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하나가 어깨가 아프다고 왔었다.

본인이 adhesive capsulitis라고 자가 진단하고 치료받겠다고 온 것을,

Impingement syndrome같으니 정형외과 가서 제대로 검사받고 수술하라고 보냈었다.

그 과정에서 좀 매정하게 보였었고 그게 서운했었나 보다.

이 지인은 수술 후 5일 만에 내게 치료를 받겠다고 나타나서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더니 급기야 나에게,

"나처럼 아파본 적 없죠?"

라고 하며 아프다고 툴툴거린다.

치료를 받겠다는 건지, 아픈걸 위로받겠다는 건지...언젠가 읽었던 '라인업'의 '존 코널리'가 생각났다.

 

 주인공인 사립탐정 찰리 파커는 분노와 복수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가 받는 고통으로 규정되는 인물이다. 그는 직접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게 놔두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덕분에 그는 이기심이나 비탄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었고, 그가 쫒는 부인과 아이의 살인범에게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중략)...나는 모든 것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애를 쓰는 남자에 대해 쓰고 싶었다. 최악의 악몽이 현실로 실현되면 거기에는 일종의 끔찍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든 일단 그 정도로 끔찍한 일을 견뎌내면 다시는 어떤 것도 그를 그 정도로 아프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찰리 파커란 이름을 지어준 이유는 그와 같은 이름의 재즈 뮤지션인 찰리 파커의 별명인 버드에서 풍기는 비행, 자유, 영성의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에 얽매여 있는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그 이름을 주고 싶었다.

(라인업, 91쪽에서...)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장르소설 작가들 말고,

'라인업'을 통해서 유독 매력적으로 와닿았던 사람이 켄브루언과 존 코널리였는데...

켄 브루언은 막상 읽으니 '라인업'을 통해서 보여지던것 보다는 '아니올시다' 였고,

존 코널리는 '좀 심하다'고들 해서 여지껏 미루었었는데...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전혀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체해부도'식의 적출 묘사였는데, 그동안 단련될만큼 단련되어서 그런가 보다.

지극히 개인적이겠지만, 그동안 읽은 것 중 심한 것을 꼽아 보라고 한다면...'검은선'과 '한니발'을 들겠다.

하지만, 이 둘은 꼭 읽어 볼만한 작품들이기도 하다.

 

 

 

 

 

 

 

 모든 죽은 것
 존 코널리 지음, 강수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7월

 

 

 

암튼, '모든 죽은 것'은 작가의 필력과 역자의 번역력 모두 훌륭하여 재밌게 작품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저 위에 밑줄 그은 '직접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통받게 놔두려 하지 않는'....

소위,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불리우는 것만으로도 난 하트눈이 되어 황홀해하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주인공 찰리 파커를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놓은것과 어느 부분부터인가 그에게 영매 끼를 불어넣어 전지전능하게 만들어 놓아...좀 심심하고 재미없어 질 수도 있겠다.

 

나만 해도 알토 색스포니스트 '찰리 파커'를 좋아했던 터라...

처음 읽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찰리 파커'도 너무 금방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알토 색스포니스트 '찰리 파커'와 이 책의 주인공 '찰리파커'의 다른 점은 흑인과 백인이라는 것뿐이다.

색스포니스트 찰리 파커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때부터 색스폰을 불기시작했고, 16살에 네살 위인 여자와 결혼을 한다.

마약, 알콜, 약물 중독에다가 여자관계까지 복잡했던 그는 음악적인 열정만 남달랐다.

그렇게 지난하게 살던 그는 딸마저 잃고 급기야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서른다섯의 나이에 요절한다.

 

이 책의 주인공 '찰리 파커'는 경찰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찰 생활을 하던 그는, 아내와 다투고 술을 마시러 나간 사이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게 된다.

알콜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술을 마셔서 아내와 다투게 된건지, 아내와 다투어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의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암튼 그는 술때문이라고 자책을 하고 술을 끊고 경찰을 그만 두고 사립탐정 비슷한 걸로 나선다.

서른 네살로 등장하지만 몸매 관리를 잘해 서른 둘로도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는 그는,

눈동자는 청회색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만큼 투명하고, 얼굴은 약간 길쭉하며, 고통스런 기억 탓에 눈매가 깊고 입가에도 주름이 졌다. 수염을 깔끔하게 깎고 머리도 잘 다듬고 좋은 양복에 조명발까지도 도와준다면 꽤 봐줄 만했다. 조명만 괜찮으면 서른두 살이라고 우기도라도 그렇게 큰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운전면허증에서 적힌 나이에서 겨우 두 살을 뺐을 뿐이지만, 나이가 들면 사소한 것들이 점점 중요해지는 법이다.(95쪽)

다른 경찰이나 탐정들처럼 터프하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인간으로 살기 위해 애를 쓰는 한 남자일 뿐이다.

또한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전형화와 더불어, 쉽게 맥이 빠져버린 이유는...너무 금방 범인을 예측할 수 있어서 였다.

38쪽과 60쪽에서 단서가 이미 나타난다. 나만 그 실마리를 찾았나?

범행동기라는 것도 참 어이없다.
미국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나라여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먼저이고, 가정의 화목함 따위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줄 알았는데...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내에게는 그렇고 그럴 수 있는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좀 아이러니 컬 했다. 

"ㆍㆍㆍㆍㆍㆍ그는 위험을 즐기려고 한 것 같습니다. 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데, 이를테면 '인상'을 남기고 싶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인상. 요란한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38쪽)

 

울리치는 광대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광대처럼 굴 수도 있겟지만, 뉴올리언스에서 그를 아는 사람치고 그를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ㆍㆍㆍㆍㆍㆍ

 "넥타이 멋진데." 밝은 빨간색에 양과 천사 무늬가 있는 넥타이였다.

 "형이상학적인 넥타이지."울리치가 응수했다. "조지 허버트(1593-1633, 영국의 목사. 형이상학파 시인- 옮긴이) 넥타이라고나 할까."(60쪽)

 

내가 이 책에서 눈여겨 본 것은 찰리 파커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렇게 참혹한 방법으로 어이없이, 아내와 딸을 잃고도...그가 살아가는 이유, 

그건 다른 어느 친구들보다 앙헬과 루이스를 더 가깝게 느끼는 이유와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쩜 내가 장르소설을 읽는 이유,

내가 요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걸음 다가간다는게 '가까이'가 되기 보다는, 밀어내는 제스츄어가 되기도 하는걸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찰리파커는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단다.

그렇다면 앙헬과 루이스가 찰리 파커를 가깝게 느끼는 이유는 뭘까?

그 또한 그들과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읽었다거나,

그들과 별다를게 없는, 자기네와 비슷한 부류라는걸 느꼈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대할 수 있는게 아닐까?

 

그러니 '나처럼 아파본 적 없죠?'하고 툴툴거렸던 이의 저변은 둘 중 하나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겠다.

오히려 자신이 마음을 제대로 열지 못한 겁쟁이이거나,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한 고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 이미 고통에 잠식 당했거나...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앙헬과 루이스, 이 두사람이 괜히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에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것의 일부였다가 또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인 해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킬러였다. 그런 환상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로 인해 앙헬도 그런 환상을 품을 수 없었다. 이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도 저만치 멀어졌고, 나는 내 힘으로 나 자신을 다시 세우고 새롭게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했다.(125쪽)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기라도 한것처럼ㆍㆍㆍ-->이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비늘이 떨어질려면 어류의 몸이 되어야지, 사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므로,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정도로 바뀌어야 하겠다.

하지만, 이마저도 성경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 아니라면 뉘앙스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눈을 덮고 있던 콩깎지가 벗겨진 것처럼'...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형사시절에도 나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을 다룰 때면 늘 조심했고, 오만하거나 주제넘는 짓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존중하는 것을 존중해줘야 했고, 침묵에서 신호를 읽어야 했다. 그들에겐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고, 폭력을 쓸 때처럼 의사소통의 방식도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다.(149쪽)

 

모든 건 해석의 대상이며, 모든 건 암호이다. 상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얼핏 보기에 관련이 없는 정보들 속에서 의미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걸 숙지해야 한다. 이 노인네는 그런 암호를 읽어내며 평생을 살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고 여겼다. (152쪽)

 

 "악마라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가 뭔지는 나도 몰랐다. 비인간성으로 말미암아 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넘어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는 게 악마인 건지, 인간의 특징,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어 있는 어떤 특징을 규정하는 통념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뭔가가 있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171쪽)

 

내가 공감과 소통을 좀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쯤되면 존 코널리 아니, 이 책에선 주인공 찰리 파커의 타인에 대한 '존중'이 예사롭지는 않다.

공감할 수 없으면 그게 바로 악이고, 악마인 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밀려왔고, 그러자 위에 통증이 느껴졌다.(191쪽)

이런 사실적인 문장도 겪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내 얼굴의 표정을 읽고 어떤 낌새를 차린 것 같았다. 확실치는 않았고, 알아야 하거나 말하고 싶은 것 이상의 뭔가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눈치를 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췄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걷다가 서로 위로를 건네는 두 명의 여행자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를 느꼈다.(253쪽)

'따로 또 같이'나, '제대로 된 공감' 따위의 말이 무색하게...

그저 잠시 말을 멈추고, 걸음을 멈추고, 서로에게 일부러 위로를 건네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요원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기때문에 살면서 비슷한 고통을 겪거나,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는게 쉬운 일도 아니지만...
만나고 스치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어떤 위로 같은,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를 느끼기도 하는가 보다.

내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손길에서, 묘하게 머뭇거리는 그 동작에서 전문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뭔가가 느껴졌다. 내 희망사항이었을까? 나는 그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첫 걸음, 다시 세상 속에 들어와 자리매김하려는 어설픈 첫 시도였다. 이틀동안 무수한 일을 겪은 다음이라, 잠시나마 뭔가 긍정적인 것을 만지고 싶었고,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선한 것들을 깨워 일으키고 싶었다.(325쪽)

 

 그녀는 말을 멈췄고, 나는 이 얘기가 지금껏 속으로만 되뇌어졌다는 걸 알았다. 이건 입밖으로 꺼내서 사람들과 주고받을 얘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는 그런 얘기였다. 가끔은 자신만의 고통이 필요했다. 자신만의 것이라고 부를 아픔이 필요했다.ㆍㆍㆍㆍㆍㆍ

"그리고 나는 지금 이러고 있어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가끔은 근접하기도 해요. 그리고 가끔, 운이 좋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죠.가끔은."

(438쪽)

존 코널리의,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섬세함과 세심함이 좋았다.

 

345쪽 중간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등장한다.

58, 59쪽에선 마지막 봤을때보다 몸이 불었고, 접힌 목덜미 사이로 땀이 줄줄 흐르는 거구의 사내라고 했었는데...

아내와 딸을 잃은 지 넉달 후라는 설정이 나왔으니까 아무리 길어야 넉달만에 보는 친구이니,

마지막 봤을때보다 몸이 불었고 땀이 줄줄 흐르는 걸로 봐서 여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체구의 남자로 여겨진다.

이때 황갈색 양복이라고 표현되던 것이 345쪽에선 황갈색 정장으로 바뀌어 있다.

일반적으로 양복과 정장의 혼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단벌신사로 표현되고 있어서 단어가 하나로 통일되면 좋을 것 같고,

양복은 남자가 입는 옷이고, 정장은 여자도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느낌이 드니까 말이다.

