여러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인데 왜 모르고 있다가 이제 와 이렇게 수선스러운 거냐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뭐~ㅠ.ㅠ

햇살이 너무 너무 좋아서라고 해두자.

시집도, 시인도 넘 넘 넘 맘에 든다.

시인의 표현을 빌어, 지난 겨울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갖고 계신 알라딘 서재 여러분들~!

"이 봄날 쓸쓸한듯 다정하고 다정한듯 쓸쓸한 시집 한 권 읽어 보세요, 꼭이요~."

하고 소문내고 싶을 따름이다.

 

이 시집은,

시란 반짝반짝 빛나는 감수성의 과잉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빼어나고 융슝함으로 이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며,

감성이 절제될 때야말로 제대로된 시가 나오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에게라면,

수선내지 않는 소박한 자연스러움으로,

각기 상반되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것이, 두루두루 손색이 없다.

 

제목 <기억의 못갖춘마디>만 해도 그렇다.

시집 머리의 '시인의 말' 자체로 하나의 詩이지만, 시가 아니라 '시인의 말'이란다.

음악으로 치면, 못갖춘마디쯤으로 시작하는 꼴이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투이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외등처럼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자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마다 불 꺼진 방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대여,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를 돌아나간 아코디언풍의 바람을 기억하는지

 

나는 나를 다독거린다

 

그의 이 시집을 읽다보면 일상의 소박한 삶과 언어들이 모여 詩를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오래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표정을 짓고 있다한걸로 미루어...생각없이 대충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고, 그런 나를 대견해 할 수 있다는 거...그런 나를 위로하고 다독거릴 수 있다는 거...참 멋진 일인 것 같다.

이 못갖춘마디(시인의 말)는 3부의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와 어울려 비로소 하나의 갖춘마디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몸살

 

 

 

뜨겁고 춥다, 이 모순의 육체는

그럭저럭 매력적이다

약 기운 때문인지 지면에서 얼마쯤

붕 떠 있는 느낌,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듯 아슬아슬한 공중부양 같다

들뜬 청춘 같다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

연초록은 원래 비릿하고

청춘은 불량을 무기로 내세운다.

이빨 사이로 찍찍 침을 내뱉거나

면도날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는

 

 

그 시절 지나면 몸살이란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팍 불이 나간

백열등 같은 것, 잠시 미련처럼 빛살이 어려

알전구를 귀에 대고 흔들어본다

이 어둠을 어찌 돌이킬래?

누군가 속삭인다

끊긴 필라멘트마냥 파르르 오한이 온다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량의 시절인 듯

연탄불처럼 다시 층층 포개지고 싶다

포개져 마침 화르륵 타오르는 체위이고 싶다

나중에는 부엌칼로 갈라야 하더라도

가르다가, 앗 뜨거라 불투성이로 깨지더라도

 

 

몸살이란, 그 기억에 살이 낀 것이다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직은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 참 고마웠다.

뜨겁고 추운, 추워서 뜨거웠던, 어두워서 환했던...기억을 몸살, 백열등, 연탄불과 연결시켜 혼자 열 없이 열 오른 것이라고 한다.

아~

'초봄이 한겨울보다 매서운 건 세상 움트는 것들의 통증 때문이다'라는 문장은 어쩔 것인가 말이다.

지면에서 약간 붕 뜬 느낌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들 뜬 청춘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아니면, 몸살기 있어 열 나는  빨갛게 달뜬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건강한 슬픔' 부분)

건강한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것은 어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싶을 때 맘껏 울되 거기 침몰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위안과 힘을 얻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그것보다 더 '건강한 슬픔'은 없지 싶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건넬 수 없어 혼자 깊숙이 운 나에 비해,

나에게 스스럼 없이 울음을 건낸 그녀는 훨씬 '건강한 슬픔'을 가진 것이다.

 

누군가의 건강을 염원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울지마라, 울지마라' 백번의 말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맘껏 기대 울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어깨를 기대기 좋도록 비워둘 것이다.

 

단풍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어서

붉은 잎 단풍 한 장이 가슴을 치네

그 때 눈멀고 귀먹어

생각해보면 가슴이 제일 다치기 쉬운 곳이었지만

그래서 감추기 쉬운 곳이기도 했네

 

차마 할 말이 있기는 있어

언젠가 가장 붉은 혓바닥을 내밀었으나

그 혀에 아무 고백도 올려놓지 못했네

다시 보면 붉은 손가락인 듯

서늘한 빗질을 전한 적도 있으나

그 손바닥에 아무 약속도 적어주지 않았네

 

붉은 혀 붉은 손마다 뜨겁게 덴 자국이 있네

남몰래 다친 가슴에

쪼글쪼글 무말랭이 같은 서리가 앉네

감추면 결국 혼자 견뎌야 하는 법이지만

사랑은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어서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네

이 시도 참 좋다.

사랑은 맹목을 잃는 순간 사랑이 아니지만, 맹목을 지나는 순간 깊어지는 것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제목이 단풍이라니...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감추는 것은 비겁한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쩜 혼자 견뎌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무는 십일월이라는 걸 보면...말이다.

 

바닥이란 무엇인가

규정하자면,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바닥' 부분)

어찌보면 이 시의 제목은 '바닥'이 아니라 '규정'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바닥일때는 더는 불안할 게 없다.

더 이상 아래로 추락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앉은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모르겠을 때의 판별법은,

그냥 그곳에 털썩 주저앉아, 그게 편안해지면 그곳이 바닥인 게다.

 

울음

 

벚꽃이 만개하면서

그는 이제 울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우는지 잊는다

그는 언제나 그를 위해 울었을 뿐

누군가를 위해 울어준 적이 없었으므로

저 벚꽃의 만개를 울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아니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킨다는 것

저기 聖 벚꽃들 울음을 감춘다

그러나 어금니 깨물 때마다

몇 무더기씩 흩날리는 꽃잎들을

그가 처연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으리라

젊음을 탕진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은 지금

어디선가 장구 소리 희미하게 들려온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화무십일홍이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과 울음조차 꾹꾹 눌러 삼키는 것 사이에서 벚꽃은 피고 진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울음조차 잊었다는 거고,

이 시에서 '잊음'을 '젊음의 탕진', 또는 '늙음'과 동격으로 놓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한다.

聖이란 다른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준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감정 따윈 배제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지만,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는 그 누군가를 배려하고, 그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울어주는 것'이 聖스러운 것이리라...

사람의 그늘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엇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간ㅁ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었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본 지 오래다

잠깐 시인이 여자가 아닌가 착각을 했었다.

적어도 시인은 아니어도 작중화자는 여자여야 하겠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머리를 쓸어넘기듯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다'는 부분에서 '레터스 투 줄리엣'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했던 그늘의 길이, 또는 깊이라는 것은...사람의 마음 속 쯤 되려나?

어쩜,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등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일들을

나이가 들면...되짚고 더듬을 수 있게 되나보다.

나도 자꾸 되짚고 더듬고 싶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머리를 내맡긴다는 것은, 빗질을 내맡긴다는 것은 순종, 또는 순응...

아니다, 마음을 내맡겨 위로를 받는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방울토마토 기르기

 

화분에 방울토마토를 기른다

화분에 기르는 방울토마토는 식용이 아니다

그거야 마트에 가면 상자째 살 수 있다

차라리 방울이 딸랑 울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볕도 좋아야 하고 물도 자주 줘야 하지만

곁가지도 따주고 꽃도 솎아내란다

 

하지만 저 가엾은 연초록을 어떻게 잘라낼까

나는 시인이므로 시인답게 머뭇거린다

전문가는 혀를 착나 입을 삐쭉거리는 대신

지지대를 고쳐 세우며 가르쳐준다

시인의 마음으로 기르는 식물은 되는 게 없지요

한 잎도 한 가지도 솎아내지 못해 벌벌 떨면

결국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져요

 

그는 모질게 곁눈을 따낸다

나는 모질지 못해 다시 연민을 꿍얼거린다

자연은 그냥 둬도 즈이들끼리 잘만 어울리던데요

전문가는 또 심드렁하게 나를 때린다

사람의 손 바깥에서야 자연 아닌 게 있나요

품안에 거둔 만큼은 손길 가는 게

최소한의 예의지요

 

아직 여물지도 않은 방울토마토의 방울들이

요란하게 내 머리를 울린다, 진짜 모진 것은 무엇일까

'방울토마토 기르기'  이 시는 '딸랑'거리며 내 머릿속에 연신 경종을 울렸다.

