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밤이 실종됐다.

밤만 실종된게 아니라, 느긋한 아침 시간도 실종됐었다.

아들은 어느새 학교를 갔는지, 침대 위 이불 무덤만 지난 밤의 흔적을 전하고,

어이가 없어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나를 향하여 남편이 한마디 한다.

"걔가 한두살이야? 엄마가 안 챙겨줘도 알아서 잘 해."

"?????"

나는 안 떠지는 눈을 간신히 실눈 뜨고 앉아 있었는데, 그게 보기에 따라서는 째려보는 모습이 되길 바랬었다.
"엄마 닮아서 아침 잠 많은데 어떻게 일어났냐구?
 니가 아침마다 드리던 문안 전화 안드리니까 무슨 일 났는 줄 알고, 아버지가 전화 하셨더라.

 덕분에, 앞으로 니가 종종 늦잠 자거나, 한번씩 알람 고장나도 되겠더라, ㅋ~."

결혼 후 16, 17년동안 빨간 날만 빼고 드린 아침 문안 전화 덕분에 아들은 지각을 면한 모양이다.

"건강 칼럼은?"

"군화,상화, 홧병?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심장 타령이냐?

 내가 싹수 노오~랗다 판단해서 잠이나 제대로 자라고 작년인가 재작년 춘곤증 칼럼 긁어다 올렸어."

여러가지 벌려 놓은 일이 겹쳐 바쁜 중에,

미국에서 오랜 친구가 나왔으나, 내가 제일 가까운 이웃, 친지에 속해 가이드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게다가 마음 쓰는 일까지 있어서 뾰족해질때로 뾰족해진 채로 보낸 20 여일이었다.

마음 쓰고 있던 일을 떨어내고 나니, 홀가분해져서 잠이 밀려들었었나 보다.

근 12시간이 블랙 아웃인것 치고는, 큰 말썽은 없었던 듯 하여 숨고르기를 하며 멍 때리는 표정을 추스리려는 나를 향해, 남편은 이런 말로 잠을 완전히 깨웠다.
"요즘 하트가 아니라, 브레인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 알어?"

"어? 증말...? 어떤 사람도 나보고 그렇게 얘기했었는데...흐흐흐~"

"어이구구, 얘 좀 보게? 나, 너 칭찬한게 아냐..."

이럴때 잔소리를 막는 방법은 말을 끊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 뿐이었다.

"줄 거 있음 빨리 줘보지 그래?"

"ㆍㆍㆍㆍㆍㆍ?"

"어제 직원들이랑 점심 먹구나서 디저트로 나온 사탕이라도 챙겨 놨을 거 아냐?"

남편은 이상한 CD를 하나 가져 온다.

 

"설마 이게 for me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라니? 그럼, 뭐가 돼야 for you가 되는 건데?"

잔소리를 막아볼 요량이었는데, 또 다른 잔소리로 이어지려는 듯 어째 분위기가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요즘 음악이나 책이나 다 특별난 거 없더라. 다 거기서 거기더라...는 얘기지"

빨리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나 책을 탓할 게 아니라, 무뎌진...니 귀랑 니 눈을 개비해야 되겠다.

 어떻게 들어보지도 않고 그래...특별난거 없더라, 다 거기서 거기더라...라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오니, 나오길?"

"아니, 나는 남편이 자기 좋아하는 음악 CD를 사면서 기념일 하나가 그냥 묻어 지나갔다 그런 얘기를 한거지.^^"
"옛날엔 취향이 비슷해서 좋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갖다 맞출려고 기를 쓰더니 말야...

 이제 같이 살아서 자연 동화되고 닮으니까, 구태의연해서 싫다고 하고 싶어?"

"ㆍㆍㆍㆍㆍㆍ"

"이거, 귀한 CD, 호사스런 귀 위해 힘들게 구한 거거든...전에 버벅거리며 네이버 뮤직 검색하고 난리쳤던 거 기억 나, 안 나?

 무스타파, 무하마드 나오는, 무슬림 음악 좋다고 강요했던 사람이 나였니, 너였니?

 옛날에 도어즈 들을때 혼자 Shaman's blues 귀 터지게 듣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언젠가 우연히 듣게 된 Sami Yusuf는 브리티쉬 싱어송 라이터로 아제르바이젠 출신이란다.

앨범 타이틀은 'Wherever you are'이고, 들어보니 언제 어디선가 'you came to me'라는 곡을 듣고 좋아서 구해달라고 했던 사실을 깨달았지만...한창 나중이었다.

"난 지금 좋고 비싸고 특별한 것만을 좇는 널 갖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예전의, 작고 사소하고 일반적인 것에 특별함을 부여할 줄 알았던 널 이렇게 통속적이고 세파에 찌들게 만든 사람이 난 거 같아서...그게 말야, 속상해."

 

'남편, 미안~

 하지만, 남편...난 말야, 지금 이딴 일로 속시끄러워 지고 싶지 않거든.'

혼자서 중얼거리는 수밖에ㆍㆍㆍㆍㆍㆍ.

 

느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느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지만, 느낌이라는 것이 얻기 위해 안달하거나,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해서...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느낌을 공유한다는 거 - 공감한다는건, 살면서 몇번 못 만나게 되는 그런 귀중하고 소중한 경험이 아닐까?

그걸, 지금 곁에 있다거나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타성에 눈 멀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안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출렁거리고, 파도치는 느낌에 휩싸일 때도 있으니,

그걸로 충분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이겠다.

부부가 되기 살짝 전의 사랑의 격동기이거나, 서로를 궁휼히 여기는 연민기 때의 일이 아닐까?

 

그러니 그건 '대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간'에 관한 문제로 봐야 덜 심각하고 덜 진지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독립연습 
  황상민 지음 / 생각연구소 /

  2012년 3월

 

 

흔히 심리학자가 쓴 심리학 책이라고 하면, 어루만져 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그저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소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핵심을 꿰뚫는 탐색과 성찰의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서른이 넘으면 자기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절에 혹했다.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제 어떻게 감정의 독립을 해보리라 다짐을 해보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독립이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놓아주는 거지만 말이다.

사랑이란 허울 아래 난 너무 집착했던 것 같다.

어려서는 할머니의 치맛폭,

아가씨 때는 아빠의 보살핌,

결혼하곤 남편,

아들이 태어나곤 아들,

내가 아들을 키운건 맞지만...

잘 커주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정신적 보상감을 맞보곤 했었다.

 

이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보려고 한다.

여기서 key word는 '내'이다.

내가 주체인 삶,

내가 주체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내 자신에 책임을 내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난 아직도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할머니를 떠올리거나,

아빠를 찾거나,

남편에게 기대거나,

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의지를 하려고 한다.

 

그들을 탈탈, 훌훌 떨어 다 보내줘 버리고...

'독립 연습'이 아니라, '독립'을 해 보리라~.

