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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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네이버 국어사전)

사는 게 뭐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고, 심지어 유명한 작가가 썼다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은 내게 한장의 음반 같은 책이다.
보통 책은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지만, 음반은 필 꽂히는 것만 무한반복하여 듣는다. 

처음 intro가 나오는 것부터가 그렇다.
음반을 생각하고 설렁설렁 읽어 넘긴다.
그런데 웬걸, 처음부터 남의 얘기 같지가 않다. 
책을 고쳐 잡게 된다.  

-이래서 힙합을 헤드폰으로 듣는구나. 이건 정말, 일대일인데?
-그래?
-응. 나한테만 말하는 것 같고, 진짜 심장이 쿵쿵 뛴다. 단순하고 불안, 미숙?
어른들이 듣기에나 그렇지.
-근데 그런 게 묘하게 뭔가 막 사람을 움직여.그리고,(106쪽) 

처음 감정이입을 하기까지가 좀 힘들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열일곱살 강연우의 1인칭 시점의 소설인데,
이 녀석이 이 시대 열일곱 먹은 소년 같지가 않았다.
속에 나이 4,50 근처에서 연애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 쯤이 들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서 한참 조숙하다는 건 얘기했고 소심하고 섬세하기 까지 하다.
단지 사랑에 관해서만 숙맥이다.
(뭐, 러브 라인이야...나이에 관계 없이 처음이면 순진무구할 수 있는 거니까~) 

소년과 짝을 이루는 몇 명의 소년,소녀 들이 등장하는데,
소년의 친구들이 더 설득력 있었다.
겉넘고 싶고 그래서 겉넘어 보게 되는 질풍노도의 시기. 
 
강연우의 엄마 신민아는 엄마 같지 않다.
잘 봐줘야 누나 정도. 

폭풍우 몰아치는 날 카페에 앉아 창밖 경치를 봐야 했고, 어떤 새벽에는 취해 들어와 마구 깨우는 바람에 공원에 나가서 탠덤바이크를 태워저야 했고, 극장에서는 반드시 캐러멜 향 팝콘과 다이어트콜라를 나눠 먹어야 했고, 핑크색과 초록색 가발로 바꿔 써가며 스티커 사진을 찍어야 했고, 각기 다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걷다가 반쯤 남았을 때 바꿔 먹어야 했고, 집 앞 놀이터에 불려나가 캔맥주가 두 개쯤 비는 동안 스프라이트 한 캔을 마셔줘야 했고, 그네까지 밀어줘야 했고......이 모든 게 본인의 주장으로는 신 육아법이라고 한다.(351쪽)

그런 엄마 신민아 씨는 일곱살 어린 남자와 사귄다.
강연우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사실 나는 위로를 잘 믿지 않는다. 어설픈 위안은 삶을 계속 오해하게 만들고 결국은 우리를 부조리한 오답에 적응하게 만든다. 그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거기 실려간다. 삶이란 오직,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것이 생겨나고 변형되고 식고 다시 덥혀지며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듯이, 위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잠깐씩 짧은 위로와 조우하며 생을 스쳐 지나가자고 말이다.
 우리 모두는 낯선 우주의 고독한 떠돌이 소년. 이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 <작가의 말>중에서 -

책 뒤의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지,
제목은 <소년을 위로해줘>였지만, 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었다.
그런 일들을 겪어 내고도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는 소년을 위로한다는 건,
삶을 계속 오해하게 만들고 그를 부조리한 오답에 적응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놔야 가능한 일인데,
아직 열일곱이라면 희망만을 얘기해도 좋은 나이가 아닐까?

오히려 소년의 어머니, 소녀의 아버지, 뭐 그런 사람들을 등 두들겨 주고 싶었다.
그 시기에 머물러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들,
심지어 이삿짐을 나르는 아저씨들 까지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정서가 메마르셨는데 양초가 저렇게 많겠냐?
-그건 또 그렇네. 박스에도 엄청 많아요. 초가 장난 아니게 무겁다는 거 처음 알았잖아. 어떻게 책박스보다 더해.(25쪽)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책보다 양초가 더 무겁다는 것.
책이 무겁다고 궁시렁 거리는 이삿짐 아저씨들에게 한번씩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와락 보듬고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 두들겨 주고 싶었던 건 소녀의 아버지였다. 

 

네, 지금은 다르다는 것,압니다. 남자들도 자신들도 자신 속의 섬세함과 마음 약함 같은 거 드러내는 데 눈치 안 봐도 되고,때로는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되고 있어요. 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버린걸. 다른 옷을 입어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손바닥에 칼로 손금을 판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그렇게 감정은 물론이고 운명까지도 ‘개척’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익히며 성장했어요. 타고난 감성은 억눌러야 했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진 것, 저도 환영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훨씬 솔직하고 다정한 사람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부러운 마음도 많아요. 하지만 그건 머릿속 생각일 뿐이에요. 달라진 세상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동의하지만 훈련된 대로 꼰대 기질이 먼저 나와버리니까요. 출세와 돈밖에 모르는 사람, 점점 그렇게 돼가는 거죠.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안 그러면 지금의 삶은 갖지 못했겠죠.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절실한 감정보다는 내게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라는 확신이 열정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 기준에 맞는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갖춰나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으니까요.(439쪽)

엄마 신민아씨는 내가 아는 누군가랑 좀 닮아 애착이 갔다.
남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살고 싶어 친절을 익혔다지만, 어쨌거나 남들 눈에 조금은 튀게 살고 있는 엄마는, 연우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연우 네가 지나치게 예민한 거야. 그 아저씨들, 피곤해서 남 일에 그렇게 관심없어. 그리고, 피곤한 사람은 무신경할 수밖에 없거든. 배려라는 게 원래 뇌에서 나오는 거라 체력 소모가 엄청 많다구. 그걸 갖고 뭐라고 하면 안 되지.(41쪽)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 가볍게 만들어주거든. 누구나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47쪽) 

이쯤되면 연우의 엄마 신민아 씨는 세상에 무심해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헌데,이건 어찌보면 아들 연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각성의 말 쯤으로 들린다.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감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아주 멀리 가지도 말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볼 것이며,
그리고 규칙적으로 그가 그 자리에 있는 지 점검 정도는 해주어야 겠지.

이걸 이 책에선 이렇게 멋지게 얘기한다. 