'자연'과 '모질다'는 것과 '손길'과 '최소한의 예의'의 상관 관계에서 남모를 고민을 좀 하였다.

그러다가 잎도, 가지도, 꽃도, 열매도, 번식도 죄다 부실해지는 것이 바로 모질지 못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연민이나 동정과 다름 아니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왜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어린왕자'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이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게 전제조건이어야 한다.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그냥 사랑하겠다는 무모하고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사람이 있다.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자기 자신도 상처 입을 수 있다.

진짜 모진 건 그런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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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17 00:1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중에늠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이 있는데
시인은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합니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덕분이라더군요 ㅠ.ㅠ
저 역시 시인의 친구이지만 시를 잘 읽지 않습니다.
시인을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의 일원인 셈이지요 ㅠ.ㅠ

그나마 대학 때 읽은 수십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 후로는 시집을 사지 않았습니다.
반성 많이 됩니다. ㅠ.ㅠ

2012-04-1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4-16 21:50   좋아요 0 | URL
좋은 시를 덕분에 많이 읽네요
방울 토마토 기르기가 가장 맘에 드네요.
제목이 참 독특하면서 와닿는 시집이군요

숲노래 2012-04-17 08:19   좋아요 0 | URL
사랑하려는 마음이라면
언제나 서로를 따사로이 덥히는
좋은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나리라 믿어요
 

Ma Non  Tanto(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게)?

 

아니, 한번쯤은 지나치거나 과하게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들은 맨날 바라고 부러워하고 염원하는 일을...직업으로 택해 하게 된다면,

지나치거나 과하게 애정과 사랑을 듬뿍 쏟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던 것을 직업으로 택해, 하고 사는 사람은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남들 다하는 일상사 근심 따위는 없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었다.

암튼 내가 엿보기에 그것이 그들의 천직인 것 같아 보였고,

그 일을 하는 그들이 마냥 행복해 보여서 부러웠던 사람들, 둘에 관한 책을 읽었다.

 

한명은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이고,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

사진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의 사진들의 주는 느낌은 남달랐다.

스케일부터 웅장하고 담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뭐랄까 사람의 영혼 따위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사진을 매개로 나에게 뭔가 계속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책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호시노 미치오는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할 때까지는 사진과 관계없는 삶을 살다가,

어느날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 출간된 알래스카 마을의 사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전공도 작파하고 사진을 하게 된다.

동물 사진에만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관점으로 알래스카의 자연과 동물을 꾸준히 사진에 담아,

'National Geographic','Audubon'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며 일본 각 지역과 미국 카네기 자연역사박물관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1996년 8월 8일 취재차 방문한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 쿠릴 호수에서 불곰의 습격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맑고 투명한 글이 곁들여진 그의 사진은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와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둘 줄 아는 사회의 차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후자의 사상에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력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척이 한층 더 근원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40쪽)

어떻게 보면,

호시노 미치오가 추구한 건... 사진이 아니라,사진이라는 것으로 대표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밥 샘이란 불가사의한 클링깃족 인디언을 만나고,

그와 함께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데,

그건 바꾸어 말하면'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법이라고 할 수 있겠고,

어쩜 그 '보이지 않는 것'에'영혼'도 포함되었던 게 아닐까?

"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을 절대 거절하면 한 돼."란 말을 나는 밥에게 듣고 왔다. 우리 입에 들어간 음식은 죽은 자와 우리 조상의 영혼이 먹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포틀래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의 존재다. 영혼 재래를 믿는 클링깃족 사회에서는 이 시기에 태어난 친척 아기에게 죽은 자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고 나서 "안녕하세요, 할머니!"라고 아기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죽은 자에게 인사를 한다. 포틀래치의 열기 속에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 대한 양수가 복받침을 느꼈다.ㆍㆍㆍㆍㆍㆍ자네들은 왜 '영혼' 이야기를 하지 않나? 나는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네. 자네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ㆍㆍㆍㆍㆍㆍ? 샤이언족의 땅을 나와 처음으로 알래스카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계속 기도했다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땅에 잠든 영혼들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니 말일세ㆍㆍㆍㆍㆍㆍ."(97~99쪽)

  

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무한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정지한 것 같은 숲은 물론 심지어 별조차도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일만년을 여행한 별빛이 전해주는 우주의 깊이, 인간이 먼 옛날부터 간절하게 바란 피안의 세계, 무슨 목적을 위해, 어떤 미래를 향해 살아가느냐 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ㆍㆍㆍㆍㆍㆍ.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어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 알고 싶은 것을 알고 말았을 때, 과연 우리는 살아갈 힘을 손에 넣을까? 아니면 잃어버리게 될까? 알고픈 것을 알려는 마음이 인간을 지탱해 주지만, 알고자 하는 것을 결국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161쪽)

다시말해, 호시노 미치오가 그의 사진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한 것들이 물질문명이나 기술문명 따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신화와 전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영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서...

충분한 공감과 소통에 실패한 듯 보이기도 할지 모르겠다.

숲을 산책하며 밥의 아내 도우가 해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퀸샬럿 섬을 밥과 함께 여행했을 때 하이다족 여자가 밥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도우에게 질문한 것은 그래서였다. 자신의 내밀한 괴로움을 어떻게 만난 지 한 시간이 채 안 된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밥이 힐러(신앙에 근거한 치유 능력을 가진 자) 라서 그랬을까? 도우는 내 추측을 부정하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었어. 하지만 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힘으로 치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대신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곁에 있어 줄 수는 있어. 밥한테 그런 힘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젊었을 적에 떠난 여행에서 밥은 몸소 지옥을 경험했어. 고통을 품은 사람들은 밥이 짊어진 깊은 상처를 저도 모르게 느끼는 게 아닐까? 그래서 봇물이 터져 콸콸 흘러나오듯 자기 상처를 털어놓게 되는 것 같기도 해.

 밥이 반세기 동안 방치되어 황폐해진 묘지를 십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청소한 다음부터 싯카 인디언 사회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눈뜨고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게 되었지.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문득 큰까마귀의 말에 따라 불덩어리를 가지러 간 젊은 매가 떠올랐다. 화상을 심하게 입으면서도 불꽃을 가져와 생명에게 영혼을 불어넣은 젊은 매의 모습을 나는 내심 밥 샘과 겹쳐보고 있었다. 이 세상은 큰 까마귀의 말에 따라 불덩어리를 가지러 간 무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115쪽)

이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내겐 이 책을 읽은 의미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힐러, 치유, 치유능력, 고통이나, 깊은 상처 따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체적 상처나 고통, 그 치유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만은 모든 치유법을 아우르는 온갖 병에 듣는 처방 쯤 되는 것 같다.

 

위 얘기를 종합해 볼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같은 공감이나 소통 능력을 갖게 되는...

이를테면, 영혼에서 나는 찝찌름한 냄새가 같기 때문이 아닐까?

 

"자네한테 인디언의 말을 하나 가르쳐 주지ㆍㆍㆍㆍㆍㆍ."

"네ㆍㆍㆍㆍㆍㆍ."

"초우친."

"그건 무슨 뜻인가요?"

"사랑한다는 말이네."

나는 그 말을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208쪽)

 

다른 한명은 맨발의 디바 '이은미'였다.

 

 

 

 

 

 

 

 

 

 

 

 

 이은미, 맨발의 디바
 이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이은미의 라이브 공연을 몇번 본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가 뿜어내는 에네르기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힘을 얻어오곤 했었다.

그때마다...그녀에게서 그런 에네르기를 뿜어내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걸 그녀는 prplogue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마흔이 되면서부터 화낼 일이 별로 없어졌다. 한때 '호랑이'라 불렸을 정도로 지난날의 나는 누가 보아도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야, 아니 강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런 태도가 내 음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것 같다.

 격정으로 어지러웠던 스무 살, 치열했던 서른 즈음을 지나 어느덧 마흔을 넘긴 나는 다행히 많이 강해졌다. 내 몸 위에 날카롭게 돋아 있던 가시가 사라지고, 보드라운 잎사귀가 새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음악 안에서, 또 음악하는 사람들에게서 얻은 기쁨 덕분에 조금씩 바뀐 것이다. 자연스레 내 음악은 좀 더 친절해졌고, 내 성격도 좀 더 원만해졌다.

 언젠가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불현듯 '아,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만 넘치던 어린 시절엔 그저 음악이 좋아서 무대에 섰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세월이 흘러 한뼘 정도 성숙한 다음 바라본 무대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보다, 나를 한결같은 눈길로 바라봐주는 관객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을. 내 음악을 사랑해주는 이들이 있기에 무대에 오를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자,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4~5쪽)

좀 길지만 prplogue의 거의 전부를 옮겼다.