 

남이 해달라는 것을 척척 잘 해줘야 착한 삶일까?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게 아니다. 대인관계가 도를 닦는 일도 아닌데 그건 지나친 생각이다. 제 몫의 일을 해내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착하게 사는 거다. 흥미롭게도 우리 사회는 착하게 사는 것을 남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이 남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28쪽)

 

현재의 모든 문제가 정말로 트라우마 때문일까?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만들어놓은 미신이다. 미신은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믿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트라우마가 현재의 나를 괴롭힌다고 믿는 순간 나는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상처를 통해 아픈 마음을 치료하려던 프로이트의 노력이 정확히 반대로 작용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그만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걸 가르쳐준 것으로 충분하다.(106쪽)

 

사람들은 흔히 감정을 공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정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아내의 기분 좋은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하는 게 마땅하다. 비록 콘서트 티켓 값이 비싼 편이긴 하지만 아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헐값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비용이 그 정도라면 그건 얼마든지 투자할 만하다. 남편이 이런 방정식을 모를 경우 아내가 가르쳐줘야 한다. (1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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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3-15 16:46   좋아요 0 | URL
공감의 따뜻한 파도에 몸이 둥둥 뜨는 일,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는 말씀에
격하게 울컥해요.^^ 어쨌든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일까요, 이것도.ㅎㅎ
어제 사탕 하나 못 받은 일인 흑흑 ㅠ

숲노래 2012-03-16 01:06   좋아요 0 | URL
서른에 앞서 열세 살에도 내 마음을 나 스스로 아끼며 사랑해야 하리라 느껴요~

아무개 2012-03-16 09:46   좋아요 0 | URL
페이퍼 읽자마자 바로 주문 했는데 21일나 되야 도착하겠더군요. 주말에 읽고 싶었는데...마흔에 가까워 오는데도 내 마음은 아직도 내 마음이 아닌듯하네요. 감정적독립... 정말 쉽지 않은거 같습니다.

하늘바람 2012-03-16 10:46   좋아요 0 | URL
두분의 대화가 정겨워요
전 이젠 사탕은 꿈도 안꿔요
네가 애야 하니까
이제 40대이니 더더욱 마음에 책임져야하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여리고 여리신 양철나무꾼님
껴안아 드리러 가고 파요

마녀고양이 2012-03-16 11:59   좋아요 0 | URL
^^*....... 한번 더 쪼옥~ 쪽쪽쪽~

감은빛 2012-03-22 15:42   좋아요 0 | URL
두 분의 내공이 느껴지는 대화인걸요.
어쩜 저렇게 멋지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나요?
양철님의 멋진 글을 차근차근 읽어볼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쉽네요.
담에 몰아서 밀린 글들 읽어버려야겠어요.
늘 건강 챙기시구요.
 

잘 지냈어요?

답장이 완전 늦어버렸죠?

손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준 이쁜 편지에 대한 답이 너무 늦어버렸어요.

게다가 성의없이 이렇게 메일로 뚝딱 해치우려 하다니, 두루두루 미안해요~ㅠ.ㅠ

호칭을 어떻게 할까 한참 망설였어요.

그동안의 호칭이 있지만...

내겐 늘 봄처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으니까 '봄처녀'?

설레임의 그 느낌을 살려 '삼월이'? 하다가,

새록새록 돋아나는 새순처럼 그대도 나도 경쾌하게 새로 시작하자 하는 의미로 'march'로 하기로 내맘대로 정했어요.

 

그랬군요, 마치.

참 힘든 겨울을 견뎌내고 맞이하는 봄이라서...이 봄이 더 새롭고 의미있겠어요.

마치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지난 겨울 약간의 건강과 사람과 마음을 잃었고, 후회와 추억을 얻는 시간들을 보냈거든요.

그래서, 마치에게도 이 책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요.

막 달콤하고 새로워질지도 몰라요, 후유증이라면요? 

어딘가로 떠나고 싶겠죠~^^

 

마치도 알테지만...책을 선물하는 건 좋아하지만, 책 선물 받는 건 좀 부담스러워 했었어요.

특히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받는 책선물은 리뷰나 서평을 써야한다는 의무감에서 글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때문에 신간평가단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누가 책을 선물해주겠다고 하면 정색을 하고 사양 해서, 여러번 오해도 사기도 하구요~.

 

그런 내가 이분이 가져다 주시는 책들은 전혀 부담스러워 하지 않는데,

처음은 6, 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첫 출근을 하고 채 일주일도 안됐을때였으니, 낯설기는 이 분이나 나나 마찬가지였을텐데...

잠깐 딴일을 하는 사이, 내 책상 위의 '장르소설'을 읽다가는 그냥 들고가 버리신거예요. 내참--;

당신이 읽던 또는 읽은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을 팽개쳐 놓고, 내 책 '살인의 해석'을 들고 가버리신 거예요.

전화해서 당장 들고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교양(?)을 지키느라 꾹 참고 가져오시라고 조곤조곤 말씀드리자,

"자, 자, 잠깐만~ 지금 클라이막스 거든. 딸깍!"

이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고...

내 책을 내 책이라고 해 보지도 못하고 '딸깍' 전화를 끊기고만 꼴이었죠~ㅠ.ㅠ

 

내 손을 떠났던 책들은 며칠만에 가지를 치고 새끼를 쳐 여러권으로 불어났고,

그 후로 여지껏 책을 바꿔가며 읽는 유일한 책친구예요.

근데 요번에 이 분이 가져오신 책 가운데 장르소설이 아닌게 한 권 끼어 있었어요.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변종모 지음 / 달 / 2012년 2월

 

 

4. 국경에 서서

ㆍㆍㆍㆍㆍㆍ

누구나 근본적인 것을 벗어나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삶인데 나는 자주 공허하다. 그 공허가 단순한 허무이거나, 그허무가 복잡한 외로움일지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것이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일도 우정도 사랑도 그 무엇도 내 쪽으로 흘러주길 바라는 마음. 상대와 나의 중간에 두지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울게 하는것. 그것으로 타인의 마음을 사려는 일. 나의 마음만 앞서 타인의 마음을 나에게 강요하는 일. 때로는 나의 배려가 타인에게 불편을 초래할 수도 있는데 내가 떠넘긴 것들에 행복해 하지 않는다고 자주 불행했다. 반드시 내 쪽이어야만 내 것인 줄 알던 시간, 나는 자꾸만 그 경계를 침범했는지도 모른다. 가지려고만 하고 나눌 줄 모르던 시절, 소유하려고만 하고 이해하지 않던 많은 날들이 물거품처럼 밀려온다.

마치 세상의 끝처럼 적막한 정오의 시간. 나의 뚜렷한 경계 없이 펼쳐진 국경의 끝에 서서 오래된 마음 하나를 넘긴다.

 있는 것을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일, 사실을 내 것으로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함부로 그것을 넘지 않는 일.

 사는 것은 결국 내가 나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60~61쪽)

 

윗 부분에 포스트잇을 '떡~ 하니' 붙여준 걸로 미루어 "금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페이퍼 관련...

얼마전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 같고, 저런 대답을 들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예요.

있는 것은 그대로 두라고...

그리고 내 안의 나를, 내 안의 경계를 먼저 허물라고...

그러면 상대도 자연 허물게 될거라고...

