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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상 위에 이 책을 올려놓았더니,
지나가던 직원이 보고는,
'이젠 라틴어까지 배우려는 것이냐'며 혀를 끌끌찬다.
그 직원이 보기에도 내가 여러 언어를 건드리기만 하는 꼴이 기가 찼었나 보다.
내가 펼쳐놓기만 하고 수습을 못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기는 하지만,
그 어렵다는 라틴어에 함부로 손을 댈 정도로 들이대지는 않는다.
'라틴어수업'이라는 제목을 빙자한, 한동일이라는 분의 삶의 흔적, 발자취 정도 되겠다.
사실 이 책이 처음부터 재밌지는 않았다.
아주 반듯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바른생활 교과서를 보는 느낌이었달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예전 강의 내용을 정리한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입말과 글말은 체감 온도가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책의 중반쯤을 읽다가 문득 저자의 양력이 떠올랐는데,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일뿐만 아니라, 신부님이셨던 것이다.
이 분이 사제복을 입지 않고 일반 복장을 하셔서 그런걸까.
깨달을 새가 없었는데,
문득 문득 성직자 같은 이미지가 엿보였었는데,
성직자였다.
책의 후반부쯤 일반 복장을 하는 이유가 나온다.
강의에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책에서는 라틴어 공부 자체보다는,
우리가 알고있는 단어나 숙어의 의미나 뉘앙스 같은 걸 알기 쉽게 풀어낸다.
라틴어가 갖는 언어적 특성 따위가 배어있는 인생론에 가깝다.
그런 라틴어의 특성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측면을 든다.
우리가 사용하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법률적 표현인데,
'하지 마라', '주의해라'와 같은 명령형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45쪽)
'라틴어의 고상함'을 얘기하면서는,
문학적, 언어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여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한데,
라틴어가 그런 언어라고 얘기한다.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여, 오해가 생기고 소통이 되지않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말은 곧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 책이 재밌지 않았던 이유는,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표현하는 부분과,
공부를 습관이라면서 꾸준히 공부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게 좀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한때 너무 공부만 했고,
그리하여 엉뚱(=엉덩이가 뚱뚱)하기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자신이 있는데,
하지만 다시 공부를 하라면 그건 또 완전 싫다, ㅋ~.
그러면서 '하비투스'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들려준다.
'습관'이라는 뜻 외에도 '수도사들이 입는 옷'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수도사들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기도를 하고 노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두 일괄적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여기서 '습관'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단다.
공부하는 습관에서 그치지 않고,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하는 걸 중요시하는데,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게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는게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모든 일을, 내지는 모든 공부를 자신이 다 할 수 있다고 하고 깔고 앉아 뭉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라틴어의 뜻을 설명해주는 것도 쏙쏙 들어왔는데,
'Sacer(사체르)'라는 단어에 '거룩한'이라는 뜻과 '저주받은'이라는 뜻도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단어라는 것이다.
가끔 만나게 되는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이 '저주받아라'라는 욕설을 담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몰랐던 그 말의 뉘앙스를 명쾌하게 알게 되어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꾸준히 산책을 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점.
공부도 꾸준히 하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산책을 한다는 데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만든달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마치 폭발 직전의 폭주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삶에는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필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상처가 오히려 그런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되어주었습니다. 멈춰 서서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으니까요. 그래도 때로는 '이 간이역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이 간이역을 지나고 또 지나면 제가 닿을 종착역도 어디쯤인가 있을 겁니다.(259쪽)
이러저러한 라틴어 격언을 맛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지금의 내 마음가짐과도 닮아서 좋다 싶었던 건 이 문장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272쪽)
malo가 인도 유럽어로 '나쁜'을 의미한다는데,
그럼 내가 좋아하는 재즈보컬리스트 '말로'도 그러한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