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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존 윌리엄스 지음, 조영학 옮김 / 구픽 / 2016년 8월
평점 :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을 깜냥이 안 되나 보다.
고등학교때 이과였던 나는 국사와 세계사에 한참 약해서,
이런 역사 소설의 경우, 궁여지책으로 그 시대의 역사책을 먼저 훑어본다.
이 책 '아우구스투스'도 읽기전에 그 무렵 로마의 역사를 공부를 하는 걸로 워밍업을 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들을 보면 작가 생전보다는 사후에 회자되고 인기를 얻기도 하는 걸로 미루어,
이 책도 그렇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아무런 상 따위는 수상하지도 않은 '스토너'가 나름 괜찮았었기에,
찬사가 쏟아지고 1973년에 전미도서상도 수상한 이 책은 더 나으려니 했었다.
이 책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내 견해를 밝혀보자면, 속빈 강정이고 빈수레가 요란한 꼴이다.
우리나라에 이제서야 소개된건 다 이유가 있지 싶다.
미국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에는 반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미국에서 받은 상은 뭐냐고, 어떻게 받게 되었냐고 할 수도 있겠다.
1973년 무렵, 미국의 정세나 상황에 이 책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을까 소심하게 추측해 본다.
번역도 그리 깔끔하지 않다.
조영학 님의 다른 번역 작품들을 좀 읽었었던 터라,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도 모르겠다.
오타 작렬에다, 문장에서 시제가 일치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편지를 쓰며 회상하는건데, 현재시제여도 이상할텐데 미래시제로 번역된다.
또 '물주구문'이라는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이지 싶은데,
사람을 주어로 바꾸었을때 시킴과 당함을 혼동하고 있다.
고백하건데==>고백하건대(20쪽)
이 정도는 '숨은그림찾기' 급의 퀴즈이고,
21쪽의 이 부분을 읽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한 나는,
아마존까지 꾸역꾸역 들어가서 원서를 미리보기로 비교하였다.
그저 성격좋은 애송이 정도였지. 얼굴은 너무 섬세해 혹독한 운명을 이겨낼 것 같지도 않고 성격은 내성적이라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고, 목소리도 감미로워 지도자의 거친 언어를 담아낼 것 같지 않았네. 그저 한가로운 학자나 문인이라면 또 모르지. 가문과 부가 있으니 자격이야 충분하지만 솔직히 저렇게 빈약해서는 원로도 어려울 듯싶어.(24쪽)
위 박스 안은 서기전13년, 마에케나스가 리비우스에게 보낸 서한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쓴 편지 글인데,
편지를 쓸 당시에는 이미 황제가 되어있는 옥타비우스를 얘기하면서 현재시제를 사용하니 완전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원로도 어려울 듯 싶었어'정도가 어떨까 싶다.
친구들이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날은 물론 그 후로도 한동안 다들 나를 바보같다고 생각할 거네. (23쪽)
이 부분도 '생각했을 거네'정도로 바꿔 주는게 낫지 않을까?
25쪽의 카이사르가 옥타비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아무리 편지 글이 그런 형식을 띤다고 해도 '친애하는 옥타비우스'는 좀 웃기는 번역이다.
초반부에 집중되던 이런 오류들은 중반부로 넘어가면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몰입에 실패해서 맥이 빠져버리니 재미가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의 전미 문학상 수상은 어찌보면,
황제라는 미명하에 독재를 정당화하고, 그리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던 로마 시대의 그것을,
1973년 당시 강대국인 미국이 재현해 내려했던 욕구와,
그 당시 강대국을 열망하고 선민 의식을 키우려던 미국 국민들의 그것에 부응하려는 기대심리가 맞물려 이뤄낸 성과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신과 일기, 회고록 등 여러 형식의 글들이 엮여 한 편의 소설이 되는데,
서신도 어느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게 아니고,
일기, 회고록 또한 어느 한사람의 것이 아닌데,
이런 것들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존 윌리엄스의 창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한사람이 쓴 것 같다.
그 시대에는 모든 글을 연설체로 씌여서 문체에서 자신만의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인지,
존 윌리엄스가 그렇게 써서 그런 것인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그 섬세함을 잡아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쉬웠다.
암튼 이러저러한 편견을 버리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보니,
옥타비우스 보다는 '브루투스'가 오히려 멋지다.
브루투스라 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음의 순간에 '브루투스 너마저도'했던 그 브루투스이다.
그동안 난 브루투스를 반역을 꿈꾼 포악한 정치가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도덕적'이라는 관점에 있어서는 사람들에 따라 입장이 다를테니 차치하고,
행동가이기 전에 학구적이었던 것 같다.
