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도 다가오고 하여, 못 뵌지 오래된 스승님께 '보고 싶어 죽겠어요.'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산에 가면 들 보고 싶을까요?'하는 답문자를 보내오셨다.
이 분의 언어 유희를 어느 정도 아는지라,
'들에 가면 산이 보고 싶고 말이죠~^^'하고 맞장구를 쳐드렸다.

주말에 홍천의 비발디파크에 다녀왔다.
놀토가 아니어서 아이의 결석문제를 가지고,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헐~(,.) 아이의 담임선생님...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더라. 

대단히 난해하거나 중의적인 내용도 아니고,
'가족 모임이 있어 학교를 결석하겠다'했더니,
'알겠다, 결석시켜라. 진료확인서가 있으면 병결 처리된다'라고 대답하길래 그런 줄 알았었다.
토요일 오전 9시에 전화를 해선 '훌륭한 강사님을 모시고 진로 특강을 하니 꼭 등교를 시켜야 한다.'고 하길래,
'그러냐, 벌써 출발을 했는데...꼭 되돌려야 하냐?'고 했더니,
'알겠다, 좋은 특강인데 아쉽다.'고 하시더라.
그 후로,
'어디냐? 온다는 얘기 아니었냐?'
비슷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이틀에 걸쳐 무려 열 몇통의 전화를 받다보니, 짜증이 났다.

상대가 못알아 듣는 말을 구사한 것도 아니고,
사투리나 외래어를 섞어 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디를 향하여 출발을 했는지까지 명확히 했건만,
제대로 듣지 않아 실수를 하고도...고칠 생각을 안하다니.
나중엔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눈치없게 못 알아들은게 아닌가...엉뚱한 생각까지 했었다.
어른인 나와도 이런데, 아이들과는 눈높이를 어찌 맞출지 심히 걱정스럽다.

그 와중에 심보선을 읽었다.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뒷표지 발췌

나와 닮았다는 건 적어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경우 어긋나도...짐작하는 동안 즐거우니 그걸로 된거다. 

개인적으로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좋아한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나 '평범해지는 손' 따위를 좋아한다.
'눈 앞에 없는 사람'이 사랑이나 사랑의 쓸쓸함에 대해 얘기했다면,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허허로움에 대해서 얘기했다 하겠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심 보 선 -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 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3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그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져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4

내게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계절을 보낼 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평범해지는 손
                    - 심 보 선 -

하얀 손 창백한 손
흐린 초점으로 보면
사라지는 은하계 같은 손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는 소파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다
오랜 윤회 끝에 한 천 년 만에
이 자세를 되찾았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이 자세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손의 주인이 말을 한다 고마워
너를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연못처럼 고요하다
둘에서 셋 아니면 셋에서 넷이 되었겠지
그 정도겠지
왠지 이 방의 가구들은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다
부처가 방금 걸어 나간 적멸보궁 같다
이제 당신도 그만 나가보지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바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 자세 그대로
소파 위에서 이별을 반가사유하며
영원히 늙어가겠다는 듯이
남자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사랑을 일용하였으나
생의 터럭 한 올조차 포기한 적 없다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을 되돌아볼 것이다
숭고한 영감이라 부르든
가혹한 저주라 부르든
사랑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였다
이별하고 나서 남자의 손은 점점 평범해져갔다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

그리고 정철훈의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읽었다. 

           이도백하(二道白河)

                               - 정 철 훈 - 

옛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를 견뎠을까
지금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도 못했을텐데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귀밑머리 가늘게 떨리는 세월의 강가에서
돌을 주워 솥단지를 걸고 청솔가지 꺾어 불을 지피며
건너가야 할 강 너머를 바라보던 아득한 시선들 

지금도 강가에 가면
그 옛날 불을 지피던 검댕이 돌들이 뒹굴고 있다 

가로지른다는 것은 여기서는 안 보이는 틈새를 가까스로 빠져나가는 일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태우는 일
강을 건넌 사람들에게서는 연기 냄새가 난다 

태워간다는 거
사랑하는 일이 돌을 주워오고
청솔가지를 꺾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어두운 주방에 쭈그리고 앉아 사부작사부작
슬픔을 삭이는 소소한 움직임이 강을 건너는 것이다
안으로 삭여 스스로 흐느끼지 않으면 강은 건널 수 없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면
강가에 지핀 장작불은 유난히 거세게 타오르고
뜨거운 바람이 소스라치며 하늘로 빨려올라간다 

광주리며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아이들 손목을 잡았다지만 더러는 물에 빠져죽고
더러는 물속을 걸어 건넜던 것이다
아무 소리도 없이 강물만 사부작사부작 

파랗게 파란 채 죽은 것들이 강이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칠흙 같은 어둠 속
휘영청 달 하나가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시집<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중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람만이 외로워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구나 하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얘기할 수 없는 것도 슬픔이지만,
아무리 사랑한다 얘기한다 하더라도 얘기가 안 통한다면,
공허한 울림이나 메아리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들어줄 사람을 위해 얘기를 하는거고,
읽어줄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닐까, 

그래야 겠다.
내가 해석되고 싶은 대로,
내가 해석되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의 말에, 글에 귀기울이고 집중해야겠다. 

다행히도...나는 옛사람이 아니어서,
사랑한다사랑한다 얘기할 수 있으니,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나이를 건너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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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6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1-09-06 17:15   좋아요 0 | URL
그건 아마도 심보선님의 경우,
범인 같은 삶을 살고...삶이 녹아나는 시를 쓰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진짜로 영어를 쓰라는 유언을 하셨고,
같이 유학을 갔던 아내와 이혼을 하기도 했다죠.

저희 아들은요~
한때 제가 야단치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이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다죠~

저도 명랑, 쾌활,긍정적,희망적이기만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제게도 이토록 위안이 되는 걸 보면요~^^

글샘 2011-09-06 16:01   좋아요 0 | URL
충청도 분이신가요?
산에 가면 드~을(덜) 보고싶을까? 저는 이렇게 들리걸랑요. ㅋㅋ 충청도라...
이건 충북 영동을 '이응동(이응은 이중모음을 짧게 발음)'으로 읽을 줄 알아야 들리는 말이에요.

가족 모임은... 체험학습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보고서만 제출하면...
뭐, 저도 한번도 해준 적은 없지만요.

이도 백하(백두산 아랫마을)처럼 옛날모습이 남아있는 마을에 가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단 생각이 들죠.
일이 많아 숨쉬기가 어렵고,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몸은 녹초 강산이고...
어디 바위 밑에 앉아 연못이나 바라보며 한숨 좀 쉬고 싶은 오후입니다.

sslmo 2011-09-06 17:23   좋아요 0 | URL
그분은 대전 분이신걸로 알고 있고, 전 서울 토박이예요.
대전이 행정구역 상 충청도인가요?
샘은 부산이잖아요, 부산은 경상도 아닌가요?

전 쌀을 살이라고 발음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요~^^

제가 은파라는 예쁜 이름의 호수는 아는데...
일 대충 해치우시고, 은파로 세월이나 낚으러 가죠~^^


글샘 2011-09-06 17:56   좋아요 0 | URL
제가 태생은 충청북도 산골이에요. ^^
충청도 5년, 부산 15년, 서울 10년, 다시 부산서 한 15년 이렇게 살고 있네요. ^^
그래서 온갖 지방 말을 대충은 잘 알아듣는 편이랍니다.

은파에서 한잔 하고 싶긴 하네요. ㅎㅎ
좀있다가 부페가서 술먹는 자리가 있긴 합니다.

