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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먼저 읽은 '상상목공소'와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상상목공소에서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해 내는데서 오는 한계점에서 '목공'이 시작되었다면,
이 책에선 사유를 언어로 표현해 내는데서 오는 한계점에서 '악보'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목공'으로 탄생시켰다면, 악보는 '중의성'을 담은 하나의 텍스트이다.
상상목공소의 날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연결된 공간을 넘나드는 꿀벌이나,
날씨에 따라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건사하며 나는 한마리 제비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이 책에서의 날개는,
몇번 크르렁 대고는 탈탈거리다가 풀섶에 머리를 처박고 곤두박질치는 무선조종 글라이더의 프로펠러가 연상됐다고 해야할까.
상상목공소의 그것은 낮게 날때 지형이나 입지를 자세히 관찰하며 즐길 수 있는 팁을 제공한다면,
이 책의 낮은 비행은 풀을 꺾고 땅을 파헤치는 것이 불안하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고치고 재정비해야할 여지가 있다.(이건 어디까지나 악보가 담고 있는 중의성을 내 맘대로 해석한 결과물이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투덜이 스머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똑똑하지만 잘난 척하는 '똘똘이 스머프'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투덜이 스머프에 가깝다.
투덜이 스머프로 말할 것 같으면 '난 OO가 싫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캐릭터이다.
세상일 모든 것에 불만이 있는 듯, 생각하는 것도 싫고, 일하는 것도 싫으며, 치장하는 것도 싫고, 요리하는 것도 싫으며, 즐거운 것도 싫다고, 다 모든 것이 다 싫다고 하는 불평분자, 비관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 투덜거림의 근원을 살펴보면 모든 일에 두루두루 관심을 갖고 정성을 쏟는다.
(그가 아기 스머프에게 쏟는 정성을 보면 본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심을 갖는데서 변화를 모색할 수 있고 발전도 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는 서곡에서, 나는 이 책이 소수의 단수들을 위한 책이 되는 것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극적으로 의도하고 적극적으로 조장한다고 얘기한 뒤 바로 몇 줄 아래에서 나는 나의 이 책이 하나의 전염병이 되기를, 역병처럼 창궐하기를 소망한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난 번역에 관심이 많아, 이분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 사건(?)이 자세히 알고싶어 이책을 구입하였고, 이 부분을 읽고 말 생각이었다.
읽다보니 어려워 책장을 후두둑 넘긴 부분도 있지만 나와 관심사가 겹쳐 재밌게 읽은 부분도 있다.
랑시에르의 번역과 관련하여서는 '번역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의 일부분만을 옮겨 보면 이렇다.
'그 번역의 전반적인 느낌이랄까, 서론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차례로 검토해 보면서 받은 개인적인 인상은, 역자가 단어들의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의미에만 얽매여서 그로 인해 기계적인 번역에 빠지게 된 경우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보다 슬프고 쓸쓸하고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비교 독해의 과정이었다고 할까.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께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나만이 품고 있는 지극히 '도착적'이고 '이상적'인 몽상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좋아했을,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존 레논의 노래<Imagine>가사의 한 구절처럼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But I'm not the only one".(368쪽)
이쯤되면 그의 투덜거림이 어지간한 애정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읽었던 이세욱님의 '로아나'가 떠오른다.
이세욱님은 '로아나' 하날 번역하길, 이탈리아어판 불어판 미국판 번역을 일일이 비교하셨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도 재미있었는데...
이 글은 15년 전 품었던 서적 분류법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시작한다.
현재 서른 네 살이니까 15년 전이면 열 아홉살인데, 그때 이미 서적 분류법에 의문을 품고 투덜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이 책이 '음악'코너에 분류되어 있지 않을까 우려를 표한다.
그는 문학적 분류법에 머물지 않고, 우리 문학의 위치를 재정비하고 문학의 나아갈 바를 조망하고 싶어한다.
그런 그이니 어쩜 세계문학 전집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게다가 현재성까지 아우르고 싶어한다.
내가 그의 시선이 따뜻하다고 여긴 이유는 다음 구절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세계문학은 없다' 따위의 부정적이고 확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어설픈 포스트모던의 몸짓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문학은 존재하며, 그러나 동시에 지금 존재하는 방식이 아닌 어떤 다른 형태로 존재하기를 요청받고 있다. 문제는 그 '세계'가 어떤 세계이며 또한 그 '문힉'이 어떤 문학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적'이고도 '문학적'인 요청으로부터 한 순간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계문학'이 우리에게 불편하게 묻고 있는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161쪽)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는 어떻게 보면 한없이 난해해 질 수도 있는데,
음악의 예술적 통일성과 통일적 일관성, 수행적 행위를 적절히 연결시키는 것도 경이로웠지만,
마르크스에서 맑스로 옮아가는 과정, 거기서 근로자와 노동자의 명명법으로, 김영하가 언급한 문학이 될 수 있는것과 없는 것으로 옮아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거기서 또 표리로, 인간의 내면으로, 모더니즘 소설의 주제가 되고 있는 인간 내면으로 넘나드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다.
여기서 또한번 번역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둔중하지만 무게감 있게 와닿는다.
...번역이란 단순히 일대일 대응의 옮기기가 아닌 것, 번역이란 오히려 무엇을 잃거나 덧붙인 상태에서의 어떤 변환 내지 전화轉化를 의미하는 것이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어떤 상실이거나 덧칠이다. 번역에 있어서는 언어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대일 대응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가감 없는 번역이란 없고 곡해 없는 해석이란 무의미하기까지 한 것...(179쪽)
요번엔 피식민지인, 식민지 종주국,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나오고 식민지적 언어의 특수성이랑 말이 나오는데, 그 자체로 근대적 번역이 처한 일종의 '보편성'이기도 하지 않은가.라고 얘기한다. 나도 고민하던 문제여서 슬프지만 공감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보고 '메치니코프'라고 했다는 일화, 거기서 확대해석한 '생명연장의꿈'등은 질펀한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었다.
깔깔거리고 웃고 있을때,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란 무엇인가'가 슬그머니 등장한다.
적재적소에 변주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이 책의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요소였지만...워밍업 하다가 싸늘해지는 요소이기도 했다.
가장 재미있어서 여러번 되풀이해 읽은 장은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였다.
여기서 또 '오역'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지하철 걸인들이 사용하는 배경음악에서 절실한 문제는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시선의 구걸'이라고 한다.
우리의 제사를 예로들며, 공자의 유물론을 언급한다. 죽어서 없지만, 있는 것처럼 살기.
철수와 영희의 '선생님, 안녕하셔요?'
등을 오역의 예로 들지만, 그러나 이 오역이 반드시 오역일 수만은 없다고 얘기한다.
오랫만에 난해한 책을 만났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테지만, 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또는 '아는 만큼 보인다'등을 이용해 적절히 자위한다.
다 읽어내고, 다 완벽하게 해석하고, 다 완벽하게 이해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면...생각만큼 어려운 책은 아니었다.
나름 재미있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그러니까 감정이입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노래 한곡을 예로 들면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른 느낌의 곡이 탄생할 수 있듯이,
그가 만들어낸 악보를 이렇게 저렇게 읽고, 거기에 내 감정을 적절히 섞어 해석하고, 어떤 노래로 불러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보자 일때는 어렵지만, 악보를 읽는 데 탄력이 붙으면서 변주가 가능해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묵혔다가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 그때는 작가의 투덜거림이 세레나데처럼 들려질지 또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