그럼, '금은 뛰어넘으라고 있는거야, 야호~ '이런 터무니 없는호기를 부리지 않고도

번지고 스미고 물들어 하나될 수 있을 거라고...

 

기실은 이 친구야말로 지금 인생의 가장 힘든 한때를 보내고 있거든요.

그동안 해오던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줄이더니 이제는 정리하는 단계를 밟고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몇번 나에게 툴툴 거렸었고,

그가 보기엔 매정하게( 내 입장에선 쿨하게)...내 본업은 진료와 치료이지, 위로가 아니라고 말했었구요.

"그동안 무수히 읽어 오신, 그리고 만들어 오신 책이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요?"

내가 덧붙였었던 당돌했던 말이 생각나서 씁쓸하게 웃자, 이런 말씀을 도인처럼 휘날리셨던 분이예요.

"서선생은 내 인생 후반기의 페이스메이커야.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선수 뿐 아니라 페이스 메이커도 중요해. 때문에 훌륭한 선수는 페이스 메이커를 관리할 줄 알지."

 

같은 날, 또 다른 책친구에게서 같은 책을 선물받았어요.

'화이트 데이, 사탕 대신'이라며 주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책을 읽기 전이라...

'내가 사탕보다 사탕 같은 문장을 더 좋아했었나?' 하고 툴툴거렸었죠.

한동안 감성 과잉의 글들을 의도적으로 멀리 했었죠.

나도 헤퍼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해야할까?

앞에서 얘기했던 후유증으로 고생할까봐, 여행산문집은 기피 대상 1호였구요.

 

참, 저 서재 대문의 이름을 바꿨어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나서다'에서 'where is my mind?'로 바꾼 건

뭐, 심오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가볍고 경쾌하게 가자는 생각에서 였어요.

그동안엔 마음이란 것이 꼭 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아 찾으러 나서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면...

지금의 'where is my mind?'는

'마음아, 어딨니?'하고 기웃거리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

자아나 정체성을 찾겠다는 심오한 의도에서가 아니라...'심심해, 나랑 놀자, 나랑 놀아줘...'하는 심정.

아님 말고...돌아서서 터벅터벅 걸어갈라치면,

어디선가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감은 눈을 비비고, 슬리퍼 대충 꿰고 저만치 뒤에서

"야!"하고 불러세우는 그런 편안하고 수더분한 이름의 'mind'

 

2. 그리운 것은 허물어져야 한다.

 

 

결국 이렇게 만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머물렀던 한뼘의 간격은 얼마나 먼 것이었는지요. 우리 허물어버릴 것이 있다면 빨리 허물고 말죠. 괜한 오해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 각자의 앞만 보고 서로 등 돌려 사는 동안 당신이 그리워했을 나와 내가 드리워 했을 당신은 더 이상 말하지 말기로 합시다. 이렇게 만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때는 왜 그랬을까. 어차피 볼 거라면 하루빨리 만나지기를 바랍니다.(31쪽)

 

옛날에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환자로 알게 된 사람이 세월이 지나다보니 다른 감정이 생겼다, 어떻게 해야 되겠냐?

파릇파릇했던 그때 대부분의 과 친구들은 '환자로 그만 만나자, 애인으로 만나자'를 택한다고 했었는데...

나와 또 한 친구만 '세상의 반은 남자(또는 여자)다, 환자로 알게 되었으니 치료가 우선이다'라고 대답했었어요.

그때 교수님은 나와 친구를 일컬어, 'mind를 옵션으로 들고 다니는 녀석들'이라고 하셨었구요.

그 후로 사람을 만날 기회는 많았지만,

언제나 다가오면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만큼, 어쩜 그보다 좀더 물러나느라 바빴었죠.

 

그런 내가 좋다고 떠벌릴 수 있었던 건, 연예인이나 넷상의 인물들, 또는 외국에 나가 돌아올 기미가 없는 친구들이 고작이었어요.

연예인이 내 앞에 나타난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고,

넷상의 인물들이나, 외국에 나갔다 돌아온 친구들을 만난 경우는 여러번 있었어요. 

하지만 내 상상과 기억 속의 인물들은 실제와는 큰 차이가 있었고...그걸로 끝이었죠.

아무 문제없었어요.

근데 요번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었어요, 내 상상과 실제가 차이가 전혀 없었던 거예요.

 

9. 부탁해.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요? 어려운 건 하지 마요. 알죠? 나 소심해서 거절 잘 못하는 거?"

"만약, 미국에 간다면 서부 101번 해안 도로를 꼭 한번 가봐. 그 길은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길이야. 너도 그 길에 서며 나와 같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ㆍㆍㆍㆍㆍㆍ

무심하고 심심한 길은 때로 커다란 도시를 품었다가 때로 황량한 길을 내놓기도 했다. 이대로 계속 운전만 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다. 아니, 허황된 풍경을 만날 때며 잠시 그풍경에 미치기도 했던 것 같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사흘이면 끝까지 달려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길이었다.

 황홀한 석양이나 신선한 아침을 맞을 때면 행복했지만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 인내란 지루한 이 길 위에서 다시 외로워질 일과 그 외로움 끝에 있을 불안감 같은 추상적인 감정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는 원초적인 것이기도 했다.(82~83쪽)

 

하늘에는 태양이나 별처럼 자체 발광하는 것들도 있지만, 달처럼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해가 싫었었어요.

저 잘난 맛에 홀로 반짝거리는 해가 싫었었던 게죠.그럼 햇빛은?

 

햇빛은 의료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대요.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 가시광선, 빨강 바깥 쪽의 적외선, 보라 바깥쪽의 자외선...이렇게 해서 의료용으로 사용한대요.

자외선은 멸균 기능이나 이런 걸로 사용해서 큰 문제가 없는데, 적외선이 좀 그렇죠.

한때 약장사라고도 하고, 의료기 라고도 하는 다단계업체에서 이 '적외선치료기'를 팔았었어요.

그래서 어르신들 계신 집에 가면 하나 씩 있는데, 얘의 열 발생 방식은 복사열 방식이예요.

복사열이 뭔지 잘 모르시는 어르신들은 뜨거워지지 않는다며,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하다가는 그을리는 것으로 부족해서 옷은 눌러붙고 수포가 생기는 burn을 입기 부지기 수.

흰 색 계통의 수건을 한장 덮어 주고 그 위로 빛을 쪼여주면 적당히 따뜻한 것이 괜찮은데,

우리가 '햇빛 = 햇볕 = 햇살'이라고 부르는 게 실은 이 원리이예요.

누군가는 둥글려 얘기하느라고 햇살은 '입자'라고 했던데,  안 그러고 '먼지 입자'라고 해도 괜찮아요.

내게 환자는 치료가 우선이었듯이, 해는 일종의 의료용이어야 한다는 논리여서 그리 로맨틱할 것도 없거든요~ㅠ.ㅠ 

 

4. 생각 속의 사람들

ㆍㆍㆍㆍㆍㆍ

"선배, 얼마나 다녀올 생각이에요?"

"글쎄, 일 년은 넘겠지?"