차좋아 2011-09-06 18: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시를 읽어 보려고 양철 나무꾼님의 페이퍼를 출력을 했어요.(처움에 양철 페이퍼라고 적고 혼나 낄낄거렸어요ㅋㅋ 아 눈물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심보선의 시 저도 좀 읽고 싶은데 너무 안 읽혀서 답답함 토로하러 다시 왔습니다. 원래 시에 집중 잘 하지 못하지만 정도가 심해졌어요. 아무래도 주위가 산만해 진듯, 마음이 산란스럽고 여유가 없어서 그런거 같아요.
심보선의 시 다들 공유하는 어떤 감정, 정서 탐나는데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네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산이 보면 들이 보고싶어져요^^ㅎㅎ 엄다산 엄다야 제 아이들이에요~

아이리시스 2011-09-06 18:39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 :)

아, 저 너무 사랑한다는 말 남발하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놀토 아닌데 학교 안간 꼬맹이 부러워요. 우리 엄마는 왜 날 학교에 안 가고 가족모임 가도 된다고 말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남들 학교에 있는 시간에 나만 다른 곳에 있는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거든요. 언젠가 고딩 때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고 버스를 탔더니 어른들이 다들 질 나쁜 애가 학교 탈출한 것처럼 쳐다보길래 더 재미났었어요. :)

답답함을 토로하는 페이퍼인데 혼자만 재미나 해서 죄송해요.ㅎㅎㅎ

순오기 2011-09-06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애들을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빼먹게 했어요, 사진 붙여 보고서 써내면 되니까요.
때론 보고서 안내도 된다면서 그냥 재량껏 봐주신 선생님도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좀 답답하시네요.ㅜㅜ

충청도 말을 아는 저도 언어유희를 알아먹었어요.^^
심보선의 시~~~~~~~~~는 그냥 읽고 또 읽는 것으로 대신해요.

알케 2011-09-07 02:36   좋아요 0 | URL
정철훈...시 참 좋군요. 이 새벽에 가슴이 찌릿합니다. 저는 근래 집 이사에 새 일터에..겹치고 겹쳐
넋빼고 사는 요즘입니다. 명절 잘 보내시길 미리 인사드립니다

무스탕 2011-09-07 09:25   좋아요 0 | URL
시인들의 시보다 나무꾼님의 글이 시 같네요 ^^
가끔 애들이 학교가기 싫다 그러면 '가지마. 엄마랑 놀자' 그래도 억지로 가방 떠메고 학교가는 애들을 보면 뭐가 저 애들을 저렇게 세뇌시켰을까.. 싶기도 해요

2011-09-07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1-09-07 22:27   좋아요 0 | URL
ㅎㅎ 선생님이 마치 사오정 같으세요^^ 저리 말귀를 못알아 들으시다니 학생들도 좀 답답할듯....^^;;;

햇빛눈물 2011-09-13 20:58   좋아요 0 | URL
ㅋㅋㅋ...읽으면서 '빵' 터졌습니다. 저도 학교에서 근무하지만 가끔 '사오정'같은 분도 더러 계십니다. 학교란 곳이 '묘'한 곳입니다. 나이듦과 젊음이 이상시리 공존하는 곳이죠. 얼마전에 헌책방에서 오규원 시 전집 2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구입한 오규원의 <날이미지와 시> 앞부분을 다시 들추어보니(전에 읽다가 포기했는데 다시 읽어봐도 무슨말인지 어렵네요...ㅋ) 이런 말이 있네요.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선택과 대치라는 우리들 사고의 한 축이며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이라는 한 축"이다. 혹시 그 담임 선생님 국어 교사인가요? 아니면 진짜로 사오정일수도 있을 것 같네요. 즐거운 한주되시길~~
 

가끔 내게 선문답 같은 말들을 던지셔서...
때론 머릿속을 헝클어놓기도 하고, 때론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릿 속을 일목요연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계시다. 
 
지난 토요일, 이 분과 차 한잔을 하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데 갑자기 없어지셨었다.
"맘 넓은 내가 참고 이해해야지...ㅠ.ㅠ" 
"참, 그 맘 너무 넓어 뿔뿔히 흩어지겠다아..." 
"그럼, 속 깊은 내가 참는다로 바꿔야 하는 건가요?" 
"속이 깊다는 건 한가질 흘려버리지 않고 생각을 거듭한다는 뜻이야, 자기 자신에 관한 문제지.
 맘이 넓다는 건, 타인을 배려한다는 뜻이고..."

이 분이 잠시 다녀오신 곳은 복권방이라는 곳이었다.
요즘 하시는 일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만한 재력가에 요행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복권이라니 씁쓸했다. 

한 친구를 만났다.
강남에서 개업을 했다가 7년만에 접고, 어딘가 월급쟁이로 가게 되었단다.
자기 일을 하다가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진 않을텐데...
게다가 처음엔 월급도 인턴사원 수준으로 받게 될거란 얘기에 나도 모르게,
"때를 좀 기다리지~."
라고 해버렸다.
"넌 남자들의 세계를 몰라. 나 가장이잖아."
라며 쓸쓸하게 웃어 울컥하게 만들었다. 

분명 요행 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이들인데,
이들의 불운을 시대말고 무엇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살다보면 언제고 좋은 날이 있을거다, 건투를 빈다.
따위의 섣부른 위로 대신, 커피와 술을 함께 들이켰다.
 
시간상, 이 둘 사이의 어디쯤에서 곽노현 교육감의 2억 수수 얘기를 들었다.
처음 얘길 들었을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는데, 정황 얘기를 듣고 보니 그래도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겠다.
결과적이고 도의적인 처신이야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를 향한 믿음은 흐트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오늘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어보니...서울시교육감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이해학 목사의 경우, 상식적인 선에서 처리를 해야한다고 말하면서도 곽노현의 진정성은 믿는다고 하였고, 
김상근 목사의 경우도, 곽노현의 진정성은 믿느나 공인으로서 법이 이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곽노현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그렇지만,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진 않을 게다. 

생각은 이리저리 널을 뛰어, 나의 경우를 돌아본다.

경계를 만들어 내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였으면,
그 안에선 맘껏 움직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는데,
난 경계를 만드는 데 실패를 한건지, 안으로 들이는데 실패한건지 모르겠다.
어쩜 내가 까는 멍석이라는 것이 이들의 날개를 펴기엔 역부족인건 아닐까?  

생각은 또 다시 이리저리 널을 뛰어...사람에게, 벗에게 이리저리 상처 입을 바엔 책 한권이 나을 수도 있겠다.

연암 박지원은 기묘한 인연으로 만난 벗이라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나누는 대화가 무료하고 함께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홀로 책 속에서 벗을 찾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친구라면 함께하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천박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동이 더럽지 않아야 할 것이란다.('천년 벗과의 대화''알라딘 책 소개'인용)

 

 

  

 천년 벗과의 대화
 안대회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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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30 20:36   좋아요 0 | URL
곽노현 교육감의 진정성... ㅠㅠ

그래, 그것은 믿는다쳐도, 후보 단일화 논의할 때 틀림없이 박명기 교수는 자신의 부채에 대해서 호소했을거야. 그래도 선거를 치뤘다면 선거보전금도 상당 금액 돌려받았을거 아냐. 그런데 박명기 교수는 후보를 사퇴했어. 만일 그 시점에 박명기 교수의 부채에 대해서 진보 진영에서 일언반구없이 무조건 사퇴하라고 압박했다면, 그것 역시 도의적인 책임이 아닐까? 곽노현 교육감이 아니더라도, 그때 후보 단일화를 촉구했던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이 없게 되는 상황이야. 박명기 교수 한명만 희생해라, 그것도 엄청난 희생해라... 이건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잖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 이리저리 생각해도, ㅠㅠㅠㅠ

sslmo 2011-09-03 12:49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없다며...
녹취록도, 각서도, 녹음기록에도 돈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며...
준 2억의 자금 출처도 개인 자금으로 명확하고...

나도 모르겠어~
다만 어렵게 성사시킨 '친환경 무상급식'이 흐지부지해지지 않을까 그게 젤 걱정 돼~ㅠ.ㅠ

blanca 2011-08-30 21:4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요새 벗에 대해 생각해 보아요. 경계. 그 울타리가 너무 단단한 게 문제인가 물렁한 게 피곤한 건가. 아직 답을 찾는 중이고요. 곽노현 교육감 관련된 문제는 진실과 사실의 어디 쯤에서 판단을 내리기에 아직 제가 수집한 정보가 부족해서 보류 중이지만 참 마음이 안 좋네요. 게다가 지독한 콧물 감기로 거의 최루탄 맞은 기분이기에 세상이 더욱더 어둡게만 보입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한 번 들어봐야 겠습니다.

sslmo 2011-09-03 13:55   좋아요 0 | URL
아들을 키우면서,
아니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의 경계나 영역을 확고히 하기보다는,
날개를 '활짝' '맘껏' 펼 수 있도록 영역을 넓혀야 하는게 아닌가.