 

넉달만에 보고 요번 일로는 뜨문뜨문 전화통화를 하다가 본 것일 것이다.
이번 사건이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진 것이 아니니까,

밑의 '처음 만났을때 이후로'는 '지난 번 만났을때 이후로' 정도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 만난건 친구 사이이니 최소한 몇 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수도 있을테고,

몇 년이면 얼굴 살이 빠지거나 찐게 이슈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울리치를 58, 59쪽에선 황갈색 양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라고 표현했는데,

345쪽에선 '젊었을 때는 예뻤고, ㆍㆍㆍㆍㆍㆍ서른 살의 여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앞뒤로 번역이 너무 좋아 번역 상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뭔가 착오가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암튼, 이 부분 때문에 몰입도가 떨어지고...화~악 깨는 건 있다.

처음 만났을때 이후로 그가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살도 많이 빠졌고,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광대뼈가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일 때도 있었다. 문득 몸이 아픈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얘기를 하고 싶으면 울리치가 먼저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는 그를 보는데 제니 오바흐의 시체 옆에서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젊었을 때는 예뻤고, 규칙적인 운동과 신중한 식이요법으로 몸매를 유지했으며,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데도 상당히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던 서른 살의 여자였다.(345쪽)

 

그런 생각을 했다.

타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타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오지랖 넓게 채워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을 욕심내어서도 안 된다.

잔에 찬 다음은 넘치게 마련이다.

두개 다 갖고 싶다고 양손에 쥐고 있다가 넘어지면 코가 깨지듯이 말이다.

 

"나처럼 아파본 적 없죠?" 라고 묻는 이에게,

어떻게 해줄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으면 손 떨고 수긍하는 법도 배워야 하리라.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을 것이고,

잔혹하고 고통스러워서 내 소중한 사람은 공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일도 생길 수 있으리라.

 

색스포니스트 찰리파커는 음악에 대한 넘치는사랑으로, 음을 잘게 나누고 쪼개는 비밥을 창시했다.

음악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어찌되었건 정통에선 변형이다.

음을 그대로 지켜 연주하는 고전이나 정통은 너무 소박하고 수수하다고 하여 밀려날지도 모르겠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나 정통의 입장에서 보면 음을 조금이라도 왜곡 또는 변형시킨 경우,

찰리 파커의, 음악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제대로 된 음악이 아니라고 하여 눈감아 버리기엔, 가슴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수식이 화려한 넘치는 사랑과 공감을 할 것이냐,

소박하고 수수한 사랑과 공감을 할 것이냐, 하는 취향에 관한 문제일뿐...

모두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도 없고, 모두에게 이해되어지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슬프거나 처연하지는 않다.

 

이제, 존 코널리의 '무언의 속삭임'으로 달려 볼까나?

 

 

 

 

 

 

 무언의 속삭임
 존 코널리 지음, 전미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12월

 

 

 

 

 

 

 

 

 

 

 

 

 

페이퍼의 내용이랑 전혀 상관없는 이 곡이 듣고 싶은 걸 보니, 망령 또는 드라큘라의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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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2-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밀려왔고, 그러자 위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픔과 공감이 듬뿍 묻어나는 스타일이군요.
이 글도 그렇구요.

gimssim 2012-02-15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요. 그래서 어딘가 투정부리고 상대는 그것을 받아주어야한다고 생각하죠.
왜? 나는 아프니가.
그러나 몸이 아픈 것만큼 철저하게 개별적인 게 어디 있을까요?
마치 죽음이 그러한 것처럼.

알케 2012-02-1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널리 문장은 묵직하게 '가오'를 잡다가 툭 던지는 유머가..ㅋㅋ "장의사를 고소하기 위해 무덤을 박차고 나온 시체처럼"이란 형용사절에서 빵 터져서 ㅎ 또 루이스와 앙헬커플의 로코식 대사치기도 재밌고..근데 근래 나온 3권 <무언의 속삭임>은 쫌...기대이하였어요..

마녀고양이 2012-02-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실이 그리 슬프거나 처연하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 한다는 사실이...

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잠시, 난 왜 그게 그리 안 되는지 몰라.
글이 쥐어짜면 물기 떨어지겠다,,, 좀 쉬어야 할텐데, 걱정하는 중~ ㅠ

2012-02-15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2-15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에 양철나무꾼님이 힘들 게 읽었다는 게 그런 거였군요! 그러면 나는 그것만 모아서..( '')
저는 뭔가 자극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ㅋㅋㅋ

페크pek0501 2012-02-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위험을 즐기려고 한 것 같습니다. 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데, 이를테면 '인상'을 남기고 싶어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인상. 요란한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38쪽)

- 저도 댓글을 쓸 때 뭔가 인상을 남기고 싶어져요. 요란한 넥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요. ㅋ

 
좌백 무협 단편집 - 마음을 베는 칼
좌백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지금이야 장르소설 매니아라는게 소문이 나서 주변에서 정보도 제공해 주고 책이 생기면 가져다 주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부터 장르소설을 들입다 파지는 않았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여느 내 또래가 로맨스 소설을 읽던 고 2 여름방학  무렵 우연히 읽게된 무협지가 시작이었다.

누가 번역한건지 기억 안나는 삼국지를 누런 서류봉투 종이로 표지를 입혀 갖고 다니며,

틈만 나면(화장실, 버스를 기다릴때, 길을 오가면서도...) 야금야금 읽었었다.

 

그날도 책에 코를 박고 길을 걷다가 열린 창 너머로 누가 끼얹은 물벼락을 맞았다.

물을 버린 곳은 독서실인듯 했다.

사과를 받아낼 요량에서 였는지, 다른 흑심이 있어서 였는지...쳐들어갔으나,

독서실까지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입구 사무실에서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총무 아저씨에게 제지를 당하였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사무실 책상 위에 잠시 놔 두었다가 다시 들고 나오는 수고를 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볼 일을 보고 책을 마저 읽기 위하여 펼치니,

글쎄, 삼국지가 아니라 지금은 제목도 기억 나지 않는 무협지였는데...

슬쩍 들춰보니 너무 재밌는지라 까만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읽었었다.

 

살짝 옆으로 새서...내가 노트 필기에 일가견이 있다.

선생님의 말씀을 밑줄 쫘악~, 별표 꽁약, 돼지 꼬리 땡땡, 

중요한 내용을 뽑아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이고,

그 사이 유기적 연관성을 엮어 기억하기 쉽게 정리한다.

특히 연표나 족보 만들기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노트를 잃어버리고 당황했었을때,

시험은 코 앞이고 노트를 빌릴 곳은 없고, 누군가 CD아저씨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는 동영상 강의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라,

강의 녹음과 노트를 불법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대여해주는 그런 사람을 CD아저씨라 불렀었다.

(이것도 족보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 아마...)

때로는 제대로 된 족보일때도 있었고, 때로는 pseudo족보일때도 있었는데, 불러놓고 보니 내 노트의 복사본이었다.

 

암튼, 그 무협지를 인물관계도 - 족보를 일목요연하게 그려가며 열심히 읽었고,

내 무협지 인물관계도 - 족보에 재미를 붙인 아저씨는 그 후로도 몇 권을 더 빌려주었었는데...

등장인물만 조금 바뀔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에 흥미를 잃어, 그렇게 그렇게 끝이 났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무협지와 여러가지 공통점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한가지는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범상치 않은 숨은 고수나 지존에 대해 떠벌리더라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 없었고,

그래서였는지, 무협 소설이나 무협 영화의 제목도 심심찮게 회자되곤 했었다.

물론 개중에는 무협소설이나 영화 따위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공부만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처럼 김용을 제 2의 참고서 취급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어쭙잖게도 이제 무협소설을 제외한 장르소설을 들입다 판다.

그런 의미에서 좌백이 더 이상 읽을 게 없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적으로 무장하고 실존적 질문들을 던져대는 그의 몇몇 작품은 참 재밌게 읽었다.

그의 단점을 꼽으라면, 장편(아니 대하)소설을 몇가지나 벌여놓고 너무 오래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그의 지병으로 인한 것이 되었든 나름의 사정이었든 간에, 그 기간이라는 것이 독자가 설레이며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넘어섰다.

 

이번 단편 무협 소설집은,

그간 좌백의 무협소설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좌백이라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단편소설집이라는데서 그의 다양한 시도들을 입맛에 맞춰 골라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간 읽은 무협소설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비슷비슷한 줄거리와 내용을 살짝 비트는 것만을 가지고도 그만의 독특한 무엇인가로 만들어내는 묘한 재주가 있다.

 

ㆍㆍㆍㆍㆍㆍ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것도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살인이 무서워서라는 것을. 그는 여태 한 번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못 죽이는 게 무슨 고수냐!"

 

옛적에 고수는 칼을 빼면 반드시 베었고, 손을 쓰지 않으면 모르되 한번 쓰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거두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손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되는 것이었으니, 무술을 배우며 마음을 같이 닦는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간혹 모양으로 배우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다.(14~16쪽)

 

화상이 그에게 맡긴 일은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지방의 토호로 온갖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 하나쯤 죽여도 하늘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에서 해방되는 숱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사람이란 의외로 약한 존재라 적당한 곳을 적당히 찔러 주면 죽게 마련이라고 했다. 삶은 고해요, 산다는 것은 악업을 쌓는 일이다. 사람은 다 서로 뜯어먹으며 살고 있으니,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도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고 했다.(31쪽)

좌백이 추구하는건 무조건적인 권선징악이 아니라...다분히 인간중심, 나 중심적인 시각이다.

무술에 고수인 자가 사람 찌르지 못하는가 하면,

빌어먹고 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살기위해서라면...남을 죽여도 괜찮은가 '제법 진지하게' 묻고 있다.

 

"누가 그래? 어떤 놈인지 몰라도 뻥도 세지. 대개의 무림인은 당신이랑 똑같아. 뛰면 숨차고 땀나지. 담장은 원래 못 뛰어넘으라고 만든 거야. 그걸 왜 뛰어넘어? 문으로 안 들어가고 담장을 뛰어넘는 놈이 정신 나간 놈이지."(73쪽)

개념들을 살짝 비트는 언어유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이게 오히려 재미있다.

담은 못 뛰어넘으라고 만든게 맞지만,

문이 아니라 담장을 뛰어넘는 쪽이 조금 더 무림다운 feel인데 말이다.

 

그는 어쩜 이런 언어 유희를 구사하여 생기는 대립, 강조의 개념을 이용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야수는 이렇게 살생을 하지 않지, 당연히. 놈들에게는 그날 먹을 고기만 있으면 되니까. 사람은 달라. 사람이니까 이렇게 살생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람이니까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죽일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거다."(118쪽)

라고 하는가 하면,

"죽을 놈은 죽어야지요. 요즘 열 걸음 걸으면 죽을 놈 한 놈만 봅니까. 걸음걸음 죽을 놈투성이지요. 마음 같아선 그냥 확!"

"죽 놈과 죽 놈은 다르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면 협객이 아니라 살인마야."(134쪽)

 

죽은 칼이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죽이는 칼이라고 읽을 수도 있지...(172쪽)

 

인자무적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했지. 인자는 무적이다. 참 좋은 말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인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인한 사람이란 즉, 좋은 사람이고, 인격자니까 그에게 적대할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지.(173쪽)

그게 아니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네. 그게 내 생각의 훌륭한 점이지.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 즉, 나는 인자무적이라는 말을 '인자는 무적이다.'라는 걸로 해석했네. '인자는 너무나 강해서 이길 자가 없다.'는 뜻으로. 검객이라면, 인자 검객은 무적 검객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174쪽)

'을'과 '일' '은'과 '일' 한 글자의 차이를 가지고 두드러지게,

또는 '인자무적'이라는 한단어를 가지고 해석의 관점에 따라 큰 차이를 만들어내...글 전체를 관통하는 글쓴이의 입장이 되게 한다.

 

이 책 전체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을 베는 칼'이라고 했을 때 '세치 혀'를 떠올렸었다.

사람의 혀는 때론 뾰족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하고,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가 얘기하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읽어낸 마음을 베는 칼이란 다른 어느것도 아닌 '자기 비하 내지는 자기 기만'이었다.