-주변의 위험한 물건 다 치워놓고 마음껏 놀게 해주는 것, 그게 방목이야. 대부분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만 결정적일 때는 개입을 해야 해. 그러니까, 멀리 있더라도 연결은 끊어지면 안 된다 이거야. 그런 걸 방목의 기술이라고 하지.(251쪽)
 
신민아의 법칙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이거였다.
...방정식이 안 풀리면 책을 덮고 밥을 먹어라. 무조건 붙잡고 끙끙대기보다는 새로운 기분으로 문제에 매달릴 수 있도록 체력을 보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연우야 잘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잘 풀리는 건 아니야. 스스로 일을 잘 풀어가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말야,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내가 내 행복을 찾고 있는 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214쪽) 

결국,
책 한권을 읽고 소년을 위로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내가 등 두들김을 받고, 위로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내'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건, 그러니까 '가족'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제목을 슬쩍 바꿔 힙합처럼 읊조려본다.

아줌마도 위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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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12-24 10:24   좋아요 0 | URL
아줌마도 위로해줘~ X2

sslmo 2010-12-26 02:22   좋아요 0 | URL
네,이리 오세요~^^
꼬옥(끌어 안고)
다독,다독,다독,해드릴게요~

마녀고양이 2010-12-24 1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속에 나이 4,50 근처에서 연애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나무꾼 님의 이 표현 죽이네요.

그런데 인용구들, 마음에 너무 들어오는데. 국내 소설을 매우매우 기피한다지만,
강하게 끌리는... 글귀들. 도저히 무시를 못 할거 같아요.
이거 11월 나온 신간이네? 신간 진짜 잘두 읽는다... ^^

나둥나둥 위로해줘. 자기에게는 위로의 뽀뽀 날리고 갑니다~ 좋은 연말~

sslmo 2010-12-26 02:27   좋아요 0 | URL
ㅎ,ㅎ...저도 국내소설 잘 안 읽잖아요.
근데 괜찮았어요.

12월에 나온 책들도 커버해 줘야 하는데, 요번 달은 책장 정리를 하고 있어서요.
항상 읽는 속도가 읽고 싶은 책을 못 따라가요~ㅠ.ㅠ

네, 님도 이리오시와요~
꼬옥
다독, 다독, 다독~

2010-12-24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6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2-24 10:4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이리오세요. 꼬옥~~~ ㅎㅎ
날이 춥지요? 그래도 마음은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시기를요!!

sslmo 2010-12-26 02:29   좋아요 0 | URL
네~
님도요.
꼬옥
다독, 다독, 다독~

님도 몸도 마음도 따뜻하고 건강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를~!!!

2010-12-24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6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절로 2010-12-24 15:22   좋아요 0 | URL
나는 사실 위로를 잘 믿지 않는다...!
위로는 거울이 젤루 잘 해줘요.
거울 속에 비친 내 눈물이 젤루!

sslmo 2010-12-26 02:38   좋아요 0 | URL
저는 찜질방과 이불 뒤쓰고 누워 죽은 듯 자는거요.

자신을 말끄러미 쳐다보는 거 참 쉬운것 같으면서 어렵더라구요.
이렇게 님께 또 한가지를 배우네요, 감사~!!!

루체오페르 2010-12-24 16:40   좋아요 0 | URL
제가 해드릴 수도 없고...크^^;
옆의 소중한 누군가가 해주시길 바랍니다.ㅎ

양철나무꾼님 메리 크리스마스&해피 뉴 이어~^^

sslmo 2010-12-26 02:3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도 아줌이지만, 이 책에 나온 엄마 아빠들을 얘기했던 거였어요~

님과 님 가정에도 메리 크리스마스&해피 뉴 이어~^^

saint236 2010-12-24 17:16   좋아요 0 | URL
아줌마도 위로해줘^^ㅋㅋㅋ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고요
2010 서재의 달인에 선정 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sslmo 2010-12-26 02:41   좋아요 0 | URL
아저씨도 위로해 드릴게요,ㅋ~.
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겠죠?^^

서재의 달인은 얼떨떨합니다만,
암튼,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 2010-12-24 17:56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이브 치고는.... 날이 너무 추워요~
아무튼,




sslmo 2010-12-26 02:43   좋아요 0 | URL
클스마스 잘 보내셨죠?^^
오늘은 더 춥더라구요.
노란별이랑 초록 글귀, 넘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2010-12-24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6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2-25 20:44   좋아요 0 | URL
지금 크리스마날 이브날에 편의점에 일하고 있는 88만원 세대 청년도 위로해주세요^^;;

sslmo 2010-12-26 02: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꼬옥.
다독, 다독, 다독~

내년 크리스마스 날엔 이쁜 여친 만드셔서, 따뜻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2010-12-25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6 0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1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1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0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6 0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12-25 09:42   좋아요 0 | URL
배려라는 게 뇌에서 나오는거라 체력소모가 많은 거군요.ㅎㅎ
그래서 내가 지쳐있으면 배려를 잘 할 수 없게 되는거구요.^^
그러니 나의 심신이 지치지 않도록 좋은 에너지와 활력을 잘 불어넣어줘야겠어요.
한해동안 저도 참 고마웠어요, 나무꾼님.
좋은 글로 서로 위로가 되는 거 알죠.^^

sslmo 2010-12-26 03:06   좋아요 0 | URL
배려가 뇌에서 나오는거라 체력소모가 많은 거라는 말, 쫌 멋지죠~^^

내년엔, 님도 저도 쉬이 지치지 않도록 체력 안배를 잘 하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저도 참 감사했습니다,프레이야님.

비로그인 2010-12-25 18:39   좋아요 0 | URL
양철님은 종종 귀여운 구석이 예상 외의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
조금은 특별한 (또는 누군가에게만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요.) 토요일 저녁 즐거이 보내고 있으시지요? ㅎ

올 한해 많은 얘기들 감사합니다 :D

sslmo 2010-12-26 03:11   좋아요 0 | URL
무엇이 바람결님으로 하여금 '귀엽다'는 느낌이 들게 했을지 좀 궁금해지는 걸요~^^

요즘은 특별한 게 부담스러워 몸 사리게 돼요.
그렇게 그렇게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거, 어쩜 곁에 있어서 소중함을 잊게 되는 공기나 햇볕 만큼 감사한 일일지도요~

오히려, 제가 님께 많이 자극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__)

세실 2010-12-25 21:59   좋아요 0 | URL
저두 위로 받고 싶어요. 이 책 읽으셨군요. 보관함에 담아둡니다.
님 얼마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행복하시길^*^
이곳엔 눈이 내립니다.

sslmo 2010-12-26 03:12   좋아요 0 | URL
네,
꼬옥.
다독, 다독, 다독~

화이트 크리스마스라서 좀 더 행복하셨겠는걸요~^^

2010-12-26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7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8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어느 집을 지나다가 발길이 멈췄다. 
미친 목련 봉오리가 맺혔던 그 집이었다.
대문 밖에 잘린 목련 가지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담장을 삐져나온 잔가지들을 잘라낸 듯 한데, 
가지도 제법 튼실하고 수북히 쌓인 품이 뉘집 마당쇠가 공을 들였나 보다. 