후배는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두 번 정도 못 본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우리 다녀와서는 좀 더 자주 봐요."

 그렇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잘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것이 전부였다. 몇 번의 연락을 받은 끝에 선심 쓰듯 겨우 작별 인사를 하러 나간 자리. 그것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뤄뒀던 시간을 만회하려는 얄팍한 계산이 있었는지 모른다. 떠난다는 이유로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제봐도 좋을사람이라는 편리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소중한 인연들을 우연히 길에서 스치는 사이보다 못하게 꾸역꾸역 이어나간다. 시간이 아닌 마음이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을 핑계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정작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들을 아름답게 채워준 것들을 외면하고 사는 일. 그것을 또 외면하고 나는 자주 아름다운 것들을 기대하며 길을 나섰다. 내 곁에 소중하게 여기며, 그 인연을 어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반짝하고 잠시 마주하는 것에만 열광한 채 늘 가슴에 두어야 할 것들을 머리로만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자주 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소외시키며 살았다.가끔 먼 곳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도 허전했던 이유, 그것은 그곳에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마땅히 생각해낼 수 없어서이기도 할 것이다.(115~116쪽)

 

가끔씩 헤어지시라! 조금 떨어져 그만큼씩 그리워하면서 서로의 간격을 넓혀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 가까이 있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함은 헤어져 있어보지 못함이다. 마음이여, 부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사랑도 없을 것이다. 구속이란 그리움의 간격 없음이 아닌가? 우리는 대부분 사랑이라는 것이 한 치의 간격도 없이 행해져야 완벽하다고 여긴다. 실수다. 그대가 아끼는 것을 조금만 멀리 두고 보라. 그리움의 간격이 필요한 것이다.

 너에게 더욱 밀착하려 했던 나의 마음이 너에게서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너는 나의 곁에 없었다.(153쪽)

  

내가  참 나빴던 거죠.

난 그때 이도백하를 읊조리며, 옛사람을 걱정할게 아니라 상대방을 걱정했어야 했었던 거죠.

나는 이렇게 감정에 겨워 훌훌 떨어놓고 투정부릴 상대라도 있지만,

다 받아주고 들어주고도,

채워가질 수 없는 마음의 결여를 안고 사는 그를 걱정했었어야 했었던 거죠.

그걸 이제서야 깨닫고, 이제서야 미안하고, 이제서야 그 넓은 마음 씀씀이에, 다시한번 목이 메여요.

 

하지만, 마치.

내가 이 책에서 골라 읽어낸 한구절은 이거에요.

 

불염거(不染居)-있는 곳에 물들지 않는다.(227쪽)

너에게 물들지 않고 그리하여 내가 나에게 물들지 않기를.(229쪽)

 

그리고 새로운 책 한권을 펼쳤어요.

 

 

 

 

 

 

 

 

 

  사랑을 알 때까지 걸어가라
  최갑수 지음 / 상상출판 / 2012년 1월

 

 

#001

 데우다

여행은 마음을 ‘데우는’ 일이라고 써본다.

그러니까 여행의 온도는 37.2도 당신의 체온과 같아서
여행을 가는 건,

당신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의 기분 좋은 온도를 느끼는 일.

 

#002

정말로 아끼지 말아야 할 것

 

좋아하는 감정,

사랑한다는 고백,

이런 건 절대로 아끼면

안 되지.

 

#052

비법

 

ㆍㆍㆍㆍㆍㆍ나는 아무도 없는 사원을 맨발로 걸었고,

맨발에 닿는 돌의 감촉이 문득 차가워서ㆍㆍㆍㆍㆍㆍ

 아무도 없는 사원의 공기가 낯설어서ㆍㆍㆍㆍㆍㆍ

가만히 빈 봉투처럼 그 자리에 서 있곤 했지ㆍㆍㆍㆍㆍㆍ

그리고는 한 석상 앞에 멈춰 섰는데

ㆍㆍㆍㆍㆍㆍ

문득 외로워졌던가ㆍㆍㆍㆍㆍㆍ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혼자 있다는 게 오히려 외로워졌던가ㆍㆍㆍㆍㆍㆍ

그래서 이렇게 물었던가ㆍㆍㆍㆍㆍㆍ

외로움을 견디는 비법 같은 것이 있을까요ㆍㆍㆍㆍㆍㆍ

석상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던가ㆍㆍㆍㆍㆍㆍ

글쎄ㆍㆍㆍㆍㆍㆍ 견디는 거ㆍㆍㆍㆍㆍㆍ 그냥ㆍㆍㆍㆍㆍㆍ

견디는 거ㆍㆍㆍㆍㆍㆍ그게 외로움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ㆍㆍㆍㆍㆍㆍ

나는 맨발로 서 있었고ㆍㆍㆍㆍㆍㆍ숲 위를 뛰어가는 원숭이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지.

나는 가만히 그 소리를 견디고 있었네.

 

어때요, 마치?

내가 왜 이 책 두권을 골랐는지,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지...눈치 챘을거예요.

Tin woodman이 왜  tin woodman이겠어요?

근데요, 마치.

앞으로는 나에게만 말고, 이곳에 글을 올려줘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좋고 이쁜 글을 나 혼자 보고 있으려니, 영 미안해서 말이죠~ㅠ.ㅠ

내가 좀 게을러야지, 내 답장 기다리다 그대 파파할머니 될까 두렵다~

암튼, 고마워요~

이 봄, 마치에게...또 나에게 어떤 March를 배경음악으로 선물해야 할까?^^

참, 보내주신 겉봉투의 주소로 이 책 두권 보낼게요.

 

 

 

 

 

 

 

 316 - P-1
 삼일육 (316) 노래 / Sail Music (세일뮤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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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 변종모 (A lie of yearning for nobody)
    from 512 2012-10-14 14:57 
    노련한 여행자의 솔직한 이야기.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한국에 돌아오면 제일 처음으로 읽고 싶던 책. 다른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친구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몇 장을 읽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술을 한잔 마셨습니다. 목구멍까지 술이 차올라 찰랑거렸으니, 어쩜 술 한잔이라 하기엔 좀 과할 정도였을지도 모르겠군요. ...
 
 
2012-03-12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3-13 11:33   좋아요 0 | URL
"가끔씩 헤어지시라! 조금 떨어져 그만큼씩 그리워하면서 서로의 간격을 넓혀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 가까이 있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함은 헤어져 있어보지 못함이다."- 이 글 읽으니 주말부부가 좋다는 어느 친구의 말이 생각나네요. 엉뚱하게도...ㅋ

사실 가까이 있어어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너무 많죠. 사람이나 물건이나...

잘 읽고 갑니다.