'자존감'과 '자존심' 경계도 잠시 넘나들었다.

 

펜이 되었든 칼이 되었든 간에,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아야 한다는 전제도 물론이지만,

그와 더불어 도구를 ' 벼릴 준비가 되었나?'를 가늠할 수도 있어야 하겠다.

'잘'이란 '과하지도 하지도 않게' 이다.

흔히 애정이 넘쳐 술을 잔에 넘치게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단편 '마음을 베는 칼'의 경우, 겉으로 눈에 띄는 것이 아닌 자기 내면과의 싸움이다 보니,

스케일이 큰 무협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갈등의 굴곡이 작게 느껴져...좀 맹숭맹숭할 수도 있겠다.

난 비슷한 내용으로 고민해봐서 그런가...제대로 감정이입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르신 자신이 바로 그 칼입니다. 말로, 행동으로 제 마음을 베어 버리셨죠.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궁극적인 검의 경지인 심검에 당했다는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서야 깨달았습니다."(173쪽)

 

ㆍㆍㆍㆍㆍㆍ하지만, 칼이란 뭔가 특별한 게 아닐까. 그릇이나 식칼보다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르다는 의미에서. 크게 보면 무기도 도구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릇과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전문적으로 목숨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 것이다. 무기라는 것은.(260쪽)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본다면, 침은 어떠한가?

얼마전 에이즈도 뜸으로 치료할 수 있다던 구당 김남수의 침사자격증이 허위라는 법원 판결이 있었다.

그렇다면 30여 년동안을 자격증도 없는 사람에게 침을 맞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침은 사람의 몸에 있는 혈(穴)을 찔러서 병을 다스리는 데에 쓰는 의료 기구이지만, 잘못 찌르면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절삭력이나 이런 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기라고 할까, 아니면 공명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ㆍㆍㆍㆍㆍㆍ.칼의 울림이 손을 통해서 척추까지 전해져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 있긴 있더군요. 전통 일본도에는."

울림이 손을 통해서 척추까지 전해져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이런 느낌은, 공명만 된다면 칼 뿐이 아니고 침이나 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요번 좌백의 단편집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는 '살기(殺氣)-남을 해치거나 죽이려는 무시무시한 기운'가 아닐까 싶다.

무사라면 누구나 살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그 살기를 적절하게 갈무리하고 살면 고수가 되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하수가 되는거다.

'마음을 베는칼'의 그 어르신은 살기를 잘 갈무리하여 심검을 구사하는 걸로 묘사되고,

또 사도(死刀)와 활검(活劍)에서 친구 간에 '베고 베이고'는 또 어떻고 말이다.

이러니, 언어 유희를 구사하여 생기는 대립, 강조의 개념을 이용하여 주제를 드러내는...역설의 미학을 제대로 사용한다고 혀를 내두를 수 밖에~

 

易擊胡蝶 難擊落葉

"나비를 베기는 쉬우나 낙엽을 베기는 어렵다ㆍㆍㆍㆍㆍㆍ. 무슨 뜻의 글귀입니까?"

ㆍㆍㆍㆍㆍㆍ

"아, 뭐 진짜 벌것 아닌데. 제 개인적인 무언武言이라고나 할까."

무언이라면 무인이 무술에 대해 깨달은 바를 표현하는 말이다.

 

"왜, 나비는 살기를 감추고 가까이 검을 움직여서 꼬드긴 다음 벨 수 있잖아. 하지만 낙엽은 떨어질 때까지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그러다 보면 다른 생각도 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도 해서 아차 하고 떨어지는 순간을 놓쳐 버린다는 거지. 별거 아니야."(272쪽)

 

내가 일상에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듯한 구절이 있어서 옮겨 보자면 이렇다.

 "대체 도사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장선생

 "능력자가 있긴 하지만 그런 분은 잘 안 보이죠. 하지만 허풍쟁이는 셀 수 없이 많고 사기꾼도 그만큼 많다ㆍㆍㆍㆍㆍㆍ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요."

 윤기자

 "그냥 전통 무술이라고 하면 장사가 안 되니까 거기에 자꾸 신비한 색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군 할아버지 때 보필했던 풍백, 우사, 운사가 쓰던 무술이라고 하는 것도 본 일이 있으니까요."

 "재밌네요."

 곽사범.

 "재밌기만 하면 다행인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으니 문제지.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다 보면 뇌에 산소 부족 상태가 일어날 수 있거든. 이게 단전호흡을 하다가 부닥칠 수 있는 부작용의 원인인 건데, 처음에는 환각 상태에 빠지고 심각하면 죽기도 해. 숨 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도 한 번 체험한 일이 있어. 작정하고 산에 올라가서 백일 수련을 하던 때의 일이지. 산 정상의 바위 위에 앉아 단전호흡을 하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수련도 하던 때ㆍㆍㆍㆍㆍㆍ.근데 하루는 수련을 마치고 밤중에 산을 내려오는데 눈앞에 내가 밟아야 할 곳이 밝게 보이는 거라. 흰 페인트로 그려 놓은 것처럼 점점이. 여길 밟고 뛰어서 저기로 갔다가 그 아래로 뛰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했더니 정말 되는게 아니겠어. 평소 두 시간은 걸리던 하산길이 단 30분 만에 끝났지. 단전호흡이 어떤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어. 위험할 때가 더 많아서 탈이지. 그러니 단전호흡을 시도할 때는 책 보고 혼자 하지 말고 요즘 많이 있는 큰 단체들 있잖아, 거기서 여러 사범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아.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전하니까."

ㆍㆍㆍㆍㆍㆍ

"저, 그 하산법은 그다음에 또 시도해 보셨나요?"

ㆍㆍㆍㆍㆍㆍ

"다리 부러졌지."

웃고 말았다.(274~275쪽)

 

암튼, 이 책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얘기하라면 '고마움'쯤 되겠다.

기존의 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고마웠다면 고마웠달까?

단편이라서, 그의 다양한 시도들을 입맛에 맞춰 골라 읽을 수 있었던 건 덤 쯤으로 여겨도 좋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 호흡이 긴 대하소설 류를 좋아하지만, 완결이 안됐다고 툴툴거릴 일도 없고 말이다.)

 

그대로라는건 발전하고 나아지지 못했다는 의미니까...도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좌백은 아주 복잡하고 자세한 설명은 독자가 머리 아파 대충 건너 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황당무개함을 자랑으로 하는 무협소설이라지만 여전히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김용의 작품들을 예로 들어 보면...비슷한 설정, 비슷한 내용 뿐 아니라 무술도 같은 무술이 두번 등장하지 않는다.

 

'자객열전'을 생각나게 하는 '신자객열전'이나,

'이백'의 '협객행'에서 출발하는 '협객행'이나,

'레베르테'의 '검의 대가' 모티브에서 출발하는 ' 쿵푸 마스터'따위의,

비슷한 설정, 비슷한 내용에서 출발하여 이런 글을 써낸다는 것은 보통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고,

자신감이 있으니까 이런 모험을 불사하는 것임을 이제 난 알겠지만 말이다.

 

매년 하얗게 골짜기며 나무를 뒤덮는 눈이 내린다고 해서,

작년에 내린 눈과 올해 내린 눈이 같지 않고,

어제 내린 눈과 오늘 내린 눈이 같지 않듯이...

어떤 눈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릴것이고,

어떤 눈은 나뭇가지를 덮어 새순을 돋게할 봄눈일 수도 있다.

 

그가 마음껏 벼리고 펼쳐놓으면, 나는 그의 재주를 신비한 눈으로 감상하면 될 일이다.

그러니 그가 잠수한 동안 툴툴거릴게 아니라 같이 아가미를 키워야 하고(이건 아닌가 보다~ --;)

내가 손 놓고 쉴 일이 아니라, 감상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하려나?

아니, 어쩜 그건 눈이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감상은 어쩜 '시간'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잠든 듯했던 여인이 일어나 문밖에 붉은 등을 내걸고 술청 안 곳곳에 있는 초들에도 불을 붙였다. 불빛을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햇살 대신 바닥을 쓸었다.

 

"바람이라. 그래 바람일 수도 있지.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곡식의 생장이나 사람들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존재가 우리니 바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냥 우리가 한번 쓸고 가면 남은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며 사는 거지. 그게 그들과 우리의 차이였던 것이지."

 

그가 구사하는 이런 미문도 당근 매력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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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08 14:15   좋아요 0 | URL
몸과 마음을 같이 갈고 닦기 위해 수영 강습 등록하고 왔어요. 몸이란게 신기하죠. 30년 만에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갔는데, 30년 전에 배운 그 영법(자유영)이 단번에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 여름엔 정말 30년 만에 수영복 입고 바닷물에 한 번 들어가 보려는지 어쩌는지.. 흐흐

sslmo 2012-02-14 15:03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전 한때 스킨 스쿠버가 엄청 배우고 싶어서...잠실 롯데월드 수영장을 들락거렸었어요.
거기 한쪽 구석에 스킨 스쿠버 전용 풀이 있잖아요.
열쉬미 노력했는데...폐활량이 넘 작아 중도포기했다는~ㅠ.ㅠ

저, 물이랑은 안 친한데...
잠수한다는 사람 찼으러 다니려고...아가미 키우는거, 이거 하난 잘할 자신 있습니다여~^^

올 여름엔 님 계신 곳으로 수영복 한장만 달랑 들고감 되는 거예요?^^

2012-02-0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2-14 15:13   좋아요 0 | URL

숲노래 2012-02-08 17:45   좋아요 0 | URL
좋은 바람
좋은 마음
좋은 하루
즐거이 읽은 책으로
따사로이 보듬으소서~

sslmo 2012-02-14 15:20   좋아요 0 | URL
된장님의 댓글을 읽다보니,
저도 뭔가 '좋은'이랑 '~소서'따위를 넣어서 '덧글'을 달아야 할 듯~!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복 많이많이 받으소서~^^

2012-02-08 20:44   좋아요 0 | URL
흠. 눈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 인용문이 마음에 특히 남습니다.
저도 이런 아름다운 게 좋아요..^^

감상은 '시간' 문제. 그렇게 오래도록 기꺼이 기다릴 작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 작가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꾸준히 책을 내 준다는 게 전제된, 그런 기다리는 상호 관계.. 좋아요.^^) - 전 가지지 못했지만요.

아가미를 키워 같이 잠수할까 하는 말에 ㅋㅋ-.

*참, 저 좌백님 알고 있었어요. 책은 안 읽어봤고.. 진산마님의 삼돌이이시죠...ㅎㅎ (인터넷에 대유행한 진산님의 <마님 되는 법> 알고 계시죠?!)

sslmo 2012-02-14 15:40   좋아요 0 | URL
흰 눈에 관한 얘기는 인용문이 아니고 제 글이고요~^^
마지막 인용문, 바람 얘기 좋죠?