서정윤 시 '사랑한다는 것으로'처럼 말이죠~^^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꺽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프레이야 2011-08-30 22:23   좋아요 0 | URL
살수록 뭐라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요.
먼저 헤아려주는 속깊은 맘과 배려하고 양보하는 넒은 마음이 두루 있으면 좋겠는데
요원한 문제일까요.
전 어젯밤 이런 걸 결심했어요. 뭐냐구요?
"어떤 순간에도 절대 화내지 말자. 화를 내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극소수의 순간 이외에는
절대 화내지 말고 웃음으로 되돌려주자."
근데 잘 될까요? 저?^^

sslmo 2011-09-03 14:01   좋아요 0 | URL
화가 나면 참지 말고 화를 내야죠, 참으면 병 되잖아요~^^

그 당사자에게 화를 낼 수 없다면,
님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외칠 수 있는 대숲을 하나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전 이제 얘기하고, 표현하고 사는 편이예요.
싫은 것도 얘기하지만, 좋아 죽겠는 것도 얘기해요.

살짝 귀뜸해 드리자면...전 프레이야님이 좋아 죽겠어요~^^

2011-08-30 22:50   좋아요 0 | URL
저도 여태까지 본 곽노현이란 사람이 그렇게 남모르게 뒷거래를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아요. 어떤 분 말씀은 그런 경우에 선거비용을 보전해 주는 것이 '관례'라는 말도 하면서, 진보진영이 너무 쉽게 사람을 버린다고도 하더군요. 여튼 끝까지 잘 버티시길 바랍니다.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ㅠ.ㅜ

차라리 진정한 대화를 하지 않을 바에는 책을 친구하겠다는 말. 오늘 <책에 미친 바보>에서 보며 위로를 얻은 말인데요. 여기서 또 보니 신기하네요.^^ 생각나는 얘기가 있어요. 소로우가 에머슨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다 서로 멀어지게 되었을 때 그런 말을 했대요. "함께 높은 곳을 걸은 친구는 낮은 곳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의 말인데요. 본래 말은 더 멋있었을 거예요. 아마.. 이 말, 참 인상적이었어요.

sslmo 2011-09-03 14:13   좋아요 0 | URL
곽노현이 뒷거래를 했건 안 했건...그건 차치하고라도,
그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들이 있어 덜 외로울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덕무가 참 좋아요.
김탁환의 '열하광인'을 보면 이덕무가 좀 자세히 그려지고 있는데,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야뇌 백동수에 관한 얘기도 나오는 것이...재밌어요~^^

글샘 2011-08-31 08:54   좋아요 0 | URL
넓은 맘은 사회적 배려처럼 흔한 것일 수 있지 않을까요?
속 깊은 사람 만나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깊다는 거... 한 길 사람 속이 그렇게 깊을 수도 있다는 거...
그거 하나가 인간의 매력이죠. ^^
책을 읽노라면, 그 매력에 빠질 수도 있고 말입니다.
아, 벌써 9월이네요.
구월의 이틀... 정도는 온전히 내 시간을 가지고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따가운 햇살이 아직도 싱싱합니다.

sslmo 2011-09-03 14:17   좋아요 0 | URL
구월의 이틀,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나오셨나요?

바쁘시죠?
즐거운 상상이랑 엮어서 같이 하면 덜 피곤하실까요?
맛나고 좋은 음식도 챙겨 드시면서 쉬엄쉬엄 하세요.
아프시면 안돼요~^^

2011-08-31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1-08-31 14:55   좋아요 0 | URL
자기한테만 유리하게 적용하는게 원칙이고 배려고 법이라면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물론 상황이 꼬였다고 하더라도요~
고전sf소설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어떤 상황하에서 집단의 일원이 혼자서 하기에는 윤리적이지 않은 일을 집단이 하면 윤리적일 수 있는가"

sslmo 2011-09-03 14:46   좋아요 0 | URL
윤리라는 말 자체가 집단의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다'해야 님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는 걸까요?
님의 취지를 파악 못해, 댓글의 방향을 잃고만~ㅠ.ㅠ

2011-08-31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8-31 19:44   좋아요 0 | URL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군요! 정말 공감할 만한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정치에 정말 관심이 없나 봅니다. 곽노현이 뭘하든, 서울 시장이 사퇴를 하건 뭘 하건..길건너 불구경하는 수준도 안됩니다. 전혀 관심이 없어요~

다 똑같은 넘들이 그냥 지럴허다 말것지...하는 심정입니다..에휴~


sslmo 2011-09-03 15:04   좋아요 0 | URL
무엇이 우리 yamoo님을 길 건너 불구경 하도록 만들었을까요?
그래도 너무 멀리 '강'을 건너 가진 않으셔서 다행입니다요~

'길' 건너니까 여차하면 물동이를 같이 들고 계시지 않을까요?^^

루쉰P 2011-09-02 13:26   좋아요 0 | URL
진정한 친구를 만나는냐는 문제는 내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냐는 문제와 통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상대만 찾다 보면 결국은 못 찾을 것 같아요. 사람은 참 무섭죠.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있는냐는 질문은 하기 힘드니 말이에요. 저도 많은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하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됐는지는 의문이에요. ^^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돼고 싶다는 것이 저의 마음입니다. ㅋㅋ 근데 항상 마음과는 틀리게 내 안의 어둠이 깊어 사람을 근접시키지 못 하는 자신이 돼 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도 하구요. 배신당해도 좋다. 내가 그에게 진정한 친구가 돼 보겠다란 것이 제 정신입니다. 흠...왠지 멋있는데요. ㅋㅋ
그래서 양철나무꾼님께도 진정한 친구가 될려고 합니다. 풉!!

sslmo 2011-09-03 15:09   좋아요 0 | URL
님의 댓글을 읽으니 '근묵자흑'이란 말이 생각나요.
자신 안에 어둠이 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둠을 간과하지 않을거예요.
친구라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1-09-02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6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6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1-09-05 01:57   좋아요 0 | URL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예요.
내가하면 사랑이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기준 잣대를 어디에 두고봐야 하는건지...
전 그저 조용히 지켜보려구요.^^

sslmo 2011-09-06 15:13   좋아요 0 | URL
적어도 내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벼려 내 자신에겐 떳떳해야겠죠.
근데, 가끔 제 자신조차 흔들릴 때가 있어서 말이죠~ㅠ.ㅠ

라로 2011-09-05 03:09   좋아요 0 | URL
맘이 복잡하고 쓸쓸하고 우울하고,,,등등
온갖 미운털이 박혀있는 일상에
님의 선물이 도착했어요~.^^
책만 보내실 줄 알았는데 커피까지!!
늦은 생일 선물이라시며 보내 주셨지만
이렇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정말 감사드리고 저도 이렇게 알라딘에 있다 보면
오고 가는 정을 드릴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늦은,,아니 너무 이른 시간이에요.
오늘 하루도 즐겁고 따뜻하시길 바랄게요~.^^

sslmo 2011-09-06 16:59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에게 책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요.
게다가 저보다 다독에다가, 책을 고르는 안목도 한수 위인 님 같은 경우엔 말이죠~

어떤 책을 같이 보낼까 고민하다가...제가 좋아하는 커피를 함께 보냈어요~^^
님 마음에도 드셨음 좋겠어요.