그 이유는 그녀와 내가 분야는 다를 뿐이지만, 처한 입장은 똑같기 때문이었다.

난 과연 '내 일을 사랑하나' 하는 생각을 해 볼때가 있다.

다분히 문과적 성향을 타고났다고 생각한 나였고,

아빠의 강요에 의해서 선택한 학과였지만, 도태하거나 낙오하는 건 더더욱 싫었었다.
'아,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뜨문뜨문이었다.

그러다가 한곳에서 6,7년 근무하게 되면서,

자칭 VVIP라 불리우고 나는 진상으라고도 부르는 그들이,

다른 의미로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을때...

나는 내 직업 앞에서 다시 한번 겸허해 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음악이나 무대 자리에 사랑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넣어보면 훨씬 쉽게 이해가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얘기할 수 있지만, 실상 덜 능률적인건 사실이다.

내가 한결 같은 눈길로 바라보는 그 사람이, 나를 같은 눈길로 바라봐줄때 나는 행복에 겨운거다.

다시말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나에게 화답하여 줄때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사무치게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이겠다.

 

음악에 미쳐서, 무대에 서면 그같이 엄청난 에네르기를 뿜어냈던 이은미도...음악 말고 다른 것은 볼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게 되는데, 그 회의감을 burn out 현상이라고 한단다.(소진증후군이란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책에선 그걸 피아니스트 정원영을 빌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딱 하나만 생각하자. 너 음악 없이 살 수 있어?"

 오랜 슬럼프를 겪은 뒤라 다시 소리를 찾고 음악을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새로웠다는데,

깊고 어두운 우울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길 간절하게 바랐던 그녀에게 답을 준 것도 결국 음악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오랜 진통 끝에 탄생한 6집 음반의 제목은 '마논탄토 Ma Non  Tanto' 였단다.

 

우울증을 앓으면서 그녀는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걸 절감했단다.

지나치게 감정에 빠진 나머지 그것이 그녀의 소리를 잠식하는 일이 없도록,

가슴은 뜨겁되 그녀의 음악이 대중의 감성을 너무 앞서 지나치지 않도록,

채우기보다 걷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단다.

 

음악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누군가 그에게 Tears in heaven

 물론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교감이다.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를 강렬히 바라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할 수 없다.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나와 다르게 느낀다고 해서 "그건 틀렸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정답을 강요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음악이고 예술인데 말이다.(73쪽)

 

 

 

ㆍㆍㆍㆍㆍㆍ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음악은 그저 듣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최고다. 바람 소리로 들리면 바람 소리로, 플루트 소리로 들리면 플루트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예술은 조각내고 분석하고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느끼면 스며드는 것이기에. (75쪽)

그건 예술뿐 아니라, 사람이나 사랑 따위의 궁긍적 목표와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호시노 미치오'와 '이은미' 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방법으로 소통을 하고자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통의 방법에 있어서 '호시노 미치오'는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사진이나 글은 신화나 전설을 소통시키는데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반면 '이은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소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음악을 전달하는 매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다. 

나는 음악으로 내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들은 찬찬히 내 음악을 감상하고 즐기면서 소통하면 된다. 그 이상의 것이 왜 필요한가. 그들 곁에서, 그들의 다친 마음을 위로해주고 희망을 전해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음악이다.(85쪽)

 

좀 더 쉬운 길도 있는데 왜 굳이 힘든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검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제자에게 스승이 한동안 앞마당만 쓸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검을 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검을 다스릴 줄 아는 심성과 끊임없는 비질에도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과 인내심이기 때문이다.(90쪽)

그러고보면, 심성과 강한 체력과 인내심은 검이나 음악을 하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공감과 소통의 전제 조건인 듯 하다.

 "사람들이 이걸 알까?"

  아주 미묘한 소리 하나 때문에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는 원하는 사운드를 완성한 다음 만족스런 표정으로 서로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정말 우리가 이 작은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싶은 것이다.

 "아마 모를 거야. 그런데 몰라도 돼."

 굳이 말하지 않는 한 그 수고를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리 하나 때문에 밤을 새웠고, 소리를 찾았고, 한 뼘 더 성장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

(126쪽)

이은미, 그녀가 부러웠던 건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몰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이라도, 단 한사람만 있다면...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이 한사람 덕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러운, 그래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도 있는데...

나도 오늘부터 날 알아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여야 할지,

아님 날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을때 보여줄 비장의 무기를 연마하여야 할지, 를 놓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에 눈을 껌벅이고 앉아 목하 고민 중이다~--;

 

 

 

 

 

 

 

 

 

이은미 - The Best Collection 2000~2011 [DIgipack]
이은미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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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4-1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글도 음악도!!

숲노래 2012-04-10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노 미치오 님은
알래스카에서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수 있는 삶'을 누리는
자연 터전을 보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으며
글로도 엮자고 생각한 사람이에요.

프레이야 2012-04-1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과 글을 보고 알래스카를 꿈꿔요.
여행하는 나무!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 가보는 거랑 사는 거랑은 천지차이겠지만요.^^

이은미 콘서트는 딱 한 번 가봤어요. 맨발의 디바!
정말 대단했어요.
결혼 안 하길 잘했지라니.ㅎㅎ 그래도 자긴 결혼했으면서...
정말 우애로울 수 있는 반려자, 그게 최고의 관계일 것 같아요.
그곳엔 오늘 비가 추적추적 많이 내렸나봐요. ^^

잉크냄새 2012-04-1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라는 책을 통하여 그를 처음 알게 되었지요.

사진작가이지만 그의 글은 풍경보다는 그 풍경속에 존재하는 삶의 이야기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진 2012-04-1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보고 있어서 글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호시노가 추구한것은 사진이 아니라 아진으로 대표되는 어떤 것... 크, 좋네요 !

風流男兒 2012-04-18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역시 아껴가며 보고 있어요.
급하게 읽고 싶지 않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그런가봐요.
 

"왜 얼굴이 시든 꽃 같애?"

나를 향하여 그런 비유를 한 아주머니를 향해 한껏 눈을 흘겨 보았다.
"엄마는 비유를 해도 시든 꽃이 뭐야, 시든 꽃이...

 내가 활짝 피었던 꽃이라도 되어야 어제 내린 눈, 비에 시들어 열매 맺는다고 하지...

 요며칠 내 잠이 좀 부족하기로 시든 꽃이라니 너무 심한 거 아녜요?"

"무슨~?

 눈 내리고 바람 몹시 불어 잠 못자는 건 어제지...오늘은 날만 쾌청이구만, 젊은 처자가 왜 잠을 못 자?"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날이 너무 좋다.

어제는 4월에 눈이라니,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눈으로들 보고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면,

오늘은 하늘에서 벚꽃잎 정도라도 날려주었으면 그럴 듯하게 날씨가 좋다.

어젠, 참 이상하게...하늘에서 날리는게 눈인데도, 벚꽃이 흩날리며 시작하던 일본 영화 '4월이야기'가 생각났었는데,

오늘은, 참 이상하게...날이 너무 좋은데도, 박정현의 이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지 모르겠다~ㅠ.ㅠ

 

 

바람에 지는 꽃


진홍의 꽃잎 바람에 지네
풀빛 마음 가는 시간에 지네
영원하단 약속들은 슬픔 속으로 지네
눈을 떠도 꿈을 꾸는 나
나의 눈가에 가득 젖어 드는 건
눈물처럼 미움처럼 돌아오지 않는 그


흘러 흘러가네 떠나가네
난 변해가요 원망마요
꽃잎처럼 지는 마음에 부는 바람
가네 난 떠나가요 미련없이
난 변해가요 미련없이
늦은 여름 저녁 바람은 가슴이 멍든 긴 한숨같아

눈 감아도 보이는 사람
그의 모습에 젖어드는 건
그리움에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 나
흘러 흘러가네 떠나가네
난 변해가요 원망마요
꽃잎처럼 지는 마음에 부는 바람

가네 난 떠나가네 미련없이
날 놓아줘요 미련없이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바람에 지는 꽃은
흘러 흘러가네 떠나가네
난 변해가요 원망마요
꽃잎처럼 지는 마음에 부는 바람

가네 난 떠나가네 미련없이
날 놓아줘요 미련없이
늦은 여름 저녁 바람은
가슴이 멍든 흘러 흘러가네 떠나가네
난 변해가요 원망마요
꽃잎처럼 지는 마음에 부는 바람
 

언젠가 읽었던 '권남희'님의 '번역에 살고 죽고'의 한 구절이 생각 났다.