전 요즘 바람이나 햇살 따위 경계나 영역 없이...맘껏 오갈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저도 당근 진산 마님, 알고말고요~^^

재는재로 2012-02-08 19:25   좋아요 0 | URL
좌백은 이책말고 대도오 후속작 흑풍도하4권이후 책이 안나와서 4권마지막에서 대도오가 등장하는데 이케 책이 않나오서 책에 유성탄과 일행의 후일담이 나오죠 드라큘과 싸우는 역시 무인은 무로 자신을 나타내고 작가는 글로 자신을 나타내는 요즘의 양판과는 틀린 사람냄새 물씬한 무협의 향기가 그립어요

sslmo 2012-02-14 15:56   좋아요 0 | URL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무협의 향기라...저는 '극악서생'이요~^^
1부는 열쉬미 읽었는데...2부는 못 읽었네요~ㅠ.ㅠ

마녀고양이 2012-02-08 19:44   좋아요 0 | URL
세상에.. 이제는 무협소설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자기한테 두손 두발 다 든다. ^^

하기사 나도 김용 읽느라 얼마나 밤을 지새웠는지, 김용 소설 출간된 것은 몽땅 다 읽었는데.
지금두 영웅문 1부 2부는 샀는데, 금전적 사유로, 3부와 녹정기, 천룡팔부를 못 사고 손가락 빤다눈.
아.. 갑자기 김용 생각난다, 사고 싶다.

sslmo 2012-02-14 15:59   좋아요 0 | URL
내가 전공이 무협이었다고 얘기했을텐데...
부전공이 족보 그리기~^^

김용, 다 갖고 있지롱~
줄 수는 없고, 빌려 줄수는 있어.
비디오도 있는데...안 튼지 한참 돼서 화질은 장담 못한다는~ㅠ.ㅠ

oren 2012-02-08 20:42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인용문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부분이 이 글의 제목과 딱 맞아 떨어지는군요..ㅎㅎ
* * *
"나도 젊었을 때는 대문에서 초인종이 울리면 "야, 무슨 일이 있으려나 보다"하고 기대했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의 참모습을 알게 된 뒤로는 똑같은 초인종 소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아, 무슨 골칫거리라도 생겼나?"하고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 쇼펜하우어

sslmo 2012-02-14 16:08   좋아요 0 | URL
oren님을 보면 항상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이,
어떻게 적재적소에 적절한 구절들을 찾아다 넣을 수 있는 것인지, 원~ㅠ.ㅠ

책 한권을 그냥 읽기도 힘든데, 이렇게 읽기는 더더욱 힘들 것 같습니다여~^^

비로그인 2012-02-08 21:39   좋아요 0 | URL
무협지와 학교 때 노트 이야기, 재밌어요. ^^

좌백은 글을 잘 쓰는군요. 아니면 나무꾼 님의 해설을 따라 읽어서 그런가요? 저도 마침 얼마 전에 '말로도 사람을 벨 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한 번 베이고 나면, 피해야겠지요? ^^;;

sslmo 2012-02-14 16:31   좋아요 0 | URL
전 좌백 같이 온기가 느껴지는 글이 좋아요.
님과 제가 같이 좋아하는 애니 프루나, 재스퍼 포드 같은 경우...다 따뜻하잖아요.
manci님의 글도 예전엔 그랬는데~~~
요즘 통 볼 수 없으니...이사 잘 하시고 빨리 컴백하세요.

한번 베일때 아프지, 두번째부턴 내성이 생기겠죠?
곪고 덧나지 않는다면 흉터나 옹이는 때론 영광스런 훈장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요.
넘 교과서 같은가요, ㅋ~.

알케 2012-02-09 10:53   좋아요 0 | URL
좌백의 문장 좋죠. 저도 좌백의 다음 작품 기다리다 늙어죽을 기세 -.-;; 제 기준 좌백의 명작은 <대도오> <비적유성탄>.. 흠...제가 생각하는 무협 중단편의 백미는 이재일의 <칠석야>입니다. 언제 기회되시면 이재일의 작품들 장편 <쟁선계> 같은, 보시길 권해요. 트루기..캐릭터..서사구조가 완성도 높죠.

sslmo 2012-02-14 16:38   좋아요 0 | URL
아, 이재일 기억해 둡죠.
전에 '제프리 구루물 유누핑구'때도 엄청 바람만 잡으시고 트랙백 안거시는 바람에 땡스투 없이 CD구입했습니다.
이재일 찾아보니, 칠석야 절판입니다.
트루기, 캐릭터,서사구조 완성도...요번에도 엄청 바람만 잡으시고, 쫌 밉습니다여~ㅠ.ㅠ

쉽싸리 2012-02-09 11:32   좋아요 0 | URL
소싯적에? 무협지 참 많이 읽었는데요. 그때는 만화방에 무협지도 함께 취급했지요. 손바닥 정도 크기에 세로쓰기였던 것 같아요. 와룡강(생?)이라는 필명의 작품을 많이 보았죠.
좌백의 것은 만화로 나왔던 작품 몇 개를 본것 같아요.

sslmo 2012-02-14 16:48   좋아요 0 | URL
전 만화방에는 못가봤지만 손바닥 크기 세로 쓰기 무협지는 알아요.
이쯤이면 쉽싸리 님과 제 소싯적이 같은 때인가요?^^
좌백이 만화로도 나왔군요?
전 글로만 읽어놔서리, ㅋ~.

루쉰P 2012-02-09 12:50   좋아요 0 | URL
루쉰P야, 루쉰P야! 뭐하니? - 죽었니, 살았니? 왠지 제목이 저를 부르는 듯 해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ㅋㅋ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 입니다. 여전히 양철댁님이 보내주신 책을 노려보며 손을 델 까 말 까 하고 고민 중이며, 어둠이 찾아오는 관리사무소 안에서 스스로의 그림자는 어디에 있을까? 앉아서 사색을 하며 살아 있음에도 죽음을 느끼고, 죽음 속에서 삶의 기척을 찾아내고 말리라 결의를 하는 하루 하루의 일상입니다. 음...너무 멋있게 썼네요.

저도 무협지는 정말 많이 읽었죠. 하찮은 자신에 비해 무협 소설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하찮았으나 점점 강해지는 그런 모습을 읽으며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저도 읽지 않고 있지만, 양철댁님의 글을 읽으며 자신을 벗어나려 했던 제 모습을 발견하네요. ^^ 전 걱정 안 하셔도 될 정도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게 교주의 능력이지 않겠습니까! 교주라고 하면 이 정도의 상처는 쪽팔려서라도 버티고 일어나는 법. 무림의 고수는 아니어도 이 정도의 능력은 있는 교주이니 걱정마삼. ㅋㅋㅋ

인생은 무협지처럼 저에게 절세 무공을 전해 주는 사람은 없으나 무협지처럼 스펙터클 하니 이 몸 하나 건사하지 못 하겠습니까? ㅋ 오늘도 하루를 보내며 절찬리 무공 연마 중입니다. ㅋㅋㅋ

sslmo 2012-02-14 16:58   좋아요 0 | URL
ㅎ,ㅎ...역쉬 교주님이셔요.

루쉰P야, 루쉰P야! 뭐하니? - 죽었니, 살았니?
이 다음 버젼도 알고 계시죠?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 쿵짝~!

제겐 절대무공도, 무림의 고수도, 능력 있는 교주도...다 필요없는거 알까요?
치열하게 몸무림치시는 중이어도 괜찮고, 몸무림치시다가 넘어지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그렇게 그 자리를 지켜주고 계신것만으로 족할 따름이니까요~^^

2012-02-09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3-17 14:37   좋아요 0 | URL
좌백은 무엇인가 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허무함 가운데 통쾌함이랄까 아니면 통쾌함 속의 허무함이랄까? 좌백의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좌백스러운 작품을 꼽자면 전 천마군림을 꼽습니다. 다만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데 미완으로 머물러 있죠. 구룡쟁패의 시나리오 작가도 했었습니다. 좌백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 회사에서 잘리기를 원했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좌백이 너무 게으른지라, 그의 부인도 그다시 생활비로 구박을 하지 않는 편인지라 경제적인 위기와 배고픔을 겪어야 글을 쓴다는 것이었죠. 아마도 꽤 오랫동안 천마군림은 꽤 오랫동안 7권이 안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몸의 70%를 물이 차지한다는데,

요즘 같아선 내 몸의 전부가 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같다.

물먹은 하마내지는, 잔뜩 습기먹은 구름 같아서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내 '주르륵'내지는 '후두둑'이다.

 

명절이 지나고 같이 다니시는 할머니 세 분이 오셨다.

그 중 한분이 곱게 포장된 콩고물에 팥앙금이 들어간 떡 두팩을 내놓으셨는데,

밝은 눈으로 그냥 보기에도 곰팡이가 펴 있었고 살짝 랩을 걷어보니 쉰내가 났다.

난 그냥 '잘 먹겠노라'고 하고는 받아 두었다.
할머니 얼굴이며 팔뚝을 쳐다보니 불긋불긋한 것들이 나 있길래,
서둘러 합곡,태충 잡고 은백 대돈 사혈하고...그때까지는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하였다.

다른 할머니 한분이 출출하니 아까 준 떡을 나눠 먹자고 하시는 거였다.

난 깜짝 놀라 '떡은 명색이 병원인데...음식 냄새도 나고 하니 선식이나 한잔씩 대접하겠다'고 하는데,

그 할머니 손도 크시지, 어디선가 나머지 두 할머니 몫까지 주섬주섬 꺼내놓으시는거다.

 

난 어쩔 수 없이,

"엄마, 떡이 좀 상했더라. 그래서 안 내어놓으려고 한건데..."

라고 하자,

"냉장고에 들어가 있던 떡이 왜 상하느냐?

 가지고 와라, 어디 곰팡이가 폈느냐?

 이게 깨지, 어디 곰팡이냐?

 난 다 먹었다, 먹어도 암치도 않더라.

 나를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망신을 줄 수가 있느냐?"

 고 하시고는 두 할머니께 마저 나눠주시며 쌩하니 나가버리셨다.

 

눈물, 콧물 흘려대고 있는데...

햇수로 7년, 꽉 채운 6년을 알고 지내는 분이 들어오시길래 여차여차 저차저차 설명을 드렸다.

도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우는 이분 曰,

"서선생, 도 닦게 해줬으니 그 환자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거네..."

하셨다, 에효~ㅠ.ㅠ

 

다다음날인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어김없이 할머니 세분이 같이 오셨다.

내가 서둘러 처치를 했던 상한 떡의 장본인인 그 할머니는 거의 가라앉아 있었고,
나머지 할머니 두 분의 얼굴엔 빠알갛게 꽃이 피어 있었다.

얼굴에 핀 꽃을 보는데...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There is no end of things in the heart.

언젠가 지인이 안부 글 중에 같이 주신 구절인데, 마음에 와닿아 오래 간직하고 있는 구절이다.

에즈라 파운드라고, 미국의 시인인데 이백의 시를 영역해서 알려졌나 보다.

저 구절이 이백의 시 어느 한구절쯤 되나본데,

한동안 찾아보려고 하다가,

저 말의 의미를 어느새 '내 안에서 나化'하였기 때문에, 이백을 찾는게 더 이상 무의미하다 싶어져 그만두었다.

 

사는게 힘들면 얼마나 힘들며, 쉽다면 얼마나 쉽겠는가 말이다.

그 할머니가 살아오신 여든 여덟 해의 삶에 미루어 앞으로 살아갈 몇 년, 길어야 십몇 년은 덤일 수 있다.

내 생각에 망신이었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망신이었다고 해도...그게 목숨보다 대단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 할머니에게는 목숨만큼, 또는 목숨보다 중요한가 보다.

마찬가지로 마흔두해를 살았으며, 앞으로 몇십 년은 더 살아야 할텐데,

여든여덟 해를 살아오신 할머니도 목숨을 걸고 지키시는 무언가가 있는데,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써본 적이 있는가?

꼭꼭 닫아걸고 있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라치면, 간신히 자리잡은 평정이 깨질라치면...

그걸 지키려고 울고불고 악을 쓰는거 그거 하나는 잘하는거 같다.

 

'no'에는 '아니다, 없다'의 의미도 있지만,

'~을 넘어서는' 의미의 'over', '~을 극복하는' 의미의 'get over', '~을 초월하는' 의미의 'beyond' 등의 의미도 있는것 같다.

이런 의미들은 하나같이 나에겐 버겁기만 하다.

 

지난 가을 '왕따' '스따' 때도 느낀 거지만, 나도 한참 잘못 됐다.