난 살아있는 생명에 좀 무심한 편이어서,
길 잃은 강아지나 들고양이가 됐다면 무덤덤히 지나갔을 것이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뭇가지라면 죽은 나뭇가지라고 생각해서 그러했을텐데, 
수북히 쌓인 가지 더미에 매달린 목련 봉오리들이 눈에 밟혔다.
나뭇가지들이, 매달린 봉오리들이, 색깔없는 피를 흘리며 눈물을 매달고 누워 있는 듯 느껴져 한참을 서성였다.

2.  
주말에 드라마를 봤다.
고두심이 엄마로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이 나이에 병 하나 없는 사람 없다더라.
 이만하면 다행이다."

 이 대목에서 색깔없는 피, 매달고 있던 눈물을 토해냈다. 

고두심은 아버지 산소를 찾아,
"정신 차리고 꿋꿋이 잘 살라고 이만한 병 주셔서 감사해요."
이러는데,
이 작가 누군지 홈페이지 찾아 들어가
백일섭처럼 '망할놈의 여편네'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접었다. 

극중 고두심은 예순 근처로 짐작된다.
자궁암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목련 고목에 피어나는 미친 꽃 봉오리처럼 그냥 떼어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꽃 피우지 못한다고 해서 나무가 아니고 여자가 아닌가? 
과연 현실의 고두심이었다면, '이만하면 다행이다' 라고 할 수 있을까? 

3.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모든 살아있다가 스러져 간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강하고 화려하게 내뿜는 것들은 물론이고,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에게도 감사해야 하겠다.
 
잘린 고목에서도 꽃은 핀다.
 

4.  
<시코쿠를 걷다>를 읽었다.
시코쿠에는 사찰을 돌며 순례하는 순례자만 있는게 아니란다.
순례자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내어주며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주러 오는 '오셋타이'수행도 있단다. 
받는 사람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감사한단다.

겨울 내내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쉽게 지쳤다.
내 삶 또한 내 몸과 비슷했다.
그렇게 겨우내 몸과 마음이 고달픈 뒤에야
나는 떠날 생각을 했다.

“몇 번째예요, 이번이?”
“여섯 번째. 시코쿠는 저의 병원이에요.”
“병원이라니요?”
“스트레스가 심해요,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그런데 여기 와서 며칠 걸으면
그게 씻은 듯이 사라져요. 신기하지요!”

순례에서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한다. 몸과 마음의 크고 작은 질병이 낫는, 혹은 호전되는.
나 또한 겨우내 떠나지 않던 감기가 시코쿠에 온 지 이틀 만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순례는 저의 종합병원이에요. 여기 오면 온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요.
아마도 저는 죽을 때까지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순례를 다닐 것 같아요.”

동감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산책이든, 여행이든, 바다든, 산이든,
108배든, 기도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자기만의 종합병원을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

5.
 

 

 

지현곤의 <달달한 인생>을 읽는다.
'시코쿠를 걷다'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함부로 남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 것.
전혀 불행하지 않았던 그를 불행한 존재로 못박아 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지현곤 作 '노아의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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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12-22 01:29   좋아요 0 | URL
함부로 남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 것.
전혀 불행하지 않았던 그를 불행한 존재로 못박아 버리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너무 멋진 말이네요.^^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저도 말하고 싶어요.

sslmo 2010-12-24 09:0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만하면 다행이다...말하고 살고 싶은데,

여기서 고두심 좀 마음 아프게 나와요.
좋아하는 찜질방을 돈 아까워서 못 간다고 나와요~ㅠ.ㅠ

마녀고양이 2010-12-22 08:29   좋아요 0 | URL
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이 문구는 좋아, 삶에 도움이 된다니까. 하지만
'모든 살아있다가 스러져 간 것들에 감사해야 하겠다' 이 문구는 슬퍼지잖아요!
인위적으로라도 밝은 것만 생각해야,
감기 걸리고 직살나게 바쁘고 겨울 회색에 조금 우울해도... 덜 힘들지!

언젠가 같이.. 산림욕이나 갑시다. 맛난 공기 먹으러.
(그래도.... 페이퍼는 이쁘네~)

sslmo 2010-12-24 09:05   좋아요 0 | URL
네~
새해에도 계속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절로 2010-12-22 09:28   좋아요 0 | URL
노아방주 그림..피식 웃음이 새는데요. 인간은 아니지, 방주를 사주한 신은 어찌 그리도 자기 중심적인지요.

저, 오늘 자유부인이에요(신랑 허씨가 연수갔데용~그것도 박으로다가~근데 이게 자랑질 거리가 되긴한가 모르겠네@@)

sslmo 2010-12-24 09:07   좋아요 0 | URL
같은 서울 하늘 아래라도 되야, 자유부인인게 자랑질로 들리죠~^^
둘이서 찜질방에서 만나 우리끼리 외박이라도 하게...
님과 전, 서울과 진주...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요~ㅠ.ㅠ

저절로 2010-12-24 15:23   좋아요 0 | URL
힝! 불러만내봐요. 내가 어딘들 몬가나!

sslmo 2010-12-26 02:11   좋아요 0 | URL
하긴 그때 거기까지 왔다가신 걸 보면...한 액티브 하신 듯~!!!

서울 오실 일 있음 연락 주세요.
만사 제쳐놓고 나갈게요.
저도 혹 진주를 가게 되면 연락 드리지요~^^

잘잘라 2010-12-22 13:13   좋아요 0 | URL
겨울엔 꽃 나무를 알아보기 힘들어요.
꽃도 지고 잎도 지고, 옷 벗은 나무를 보고 왕벗나문지 단풍나문지? 또는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아, 벌써 딸리네. 이거야 원..) 그 수많은 나무가 겨울에는 다같이 그저 '겨울 나무'가 되버려요.

아아! 그렇지! 나무 하는 나무꾼 양철나무꾼님이 있었지!
겨울에도 우리가 사과나무와 은행나무를 구분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세요!!! 부탁이예요^^

sslmo 2010-12-24 09:09   좋아요 0 | URL
우와~메리포핀스님, 멋져요~
전 저렇게 많은 나무 이름 몰라요.
제가 님을 '싸부'로 모셔야 겠는걸요~!!!

2010-12-22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12-22 18:45   좋아요 0 | URL
미친 목련이라는 표현이 왠지 정감가는걸요.
가끔 저도 생뚱맞게 피는 꽃 보면서 그런 생각 하거든요. 말로 표현은 못하지만요.