일본어 번역가로 살고있는 권남희 님의 삶을 그녀 특유의 재치있고 경쾌한 문장들로 그려내고 있는데,

번역과 관련된 여느 얘기나 자료들보다는...이 구절, 그러니까 무라카미 류의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를 번역한 후 썼다는 역자 후기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번역에 살고 죽고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4월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를 번역하는 동안의 일이었다.

 한 여자아이가 사랑에 빠져 힘들어했다.

 언제 이 사랑의 끝이 올까 불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막 번역한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의 내용 일부를 들려주었다.

 "파일럿의 가장 큰 불안은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불안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일럿은 실제로 비행기를 추락시킴으로써, 알코올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가 됨으로써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번역이 끝날 즈음에 여자아이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을 끝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탈고를 하는데 왠지 눈물이 났다. 그녀의 사랑이 슬펐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과 불안을 떨치기 위해 불안 속에 몸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를 읽은 독자들이 후자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마 무라카미 류는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195쪽/ 권남희, 번역에 살고 죽고)

왜 이렇게 눈물이 나고 슬픈건가 모르겠다.

 

나도 열매 맺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 위하여 시들어 봐야 하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건 아닌가?

지금 안고 있는 불안을 통과하기 위해, 불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지, 불안을 떨어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닌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건 호랑이를 잡든지 호랑이에게 잡히든지 둘 중 하나이지, 애초에 호랑이 굴로부터 도망치는 건 고려대상이 아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건 지독한 편견이지 싶다.

지레 겁먹고 회피하려 하지 말고 일단 통과하고 보는거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차에 접하게 된게 조선 시대 수필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는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 란 글의 일부인데,  '이명옥'이 쓴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란 책에 나온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類)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김영진 옮김,《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사)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09년 7월

 

 

심노숭이야 조선시대 사람이라니까 낯설다고 치지만, 이명옥 님은 '그림 읽는 CEO'로 만난 적이 있는데도...

그때까진 글이 이렇게 착착 휘어감기는 줄 몰랐다.

어쩜 지금 내가 겪으면서 건너가고 있는 인생의 간난신고에 관한 그림과 글이라서 남다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미녀는 허상이지만 그렇다고 지레 체념할 필요는 없다.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 방법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니까. 미국의 국민소설로 사랑받는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첫 장을 펼치면 미인이 되는 비법이 적혀 있다.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은 아니지만 그녀의 매력에 한번 사로잡히게 되면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느껴진다.

그렇다. 평균치의 용모를 절세미녀로 성형하는 비법은 바로 매력이다.(157쪽)

 

예술은 삶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삶과 함께 버무리고 녹여낼때 진정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 이명옥님의 말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꼭 한 군데 있었다.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 부분이었다.

여기서 공부가 노력과 비슷한 의미로 씌였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랑을 한다는 건, 이미 눈멀고 귀먹었다는 얘기인지라...노력이나 공부 따위 개인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서, 아무런 대책이나 준비가 없는 어쩔 수 없고, 어쩌지 못하겠는것이 아닌가 말이다.

 

샤갈의 그림 '생일'을 예로 들어, 중력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은'사랑'이라고 얘기한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둘의 지금 기분이 날아오를 듯 하다는 걸 알겠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어느새 그런 날아오를 듯한 황홀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지만...

그림 밖의 얘기를 전해듣고 약간 깨는 느낌이었다.

이 그림 속의 남자 화가 샤갈이 스물한 살 때, 이 그림 속의 아름다운 여자 벨라는 화가 샤갈보다 여덟 살 아래인 열세 살이었단다. 유대인 보석상의 딸이라는 신분 상의 차이는 차치해 두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샤갈이 그때 남겼다는 일기를 보면, 나이나 신분 차이 따위로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벨라의 침묵도, 벨라의 눈도 모두 내 것이다. 그녀는 마치 나의 어린 시절과 현재, 미래까지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오랮전부터 나를 지켜보면서 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생각들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직감적으로 벨라가 내 아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이일호의글과 그림 '화염경'을 빗대어서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견에 살을 입히고 확장시키고 발전시켜 나간다.

 

형체가 없는 영혼은 늘 자신의 몸을 그리워한다. 제몸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과 포개져야 한다. 사람은 영혼의 빈틈을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영혼의 빈틈에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고, 살과 살 사이에서 두려움과 한희가 대립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과 살 사이의 빈틈을 없애려고 맹렬하게 요동친다. 하늘에서 백만 송이, 천만 송이, 억만 송이의 장엄한 꽃비를 내리게 한다. 내 몸이 네 몸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의 구별조차 할 수 없는, 남녀간의 사랑은 영겁회귀를 노래하는 화엄세계의 춤인 것이다.(이일호의 '화염경' 부분, 183~4쪽)

 

사랑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뜬금없이 웬 공부?'하면서 손사래부터 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공부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 인격을 완성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 있는 매 순간이 기적이며 축복임을 절감하는데 사랑 만한 스승은 없을 테니까.(185쪽)

 

오히려 내가 묘한 감동을 받았던 것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달을 응시하는 두 남녀>란 그림이었다.

 

 

살아가면서 때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어떤 말로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때론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입다물어야 하는 말들도 있게 마련이다.

저 그림을 보면서, 말 안하고도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르 방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건 뭐랄까...감동을 일부러 전하고 공감을 억지로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번지고 스며 물들어 향기나 냄새 따위가 충분히 배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느낌.

참고로 그림 속의 그들은 화가 부부란다.

 

저런 그림을 볼때마다...그런 생각으로 멈칫한다.

상대와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다고 간절하고 절절하다가도,

어느 만큼, 얼마만큼 활짝 열어젖히고 내어보이는 것이 진정한 소통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이다.

저렇게 말 안하고, 말 줄임표 속에, 침묵 속에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는 저런 경우라면...

난 상대의 말줄임표의 이면을 기꺼히 그리고, 충분히 존중해 줄 수 있겠다.

말줄임표와 더불어 내가 요즘 예뻐하는 문장 부호는 쉼표의 하나인 '반점(  , )' 이다.

누군가는 저걸 매력적인 콤마라고 표현하기도 하더구만.

 

올챙이처럼 날씬한 꼬리가 달렸는데,

그 꼬리가 한쪽으로 살짝 쏠렸구.

머리통은 통통한게 동글동글하고 이쁘구.

쌔까만 머리통과 몸통이... 환장하게 이쁘구.

 

그 콤마 하나가 꼭 앞뒤 단어들 사이의 긴장감을 살짝 풀어 주는 느낌이 든다.

한참은 아니어도,

온전히는 아니어도,

살짝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여유...

 

그리고 이런 제목의 책을 발견해서 구입했다.

 

 

 

 

 

 

 

 

 콤마, 씨
 강정 지음, 허남준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2월

 

 절대로 <보태는 말>을 '신형철'이 써서라고는 할 수 없다, ㅋ~.

 

"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몸에서 그 사람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강정은 이 책의 첫 글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 책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지만 조금 덧붙여 볼까. 한 편의 시가 강정이라는 몸을 통과해 한 편의 산문이 되고 있는 작은 신비 앞에서 나는, 이를테면,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그 어머니의 전생을 얘기해주는 상황의 이상한 시간 구조 같은 것, 혹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는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 본 적도 없는 욕망을 상대방을 통해 문득 실현하는 순간 같은 것을 생각했다. 강정과 시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프랑스의 비평가 장 벨맹 노엘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서로 상대방의 욕망을 빌리는" 일 같다. 비슷한 일이 이제 이 책의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을, 사랑을 나눌 때의 속도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나랑 닮은 사람을 거울 삼아, 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좀 힘들고 아프지만,어떤 의미로든 의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잘 통과하였을때, 어떤 의미로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에 비추어, 내가 No라는 대답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때론 Yes가 될 수도 있고, 또 No가 될 수도 있다.

그게 거절이나 거부는 아닌데...꼭 refuse랑 연관시키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제 머리로는 알아먹었으니, 체화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터인데...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 생경하여 낯설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의 거울 노릇을 한 이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창피하고 미안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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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mssim 2012-04-04 21:4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마음이 아픈 것도 즐기시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애기가 되는 건가요?
오래 가지만 않는다면 슬픔도 때로 힘이 될 때가 있더라구요.
좀 더 명징하게 허리를 세울 수 있는...
정성드린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2-04-04 23:29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샤갈이랑 프리드리히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기 대구도 여전히 싸늘한 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꽃이 활짝 피고 있는 중이랍니다.
하지만 어제 강풍이랑 비가 오고나니 이제 막 피었던 꽃잎들이 금방 땅으로 떨어져있더라고요.
마침 페이퍼에 올리신 박정현의 노래가사처럼요.