 

참, 어쩜 이분도 나를 향하여 '뭐, 이렇게 지 멋대로인 기집애가 다 있나?'하고 속으로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꺅~"소리만 안 냈을 뿐이지 좋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여기저기 수선내며 들쑤셔 놓고,
블로그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때맞춰 안부도 챙기더니...다 잠깐이구나...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여...하던 것들을 멈춘 것은 아니다.

단지 에즈라 파운드를 내 맘대로 해석했기 때문에,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않을 뿐이다.

늘상 더듬이의 한쪽을 그쪽을 향하여 열어두고 있고,

겨울이면 산에 못 다니시겠지 싶어,

아프시다던 손가락 관절이 더하지 마시라고 한번씩 염력을 날려드리기도 한다.


가끔 가뭄에 콩나듯 안부만 전해듣는데, 그만하면 됐다.

 

'no'를 혜민스님 버젼으로 해석해 보자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더라.

언젠가 이 동네 누군가 내게 해준 얘기랑 똑같은 얘기다.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난 정말 말을 많이 아낀다, 글은 좀 덜하다.

말을 많이 한 어떤 날은 주워 담고 싶을 때도 있다.

혜민스님은 이런 말씀도 하신다.

음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음표와 음표 사이이 거리감, 쉼표때문입니다.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과 말 사이에 적당한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쉼 없이 달려온 건 아닌지,

내가 쉼 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돌아봐야 합니다.

 

입에 지퍼가 달렸으면 싶을때도 있다.

또는 텔레비젼처럼 사전 심의제가 있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할 우려가 있으면 X-box 처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X-box 처리가 뜨는 순간, 눈치 빠른 상대방은  X-box의 내용 자체를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운전을 잘 못하는 사람은

운전 중에 브레이크 페달을 자주 밟습니다.

대화를 잘 못하는 사람은

대화 중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브레이크를 자꾸겁니다.

 

'지식은 말하려 하지만, 지혜는 들으려 합니다!'

이건 내가 자신 있는 부분이다.

상대방의 얘기를 끝까지 듣는 것.

근데 문제는 얘기의 행간을 파악하려 한다는 거다.

환자들이 나에게 말 안하고, 말 못하는 사이의 것들을 읽으려고 애쓰다가 정작 핵심을 놓치기도 한다.

덕분에 지혜로운 자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때론 지지리 오지랖이 되기도 한다.

"목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듣고 싶소. 말들 사이로 흐르는 음악 말이오." 


짐작했던 대로 그녀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그가 아는 이탈리아 여자들은 모두 그러했다. 그녀는 음절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느릿느릿하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리듬을 지닌 말투였다. 

나도 이런 목소리를 지닌 여자이고 싶다.

말들 사이로 음악이 흐르는...언제 말을 하고 언제 쉬어야 하는지, 때를 잘 아는 여자.


음절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또박또박 발음하는, 느릿느릿하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매혹적인 말투는 또 어떻고...

이건 앞의 것은 잘하면 가능할 것도 같고, 뒤의 것은 '매혹'에서 걸린다.

대학시절 방송국 PD로 합격했는데, 아나운서로 알고 공들이려던 선배가 몇 있었고, ㅋ~.
아직도 전화하면 너 말고 어른 바꾸라는 소리를 듣는걸 보면, 매혹이랑은 거리가 한참 멀다.

 

목소리 관련 생각나는 여자는 없고, 생각나는 남자는 있다.

내가 아껴두고 야금야금 꺼내 듣는 목소리는 '강승원'이다.

강승원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김광석이 부른 '서른즈음에'를 만든 사람, 오리온 초코파이 정'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를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그제서야 '아하~'한다.

요즘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음악감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조금더 알고 있는 걸 읊어 보자면, 서강대 물리학과를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산하지대가 참빛이다''과학으로 세상보기'를 쓴 양형진님도 물리학과 출신인데, ㅋ~.

대학가요제 '저 너머 빈들에 서서'를 부른 '에밀레'와 같은 이름의 '에밀레' 동아리 '창단멤버'이다.

예전에 술먹으러 홍대 앞에 자주 출몰하였었다, 요즘은 내가 바른 생활을 하여 모르겠다, 끙=3

 

암튼 난 이 분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no의 또다른 뜻들을 자연 터득하게 된다.

날 도닦게 해주는 건 그 같은 환자일지 모르지만,

날 도통하게 해주는 건 이런 경구를 주시는 분, 이런 목소리의 음악 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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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우리 동네 사람들

                    

이 한마디 말로 내 마음 전할 수 있을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생각없이 떠나보낸 수 많은 기억들
이제 잡으려 하여도 난 여기에 서있고

 

하나 둘 셋 넷

 

나의 분주함에 잊혀진 모든 이에게 미안해
커다란 선물 상자 안에 서있는 나에게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미안해
내가 떠나보낸 나를 떠난 여인에게도

 

나의 미모와 총명함 순진한 몸동작까지도 미안해
그 안에 울고 있는 나의 다른 모습에게도
내가 알고 있는 모른 척 했던 이에게 미안해
그러며 태연하게 거짓을 말하던 나에게도

 

세상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시간은 우릴 떠밀어내고
오늘도 습관같은 실수로 떠나가는 너를 바라보고 있는데

(간주)

 

어젯밤꾸었던 꿈들이 생각나질 않아
재미없는 일들로 매일 바쁘다 해
거울 속 내 모습 낯설게 느껴져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나를 생각하며
너의 눈에 비친 내 모습 바라보며

오늘도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되었나 봐

모두들 어쩌다 지금의 내가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
내 목소리에 가리운 속삭임들 까지도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고마워
내가 떠나보낸 나를 떠난 여인에게도
내가 떠나보낸 나를 떠난 사람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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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1-29 21:09   좋아요 0 | URL
에밀레, 강승원, 저 빈들에 서서...저 다 알아요.
혜민 스님은 요즘 방송 많이 타시더군요. 저 책은 저도 언젠가 구해서 볼 것 같네요.

sslmo 2012-02-14 17:17   좋아요 0 | URL
이렇게 반가울수가...
결론은 혜민스님까지 다 겹치는거네요~^^
이 댓글을 조금만 일찍 눈여겨 봤더라면, 혜민스님 책 구하시기 전에 보내드리는 건데 말예요.
다음을 기약할 밖에요~

blanca 2012-01-29 21:33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으니 저도 눈물이... 저도 나이 들어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대체 얼마 만큼 연락하고 챙겨야 하는지 그 감을 익히느라 헤매는 중이랍니다. 저는 혼자 목소리 녹음해서 우연히 들어봤는데 예전처럼 오그라들지 않아서 신기하더라고요. 자기가 자기 목소리 들으면 왠지 그 견딜 수 없는 느낌이 있는데 오늘 들으니까 안 그렇더라고요. 양철나무꾼님 목소리 정말 궁금한데요^^

sslmo 2012-02-14 17:28   좋아요 0 | URL
한참 전에 내가 쓴 글인데...댓글을 달기 위해 다시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후두둑이네요.
오늘은 참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네요.
노력해도 볼 수 없는 사람들,
노력해도 보기 힘든 사람들,,,도 있고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 대체 얼마 만큼 연락하고 챙겨야 하는지...란,
뵐 수 있을때, 살아계실때...'한번이라도 더'가 가장 적당한 기간인데 말예요.
전 blanca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2012-01-29 23:38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문장, 마음에 넣어두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서 "비밀이 있는 사람이 부자다." 그러던데, 이때의 비밀은 이런 비밀일 거 같네요.^^
no로 넘어서기, 개념은 좋아요. 실천이 어려워도.

여하튼 왠지 애틋하고 그런 글이에요.

sslmo 2012-02-14 18:08   좋아요 0 | URL
여기서 비밀은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이 버젼의 말하지 못하는 비밀 아닐까요?

갑자기 이 노래 듣고 싶네.
이 노래는 김 광석 보다는 유준열 버젼이 좋은 유일한 곡인데...
못갖춘마디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하는 유준열 목소리 듣고 있으면, 아슴아슴해 지는데...
찾아봐야겠당~^^


oren 2012-01-30 01:17   좋아요 0 | URL
글을 참 잘 쓰시는 양철나무꾼님께서 '말' 때문에 겪는 고충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많이 한 어떤 날은 주워 담고 싶을 때도 있다." "입에 지퍼가 달렸으면 싶을때도 있다" "근데 문제는 얘기의 행간을 파악하려 한다는 거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말'에 대한 두어가지 아포리즘이 떠오릅니다.

* * *

"말은 야수다. 한 번 우리를 탈출하면 다시 집어넣기 어렵다. 또 말은 마음의 맥이다. 현명한 사람은 맥을 짚어 건강을 가늠하고, 진지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듣고 마음을 추측한다."
- 쇼펜하우어

* * *

"모든 말은 결핍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지 못한다. 모든 말은 과잉이다. 차마 전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도 전하게 된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sslmo 2012-02-14 18:12   좋아요 0 | URL
두루 두루 고맙습니다, 꾸벅~^^

순오기 2012-01-30 05:35   좋아요 0 | URL
다들 그렇게 상처도 받고 도로 주워담고 싶은 말도 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요?
그래도 나이테가 굵어지면 점점 무뎌지기도 하는거 같고...
음악을 들어도 나는 모르는 목소리지만 잘 들었어요.

sslmo 2012-02-14 18:13   좋아요 0 | URL
제가 왕 사랑하는 목소리예요.
님도 사랑해주시면 좋겠어요~^^

잘 지내시죠?^^

2012-01-3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0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2-02-14 18:19   좋아요 0 | URL
ㅎ,ㅎ...이런 아부성 칭찬이라...
이런 말, 백번 들어도 싫지 않은걸요~^^

아이리시스 2012-01-31 01:53   좋아요 0 | URL
말이 많아서 좋을 게 없지만 너무 없는 사람도 답답하잖아요.
결국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면 좋겠는데,

양철나무꾼님,
제 책선물 받아주세요.
어떤 게 좋으세요?^^
거절하시면 저 울거예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sslmo 2012-02-14 18:22   좋아요 0 | URL
내가 한번 아직 손도 못대고 덩치로 쌓아놓은 책들을 인증샷 찍어 올려야쥐~ㅠ.ㅠ
책 선물, 나중에 받으면 안될까요?????

아이리시스님, 우는거 한번 봐야지~
메롱~=3=3=3

잘잘라 2012-01-31 02:10   좋아요 0 | URL
난로처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예전엔 이런 말이 싫었어요. 뜨뜻미지근하게 그게 뭔가 싶어서요. 차든지 뜨겁든지 확실한게 좋다 했지요. 나이가 들었나봐요. 이젠 이런 말이 반가워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sslmo 2012-02-14 18:34   좋아요 0 | URL
전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서 눈물 찔끔거리면서 마시느냐,
식도록 기다렸다가 숭늉 마시듯 후룩 마시느냐 처럼요.