햇빛눈물 2011-09-13 21:09   좋아요 0 | URL
저 또한 곽교육감님의 진정성일 믿는 축에 속합니다. 곽교육감님의 사건이 터진 이후 학교 내에서 사건에 대한 대화 패턴은 극명하게 둘로 나뉩니다.(진보건 보수건 상관없이) 즉각 사퇴해야 한다. 아니다 본인이 떳떳이 밝힌 마당에 제대로 조사해야한다. 사퇴는 시기상조다! 솔직히 전 둘다 아닙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곽교육감님은 어설픈 선거제도로 인한 마음 약한 희생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건에 '도덕성' 운운한다는 자체가 보수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갇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거 같습니다. 도대체 '도덕성'이 뭘까요? 갈수록 근본적인 문제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난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컸다.
하루종일 말을 나눌 친구라곤 복덕방에 모이는 할아버지 친구들과, 노인정에 모여 TV를 보는 할머니 친구들이 전부였다. 
그때 포차 떼고 장기를 두어도 맨날 날 이겨 먹는 복덕방 할아버지들과 텔레비젼에 나와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멋지게 부르는 하춘화가 내 '맞수'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학교를 들어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또래의 친구들이 생겨났다.
개 중엔 나와 경쟁관계도 있었으니, 이때부터가 진짜 '맞수'였을 것이다.

'힘, 재주, 기량 따위가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를 '맞수'라고 한단다.
나는 '맞수'라는 말이 갖는 '경쟁 상대'라는 의미보다는, 나를 노력하게 하고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도록 '자극하는 대상'이라는 데 방점을 찍고 싶다.
맞수는 내가 이기고 쓰러뜨려야 하는 경쟁 상대나 적이 아니라,
나를 노력하게 하고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나를 깨어있게 하는 '동무'이다.

나이가 들면서 맞수가 없어졌다.
직장과 가정은 내게 어떤 경쟁관계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던 대상들도 없다.

"애인을 만들어봐...그럼, 일상 생활에서의 무료함, 자잘한 권태는 거기에 묻혀서 아무것도 아냐..."
하는 누군가의 자상한 충고에 나는,
일 잘하는 게 멋있어 선택한 애인은...일이 먼저라며 나에게만 올인하지 못하니까 시큰둥해지더라고 했던 것 같다.
반면, 나에게만 올인하겠다는 애인은... 내 할일 다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만을 자기에게 할애해도 좋다는데, 왠지 내가 그의 또는 그가 나의 자투리 시간 땜빵 용인거 같아 끝내버린 얘기도 한것 같다.

표면적인 얘기는 애인이나 연인 등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지만, 난 거기서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상대)의 부재를 보았다.

나를 깨어있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눈을 반짝이고,
발걸음이 가벼워져 구름 위를 걷는 듯 엉덩이를 살살 흔들어가며 사뿐히 걷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콧소리를 살짝 섞어 애교를 떨고,
그럴 수 있는 상대를 못 만난 때문이라고 툴툴 거렸지만,

한걸음 떨어져 내면을 들여다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그 무엇도 나를 깨어있게 할 정도로, 경쟁을 할 정도로 치열하지 않아졌다.
 

내 삶에 제일 앞에 놓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
그동안의 내가, 일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바쳤다면...이젠 일을 하면서 에너지와 열정이 샘 솟는 그런 일을 찾고 싶다.
그동안의 나로 미루어 찾아야 하는 건 일이 아니라 대상일테지만 말이다.

아무리 좋아하던 것이라도 일로 하게 되면...치열한 경쟁 구도로 만들어 버렸었던 그동안의 내 모습이 맘에 든다는 건 아니다.
무엇인가 나를 깨어있게 하는 그 대상을 만났을때,
그게 일이 되어 버리고,
경쟁상대=맞수가 되어버려 치열해지고,
그리하여 내가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봐, 잃게 될까봐...지금도 좀 두렵다.

그렇다고 머리와 마음과 몸을 다 따로따로 움직여가며,
'외로워, 무료해, 권태로워...'하면서 에너지를 최대한 분산시키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 또래의 다른 여인네들처럼 꼬박꼬박 네일케어나 피부관리를 받으러 다니거나...
창 넓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세련된 바지런함 또한 절대 따라갈 수도, 따라가고 싶지도 않다.
더 늦기전에, 내 자신을 깨어있게 하는 게 무엇인지...내 자신의 내면과 마주앉아 곰곰히 고민해 보아야겠다.
그런데, 아직 난 내 자신의 내면과 다른 언어나 다른 음역대로 얘기하나 보다.
아직 답을 찾을 수 없다.
  
 

 

 

 

 

 게임의 명수
 이언 M. 뱅크스 지음, 김민혜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이언 M.뱅크스'가 쓴 <게임의 명수>를 보면, 구게라는 게임플레이어가 나온다.
그는 실은 인간이 아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컬쳐란 종족으로 죽지도 않는다.
컬쳐란 종족에는 돈이란 개념이 없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 내기 게임도 시큰둥해진다.
삶에 의욕도 없다. 

구게는 게임의 일인자이다.
게임을 그렇게 시큰둥하게 하다가 그만 위기에 몰리게 되고 속임수를 쓰자는 유혹을 받게 된다.
실제로 속임수를 쓰지 않았지만, 속임수를 쓰자는 유혹을 받아 들인걸 빌미로 다른 (아자드)제국과의 게임을 강요받는다. 

다른 제국과의 게임은 실제 전쟁과 흡사하다.
처음 구게는 자신의 종족, 컬쳐의 방식대로 게임에 임하다가 위기에 몰린다.
점점 게임에 익숙해지면서, 아자드 제국의 문명에도 익숙해지고 아자드 제국의 이질적 문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냥에까지 동참하게 된다. 

구게는 다른 문명에 익숙해지고 이질적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게임에 이기게 되고,
구게 자신은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모르지만...다른 제국과 게임을 하는 동안 적어도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때, 가정의 소중함마저 깨닫게 된다. 

구게의 진정한 맞수는 구게와 게임을 하였던 다른 제국의 게이머들이 아니라, 구게를 유혹하고 게임으로 내몰아 치열하게 살도록 한 '모린-스켈'이란 드론이 아니었나 싶다.

 

 

 

 

 

 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011년 8월 


'맞수'하면 아무래도 바둑을 빼놓을 수 없고, 이창호와 그의 스승 조훈현이 생각난다.
그런 이창호의 책'부득탐승(不得貪勝)'이 나왔다,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바둑계에는 내제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제자란 일본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도제(徒弟) 제도가 바둑계에 접목된 형태로,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기예를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선생님은 이 일로 “이제 겨우 서른둘인데 무슨 제자냐”, “창호네가 전주의 알부자라던데, 아마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매달 상당한 수업료를 받고, 입단하면 거액의 사례금을 받기로 했다더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억측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제자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일본유학 시절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선생의 내제자로 들어가 아무 대가 없이 가르침을 받았듯이, 나에게 또한 대가 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선생님 댁으로 들어섰을 때 불과 몇 년 뒤 우리 사제가 타이틀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과 나는 물론, 선생님의 가족도 나의 가족도 그 누구도 내가 가까운 장래에 ‘절대자 조훈현’으로부터 타이틀을 쟁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훈현이 한국바둑 최초로 내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관철동(한국기원 종로회관)에 퍼지자 선생님의 동료들은 일제히 “호랑이새끼를 키워서 나중에 물리는 거 아니냐”며 농담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특유의 속도감이 배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제자에게 지면 행복한 거지. 그래도 한 10년은 걸릴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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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4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8-24 19:14   좋아요 0 | URL
아무 댓글도 달 수 없네요. 저도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주제라는 말만...그런데 저는 그게 그때 저의 상황때문에 부딪히게 된 고민인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 그리고 이 페이퍼를 읽으며 다시 확인되는 것은, 그게 살면서 한번 딛고 가야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였어요. 마흔 무렵에 통과 의례를 겪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네일 케어 받고 피부 관리 받는 여자들의 삶도, 우리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가 아닐거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고작 알아낸 것은 그 정도 같네요.

sslmo 2011-08-25 17:19   좋아요 0 | URL
통과의례라 하시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싶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그럴까요?
좋고 귀한 깨달음을 귀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로 2011-08-24 20:27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삶에 제일 앞에 놓을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어서 그런지 예사롭게 읽히지 않네요.^^
우리 화이팅 하자구요!!