숲노래 2012-04-05 03:14   좋아요 0 | URL
삶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를 '배우라'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배우'다 보면, 시나브로 사랑이든 무어든 스스로 깨우치겠지요..

차트랑 2012-04-09 10:44   좋아요 0 | URL
사람들로하여금 쌈박질을 하게하는 고흐의 그 구두로군요..
거의 너덜거리는 수준의 저 구두 한켤레를 두고
쌈박질이라니...예술의 세계는 매트릭스입니다ㅠ.ㅠ


차트랑 2012-04-09 10:46   좋아요 0 | URL
저의 서재를 다시 방문하시는 불편을 덜어드리고자
이쪽에 댓글의 댓글을 드립니다 양철나무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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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철학의 탈주를 우선 읽어보아야 할 듯 합니다 ㅠ.ㅠ
푸코, 들뢰즈, 라캉, 데리다 그리고 알튀세르...
이런~ ㅠ.ㅠ
특히, 비철학적 철학을 요주의해야 할 것 만 같다는...
정말 마음에 안드는 프로이트와
마음에 쏙~드는 맑스를 통과하는 골치아픈 동굴탐험^^도 병행.
역시 마음에 안드는 헤겔선수도 끼워드려야...
스노볼이 따로 없군요 ㅠ.ㅠ

서양철학은 정말 머리를 지근거리게 한단 말씀이에요ㅋ
그러나 흥미를 결코 잃지않게 한다는 강점도 있습죠 ㅠ.ㅠ

그나저나 투사능력이 탁월한 강신주님~^^
이분 역시 요주의 인물이시라는...

양철나무꾼님께서 방문해주신 결과 이거 이거...
읽을거리 엄청 던져주시는걸요^^
고미숙선수가 들뢰즈를 언급할때면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빙빙@@~

한동안 아짤아찔한 현기증을 경험하게 되나봅니다..
이런걸 두고 베리굿~ 현상이라고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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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양철나무꾼님~

차트랑 2012-04-09 11:04   좋아요 0 | URL
한 말씀만 더...
(이거 굴비는 엮어대는 군요...바람직하지 앓은 거라던데...ㅠ.ㅠ)

'사랑도 공부하 필요하다' 저는 이 말씀에 공감~^^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 대칙이나 준비 같은거 이딴거 할 수 없다는 말에 동감^^

문제는 교통사고가 난 이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고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이거거든요.
이때부터 진짜 공부가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놓칠 것인가...지켜갈 것인가...

첫사랑에 흔히들 실패하는 이유는
(물론 성공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으니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위해
공부하는 것 처럼, 공부를 하시라는...뭐 그런 뜻 아닐까요?? ㅠ.ㅠ

죄송합니다 ㅠ.ㅠ
그리고 박정현의 노래 잘 들었습니다
좋아요 이노래...

마녀고양이 2012-04-10 11:55   좋아요 0 | URL
사랑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절대 공감과 동감.
 

한때 몰려오는 잠을 쫓기위해 커피를 들이붓고 살았었다.

커피를 하도 마셔대서 내 몸이 피가 아니라, 커피로 이루어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커피 덕분에 몰려오는 잠은 피할 수 있었지만, 항상 쓰린 속 때문에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내가 중국의 미인 '서시'정도의 용모라면 찡그린 얼굴을 트레이드 마크인양 내세운다지만 그도 아니고...

손발은 거무죽죽 식은땀이 나고 심지어 수전증 환자처럼 달달 떨어댔다.

이제 세월이 흘러 커피로 잠을 쫓지 않아도 되는데, 여전히 커피가 들어가면 말똥말똥이다.

될 수 있으면 커피, 코코아, 초콜릿 등을 멀리 하려고 하는데...

어느새 중독인지, 있으면 안 먹고도 잘 지나갈 수 있는데, 없으면 불안한 것이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가 내게 커피 선물은 끊이질 않는데,

작년에는 그 진한 유럽 커피를 두 블럭이나 보내주신 분이 계셨었고,

철철이 녹차를 가져다주시는 분이 계시고,

누군가 커피 취향이 똑같다고 기분 좋아하자 엊그젠 족히 1년은 먹고 죽어도 좋을 만큼의 커피를 보내주셨다.

 

 

 

 

 

 

 

 

 

 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3월

 

이 책은 제목이 예뻐 아무 생각없이 집어들었다.

때문에 내용이나 문장이 이토록 내 마음에 들지는 미처 몰랐다.

저자 '장윤현'이 누구인지 몰랐고, 제목 '외로워서 완벽한'을 좀 촌스러워서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펼치고, 책날개 안쪽에서 이 책의 저자 '장윤현'이 장윤현 감독이라는 걸 알았다.

난 '접속'을 시작으로 '텔 미 썸띵' '황진이''가비'까지는 봤고, '썸'은 못봤다.

다작을 내는 감독은 아니지만,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호감가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좋았다고 영화대본을 직접 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글까지 좋아야 한다는 법은 없는데...글도 영화만큼이나, 아니 영화보다 훨씬 좋았다.

 

그걸 두고 장윤현은 <프롤로그>를 빌어 이렇게 겸손하게 얘기한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때는 느낄 수 없던 자유도 있었다. 영화는 절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ㆍㆍㆍㆍㆍㆍ그런데 문자는 달랐다. 원래 계획보다 더 길어진 문장, 더 디테일한 설명, 더 근사해 보일 법한 문구 등을 맘껏 써도 예산 초과라 비난하는 이가 없었다. 멋졌다. 영화를 만들 땐 느끼지 못한 자유를 아마 나는 과하게 누렸던 것 같다. 문장을 다지고 깎아나가는 과정보다는, 속에 있는 말을 맘껏 외치는 자유만 취한 듯도 싶다. 송구할 따름이다.(12쪽)

 

그건 커피였다. 그동안 내가 마셔왔던 커피와는 달랐지만 분명히 커피였다. 쓴맛과 달콤한, 전혀 다른 두 맛이 과하게 섞여 있었지만 맛있었다. 나의 첫번째 부다페스트 커피였다. 문득 볼에 닿는 햇볕의 따스함이 느껴져 카페 창밖을 내다봤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제야 내가 처음으로 부다페스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봄이었다. 아직 쌀쌀했지만 햇살 속에서 따뜻한 부다페스트의 봄이 느껴졌다.(25쪽)

 

 쓴맛을 왈칵, 듬뿍 안겨준 뒤에 아주 인색하게, 아주 잠깐 달콤한 맛으로 윌해주는 에스프레소는 인생을 참 많이 닮았다.(34쪽)

 

이쯤만으로도 책 제목인 '외로워서 완벽한'은 커피를 마시기에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걸 알겠다.

평범한 커피조차 그렇게 집중해서 마시니 참 맛있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게 만약 커피가 아니라 술이었다면 <가비>라는 영화가 과연 존재했을지 모르겠다.ㆍㆍㆍㆍㆍㆍ하지만 그날 A씨 앞에서 마셨던 게 술 대신 커피여서 나는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한 모금 공들여 음미할 수 있었고, 같은 수준의 교묘하고 욕심에 찬 말을 내뱉지 않고 꿀꺽꿀꺽 함께 삼킬 수 있었다. 그날 꿀꺽 삼킨 말, 커피 잔에 슬며시 버리고 녹여서 함께 마신 내 말이 <가비>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된 것이다.(50쪽)

그렇다.

술이라면 대담하고 용감무쌍해질수는 있겠지만, 욕심에 찬 말을 내뱉지 않고 끌꺽꿀꺽 함께 삼킬 수는 없었을 게다.

그러니 나도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술이 아니라 커피를 마셔야 하리라.

 

지치고 힘든 일이 넘쳐날 때,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웅크려 숨고 싶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거울을 향해 웃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완벽히 즐거워 보이면 나는 안심한다. 내 스트레스와 상처가 다른 이에게 전염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에게도 내 슬픔을 떠넘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53쪽)

이 사람, 참 나랑 닮았다.

나도 지치고 힘들고 또는 사람에게 상처 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웅크려 숨고  싶으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후 거울을 향해 웃어본다.