오늘 차 라이닝만 고치러 갔다가 다른것도 고장났다고 해서 생각지도 못한 지출로 속은 쓰리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그 표현은 이럴때 어울리는거죠.
암은..결코 그렇게 만만한 병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에구.

sslmo 2010-12-24 09:17   좋아요 0 | URL
에고고~~~
속이 좀 쓰리셨겠는걸요.
브레이크 라이닝도 손수 고치러 다니시고, 굿 드라이버신가 봐요.^^
저도 살살 달래서 간신히 모시고 다니고 있어서 말이죠.

차에 '이만하길 다행이다'가 아주 어울리는 걸요~

세실 2010-12-26 16:48   좋아요 0 | URL
라이닝은 옆지기가 말해줘서 안거예요. 딱 거기까지만 ㅋㅋ
직장 옆이 삼성 서비스센터라 조금만 이상하면 바로 간답니다.

sslmo 2010-12-27 21:34   좋아요 0 | URL
ㅎ,ㅎ...저는 직장 아래층이 옛날에 현대자동차 서비스 센타였는데,
불경기라 요즘은 카 오디오센터로 바뀌었다는~ㅠ.ㅠ

비로그인 2010-12-22 22:16   좋아요 0 | URL
저의 종합병원은 한강변에서 자전거타기에요. 그래서 자전거 자주 타기가 힘든 한여름 한겨울이 길게만 느껴지나봐요.

어떻게 지내세요? 연말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네요..

sslmo 2010-12-24 09:22   좋아요 0 | URL
저의 종합병원은 '찜질방'이예요~^^

찜질방 가서 땀 쏙~빼고,
구운 계란이랑 식혜도 먹고,
두런 두런 낄낄거리다 보면 세상이 좀 살만한 곳이 되어 있더라구요~

연말, 전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어요.
1월까지는 정신이 좀 없으시겠네요.
그럴때일수록...건강 챙기셔야 하는 거 아시죠?^^

cyrus 2010-12-23 00:07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라는 책의 표지를 보니 갑자기 수풀이 무성한 산에 혼자 가보고 싶네요.
나무꾼님이 언급하신 드라마 내용을 보니 주말 드라마 <결혼해주세요> 군요,
저희 어머니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죠. ^^

sslmo 2010-12-24 09:25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 어머니에게 권해 드려요.
님은 '시코쿠' 말고 유레일 패쓰나 시벨리아 횡단 열차가 좋지 않을까요?^^

비로그인 2010-12-23 01:50   좋아요 0 | URL
자기만의 종합병원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곰곰이 생각해봐겠는걸요. 나만의 종합병원은 과연 무엇인지 말예요^^

sslmo 2010-12-24 09:27   좋아요 0 | URL
제 종합병원은 조 위에서 '찜질방'이라고 말씀드렸고,
후와님의 종합병원은...그러니까...저도 궁금한걸요~^^

카스피 2010-12-23 11:29   좋아요 0 | URL
이런 한마디 하셨어야죠.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것이 틀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꿋꿋이 잘 살라고 이만한 병 주셔서 감사해요."라니 웬만한 성인군자 아니면 힘든 말입니다요^^;;;

sslmo 2010-12-24 09:31   좋아요 0 | URL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성인군자'를 감싸안고도 남지만 말이죠~^^

2010-12-23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23 16:20   좋아요 0 | URL

조만간 성탄이네요~ 집에서 조용히 만화책이나 배 깔고 누워서 보고 싶은데

아는 형이 결혼한다고 급작스럽게 연락해서 전주에 내려가게 됬네요 ㅎㅎ

올 한해 잘 갈무리 하시고~ 건강하시길 ^^

sslmo 2010-12-24 09:37   좋아요 0 | URL
전주 좋은 동네죠, 잘 다녀오세요.
근데 서울 날이 이렇게 추우면 그쪽은 눈이 많이 오던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부럽군요~^^

같은하늘 2010-12-23 18:09   좋아요 0 | URL
드라마를 안봐서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요? 항상, 모두, 언제나~~~ 현실은 달랐다......

sslmo 2010-12-24 09:4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드라마를 오다가다 봐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몰라요.
다만 어머니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자라는 건 간과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여~ㅠ.ㅠ

비로그인 2010-12-23 19:15   좋아요 0 | URL
훔..
색깔 없는 피, 매달려 있는 눈물.

양철님은 12월에 좀 민감하신 것인지.. 아님 체력 저하이신지..
많은 분들의 댓글로 기분 업 하시길 빌겠습니다. ^^

sslmo 2010-12-24 09:4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얘길 듣고보니 또 그렇네요.
살아있는 건 모두 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데,
그렇게 간과하게 되는 게 속상했어요.

음~
한마디 더 보태자면, 어머니도 여자거든요.

바람결님의 댓글로 '훅..' 업 됐습니다~^^

風流男兒 2010-12-24 14:09   좋아요 0 | URL
댓글보다 지도편달 보고 잠깐 웃고가요
매맞을 편
매맞을 달.

sslmo 2010-12-26 02:17   좋아요 0 | URL
제가 잠깐이나마 風流男兒님께 웃음을 드렸다니,
저도 잠깐 웃게 되네요.

달리는 말에 채찍질 중요할까요?^^

글샘 2010-12-25 03:08   좋아요 0 | URL
오셋타이... 맘에 들죠?
주는 게 덕을 쌓는 수행이란 말... 메리 크리스 마스~

sslmo 2010-12-26 02:20   좋아요 0 | URL
시코쿠를 걷다, 님 서재에서 봤는걸요~^^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어요.

2010-12-28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9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민들레 소녀
로버트 F. 영 지음, 조현진 옮김 / 리잼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을 해야 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녀가 떠올랐다.
아니 리뷰를 쓰는 내내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라면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써낼까 싶었다.

난 간혹 시선이 시니컬한 편이다.
항상 그녀의 시선은 따뜻했었다.
내가 보기엔 그저 그랬어도,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녀가 리뷰로 써내면 따뜻하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어 있곤 했었다.

이 책이 내겐 그저 그랬다.
책 날개 안쪽을 보니 ‘로버트 F.영’은 ‘공상과학소설가’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들이나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문제가 없는 데, 어디선가 한번쯤 등장했던 내용들이다 보니 신선함이 반감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종류의 책을 너무 많이 읽은거야’ 하고 퉁쳐 버리기엔 뭔가 개운치 않다.
1950년대,60년대에 쓰여진 작품들이 이제야 번역된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흥미만 가지고 읽고 덮어버린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의 답보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소설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재미를 붙일 수 있을만한 내용이다.
어느 걸 봐도 황당무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럴듯한 개연성을 갖고 있고, 적당히 재밌다.
‘공상과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거부감이나 이물감은 없다.
표제작이기도 한 <민들레 소녀>는 일본 에니메이션 ‘클라나드’에도 소개되어 좀 유명한가 보다.