이창호의 저 책은 저도 찜해놓고 군침만 흘리고 있어요. 이번 달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지른 죄가 많아서,,,ㅠㅠ

2011-08-25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8-24 21:40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은 맞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제가 맞수가 되어줄게요. 십 년만 기다려줘요. 오호호호홋.

sslmo 2011-08-25 17:33   좋아요 0 | URL
10년이라...불공평해요~
님은 한층 더 반짝 반짝해 지실테고, 전 소진하고 사그러들지 않을까요?
우후후후훗~!

글샘 2011-08-24 21:59   좋아요 0 | URL
맞수! 맞다구요!!
답이 없는 것도 맞고, 겁쟁이인 것도 맞고 ㅎㅎ

sslmo 2011-08-25 17:37   좋아요 0 | URL
뭐가? 맞냐구요??
설마...제게만 통용되는 얘기는 아니겠죠?
답이 없는 것도, 겁쟁이인 것도~^^

꿈꾸는섬 2011-08-24 23:38   좋아요 0 | URL
맞수...그게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이제야 하는 저는 뭘까요?

sslmo 2011-08-25 17:39   좋아요 0 | URL
그동안 그만큼 경직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다는 얘기가 되겠죠.
모든 걸 맞수=경쟁상대화 시켜버리면 삶이 좀 빡빡하잖아요~^^

마녀고양이 2011-08-25 14:45   좋아요 0 | URL
우와................ 멋진 페이퍼.
그런데 나는 맞수 말구, 질리지 않게 놀아줄 상대가 필요해.
너무 만만해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영 포기하게 만들지도 않는 그런거......
하지만 내가 인정할만큼 멋져야 한다는거 그게 전제 조건이야.

sslmo 2011-08-25 17:44   좋아요 0 | URL
그게 맞수지, 다른 이름으로 호적수, 영어로 soul mate쯤 되려나?
난 soul mate말고, 그대에게 another mate가 되고 싶어, ㅋ~.

마녀고양이 2011-08-27 14:33   좋아요 0 | URL
another mate가 머야?
나 사전까지 찾아봤잖아, 내가 생각하는거 말구 다른 뜻 있나 해서.
수많은 친구 중에 하나란 의미야? 흑흑....... 나 그거 안 할거야!

나는 only one! 아라찌!

추신 : 나 오늘 과부야. 코알라도 날 버리고 외가 갔어. 그리고 자기한테도 버림받아서 하루종일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하에서 알라딘에서 노는 중이야...... 흑흑흑.

sslmo 2011-08-29 16:46   좋아요 0 | URL
one, another, the other...말 그대로야.
one-->soul 말고,
soul과 짝이 될 수 있는 body도 생각해 볼 수 있고(soul & body),
soul과 다른 짝이 되는 heart를 생각해 볼 수도 있고(soul & heart)

주말 내내 힘들어 하더니 좀 괜찮아?^^

pjy 2011-08-25 17:43   좋아요 0 | URL
'힘, 재주, 기량 따위가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대' 맛수로 칠만한 배우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굉장히 건설적인 방향으로 살아보고 싶은 꿈과 희망을 아직도 부여잡고 있습니다~ 물론 49:51로 제가 이기고 싶습니다ㅋㅋㅋ

sslmo 2011-08-25 17:47   좋아요 0 | URL
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근데, 살다보니 배우자가 맞수인것도 재밌고 건설적이겠지만...
저보고 배우자를 다시 고르라면 존경할만한 사람을 택하겠어요~^^

쉽싸리 2011-08-25 19:59   좋아요 0 | URL
스승은 그저께 7연승했고 제자는 오늘 졌어요. 더구나 지금은 맞수는 아니죠.
오랫동안 '맞수'가 있다는 것도 매우 기쁜일 이지요. 그래야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견딜수 있는게 아닌지...
일과 생활의 스트레스를 거의 매일 바둑으로 푸는 저로써는 아직까지 삶이 '승부'가 되는 지경으로 치닫진 않았다는데 안도합니다.

sslmo 2011-08-27 09:37   좋아요 0 | URL
앗!프로필 사진이 바뀌셨네요.
강아진가요, 귀여워요~^^

전, 승부가 나야하는 건...이겨야 한다는 못된 습성이 잠재해 있어서요,,,
바둑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님이 이해불가지만~
뭐,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은지라...ㅠ.ㅠ

이사 정리는 얼추 되셨나요?^^

cyrus 2011-08-25 20:02   좋아요 0 | URL
맞수라,, 생각해보니 살면서 맞수에 대해서 신경써본 적이 없었던거 같아요. 그래도 상대방의 능력이
나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해서 은근히 질투 정도는 해봤는데 이런 것을 맞수라고 하기에는 그렇고요.. ^^;;


sslmo 2011-08-27 10:42   좋아요 0 | URL
전 오르지 못할 나무를 향하연 쿨~하게 존경을 날려버려요.^^

문제는 요즘,,,어느 나무이고를 향해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건지도~ㅠ.ㅠ


프레이야 2011-08-25 21:08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말해 소위 '임자 만났다' 의 '임자'쯤 되는 건가요.ㅎㅎ
양철댁님 페이퍼는 늘 참 좋아요.
그냥 그래요.^^

sslmo 2011-08-27 11:00   좋아요 0 | URL
1 . 물건을 소유한 사람.
2 . 물건이나 동물 따위를 잘 다루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3 . 부부가 되는 짝.

국어사전 찾아봤어요.
님이 말씀하신 건 2번이겠죠? 전 3번에 가깝게 생각했었나 봐요~^^

좋다고 해주셔서, 좋아요.
덕분에 아침부터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해요~^^

2011-08-2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7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8-26 21:49   좋아요 0 | URL
아.. 과연 양철님의 삶의 제일 앞에 놓아 둘 그것은 무엇일까..

만일 찾게 되신다면? 또 어떻게 바뀌게 되실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sslmo 2011-08-27 11:54   좋아요 0 | URL
아~바람결님이당~^^
반가워라...

ㅎ,ㅎ...근데 제 죽 끓듯한 변덕을 벌써 간파하셨어요???

風流男兒 2011-08-29 13:33   좋아요 0 | URL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의미있는 선택을 하게 되시리라 믿어요.
참 좋은 글 다 보고난 순간, 제게 양철님은 너무 훌륭한 맞수신데요 ㅎㅎ
(물론 양철님은 맞수가 없다는 게 제일 큰문제긴 한데 쿨럭 ^^)

sslmo 2011-08-29 16:49   좋아요 0 | URL
뭔가를 선택하고 나면 안주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하겠죠~
참 좋은 글이라고 해주셔서, 맞수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딘에서 만나게 되는 분들은 실제적이지 않아서 맞수의 범주에서 제외되었습니다.(쿨럭~--;)

하늘바람 2011-08-30 00:45   좋아요 0 | URL
와우 저도 나인님과 같아요
어쩜 이리 멋지게 생각을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sslmo 2011-09-03 09:50   좋아요 0 | URL
ㅎ,ㅎ...저는 나름 치열했는뎅...멋지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2011-08-30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1-09-05 02:05   좋아요 0 | URL
학교 다닐때도 직장생활에도 나 잘났다고 살았는데...
모든것 접고 아이들의 엄마로 살면서 그런거 하나도 못 느끼는 저는 어쩌나요?
오랜만에 들려 읽지만 역시 양철나무꾼님 글이 너무 좋아요.^^

sslmo 2011-09-06 14:33   좋아요 0 | URL
와~넘 오래간만이예요, 반가워요.
저도 요즘 그런거 하나 못 느낀다니까요~^^

제가 같은하늘님 같은 분들께 하는 말이 있어요.
아이 잘 키우는게...젤 중요하다니까요~!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혜가: 마음이 너무 무거우니 덜어주십시오.  
달마: 마음을 갖고 오너라 
혜가: 마음을 찾아보아도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달마; 찾아낸들 그것이 그대의 마음인가?
 