완벽할 순 없겠지만, 웃어보일 수 있으면 적어도 안심을 한다.

내 슬픔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일 따윈 없다는 거니까.

누군가는 보이지도 않는 글에서도 감정을 읽어내던데,

얼굴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어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위 글의 역의 논리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거울을 향하여 웃어보일 수 있다는 건 내 감정을 조절하여 상대방을 대할 수 있다는 거다.

적어도 내 감정이 상대방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속으로 스트레스와 상처로 몸부림치더라도 다른 이와 글에까지 전염시키지 않고...겉으론 웃으며 사람을 대하고 글을 쓸 수는 있다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즐기는 이에게 반가움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잠시나마 내게 기대어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자투리 여유를 제공하는 커피 한 잔. 그 작은 만족감에 기대는 이가 비단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나는 오늘도 커피에 살짝 기대어본다. 설탕을 타지 않는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즐기는 사람들과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길 꿈꾸며ㆍㆍㆍㆍㆍㆍ.(67쪽)

 

그래서 수많은 종류의 커피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이미 즐기고 있었다는 이가, 그리고 그 사실이 그리도 반가웠나 보다.

당근, 진한 유럽 커피는 아니다.

에스프레소는 접수 불가다.

에스프레소라면 물을 듬뿍 부어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래도 취향은 독특한지라,

로스팅은 아니어도 홀빈을 갈아서 블랜딩, 드립 정도는 내가 직접하고 싶은데,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포터블로 가지고 다니는 커피 중에서 내게 '가장'이라고 생각하던 것이었다.

물론 그이가 물을 한강수로 부어 먹는지, 설탕과 프림으로 죽을 만들어 먹는지 까지는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든, 행복한 시대든 사랑은 매한가지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사랑은 서로 몸의 온기를 나누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마음을 부비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다. 사랑은 결국 영과 육의 허기를 채우는 것인 셈이다.(139쪽)

 

사랑은 영과 육의 허기를 채우는 거란다.

난 둘 중 하나에 구태어 비중을 둔다면 육이 아니라, 영이지 싶다.

전에도 지나가며 얘기했었지만, 개인적으로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이른바 소울 푸드(soul food)라고 생각하는 음식은 차(tea)이다.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차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반가움을 느끼게도 되고,

내가 좋아하는 차나 커피를 선물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차와 커피가 마음을 표현한다는 걸 나는 몸소 느꼈었지만,

그래서 내겐 무엇보다 따뜻하고 큰 위로가 되기도 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로제 역할을 하는지 어떤지의 예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조지오웰의 <위건부두 가는길>과 영화 <블루>가 그 중 하나이다.

조지오웰은 그들이 좀 더 싸고 건강에 좋은 채소나 과일, 오렌지 주스 대신에 차와 설탕에 많은 지출을 하는 것에 크게 놀란다. 하지만 그는 곧 사람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공산 노동자, 게다가 일감이 줄어 실업자가 된 사람에게 건강한 식생활이란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건강하게 더 오래 살고픈 마음조차 상실한 상태다.ㆍㆍㆍㆍㆍㆍ그 옛날, 커피와 차는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제였다.(143쪽)

<1984>에서도 했었던 커피에 대한 언급을 <위건부두 가는 길>에선 위와 같이 하고 있다.

저 표현이 1984에서처럼 real일지 몰라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삶도 커피도 real이려면 다 씁쓸해야 한다는 말이 되려나? 끙~--;

 

영화 <블루>의 주인공 줄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화상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의 고통에 대한 은유 같다. 너덜거리는 화상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려면 먼저 그 환부를 긁어내는 아픔을 정신으로 견뎌내야 한다. 마음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바로 보고 그 부위를 정확히 가늠해내야 한다. 그 과정은 매우 아프고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내야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146~7쪽)

줄리는 타인의 온기를 빌려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 곁을 떠난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무정한 이별 커피까지 남긴 뒤 그곳을 벗어난 줄리의 그 다음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급하게 걸어 나가던 중, 갑자기 돌담에 손등을 들이대 긁어나간다.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드르륵, 피나게 돌담에 긁힌다.

 줄리가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 때 택한 두 가지 방식은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방법 중 고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자신이라도 사랑해줄 것이라 믿는 사람의 온기에 기대보는 것, 또 스스로를 상처내서 그 생생한 아픔으로 먹먹한 가슴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는것. 어른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은 그 두 가지 정도뿐이다. 타인에게 고통 전가하기, 떼쓰기는 통하지 않는다.ㆍㆍㆍㆍㆍㆍ엄살을 피우지 않고 똑바로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 어른스럽고 나은 치유 방법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부작용은 따른다. 상처에 매달려 진을 빼고 난 뒤엔 감정마저 푸석하고 거칠어지기 십상이니까. 상처를 긁어내는 과정에서 유연한 마음까지 뭉텅 떨어져나가 버린 듯, 약간은 괴팍하고 무뚝뚝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150~151쪽)

오래전 봤던 영화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급하게 걸어나간 줄리가 돌담에 손등을 들이대 긁어나가는 저 장면 때문이었다.

손등에 상처를 내서 그 통증으로라도 가슴 먹먹함을 이겨내 보려는 노력으로도 읽혔고,

보이지 않는 가슴의 통증을 손등의 상처로 형상화시켜 보려는 마음으로도 읽혔다.

우리는 상처를 눈으로 보아야만 아픈 줄 아는 경향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가슴이 아프고 쓰린 것으로 상처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슴에 상처 입은 사람의 상처를 긁어내는 과정에서 유연한 마음까지 뭉텅 떨어져 나갔다고 한것으로 말이다.

암튼, 상처 입고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커피랑 관련되어 떠오르는 영화나 음악, 장소가 좀 더 있다.

짐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책에서도 살짝 언급되고 있다.

기억나는 걸 얘기해 보자면, 이기팝과 톰 웨이츠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흑백 필름이다.

"금연해서 좋은 점이 뭔지 알아?"

"한 대쯤은 괜찮다는 거지."

 

또 하나, 바흐의 커피 칸타타.

 

Aria, 'Ei, wie schmeckt'
(아, 커피가 얼마나 달콤한지)

 

Ei! wie schmeckt der Coffee süße,
아, 커피맛은 정말 기가 막히지. 
Lieblicher als tausend Küsse,
수천 번의 키스보다도 더 달콤하고,

Milder als Muskatenwein.
맛좋은 포도주보다도 더 부드럽지.

Coffee, Coffee muss ich haben,
커피, 난 커피를 마셔야 해.
Und wenn jemand mich will laben,
누가 나에게 한 턱 내려거든, 

Ach, so schenkt mir Coffee ein!
아, 내 커피잔만 가득 채워주면 그만이예요.

그리고 워낙 유명한 곡, Bob Dylan의  'one more cup of coffee'

 

옛날에 대학로에 커피 칸타타라는 커피전문점도 생각난다.

난 이 무렵부터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었는데, 깡통에 든 folgers 커피를 내려마셨었는데...

이 곳의 헤이즐넛 향에 넘어가 한때 커피를 향으로 마시던 때가 있었다.

 

커피잔이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제각각이었는데, 커피잔만으로도 인테리어가 되는 것이 독특하고 참 예쁜 가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에 이 책은 본전 생각나는 것이 좀 그랬다.

잔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도 아니고 저 표지처럼 잔잔한 일러스트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장윤현의 <가비>가 나오기전까지...

뭐니뭐니해도 커피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바로 이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 영화를 두 번째 본 후로부터 문득문득 건조한 황사가 불어올때쯤이면 이 영화가 생각났고, 다시 꺼내 볼 때마다 사막의 모래 바람이 마음을 휩쓸었다. 사람이 그리워졌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졌다. 그때마다 나는 건조해진 혀를 묽은 아메리카노로, 뜨거운 에스프레소로 적셔야 했다.(72쪽)

 

내게도 바그다드 카페 같은, 야스민의 커피포트 같은 마음이 있다면 좋겠다. 상대 마음의 농도를 헤아리고 내 마음을 진하게 내리거나 혹은 연하게 물을 타 표현하고 싶다. 내가 만든 영화에도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삭막하고 건조하기만 한 삶에서 당신 마음에 꼭 드는 커피 한 잔 같은 영화를, 때로는 따뜻하고 연하게 마음을 감싸고 때로는 독하고 진하게 머리를 깨우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리하여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면, 내마음 당신 마음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이다. (75쪽)

 

 영화가 자유로운 상상과 개성 있는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의 무의식이 감독의 무의식에 반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능력 역시 내 무의식 저편에 감취진 상처가 자극받는 데서 출발한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옳다.ㆍㆍㆍㆍㆍㆍ그리고 끝내는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을 치유할 만큼의 상처를 받은 행운을 누린 적이 있기나 한지를 고민하게 만들어버린다. 차마 그 고민에 선뜻 대답할 수 없을 때, 나는 영화 속 바그다드 카페의 사람들이 부럽다.(82~83쪽)

 

O.S.T.'calling you'로 유명한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영화를 장윤현 감독은 상찬하고 있고, 자신의 영화 <가비>도 그럴 수 있기를 저와 같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와 영화 <가비> 그리고 영화 <가비>의 원작이 된 책<노서아 가비>까지를 두루두루 본 나로서 한마디 하자면, 책 '노서아가비'와는 또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two thumb up해줄 수 있겠다.