2012-03-13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4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젖은 단풍나무

 

                                  - 이 면 우 -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비가 내렸다
오솔길 초록빛 따라가다가 아, 그만 숨이 탁 막혔다
단풍나무 한 그루 돌연 앞을 막아섰던 때문이다 그

젖은 단풍나무, 여름숲에서 저 혼자 피처럼 붉은 잎
사귀,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물먹
은 포풀린을 쫘악 찢는 외마디 새울음, 젖은 숲 젖
은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살면서 문득 그 단풍나무를 떠올린다 저 혼자 붉
은 단풍나무처럼 누구라도 마지막엔 외롭게 견뎌내
야 한다 나는 모든 이들이 저마다 이 숲의 단풍나무
라 생각했다 그대 바로 지금, 느닷없이 고통의 전면
에 나서고 이윽고 여울 빠른 물살에 실린 붉은 잎사
귀,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라도 상처 하
나쯤은 꼭 지니고 가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초록숲이지만 그 속엔 단풍나무가
있고 때론 비 젖은 잎, 여윈 손처럼 내밀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처음 들어선 숲엔 말없음표 같은 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미는
낯선 손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아직 몰랐다 다만 여
름숲은 초록빛이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믿어버렸다
그 단풍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고통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살다가, 누구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세운
두 무릎 사이에 피곤한 이마를 묻을 때 감은 눈 속
따듯이 밝히는 한 그루 젖은 단풍나무를 보리라.
  
  지금이 꼭 가을이 아니라도

 

요 며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 대신, 엉덩이 곁에 발을 들어올리고 무릎을 곧추 세우는 꼴로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female 버젼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누군가는 빨리 화장실로 가라고 몰아내려 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고난도의 자세를 구사할 수 있는 신체의 유연성에 감탄스러울 뿐이긴 하지만...

그런 자세를 하고 있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자세를 허물어뜨려 원상복귀하기까지의 그 고통이 만만치 않은 걸 자꾸 까먹고 또 그 자세를 취하니 그게 문제다.

 

 

 

 

 

 

 

 

 

 

  만 가지 행동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2월

 

 

 

"저도 답답했어요. 선생님은 자꾸만 '두성을 쓰란 말이야.' 하시지만, 그걸 쓸 줄 알았으면 벌써 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그동안 내가 책에서 했던 말들도 저 멘토의 말과 같았구나 싶었다.

ㆍㆍㆍㆍㆍㆍ

훈습의 구체적 방법이나 내용은커녕 용어의 의미조차 밝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사석에서 지인들이 "그런 얘기를 책으로 써 달라."고 했던 내용들은 훈습 과정의 개인적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실천한 행동들에 대한 내용이었다.(7쪽)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프로이트가 정의한 작업이 먼저 이행되고 나면 엡스타인이 정의한 상태가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무의식 깊이 밀어 넣은 후 억압, 회피해 온 정서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의식 속으로 되찾아 오면 저절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고, 다음으로 타인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왔다. 이어서 세상을 보는 틀이 바뀌고, 그 다음에야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졌다.(27쪽)

 

훈습 기간 중 분리되기만큼 어려운 것은 '경계지키기'였다. 예전 방식은 버렸어도, 어디서든 새롭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73쪽)


'성실하게 살되,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65쪽)' 교과서대로만 살면 될 줄 알았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른이니까, 나의 마음 하나 쯤은 이미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하고 산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누군가를 치료하고 사니까, 그게 감정이입을 하고 사는 거라고 착각을 했었나 보다.

요즘들어, 누군가를 치료하는 건 반대로 철저히 나를 배제하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누군가를 지켜보고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일이, 표현하지 못하고 염원하기만 하는 일이...

어쩜 '나'라는 나무의 겉줄기나 외관은 그대로 둔채, 보이지 않는 물관과 체관만을 그에게로 향하고 행하게 하는,

그런 서글프고 비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김형경님처럼, 남에게 내 삶의 나뭇가지 하나 기대지 않는 것이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당히 친절하며,

냉철하고 지적이며 시니컬한 미소를 구사할 줄 아는, 그렇지만 감정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서툴지 않은 사람.

그런 완벽한 사람을 어른이라고 그려놓고 있었지만, 그건 단지 내가 그려놓은 이상향이었을 뿐...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었나 보다, 누군가의 말대로 채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가 여전히 울고 있었나 보다.

 

이 책의 김형경같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누구 안 아픈 사람이 있겠어? 살아가면서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혼자 웅크려서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

누구나, 누구나, 누구나...다 아프고 다 괴로울 것이다.

그런 인정 만으로도 버거운데...누구나의 틈을 뚫고 '누군가'가 슬며시 자리한다.

'누구나'에서 '누군가'로 '분리'되기도 버거웠는데...이번엔 '경계지키기'를 요구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는데...

"중도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상태가 아니다. 흑과 백이 분리되기 이전, 너와 내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중도라 한다."

라는 어려운 말을 인용하려다가,

쿨하게 내 식대로 가기로 했다.

 

'경계 - 금'은 넘으라고 있는거야~!'

 

 

 

 

 

 

  루시드 폴(Lucid Fall) 정규 4집 - 레미제라블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씨제이 이앤엠 (구 엠넷)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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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0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쪼옥~

하늘바람 2012-03-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끄떡끄덕.

2012-03-09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3-09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은 흐리고 차분한 아침, 루시드 폴의 목소리가 착착 감겨오네요.
잘 듣고 가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참, 로뎅의 그 자세는 정말 ..ㅎㅎ

숲노래 2012-03-09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참말 안 아프며 살아갈 수 있어요..

꿈꾸는섬 2012-03-1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면우 시가 참 좋다고 내내 생각했어요.
 

눈물 젖은 김밥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근사록을 논하지 말라.

 

하늘에는 태양이나 별처럼 자체 발광하는 것들도 있지만, 달처럼 태양빛을 받아 반사하여 빛을 내는 경우도 있다.

언제부턴가 맨 앞에서, 스스로 빛을 낸다는 따위의 말들이 부담스러워졌다.

자체발광이나 주인공, 주체가 되는 삶도 멋지지만,
그것들이 빛나고 멋지기 위해서는,

어두운 부분은 물론이고 어둠과 빛의 경계가 되는 두리뭉실하고 모호한 배경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달처럼 태양빛을 반사하여 빛을 내는 태양보다 어두운 달같은 것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게 되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밝음이 환하고,

달은 태양빛을 반사해 내는 면적에 따라 밝기가 다르다.

내가 '제대로' 된 어둠이거나 들어온 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내는 반사경이었을때,

내 남편과 아이라는 밝음이 한층 빛날 수 있다.

어제 새벽에 일어나서 수련회 가는 아들을 위하여 김밥을 쌌다.

김에 밥을 얇게 펴고 여러가지 재료를 차곡차곡 얹어 돌돌 만 문장은 '하이데거'와 '기획 투사'였다.

 

나도 참 웃긴 것이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자료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않고,

중이 염불 외듯 김을 한장 깔고 '하이데거', 밥을 얇게 펴고 '기획투사',

여러가지 재료를 나란히 쪼로록 놓고  '하이데거', 김발로 돌돌 말아 꼭꼭 눌러 '기획 투사'

...이렇게 읊조리고 앉았었다.

 

기껏 정성 들여 김밥을 싸 3단 도시락에 넣었더니,

"엄마아~~~~~! 내가 어제 한 얘기 뭘로 들었어?