기호의 문제이지, 최선이나 차선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근데, 님과 전 넘 가까운건가요, 아님 넘 먼건가요, 아님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건가요?^^

마녀고양이 2012-01-31 14:09   좋아요 0 | URL
ㅋㅋ, 자긴 '혀'가 문제인거야,
말할 때의 '혀'가 아니고, 먹을 때 '혀' 말이지....
먹을 때 예민해서 그래, 조금 쉬어도 잘 먹는 사람들 있다니깐.. 며칠 지난 케익도 그렇고.. ^^

그래서 그 할머님들은, 모두 얼굴에 붉은 꽃이 나셨단 말이지....
참 멋지다, 그 할머니들... 흐흐.

sslmo 2012-02-14 18:37   좋아요 0 | URL
요즘 세상에...울긋 불긋 곰팡이 핀 떡을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내가 곰팡이 핀 치즈는 얼마든지 먹어줄 수 있어.
자기도 먹는 혀, 한 예민하거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결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ㅠ.ㅠ

2012-02-01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는재로 2012-02-06 21:12   좋아요 0 | URL
ㅎㅎ 말한마디 잘못했다 당한적있죠 술자리에서의 말실수는 특히 후배한테 10만원정도 ㅠㅠ 말하고나서 수습도 못하고

sslmo 2012-02-14 18:48   좋아요 0 | URL
술자리에서의 말실수라...
전 배시시 해시시...웃음도 많아지고 말도 많아져요.
웃음은 어찌해보겠는데, 말은 담날 생각나지도 않고 영~수습불가더군요~ㅠ.ㅠ

페크pek0501 2012-02-07 12:50   좋아요 0 | URL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 이게 어렵죠.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 같아요.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되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런 것 같아요.
마치 풍선처럼요... 너무 껴안으면 풍선 터지고, 너무 허술하게 안으면 풍선이 날아가고... 그러니 알맞게...
아휴, 어려워요.ㅋ


세실 2012-02-12 10:42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늘 20대 인가봐요. 친구앞에서 무안 주었다고 질책하시는걸 보면.....
그냥 쿨하게 "어? 내눈엔 안보였다. 버리자" 하실수도 있을텐데....

평소 이해가 되던 딱딱 끊어내는 듯한 투박한 친구의 말투가 가끔 거슬리는거보면 저도 아직 멀었나봐요.
 
미세레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오히려 그럴때 감동한다.

진수성찬이나 고량진미가 아니라,

내 식성과 양을 파악하여 입맛을 돋구는 음식을 안성맞춤하게 내어,

밥풀 한톨, 국물 한방울 허투루 남기지 않게 하는 그런 상차림일 경우.

상 위의 그릇이란 그릇은 말끔히 비우게 만들었을때.

산해진미라도 내가 못먹는 음식이이어서,

예의상 젓가락으로 몇번  깨작거리다 마는 경우라면 도무지 감동을 할 수가 없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장르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좀 잔인하다 싶은건 잘 읽지 못한다.

그게 영화라면 좀 더 심각해지는데, 시각적 잔상이 너무 오래 남아 붙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읽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검은선'으로 만났다.
시각적 잔인성이나, 반전, 충격적인 요소 모든 면에서 '검은선'이 더 심했다.

 

요번에는 좀 덜하다.
그리고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장르소설만의 어떤 강렬한 한방을 원하는 사람의 기대에 살짝 못미칠 수 있겠지만,
그랑제의 매력을 아는 경우라면, 이 작품이 best는 아니어도 흠뻑 빠져 들 수 있다.

내 경우, 이세욱 님의 번역이라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문학작품을 만난 듯 설레였고,
두권으로의 분권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문학동네의 출판 기획력 또한 흠잡을 곳 없었다.

이젠 블렉펜 클럽 시리즈라면 망설이지 않고 골라도 될 것 같다.

이세욱 님의 학문하듯 공들인 번역, 문학동네의 출판 기획력, 장르소설로써의 가독력...

이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물론 이세욱 님의 손을 번쩍 들어주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의 번역이었더라면 아무래도 그랑제만의 독특한 매력을 제대로 맛보기 힘들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 번역본까지 참고하시는 걸 보고,

이 분의 실력(실력을 평가할 깜냥이 안되는 고로)이 아니라 노력과 열정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랑제의 前作 두 작품을 번역하셨던 역자 이세욱 님은,

이번 작품에서도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면서도 그랑제만의 독특한 작품성을 제대로 살리고 전달하기 위하여,

작가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책 속의 인물들이 움직인 공간들을 실제로 방문하여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종교와 음악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여 출판사 온라인 카페에 올려 놓기도 하셨다.

종이로 만든 책 밑에 번역자가 주석을 다는 기존의 방식이,

소설에 불쑥 개입하여 서스펜스를 감소시키게 될까봐... 출판사 온라인 카페를 이용하셨단다.

근데 이건 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 같아 좀 서운해지려한다.
책 하단의 주석이 꺼려진다면 책 뒷면의  몇장을 할애하는건 어땠을까?
책을 두권으로 나눌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화보집이나 미세레레 CD를 사은품으로 만드는 건 어땠을까?
이런 시청각 자료가 아쉬웠다.

암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 것들에 이 책이 가리워진다면 그건 더 아쉬울 그런 책이다.

 

프랑스 소설이다.

파리의 아르메니아 성당에서 벌어진 독일계 칠레인 성가대 지휘자의 살인사건을 다룬 종교와 음악을 넘나드는 소재이다.

 

위의 두 전제만으로도 독서의 방향 잡기가 살짝 혼란스러웠었다.
요번엔 도대체 무얼 갈등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거지?

이념간의 갈등인가, 아님 종교간의 갈등인가, 그것도 아님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 간의 대립인가?
때문에 흠뻑 담금질하기가, 감정이입하기가 좀 머뭇거려졌다.
작가는 이런 문화적 이질감을 염두에 두고 배려한 듯, 아주 세세하고 작은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배려들은 개연성이 되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다 보니 만연체가 되어버려 자칫 늘어지고 지루한 감마저 들었다.

(난 어찌되었든(?) 장르소설의 생명은  긴장감과 급박함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인가 보다~ㅠ.ㅠ)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런 자세한 설명 때문이 아니라, 갈등의 경계가 모호한데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두형사(한 번도 신분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과 고통을 품은 카스단과 마약을 투여하면서라도 잊으려 애썼던 트라우마를 가진 볼로킨)가 등장하는데 그럼 그들은 善인가?
결국 惡이 파멸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악은 완전 사라지는 것일까?
본인도 모르게 악을 행사하는 그 어린 합창단원은 악인가, 선인가?

그리고 과거 악을 경험하고 악에 충분히 노출되었던,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의지로 악에 대항하고 있는 두 형사는 악인가, 선인가?

 

내가 기실 궁금한건, 두 형사와 본인도 모르게 악을 행사한 어린 합창단원의 지금이 아닌 '미래'이다.
장르소설을 읽다보면, 간혹 모든 인간이 통째로 편먹고 외계생명체나 로봇과 갈등과 대립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들 사이'에서 국가나 종교나 이념적 이해관계에 따라...갈등과 대립을 하고, 동지나 적이 되기도 하며, 선악을 나누기도 한다.

이 선악을 나누는 차이는 대단한 것이 아닐 때도 있으며, 때론 아주 사소하기도 하고, 심지어 경계선에 있어서 구별이 모호한 경우도 있다.

 

선과 악은 낮과 밤, 또는 빛과 그림자이다.
낮이 없으면 밤이 없듯이, 선이 없으면 악은 존재 할 수가 없다.
이렇듯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태인을 학살 했다고 해서 극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구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자기를 안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약탈, 강간, 살인하라고 하고...심지어는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극악하다고 하는 히틀러의 만행과, (비록 구약에 기록될 뿐이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하고 선하신 것으로 알고있는 하나님이 행한 업적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기 때문에 한가지 기준이 필요하겠다.
선과 악은 시대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며, 또 인간의 선악은 '인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가곡 '미세레레'에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를 떠올리다.

 

'미세레레'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가 작곡한 성가곡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란다.

예전에도 몇번 들어본 적이 있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아서 그런지...항상 음악이 귀를 비껴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터라,

성가곡 한곡으로 이런 소설을 만들이낸 그랑제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주의깊게 듣다보면 감동과 매력의 요소가 여럿 있을테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여자인 나도 내기 힘든 곱고 높은 미성 정도였다.

여성이 금지되었던 당시 교회음악에서 이처럼 높은 음이 사용된 것은 뛰어난 카스트라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는데...그렇게 본다면, 자신의 성을 제대로 발현하고 살지 못하는 것은...그것이 제 아무리 신을 향한 그것이라 할지라도,

더우기 자신의 성에 눈을 뜨기 전의 소년들이어서 '불쌍히 여기소서'가 꼭 그들에게 맞춤한 것처럼 느껴졌다.

성가곡 '미세레레'에서 영감을 받아 씌여진 소설 '미세레레'또한, 그래서인지 변성기를 거치기 전 소년들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수단이자 도구가 된다.

이쯤에서 생각나는게 칼 오르프(CARL ORFF)의 카르미나 브라나(Carmina brana)이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레'가 종교적인 음악이라면,

그 무렵 음악을 했던 칼 오르프(CARL ORFF)는 유럽을 짓누르고 있던 종교의 권위를 마음껏 조롱하는 음악을 했다.

 

카스단은 곡명과 작곡자 이름의 대비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뜻의 미세레레라는 제목은 비통한 느낌을 주는 데에 반해서 알레고리라는 이름은 명랑함, 축제, 환희를 연상시켰다. 

 그때 갑자기 헤드폰에서 아주 높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목소리. 그 부드러움이 너무나 기이하고 강렬해서 듣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깨뜨리고 순식간에 목이 메게 하는 목소리. 누구도 따라 올라갈 수 없는 높이에 다다른 소년의 목소리. 마치 세상 위로 솟구치듯이 화음들에서 떨어져나가 아주 높은 선율을 따라가는 목소리.

 카스단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망인의 집에서 한밤중에 헤드폰을 쓰고 외과용 장갑을 낀 채로 바닥에 앉아 눈물을 흘릴 판이었다.ㆍㆍㆍㆍㆍㆍ레지스 마주아에라는 어린 성가대원의 힘이었다. 소년은 오로지 목소리 하나로 듣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슬픔을 되살리고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낸 것이었다.(1권/73쪽)

 

미세레레- 번역과 편집에 대하여


번역의 훌륭함은 앞에서도 얘기했었고, 옥의 티를 살펴 보겠다.

나무딸기 빛깔의 모조가죽(1권/11쪽)

 raspberry는 라즈베리로 적어주면 되지 않을까? '나무딸기'가 오히려 어색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맞춤법, 외래어 표기 용례집'일반 용어'참조) 

 

"그래, 고막과 가운데귀를 뚫었어.

ㆍㆍㆍㆍㆍㆍ

 살인자는 양쪽 귀에 어떤 뾰족한 것을 난폭하게 찔러넣은 것으로 보여.

ㆍㆍㆍㆍㆍㆍ"(1권/39쪽)

위에서 '가운데귀'를 '중이'로 고쳐주는게 나을 것 같다.

귀의 세부 명칭중에 '중이'가  '가운데귀'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가운데귀'가 됐을 경우, 밑에 나오는 '양쪽 귀'와 관련 '가운데 귀'로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아이언맨은 심장에 결함이 있고 슈퍼맨은 신비의 물질 크립토나이트에 민감한 것처럼ㆍㆍㆍㆍㆍㆍ(1권/128쪽)

이 부분도 좀 아쉬웠다. 아킬레스건은 '약점'이라는 뜻으로 쓰였을텐데...

의약학 용어와 음악용어가 짬뽕이 되어 나오는 내용 전개 상, 아킬레스건이라고 하니 해부학적 부위가 먼저 생각났다.

 

다음은 말 그대로 오자이다.

 

그 결핍과 그에 따른 기능장애는 오르지(오로지) 마약으로만 치료할 수 있었다.(1권/203쪽)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했던 하인리히 힘러는 트레블린카 강제스용소를 방문하면서 제 거동이 (편)한 것에만 신경을 썼다.(1권/365쪽)

 

되작이다, 궁굴렸다 , 베돌이, 버르집다, 기신기신, 동을 달다, 뭇매를 놓고... 같은 표현 만으로 충분히 이세욱님의 우리말 벼리는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미세레레 - '불쌍히 여기소서' 기원의 대상

 

"그는 우리와 차원이 달랐소. 달라도 이만저만 달랐던 게 아니오."