 

혜가와 달마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때로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통통 튀는 짬뽕공도 아닌 것이 어디로 튀는지 싶을 때도 있고,
움켜쥐었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연기처럼 실체가 없을 때도 있다. 
단지 마음이 뻐근하고 아파올 때, 어디를 치료해도 여의치 않을 때...마음이란 것이 있고, 그것도 내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은 <안녕, 우울증>이다.
우울증을 직접 대면하게 되고 실체를 파악하게 되는 'Hi, 우울증'일지, 쾌차하여 안녕을 고하는 'Good bye, 우울증'일지는 이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의 지은이 '강용원'은 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알라딘 책 소개를 보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는 학문이라 판단하고 삶의 행로에 대해 고민을 거듭하다가 신학을 공부해 성직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본적인 사목과 대학생, 청년 교육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던 중 이 땅의 사회, 역사 문제에 눈뜨게 되면서 자신이 속한 생명공동체의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직을 내려놓고 사십대 중반에 한의대에 입학, 우리 생태에 맞는 의학이 무엇인가를 탐색하였다. 학업을 마친 뒤 ‘마음향기한의원’을 열어 마음 관련 질환, 특히 우울증을 우리 방식으로 치료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지금은 아픈 사람 하나하나를 앉아서 기다리는 수동적인 개인 치료 방식을 잠시 접고, 이른바 3대 신성학문을 모두 공부한 인생의 뜻을 곡진히 살피면서 능동적 사회 치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글쓰기와 대중강연에 힘을 모으고 있다.

라고 되어있다.
그의 이력을 알아야 '남성한의사, 여성 우울증의 중심을 쏘다'라는 부제를 단 책이 그럴 듯 해진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리하여 본인 스스로 우울증을 앓았으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서양의학에서의 상담은 상담자가 피상담자와 분리되어 있고, 상담자가 완전하다는 전제가 있으며, 상담자는 말을 하기 위해 분석하면서 피상담자의 말을 듣지만, 저자는 듣기 위해 말을 하고, 가슴을 열고 귀를 기울인다는 차이점이 있단다. 저자는 이를 위해 ‘우리말 생태’와 대중가요 등을 활용한 ‘서민적 텍스트’를 통해 한국적 상담 치료법을 개발해 치료에 활용하고 있단다.

눈에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것으로 세계를 사물화한 이 문명의 프로크루스테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노상강도)식 발상은 심지어 마음조차 뇌에 가두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뇌를 포함한 우리 몸 전체가 삶의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사건ㆍ운동doing이지 뇌의 산물being이 아닙니다. 몸 문명이 내다버린 마음은 무한히 생성하고 변화하는 자유로서의 생명 현상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복원은 자유의 복원입니다. 자유는 평등한 소통을 부릅니다. 소통은 모든 생명이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공존과 평화의 위대한 가치를 향해 가려 할 때 마음의 복원이 없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38쪽)

 

그러므로 자신을 비우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비우라는 말의 전제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린 절대 다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자신을 돌려주어야 진정한 비움의 세상이 도래합니다.(40쪽)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의를 기울이는 주체, 즉 행위자로서 마음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를 기울이는 상대방, 즉 마주 선 주체로서 마음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우선 주체, 즉 행위자 문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이 마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사는가를 묻는 것이 지금 우리가 나눌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지닌' 존재라고 하지 않았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간과한 것이 서양의학과 전통적인 한의학이었습니다. 마음을 동사가 아닌 명사로 파악한 것이 둘의 실패 요인입니다. 마음은 사건이므로 지닐 수 있는 사물이 아닙니다. 흐르는 파동입니다. 구조를 흔드는 운동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며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생명이 주위 조건과 함께 부단히 일으키는 상호작용입니다. 소통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마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산다는 것은 자신이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는 마주 선 마음 존재에 먼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말을 엮고, 인격을 엮고, 삶을 엮습니다. 함께 도약합니다. 통섭입니다. 결국 마음의 존재로서 산다는 것은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것입니다. 
통섭으로 열린 길을 가는 의학의 주체는 환자 앞에 경청하는 존재로 섭니다. 병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말부터 앞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환자 자신, 그 마음을 듣는, 그래서 그 인격과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병을 확인하고 약부터, 그리고 끝내 약이나 처방하는 자는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병을 통해 사람과 삶을 만나 더 평화롭고 행복한 길을 함께 가도록 돕는 자만이 의사입니다.(51~52쪽)

 

위대한 영적 스승들도 인간적 약점과 고통을 안고 있었던 게 사실이고 보면 마음을 치료하는 의자醫者가 이런 유의 흔들림 족에 있다는 게 그리 대수로운 화제가 될 리는 없을 테지요. 다만 이 이야기를 통해 환자와 의자의 인간적 소통으로 치료 연대를 만드는 일이 좀 더 자유롭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병이 전염되듯 치료도 전염됩니다.(72쪽) 

 

우울증 상담치료를 하다 보면 거의 모든 경우에 맞닥뜨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사람 우울증 고쳐 놓으면 뭐 하나. 가족도 그대로, 친구도 그대로, 직장 사람들도 그대로인데...하는 답답함입니다. 모든 마음의 병, 특히 우울증은 대부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것인데, 달랑 그 사람의 삶의 지향성만 어루만져 보았자 관계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현실에서의 삶의 변화 가능성은 그리 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92쪽) 

 

다음은 사소한 일상의 습관들 속에 속살을 감추고 있는 우울증의 양상(105쪽)이란다.
몇개나 해당되는지 체크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실없다 싶을 정도로 잘 웃는다,
늘 양보한다, 따스하게 남을 배려하며 보살핀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한다,
손해 보고라도 공존을 꾀한다,
급기야 자기를 베어 남을 살리는 자기 파괴적 희생을 감수한다,
경쟁 국면에서 물러선다,
직장생활에서 언제나 일 많은 곳에 배치된다,
꼭 못된 상사를 만나 고생한다,
사고를 자주 당한다,
상대방(연인)의 약점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심각할 정도로 숫기가 없다,
거절당할까 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그냥 침묵한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노력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에 좌절한다,
좋은 기회를 놓치는 징크스가 있다,
아무리 푹 쉬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고 무력하다,
목표를 성취했을 때 이상하게 허망해진다,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때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상대가 떠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휘말린다,
등등...

어찌되었건, 좋은 수필 한편을 읽은 느낌이다.
본인이 겪은 기록이어서 전해져 오는 깨달음도 남다르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로서의 한방치료...갈 길이 멀다. 
본인의 경험을 환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환자들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 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또 한번의 상담만으로 완치된 걸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은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서민적 접근이라고 하기엔, 환자와의 상담시간과 비용의 문제도 환자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다.
부수적으로 금액이나 보험 수가의 문제도 있다.
우리주변의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질환이니, 문턱을 낮추고 금액의 형평성을 맞추는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울증이란, 자가 치료나 가족 치료가 가능한게 아니다.
다만 '우울증이 이런 것이다' 하는 본인의 경험이 우러난 예가 자세히 나와 있어, 미루어 보고 접근하기 쉬울 뿐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듯, 우울증의 증상이나 발현도 다 다른데...치료법이나 약 따위는 너무 뭉뚱그려 나왔다는 느낌이 든다.
독자의 범위를 상담자로 봐야 할지, 피상담자로 봐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 책을 이렇게 끝내서는 훌륭한 한의사 한명을 홍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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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8-19 14:55   좋아요 0 | URL
우울증 양상 체크하다보면 거의 해당되다시피 해서 이젠 안하려고 마음먹어요 님
그런데 님 많이 우울하신가요?
저도 님께 치료제가 되어야 하는데~

sslmo 2011-08-19 15:16   좋아요 0 | URL
ㅎ,ㅎ...때로 때떄로 우울하긴 하지만, 이 책은 직업적 호기심으로 읽었어요.
님이 날려주시는 추천 한방, 달아주시는 댓글 한줄이 제게는 직빵인 치료제 랍니다~^^

yamoo 2011-08-19 14:57   좋아요 0 | URL
한 때 정신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이 쓴 에세이들을 탐독한 때가 있어요. 이나미씨부터 시작해서 김정일, 양창순 등~

언제부터인가 찾지 않게 되더라구요...왜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책들은 매우 유익한데 말이죠.