  제발 튀지않고 싶으니까...다른 애들처럼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 둘둘 말아달라고 그랬지~"
그러고보니, '둘둘~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요즘 아들과의 사이가 심하게 삐그덕거리다 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나 보다.

'정말 호일에다가 김밥 한 줄을 둘둘 말아가지고 가는 애들이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내 딴에는 새로운 시작이고 출발이라지만, 남들이 볼때는 눈 감고 귀 막고 소통을 거부하고 정 떼려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한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한 내가 참자',

또 다른 한손으로 가슴을 다독이며,

 '참을 인'忍'자 세번만 쓰자'

하고 자위하였다.

암튼 중간에 타협점이라고 찾은 것이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재활용 용기였다.

 

 

 

 

그렇게 꿀꿀한 마음을 어떻게 갈고 닦아 보려고 집어든 책이 '근사록'이었다.

 

 

 

 

 

 

 

 근사록
 한형조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2년 1월

 


난 한 작가에게 필이 꽂히면 그 사람의 전작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한형조 님은 '허접한 꽃들의 축제'와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과거와 현대, 동ㆍ서양 할 것 없이 시대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며 넘나드는 사상적 깊이에 매료되었었다.

게다가 수선 부리지 않는 글의 품새 또한 고고하기 이를때 없었다.

 

얼마전 웹서핑을 하다가 '근사록'의 저자 란에 그의 이름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설레여 주문했었다.

근사록은 판본이나 해제를 달리해 가며 여러번 읽은 기억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읽은 기억만 있는지라, 체화하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에,

이 분의 것으로 보면 혹 문리가 트이듯이 어느 순간 훤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책을 받아보고 좀 실망을 했는데...여러명의 필진 중 대표 저자일 뿐이다.

 

한형조님은 서문에서부터 반짝거렸다.

' 다섯꼭지의 글은 그런 점에서 '해설'이라기보다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이나 주자학은 역시나 '낯설다.' 이 기획은 그 낯설음을 덮지 않고, 생살로 확인해보고자 했다. 손쉬운 동조는 위험하고 쉬운 설득은 무력하다.

 혹, 그동안 유학을, 너무 이너 서클에서 '당연하게' 설교하지 않았을까. "한국의 전통이고, 거기 좋은 말씀만 가득하구나"의 안의함 같은 것. 무릇 이방의 사유는 이방의 것으로, '불가해하다'고 적어주는 곳, 거기가 소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대편의 경계도 잊지 않아야겠다. '낯설다'는 것이 혹 진리의 징후일 수도 있다.(7쪽)

 

이 책이 낯설다는 사람들을 위해 살짝만 얘기해보자면, 주자학의 입문서이자 교과서이다.

사서삼경 외에, '심경'과 이 '근사록'을 보탤 수 있겠다. 그런데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책의 이름조차 생소할 터이니 주자학은 근 백년 사이에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제목의 '근사'는 논어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근사록, 덕성에 기반한 공동체, 그 유교적 구상'

자세히 보니 이 책의 제목은 그냥 '근사록'이 아니다.

그동안의 책들이 교과서적 진술의 화석으로만 남아있던 것을 우려하여, 그걸 넘어서고자 노력했단다.

무엇보다 지식이 삶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주자가 '근사近思란 이름을 붙인 이유라고 못 받는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으므로 그 정신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단다.

다시말해, 교과서(근사록이겠지?)가 알려주지 않는 맥락과 지층을 엿보여주고,

시대가 정위해놓은 판단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며,

미래를 위해서 주자학적 사유가 던지는 교훈과 충격의 지점을 확인하고자 했단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주제 다섯가지를 설정했단다.

도, 공부, 가족, 사회, 국가가 그것인데....

그것은 각장마다

1장, 도와 형이상학,

2장, 공부와 마음통제, 심경과 상호보완

3장, 가정의 경영, 남녀의 역할 차이에 대한 음미

4장, 유교의 공동체적 세계관 - 주자학적 구상의 전체적 얼게, 혹은 조감도

5장, 국가와 통치에 관한 장, '자연'과 '무위' 위에 설정한 '이상주의'국가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그 태극이다. 그 태극이 움직여 최초의 움직임을 낳았다. (無極而太極  太極 動而生陽)

(31쪽)

 

퇴계 또한 같은 치지에서 자신의 필생의 역저 '성학십도' 맨 첫머리에 이 '태극도설'을 실었고,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이것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멈추어서서 묻는다. "대체 자연이, 그 과정이 왜 인간의 길에 그토록 중요한가?" 여기 설명이 필요하다.

 주자학은 인간을 독립된 개인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파생으로 본다. 그 자연 안에서 개인들은 타자와, 흑은 가족으로 혹은 공동체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 개인은 그런 점에서 사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의 과정에 협력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장재의 '서명(西銘)'이 그 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길은 우선 '자신의 유주적 의미'(理)를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상 속에서 그것은 두꺼운 먼지를 덮어쓰고 있고, 그 가능성(性) 또한 심각하게 녹슬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가 일상적 인간으로서의 '다스 만'(das man)의 소음과 타율 속에 망각'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단박에 주자학을 떠올렸다.

소외된 기(氣)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둔감과 무기력을 노정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가고, 다른 사람의 기쁘고 슬픈 일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표정이 없고, 얼굴이 굳어 있으며, 자신 속에 골몰하고 인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이 오래된 구습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본래의 감응의 자발성과 자연성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주자학은 그 목표를 위해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은 자기 위주의 욕망과 왜곡된 습관 등을 고치고, 아울러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전체적 전망을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 또 사람 차이도 있다. 요순처럼 타고난 조건이 좋을 수도 있고, 인간 백정 도적처럼 도무지 대책 없는 유형도 있다. 보통은 자신의 노력만큼 이런저련 장애물이 즐어들고, 가려지고 묻혀 있던 본래의 자연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가령, 어른들이 지나가면 공경하는 마음이 들 것이고,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갈라치면 달려가서 구할 것이다.

ㆍㆍㆍㆍㆍㆍ

'근사록'의 도체편을 펴면, 기이하게도 이 체계가 '자연'에 대한 근본적 신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장의 믿음이기도 한데, 주자학 또한 동양의 오랜 전통에 맞게 자연을 최종적 원천,판관으로 알고, 그'절대'에 순응하는 것으로 인간의 일을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 점에 고개를 젓는다. 인간의 일이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사람 손이 가지 않고, '저절로' 잘 되는 일이 없는데, 정말 주자학은 '순진하게도', 물정 모르고 '자연의 자연성'에 최종적 귀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32~33쪽)

 

조금 길지만 지문의 일부를 옮긴 이유는, 내가 김밥을 싸면서 읊조리던 '하이데거' '기획투사'와 묘하게 들어맞아서이다. 

 

제2장 공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자각과 실천' 편까지는 읽었다.

내가 예전에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던 '주역, 인간의 법칙'을 쓰신 이창일 님이 쓰셨다.

