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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스 플라이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6 ㅣ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6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 번역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은 두루 섭렵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좋았다.
그동안 그 주인공 해리 보슈를 욕하면서도 멋있다고 했었는데...이젠 그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렇게 품어 갖기 벅찬 남자는 우러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에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순서가 뒤죽박죽인채로 번역되었다.
번역된 순서대로 따라 읽다보면,
해리 보슈는 이 여자 저 여자 찝쩍거리는 마초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고고한(高,孤,寒,)것처럼 표현되어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급기야 그들과 우리의 문화적 차이 내지는 사람을 보는 안목의 차이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려 하려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이작품 <앤젤 플라이트>에서는
그가 아내 엘리노어 위시를 어떻게 대하는지,
친구들과 부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그래봤자 다 경찰관이지만),
그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제법 자세하고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꿍꿍이를 알 수 없던 해리보슈라는 인물에 살이 붙고 피가 돌게 되고,
그러면서 그가 가진 오리무중의 과거와 내면과 사연이, 나름 깊이와 더께와 온기를 더해 간다.
우리는 순간의 만남 속에, 그 찰라의 연속 속에 살고 있다.
순간의 만남 속에서 만나는 건 사람의 일부분이고 단편인줄 알면서도,
일부분이나 단편을 가지고 전체를 미루어 짐작하거나 아우르려 하는 우를 범했었다.
해리 보슈를 향하여서도 여지없이 그 기준을 적용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늦게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이 책의 줄거리 라인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고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스포일러가 될 것 같고,
보슈가 고고한 마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지는데, 그게 좀 눈물겹다.
해리 보슈는 어찌 어찌하여 엘리노어 위시와 결혼을 하는데 일년만에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려 한다.
어쩜 그는 아내와의 결별보다는, 다시 '홀로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ㆍㆍㆍ보슈는 그 관광객들이 자기한테서 뭔가를 느낀 건 아닐까 생각했다. 위험이나 아픔 같은 것을 느낀 건 아닐까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감지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보슈에게서 그런 것을 감지해내는 게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꼬박 스물네 시간 이상이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한 손을 들어 얼굴을 쓱 부비니까 축축한 회반죽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슈는 상체를 굽히고 두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다시는 느끼지 않기를 바랐던 그 고통이 다시 찾아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외로움을 느낀 것이, 이 도시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목 안에 뭐가 걸리고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었고, 이렇게 넓은 공간 안에 있는 데도 수의에 싸여 관 속에 누운 것 같은 밀실 공포증이 느껴졌다.(176쪽)
과연 해리 보슈는 엘리노어 위시를 사랑했을까?
사랑한다는 감정 자체를 사랑한 건 아닐까?
인간이 애 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해리, 당신도 중독된 게 있잖아. 나도 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새로운 사건을 맡을 때 드는 느낌 있잖아. 다시 사냥에 나설 때 느끼는 스릴감 말이야. 무슨 느낌인지 당신도 알거야. 이제 나는 그런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됐잖아. 그런데 그 느낌과 가장 비슷한 느낌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내가 펠트 천 테이블에서 카드 다섯 장을 집어 들고 들어온 패를 확인할 때였어.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긴 더 어렵겠지만, 난 그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해리. 우린 둘 다 약쟁이들이야. 약의 종류만 다를 뿐이지. 난 당신 약을 갖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
보슈는 잠깐 동안 엘리노어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문앞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지만 곧 다시 들어왔다.
"당신 말을 들이니 가슴이 너무 아파, 엘리노어. 난 항상 당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다시 갖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238쪽)
위 문단에서, 슬프게도 나는 이들 부부의 명확히 다른 입장을 읽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깨어있게 하지 못하는 걸 깨닫고 가슴 아파하지만, 연민이지 사랑은 아니다.
오히려 해리 보슈는 일을 할때,
전직 FBI요원인 엘리노어 위시 역시 같은 일을 할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그녀는 도박에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위 문단은 번역도 껄끄러워 길지만 옮겨 보았다.
중독은 크게 신체적 증상으로서의 중독(농약, 중금속, 기타 화학약품, 식중독 등)과 정신적 의존증으로서의 중독(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마약, 인터넷, 쇼핑, 도박 등 )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건 정신적 의존증으로서의 중독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해리 보슈는 일 중독, 엘리노어 위쉬는 도박 중독 쯤 되려나?
그러니, '우린 둘 다 중독자들이야, 중독의 종류만 다를 뿐이지.'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다음 문장도 해석될 수 있다.
당신이 중독된 것과 같은 중독이 되고 싶다는 것인지,
당신이 사용한 해독제가 갖고 싶다는 것인지,
당신이라는 약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말이다.
"작년에 둘이 같이 봤던 영화가 생각나네. <타이태닉>말이야."
"나도 기억나."