난 <별들이 부른다>도 좋았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왜 별다른 운명을 가진 사람만 훌륭하다고들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그건 그들만이 외로움을 견딜 줄 알기 때문이지. 그들은 그저 묵묵히 외로움을 견뎌 낼 줄 알거든. 하버드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85쪽)

“인정하죠. 당신이 나에게 방과 식사를 줬어요. 하지만 난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지도, 당신이 편하게 일을 하게도 못했죠. 하지만 그렇게 아낌없이 준 것들을 빌미로, 당신은 내가 인간의 존엄성을 가져보려고 할 때마다 내 영혼의 한조각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죠.”
앨리스는 단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누구도 영혼의 한 조각 같은 걸 신경 쓰지는 않아! 왜 그렇게 말하는 거니?”“걘 우주인이잖아.” 잭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주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거든. 우주인들끼리 말이야. 그건 그들을 미치게 하거나 아니면 벌써 미쳤다는 걸 모르게 해 주지!”(92쪽)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우주는 줄어들고, 외로움은 점점 자라나는 데 있다. 외로움은 지식의 회랑과 말로 이루어진 대성당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단어와 말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내가 광인이 되는 순간까지 또는 심해 바닥에 가라앉은 널빤지에 들어앉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만약 수송선의 진로를 정하는 게 내 시간을 소모할 만큼 복잡한 과정이라고 해도, 조타실에서 혼자 배를 조종하는 시간들이 긴 밤이라고 해도, 외로움이 자라나는 상황과는 다를 것이다.(94쪽)


이 책은 별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외로움 같은 단어들이 이 시대에도 통용되는 언어들로 정의 되어 있다.  
특히 이 책 전편을 흐르는 시에 대한 통찰력은 돋보인다.

책을 읽으며 이 시대를 사는 내가 슬펐던 건,
미쳐야 할 순간에 멀쩡하고, 상처받아야 할 순간에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순간 깨달아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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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21 09:02   좋아요 0 | URL
아, 저 인용구 넘 좋다....
'그건 그들만이 외로움을 견딜 줄 알기 때문이지'.. 나 이런 사람 되고 싶거든요.
별다른 운명을 가지고 싶은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 되고 싶어요.
과연 가능할까나.. 워낙 외로움도 잘 타니까.

묘사가 참 좋은 책이네요.

sslmo 2010-12-22 01:08   좋아요 0 | URL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찬 책이예요.
사람들에 따라선 '참 좋다.'고 할 수도 있을텐데...내가 그간 장르소설을 너무 읽어주신게죠~^^

느린산책 2010-12-21 09:46   좋아요 0 | URL
양꾼님의 마지막 고백..뇌리에 박히네요.

sslmo 2010-12-22 01:10   좋아요 0 | URL
이 책, 좀 사랑스럽고 멜랑꼬리하여 이런 고백 가능해요.
어찌보면, 사랑 고백하기 참 좋겠다~^^

반딧불이 2010-12-21 14:31   좋아요 0 | URL
저의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우주는 티끌만큼 늘어나는데, 외로움은 순간적이지만 사무치는데 있는것 같아요.

sslmo 2010-12-22 01:12   좋아요 0 | URL
순간적이고 사무치는 거,이거 상처를 만들수도 있는데...
순간을 길게 잡아서 간격을 넓히고,사무치는 고저의 차를 줄여서 좁히고...
둥글려야죠~^^

그게 나이 먹는 힘이죠~!!!

저절로 2010-12-21 15:38   좋아요 0 | URL
미쳐야 할 순간에 멀쩡하고, 상처받아야 할 순간에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한 채..!

요즘 제가 똑 저래요.


sslmo 2010-12-22 01:13   좋아요 0 | URL
우리 머리 맞대고 대책을 강구해 보자구요~!

마녀고양이 2010-12-22 08:30   좋아요 0 | URL
무신 대책을 강구해염!
둘 다...... 햇살 보고 사세요!
(잔소리를 해야 해, 투덜투덜~~~)

sslmo 2010-12-24 09:00   좋아요 0 | URL
투덜이 스머프 같애,ㅋ~.

마고님도 끼워 줄게~!!!

꿈꾸는섬 2010-12-21 16:44   좋아요 0 | URL
인용구가 정말 좋네요.^^
나이들수록 우주는 줄어들고, 외로움은 점점 자라난다.
서글프긴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아요.^^

sslmo 2010-12-22 01:18   좋아요 0 | URL
언젠가 더 나이가 들어...
서로의 외로움을 꺼내 자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꿈섬님은 한참 영거하시잖아요~^^

꿈꾸는섬 2010-12-22 01:30   좋아요 0 | URL
ㅎㅎㅎ그쵸. 전 아직 조금 더 젊지요.ㅎㅎㅎ

sslmo 2010-12-24 09:01   좋아요 0 | URL
젊다는 거 보다 더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애요~^^

같은하늘 2010-12-23 18:11   좋아요 0 | URL
대책을 강구해야 할 사람이 여기도 하나 추가요~~~ -.-;;;

sslmo 2010-12-24 09:01   좋아요 0 | URL
네, 님도 같이 머리를 맞대 보자구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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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알라딘의 글쓰기 기능이  심히 불안정하다. 
지난번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때도 그랬는데, 어제 새벽에도 한참 공들인 리뷰 하나가 홀라당 날라갔다. 아무리 되뇌려 해도 어제 그 필이 살지 않는다. 이 속성 날림의 리뷰가, 어제 '덕분'이 될지 '때문'이 될지 나도 모르겠다.

요즘 내 삶의 화두는 ‘심신의 안녕과 건강’ 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모르는 '마음 관리법'에 관해서였다.누군가는 마음을 관리하려고 애쓰는 것도 집을 짓는 것과 같으니, 집을 짓지도 말고 탈출하지도 말고 그저 하루 세 번 웃으라고 점잖게 충고를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였는지 이 책은 내게 심신 관리술로도 읽혔다.

솔직히 이 책이 그리 재밌지는 않았다.
하긴 지능지수 170이 넘는 아저씨의 ‘심신 관리술’이 재밌다면,
나도 이에 버금가는 지능을 지녔거나 똘끼 충만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어렵기까지 하다.
때문에 중간중간에 던져지는 방향을 제시하는 암시들을 놓치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드로스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선이 아닌지,
이를 말해달라고 누군가에게 굳이 간청해야 하겠는가.

And what is good,Phaedrus,
And what is not good -
Need we ask anyone to tell us these things?
라는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나는 여기서 선이 禪인지 善인지 궁금하여, 원서를 찾아 보았다.)

