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서의 계절'하면 으레 '가을'이 따라 붙어야겠지만,
진정한 독서의 계절은 '여름'이 아닌가 싶다.
그냥 여름도 아니고 요즘처럼 한여름에는,
게다가 나처럼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엉.뚱.족'에게는,
어디 바깥으로 휴가를 간다는 것 자체가 곤욕인지라,
열어 놓은 베란다 창문으로 한줄기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을 벗삼아,
마루에 아무렇게나 배 깔고 누워 책을 읽는 것만한 일이 없다.
올여름에도 매번 시작만 하고 끝을 보지못했던 '혼불'이라는 대하소설을 시도하였다.
혼불 1권의 처음 시작은 하도 읽어서 외울 정도이고,
언젠가는 n*******님의 페이퍼 인용구를 보고 그 뒤를 외워 적어내려갈 정도였으니,
여러번 시도는 하였음이 분명하나 중간에 흐지부지가 되고 말았었다.
요번에도 1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몇번 집어던지거나 내팽개질뻔 하였다.
대하소설을 제법 읽었으니 내용이 길어서라거나 재미가 없어서는 아닌 것 같고,
나 또한 종갓집 맏며느리인지라 그 기세에 눌려서가 아닐까 싶다.
난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청암부인이나 효원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뭐, 그렇다고 책 속에 등장하는 다른 여인네들은 나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마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세월이나 처지를 한탄할 새도 없이 그냥 그렇게 말라죽었을 것 같다.
2,
그런데,
오늘 아침 뉴스에서 '박찬주 대장 부인의 공관병 갑질'이라는 기사를 보고는 깜.놀.하고 말았는데,
'혼불'에 나오는 웬만한 시집살이보다 더하더라.
옛날의 시집살이야 시대적 상활과 형편이 그러하니 그렇다치더라도,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행동을 하는걸까.
옛날 시집살이는 시키는 사람이 먼저 알아야 부릴 수 있다고,
모범을 보였었는데,
대장 부인의 그것은 '갑질'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병적인것 같다.
아들도 있다는데,
대장 부인의 사람을 부리는 방식을 봐서는.
며느리감이 왔다가도 다 도망 갈 것 같은데,
아들은 장가가기도 힘들테니 몽달귀신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음화화화~ㅅ!
3,
'혼불'을 사전에서 찾으면 이렇게 나와 있다.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종발만 하며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한다.
혼불이라고 했을땐 낯설었는데 도깨비불이라고 하니 익숙하다.
얼마전 봤던 텔레비전 드라마 '도깨비'의 푸르딩딩한 화면도 생각나는 것이, ㅋ~.
그날밤, 인월댁은 종가의 지붕 위로 훌렁 떠오르는 푸른 불덩어리를 보았다. 안채 쪽에서 솟아오른 그 불덩어리는 보름달만큼 크고 투명하였다. 그러나 달보다 더 투명하고 시리어 섬뜩하도록 푸른 빛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청암부인의 혼불이었다.(3권, 107쪽)
1권이 지나고 2,3권이 되어도 답답하거나 꿀꿀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제와 읽으니 1,2권때는 안 보이던 새로운 덕목들이 보인다.
만17년동안 쓰인 대작인데 완성을 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셨다는데,
그 안에 녹아나는 삶은 아프고 눈물겹지만 아름답다.
결혼과 죽음을 하나의 의식으로 표현해내는 게 그러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들과 사투리를 적재적소에 두루 사용하고,
거기에 운율을 살려 판소리의 가락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러하다.
3권 말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내외간의 정이란 것이 열 살 줄에는 몰라서 살고, 스물 줄에는 좋아서 살고 서른 줄에는 정신없이 살고, 마흔 줄에는 못 버려 살고, 쉬흔 줄에는 서로 가여워 살고, 예순 줄에는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해 산다."고 하더라.(3권, 295쪽)
이 구절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같이 늙어간다' 정도가 아닐까.
직접 경험하한게 아니고,
책을 읽고 간접경험을 통해서인데도 이렇게 사무치는걸 보면,
이 작품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
책을 읽는것만으로도 까닭 모를 분노를 느끼고,
화를 주체할 수 없어하는 걸 보면,
이 책은 여름에 읽기엔 다소 무리이려나?
어디 계절에 관한 문제일까, 마음을 다스리기 나름이겠지~--;
'혼불' 다음엔 무엇이 좋을까.
이제 3권을 읽었을 뿐인데, 다음편이 기대되는게 아니라,
다음엔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