 

'논어'가 '논어'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숙독을 통해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확인되었을 때이다. '숙독이 완비' 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구절들이 잘 익힌 음식처럼 맛이 우러난 것을 먹고, 잘 소화시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독서를 위한 문자의 해독과 경전의 해석에서 엄밀한 문자학적 지식이 무시되지 않지만, 그것은 일의 반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 젊어서 군서(群書)를 독파했던 정이천은, "나는 젊었을 때 책을 많이 읽기를 탐냈는데, 지금 많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성인의 말을 완미하여 마음 속에 기억한 연후에 힘써 행한다면 자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완미하지 않으면 성경의 의미, 성인의 뜻, 일리(一理,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보통 독서인들의 주지주의를 지적하지만 정이천의 이와 같은 말은 반주지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축적, 정보의 습득은 인식의 수평적 확대를 말하지만, 완미의 독서는 깊이의 수직적 측면 곧 체험의 깊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지식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거나 양화된 정보의 수준을 평가하는 독서론은 이러한 깊이의 독서론을 측정할 수 없다. 전통의 독서 문화가 암송과 숙독을 위주로 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58쪽)

 

 

암튼 1장과 2장 까지 읽고 느낀 것은, 근사록은 체험철학이라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지식은 생명을 얻는다.

그냥 책상에 앉아 책을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몸을 놀리는 수고로움과 땀흘리는 신성함이 함께 우러졌을때 힘을 얻는다.

 

'천석군집 며느리뽑기대회'처럼 밥을 빌어 죽을 쑤어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과대포장이나 예쁘게 담을려고 공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주의이다.

하지만, 있는 있는 도시락 놔두고 단지 튀는게 싫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장담할 수 없는 호일을 일부러 사다가 둘둘 말아가는 거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다.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하는데, 노력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지...

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는데도 노력 따위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겠나?

또 모르겠다, 지나치게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해 그것이 병을 불러 오는 경우라면...무성의하고 대충대충 하라고 하겠다만~

어째 영 꺼림칙하다.

 

그리고 어쨌든 봄비 내리는 아침이다.

 

 

 

 

 

이지형 두번째 소품집 - 봄의 기적
이지형 노래 / 해피로봇레코드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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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3-06 11:12   좋아요 0 | URL
근사한 리뷰인데요. ^^ 정말 근사해요. (짝짝짝)
세상에, 김밥을 말면서 하이데거와 기획투사를 읊조리는 엄마라니...
거기다, 포일에 말아달라는 쎄~한 아들 사이에 놓인 근사록이라니...

남자 아이들은 그런 게 있어요. 모범생 스탈로 도시락싸오면 초딩스럽다는...
아마도 애들이 다들 잘 먹었을 것입니다. 부러워 하면서요. ㅎㅎ

유교의 '자연'과 노자의 '자연'은 인용 의도가 다른 거 같아요.
유교는 '자연'의 법칙성 속에서 '종법'과 '양'의 두드러짐을 주워내고
노자는 '자연'의 무위함을 강조하는 식인 것처럼 말입니다.

一陽一陰之謂道... 이런 구절도 '양과 음'의 구별을 '도'라고 하는 건지, '한번 양이 되고 한번 음이 되는 원리'가 '도'라고 하는 건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니 말이죠.
근사록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이 책도 참고가 되겠네요. ^^

2012-03-06 12:19   좋아요 0 | URL
저런 김밥 도시락이라니 역시 모든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자식에게 과분해요..ㅎㅎ (자식들은 늘 저렇게 말도 안 되게 투정하죠. 저만 해도 그런 경험 한 트럭이에요. -자식으로서..) / 그리고 너무 좋은 리뷰여요! 자연스럽고, 핵심적이고! 인용하신 글도 참 좋고요. ^^ 근사록 읽고 싶어졌습니다~

하늘바람 2012-03-06 13:25   좋아요 0 | URL
님의 내공을 어찌 따라가요. 정말 근사해요
아들은 징징 댔지만 엄마의 멋진 김밥을 두고두고 기억할 걸요
진짜로 호일에 둘둘 말아 주는 김밥만 싸 주는 엄마를 가진 아이는 평생 그립고 부러워할텐데
하이데거 학교 다닐때 살짝 읽어보았을떄 넘 어려웠어요.
지금은 제 자신이 수준이 아닌되어서

페크pek0501 2012-03-06 15:03   좋아요 0 | URL
저 위의 글샘님의 댓글에 동의합니다. 김밥을 말면서 하이데거와 기획투사라... 정말 멋져요.
그리고 재밌어요.ㅋㅋ
저도 짝짝짝~~~.

차트랑 2012-03-06 20:35   좋아요 0 | URL
동양의 고전을 접하기 시작한 것이 얼마되지 않아
양철나무꾼님의 페이퍼를 통해 도움을 얻고자합니다.
서재 즐겨찾기 추가해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프레이야 2012-03-06 22:2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세실님에 이어서 님까지 김밥을~~~ 냠~
전 김밥 말아본 지가 언제 적 일인지 아득해요.
천국표 김밥으로 간단히 도시락에 넣어주던 불량엄마랍니다~ ^^

숲노래 2012-03-07 07:09   좋아요 0 | URL
옛 선비들은 책이나 생각을 넘어,
손에 쟁기와 호미와 낫을 쥐고
들판에서 일하고
집에서 기저귀와 걸레와 주걱과 부엌칼 들고 일했으면
"가까이 놓고 생각하기"와는 사뭇 달리
다른 삶이야기를 풀어냈으리라 믿어요..

같은하늘 2012-03-08 00:1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좋은 글에서 아들의 싸~~한 반응이 제일 눈에 들어오네요.
지금은 엄마~엄마~~ 하면서 따르는 아들들도 그렇게 될텐데라는 생각에...

순오기 2012-03-08 10:38   좋아요 0 | URL
와우~~~ 교양있는 엄마란 이런 엄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페이퍼네요.^^
음악처럼, 정말 고맙습니다~~~~~꾸벅 인사하고픈!
 

그러니까 어제 생긴 일이었다.

" 내일 개학하면 바빠져서 엄마랑 놀 시간 없으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엄마랑 놀아줄게."

녀석은 인심 쓴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넘넘 심심하여 방바닥을 뒹굴던 그녀, 속으로 '올레이~'를 외쳤지만...

" 뭐가 필요한 건데...?

  너 올해부턴 교복 입어서 패션에 힘 안줘도 되잖아.

  글구 엄만 절대 니네 아빠랑 백화점 안 간다~"

하고 한번 그냥 튕겨 보았다.

 

" 흥, 가지 마라~.

  나 별로 필요한 것도 없고, 어제 두시까지 책 봐서 별로 가고 싶은 생각 없어.

  필요한 거야 내 용돈으로 사도 되고...

  난 그냥 내일부터 3년동안은 아들없는 셈 쳐야 할, 쓸쓸할 엄마를 생각해서...마지막으로 한번 엄마랑 놀아주려고 그랬지."

오히려 녀석이 기세 등등이다.

 

"암튼, 암만 아빠랑 백화점 안 가."

"엄마,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또 시작할까?"

그녀는 엉덩이가 무거웠다.