또 한 부분,
원래 의도했던 바에 따르면, 사악한 파이드로스에게 승리를 거두는 이는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아니다. 오히려 승리를 거두는 이는 파이드로스를 항상 헐뜯고 비방했던 서술자에게 승리를 거두는 고결한 파이드로스다.
이 부분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자전적 소설이니,저자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정신질환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던 저자가, 전기충격치료까지 받아가며 회복되었으나 기억력을 잃는다.
잃어버린 기억력을 되찾고자 열한 살 먹은 아들과 친구 내외와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정신적 삶과 기술공학적 삶 사이의 분열에 관한 책을 쓰고자 마음 먹었다고 얘기하는데,
결국 이 여행이 이 책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기본이 된단다.
내가 어림잡아 계산해 보니 이때 나이가 얼추 마흔 하나 였었다.
지금 내 나이 마흔 하나이다.
자연 나와 비교가 되는데, 궁금한 점도 있고 부럽기도 했다.

20대의 거의 전부를 학문과 군 생활과 여행으로 탕진하였고,
30대의 거의 전부를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보냈던 그에게,
여행을 같이 할 정도의 친구가 있다는 게 하나였고,
모터사이클을 장만하고 풍족한 여행을 할 여력이 있었다는 게 또 하나였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었으리라.

어찌되었건...그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고, 그걸 책으로도 쓰게 된다.
그가 소설에서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선, 가치, 질, 소피스트, 수사학에 대한 탐구작업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와 같은 중력의 법칙이 존재했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솔직히 말해 난 모르겠어. 내가 보기엔,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온갖 테스트란 테스트는 모두 통과한 것이 중력의 법칙 같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지니는 속성 가운데 단 하나라도 바로 그 중력의 법칙이라는 것이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생각해낼 수 없으니깐 말이야.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이 지니는 과학적 속성 가운데 단 하나라도 중력의 법칙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낼 수 없으니까 말일세. 그런데도 그와 같은 중력의 법칙이 존재했다고 믿는 게 여전히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75쪽)

이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음을 부각시키는 그런 논리이다.
초원을 텅비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의아했는데, 바로 ‘텅비어’ 와 대구를 이루는 ‘소유하는 것도’ 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물의 의미’ 와 ‘존재 자체’, 이쯤되면 머리가 뽀글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했던 부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서술자는 사악한 파이드로스에게 승리를 거둘 줄 알았는데,잃었던 기억을 되찾고 보니, 고결한 파이드로스 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결한 파이드로스가 승리를 거뒀다고 함으로, 자신의 잃었던 기억의 정당성을 찾지만...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독자인 우리에겐 털어놓지만, )
같이 여행을 하는 존과 실비아 내외에게도 아들 크리스에게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다.
그는 또 다시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거나 전기충격요법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터사이클 관리술에 대해선 그토록 집요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던 그가, 아이를 그렇게 방치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궁금하다.

암튼, 이 책은 내게 선문답 같다.

그는 충돌했고...해체 되었으며...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실체를 모르는 그런 마음이라고 하여,
내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볼 마음 한켠,또는 내가 아끼는 그 누군가를 보듬어 안을 마음 한뼘,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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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10-12-18 12:4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글은 항상 좋아서, 이 리뷰도 좋지만, 날라가 버린 리뷰님도 읽고 싶지 말입니다. ㅠㅠ

sslmo 2010-12-21 02:16   좋아요 0 | URL
이렇게 항상 칭찬해 주시니 말이죠~^^

그런 거 있죠, 날라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
이제 웬만해선 알라딘 글쓰기에 바로 글을 쓰는 일은 삼갈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글이 날 것의 느낌이 덜하고 뜸하게 되네요.^^

마녀고양이 2010-12-18 14:06   좋아요 0 | URL
글 참 좋다.... ^^
그런데 책 참 어렵다... 아하하.

그러게요, 내내 나도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켜보고 이모저모 생각해 보지만,
누군가 한번 편안하게 껴안아줄 마음 한뼘 없으니, 서글프네요.
같은 병을 앓고 있는건가, 우리~ ^^

sslmo 2010-12-21 02:21   좋아요 0 | URL
빨간 불이 미친 듯 깜박이는?^^

이 책 참 어려워요.
난 이 책 옛날에 한번 보다가 팽개쳤었어요, 넘 난해해서.
난해함은 어느 정도 해소 되었는데...
그래도 이 아저씨, 별로예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말이죠~

아,근데...마고님은 심리학 공부하니까, 한번 훑어 보긴 해야 되겠죠?^^

루체오페르 2010-12-18 15:07   좋아요 0 | URL
옷 이 책 몇일전에 어떤 분의 추천으로 도서에 담아놨었는데 바로 양철님의 리뷰로 볼줄이야.^^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시는데 도움이 될듯하네요.ㅎㅎ

sslmo 2010-12-21 02:25   좋아요 0 | URL
옷~반가워라,루체오페르님!!!

이 책 읽으면 잃어버린 마음 위치 정도는 파악할지 모르는데, 다소 시니컬해져요~^^


순오기 2010-12-18 15:36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은 절대 손이 안 갈 거 같아요~ 그래서 님의 리뷰가 고맙지요.^^
연말이라고 밀린 일 처리한다고 마음만 분주하지 별로 진전이 없어요.ㅜㅜ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의무감으로 하는 거라서 그런 거 같아요.
누군가를 보듬어 줄 마음 한뼘이 저에게도 필요해요~

sslmo 2010-12-21 02:29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면 리뷰를 좀 폼나게 써야할텐데,
너무 제 느낌 위주로 훑고 지나간게 아닌가 싶어요~ㅠ.ㅠ

연말이예요.
진짜 하기 싫어서 미뤄 둔 일만 골라서 처리해줄 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낭만인생 2010-12-18 22:57   좋아요 0 | URL
마음..
정말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인데도 가장 어렵네요.

sslmo 2010-12-21 02:3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낭만인생님~

네,그게 가장 어렵더라구요~^^

cyrus 2010-12-20 11:05   좋아요 0 | URL
아,, 생각보다 어려운 책인거 같아요. 분량만도 상당하던데..^^;;
파이드로스라면 플라톤의 동명 저작에 등장하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는데,,
이 책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네요.
글쓰기 저장에 대한 나무꾼님의 심정,, 저도 이해가 갑니다.
나름 길게 써나가다가 갑작스런 오류에 걸리게 되면 뚜껑 열리게 되죠^^:;

sslmo 2010-12-21 02:35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워 볼까 합니다~^^
(뚜껑 열릴 때마다 잠깐씩)
도대체가 컴맹이라서, 이게 내가 잘못해서 생긴 오류인가(?) 한참을 고민합니다.
꼭 그 오류는 글을 길게,장시간 썼을때만 걸리는 것일까요?