 

예전에는 공감이나 소통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간접 경험만으로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독서 따위의 간접 경험으로 안되는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사람의 삶이나 사랑 따위 본인이 고스란히 겪고, 통과하고, 경험해 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고

때문에 공감하거나 소통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걸,

때문에 위로나 치유 따위는 더 더욱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겠다.

 

나는 도락의 절정이 그런 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닉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아예 끝까지 가버리지 않는 것, 아슬아슬한 경계선 안쪽에 멈춰 서서 그 끝을 아련히 그리는 경지가 더 윗길이라 여긴다. 무리하면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손을 거두어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즐김의 최고 경지가 아닐까.(204쪽)

 

토메크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은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생겨나는 것, 때때로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슬퍼하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문득 고백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랑은 명사지만 누군가에게 고백하거나 전달할 때는 '사랑하다'라는 동사로 쓰인다. "사랑해." 그래서 그건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 당신에게로 움직여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ㆍㆍㆍㆍㆍㆍ

그렇다면 커피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 왜 사랑이 아니겠나. 어여쁜 당신을 위해 원두를 곱게 갈아 뜨거운 물로 커피 한잔 내려주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그렇게 향긋한 커피로 당신의 지친 몸을 녹이고 위로하고 싶을 때, 그리하여 당신에게로 움직이는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역시 사랑에 빠진 순간일 것이다. (238~239쪽)

 

내가 그를 영화감독 장윤현 말고도, 작가 장윤현으로 인정하게 된 건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이 사람, 참 세세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들은 커피의 이름이며 특징을 떠나 네가 가장 맛있는 방식으로 마시라고 말하곤 했다. 내 입맛대로 남의 취향을 조절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임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남과 다른 내 취향을 인정해주는 것을 넘어, 그것을 세세히 기억해주기까지 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된다.(272쪽)

 

끝으로, 장윤현 감독의 <가비>의 모티브가 된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를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김탁환의 다른 작품만큼 완성도가 높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심심풀이 땅콩이나 킬링타임용으로 한번 쯤 읽을만 하겠다.

 

'하여, 당신에게 커피는 무엇인지요?'

하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난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책과 더불어, 수선 내지 않는 친구쯤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여기서 친구라고 딱 못 박을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너무 거창하게 이름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은...그런 소박한 어떤 것이지만,

내게 있어서,

나에게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그토록 의미가 남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김탁환의 글답게 수려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바로 전에 읽은 장윤현의 감동에 비하면, 울림은 약하다.

사랑하는 사이에 왜 그런 거리를 두느냐고 묻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 습성은 습성이다.

 

이 검은 액체가 전하의 혀끝에 닿는 순간을 상상하며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또 깨웠다. 사랑보다도 더 짙은…… 어떤 '지극함'을 배우고 익히는 나날이었다. (131쪽)

 

누군가 홀로 외로워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남을 웃게 만들 작은 재주가 있다면 그 재주를 몰래 쓰고 시치미를 떼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146쪽)

 

내가 전하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이반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건 내가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사기꾼은 진실해선 아니 되고 정직해선 아니 되고 일이 끝난 후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삶의 원칙을 바꾸면 큰 낭패를 보는 법이다. (192쪽)


따냐에게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을, 사랑을...너무 일찍 알아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열차게 살다보면 삶의 원칙 따위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며,

때문에 삶의 원칙을 바꾸었기로 큰 낭패를 보는 법 따위는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난 책 속의 그녈 보며,

아직은 삶이나 사랑을 몰라도 되겠지...
그렇게 젊고 아름답고 건강할 때는그딴 걸 몰라도 되겠지...
그딴 건, 좀 더 자기 자신에게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질 때에나 필요한 거겠지...
지독히 외로워서 꺼이꺼이 허리를 접고 울어버릴 수밖에 없을 때에나 필요한 거겠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비틀면 이 모두가 다 부질없는 일이지 싶기도 하다.
내가 그대가 아니고,그대가 내가 아닌데...누가 누굴 이해할 수 있겠으며,

내가 그대가 아니고,그대가 내가 아닌데...상황의 펼쳐짐이 그림처럼 선명하더라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진데, 보는 것만으로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봄이고, 좀 꾸물거리는 저녁이다.

이런 날 따뜻한 커피 한잔이 오히려 산뜻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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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3-30 19:06   좋아요 0 | URL
이렇게 길게 쓰시다니...
추천값은 긴 글을 읽은 제가 받고 싶어지지만...
그래도 읽는 이보다 글쓴 이가 더 힘어들었겠으니 추천 눌러야 하겠죠? - 당근...

"거울을 향하여 웃어보일 수 있다는 건 내 감정을 조절하여 상대방을 대할 수 있다는 거다.
적어도 내 감정이 상대방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거다."

좋은 글 보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2-03-30 21:13   좋아요 0 | URL
님, 오늘 이곳에 하루종일 봄비가 내렸어요. 목련화가 만개해 비에 흠뻑 젖었어요.
창 밖으로 그걸 바라보며 블루베리 머핀과 함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어요.
이런 날은 정말 커피 한 잔이 술 한 잔보다 낫지요.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 바그다드 카페, 저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에요.
노서아 가비,에서 김탁환이 커피를 정의한 문장들이 새삼 떠오르네요.
커피는 아내같은 애인이다, 이런 게 있었죠. 무슨 말일까 알쏭..
근데 한의사가 제겐 커피가 맞지 않다고 딱 끊으라고 했는데 못 끊는다지요.^^

blanca 2012-03-30 21:26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 힘들때는 커피를 더 많이 마셔요. 속이 너무 쓰려서 끊어보다가 또 마시고 그렇게 참다 마신 커피는 더 소중해요. 제가 예전에 커피를 끊으려 하니 어떤 분이 " 이 좋은 걸 왜 끊어?"라고 반문했던 게 생각나요.

cyrus 2012-03-31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커피를 좋아해요. 요즘에는 공부할 때 단맛이 강한 카라멜 마끼야또를 많이 마시게되요,
커피도 너무 자주 마시면 위장에도 좋지 않다는데 거기에 단 커피만 마시게 되면 도리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알면서도, 자주 마셔요 ^^;;


rosa 2012-03-31 11:33   좋아요 0 | URL
하여 제게 커피는 따뜻함이고, 행복이고, 여유로움입니다.^^
어제처럼 비 오고 바람 많이 부는 날에는 한 잔의 커피가 전해주는 따뜻함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거든요.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는 절로 '행복하다'는 말을 내뱉게 되고
바쁜 와중에도 커피 한 잔을 먹기 위해 준비하는 그 시간과 커피가 부글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의 뿌듯함이 좋습니다. 잠시나마 여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근데 전 쓰고 찐한~ 커피 좋아해요.^^
장윤현 감독의 책은 나중에 꼭 챙겨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샘 2012-03-31 15:04   좋아요 0 | URL
ㅎㅎ
'책과 음악과 커피가 있는 카페' 하는 방송 하나 하시죠^^
예전에 뭐, 방송반 하셨더더니, 케이블 정리만 확실히 배우신 건 아닌 듯...
멋진 페이퍼네요.
왠지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느낌이랄까...