변론가로서도 명성이 높았고 정치적·철학적인 작품의 저자로도 유명했다는데,
따로 그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고 서신만 몇 편 존재한다니 아쉽다.
이 소설 속에서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낸 서신을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지금의 지위가 얼마나 위중한지 자네가 제대로 이해할 것 같지는 않구먼. 내게 애정이 남아 있지도 않겠지. 나 또한 바보가 아니니 자네를 걱정하는 척 위선을 부릴 생각은 없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도 자네가 아니라 이 나라를 걱정해서일세. 안토니우스는 미친놈이니 편지를 받을 수 없고 레피두스는 멍청이라 편지를 이해조차 못할 터이니. 자네는 미치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니,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리라 믿네.(116쪽)
암튼, 원로회 의사록과 개개인의 일기를 보니,
미신과 점성술, 예언가나 주술가 따위가 그 시대, 그 국가에도 성행했었나 본데,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독재의 시대'에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들이 기승을 부리나 보다.
나처럼 긍정적이 못해 맨날 투덜거리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감정이입을 하다가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세력을 튼튼히 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장시킨 카리스마 짱 넘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명의 철학자 내지는 선각자를 만나는 기분인데,
이건 왠지 스토너 교수를 닮은 듯도 하고, 존 윌리엄스 작자 본인을 닮은 듯도 싶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의미가 없어질수록 세월을 버텨낸 힘에 대해서까지 점점 회의가 든다네. 인간이야 운명을 향해 발버둥친다지만 신들은 분명 그런 미천한 존재들한테 관심조차 없다네. 신탁도 모호하기 짝이 없기에 결국 그 예언도 직접 뜻을 헤아려야 하지. 사제 노릇을 할때도 난 짐승 수백 두를 잡아 내장과 간을 실험했고, 그 결과 설령 신들이 실존한다 해도 인간사에 개의치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네. 그래서 내가 사람들한테 로마의 고대 신을 따르라 부추겼다면 그건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필요 때문이었네.(382~383쪽)
위 문단을 곱씹어보게 되면 알 수 있듯이,
아우구스투스 이기 전에 옥타비우스였던 그는 정치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고,
"우리는 승리가 아니라 삶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26쪽)의 그것처럼 살기 위한 여정이었을 수도 있다.
ㆍㆍㆍㆍㆍㆍ어차피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네. 아무리 초라하다 해도 본질을 넘어선 그 누구도 되지 못해. 나는 지금 말라빠진 정강이, 쭈글거리는 손, 세월에 얼룩지고 처진 살갗을 보고 있네. 한때 이 육신이 그 자체에서 벗어나 타인의 육신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니 우습기까지 하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혹자는 쾌락의 찰나에 온 생을 걸고는, 육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외로워하지.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육신이 아닌 것이 오로지 쾌락뿐이건만, 그 쾌락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야. 오히려 우리 믿음과는 달리, 성애란 그 무엇보다도 이타적이라네. 타인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를 탈피하려 하기 때문일세. 그 때문에 대부분 가장 저급하다고 여기네만 성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네. 성애가 더욱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하지만 일단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아에 갇히지도, 자아 속으로 쫒겨나지도 않는다네.ㆍㆍㆍㆍㆍㆍ동성애는 내가 볼 때 육체적 쾌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네. 동성의 몸을 애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애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야.오컨대 자아의 탈출이 아니라 자아로의 구속이라는 뜻이라네. 친구를 사랑할 경우 자신을 타자화할 수 없어. 온전히 자신으로 남아, 될 수도 없고, 되어본 적도 없는 자아의 신비를 관조해야 하지. 아이를 향한 사랑은 이 신비에서도 가장 순수한 형식이라네. 아이의 내면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잠재력이 많은데다, 가장 극단에 있는 자아가 관찰자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라네.(384~385쪽)
존 윌리엄스의 전작 '스토너'도 그렇고 요번 '아우구스투스'를 읽고 느낀 점은,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스토너가 학문을 광적으로 사랑하거나,
아우구스투스에게 전쟁을 불사하는 독재자나 폭군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가 아니라,
나름 자기자신에게 집중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낼지 모르겠지만,
난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를 내 자신에게서 찾아야할 듯 싶다.
이 책을 읽을 깜냥이 아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단 가랭이가 찟어진다는 말은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툴툴거린다.
뱁새도 황새도 조류여서 날개로 날아가면 되는데, 굳이 종종 거리면서 걸어가다가 가랭이가 찟어질 일도 아니다.
때문에 '부루투스, 너마저도'했던 부루투스를 멋지다고 설레발을 칠 수도 있는 것이고,
거기서 '브로콜리 너마저도'를 유추해 낼 수도 있는 것이리라.