헐~플라톤을 기억해 내셨군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2-27 17:40   좋아요 0 | URL
제겐 공감할 부분이 많은 소설이었어요. 물론 제가 그와 같은 수재는 아니지만요^^;
소설 속 아들이 피살되었더라구요. 이 소설을 써낸 후 그 일을 겪은 작가의 마음이 어땠을까 마음이 아프네요.
다른 판본으로도 읽어 보셨군요? 이번 판본은 역자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어 그런지 잘 읽히더군요.
서평 잘 읽고 갑니다~

sslmo 2010-12-27 21: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파고세운닥나무님~^^
님의 멋진 리뷰를 보고 추천과 한방 꽝 눌렀었죠.

저도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적 내용들은 충분히 매력적으로 읽혔어요.
그런데, 제가 한 아이의 엄마여서 그런가...
아들을 아이의 눈높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려 하는게 맘 아팠어요.

아들이 피살되고, 아들의 오토바이를 싣고 또 한번 여행을 떠났었다고 되어있더군요.
저는 아들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딸을 아들의 재림 쯤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하긴, 이해하려 한다고 이해가 될만한 상황은 아니지만서도~^^

후속편 '라일라'를 읽게 될지는 좀 고민해 봐야 겠어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2-28 13:59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부분이 있겠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혼의 남성에겐 그저 주인공과의 동일시만이 주된 독해의 방법이 되었네요^^;
한국을 신비로운 나라라고만 묘사하는 게 걸리긴 했어요. 그들이 늘 갖는 생각인데, 작가 역시 다르지 않더군요.
<라일라>가 아직 번역이 안 되었지요? 읽어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sslmo 2010-12-29 22:33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제가 겸연쩍은걸요, 또 한 수 배웁니다.

저도 한국을 신비로운 나라로만 묘사한 것과 '성벽'에 대한 연구 등도 유감스러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탐구와 역자 분의 열정 등은 높이 살만 하죠~^^
 

어제 집안에서 떼굴거리다가 EBS에서 하는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옛날에도 한번 봤었는데, 
그때는 줄거리를 따라 가느라 몰랐는데,
다시 보니, 풍광이 끝내준다.
언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장가계'를 한번 가보고 싶다.

영화는 책 보다 많이 순화시키고 둥글린 느낌이다.
인상깊었던 대사가 몇 있었는데,
"여자는 남자의 장점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는 않죠."
가 기억에 남는다. 

날 돌아보면,
사랑을 하는 데,장점이나 단점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라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위는 없다.
그냥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죽으며 여자에게,
"용서해 줘."
"당신은 잘못한게 없어요."
이런 대화가 오가는 데,
서머싯 모옴의 원작에선
"죽은 것은 개다."
이랬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사랑했어.
당신이 목적과 이상이 쓸데 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먹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해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자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서머싯 모옴의 <인생의 베일>중에서, 

이쯤되면 남자의 절절함에 가슴이 메어진다.

















 
그래서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시를 찾아 보다 만난 책 한권. 

 

 

 

 

 

가끔 '칼데콧 상 수상작'이라는 그림책을 보곤 하지만,정작 '칼데콧'의 그림책을 본 기억이 없었던 내게 이 책은 여러가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히 어렸을 때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의 그림들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칼데콧'풍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충격이었다.

책은 그림책이어서 몇장 되지 않아,쉽게 읽혀지지만 '생각하는 동화'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그림이 글의 부속물 정도로 여겨지던 틀을 벗어나 그림이 책의 주인이 되어 이야기를 설명하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 냈습니다.따라서 그의 그림책은 글을 모르더라도 그림만 보고도 이야기를 이해하고 웃을 수 있습니다.'
라는 '작가소개'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간의 내 습관대로 글로 내용을 파악하며 읽었을 때랑,천천히 그림을 음미하듯 따라가며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우선,그림에 두개의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화가가,사람들을 보는 시선과 개를 보는 시선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자기가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림이 터무니 없이 상상에 의해 그려지지도 않았다.

그림 속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일치한다.
한 남자가 있고,그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들의 복장이나 시선 등에도 일관성이 있다.
놀라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바람의방향, 뒷 남자의 쭈뼛한 머리까지 그려내는 것도 재밌고, 창문 안과 밖의 경계를 빗금 선으로만 표현해 내는 것도 놀랍다.
미친개 말고도 많은 개가 나오는 데,개의 종류나 표정이 다 다르지만,어느 하나 즐거워 하거나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마을에 나타난 개 한마리가,착한 남자에게 간택되어 졌다,관심 밖으로 밀려나고,질투심에 발광을 하고,버려지고 죽는...일련의 과정들이 그림들 안에 잘 녹아 들어 있다.
개는 그렇게 죽고 나서도,한 남자는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전 과정을 따라 읽어가다보면 처연해지기까지 하다.
작품해설에선,
"...어쩌면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 말썽을 피우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고 얘기해서,
미친개에게 일말의 책임을 지우려 하고 있지만 말이다.

개와 사람의 대비를 통해서 보여주려 한 것이 소통 부재-不通의 문제인것은 맞겠지만,
그 전에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자신의 평판이나 명성을 위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적절한 관심을 나눠줄 수도 없으면서 자신이 단지 외롭다고...개를 거둬 키우는 사람들에 관해서이다.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자기 만의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하려 하는 것은,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통이 되는 것이다.

결국,시대를 막론하고 벽이나 베일,굴레를 떨쳐내고 소통하는 것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자신의 그릇을 과대평가하여 모두를 다 사랑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니까 말이다.

덧,
'로버트 F.영'의 단편선 <민들레소녀>를 읽고 있다.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편집장이었던 시절에 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랑으로 글을 쓴다네." 누군가는 지체없이 이렇게 톡 쏘아붙였다. "잉크로 쓰는 게 나을 텐데."
로버트 F.영은 그 둘을 다 쓰곤 했다.