하늘바람 2012-04-01 11:50   좋아요 0 | URL
저도 속상하고 지칠땐 이불 뒤집어 쓰고 자는데~ 누군가는 잠이 오냐고 하지만요.
커피를 소재로 이렇게 길고 멋진 글을 쓰시다니 참 대단하세요 책과 음악과 영화와.블루의 줄리엣비노시, 바그다드 카페 참 좋아했는데. 모두 혼자본 영화라 더 와닿았는데 말이에요.
이상하게 저도 님께 커피를 선물하고 싶더라니. 그런데 일년드실 커피가 있으시다니~ 부러운데요.
전 요즘 커피를 자제하고 있어서 꾹꾹 참느라 죽을 지경이긴 합니다만.
오늘 같은날은 창 넓은 카페에서 김 모락모락 나는 커피 마시고 싶네요

2012-04-26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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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숙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ㆍㆍㆍㆍㆍㆍ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며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ㆍㆍㆍㆍㆍㆍ

 

김선우를 읽기엔 햇살이 너무 좋지만, 그렇다고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눈물이 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집을 아무렇게나 뒤적이다 이 시에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입에 문 것처럼 멍해진다.

시집의 겉날개 안쪽을 뒤져 프로필을 찾아낸다.

1970년생, 나랑 동갑이다.

항상 이이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처음 접하는 작가인듯 읽는다는 것이고,

읽다가는 책날개의 프로필을 뒤져 '어, 나와 동갑이네'한다는 것이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돌아다니다가, "아하? 그 김선우...!"하고는 흡족해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글의 첫인상은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신선하고 통통거리는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면, 속 깊고 늙수그레한 영감이 들어앉아 있는것도 같다.

아직까지, 이토록 신선하고 통통한 글을 쓰는 가슴 속에 속 깊은 영감을 한명 들어앉히고 사는 이는 김선우 외엔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어렸을때부터 난 좀 이중적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어딘가에 속하고 그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면서도, 그 소속감이 주는 편안함을 은근 즐겼던 것도 같다.

같은 이유로...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곁에 손닿는 곳에 두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러고 싶어했다.

혹은, 그러고 싶어 안달했다.

 

이 시를 읽으면서...그랬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곁에 없어도,

손 닿는 곳에 없어도...좋아하거나 사랑할 수는 있는 것이다.

햇살이, 바람이, 비가, 달이...그렇듯 어떻게 당신이 내 것일 수 있겠는가?

 

말로는 천만번도 할 수 있다는 그 말을 쉬이 못하는 사람을 내칠 것이 아니라, 귀히 여겨야겠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늘도 다 만 사 랑 하 여 야 겠 다.

 

ㆍㆍㆍㆍㆍㆍ

 네 그럼요 철학이지요, 감꽃 지던 그날도 똑똑히 기억납니다 감나무 아래 동그랗게 싸놓은 똥무더기 위로 튀밥 같은 감꽃이 떨어지고 따스한 바람이 지나고 파리가 지나고 꿀벌이 지나고 나비가 지나는 것을 한참토록 바라보던 날이 있었죠 이건 뭘까 나는 달랑 요 한 몸인데 이것은 어디서 온 걸까 고독하게 턱을 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황금빛 똥을 오래 바라보던ㆍㆍㆍㆍㆍㆍ밥이 변해 똥이 되는게 시간이라는 걸까 밥이 똥이 되는 것처럼 무언가 이 몸 안에서 변해 내가 되는 것을 흔쾌히 저지르는 게 삶이라는 걸까 딱 그런 문장은 아니어도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서운 거겠구나 정신 바싹 차려 살아야겠구나 저의 철학이 거기까지 나아갔는지는 모르겠으나ㆍㆍㆍㆍㆍㆍ

 아 그렇군요 철학으로부터 똥이 온 게 아니라 똥으로부터 철학이 왔다고 하는 쪽이ㆍㆍㆍㆍㆍㆍ아 네에ㆍㆍㆍㆍㆍㆍ

 

                                                                                                                                     '나의 철학' 중에서,

 

이 시는 모호하고 난해하다.

게다가 '걸까', '같습니다', '~겠구나'나 '겠으나' 따위의 '용언의 어미 변화'만을 가지고 모호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김선우의 시엔 유독 오줌, 똥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요번엔 철학과의 접목이다.

전혀 관계가 없지만...개똥철학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밥이 변해 똥이 되기도 하는데, 똥이 변해 밥이 되기도 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밥이 똥으로 변하는게 아니다.

밥이 변해 똥으로 되는 거고, 거기에 필요한게 '시간'이라는 거다.

똥이 되고 내가 되는 거다.

그게 삶이라는 거다.

 

'변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다른 성질로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면,

'되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자연스럽게 이르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밥과 똥에만 국한 시킬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삶으로 까지 확장을 시키게 되고,

그러다보면 요번 시집에서는 그간의 그녀와는 또 다르게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랑 노래를 하는 그녀를,

경쾌함을 한꺼풀 들춰내고 보니 '참 깊더라~'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

차갑고 딱딱한 무쇠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고소한 떡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러포즈를 하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

깊고 진중한가 하면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명랑하기도 하다.

차가운 무쇠 기계도 얼마든지 달콤하고 로맨틱해 질 수 있다.

 

'저기요......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촌스럽지만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가래떡처럼 뜨끈하다.

 

이 시를 읽다보면,

나도 마냥 말랑말랑하고 경쾌하여져서...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한번 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달리는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만나지든 그렇지 않든 다 괜찮다...하고 한없이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시는 내게 또 하나를 가르쳐준다.

현재를, 순간을, 오늘을 사는 삶이다.

오늘을 최선을 다하여 살았을때,

뜻밖의 선물처럼,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리고 볼 일이다.

 

꽃, 이라는 유심론

 

  눈앞에 열명의 사람이 잘빠진 몸매로 웃고 있어도

  백명의 사람이 반짝이는 선물을 펼쳐 보여도

  내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예전에 꽃이 예쁘게 핀 돌담길을 지날 일이 있었다.

이내 비가 내리길래 예쁘게 핀 꽃이 지겠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그랬더니, 누군가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쁘게 꽃 피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꽃잎을 다 떨구더라도 열매 맺을 수도 있음을 알게해준 비가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비를 탓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이 시는 좀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내 맘대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번개치고 천둥소리 들리기까지의 찰라를, 나와 당신 사이의 간극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내가 당신이 아닌 이상 간극은 어떤 의미로든 존재할 수밖에 없을테고,

간극이 찰라에 가까울수록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롤랑바르트가 어떤 의미로 말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아프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도 알겠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외로움일 수도 있지만, 호젓함이거나 그리움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찌되었건 나의 주관적 견해일뿐...

시의 해석은 각자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 눈물인듯 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더라도 너른 벌판에 우뚝 선 무엇하나 없어 번개를 맞을 일조차 없는 詩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사람의, 익명의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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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3-22 18:39   좋아요 0 | URL
언제나 늘 그렇지만 양철나무꾼님 언니 덕분에 시를 읽어요 요즘
시만 주구장창 읽던 때가 있었는데 그게 언제 였는지 가물가물한 요즘.
서늘서늘한 날씨에 그런데 참 와닿는 시였네요

프레이야 2012-03-22 19:49   좋아요 0 | URL
꽃이/지는/이유
헉.. 대단한데요, 김선우 시인.
양철나무꾼님이 준 별 다섯에 바로 장바구니 직행이에요^^

잘잘라 2012-03-22 21:03   좋아요 0 | URL
시로 읽기엔 참 좋아요^^
같이 살기엔 속 터지는 날이 많을것 같구요. 히히
글쓰는 사람하고 살자면 먼저 도를 닦아야 할까요?
비에 마음이 젖어드는 밤이예요.

2012-03-22 21:42   좋아요 0 | URL
1. 흠. 모든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기도 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해요.
사람도 마음도 사물도.. 이 세계 모두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블레이크 시였나, 하여간 외국 싯구인데요. (기쁨이란 가질 수 없는 것,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 기쁨을 가지려 하지 말고 다만)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자"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인용했던 책이 예전 집에 있고 여기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좋았는데..

여튼, 날아가는 기쁨에 입맞춤하는 사람이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았어요. 쉬운 건 아니지만.. ^^

2. 마지막 시가 제일 좋아요. 전.
그리고 '번개 친후 천둥치기까지의 시간'을 '당신과 나의 간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양철님의 견해도 멋있어요~>.>

2012-03-23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5 12:35   좋아요 0 | URL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에서 가슴이 서너번 쿵쿵쿵.
멍하니 두세번 다시 읽고, 또 읽고, 끊어진 길 보인다 라는 문구를 되내이고 되내이고.

나는...... 이런게 슬퍼! 그래서 차라리 천둥 번개가 친 다음에, 아무도 없어서 편안해, 도망칠 수 있어서....
완전 실존적 한계다... 아흑.

같은하늘 2012-03-28 01:09   좋아요 0 | URL
이 밤에 눈에, 머리에, 가슴에 착착 안기는 시들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