"거기 나왔던 아가씨 있잖아. 그 청년과 사랑에 빠지지. 그 배에서 처음 만난 건데도 말이야. 그리고... 그 청년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마지막에는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어. 그와 함께 있으려고 구명보트를 타지 않았지."
"기억나, 엘리노어."
보슈는 엘리노어가 옆자리에 앉아서 울던 것과, 자기는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이 여자는 이토록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일까 황당해했던 기억이 났다.
"당신이 울었었지."
보슈가 말했다.
"그래. 내가 운 건 누구나 그런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해리, 당신은 나한테서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런데 난ㆍㆍㆍ."
"아냐, 엘리노어, 지금 당신이 내게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ㆍㆍㆍ."
"영화 속의 그 아가씨는 구명보트에서 다시 타이태닉 호로 올라갔어, 해리."
엘리노어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보슈에게는 울음소리로 들렸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을 거야."
엘리노어가 말했다.
"그래, 맞아. 누구도 능가할 수 없지. 영화니까 그런 거야. 내 말 들어 봐. 내ㆍㆍㆍ가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 엘리노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고 애쓰지 마."
"그런데 자꾸 그렇게 돼, 자꾸만ㆍㆍㆍ.사랑해, 해리. 그런데 충분하지가 않아. 당신은 이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엘리노어, 아니야ㆍㆍㆍ제발. 난ㆍㆍㆍ."
"잠깐 나가 있을게. 생각 좀 정리하려고 그래."
"집에서 기다려줄래? 15분 이내로 도착할게. 만나서 얘기하자ㆍㆍㆍ."
ㆍㆍㆍㆍㆍㆍ
보슈는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 있고 싶었다.(325쪽)
"괜찮아?"
"응, 괜찮아....아니, 괜찮아질 거야."
"엘리노어, 사랑해. 이 말을 자주 못 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ㆍㆍㆍ."
수화기 저편에서 엘리노어가 쉿 하는 소리를 내서 보슈는 말을 멈췄다.
마침내 엘리노어가 작별을 고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보슈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귀에서 전화기를 뗐다. 마음속에서 수영장이, 침대에 덮인 담요처럼 부드러운 그 물 표면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 세상에 보슈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그 수영장으로 달려가 잔잔한 표면 속으로 다이빙을 해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수영장 바닥에서, 그는 몸속의 산소가 다 사라지고 가슴이 아파올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거기 남아서 죽을 것인가, 위로 올라가서 살 것인가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까지 버티면서 악을 써댔다.
지금 보슈는 그 수영장과 따뜻한 물이 그리웠다. 폐가 터져버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326쪽)
암튼 둘은 같은 영화를 보고서도, 추억으로 서로 다른 느낌을 간직한다.
해리 보슈는 현실에 안주하는 타입이다.
진정한 안식처로서의 집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414쪽) 그는,
영화에 몰입하고, 영화 속의 사랑을 꿈꾸는 엘리노어 위시가 황당할 수밖에 없다.
반면 엘리노어 위시는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눈물겹고 버겁기만 하다.
그러니 이들은 비껴가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해리 보슈의 껄떡거리는 마초기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후라서 라고 하지만, 이런 문장들은 제대로 멋지다.
"전 오늘은 그냥 그렇군요, 케이트. 좀 힘든 밤을 보내서. 그리고 비오는 날을 안 좋아합니다."(444쪽)
보슈는 창문을 닫았다. 비는 언제나 그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비가 없이도 충분히 슬펐다. (446쪽)
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려 자기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걸어가다가 뛰기 시작했다. 자기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516쪽)
하지만, 멋지고 감성적이어서 작업 멘트를 슉슉 날릴 수 있는 것과
영화 속 사랑을 꿈꾸는 엘리노어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젠가 보다.
해리 보슈는 아무 말없이 어깨를 툭 치면서 술 한잔 같이 하는 몸의 대화를 더 수월해 하는 부류인가 보다.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에요."
보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변하죠. 하지만 보통 핵심은 변하지 않아요."(242쪽)
......
보슈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말이 아니죠. 내 말은 그때 나는 프랭크 쉬헌이라는 인간의 핵심을 봤다는 겁니다. 그때 나는 그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죠..."(244쪽)
그러고보니, 나도 참 웃기다.
같은 여자로서 엘리노어 위시에게 마음이 가야할텐데...차라리 해리 보슈에게 마음이 기운다.
아니다 싶은 여자는 빨리 훌훌 떨어버리고,
이 가을 해리 보슈의 고고함을 달래줄 여자를 만나길 바래본다.
(예를 들면, '블랙 아이스'의 '실비아' 같은 여자라면 좋겠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책의 내용은 아꼈는데 책도 엄청 재밌다.
개인적으론 테리 메케일렙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화 되기도 했던 <블러드 워크-원죄의 심장>만큼 재밌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