ㆍㆍㆍㆍㆍㆍ

"그는 이를테면ㆍㆍㆍㆍㆍㆍ내부로부터 고통을 가하는 기술에 훤했소."

ㆍㆍㆍㆍㆍㆍ
"하르트만은 자기 자신을 상대로 그 기술들을 실험했소. 그는 신비주의자였어요. 고통을 통한 회개, 그것이 아마 그가 추구한 길이었을 거요. 그는 벌을 삶의 목적이자 수단으로 생각하는 광신자였소. 제 몸을 훼손하고 저 자신을 고문하는 진짜 미치광이였소."(1권/355쪽)

 

"ㆍㆍㆍㆍㆍㆍ증오는 인간이 가장 널리 공유하고 있는 자질이죠."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연구원은 팔짱을 끼었다. 미소가 번질 듯 말 듯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 미소는 종유석 끝에 달린 차가운 물방울과 비슷했다. 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나마 종유석에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생생하게 반짝인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하지만 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순간 그것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그건 한방울의 눈물이었다.(1권/387쪽)

 

"그것도 장사라면 장사지. 하지만 그는 아주 특이한 상품을 팔고 있소.ㆍㆍㆍㆍㆍㆍ고통이라오."(2권/84쪽)
"우리 클럽은 어릿광대 놀음이오. 나는 이제 고통에 대해서, 진짜 고통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요."

"무슨 차이가 있지?"
"공포를 느낀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여기에서는 모두가 시늉만 하는거요. 손만 들어올리면 당장 고통이 멎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소. 진짜 고통이 언제 시작되는 줄 아시오? 고통을 가하는 자의 의지 말고는 아무 제약이 없을 때요. 그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소."(2권/105쪽)

세상은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고통을 갖고 살아간다.

육체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서 병원이, 정신적 고통의 해소를 위해서 종교가 생겨나게 된다.

'미세레레' 같은 종교음악만 해도 그렇다.

불특정 다수의 일반적 고통을 특정한 몇몇의 깊숙한 통증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고문'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별세하신 김근태 님의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날렸던 이근안의 목사직을 두고 말이 많았었다.

나는 그때 고문을 했었던 과거의 행위나 그런 그가 목사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뉘우치지 못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태도와 정신 상태가 문제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얼마전까지도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이며, 자신은 그 중 꽃'이라는 웃지 못할 소리를 했었다.

 

암튼 그는 목사직에서 면직되었다.

'고통을 가하는 자의 의지 말고는 아무 제약이 없'는 진짜 고통 자체를 두려워 하고 불쌍히 여기기도 해야 할텐데...

나는 이근안이 생각나서 그런지, 고통을 받는자보단 고통을 주는자가 가여운 것 같다. 

 

미세레레 - 죽음과 중독 사이 

 

한순간 카스단은 죽은 사람의 영원한 안식을 부럽게 여겼다. 예전에 생각하기로는 나이가 들면 죽음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해가 갈수록 어서 죽고 싶은 마음, 자석에 이끌리듯 죽음에 다가가려는 마음이 새록새록 더해갔다.(1권/12쪽)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커피 끓이는 일에 각별한 정성을 들이는 것이 마약을 준비하는 의식과 닮았다는 것을.(1권/81쪽)

 

데파코트는 기분 장애를 치료하는 약이고, 세로플렉스는 신세대 항우울제다. 그런데 두 약이 합쳐지면 신비로운 평형이 이루어진다. 덕분에 그는 기분 장애의 늪에 빠지지 않고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1권/88쪽)

 

카스단은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 욕실로 갔다. 9시 30분.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ㆍㆍㆍㆍㆍㆍ평소보다 늦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약효가 떨어질까봐 늘 전전긍긍해온 터였다. 그는 물 한 잔을 곁들여 알약을 먹었다. 그러면서 볼로킨을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마약이 있는 셈이었다.(1권/337쪽)

 

"신경증이란 마약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의 마약이다."

볼로킨은 가방을 고쳐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을 놓고 보면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는 두 가지를 아우르고 있어요. 마약중독자이면서 신경증 환자이니까요ㆍㆍㆍㆍㆍㆍ(2권/31쪽)

죽음과 중독의 공통점은 둘 다 치명적이라는 거다.

카스단과 볼로킨은 겉으로 소리내어 얘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각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한사람은 약물에, 다른 한사람은 마약에 중독되어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각자의 트라우마에 부딪히게 되고, 그 트라우마를 눈물겹게 이겨낸다.

 

퇴직하고 나서 처음 얼마동안 카스단은 인터넷에 취미를 붙였다. 이 새로운 소일거리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지레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환멸을 느꼈다. 웹의 세계는 피상적이고 뉘앙스나 깊이를 일절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이를테면 패스트푸드 같은 정보가 범람하는 세계였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계'였다. (1권/177쪽)

 

"아뇨. 이제는 아스키코드라는 특별한 부호체계를 가지고 컴퓨터에게 말을 걸어야 해요. 차원이 다른 거죠. 꽤 복잡해 보이지만 이것 나름의 논리를 파악해야 해요. 기계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언어로 말을 걸어야 하고 그것들의 논리를 따라야 해요."(1권/180쪽)

위의 글, 컴퓨터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볼때 짐작할 수 있듯이 카스단과 볼로킨의 중독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르다.

카스단은 이내 환멸을 느끼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계라고 무시해 버리지만,

볼로킨은 중독의 대상을 분석, 파악하고 논리로 이해, 초월하려고 한다.

 

이런 데서 살다보며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생활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도 먹는 것도 똑같아지지 않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에서만이라도 똑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한데 모인 것일까? 카스단은 현대 사회가 어쩌면 거대한 사이비 종파와 비슷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고 은밀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세뇌가 이루어지느 사회. 광고, 텔레비젼 뉴스, 쇼핑센터 따위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길들이는 사회. 어떤 의미에서 복제인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철학적 의미의 인간은 개개인을 초월하여 계속 존재할 것이었다.(2권/116쪽)

 

여자들은 특유의 파라볼라 안테나로 그가 어느 여자의 남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딴 세상' 사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온통 무언가에 철저하게 중독되어 있는 남자였다. 매력적이지만 어느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 세상에 그보다 더 탐나는 것이 있을까?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살자처럼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언제나 낭만적으로 보이게 마련이다.(2권/175쪽)

난 위 부분에서 생각이 좀 달랐는데, 볼로킨은 자살자가 아니라 초월자로 분류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아니다, 자살자는 어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세상을 살고자 한 사람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어느새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죽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약물이 되었든지 마약이 되었든지 또는 그보다 더한 것에 세뇌와 중독이 된다고 할지라도 해독제와 해쳐나올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간다.

 

여기서 얘기되는 선과 악은 모호하다.

여러사람에 의해 획일적이고 보편적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선'이다, 하지만 매력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그래서 탐나는 존재가 '악'이다.

 

난 이쯤에서,

多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善처럼 보이지만,

기준을 어느 쪽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뒤바뀔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고 싶은데...

그 다수라는 것의 기준을 정하는 것조차 애매모호하므로 자중하도록 하겠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목소리는 우리 몸의 상태를 드러내는 징표일세. 또한 우리 영혼을 담는 그릇이기도 해. 알겠어? 목소리가 정신분석학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네. 정신분석학적인 작업의 요체는 내면에 깊이 감춰진 과거의 트라우마를 밝혀내는 것이지만, 그렇게 트라우마를 의식의 표층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정신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를 말로 나타내야 해. 목소리에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어. 목소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큰수레'와 같은거야.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고 목소리를 내는것, 그것이 자유를 얻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일세. 자네도 그 길로 가는 게ㆍㆍㆍㆍㆍㆍ"(2권/24쪽)

 

이 부분은 참 중요한 내용인데, 더 모호한 느낌이 든다.

목소리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우리몸 상태의 발현이며, 우리 영혼을 담는 그릇이며, 그래서 우리를 끌고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거다.

근데, 이부분은 잘못 읽어내면 '큰수레'라는 용어 때문에 '대승불교'로 해석될 수가 있다.

불교를 얘기할 때 '큰수레' '작은수레' '대승' '소승'등은 대구를 이루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이는 예가 있기 때문에,

'불교'와 '큰수레'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여야 할때는 이같은 혼란을 초례할 수 있으니,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참고로, 불교에서 말하는 큰수레는 '다함께'라는 의미의 '큰수레'이다.

  

"트라우마를 억압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어. 인간의 영혼은 육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해. 만약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이질적인 요소가 생래적인 방어기제를 통해 배척되지 않으면, 부패나 괴저 같은 것이 생겨나게 마련이지."

"그러면 그때 가서 잘라내면 되겠네요."

"네 정신에 관한 얘기야. 정신을 잘라낼 수는 없어."(2권/24쪽)

 

내가 툴툴거리면서도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언젠가 템플스테이 같은 것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이러저러한 이유로 일정을 끝마치지 못한 낙오생이었다.
거기선 불교의 참선과 비교하여 얘기하고 있었는데...
불교의 참선도 물론 좋은 자기수련 방법이지만,

그 방법은 앙금을 가라앉히는 방법이어서,

실생활과 부딫혀 문제가 생겼을때는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흙탕물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다고 했었다.

거기선 우리가 택해야 할 방법은, 앙금을 가라앉히는 방법이 아니라 앙금을 잘라내어 없애는 방법이라고 했었다.
그때 난, 잘라내어 없애는 것까지는 아니고 가라앉혀 놓았다가
가끔 끄집어내 추억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고 싶어서 결국 그 수련회의 낙오생이 되었었다.

 

그걸 여기서 이렇게 '정신을 잘라낼 수는 없어'하는 한 구절로 요약해주니, 명쾌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암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끝에 가서 惡이 파멸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렇다면 악은 완전 사라지는 것일까?
그 전에 노출 되어 악에 물든자와 중독된 자가 생기게 마련인데...그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시인 황지우는 '산경'에서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니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고 노래하였다.

산경의 이구절을 미세레레의 해답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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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2-01-27 18:36   좋아요 0 | URL
유럽 작가들은 참 다양하게 기독교적 리츄얼이나 코드들을 소재나 알레고리로 활용하네요.
그런 자산들이 있음을 부러워 해야 하는지, 그런식의 소비를 씁쓸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ㅎㅎ
그랑제는 예전에 <크림슨 리버>만 읽었는데 이 책도 보관함으로...
Miserere Mei Deus 개인적으로 그레고리안 찬트를 좋아해서 듣던 곡이군요.
이 시기의 성가들은 신에 대한 '허심한 고백'같은게 느껴져서 좋아요.
요즘처럼 '복이나 주셈'하는 기운이 없어서 더욱 더.


숲노래 2012-01-27 19:23   좋아요 0 | URL
착한 마음도 나쁜 마음도
모두 나한테서 비롯할 테니
나쁨도 착함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순오기 2012-01-27 21:04   좋아요 0 | URL
명절때 고창은 잘 다녀가셨나요?
오랜만에 새글 올라와 반가워요~~ ^^

2012-01-27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2-01-28 00:09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세요!! 잘 지내시는거죠????
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암튼 이 리뷰를 읽고 어찌 미세레레를 안 읽을 수 있겠어요!!
꼭 읽어볼꼐요.^^

마녀고양이 2012-01-28 12:27   좋아요 0 | URL
아고 머리야....
왜이리 개념들이 어려운게야. 한두줄 댓글로 언급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

하지만 가라앉히기, 참기, 억압하기, 글쎄....
불교에서 부모나 자식과 연을 끊어야한다는거 있잖아, 나는 그게 과연 자연스러운 방법일까? 그건 회피 아냐?
머 그런 생각을 해. 물론, 내가 워낙 불교 교리에 무식하다보니, 이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거겠지만.
주말 잘 지내길..