이 책은 어떨지...궁금은 하지만 절대 읽을 일은 없을거 같아요. 그래서 리뷰라도 꼼꼼히 보고 갑니다~

sslmo 2011-08-19 15:2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실체가 없어 소외되기 쉬운 마음의 비중을 확고히 한다는 것만으로도 일독할 가치는 있어요.
하지만 그 이상...실생활에 적용, 치료법을 엿보고 하는 것을 바라선 안될 것 같아요~^^

제 리뷰를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왠지 쑥스럽지만 좀 좋아요~^^

마녀고양이 2011-08-24 10:32   좋아요 0 | URL
일단 나무꾼님의 결론에 저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양 상담학 가정에 이의가 있네요. 머, 서양 의학이다 한의학이다 나누는 자체도 좀 우습지만요.
상담자가 내담자와 떨어진 존재이고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은 <정신 분석학> 상담에서의 전제 조건이구요,
<인간 중심 상담>이나 <인지 상담>, <실존 치료> 쪽은 상담자도 불완전한 존재라고 인정한답니다. 또한
요즘 더 나아가 수용하고 포용하는 쪽이 상담의 추세이며, 한의학이나 명상과도 상당한 교감이 이루어진다고 압니다.

저자의 말은 따뜻하나, 처음 전제 자체가 오만하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책을 읽지 않았으니, 리뷰를 통한 생각이지만요~ ^^. 그런데 양철댁, 오랜만이여, 얼굴 좀 보여줘잉.

sslmo 2011-08-25 14:24   좋아요 0 | URL
사실 이 분 한의사지만, 이 분이 얘기하는 건...양의학도 한의학도 아닌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이분 종교적, 학문적으로 엄청 깊이있으시긴 하더군요~^^

과정이 따뜻하면 전제 자체가 오만해도 좋은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어디서나 기준이 되는 가치는 필요한거니까 말이죠.

아이리시스 2011-08-19 16:55   좋아요 0 | URL
그나마 다행인 게 전 우울증 아닌 것 같아요. 대부분 다 해당 안돼요. 다행이죠?^^ 생각해보니까 저는 완전 제 잘난 맛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인가 봐요. 하하. 잘 계셨어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 저는 사진으로!

sslmo 2011-08-25 14:35   좋아요 0 | URL
대부분 다 해당 안된다고요? 그 거짓말 진짜예요?
잘 웃지도 않고, 양보도 안 하고, 남을 배려하지도 않으면...딱 B사감 스탈인데~^^

맞나 틀리나, 얼굴 좀 보여줘요~^^

2011-08-19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19 21:45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반가운 리뷰에요.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 작가의 이력 못지않게 문체가 독특했어요.
좀 추상적 접근이고 문장의 근사한 매력에 더 휘말리게 되는 단점이 있었어요.
특히 우리나라 여성의 우울증, 평생을 살며 여성의 몸이 갖는 트라우마 같은 부분엔 공감이 팍~ 되었답니다.

sslmo 2011-08-25 14:41   좋아요 0 | URL
반갑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맞아요~
좀 개인적이고 신변잡기적인 글이 되어버렸어요.


cyrus 2011-08-19 23:19   좋아요 0 | URL
남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성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과 저자의 이력이 참으로 독특하네요.
우울증이라는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거 같은데,, 아무래도 사람들마다 증상이 다르니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하더라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인거 같아요.
미래에는 암 대신에 우울증이 불치병이 되지 않을까,,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

sslmo 2011-08-25 14:48   좋아요 0 | URL
불치병은 아니어도 난치병이다,,,에 한표 하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난치병의 종류 - 무좀, 기미, 중독...^^)

님도 님이지만, 어머니 종종 챙겨드리세요~^^

세실 2011-08-20 07:11   좋아요 0 | URL
우울증은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서 오는군요. 하긴 못된 상사의 비중이 굉장이 크더라구요. 저라면 적당히 무시하며 살텐데 ㅎ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을까? 그리웠어요, 양철나무꾼님!

sslmo 2011-08-25 14:50   좋아요 0 | URL
그리웠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 증후군은 관계에서 오나 봐요, 관계를 차단해 버리면 증상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근데, 관계가 그립고...사람이 그리워서 말이죠, 쿨럭~!

꿈꾸는섬 2011-08-22 16:21   좋아요 0 | URL
저 요즘 우울해요. Goodbye, 우울증하고 싶어요.

sslmo 2011-08-25 14:57   좋아요 0 | URL
제가 '타쿠나 마타타' 노래 불러드릴게요~^^

소나무집 2011-08-23 09:31   좋아요 0 | URL
생활 속에 감추고 있는 우울증 양상들이 저도 상당히 많네요. 다예요.

sslmo 2011-08-25 15:01   좋아요 0 | URL
저도 때때로 많이 겹칠때가 있어요~^^

숲노래 2011-08-24 03:49   좋아요 0 | URL
어차피 도시에서 살아가며 병을 조금 다스려도 다시 도질밖에 없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텃밭을 일구어야 하고,
몸이나 마음이 깨끗해지고 싶으면 도시를 떠나야 해요.
그래서, 도시에 있는 한의원이나 병의원도 모두
한계일 수밖에 없는 처방을 내리거나 글을 쓸밖에 없어요.
모두들 '밑바탕(본질)'을 건드리지는 않아요.

한의원부터 도시를 떠나면 되거든요...

sslmo 2011-08-25 15:07   좋아요 0 | URL
ㅎ,ㅎ...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쉽게 도시를 떠나게 안돼죠.
저는 도시를 떠나야 하는 이유만큼이나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부류이기도 하고 말이죠.

도시에 살면서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은빛 2011-08-24 14:04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면 저는 10대 시절을 무척 우울하게 보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와 학교에 대한 반항이 좀 심한 편이었죠.
그런데 학생운동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을 하면서,
저 개인의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안쓰게(혹은 못쓰게) 되었어요.

요즘은 우울하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좀 사는게 재미가 없네 정도의 느낌이 가끔 들어요.

sslmo 2011-08-25 15:08   좋아요 0 | URL
'재미'가 주사나 바이러스였으면 좋겠어요.
님께 재미 주사 한방, 재미 바이러스 만발 퍼뜨려 드리게 말이죠~^^
 
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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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개미 등허리를 타고 남도록 따갑다'는 문장을 만날 무렵 , '볕이 몹시 눈부셔서 도끼날이 미간에 꽂힌 것 같았다.(332쪽)'는 표현을 이 책에서 만났다.

따사로운 햇살이고 싶지만...개미 등허리를 태우고 남을 정도로 따가운 걸 수도, 미간에 꽃힌 도끼날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살다보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또는 나는 선의였지만...내가 상대를, 상대가 나를 해치고 잡아 먹는 무한경쟁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개중 남을 해칠 수 없어 제 스스로를 잡아 먹는...유래도 찾아볼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책 '데몰리션 엔젤'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로버트 크레이스가 마이클 코넬리보다 좋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둘 다 외롭고 쓸쓸함을 마구 발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외롭고 쓸쓸함이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잡아먹도록 놔두는 사람들이라면,
로버트 크레이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남을 해칠 수 없어 제 스스로를 해치고 갉아먹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켜 자체치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감정을 뾰족하게 모두고 벼리었을 때는 흉기가 되지만,
가시가 뾰족한 고슴도치도 가시를 비껴가며 보금어 안을 수도, 체온을 나눠 가질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캐롤 스타키가 그런 존재다.
캐롤 스타키는 폭탄 수사관으로 폭탄 철거 작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기 자신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그 트라우마에 갇혀 자기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갉아먹는 듯 보였지만,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고 반영하여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면 좋은 점이 많다고 언젠가 다나에게 이야기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홀로 일어나 생활하는 게 더 편하기 때문에 고독을 즐겼다.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쳐다보지 않았다. 폭탄에 나가 떨어져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산산조각 난 상처를 도로 꿰맨 그 수사관이라고, 파트너를 잃은 그 사람이라고, 도망쳤던 그 사람이라고, 죽었던 그 사람이라고 하며 쳐다보지 않았다. 스타키는 이러한 문제를 다나와 상담한 적이 있었다. 다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거나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고 상상한 적이 있는지 물으면서 그녀에게 진실을 깨닫게 했다. 물론 스타키는 그 질문들을 모두 부정했다.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나가 꺠우쳐준 진실이 모두 옳았다. 고독은 그녀를 자유롭게 하는 '주문'이었다.(104쪽) 

그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트라우마에 갇혀 혼자 안으로 움추리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그녀를 소외시키는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사람들 속에서 분리해 내고는 고독은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는 주문이라는 말로 자위한다.
그 결핍을 술과 담배로 채운다.
그를 알게 되고...그가 그녀와 닮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그를 향하면서도,
상처 받기 쉬운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한 그녀는 더듬이를 잘릴까봐 두려워 하기도 한다.