바꾸어 말하면 움직이는걸 너무 싫어해서,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따라다니는걸 엄청 싫어했다.

어느날 녀석이,

"내가 엄마가 없어, 아님 아빠가 없어?

 엄마, 아빠 둘 다 안가면 나도 안 가."

하고 그녀의 감성을 자극해서 어쩔 수 없이 끌어냈던 대사를 날렸던게, 녀석의 자발적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전이었다.

자전거에서 넘어서 머리가 깨졌을때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기는 커녕, 프랑켄슈타인이란 별명을 지어준 녀석이었다.

녀석에게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운동신경 둔하고 굼뜬, 아주 귀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만으로도 녀석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놀이나 모임, 나들이 같은데 엄마의 참여를 단서로 내걸었던 사람이, 그 녀석의 아빠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됐거든~아빠랑 둘이 다녀오시게."

"쇼핑은 안 하고 그냥 밥만 먹고 오자고..."

이 쯤에서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오케이하고 말았다.

 

일산에 있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정말 밥만 먹었다.

기다리는 동안 녀석은 앞으로 엄마 얼굴을 보기 힘들테니 폰 배경 화면으로 쓰겠다며 얼굴 사진을 한 장 박았고,

밥을 먹으면서 대화는 자연 새학기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 녀석은 몇가지 얘기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엄마, 나 야.자.하면 안 될까? 우리 반에 나 혼자 안 하는 거 같애~ㅠ.ㅠ"

녀석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마냥, 아빠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빤, 너 하고 싶은대로 하는 거 찬성이야."

"남들이 다하고 안하고가 뭐 중요해? 니 마음이 중요한거지?

 남들 다하니까 안하면 왠지 불안해서 하는거라면 반대고,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해 봐."

"학생이 공부하겠다는데, 부모가 반대하는 집은 우리집 밖에 없을거야."

녀석은 그녀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뭔가 할말이 더 있는 눈치이다.

"근데, 학교에서 공부가 제대로 되기는 하던?

 그리고 야자하게 되면, 지금 다니는 검도랑 드럼이랑, 기타랑 그딴 건 다 어떻게 할거야?"

"뭘 어떻게 해? 안 다니면 돼지."

"다니고 안 다니고는 니가 결정할 문젠데, 학교생활하면서 선생님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래? 에네지와 열정 넘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말야."

"암튼, 난 수험생이야. 그딴 거 말고 공부하는 학원을 보내 줘."

 

"진짜 아빠가 일러준 대로 하니까...된다아~. ㅋ,ㅋ~."

화장실에 다녀오던 그녀는 이 낮고 경박한 웃음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녀의 남편은 요 며칠 그녀의 일탈과 우울을...아들의 고입, 그와 관련 늦은 귀가가 빚어내는 일종의 빈둥지증후군이 원인이라고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이름 붙이자면, 아빠의 코치에 의루어진 '야자를 허락받기 위한 엄마 비위 맞추기 대작전'쯤이었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폰 배경 화면에 그녀의 얼굴을 찍어 집어넣을 생각을 한 것부터가, 그녀의 취향을 정확히 읽어낸 것이 신통방통하다 했다.

다른건 몰라도 자식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고 우쭐해 하려던 순간이었다.

녀석이 그녀에게 넘버원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는 까닭이기도 했으며,

이는 바꾸어 말하면, 남편은 열길 물 속보다 깊다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말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박세연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월

 

 

소통을, 소통이 되길 꿈꾸는 내가 제일의 소울 푸드로 꼽는 것은 커피와 차(tea)이다.

항상 잔이 따라 다니고, 때에 따라서는 받침까지 따라 다니기도 한다.

쓸쓸하거나 외로울 것 같지는 않다.

설사 고독하더라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적어도 손에 들고 있는 동안은 그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이기도 하다.

내가 곁에 없어도, 내가 선물한 그 차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커피나 차의 온도 만큼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어서 좋다.

 

커피나 차처럼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건 아닌지...있을 때 잘 해야겠다.

새벽에 약이 올라 몰래 사진을 지워버리려고, 녀석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던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누구란 말인가?

사랑하는 마음 한자락 있었다면 지 엄마를 저렇게 애꾸눈으로 찍어놓고 헤헤 거릴 수 있었을까?

 

암튼 다 잊고 훌훌 떨어버리고, 녀석의 처음을 응원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는 성시경의 '처음'을 따라 부르며,

녀석 없는 날씨는 좀 꾸물거리지만 마음만은 더 없이 찬란한 '처음'을 시작해 보아야 겠다.

 

나의 손끝이 당신을 느꼈을 때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하여 오고 가는 세상 속의 모든 일들 사랑 하나로 멈추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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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3-02 13:08   좋아요 0 | URL
ㅎㅎ 우리집이랑 똑같이 내가 엄마가 없어, 아빠가 없어 놀이를 이용하는군요.
있을 때 잘해라... 만고의 불변의 진리죠. ^^
그나저나 아드님이 재주꾼이군요. 드럼에 기타에... 든든하시겠네요.

2012-03-02 21:1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넘버원은 남편님이시군요.
울 아버지도 하시는 말씀이, "자식도 '한 다리 건너'고, 부인 옆에는 그래도 늘 남편인기라." (오늘 들은 말)
언젠가 예전에 하신 울 엄마 말씀은, 사람은 다 있어야 한대요. 친구도 자식도 남편도..(애인도?) 종류대로 다 필요로 하는 게 사람이라고. 전 없는 게 좀 많지만요.^^

cyrus 2012-03-02 22:31   좋아요 0 | URL
한창 공부만 해야 하는 시기에는 가끔씩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일종의 놀이 같은 것도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힘들어도 꾹 참으면서 지냈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악기를 다룰 줄 안다면
쉴 때마다 연주하면 좋을거 같아요. 드럼이랑 기타라.. 혹시 학교에서 밴드부로 활동하시나요?
정말 아드님이 멋지네요. ^^

아이리시스 2012-03-03 14:4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양철나무꾼님 보면 평생 생각도 못했던 '아들'도 갖고 싶어요 ^________^
다 있어야 한다는 말에 저도 감동. 종류대로 다 필요한 것. 설령 지겨워지더라도요. 저는 없는 거 싫어서 기웃기웃 찾아볼래요ㅋㅋㅋ

달사르 2012-03-03 22:35   좋아요 0 | URL
아들과 아빠의 팀플레이가 멋집니다! 아빠가 아무리 작전을 잘 짜줘도 그걸 멋드러지게 표현해낸건 온전히 아들의 몫이니 전, 아들에게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요. ^^

수험생 아들을 둬서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겠어요. 저희 언니도 비슷한 경우인데 빈둥지증후군을 겪는지 옆에서 잘 지켜봐야겠습니닷!

순오기 2012-03-04 08:24   좋아요 0 | URL
이런 수를 쓸 줄도 아는 아드님은 비록 넘버원은 못돼도 이제 다 컷네요.^^

같은하늘 2012-03-06 02:50   좋아요 0 | URL
음... 아드님의 마음 씀씀이가 참~~~^^
우리 아들들도 이렇게 이쁘게 커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