2012-01-28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1-28 13:47   좋아요 0 | URL
컴퓨터 잉크가 닳겠어요. 이런 리뷰는 프린트로 뽑아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니까요. ㅋ

2012-01-28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1-31 01:50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을 이렇게 감상적으로 리뷰쓰시는 분은 드물 거예요!
명절 잘 보내시고, 일주일도 잘 보내시고, 여전히 잘 계시죠?
저야말로!!!
어린 제가 더 많이 와서 안부를 여쭤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또 불쑥 숟가락 얹기가 어려운 마음^^

이 책도 그저 그렇겠지 했지만 꼭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예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난,
허기지면 음식을 찾지만,

영혼이 허기지면 책을 들입다파지만,

마음이 허기지면 사람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또 한없이 그리워 하게 된다.

 

시를 자주 읽고 가끔 외우기도 하지만...내가 개인적으로 가까이 하게 되지 않는 시인이 있는데, 류시화와 이병률이다.
류시화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이고,
이병률은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와 여행산문집 '끌림'을 읽었었는데,
그의 글 전반적으로 묻어나는 쓸쓸함의 정서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가뜩이나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터라,

그렇게 감성 충만한 글들을 읽다보면 나도 어느새 feel 충만하여져 무뇌아 취급을 받을 것만 같아서 라고 해야할까?

암튼 이병률은 그렇게 내게서 한발자국 물러나 있었다.

 

 

 

 

 

 

 

 

 

 

 

 

 

 


얼마전 내게 시집을 몇권 선물해주시겠다는 분이 계셨다.
그 분이 골라주신 시집은 이병률의 '바람의 사생활', 정끝별의 '시심전심',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였다.
'바람의 사생활'을 고르신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님이 해설을 하셔서라고 하셨고,

'시심전심'은, 내가 어디선가 정끝별을 좋아한다는 걸 본것 같은데...정끝별님이 직접 쓰신 시들은 아니니 내가 안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으셨단다.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는 절판이었다.
사실 정끝별님의 '밥'라는 시선집은 참 좋았지만, 요번 '시심전심'은 별로였었는데...
그 이유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이후로 쳐다보기도 싫어했던 그런 시 해석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였다.
나는 가뜩이나 시뿐만 아니라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고 의인화하는 걸 좋아하는데,
시를 갈갈이 나누고 헤쳐 분해하고 하는게, 로봇 분해 조립이나  과학상자 만들기같이 느껴져서 말이다.

(어찌되었건, '마음과 마음이 詩로 서로 통할 때'라는 부제는 참 멋지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내게 없는 시집들을 골라내기까지의 그 정성이 선물보다 고마웠다.

 

그동안 이병률의 시가 내게 겉돌았었던 것은 어쩜 시적자아가 여러명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적자아가 너무 여러명이다 보니, 어느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얘기는 다시하면 어느 누구는 A라는 시를, 어느 누구는 B라는 시를, 또 누구는 C라는 시를...취향에 맞게 좋아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어느 누구나 좋아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군가'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키면 그를 깊이 좋아하기는 좀 힘 들었었다.

 

예를 들면,

그의 첫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의 주된 정서는 슬픔인 듯 보였었다.

 

 

벼랑을 달리네

 

문상 다녀오는 체감온도 영화 십육 도의 추운 밤

경사진 도로에서 차로 뛰어드는 여자를 보고 놀라 급히 차를 세우는데

뒷자리에 타자마자 '가양동 2단지'를 외치는

택시가 아니라 해도 슬프도록 코를 골며 잠을 청하는

화장품 냄새 술냄새 반에 전 난취의 여자

그래도 내리라 하지 않고 조심스레 몰 수 있었던 건

당신처럼 갈기갈기 사지가 찢긴 채

누군가 나를 데려다 눕혔으면 했던 의식을 부탁해왔기 때문이다

가양동 2단지 앞에 차를 세운 영하의 밤

잠든 여자를 깨운다 눈인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던 목도리를 반듯하게 개어놓고

휘청휘청 아파트 단지 안으로 발걸음을 떼어놓는 여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건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춥지 않다 싶게 집으로 되돌아오는 밤

무언가 하얗게 시야를 덮쳐 급히 차를 세웠더니

도로에 떨어져 휘날리고 있는 두루마리 휴지

인사 대신 남겨둔 여자의 목도리처럼

매운 바람 속에서 하얗게 몸을 풀며 구르다

놀라 멈춰 선 차를 감싸며 흐느끼고 있다

가지런히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차 안에서 눈 감을 수 있었던 건

나도 당신처럼 머리를 풀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마지막인 양 파닥이고 싶었던 적 있기 때문이다

 

 

'벼랑을 달리네' 같은 경우...
그 슬픔이 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었던 건지, 파닥이고 싶었던 건지...어떤 형태로 표출된건지 애매모호하다.
그림으로 그리라면 그리겠는데,
말로 얘기하라면...글쎄, 이쯤되지 않을까?
"음, 슬픔은 슬픔인데~. 그게 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은건지, 파닥이고 싶은건지...는 나도 모르겠어...ㅠ.ㅠ"


근데, 요번에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는 좀 바뀌어 있었다.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그의 정서, '바람의 사생활'에 실껏 몰입할 수 있었다.

 

어쩜 시인은 그대로인데...
신형철의 해설 덕에 시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신형철은 좀 관조적인 시선으로,
전지자나 선각자의 그것으로 이병률을 바라본다.

일부분만을 옮겨보면 이렇다.

기어이 사랑하며 살아보겠다 하는 마음과 이냥 헤어지고 죽어버리자 하는 마음이 번갈아 밀려왔다 밀려가며 파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두 마음 중 어느 하나에 의지해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앞의 일보다는 뒤의 일이 더 아픈 일이다. 이병률의 일들이 그렇다. 이 사내의 내해(內海)를 드나드는 파도는 어찌 그리 심해파(深海波)이기만 한 것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은 어찌 이리 먹먹한 먹빛인 것인가. 그럴 수도 있는가, 그렇게도 살아지긴 하는가, 내내 물어가며 그의 시를 읽었다.
ㆍㆍㆍㆍㆍㆍ

 

'바람의 사생활'에서 그는 좀 바뀌었다.

그 슬픔이...추운건지, 슬픈건지, 흐느끼고 싶은건지, 파닥이고 싶은건지...는 모를지라도,

그 슬픔이 '적어도' 아픈거라는 건 안다.

그래서 '바람의 사생활'에서는 그 '슬픔'이 제 살을 헤집는 아픔인 줄 느낀다.
아픔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은 그는, 슬픔 또한 타인에게 전염시키려 들지 않는다.
여기서 자신을 객관화하려 하고, 타자화하여 바라보려 노력하고...그 바람에 시가 한결 깊어진다.

 

 

 

 

 

 

 

 

Smiling & Waving
이엠아이(EMI) /

2001년 7월

 

이 앨범은 절판이다.

이 앨범의 열한 번째 트랙에 실려 있는 곡이었는데, 알라딘엔 열 번째까지밖에 공개가 안됐다.
아냐 가바렉은 재즈의 거장 얀 가바렉의 딸이라는데,

얀 가바렉의 딸이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는게 놀라웠고,

독특한 목소리로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 또한 놀라웠다.

우와~ 나랑 동갑이라는데...이런 목소리, 이런 몸짓을 구사할 수 있다니...그 또한 놀랍다.

 

I won't hurt you-Anja Garbarek

 

I've lost all my pride
I've been to paradise
And out the other side
With no one to guide me
Torn apart by a fiery will inside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m an untouched diamond
That's golden and brilliant without illumination
You're mouth's a constellation
Stars are in your eyes
I'll take a spaceship
And try and go and find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My pale blue star
My rainbow;
How good it is to know you're like me
Strike me with your lightening
Bring me down and bury me with ashes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I won't hur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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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1-11 09:49   좋아요 0 | URL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문장, 왜 이렇게 찔리는지.. 음.. 그 와중에 또 배는 고프고요. ㅎㅎ

Forgettable. 2012-01-11 11:57   좋아요 0 | URL
히융 이런 글도 괜찮을 때나 읽을 수 있지, 마음 상태가 말이 아니니 공감을 넘어서 버겁네요.
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혼자라는 기분에 즐겨 읽지 않아요. 요즘은 아예 모든 글을 즐겨읽지 않나;;; ㅋㅋ

책가방 2012-01-11 13:47   좋아요 0 | URL
접힌 부분이 펼쳐지지 않네요. 요즘 제 컴이 좀 느려지긴 했습니다..^^
시라는 거..
전 잘 안 읽어지던데.. 이렇게라도 시를 접할 수 있어 좋네요.
혼자 남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엄마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년초에 친정갔다가 9일에 돌아왔거든요.
시끌벅적하다가 모두 가버린 후 혼자남을 엄마가 새삼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2012-01-11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케 2012-01-11 15:05   좋아요 0 | URL
저도 류시화는 노코멘트.. 이병률의 글과 시는 글 잘쓰는 여고 3학년생 분위기여서 늘 저에게 약간의 닭살을 ㅋ
아직 엄동지절이라 '對影成三人'의 즐거움은 봄까지 미루셔야 겠습니다.ㅎㅎ

다락방 2012-01-11 15:30   좋아요 0 | URL
(생뚱)저 몇년전에 소개팅했을 때 애프터를 받고 또 만났던 남자가 그 두번째 만남에서 약속시간에 좀 늦었거든요. 밤샘근무를 하고 오후에 나오는거라 좀 늦었다고 했는데, 그때 그가 들고 나왔던 책이 이병률의 [끌림]이었어요. 착한남자였는데, 어딘가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잘 살고 있는지 이 페이퍼를 읽다보니 문득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그의 이름도 생각나질 않아요, 이제는.
전 이병률이란 이름만 들으면 바로 그 남자로 연결되어 버려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Forgettable. 2012-01-11 16:08   좋아요 0 | URL
나도 누군가의 차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근데 이름도 얼굴은 커녕 누군지도 잘... -0-

라로 2012-01-11 15:43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시를 읽게 되네요,,,요즘 왜 이러고 사는지,,,^^;;

2012-01-11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1-11 16:48   좋아요 0 | URL
새해부터 시집을 즐거이 읽으셨네요.
즐거이 읽는 시집은
마음을 잘 달래 주지 싶어요.

프레이야 2012-01-11 21:38   좋아요 0 | URL
'바람의 사생활'은 이상하게 마음에 착착 감기질 않았어요.
'그늘과 사귀다'는 표지가 달라졌네요. 이 시인의 시 좋던에요

근데 전 마음이 허기져도 먹는 것 찾아 마구 먹어요.ㅎㅎ
거짓허기라지요. 운동은 안 하고 먹기만ㅠ

cyrus 2012-01-11 22:02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이 주신 책 선물 덕분에 송경동이라는 시인의 글을 알게 되었어요, 나무꾼님 덕분에
요즘 시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있어요. 저도 류시화 시인을 좋아하고 이병률의 <끌림>을 감명깊게
읽었는데 다시 한 번 류시화의 시집을 읽어보고 싶네요 ^^

마녀고양이 2012-01-13 17:35   좋아요 0 | URL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
나 이 구절 너무 좋아, 왜냐하면 나 역시 핏발의 냄새를 풍긴 적 있으며, 지금은 택시 기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핏발의 냄새를 풍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그때 누군가 나의 택시 기사였으면 싶기 때문에..... ^^

글구, 전에 불에 가까이 가면 화상만 입을 뿐이니 적절한 거리에서 쬐어야 한다는 문구 정말 맘에 안 들었는데,
이번에 그 밑의 문장들을 보니....... 너무 기뻐, 한아름 내려놓은 것 같아서. 내가 기뻐하는거 보여?


2012-01-18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3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