스타키는 다급히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을 깨닫고 놀랐다. 지난밤 늦게, 또 오늘 이른 아침에,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고 신중하고 싶었다. 지난 3년의 세월은 그녀에게 채워지길 갈망하는 공허함을 남겼다.그녀는 그 갈망과 사랑을 혼동해선 안 된다고, 그 갈망 때문에 우정과 친절을 사랑으로 왜곡시켜선 안 된다고 혼잣말을 했다(304쪽) 

 

그의 호텔을 향해 차를 달리면서 스타키는 폭탄 해체 작업 중일 때와 똑같은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일종의 분리를 겪는 것과 같았다. 안전하고 편안한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살과 뼈는 있지만 감정은 전혀 없는 로봇이 되어 폭탄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공간에 들어서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감정에서 분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369쪽)

 

그녀는 펠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게 생각보다 꽤 힘들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과 논쟁을 벌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상처를 입은 것 같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난 모든 사람에게 비밀 심장이 있다고 믿어요. 비밀스런 자신을 보관하는 저 깊숙한 안쪽에 있는 심장이요. 난 우리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그 비밀 심장이 본다고 생각해요. 아마 내 심장은 내가 상처 받은 것처럼 당신이 상처받은 모습을 봤나 봐요. 우리가 영혼이 통하는 사람들인것처럼요. 아마 그런 이유에서 내가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거짓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 심장이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뿐이에요."(373쪽) 

캐롤 스타키를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는 씩씩하고 당찬 인물로 그려내는 반면,
잭 펠은 좀 유약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거짓말도 불사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는 그녀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녀를 안다는 것은 안 좋았다. 함께 있을 때마다 그는 그녀의 좀더 어두운 면을 발견하며 놀랐고, 그 때문에 죄책감이 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읽는데, 비밀스럽게 숨겨진 모든 사람의 진짜 얼굴을 보는 데 너무나 능숙했다. 펠은 아주 오래전에 모든 사람이 실제로는 각기 두 사람임을 알았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한 사람과 그 안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또 한 사람이었다. 펠은 비밀스러운 사람을 언제나 읽을 수 있었다. 단단한 쿠키 같은 스타키의 외면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사람은 애써 용감해지려는 작은 소녀였다. 작은 소녀는 전사의 심장이 있어서 자신의 삶과 경력을 새로 세우려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어서 괴로웠고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240쪽) 

 

펠은 차에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상처 입은 표정에서 그는 자신이 개자식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미스터 레드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 외에 다른 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녀 이름이 새겨진 파편이 있었다. 그는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진신을 말하고 싶었다. 마음을 터놓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 또한 마음을 닫고 지낸 지 오랜지라, 그녀가 유일하게 이해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는 점점 커져만 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에는 오직 미스터 레드만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미스터 레드가 어디서 끝냈고 자신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지 못했다.(332쪽) 

실은, 이 책에 남을 해칠 수 없어 제 스스로를 해치고 갉아먹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시켜 자체치유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들과 대비되는 그릇된 사랑도 등장한다.
그래서 폭탄이 등장하는 다소 생소한 상황이지만, 우리 주변의 일처럼 낯설지 않다.
칼은 다른 사람을 찌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찌른 칼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언젠가는 내 자신을 찌른다. 

오랫만에 여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해가며 읽었다.
과정의 생략이 빠른 전개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하게 느껴진다. 
숨막히고 긴박한 내용에 걸맞게 번역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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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8-12 02:38   좋아요 0 | URL
이런 귀여운 리뷰란... ^^
로버트 크레이스랑 소주라도 한 잔 해야겠군요. ㅎㅎ

sslmo 2011-08-12 13:48   좋아요 0 | URL
ㅎ,ㅎ...쫌 귀여웠나요?
로버트 크레이스는 자기 관리에 엄청 철저해서 소주 같은 건 안 먹을 것 같아요.
여주인공 캐롤 스타키를 알아보심이...
안 되면 아쉬운대로 저라도 대작해 드릴 수 있는데...^^

2011-08-12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1-08-12 11:13   좋아요 0 | URL
로버트 크레이스는 긍정적인 힘을 갖게 하는 작가군요

sslmo 2011-08-12 14:10   좋아요 0 | URL
네, 로버트 크레이스는 좀 멋진 것 같아요.
제 글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긍정적인 힘에 열 올리는 걸 읽어내신 님도 좀 멋지시구요~^^

2011-08-1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1-08-12 11:22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지냈어요? 제가 장르소설 구입하면 나무꾼님이 보신 책들을 무조건 구매 1순위예요. 건강하시죠?^^

sslmo 2011-08-12 14:15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리시스 님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제가 있는 이곳은 오늘 비가 많이 내릴거래요?
님이 계신 곳은 어떤가요?

다시 독서 시작하시면 귀뜸해 주세요.
제가 읽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 있으심 몇 권 보내드릴 수 있어요~^^

미지 2011-08-13 00:22   좋아요 0 | URL
다녀가셨더군요. 아직 책을 찾아 읽을 여유까진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동이 됩니다.^^ 자해적 사랑은 언제나 찡합니다...

sslmo 2011-08-19 14:48   좋아요 0 | URL
그 시 참 좋았거든요.
댓글을 쓰는 데...종적을 감추어 버려서 깜짝 놀랐어요.
다시 보이네요.
좋아요, 참 좋아요~^^

자해와 사랑, 왠지 삐그덕거리는 조합 아녜요?^^

2011-08-16 00:44   좋아요 0 | URL
음. 마이클 코넬리의 주인공보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주인공이 더 멋지고, 한 수 위군요. 읽으면 왠지 힘이 날 것 같아요.^^ 잘 지내시죠? 저도 글이 매우 뜸한 편이지만, 양철나무꾼님도 바쁘신 것 같아요~!

sslmo 2011-08-19 14:51   좋아요 0 | URL
마음이 좀 번거로웠었는데...그럭저럭 정리됐어요.

로버트 크레이스의 주인공이 좀 더 멋진 건 맞지만,
절망 속에서 샘 솟는 '힘'을 찾는 건, 읽는 섬님의 몫입니다요~^^

마녀고양이 2011-08-17 01:25   좋아요 0 | URL
여주인공이 얼마전 읽은 미로 탐정과 많이 비슷한걸.
세상에는 왜그리 결핍된 사람 투성이일까. 결핍된 사람이 아이를 낳으니 다시 결핍이 되는거고,
결핍된 사람이 사랑하면서 멀쩡한 사람도 결핍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결핍된 사람이 주위의 에너지까지 빨아들여 타인도 결핍된 사람으로 전염시키기 때문일까.

참 알 수가 없어, 결핍은 칼이 되어 타인을 찌르고 다시 자기를 찌르고, 악순환인 것을..
왜 그리 자신의 결핍이 훈장인 것처럼 다들 당당하게 내세우는걸까. 봐봐, 나는 결핍이니 네가 알아서 행동해 이런거.

sslmo 2011-08-19 14:54   좋아요 0 | URL
ㅋ,ㅋ...
마고님은 시를 써야 해.
정말 근사한 산문시 한편을 보는 것 같다니까...
잉여로 결핍을 채울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결핍이 넘쳐나 결핍이 잉여인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2011-08-19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9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