이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사물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단다.  
'난 마흔네 살이야! 저 소녀는 스무 살도 안 된 것 같은데,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12쪽)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해서 심난해 할 필요가 없다.
정말 제목 같은 풋풋한 결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살짝 가볍다.
화씨451의 그 소녀가 생각나는 건, 왠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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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12-13 23:5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긴 글을 꼼꼼히 읽어줬다는 얘기잖아.
내가 이리저리 널뛰기를 잘한다는 걸 암시롱~~~^^

'민들레소녀'의 결말까지 얘기해야 '어떤 사랑법'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는데,
'민들레소녀'가 최신간이라서 내가 뭐라뭐라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해 버렸어요.
(그러니까,솔직히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잘 모르겠어~ㅠ.ㅠ'속닥')

반딧불이 2010-12-13 23:48   좋아요 0 | URL
나오미 왓츠와 에드워드 노튼을 좋아해서 영화를 보고 장가계도 다녀왔어요. 영화속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운건 엇갈린 사랑이지만 거기 두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sslmo 2010-12-13 23:54   좋아요 0 | URL
전 나오미 왓츠보다 에드워드 노튼이 좋아요.
장가계도 다녀오셨다구요, 부러워라~

"영화속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다운건 엇갈린 사랑이지만 거기 두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구절 엄청 좋아요, 님의 해석의 깊이도요~^^

지나가다 2010-12-14 00:4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인용하신 부분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라 인생의 베일에서 나옵니다.
잠깐 착각하신 듯해서요. ^^;;

sslmo 2010-12-14 01: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잠깐 착각이 아니고,완전 착각하고 있었어요.
전 왜 페인티드 베일을 <인간의 굴레>라고 제 맘대로 해석했었는지요~ㅠ.ㅠ

웽스북스 2010-12-14 00:49   좋아요 0 | URL
페인티드베일 영화로도 나왔구나...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데,
아뿔싸! 본 영화였군요. 그러고보니 영화속 장면이 참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해요

영화보다는 책을 더 재밌게 봤었어요. 하필 딱 그런 시기에 그 책을 만났었네요.

그나저나, 저는 이놈의 정신머리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지 ㅜㅜ

sslmo 2010-12-14 01:39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놈의 정신머리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지...예요.
저도 영화는 너무 둥글렸지 싶었어요.

음~저는 중국에 목마라 있을 때,이 영화를 만났었네요~

웽스북스 2010-12-14 09:53   좋아요 0 | URL
아 ㅋ 저는 인간의 굴레랑도 같은 지점이니까 통하는 면이 있는 작품이구나, 라며 멋대로 해석해버렸는데, (그건 못봤거든요) 착각하셨던 거로군요 ㅎㅎㅎ 그럴 수도 있죠. ㅎㅎㅎ

새해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어요 우리 ㅋㅋ

sslmo 2010-12-14 17:30   좋아요 0 | URL
새해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는 것도 중요한데,
전 선입견이나 매너리즘 속에 절 가두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또 하나 누군가 충고해주면...
감사하게 쿨하게 받아들이기...새해 목표예요~^^

Arch 2010-12-14 10:00   좋아요 0 | URL
분명히 페인티드 베일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잘 기억 나지 않아 서지 검색으로 책 내용을 다시 보고 왔어요. 그래도 역시 기억이 안 나요. 보다가 말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서지 검색한김에 남들 페이퍼까지 다 읽고 와서야 다시 양철 나무꾼님 페이퍼로 와서 댓글 달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서지 검색은 좀 위험한 듯 ㅡ,.ㅜ;;

저는 저를 끌어올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에 빠져든적이 없어요. 맘을 읽는 것도, '느낌으로 아는 것'도 부족해요. 그게 좋지 않다는걸 아는데 바뀌지도 않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런 자기 인식이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아, 저는 왜 아침부터 이렇게 오지게 긴 댓글을 달고 있을까요.

sslmo 2010-12-14 17:33   좋아요 0 | URL
제가 Arch님의 오지게 긴 댓글을 사랑한다는 걸 안 선견지명을 가지고 계신거겠죠~

제가 페이퍼 중간에서도 밝혔지만, 전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아요.

날 돌아보면,
사랑을 하는 데,장점이나 단점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라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위는 없다.
그냥 마음이 겉잡을 수 없이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그리고 감사드려요.
다시 되돌아와, 이렇게 긴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2010-12-14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4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0-12-14 11:58   좋아요 0 | URL
저 인용구문 안의 구절...
누군가를 사랑하면 다 저리 되는것 같아요.

sslmo 2010-12-14 17:45   좋아요 0 | URL
아,잉크냄새 님~
저 요즘도 가끔 마실은 가는데...흔적을 남기진 못했어요.
제가 누군가는 이제 저렇게 사랑할 수 없는데,
님의 글들은 저런 마음을 담아 읽고 있지요~^^

그곳은 겨울도 덜 추운 건가요?
건강하세요~!!!

cyrus 2010-12-14 22:16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나온 서머싯 몸의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영화도 보면 참 좋은데,, 못 본 것도 아쉽기만 하네요. ^^;;

sslmo 2010-12-16 01:01   좋아요 0 | URL
왠지 cyrus님은 이 책 읽으셨을 것 같았는데...가지고 계시기만 하시군여.
나중에 한번 보세요.
찐한 사랑도 해보시고 책도 읽어보고 하세요.
영화도 참 좋은데...영화 보면 중국이 가고 싶어져요~^^

순오기 2010-12-14 23:45   좋아요 0 | URL
예전엔-알라딘놀이에 빠지기 전- EBS영화 꼭 챙겨봤는데...이젠 잊고 살아요.ㅜㅜ
버림받은 개의 이야기는 찜해둡니다.

sslmo 2010-12-16 01:03   좋아요 0 | URL
전 평일엔 텔레비젼 잘 안보고,주말에 가끔 봐요.
EBS공감,영화...좋아해요.
'버림받은 개'는 '칼데콧'그림이니 한번쯤 봐 줘도 괜찮아요~^^

2010-12-1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6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0-12-17 00:10   좋아요 0 | URL
영화도 책도 아직 못 봤지만, 써머싯 모옴이라면, 관심이 갑니다.
아직 어렸을 때, 그의 단편들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던 시절이 있었죠.

어쩜 양철나무꾼님은 이렇게 제가 솔깃할만한 책만 소개하시는지 몰라요!

여러모로 늘 고맙습니다!
책 빌려주신단 말씀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

sslmo 2010-12-17 01:58   좋아요 0 | URL
저랑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있으셔서 솔깃하신가 봐여~
(바꾸어 말하면,님이 올리시는 글들도 제겐 '심히' 지름신 이십니다,ㅋ~.)

책은 제가 가진 책을 읽은 후 드리겠다는 거였는데,
벌써 공수를 받으셨다니...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죠~

2010-12-17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0-12-23 18:14   좋아요 0 | URL
전 영화도 책도 모두 아이들 위주로 가고 있는지라...
이젠 아이들이 방학이니 저의 세상으 끝입니다.ㅜㅜ

sslmo 2011-01-11 06:03   좋아요 0 | URL
아~ 님의 댓글을 이제 봤네요~ㅠ.ㅠ
저도 방학하고 싶어요.^^
지금 아이들과 더불어 많이 즐기세요.
저희 아들보면 방학이어도 하나 좋을 것 없더라구요.
어찌보면 더 바쁜 듯~

2011-01-10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1 0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